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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튼의 무게, 생명의 무게 : 전체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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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이 연구되기 시작 한 신 시리즈 i-02-모르모트의 테스트를 위해 IB-07의 샘플과 i-02-모르모트 생산에 사용 될 개량형 오리진 더스트 샘플을 들고 바이오로이드 생산실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연구원들 사이에는 긴장한 듯한 무거운 공기가 만연해있었고, 하나같이 표정을 굳히고있었다.

유사시를 대비해 배치 된 B급 바이오로이드들은 여느 때 처럼 표정이 없었지만, 상황과 어우러져 장례식을 방불케하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처음에는 연구원 중 한 명이 실수라도 한 것인가 생각했지만,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주임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기에 배제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연구실의 분위기가 침울한 것은 예삿일이다. 하지만 평소 무표정한 얼굴과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 주임이 저렇게 기분이 좋아보이는 것은 굉장히 불온한 일이다.

문득 그의 체구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작은 체구의 여자 연구원이 눈에 띄였다.

아니... 저건.


'닥터09!?'


연구에 사용되는 각종 생물들의 관리와, IB-07의 실패를 대비해 철충 바이러스를 포함하지 않고 유사한 효용성을 내는 생화학 무기 개발을 일임받았다고 들었다.

덕분에 주로 오리진 더스트, 철충 바이러스 관련 연구에 종사하는 나와 수 년간 전혀 접점이 없었으며, 그녀도 나도 멀리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 한 정도일 것이다.

그런 그녀가 IB-07의 테스트에 참여하는 건 드문 일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마치 연인 행세라도 하는 양 주임의 팔에 꼭 달라붙어서 아양떨 듯 미소를 흘리는 모습은... 내 얼굴을 한 자매개체의 저런 모습을 보니 속에서 구토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을 해도 지금 상황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직된 공기, 주임의 미소, 접점이 없던 자매개체의 방문.

다 필요없다. 주임이 기뻐 할 만한 일. 수 년간 표면적으로만 그를 접하긴 했지만 가능성은 하나로 추려진다.

연구의 성공. 비원의 달성.


그같은 사람이 닥터 개체가 애교를 부린다고 얼굴이 풀어질 사람이 아니란 것 쯤은 나라도 알 수 있다.


연구의 성공이라고?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된다.

성과는 분명 있을지언정, 전문가인 내가 말할 수 있다.

오늘은 단지 알파테스트.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늘상 들려오던 끔찍한 단말마에 뇌가 스크래치 일 듯 정신력을 깎일 뿐인 하루였을 터다.


마치 그림의 완성까지 퍼즐 조각이 단 한 조각 필요한 상황. 그 한 조각을 찾지 못해 비어있는 부분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하는 듯한 찜찜한 기분.

여러 '말도 안 되는' 상상들이 머릿속을 훑고지나가지만 필사적으로 부정한다.

그럴 일은 없다. 그럴 가능성은 1퍼센트도...


"뭐하는가 닥터, 어서 생산기를 가동시키지 않고. 모두 모였지 않나"


"아 네...."


"응! 오빠~"


주임의 재촉하는 말에 생각의 바다를 표류하던 의식이 돌아와 대답을 하려고 하자, 내 말을 담담히 끊고 그의 옆에서 닥터09가 발랄하게 답한다.

내가 이 연구 시설에 오기 전의 성격, 즉, 닥터 본래의 성격을 잃지 않은 그녀는 아쉬운 듯 주임의 팔에서 벗어나 마비가 일 듯 한 분위기를 두른 연구원을 지나, 생산기 옆에 서있던 내 앞에 멈춰섰다.


"비켜줄래?"


"무슨 생각이시죠?"


냉랭한 어투의 명령조로 내게 말을 건내는 닥터09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워, 나도 모르는 사이 닭살이 돋을 정도였다.

나는 그녀에게 미움받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없지만 지금 그런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이거 실망이군 닥터02"


맞서 듯 노려보는 나에게 쏘아붙일 기세로 뇌까리려던 닥터09의 말을 막아서 듯 주임이 나에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는 반쯤 말이 끊겼는데도 전혀 기분나쁜 기색 없이... 오히려 기뻐보였다.


