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궤적 - 1 

종말 궤적 - 2

종말 궤적 - 3

종말 궤적 - 4




기억 안날 사람도 있을까봐 적는 탈론페더 콜사인은 에셜론 1, 그리폰은 팬케이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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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한 탈론페더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전투지휘실. 방 안에는 탈론페더의 무전에서 나는 바람소리만 가득하다.


"어... 어... 에셜론, 잠시만. 어쩌지 사령관?"


이런 무전은 예상을 못했다는 듯 당황한 슬레이프니르가 내 쪽을 본다. 어찌하냐라... 일단은 할 일이 뻔하지.


"하치코는 비서진 쪽에 연락해서 메이 좀 바로 오라고 불러줘. 그리고 지금 상황은 일단 용이 도와줬으면 좋겠다. 무전기 넘겨줄래?"


슬레이프니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자, 내 손에 송수신기를 쥐어준다.


"아아. 에셜론1. 들리나? 상황을 자세히 말해줬으면 좋겠어 탈론페더."


"사령관님? 아... 일단 저희 편대 후방에 적기가 있고 그 적기가 저희를 레이더로 추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적기? 정체도 모른다더니, 레이더를 쓴다고 다 적기인건 아니지 않아?"


"아 그게요..."


탈론페더의 말을 끊고 그리폰이 끼어들었다.


"바보야! 추적모드는 레이더를 우리한테만 쪼고 있는거라고! 언제든 미사일을 쏠 수 있는거야! 락온 몰라?"


그리폰의 무전을 들은 용이 언짢아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길래 작게 '괜찮아' 하면서 앉으라고 손짓해주었다. 적에게 쫓긴다는 애들한테 지휘관의 훈시까지 듣게할 필요는 없지.


"알았어. 무조건 싸워야 하는 상황인가? 도망칠 수는 있나?"


"적의 거리랑 속도를 모르는데 어떻게 알아? 아...! 나랑 같은 기종의 레이더니까 추적모드면 40마일 이내야."


"40마일?"


그러고보니 그리폰도 고향이 미국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으니 상황을 지켜보던 닥터가 옆에서 조그만 목소리로 나즈막히 일러준다.


"64 킬로미터야."


"64 킬로미터. 그렇군..."


엄청 먼 거리 아닌가... 하고 말할 뻔 했지만 그리폰과 탈론페더도 1500 킬로미터를 날아가는데 2시간 걸렸다는 것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내가 아무런 지시 없이 고민하는 모습만 보이자 무적의 용이 불안했는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주군, 우선 퇴각시키시지요. 나를 모르고 적을 모르면 항상 위태롭다 하였습니다."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진다던데,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이유는 내가 공중전에 문외한이라서인가?"


"읏... 그런 의미가 아니오라..."


"알아~ 농담이야."


용이 내가 능청스러움만 늘었다고 툴툴거린다. 다시 송신기를 잡고 무전을 날린다.


"그럼 임무편대, 오르카호 방향으로 최대한 퇴각하되 불가피한 상황에는 교전하여 적을 파괴하라. 비행 및 전투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은 상황이 급변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현장에 있는 대원들이 직접 결정해도 좋다."


"에셜론 1, 카피."


"팬케이크 1, 카피. 대령님, 고도를 3만 6천피트로 올리고 최대 수평비행속도로 이탈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알겠어요. 편대 고도 2만 7천피트에서 3만 6천피트로 상승합니다."


메이를 불러달라고 보냈던 하치코가 다가와 내게 조곤히 귓속말을 건넸다.


"둠브링어 팀은 3분 내로 도착한다고 해요."


"알겠어. 스카이 나이츠 팀도 연락해서 전원 상갑판에서 공대공 무장 준비해서 대기해달라고 해줄래? 무선망 유지하고. 항상 고마워."


"별 말씀을요. 알겠습니다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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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6천피트 상공, 대류권이 끝나고 성층권이 시작되는 지점이야. 기상현상도 없고, 온도도 제일 낮아서 마찰열도 덜 문제되고, 제트 엔진도 제일 잘 작동하는 높이지. 


[삐- 삐- 삐- 삐- 삐-]


원래는 가장 편안하게 날만한 고도인데 정체불명의 적기가 레이더파를 우리 뒤꽁무늬에 열심히 쪼아주는 덕분에 경고음에 귀가 아플 지경이야. 엔진은 최대한 출력을 내기 위해 꽁무늬로 길게 불꽃을 내뿜으면서 위이잉 거리는 비명을 질러대고 있고, 음속의 2배로 부딪히는 맞바람 때문에 얼굴도 땡겨서 최악이지.


"저기 그리폰"


"네 대령님."


"연료량은 계산해봤나요? 우리 앞으로 750해리... 그러니까 800마일도 더 넘게 날아가야 하는데 에프터버너 켜고 못갈 것 같은데요."


"일단 적기에서 거리는 최대한 벌려놔야 하니까요. 미사일 맞으면 100마일도 못가잖아요."


"... 그건 그래요. 아! 레이더에 적기 탐지!"


