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물은 사실 통찰력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이 비상 대비 시나리오로 합작해 입안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령관 본인은 사실 그날 그날 철충 퇴치하고 애들 돌보고 하는 거에 오롯이 신경쓰느라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었거든.


그런 너그럽고 무사태평하며, 

다소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만큼은 

안전불감증인 사령관을 

누구보다 걱정하는 두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책사인 아르망과 형사 리앤이었지.

(일단 둘 다 사령관 자체에 대한 호감도 만렙 상태+ 멸망 전 인간을 기억하고 극혐하는 상태일 때 성립가능함.)


우선 아르망은 자료를 제공받을 수만 있으면 그걸 토대로 얼마든지 시뮬레이션을 돌릴 수 

있으니까, 

각 바이오로이드의 성격도 충분히 변수로 놓고, 

어떤 경우에 그들이 배신을 택할 것인가도 

냉정하게 계산해낼 수 있겠지.

그런 아르망은, 아마 배신할 가능성이 

0에 가까운 바이오로이드들이라 할지라도

(이를테면, 컴패니언, 배틀 메이드의 대부분, 이터니티 등)

그 0에 가까운 변수까지 모조리 계산해 각

바이오로이드마다 시나리오를 짜놓을 거야.

심지어는 냉철하게 자신이나 리앤이 배신할 경우에 사령관이 대처할 방법을 알려주는 

시나리오까지도 모조리 마련해놓겠지.

마치 제갈량의 세 주머니처럼 말이야.


한편, 리앤의 경우에는, 멸망 전에도 

수없이 많은 범죄자들과 그들의 어두운 이면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악한 본성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겠지.

그래서 리앤도 그 시나리오를 직접 확인해가며, 유사시에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보완해주었어.


그렇게 완성된 수백여편의 시나리오는

매우 정교하고 가히 완벽에 가까웠지.

진짜 어떤 유사 상태에도 대비할 수 있을 

만큼 말이야.


문제는 그 착하디 착한 사령관이란 남자가 

이 시나리오를 과연 하나라도 읽어보려 할 

것인가였어.


한 번 믿게 된 사람을 주욱 신뢰하는 사령관의 성격을 감안하건대,

분명 읽자마자 모조리 태워버리라고 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어.


그래서 그 둘은 조용히 고민한 끝에 

사령관실에 몰래 그 보고서 묶음을 

다른 계획서들과 함께 책으로 엮어 제출하는 거지.


사령관은 늘 그랬듯이 다른 이들이 제출하는 서류 결재만으로도 충분히 바빠 

계획서 자체는 잘 들여다보지 못하니 말이야.


그 둘은 사령관을 진심으로 걱정해서 그와

같은 일을 벌인 것이었지만,

그 일이 엄청난 폭풍을 몰고 오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있었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들은 사령관 그 자체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그 시나리오를 읽어볼 가능성을 계산에 넣는 것을 깜박했거든.


애초에 그녀들이 그 계획서를 찾아볼 수도 없도록, 

나름의 대책으로 

사령관만 들여다 볼 수 있는 책에 부록으로 끼워넣은 것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런데 어찌 된 일일지, 

부관으로 임명된 바이오로이드들 중에는 

자기 맘대로 사령관의 자료를 읽어보며 

사령관의 마음을 유추하려는 시도를 해오는 부류도 충분히 있을 거야.


가령 허당인 리제라던가, 경호대장이자 

은근 은밀하고 치밀한 성격을 가져 잘 들키지 않는 리리스라던가...그 들 중 하나인 리리스가 우연찮게 사령관의 직인이 박혀 있는 향후 계획서를 펼쳤다고 해보자.


그리고 그 계획서의 두꺼운 분량에 궁금해하며 살짝만 볼까하고 그 판도라의 금서를 

열어젖혔다고 해보자.


그리고는 그 매운 맛에 정신붕괴 직전까지 가거나, 

현실을 부정하며 거기서 급히 뛰쳐나오는 

부관 리리스를 보고 싶다.


너무 충격을 먹어서 손을 덜덜 떨며 사령관에게 껌딱지마냥 달라붙어, 


주인님 주인님 절대 리리스는 나쁘지 않아여 착한 리리스에요

주인님 주인님만큼은 리리스를 믿어주세요 

리리스는 안 그럴게여 주인님 주인님

리리스를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하고 엉엉 울어대는 것을 당황한 얼굴을 

차마 감추지도 못한 채로 애써 진정시키려는

착한 사령관이 보고 싶다.


그리고 그 매운 맛을 봐버린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책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리고 그녀들이 사령관의 선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그 시나리오에 나온 자신의 행동이 

넘 그럴듯해서 한편으로는 죄책감과 괴로움에 신음하는 것을 보고 싶다.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착한 사령관이 

황당해하면서 사태 파악에 나서려는 것을 보고 싶다.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될 때까지 오르카호 전체가 서로를 의심하면서 오해가 쌓여가는 것을 보고 싶다.


서로를 탓하며 주먹질하는 지휘관들, 

자신을 자책하고 우울증에 빠져있는 메이드들, 완전 개박살난 군기와 단속을 하지 못할 정도로 멘붕한 부관들까지... 

아르망과 리앤도 뒤늦게 자신들이 고려하지 못한 한 가지 실수를 깨닫고 머리를 쥐어뜯고 고뇌하면서 실수를 바로잡으려 나서지만,

가면 갈수록 오해가 꼬여가는 광경을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결국 아무짓도 안했는데도 모든 것을 꿰뜷어보는 빅브라더처럼 간주되는, 우리의 착한 사령관이 보고 싶다.


그리고 대인배 사령관의 노력으로 어떻게든 오해가 풀린 후에도,

서로를 믿지 못하고 여전히 배신 시나리오를 마련해 비밀리에 가져오는 지휘관들을 

보면서 뒷목을 잡는 착한 사령관을 보고 싶다.


자신들의 실수를 자책하면서 사실상 은둔하게 된 아르망과 리앤이 보고 싶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곪을 대로 곪은 오르카호가 보고 싶다.

그리고 이를 견디지 못하고 탈주하는 

사령관이 보고 싶고,

탈주하는 사령관을 다시 감금하려는

얀데레 바이오로이드들이 보고 싶다.


그렇게 오르카호가 모두 조금씩 뒤틀려가는 데도 더 이상 아무도 그 뒤틀림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철충과의 전쟁을 이어나가고 결국 

승리하는 결말을 보고 싶다.


.....그들은 그 승리 후에 과연 행복했을까?


(그냥 아무생각 없이 나비효과의 나비효과, 오해에 오해가 겹쳤을 시에 조직이 어떤 꼴이 되는가를 머릿속으로 상상해봤습니다.

제가 써놓고도, 괜스레 애들한테 미안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