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다. 백만의 죽음은 통계다.

-이오시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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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카 호는 절망을 벗어나 희망으로 나아가고 있다.

도무지 이겨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레모네이드와의 격차는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오히려 레모네이드의 세력을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피해로 집어삼킬지 계산 중이고

별의 아이는 모르겠으되 철충과의 세력비는 이제 해볼만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집단의 행복과 개인의 행복은 항상 같이하진 않는법.

적어도 사령관의 옆에서 그를 돌보는 배틀메이드와 컴패니언,

그리고 초창기부터 그를 따라왔던 지휘관 개체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집단의 행복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 결여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마리, 보고해."

"예, 각하."

회의실의 화면이 켜지고 수많은 그래프와 숫자들이 떠오른다.

"지난 아메리카대륙 동부 지역 수복 작전은 예정된 전선까지 큰 피해없이 진행되었고,

현재 추가 작전 목표 달성을 위해 15 집단군이 작전 중입니다."

"피해 상황은?"

숫자들이 강조되었다.

"전사 242,935명, 실종 65,326명, 부상 1,423,875명 외 기타 장비 손실 다수입니다.

아측 1, 2 집단군은 담당 전역을 줄이고 예비대인 9, 10, 11, 12 집단군이 추가 전역을 맡았습니다.

레모네이드의 피해는 전사 952,125명, 포로 10,325,876명입니다.

레모네이드측 8, 10, 13 집단군은 완전히 붕괴하였으며 3, 9 집단군은 후퇴하였습니다."

"생각보다 적은 피해군."

냉정하게 자르는 사령관의 말에 그의 곁에 서있던 블랙 리리스는 입술을 씹었다.

사령관은, 변했다.

예전의 사령관은 바이오로이드 하나 하나의 상처를 마치 자신의 상처처럼 여겼다.

리리스는 아직도 기억한다.

철의 왕자라는 자신이 철충인줄 아는 광인과 싸울때 입었던 수많은 피해,

기적적으로 사망자 한명 없이 후퇴할 수 있었지만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었던 라비아타의 피해까지 가슴아파하던게 그였다.

처음 오르카의 세력이 거대해지기 시작했을때 리리스는 기뻐했다.

이제 피해자는 더 줄어들 것이고, 자매들이 아파하는 일은 줄어드리라 생각했다.

그게 물러터진 생각이란걸 깨달은 곳은 최초의 육상 거점, 요안나가 세운 네오오르카의 방어전이었다.

당시 오르카의 세력은 철의 왕자와 싸울때보다도 훨씬 크고 강건해졌었다.

하지만 강성하던 구인류조차 이겨내지못한 철충을 오르카가 이겨낼리 만무했다.

대지를 개척하던 럼버 제인, 숲을 만들던 엘프와 다크 엘프,

바위와 절벽을 부수던 바바리아나, 슬픔을 무릅쓰고 지하로 내려간 더치걸.

모두가 죽었다.

비상 신호를 받은 오르카가 도착했을때는, 너무 늦었다.

살아남은건 고작 한줌.

상반신만 남아서 마지막까지 드릴을 쥐고있던 더치걸의 시신을 본 사령관은 무언가가 끊어진듯,

멸망의 메이에게 핵을 쏟아부을걸 지시했다.

메이는 불필요한 핵의 사용은 추후에 지장이 갈것이며 더 많은 철충을 부를 수 있다고 만류했지만

그런 메이의 멱살을 잡고 귀기어린 눈으로 하라고 명령했다.

거부권을 가지고 산전수전 다 겪은 메이조차 그 사령관의 눈빛을 보고선 하얕게 질려서 버튼을 눌렀다.

그 시점부터 사령관은 변했다.

이상할 정도로 세력을 키우는데 집착했고,

이전처럼 희생을 최소화하는걸 우선하지않고 작전의 성공만을 우선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가 흘러도 교환비와 숫자만 보았다.

물론 그런 철두철미하고 냉혹한 사령관이 되었기에 오르카 저항군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사령관을 옆에서 바라보는 그녀들은 누구보다 슬펐다.

복수에 눈이 멀어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사령관을 보는것은

자신들이 다쳐서 피흘리는 것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아직 몰랐다.

그녀들 역시 사령관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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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지, 아르망?"

사령관 홀로 남아 일을 처리하고 있을때, 아르망이 들어왔다.

"폐하, 이제 스스로를 용서해주십시오."

아르망의 절박한 애원.

"무얼 말이지?"

"네오오르카의 비극은 폐하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건 그저-"

"사고다. 그런 말이로군."

사령관은 손에 쥔 펜을 놓고서는 일어나 아르망에게 다가왔다.

"좋은 기회다. 너희가 착각하고 있는걸 수정해주마."

"폐하?"

"탈론 페더가 다 보고 있는거 안다. 내 말리지도 않았으니.

허나 너희들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지금까지 너희가 착각하고 있던 것, 그걸 수정하지 않았던건 그럴 필요가 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르망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서는 사령관은 아르망의 눈을 바라보았다.

순간 흠칫한 아르망.

그 눈은 복수에 눈이 멀어 광기에 빠진 눈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슬픔에 빠진 눈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너희가 상처입게 된다. 그러니 이젠 설명할 때로구나."

사령관은 뒤돌아서서 벽으로 향했다.

얼굴은 보여주지 않은채, 사령관은 설명을 시작했다.

"네오오르카의 비극은 결국 우리가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강해져야만 했다.

강해지기 위해선 더 많은 병사가 필요했지.

그러나 나 혼자 그 많은 병사를 지휘하는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래서 추가적으로 지휘관들을 만들어서 조직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물이 지금의 거대한 군대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손실은 피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사망자가 없는 전투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어.

최대한 AGS를 쓴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특히나 철충이라는 AGS 최흉의 적을 언젠가 쓰러트려야만 하는 입장에서

AGS의 비율을 더 늘리는것은 바보짓이었고.

거기다 난 아직 에이다를 믿지 않아.

그러니 너희 바이오로이드들을 막강한 군대로 육성하는게 최우선순위가 되었지.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죽어가는 아이들은

내게 있어서는 그저 실감나지 않는 통계에 불과하게 되버렸다.

지금까지의 너희와는 달랐지.

같이 생활하면서 서로를 알아갔던 그시절과는 다르게

나에게 몇 명이 제조되었는지, 몇 명이 죽었는지 알려주는건 숫자 뿐이었다.

차라리 숫자가 더 익숙한 얼굴이었어.

저항군의 규모가 커졌기에 피할 수 없었던 일이라 몇번이나 자위해보았지만

결국 결론은 내가 목숨의 가치를 경시하는 악마라는 대답일 뿐이었다.

너희는 나를 동정해선 안돼.

나를 증오하는게 옳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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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전장에서 피흘리는 자들만이 용사와 영웅이라는 명예를 받아야만 할까?

피흘리는 영웅들을 바라만봐야 하는 자는 대체 무슨 죄가 있을까.

지휘봉을 손에 쥔 자는 정말로 누군가의 피로 명예를 얻는 악마일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