"위치 데이터 링크 해줘요! EOTS로 찍어볼게요!"


"보냈어요! 적 편대 거리 35마일, 고도 4만 1천피트!"


"좌표 확인! 아! 보입니다! 영상 공유할게요!"


마침내 우리 RWR을 2분째 울리고 있는 놈들을 발견한거야. 확대 배율을 올리니 기체의 형상도 명확하게 보여. 미공군 무인 제공기 FQ-104가 넷. 그 중 선도기와 그 윙맨 둘은 무장창을 열어놨네. 레이더에 잡힌 이유가 저건가봐.


"적 편대 FQ-104 4기! 대령님 영상 공유 잘 되고 있나요?"


"잘 보여요 그리폰. 오르카, 수신 양호한가요?"


"용이오. 수신 양호. 영상으로 보면 철충에 감염된 것 같은데... 오 이런..."


[삐비- 삐비- 삐비- 삐비-]


적기의 무장창에서 보이는 섬광 2개, 그리고 2개 음으로 바뀐 더 정신없는 RWR 경고음. 심박수는 올라가고 팔과 다리에 힘이 빡 들어가. 그래 난 원래 이런 상황에서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였어. 


"적기 미사일 발사! 레이더 상으로는 NARAAK 2발이에요. 어떻게 해야하죠 그리폰?"


"지금 편대 리더는 탈론페더 대령님이잖아요."


"난 제공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목숨 걸린 문제에서 지휘는 전문가가 맡는거에요."


"... 알겠습니다. 일단 고도와 속도 유지하면서 계속 직진해야겠어요. 이 거리에 도주하는 상태면 NARAAK이 맞지는 않아요." 


"알겠어요. 현 상태 유지하며 280방향으로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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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전, 내 공중전 모듈을 조율하던 시기의 기억...


책걸상이 띄엄띄엄 놓여진 교실같은 건물 내부. 가로로 벽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이어지는 창 밖으로 보이는 활주로. 밖을 밝게 비추는 텍사스의 햇살. 내 오른쪽으로는 전투기 조종사 후보생들. 앞에는 바람 빠진 G슈트 바지와 근무복 윗옷에 정복 자켓을 걸친 중년의 흑인 장교. 가슴팍에 붙은 이름표에 쓰여있는 'LTC Robert'. 미육군항공대 최후의 더블에이스이자 바이오로이드 전투기 개발 소식에 자원해서 교관으로 나온 사람이었어.



"사후 브리핑은 이상. 해산할 수 있도록."


"저기... 훈련 교관님, 질문이 있습니다."


"1112번 후보생... 그래 그리폰양. 질문이 뭔가?"


"교범에 보면 AIM-260 미사일은 최대 사거리는 115마일이지만 명중을 위해서는 가급적 30마일 이내에서 발사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오늘 중령님께서는 훈련 중 40마일 거리에서 저에게 미사일을 발사하셨고 빗나갔습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로버트 중령은 태블릿을 들어 화면을 몇 번 밀어 넘기더니 태블릿 너머로 나를 쳐다보셨지.


"오늘 기록을 보니 격추 판정을 받았군?"


"예... 그렇습니다."


"지난 주 훈련도 같은 조건으로 했었지. 결과는 기억하나?"


"예. 지난 주에는 교관님께서 6시 방향에서 접근하셨고 30마일 거리에서 제가 진행 방향에서 수직 반전하여 헤드온 후 서로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하였고, 쌍방의 회피기동 후 근접 선회전으로 진행되어... 제가 중령님을 격추했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번 훈련과는 무엇이 달랐지?"


"제가 반전하여 공격하지 못하고 계속 수세에 있다가 당했습니다."


"왜 반전하지 못했나?"


"반전하면 유도 중인 미사일의 사거리에... 아!"


"좋아. 이해가 빠르구만. 아직 비행시간을 100시간도 안채운 것으로 아는데... 지금까지 바이오로이드 파일럿들은 인간보다 나을게 없어보였는데, 자네는 느낌이 좋군. 항상 말했지만 좋은 파일럿은 기체와 머리가 날쌔야 한다. 내가 윙맨으로 가장 똘똘해보이는 신병만 쓰는 이유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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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체와 머리는 날쌔게...


지금 적 편대는 미사일을 2발 띄워놓고 고도를 낮추면서 속도를 올리고 있어. 훈련 때와 완전히 같아. 미사일은 단순히 우리를 묶어두는 용도고 그 동안 속도를 올려서 우리랑 거리를 좁히고 확실한 공격 기회를 잡겠다는 의도야. 


적 편대의 속도는 마하 2.4, 우리 속도는 마하 2.0. 이대로 5분 뒤면 단거리 미사일 사거리에 들어갈거고 8분 뒤면 코 앞에서 마주치게 되겠지. 이럴 땐...



"대령님. 적 편대가 더 빠릅니다. 곧 따라잡힐거에요."


"그... 그래요? 어... 떻게 할까요?"


탈론페더 대령님은 완전히 긴장한 것 같네. 정찰기로서 이런 상황을 자주 겪어보진 않았을테니까...


