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국권이 일제에 탈취당하던 당시, 서울교구장은 뮈텔 주교의 관할이었다. 그는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시신교부를 주장했던 안정근·공근 두 동생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뉴스를 접하고는 ‘매우 당연한 일이다’는 논평을 내서 원성을 산다.

안중근은 천주교 신자였다. 세례명 토마스의 몸은 일제가 사형에 처했지만 그 영혼은 가톨릭에 의해 또 한 번 처형당했다. 뮈텔 주교는 일개 천주교 신자보다 일본 제국주의의 환심을 사는 게 더 중요했다. 차제에 일제로부터 교회의 안전을 보장받을 필요가 있었다.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 출신 주교다웠다.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교회가 안정적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던 걸까.


안중근 의사의 영세 신부 빌렘은 1911년 1월 11일, 안 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 야고보로부터 데라우치 총독 암살 계획을 듣고는 뮈텔 주교더러 일본 헌병대장에게 알리라고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받은 뮈텔 주교는 즉시 헌병대장에게 찾아가 고한다. 때마침 걸려 있던 교회의 땅 소송 문제를 유리하게 로비하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그 때문에 독립지사 105인이 잡혀가게 된다.



중앙집권적인 가톨릭교회에서 주교가 벌인일이 천주쟁이랑 관련이 없다고 말하진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