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공 작가님 그림과 공식 만화를 보고 쓴 글입니다. 

개인적인 해석과 원작 설정과 다른 부분이 들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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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년 중 단 하루, 유달리 창백한 보름달이 뜬 밤이면 에이미는 항상 악몽을 꾸고는 했다.


"헉...헉..."


그녀는 차가워진 손으로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습관적으로 옆자리를 돌아보자 그곳엔 잠든 사령관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했다. 가슴이 빠르게 뛰고 입이 바짝 말라붙는다.


"..."


다시 눈을 감아보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멍한 눈동자로 검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또 그의 꿈을 꾸었나보다.


"으응...에이미? 괜찮아?"


뒤를 돌아보자 인기척에 잠에서 깬 사령관이 반쯤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본 에이미는 눈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머,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기."


자기 같은 못된 여자에게 동정은 사치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능숙하게 눈물을 삼키고 뱀처럼 그의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2


오르카 호에 사는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나름대로 유급휴가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임무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을 때일 것이다.


‘어머...벌써 이렇게...”


예정보다 6시간은 빠르게 탐색을 마친 에이미가 자원으로 가득 찬 가방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잠시 쉬었다가 가도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 위에 걸터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멸망전에 백화점이었을 것이 분명한 건물은 반쯤 허물어져 그 속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틈 사이로 보이는 낡은 쇼윈도 안에는 녹슨 귀금속이나 찢어진 천조각 같은 것이 흩어져 있었다.

바이오로이드라고 해도 결국은 여자와 크게 다를 바 없었기에 반지나 귀걸이 같은 장신구들에게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어머나?”


먼지덩어리 사이에서 비교적 멀쩡해보이는 목걸이를 발견한 에이미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은으로 만들어진 체인의 끝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리자 파란 새 모양의 보석이 딸려 올라온다.

흙먼지를 닦아 내자 반짝거리는 것이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그녀는 무심코 그것을 집어 목에 걸었다. 차가운 금속이 목에 닿아 어색했다. 

낯선 감촉에 몇번이고 맨살에 닿은 그것을 손으로 문질렀다.


어쩐지 그가 생각나는 목걸이였다. 

또 그를 떠올리자 느껴지는 쓸쓸함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에이미는 고개를 흔들어 떠오르는 상념을 털어버리고 오르카 호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3



해가 떨어지자 오르카 호에도 어둠이 찾아왔다. 

옅은 전등불 하나만이 켜져, 아직 어두운 방의 한가운데에는 쓸쓸한 눈빛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에이미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한 보랏빛 눈동자를 지그시 감으며 와인을 머금었다.


비밀요원으로 만들어진 그녀는 오랜시간 활동하며 많은 생명을 앗아왔다.

그녀가 죽였던 대부분의 인간들은 정말로 알기 쉬운 ‘나쁜 놈’들 이 대부분 이였고,

세삼 이제 와서 슬퍼할 것도, 후회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중 단 한 사람만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피터..”


에이미는 흐릿한 시선으로 술잔을 바라보며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특별할 것 이름이였지만, 

이상하게도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 한 구석이 쓰라려 온다.


"나처럼 나쁜 여자는 떳떳해도 괜찮아요."


술잔을 모두 비운 그녀는 감상을 털어버리려는 듯, 

나른한 눈매로 돌아와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LRL이 들어왔다.


“에이미! 이걸 보아라! 오늘은 참치캔을 10개나 얻어왔다!!”


"어머, 오늘은 공주님께서 조금 일찍 돌아오셨네요."


그녀는 황급히 와인병을 밀어 숨기고 무릎을 낮춰 LRL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하지만 알코올 냄새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LRL이 눈썹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으우..에이미! 또 술을 마신 것이냐!”


“어머나, 미안해요. 조금 쓸쓸해져서..”


그녀는 애써 웃는 낯으로 그렇게 말했다. 

에이미는 정말 진심을 보기 힘든 여자였고, 그래서 그것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였다.

하지만 술기운 탓인지, 오늘이 피터의 기일이여서 그런지 몰라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LRL에게 그 속을 보이고 만 것이였다.


“이 진조가 있는데 뭐가 쓸쓸하다는 것이냐!"


LRL은 그렇게 말하며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 천진한 모습에 에이미는 자기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장난기 어린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가 말했다.


