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녀는 애써 바른 립스틱이 다 번질 정도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를 쏘아보던 그녀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나는 몹시 귀찮고도 불편한 시선으로 눈물을 흘리는 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결국 지금까지 나를 이용한거요? 소관을 사랑한 적이 있는지도 의문스럽소."


"후우, 사랑해, 사랑한다고 몇번이나 말했잖아?"


“그렇다면 어째서 전투 이외에 소관을 찾지 않는 것이오?”


“널 사랑하는건 맞아, 하지만 단지 너의 몸이 아닌 성능을 사랑하는 것일 뿐이야.”


나는 읽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새빨간 거짓말, 말도 안되는 변명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찌..사랑한다고 했으면서..그런 말을 할 수 가 있소..?”


그녀의 마른 뺨에 길고 투명한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뜨겁게 달아오르다 거짓말처럼 식어가는 담뱃불을 멍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사랑에 진지하지 못한 남자라 미안하네.”


무심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사랑의 끝은 항상 둘로 나뉜다.

아름답거나 잔인한데 이건 후자였다. 

결코 마음에 들지 않는 결말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던히도 노력해 보았지만, 나는 결국 용을 사랑할 수 없었다.


“...난 회의가 있어서 이만, 할 말 끝났으면 가보도록 하겠어.”


난 망연히 서 있는 용을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2



회의가 끝나고 사령관실에 돌아왔을 때, 용은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앉아 나를 기다리던 용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있는 붉은 소파만이 눈에 들어왔다.


“....”


나는 문득 그 소파로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빈 자리에 허전함을 느낀 탓이리라.

그러자 달콤한 향수냄새가 훅 풍겨 왔다.

그건 언젠가 내가 추억속의 ‘그녀’를 떠올리며 용에게 선물해 주었던 향수였고, 

또한 용이 나를 만나러 올때 항상 뿌리던 향수이기도 했다.


용과 꼭 닮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난 눈매를 조금 찡그렸다.

또 다시 내 마음속의 ‘그녀’가 현재로 고개를 내밀어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닥터의 수술로 몸이 바뀐뒤, 나는 조금씩 과거의 기억을 찾게 되었다.

돌아온 기억은 오래된 꿈처럼 흐리고 희미해서, 처음의 나는 그것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기억 또한 그에 따라 또렷해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흑백영화 같은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것은 내가 사랑했던 ‘그녀’의 모습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떠올리면 손에 잡히는 것은 뿌옇게 낀 안개같은 그리움이 전부였다. 


“보고 싶어…”


나는 용이 늘 앉아있었을 자리에 걸터앉아 또 다시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목소리도, 모습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녀와 함께한 추억과 푸른 눈동자 만은 눈이 시리도록 선명했다.









3



꿈 속에서 나는 커다란 자동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창 밖에는 도시의 풍경이 하염없이 지나가고 있었고, 옆자리에는 마치 정해진 것처럼 용과 꼭 닮은 기억속의 그녀가 앉아 있었다.  


“OOO? 안색이 안좋아 보이는데, 괜찮은거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그녀답지 않은 불안한 목소리다.


“응..괜찮아..괜찮을거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겨우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다리의 떨림은 감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듯, 우리가 지금 찾아가는 곳은 ‘호랑이 굴’ 이라는 별명을 가진 거대한 삼안 사업의 연구소였으니까, 누구를 호랑이에 빗댔는지는 말해봐야 입만 아플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곧 차가 멈추고, 지나치게 점잖은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도착했다는 실감이 나며 입이 마르기 시작했다. 

차 문을 열고 나서자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건물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꺄아아악!!”


열린 문 뒤의 어둠에서 뻗어나온 손이 그녀를 낚아챈 것은 순간이었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전개에 머뭇거리는 사이 그녀는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끌려가 버렸고, 

나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무력감에 질려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 볼수밖에 없었다.


“...!!”


뒤늦게 사라져버린 그녀의 이름을 외치려던 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신음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녀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





다음날, 악몽 속을 헤매던 나를 깨운것은 콘스탄챠의 목소리였다.


“주인님? 일어나세요. 업무 보실 시간이에요.”


소완이 준비했을 아침식사의 달콤한 향기, 노크소리 ,햇빛에 잘 말린 포근한 이불 냄새에 부스스 일어나며 눈을 비볐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인지 몸이 무겁다. 조금 더 자볼까? 

하고 생각하다가 이른 아침부터 지휘관 회의가 있던 것이 생각나 길게 하품을 하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아암...으응, 고마워, 콘스탄챠.”


본래 아침에 나를 깨우는 것을 도맡아하는 것은 부관인 용이지만, 

어제 그렇게 모진 말을 하고 그걸 바라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짓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콘스탄챠가 가지고 온 토스트를 한입 베어물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하루를 시작할 힘이 생긴다.


“콘스탄챠, 오늘 업무는?”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한번 더 듣는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대답은 내 예상과 달랐다.


“지휘관 회의가 취소되어..오늘은 특별한 업무가 없네요,주인님.”


“뭐라고?”


지금 잘못 들은 건가?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옅게 인상을 찌푸리며 콘스탄챠를 바라보자 역시 당황해 하는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어머, 용님이 말씀해주지 않으셨나요?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셔서.”


