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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 저번에 알래스카 주류 창고에서 다량으로 입수한 물건들, 슬슬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


시작은 레오나의 담담하고도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요전에 다량으로 입수한 술들은 급양계에 조리용으로 3할 정도를 배정해주고도 안주인 콘스탄챠의 서슬 퍼런 감시 때문에 처치곤란이었고, 가끔씩 워울프나 키르케가 재주 좋게 빼돌리는 것까지 계산에 넣어도 족히 3년은 두고 소비할 양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저번에 입수한 물건들 중에는 산패가 우려되는 것도 꽤 많았다. 소완이 가져간 물건들이야 그녀의 철저한 관리 하에 특수한 냉동 셀러에서 섬세하게 보관되고 있었으므로 큰 걱정은 없었으나, 남은 재고들은 그럴 수 없었다. 


"아, 맞다. 그게 있었지."

"그래, 뭐... 사령관도 요즘 다사다난했으니 생각 못 했을 법 하지."


사령관은 레오나가 보급 문제에, 그것도 특히 주류의 처리 문제에 갑자기 신경을 쓰게 된 계기가 슬몃 궁금해졌으나, 타당한 지적이었으므로 더 따져 묻지 않았다. 원래부터 이런 놓치고 넘어가기 쉬운 곁가지들은 항상 레오나가 쳐내고 다듬어 주었기에 더더욱 의심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되어서, 지휘관급 개체들과의 회의 하에 다가오는 신년 행사에 남은 악성 재고들을 선별해서 모두 처리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콘스탄챠와의 담판은 온전히 사령관의 몫이었다.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는 신조 하에 저질러 놓고 본 사령관은, 간만에 화가 잔뜩 난 콘스탄챠를 주말을 모두 써서 간신히 달래줄 수 있었다.


"사령관, 도장은 항상 잘 보고 찍어야지?"

"이미 찍은 다음에 그런 말 하는 거냐..."


사령관은 신년 행사 일정에 맞추어 금주령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문서에 도장을 찍고 나서야, 별첨된 문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최고 지휘관과 휘하 부대장 및 부대원들 간의 친목 도모를 위한 소모임 허가서였다. 시치미를 떼며 문서를 거둬가는 레오나의 입가에는, 오래 본 사람이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신년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



"아, 사령관님! 그 상자는 거기에 놔주세요!"


부산스러운 님프의 재촉에 사령관은 꽤 묵직한 궤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치리링! 하며 궤짝 안의 병들이 서로 몸을 비비는 소리가 울렸다. 사령관은 점점 쌓여가는 상자들의 양을 보고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금주령을 풀어주면서 자유분방한 호드나 수가 많은 스틸라인 쪽의 단속만 신경썼지, 발할라 쪽은 안중에도 없었다. 사령관은 레오나의 성동격서에 완벽히 걸려들고 만 것이다.


본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는 극지에서의 전투를 상정하고 설계된 부대이다. 수시로 빙점 이하로 내려가는 가혹한 환경에서 적응하기 위해, 그녀들은 체질적으로 피하 지방이 많고 살이 찌기 쉽게 설계되었다. 그것을 그녀들이 선호하는 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다른 부대들보다 더 잘 견디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가혹한 보급이었다. 그녀들은 수시로 보급이 끊기는 극지에서의 전투를 보다 잘 수행하기 위해 열악한 식량을 섭취하더라도 전투력의 소모가 적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들은 간의 해독능력이 월등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말하자면...


그녀들은 누구도 빠짐없이 술이 셌다.


술자리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사령관은 벌써부터 정신이 혼미해졌다. 분명 술을 마시는 인원은 열이 넘지 않는데, 쌓아놓은 궤짝은 열을 훨씬 넘고 있었다. 가끔씩 지휘관들끼리 정기적으로 저녁 모임을 갖더라도 와인이나 몇 모금씩 홀짝거리던 레오나가 말술이었다니. 끝을 모를 그 내숭에 사령관의 마음 속에 있었던 무언가가 금이 갔다.


"자~ 알비스랑 안드바리는 아직 어리니까 음료수로 참자~"


그 와중에도 베라는 언니답게 술자리에서 소외될 게 뻔한 어린 동생들을 빠뜨리지 않고 챙겨주었다. 그래, 그래도 아직 세상에는 아름다움이 남아 있었지. 벌써부터 많이 소모된 정신력을 다시 치유하기 위해 사령관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베라와 아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안드바리와 알비스의 손에 하나씩 쥐어져있는 병맥주를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난, 아무 것도 못 봤어. 사령관은 필사적으로 속으로 되뇌었다.


"자! 이걸로 대충 준비 됐네요!"


마지막 상자를 내려놓으며 그렘린은 당차게 외쳤다. 너... 평소에 유미랑 맥주 한 캔씩만 할땐 어떻게 참았냐? 사령관은 그런 의미가 담긴 진한 시선을 보내다가, 휑한 테이블을 보고 당황했다.


"어? 잔이 없잖아. 내가 잔 가져올까?"


그리고, 모두의 의아한 시선이 집중되었다.


'뭐... 뭐지?'


점점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는 찰나, 그렘린이 내려놓은 상자에서 병을 하나 뽑아들었다. 병몸을 쥐고 손목을 써서 한번 휘돌린 그렘린은, 그대로 탁자 모서리에 주둥이를 내리쳤다.


뻥!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마개가 날아가며 수증기가 흘렀다. 그렘린은 티 한점 없는 밝은 얼굴로 병을 사령관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런거 쓰면 괜히 설거지거리만 늘잖아요!"