"2기씩 싸우면 제가 이길 수 있어요. 2기만 묶어주시면 남은 2기를 제가 처리하고 대령님 쪽으로 다시 합류해서 나머지도 처리할게요. 일단 편대를 나누죠. 대령님은 260 방향으로, 저는 300 방향으로."


"알겠어요 그리폰. 믿고 기다릴게요."


"데이터링크 유지하시고요. 적기 위치는 추적하실 수단이 있나요?"


"저도 적외선 필터로 촬영 중인게 있어요. 데이터 링크 띄울게요."


"알겠습니다... 잘 나오네요. 팬케이크 1에서 오르카, 에셜론 편대 해산하고 항로 변경합니다. 브레이크!"


"오르카에서 에셜론, 팬케이크, 교전할 계획이라고 들었소. 무운을 비오."


탈론페더 대령님은 왼쪽으로, 나는 오른쪽으로 20도씩 선회하면서 편대를 이탈했어. 적 편대도 2대씩 나누어서 쫓아가는게 정석일테고, 그렇게 해주면 좋겠는데... EOTS 영상으로 보니 적 편대도 2개씩 나뉘어 선회하면서 뒤쫓네. 다행이야.


탈론페더 대령님은 나보다 수평 비행은 더 빠르니까 아마 10분... 못해도 5분 정도는 내게 시간이 있을거야. 대령님을 쫓으러 간 2기가 교전 중인 내 쪽으로 합류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니까, 속도를 최대한 잃지 않는 선에서 북쪽으로 기수를 더 돌릴거야. 저쪽으로 간 2기와의 거리가 60마일이 되면 선회해야지. 망망대해 위라서 공간을 얼마든지 넓게 써도 좋다는건 확실히 다행이네.


레이더 상에서 동쪽으로 넓게 펼쳐지는 밝고 넓은 띠. 탈론페더 대령님이 채프를 살포한 모양이야. 아까 발사된 미사일을 회피하는 대신 ECM을 활용하기로 한거지. 정찰기는 전자장비가 빵빵해서 좋겠네. 나같은 전투기엔 채프까지 들어갈 자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내가 미사일에 쫓기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지금까지 70마일을 넘게 날았을 NARAAK 미사일. 미사일의 작은 추진체에 들어간 연료는 진작 다 썼을테고 관성으로 비행하고 있어. 이제 미사일이 내 레이더에도 들어왔고 HUD에 거리가 표시돼.


NARAAK 미사일의 종말 유도 단계에서 최고 가속은 12G - 중력가속도의 12배야. 한 번만 피하면 추진체가 없으니 나를 다시 물 에너지는 없어. HUD에 나타난 거리는 5마일.


NARAAK의 종말 단계 속도는 마하 4, 내 속도는 마하 2. 미사일이 5마일을 쫓아오는데 걸릴 시간은 12초.


10

9

8

7

6... 지금!



러더를 오른쪽으로 끝까지 차고 같은 방향으로 롤하면서 기수를 들어올려.


"흡! 으읍....!"


순식간에 15G에 달하는 가속도가... 나를 덮치고... 1300...파운드...에... 해당하는... 무게가, 나를... 짓눌러...


셋... 둘... 하나... 푸하아...


귀 옆으로 기차가 지나가는 듯한 공기를 찢는 충격이 헤드셋 속으로 파고 들어왔으면 상황 종료야. 미사일은 나를 빗겨 지나갔고, 기체에 이상 없는 것 같고. 엔진 정상, 러더 롤 피치 HUD 무기 시스템 다 정상에 속도는 1100mph 고도는 3만 3천피트. 좋아. 다행이야.


[삐비- 삐비- 삐비- 삐비-]


... 미사일은 피했는데 RWR은 계속 삥뽕삥뽕 시끄러운거 보니까 한 발 더 쏜 모양이네. 괜찮아. 저거에 맞기 전에 저 건방진 무인기 두 대는 다 죽은 목숨이니까. 탈론페더 대령님을 쫓아간 적기와의 거리가 60마일을 넘겼거든.


바다 쪽이 위를 향하게 몸을 뒤집고, 조종간을 당겨. 눈 앞에 뒤집힌 하늘, 구름, 수평선, 바다, 그리고 다시 수평선, 하늘...


... 그리고 적 편대. 


이제 이 몸의 실력을 보여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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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 소설의 정체성은 바이오로이드들을 무자비하게 현대적 항공전에 내몰고 싶은 소설이었던 것이다. 분위기 팍팍 살려야지.



EOTS는 Electro-Optical Tracking System 전자-광학 추적 체계의 약자임. 항공기가 미사일을 건물 창문에 깔쌈하게 슛 할 때도 쓰고 지상에 있는 목표물 찾을 때도 쓰고 레이더에 안잡히는 비행기도 찾을 수 있고... 그냥 열상 카메라라고 생각하면 편할 듯.



지난 편에 그리폰을 그리핀이라고 두 번이나 썼더라. 지금은 고쳐놓음. 그리폰 인기 없어서 그런가 아무도 지적 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