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계단을 내려온 리리스는 담배를 끝까지 태우며 자신의 랜드 스피더쪽으로 향했다.

아주 오래전 군부대에 식량을 찾으러 들어갔을때 운 좋게 구한 이 구시대의 유산은 핵과 수소 전지를 동시에 사용해서 움직이며, 지면에서 살짝 가볍게 뜨고 난 후에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데 1.5초밖에 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이 물건에 자기의 옛 동생을 기리는 뜻에서 '플라잉 하치코'라는 이름을 붙이며 아주 소중하게 관리했다. 길고 잘빠진 몸매의 랜드 스피더는 본래 나이트앤젤과 더 닮았지만 리리스가 이곳저곳에 장갑판을 덧대며 방패를 든 하치코와 더 비슷해보이게 됐다.


다행히도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뜨내기들이 하치코에 손을 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하치코 안장에 매단 가방을 열어 준비할게 있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블랙맘바용 대구경 총알 70발, 연막탄 1개, 섬광탄 2개, 신호탄 하나, 3가지 시야를 제공하는 성능 좋은 관측용 망원경 그리고 아무렇게나 쑤셔박혀있는 참치캔과 즉석 식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해서 가방 밑바닥까지 뒤져봤지만 새 담배 한갑 같은건 나오지 않았다.

작게 한숨쉬며 일을 하나 더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여분의 탄창에 탄을 채워두고 방탄복의 캐리어에 연막탄과 섬광탄을 하나씩 챙겨 헬멧을 쓰고 바이크 위에 올랐다.


시끄러운 시동음이 잠깐 들리고 곧 조용해진 하치코가 지면 위를 미끄러지듯이 날아 단말기에 표시된 B-32 구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리리스는 가면서 이 고장난 발키리를 어떻게 상대해야하나 생각했다. 평야에 자리잡은 저격수. 바보가 아닌 이상 가장 높고 유리한 위치에 벌써 자리잡고 남았을것이다. 자기를 부른거 보면 이미 앞의 추격대가 실패했다는 의미일테니까, 로자아줄이 있다면 그냥 받아내면서 전진해서 잡으면 그만이지만 그녀의 로자아줄은 은신처에 고이 누워있었다.

그녀의 신체 스펙대로라면 발키리 모델의 총알을 머리가 아닌 곳은 3~4발까지 버틸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면서 잡고 싶지는 않았다.


동이 틀 무렵 B-32구역 근처에 도착하자 콘크리트 구조물에 경고의 의미로 거꾸로 매달린 바이오로이드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만 매달려있었다. 추격대를 하나만 보내지는 않았을텐데? 리리스는 의아해하며 헬멧의 끈을 좀 더 단단히 조여매고 속도를 줄이며 총을 뽑았다.

옛 격전지로 보이는 이곳은 살짝 솟아오른 언덕에 벙커인지 잔해인지 모를것이 남아 있었다.

'저기인가?' 그때 격발음과 함께 하치코의 전지부분에 총알이 튕겨져 나갔다. 장갑판을 덧대지 않았더라면 관통당해 터졌을것이다.


리리스는 재빨리 하치코를 정지시키고 내려 그 뒤에 숨었다. 장갑판은 소총탄이 같은 위치에 3발까지 적중해도 버텨줄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생각해봤다, 격발음과 함께 총알이 적중한거면 그리 먼 위치에 있지 않을것이다. 저 반쯤 날아간 벙커가 확실해 보였다. '꽤 가까운거리...다른거 하느라 제가 오는걸 미리 못봤나 보네요.' 리리스는 잠시 하치코 뒤에 포복한 상태로 상황을 지켜봤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격발음과 장갑판에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정확히 같은 곳에 쏘느라 조준에 시간이 걸린거겠지. 앞으로 한발이지만 리리스도 그녀의 위치를 확신했다. 격발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리리스는 총을 집어넣음과 동시에 하치코를 뛰어넘어 재빠르게 달려갔다, 동이 틀 무렵이라지만 아직 어슴푸레하게 어두워 발키리가 야시 장비를 사용했을거라 생각한 리리스는 헬멧의 바이저 내림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 신호탄을 벙커와 자신의 사이에 쏘았다. 

신호탄은 발키리가 장전손잡이를 놓기 전에 땅에 착지하며 밝은 빛을 내뿜었고 야시장비를 끄고 다시 표적을 찾기 위한 시간이라면 다른 바이오로이드라면 몰라도 리리스가 발키리에게 다가갈 시간을 주기 충분했다.


리리스의 예상대로 격발음은 들리지 않았다. 리리스는 벙커의 잔해까지 도달해 벽에 바싹 붙은채 말을 꺼냈다.

"항복하실래요?"

안쪽에서는 대답 대신 총검을 부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어째서 당신들은 항상 어려운 길을 택하시는지."

상대는 이미 불안할것이다. 리리스가 여기까지 뛰어오는 말도 안되는 속도를 봤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쯤 리리스가 내는 소리와 기척을 잡으려고 매우 긴장된 상태로 천장이 있는 벽에 붙어 전방을 주시하고 있을것이다. 

그런 발키리의 눈 앞에 무언가 데굴데굴 굴러 들어왔고 발키리는 자신에게 두가지 선택만 남았다는걸 알았다. 눈을 뜰것인가 감을것인가.


벙커의 바깥으로 번쩍하는 섬광과 귀를 먹먹하게 하는 굉음이 들리고, 발키리가 눈을 뜨자 커다란 총구가 그녀의 눈앞에 들려있었다.

"체크메이트."

발키리는 여전히 총검을 쥔채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했지만 눈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그냥 일이에요, 그렇게 보지 말아주실래요?"

리리스는 총구를 발키리의 이마에 꾹 누르며 말했다.

"같이 가실래요? 아니면 끌려가실래요?"

발키리는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리리스는 어깨를 으쓱 올리고 재빠르게 그녀의 머리를 권총 손잡이로 후려쳤다. 총구가 리리스의 배에 닿기전에 발키리는 머리에 살짝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리리스는 권총을 한바퀴 돌리며 다시 총집에 집어넣고 발키리의 손에 있던 소총을 뺏어 한번 겨눠보고 등에 매었다. 그리고 그녀를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포박해 연결한 뒤에 벙커 내부와 주변에 뭔가 쓸모있는게 없는지 둘러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