"..."


사령관은 한 박자 늦게 떨어져 톡, 토그르르... 소리를 내며 땅을 뒹구는 코르크 마개를 보면서 속으로 경악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마주 웃어주며 병을 받아들었다.


누구도 그 묘기를 보고도 박수를 치거나 환호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도 하나씩 병을 뽑아들고 뽁! 뻥! 소리를 내며 당연하게 모가지를 따는 것이었다. 의자 모서리에 대고 병을 따는 샌드걸, 엄지손가락으로 밀어서 따는 베라, 손날로 후려쳐서 뚜껑을 날리는 님프, 서로 주둥이를 맞부딪혀서 따는 레오나와 발키리... 뭐?


"대장님, 건배사 부탁드립니다."

"사령관이 있는데... 내가 하는게 순서가 아니잖아, 발키리?"

"아... 아냐. 그냥 레오나가 해."


사령관은 이미 질릴 대로 질려있었다. 그런 사령관을 슥 보고 레오나는,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자, 그럼... 흠, 흠."


레오나가 치켜든 병과 함께, 다른 모든 대원들의 병이 하늘을 향했다. 사령관도 바르르 떨리는 팔을 가다듬으며 함께했다.


"절하지 말고! 키는 대로! 쁘게 먹자!"

"""""거시기!!!"""""

"거, 거... ㅅ..."


우렁차게 울려퍼진 건배사와 함께, 꿀꺽 꿀꺽 하는 목넘김소리와 꼴꼴꼴하며 병이 비워지는 소리만이 적막한 공간을 채웠다. 자신은 이미 거시기가 됐음을 직감한 사령관은 충격에 젖어있느라 살짝 스타트가 늦고 말았다.


'씨발 진짜 좆됐네 나 어떡하냐?'


뒤늦게 사령관도 병을 기울이며 노빠꾸 레이스를 따라갔으나, 배 안에서 올라오는 불길과 콧속을 가득 채우는 강렬한 향에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4분의 3 정도를 용케 비운 것은 여전히 실낱같이 남아 있는 남자의 자존심이었으리라. 점점 차오르는 열을 버티지 못하고 사령관은 불던 병나발을 입에서 떼고 숨을 몰아쉬었다. 내쉬는 숨을 따라 화끈한 공기가 소용돌이쳤다.


"허억, 허억..."

"어? 사령관님, 남기셨네요?"

"아, 아, 이건..."


이미 다음 병을 따고 있던 님프가 밑둥에 남은 사령관의 술을 보고 말했다.


"후후, 내 부하였다면 호되게 혼냈겠지만, 사령관이니까 넘어가주는거야."

"각하, 괜찮으십니까? 물이라도 챙겨드려야..."

"아, 아하하... 저희들 페이스에 굳이 맞추려고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도 첫 병은 같이 비워주실 줄 알았는데!"


모두의 걱정과 애정이 뒤섞인 질타가 쏟아졌다. 사령관은 술기운과 부끄러움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곁눈질로 대장과 사령관을 힐끗 살피던 발키리는, 넌지시 화두를 던졌다.


"대장님이 흑장미... 해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모든 대원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느꼈다. 여기선 분위기상 레오나가 흑장미를 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맞아보였지만, 그래도 사령관은 끊어지기 직전인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여전히 지키고 싶었다. 첫 병부터 한번 접었는데, 흑장미까지 시키면 그땐 정말 끝장이었다.


하지만, 사령관의 손에서 낚아채듯 병을 받아든 레오나에 의해 그런 것도 이미 산산조각났다.


레오나는 단숨에 남은 술들을 삼키고, 그대로 머리 위에서 병을 뒤집었다. 진홍색 방울이 암사자의 원래는 없을 갈기를 물들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와아!"""""


짝짝짝짝짝!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에 대원들은 박수를 치며 레오나의 남자(?)다움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한 마디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러브샷! 러브샷!"""""


레오나는 살짝 주저하는 듯하며 대원들의 결례에 용서를 구하는 것처럼, 살짝 죄스러움을 담은 눈길로 사령관을 쳐다보았다. 사령관은 알면서도 그녀의 앙큼하고도 교활한 수완에 넘어가줄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은 한 모금만 마셔."


다음 병을 살짝 흔들며 도발하듯 말한 레오나였다. 하지만, 술기운까지 오르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령관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주저 없이 껴안아오는 레오나에게 사령관은 순간 당황했으나, 귀 옆에서 레오나가 술병을 입술에 갖다대는 소리를 듣고 자신도 레오나의 등 뒤로 휘감은 팔에 들린 병을 비우기 시작했다. 교차한 두 술병이 어깨 너머로 점점 기울어지고, 이내 깔끔하게 내용물이 사라졌다.


"""""오오오오오~~"""""


사령관은 저절로 이빨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크으으으~" 소리를 가리기 위해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레오나는 여전히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다음 병에 손을 뻗었다.


홧김에 병을 비운 사령관이었으나, 곧 객기를 부린 댓가가 찾아왔다. 핑핑 돌며 조여드는 시야를 얼굴을 찌푸려 다잡으며 사령관은 뒤늦게나마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하려 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자매단 모두가 알듯이, 자신은 이미 그물에 걸린 고기였다.


다음 날, 어린 아이들을 제외한 발할라 모두와 사령관이 근무변경을 요청한 것은 뻔한 일이었다. 사령관의 사유는 숙취였고, 자매단들의 사유는 요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