“공주님을 두고 외롭다니, 제가 실언을 했네요.”


LRL이 에이미와 같이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저러고 있을 때면 표정은 웃고 있어도 꽤 심란한 상태라는 신호였다. 

그래서 LRL은 분위기를 바꿀 심산으로 까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에이미는 늘 같은 술을 마시는구나! 분명 참치캔보다 맛있어서 그런 거겠지?”


술에 문외한인 LRL이더라도 에이미가 즐겨 마시는 와인병에 그려진 그림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에이미는 LRL이 볼수 없도록 술병을 더욱 깊이 밀어 숨기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맛보다는..무언가를 잊으려고 먹는 거겠죠.”


“음, 필멸자들이나 가질 수 있는 망각을 누리겠다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이상하게도 긍정의 억양은 평소보다 흐릿했다. 

에이미는 아직도 술병 옆에서 갸웃거리는 LRL을 부드럽게 안아들고 침대로 향했다.

이렇게 속내를 술술 털어놓다니, 뭔가에 홀린 듯 기묘한 느낌이다.


“그런데 아저씨는 외로울 때는 잊는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게 더 좋다고 말했노라.”


“아저씨라고요?”


이 세상에 사령관 말고 남아있는 인간이 있었나? 

의아해하는 에이미의 얼굴을 본 LRL이 덧붙여 말했다.


“나와 같이 등대에 있던 인간이 해줬던 말이다!”


LRL을 침대에 눕히던 에이미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면 저 하늘의 별이 되어서 나를 내려다 보고있을 것이라고 했다.”


순간 에이미는 처음 LRL을 구출했을 때 보았던 등대의 모습을 기억했다.

LRL의 서툰 글씨와 알 수 없는 남자의 글씨로 쓰여진 낡은 일기장, 

빛바랜 액자에 담겨있던 누군가의 가족 사진, 방안에 놓인 식기와 가구는 오래되었지만 분명 두 사람의 것이었다.


순간 물건마다 얽혀있는 LRL과 아저씨의 모습이 하나하나의 단편이 되어 에이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고, 

그녀는 왠지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등대에서 평범한 인간은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구출된 것은 LRL 혼자였다.


“그러니까 에이미도 외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에이미가 그리워하는 그 사람도 별이 되어서 에이미를 보고 있을 것 아닌가!”


LRL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으며 에이미를 올려다 보았다.

태어나마자 등대에 갇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100여년을 넘게 살아온 바이오로이드.

그럼에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주변에 웃음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아이.


그런 LRL의 얼굴을 보자, 에이미는 불현듯 그의 미소가 떠올라 결국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야 말았다.





4




그녀가 또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술을 마시고 잠드는 것이다. 

그런 날에는 꼭 피터가 나오는 악몽을 꾸곤 했다. 

그걸 알기 때문에 그녀는 잠들지 않으려 했지만, 바이오로이드의 몸으로도 그건 힘들었다.


"어머나, 피터?"


에이미는 난감한 표정으로 눈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 보았다.

백년도 넘게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했다.

여전히 고급진 넥타이에 왁스를 발라 넘긴 머리로 멋을 내고 있었고, 

구김 하나 없이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기억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에이미에게 천천히 다가간 그는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하듯 그녀의 손위에 올렸다.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게 된 그들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왈츠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텅 비어있던 검은 배경은 어느세 무도회장으로 변해 있었다.


“하하, 에이미 씨와 이렇게 춤추는 날도 오게 되네요.”


다정하고 따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긴장을 놓지 않고 주변을 경계 했다.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와 그의 가슴을 뜷을 것만 같았다. 경직된 몸 탓에 발이 꼬인다.

꿈속의 그는 항상 가장 행복할때, 한순간에 그녀의 곁을 떠나곤 했다.

그때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는 사려깊게 그녀의 몸짓에 맞추어 스텝을 밟았고, 긴장이 풀린 몸이 천천히 음악에 녹아들었다. 

곧 짧은 춤이 끝나고, 에이미는 어색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꿈 속에서 끝까지 춤을 춘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별처럼 반짝이는 눈이 그녀를 다정하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문득 에이미는 그것이 그가 그녀에게 정말로 해주고 싶었던 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미는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온기를 느끼며 말없이 그에게 웃어보였다.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 파란새 한 마리가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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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