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는 것도 잠시였다. 


홍위와 요안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의식을 잃은 마리를 둘러싸고 보호 중인 일행에게 다가갔다.


요안나가 보호하던 중이었던 마리는 

요안나가 지쳐 전선에서 물러난 뒤에, 

그리폰이 재빨리 날아가 제공권을 장악하고 

견제하는 틈을 타, 

페로가 빠르게 다가가서 구조해왔다.


마리는 가늘고 옅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나, 

허벅지와 어깨에 총탄이 스치고 지나간 상흔이 보였고, 

그 상흔에서 피가 끝임없이 흘러나오는 상태였다.


"이런...과다출혈인데... 

이거 빨리 오르카호로 돌아가야겠는걸? 

수복하지 않는다면 죽을 수도 있을 상처야!"


그리폰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일행에게 말했다.


그녀는 말하면서도 허공에 떠서 주변을 

조심스레 경계하는 자세를 풀지 않았다.


홍위가 마리의 상처를 보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일행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혹시 지혈할 천이라도 있으면 좋겠구려...

6척에 몇 치 쯤 조금 못미치는 정도의 

이 장대한 여인을 옮기려면, 

당연히 사내인 여의 힘이 필요하지 않겠소?"


(세종 12년에 정한 1척의 길이는 31.22cm 정도 되므로, 6척이면 187.32cm 정도다. 

참고로 불굴의 마리의 키는 181cm다. 

조선 초중기 사람들의 평균키가 보통 수도권 기준 성인 남자 164cm, 성인 여자 151cm 정도였을 것을 감안하면, 

그 시대엔 여자로서도 드문 키다.

믈론 그 시대에도 함경도와 평안도의 남자들은 평균키 166~167cm 정도를 자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위가 그렇게 말한 직후, 

다른 일행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요안나가 서둘러 자신의 찢겨진 옷가지를 

가져와 마리의 어깨에 붕대처럼 둘러 주었고, 

홍위도 목가리개에 목이 쓸리는 것을 막기 

위해 제 목에 두른 목도리 비슷한 두꺼운 천을 벗고,

그 천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강하게 눌러 감아 계속 상처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피를 애써 

지혈했다.


일행은 인간님이 굳이 이런 궃은 일까지 자청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 했으나, 

막상 그가 직접 돕겠다고 나서는 것을 

차마 말리기도 뭐한 다급한 상황인지라,

재빨리 홍위가 마리를 짊어지도록 도왔다.


"조심, 조심해, 잘못하면 붕대가 풀릴지도 몰라."


그리폰, 즉 굴리혼이 아주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새침스럽게 재잘댔다.


페로도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지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꼬리와 쫑긋이는 귀는 그녀가 확실히 긴장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흐읍...차..."


홍위는 마리의 늘어진 긴 다리를 두 손으로 떠받쳐 들고, 힘을 주며 들쳐업었다.


마리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던지라 생각보다 

수월하게 업을 수 있었다.


홍위의 타고난 근력도 결코 약한 편이 아니었던데다,

아까 닥터의 실험실에서 거친 육체 강화로 인해, 

A급 전투용 바이오로이드에 버금갈 정도로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홍위는 가볍게 마리를 들쳐업고 달리기 시작했고,

일행도 홍위를 중앙에 둘러싸고 호위하며 

급하게 적지에서 빠져나와 후퇴하기 시작했다.


홍위와 페로의 빠른 질주, AGS들의 신속함, 또 그에 못지 않은 그리폰의 활공 속도에 힘입어 일행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잠시 뭍에 가까이 올라온 오르카호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오르카호로 돌아온 일행은 급히 수복실을 향해 달려갔고, 

간호사들이 급히 달려와 치료 용액에 마리를 집어넣었다.


일행은 다소 긴장하며, 수복실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고, 

홍위는 서성이며 괜스레 천장을 쳐다보았다.


수십 분이 지난 후, 수복실의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여인은 키가 보통의 조선 남정네

못지 않게 컸지만, 

(다프네 키 165cm, 조선 성인 남자 평균 164cm)

그 얼굴에 청순하고 가련한 애수가 있어

자못 사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했다.


섬세하고 크며, 속눈썹이 촘촘한 눈은 

그 풍요로운 바다 지중해의 푸른색을 

그 안에 온전히 비추고 있었으며, 

섬세하고도 윤기가 흐르는 진한 갈색의

풍성하지만 과하지 않은 장발은 

등 뒤로 묶어 내렸다.