상심했던 용의 얼굴이 생각나며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기억속의 그녀의 대용품이였다지만,

잠시나마 사랑했던 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편할리가 없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그녀의 방을 향해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5




지휘관의 방이라 해도 크게 다를 것 없이 용의 방 역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다른 것이라면 방 한켠에 수많은 병법서들이 벽에 붙은 책장에 사열되어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그 방 한가운데에 붉은 꽃을 든 용이 마치 한 폭의 유화처럼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했다. 여전히 함대를 이끄는 대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여리한 몸에 푸른 머리를 허리까지 내리고 있었고,

그것은 기억속의 그녀의 모습과 또 정말 닮아 있었다.

용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지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왔소?"


“..몸이 좋지 않다고 해서 찾아왔어.”


그 말에 용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녀는 이제 처음처럼 나를 보며 웃어주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으며 더 이상 나를 서방님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단지 고개를 돌려 빛을 잃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볼 뿐이였다.

그 눈빛에 담긴 서글픔을 느낀 내 가슴이 콕콕 찔려오기 시작했다.


“...괜한 걱정이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는 꽃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전보다 쳐진 어깨와 헝클어진 머리가 그녀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하지만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을 알아버린 이상,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 없듯 이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언제까지 어긋난 사랑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거리다가 가지고 온 약을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 둘 뿐이었다.


“여기 두고 갈 테니까 먹도록 해, 그리고...미안해.”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장시간의 침묵에 질린 나는 침울한 얼굴로 방 밖으로 나섰고 그때까지도 용은 손에 들린 빨간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꽃의 이름이 능소화이고 꽃말은 그리움이며 그것이 기억속의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꽃이였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는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원에 가득 핀 꽃과 다프네가 들려준 이야기로 기억이 온전히 돌아온 내가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미 용이 떠나 버린 한참 뒤의 일이었다.





6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오르카호의 정원, 

푸른 머리의 여성과 밀짚모자를 쓴 여성이 마주앉아 정원을 돌보고 있었다. 

꽃들을 바라보던 푸른 머리의 여성, 용은 미심쩍은 목소리로 다프네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렇게 하면 정말 서방님이 좋아할 것이라는 게 맞소?”


“후후, 사령관님은 저희들만큼이나 꽃을 좋아 하신답니다. ”


“..그대의 말만 믿겠소.”


용은 그렇게 말하고 쭈그려 앉아 호미질을 계속했다. 

세이렌이 보기라도 한다면 ‘체통없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고 경악했을 정도로 궁상맞은 모습이였지만,

꽃을 받고 기뻐할 사령관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 정도는 감수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 꽃, 보면 볼수록 정말 아름답구려…”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팔처럼 활짝 벌어진 꽃잎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담쟁이 덩쿨처럼 돌벽을 휘감고 자라난 줄기 마디마디 피어난 꽃들은 새하얀 도화지에 떨어진 붉은 물감처럼 선명했다.


“어머, 다른 꽃들도 많았는데, 그 꽃을 고른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다프네는 그렇게 물으며 용을 도와 자갈을 골라냈다. 


“후후, 이 꽃을 보면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든다오.”


과거, 삼안에 끌려가기 이전의 기억은 온전하지 않았으나,

이 꽃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지며 무언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용은 다른 꽃들에 비하면 다소 초라하더라도, 이 꽃으로 정원을 가득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그 말을 들으니 저도 기뻐요.”


“고맙소, 게다가 꽃말도 마음에 든다오.”


용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프네가 말해주었던 꽃의 꽃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명예와 영광, 그야말로 사령관의 첫 반지를 얻어낸 자신에게 걸맞는 의미를 가진 꽃이지 않은가.


다프네가 들려주었던 꽃에 얽힌 또 다른 전설 -임금의 눈에 띄어 꿈같이 달콤한 하룻밤을 보내고, 그 뒤로 완전히 잊혀져 세상을 떠나, 능소화로 피어났다는 궁녀의 서글픈 이야기- 

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하지만 용은 그가 보여줬던 사랑을 믿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꽃이라면 그의 마음도 돌아설 것이라고 생각하며 굳은 땅을 호미로 두드렸다.







7




나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말라버린 정원 위를 천천히 걸었다.

갈색으로 시든 덩굴이 여기저기 뻗어 돌벽을 불길하게 휘감고 있었고,

자갈 하나 없이 깨끗했던 정원의 바닥은 떨어진 꽃들로 인해 너저분하게 변해 있었다.

나는 그 정원 한가운데에 멈추어 서서 너무도 그리웠던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용…”


어째서 소중한 것들은 곁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기억속의 그녀와 용이 같은 이 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의 몸과 마음은 이미 너무도 멀리 떠난 뒤였다.


나는 쓴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그러자 무언가 작고 딱딱한 것이 손에 걸렸다. 반지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잡아 손바닥에 올렸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수줍게 건냈던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


‘사랑해, 용.영원히 너만을 사랑할게.’


“후후, 저도요, 서방님, 정말 사랑해요.”


자꾸만 등 뒤에서 그녀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오르카 호를 떠나던 그녀의 쓸쓸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다 실수로 반지를 놓쳤고 몸을 숙여 떨어진 반지를 다시 집어 들다가 바닥에 뚝뚝 눈물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용도 이런 끝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겠지, 누군들 사랑 없는 서약을 좋아 할까?

그녀도 그것은 서글펐을 것이다. 

평생 누군가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모조품으로 살아가는 그런 처량한 인생은 싫었을 것이다.


나는 차마 눈물을 멈출 수 없어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떨어진 꽃들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너무도 차가운 바람이 잿빛으로 변해버린 정원에 불어오고 있었다.










쓴 이유

입니다.

두개를 섞다보니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이야기가 됨..

이번에도 어쩐지 슬픈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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