"오늘 테스트 내용은 네 손에 들린 i-02-모르모트가 아니다"


"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총수의 아들과 하던 작당은 즐거웠나?"





"...!"


손과 발이 온기를 잃고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한 줄기 흐른다. 역시 나는 연기가 서툴다.

곁눈질 하듯 주임의 얼굴을 바라보니 여전한 웃음기를...비웃음을 두른 얼굴에 확신이 가득 차있었다.

빠져나갈 구멍은 없는 듯 했다.

대체 왜?

왜 들킨 거지? 어째서?

내가 말 실수를 했나? 여지껏 연구실 내에서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은 전무하다고 해도 좋았다.

늘 업무적은 태도를 유지했기에, 일관성 있는 태도를 고수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니 이상하게 보인 행동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자료를 수집할 때? 서큐리티를 뚫고 자료 수집을 할 때 발목이 잡혔나?

절대 그럴 일은 없다. 역추적 대책은 완벽했을 터다. 그리고 그 대안을 마련해 온 531이 실수를 했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는다.

531의 연기가 들킨 건가? 복종 코드를 제거 한 블랙 리리스가 들킨 건가?

그렇다고 나와 531의 연결점이 확실해지는 건 아니다.

수만 가지 생각과 가능성들이 머릿속을 불과 1초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가로질렀고, 나는 기어코 한 가지 '실수'를 눈치챘다.


"설마..."


"부정도 안 하는군. 머리 좋은 개체는 쓸데없는 언쟁이 필요없어서 좋지"


툭.

나를 옆으로 강하게 밀며 생산기에 접근하는 닥터09. 나는 아무 저항도 못한 채 무력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옆을 올려다보니 경멸을 담은 듯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닥터09가 보였다.


"그 구슬이..."


531과 처음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후, 며칠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짜증스럽게 긁은 머리로부터 은구슬 같은 것이 떨어져나갔 던 일을 기억한다.

연구실에 비슷한 도구는 많았으므로, 어쩌다가 머리에 붙은 거라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돌이켜봐도 그것 외에는 미스를 범 한 기억이 없다.


"한심하기 짝이없군 닥터. 비상한 머리에 비해 안타깝기 그지없을 정도로 미성숙해"


불안에 몸을 떨며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눈을 주임에게 옮긴다.

아까까지의 미소는 어디론가 사라진 채, 모멸감을 한껏 담은 하찮은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 인상깊었다.


"왜 배신했지? 모르모트들이 괴로워보였나? 동정심이 들었나?"


하잘 것 없는 생각인냥 흘리는 주임의 입이 단어를 읊어갈 때 마다 내 안의 중요한 무언가가 점차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괴로워 보였냐고? 당연하다.

동정심?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상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건 숨 조차 쉬기 힘들 정도의 강한 죄책감이었다.

바이오로이드가 인간과도 같은 감정을 품는 게 잘못 됐나? 적어도...적어도...!


"아...아"


악마보다 못한 너희 인간들보단 낫지 않냐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욕짓거리를 늘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주임에 관하여 걸려있는 복종 코드가 목청을 높이려는 내 목소리를 막고 힘 없는 숨소리가 새어나갈 뿐이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내가 가진 생각, 하고싶은 말 모두 명령 불복종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531의 말을 듣고 코드를 삭제해둘껄 이라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흥, 말도 제대로 못하는 건가"


주임도 약간 흥분한 기색인지, 내가 단지 당혹감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것이라 착각 한 모양이다.

재미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오늘로써 연구는 완성된 거나 다름 없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시간문제고, 적어도 너희 계획이 실행 될 우려는 없겠지. 다만"


악에 받친 조소를 머금는다.


"네가 531을 끌어들인 덕택에 너는 물론이고, 그도 조만간 처분되게 되었다. 모두 네 덕이다 닥터. 자랑스러워 해도 좋아"


531이...처분? 죽는...다고? 나 때문에? 나 때문인가?

그의 멋쩍은 웃음, 즐거운 웃음, 쓴웃음, 괴로운 표정, 슬픈 표정, 아픈 듯 찡그린 표정

모든 표정이 마치 주마등처럼 눈 앞에 나타나 이윽고 사라진다.


나는 나를 필사적으로 도와준 531마저 이 손으로 죽인 건가?


내... 내 실수 때문에?