홍위는 나중에서야 서고에서 알게 되겠지만, 

가장 준수하고 고귀한 태양신을 사랑에 미치게 한,

그녀의 이름의 원래 주인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 미모였다.


"다프네, 마리의 상태는 지금 어떤가요?"


페로가 걱정하는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다프네에게 물었다.


일행들은 순간 다프네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의 아름다운 다프네가 

상대를 은은하게 진정시키는 특유의 목소리로 조곤조곤 대답했다.


"이제 겨우 숨 돌릴 정도로 상태가 괜찮아지셨어요.

다행이도 구조대 분들이 지혈을 잘 해두신 덕분에 회복이 더 빨랐던 것 같아요."


다프네의 말을 듣고난 일행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안도감을 표현했다.


"휴...다행이군요..."


페로가 속삭이듯이 말하며 단분자 클로를 

뺀 맨손으로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흥, 다행이네! 괜히 걱정이나 시키고..."


그리폰이 툴툴거리듯이 내뱉었지만, 안도감으로 그녀의 표정이 풀려있는 것은 누가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실로 다행일세!" 


요안나도 가벼운 수복을 마치고 붕대를 감은 상태로 자신의 수복실에서 걸어나오며 

한 마디를 보탰다.


"아아, 실로 다행이로다..."


홍위도 비로소 숨을 돌리며 긴장을 풀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처음 보는 처자라고는 하나, 

자신이 직접 짊어지고 온 여인이다.


어찌 그녀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아, 음....사령관님? 마리 님이 아까 깨어나셨는데, 

그동안 있었던 일의 경위를 들으시고 사령관 님과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다프네가 천천히 사령관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고, 

홍위는 그 말을 듣고 서서히 일어나면서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면, 

여도 그녀를 만나러 가봐야겠지. 

알려주어서 고맙소, 다부내多扶內.

(집 안에서 많은 도움이 되는구나.)"


홍위는 다소 키가 큰 몸을 온전히 일으키고 난 후에, 

망설임 없이 수복실 문을 열고 발걸음을 옮겼다.


홍위의 눈에 허벅지와 어깨에 제대로 된 붕대를 감고 온 몸 곳곳에 생채기가 난 근육질의 금발 여인이 침상에 누워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마리는 차분히 생각에 잠겨있는 것처럼 보였고, 진한 금발의 머리카락은 벌거벗은 것에 가까운 상반신을 덮고 흘러내려 오묘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근육질이면서도 곡선이 살아있는 몸은 그와 동시에, 

진정한 군인이자 용맹한 전사의 몸이었다. 


누가 저 광경을 보고도 부정할 수 있으랴?


홍위는 생각에 잠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군사회의에 참석한 장수들 중 작전을 짜는 데 몰입해 있는 장수의 눈을 본 기억을 떠올렸다.

 

그렇기에 홍위는 그녀와 얘기를 아직 나누지도 않고,

 그녀가 진정한 무인임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리가 생각에 잠겨있는 것을 홍위가 방해하지 않고 기다렸으나, 

마리는 홍위의 시선을 눈치채고, 

생각에 잠긴 나머지 감고 있던 눈을 떠서 

,홍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홍채는 마치 밤하늘 아래 번뜩이는 

무구의 섬광처럼 반짝였다.


국경의 갑옷처럼 푸르게 번뜩이는 커다란 눈이 다소 고요하고 가라앉은 섬세한 검은눈과 

허공에서 마주쳤다.


둘 중 먼저 입을 연 쪽은 불굴의 마리 그녀였다.


"인간님...이십니까...아니, 이제부터는 각하라고 불러드려야 되겠군요..."


홍위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것을 보자, 

마리는 천천히 눈을 뜨고, 침상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대 몸상태를 여가 알고 있으니, 굳이 일어나지 않아도 되오."


"각하께서...저를 업고 달리셨다는 것을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가 차분하고 담담하게 말하며 홍위와 눈을 마주쳐왔다.


홍위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을 맞추며 그에 대답했다.


"그래, 여가 그대를 업고 달렸소..."


"...정말 감사드립니다. 굳이 그런 일까지 자청하시다니..."


마리는 고개를 살짝 숙여 자신을 구해준 

은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 아니지...그대가 살아서 천만 다행이오."


홍위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고는, 

다시 한 번 마리에게 차근차근 질문을 던졌다.


"그대의 몸 상태는 어느 정도 차도가 있소?"


마리는 가볍게 눈을 깜박이는 듯하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차분하게 대답해왔다.


"네, 이제 며칠만 전투를 자제하면 다시 이전의 몸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더욱 반가운 소식이구려."


홍위가 진심으로 반겼고, 

마리는 안색을 부드럽게 풀며 얼굴을 살포시 붉혔다.

하지만, 홍위는 앞으로 이어갈 질문에 몰입해 있어서, 그런 것 정도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대가 싸웠던 적에 대해 아는 것이 있소?

있다면 모든 것을 여에게 알려주시오. 

아무래도 작전을 준비해 두어야 할 것만 같소. 

여의 예감에는 그리 좋지 않으니 말이오."


홍위가 심각한 안색을 굳이 감추지 않고 마리에게 부탁해왔다.


마리도 진지한 표정으로 홍위의 말에 

귀기울였고,

이내 자신이 겪어왔던 적들에 대해 하나하나 

진술하기 시작했다.


홍위는 하나도 기억에서 놓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이야기를 빠짐없이 경청했다.


불굴의 마리 그녀는 멸망 이전부터 살아남았던 기체로,  그녀의 번호는 4호였다.

그녀의 자매기들처럼, 그녀도 자랑스러운

스틸라인 부대의 장이었고, 

가장 치열한 전투 현장의 최전선에서 가장 분주하게 움직이는 전사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열정으로 인해, 그녀의 자매기들은 모조리 전장의 고혼이 되었고, 

그녀 또한 그런 위기를 여럿 넘겨왔다. 


그러나, 유독 그녀와 그녀의 부대를 고전하게 한 주범이 있었으니, 바로 스토커였다.


그녀는 스토커의 치밀한 움직임에 여러 스틸라인 부대가 전멸하거나, 

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을 수도 없이 듣고 목격해왔다.


또한, 그녀의 이야기로 판단하건대,

스토커는 라비아타 통령이라는 섭정攝政이 

지휘하는 현재의 오루가호 悟慺軻戶를 가장 

고전시키는 적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오루가호悟慺軻戶: 깨닫고 정성을 다할 우리의 수레 같은 집이어라.)


마치 과거의 자객들처럼 은밀히 몸을 감추곤 나타나지 않다가, 

적의 수장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불의의 저격을 가해 수장을 처치하고, 적의 부대를 와해시키는 그 흉수凶獸 는 홍위가 보기에도 상대하기가 꽤 까다로운 난적이었다.


자신은 요안나와 함께 개척하고자 하는 땅을 수색하던 도중, 대규모 철충 부대의 기습을 받아 응전하였고, 

둘이서 그 무리들을 무찌르던 찰나, 

갑자기 괴상하게 생긴 형상의 철충이 나타나 

같은 철충들을 동족포식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급히 오루가호 悟慺軻戶로 복귀하러 

퇴각하던 중이었다고 마리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급히 퇴각하는 도중 옆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스토커, 즉 수토거 隨堍遽에게 대응하려다,

거기에 반응하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피격당하였다고 말했다.


긴 이야기를 마친 마리는 자조하듯이 자신의 

상처 부위를 내려다보았다.


"결국 저도 제 자매기들의 실수를 그대로 반복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갔던 게지요. 

참 제 자신의 어리석음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각하..."


"...과거의 어리석음이라..."


홍위는 그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홍위 그 자신만큼 과거를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이도 손에 꼽을 정도이리라.


그만큼 홍위는 과거를 후회했고, 그런 과거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랐다.


"이는 마리 장군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로다...

그녀에게도 여와 마찬가지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존재한다."


홍위의 가슴 속에서 차분하게 냉혹한 불길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 수토거 隨堍遽 라는 흉적을 처리하고, 

마리 장군의 비원을 이루어줄 수 있으랴?


홍위는 차분히 되뇌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윽고 아주 훌륭한 계책이 떠오른 홍위는 

그 섬세하고 붉은 입술을 열었다.


"마리 장군, 그대의 조언을 듣고, 아주 훌륭한 계책이 떠올랐소...

혹시 이 배에 지휘관들이 존재한다면, 

여가 그녀들을 소집하여, 

작전회의를 열 수 있겠소?"


"예, 사령관 각하."


마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