이미 연구가 완성 됐다는 사실은 내 귀에 닿지도 않았다.

끝도 없는 어두운 감정이 마음을 침식한다.


고개를 떨군다.


주임 앞에선 마음껏 절규하지도 못한다.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것 조차 불가능하다.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감정을 무엇 하나 밖으로 표출해낼 수 없는 만큼 마음은 급속도로 곪아간다.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오며, 생산기를 조작하는 사운드가 들렸다.


바이오로이드 생산기에 접하는 일이 많이 없었을 터인 그녀는 능수능란하게 생산기 조작을 마친 후, 지참 한 샘플을 넣고 가동시켰다.

이제 방탄 재질의 단방향 투과성 거울, 즉 매직 미러 반대 너머로 그녀가 만든 모르모트가 생산될 것이다.


나는...


나는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내 목숨따윈 아무래도 좋다. 이 가치 없는 것으로 연구를 막을 수 있었다면, 531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싶다.


하지만 모두 다 잃었다.


나에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주임이 명령을 했는지, 대기 중이던 경비용 B급 바이오로이드들이 나를 구속하여 바닥에 억눌렀다.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고,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마음 속으로 줄곧 사과하고 있었다.

531에게. 내가 죽인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내가 죽일 바이오로이드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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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장실에 방문 한 닥터가 내 품에 안겨 몇 분을 울어대다가, 그녀가 읊어나가기 시작 한 이야기는 소설보다도 더 기구한 실화였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이 위태위태한 그녀를 어떻게라도 해주고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그녀에게 제지당했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닥터09는 나랑 주임 사이를 질투해서 나한테 도청기를 부착했던 모양이...에요"


반말과 존댓말이 섞여서 지리멸렬한 문장 구성으로 또박또박 나에게 설명한다.


"주임이랑 제 대화를 엿듣고 싶어서 말이죠. 완성까지는 531의 협력이 필수 불가결했기 때문에 나를 살려뒀지만, 표면상으로만 연구를 진행시키며 정작 필요한 자료들은 닥터09에게 전해서 본격적으로 진행 시켰던 모양이고요"


거리를 취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걸 지적 할 때가 아니었다.


"그 531이라는 놈이... 기억을 잃기 전의 나라는 거야?"


"응...네"


힘 없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다.


그녀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나에게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안겨들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나로선 어리둥절 할 말들을 늘어놓으며 울었었기에, 대충 짐작은 갔다.

철충에 감염된 인간이 몇 명이나 있을 리도 없고.


"경비용 바이오로이드들한테 구속 됐던 게 마지막 기억이라 그 이후 연구가 결국 성공했는지, 제가 어떻게 돼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렇게 말한 다음 그녀는 스스로에게 조소하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예상은 가죠. 폐기를 위해 옮겨지다가 철충 사태가 일어나서 고립되고, 21스쿼드에게 구조 돼서... 재기불능인 나를 살려내기 위해 기억 소거를 진행... 그런 흐름 아닐까요"


아까부터 그녀는 나에게 전혀 시선을 맞추고 있지 않다. 마치 죄인이라는 양.

마음은 아프지만 그걸 묻는 건 마지막이다.


"초재생능력 실험...이라고 했나. 감염균의 정식 명칭은 IB-07이라고 했고. 그럼, IB-07을 정상적으로 부착시켰단 말은..."


"...연구는 성공이었다는 말이겠죠"


아랫 입술을 힘껏 깨물며 그녀가 대답했다. 피가 배어 나올 것 같아서 보기 괴롭다.


"IB-07은 바이러스나 세균처럼 백신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 없앤다고 하더라도 숙주마저 죽일 정도로 강력한 극약이여야 하죠. 또 기적적으로 백신 개발에 성공한다 해도... 그녀들은 결국 죽게 돼요"


다음 말을 듣고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망설이면서도 확실하게 말했다.




"보균체...감염체들을 살릴 방법은... 없어요"




그 말은 최후통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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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간다

처음부터 읽어주고 있는 모든 라붕이들한테 고맙고 끝까지 읽어주면 더 고맙겠음

다음 화는 평소보다 텀이 조금 더 길 것 같음.

일요일 저녁 쯤 예상하는데, 혹시 더 늦어질 것 같으면 간단하게 글 하나 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