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2화



반쯤 무너진 벙커 내부부터 수색하기 시작한 리리스는 격벽 문을 하나 발견하였다. 하얀색 칠이 벗겨진 흉측한 격벽 문의 녹슨 손잡이를 힘이 드는건지 천천히 돌리던 리리스는 반쯤 돌렸을때 손을 멈췄다 그리고 문 안쪽에 몸을 바싹 붙이고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격벽 문의 손잡이를 다 돌리고 천천히 열자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나며 문의 뒤쪽에서 사나운 기관총 격발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기관총은 문을 연 사람, 아니 철충을 죽이기 위해 맹렬하게 발사 되었으며 재밍 한번 나지 않고 전부 쏟아낸 후에야 잠잠해졌다. 리리스는 그 동안 격벽의 뒤에서 조용히 귀를 막고 그게 발사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벌집이 된 강화 콘크리트 기둥과 자욱한 화약연을 해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안쪽에는 문 앞에 흐드러지게 떨어진 SM10 경기관총의 탄피와 골격만 남은 바이오로이드의 시체가 보였다. 입고 있는 헤어진 복장을 보니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이었다. 아마 절망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마지막 복수라도 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이런 트랩이라도 설치해 둔거겠지. 당연하게도 벙커안에 리리스가 찾던 식량은 없었다. 구석에 가득 쌓인 재료도 알기 힘든 빈 통조림과 담배꽁초들, 이리 저리 굴러다니는 설탕과 건빵 봉지, 그리고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두고 마지막에 먹었으리라 생각되는 두 시체 앞에 놓인 쇠고기 스튜와 연유 캔까지. 남은건 없었다.


한숨을 쉰 리리스는 부비트랩을 분해해서 경기관총이라도 챙겼다. 방치된 탓에 상태가 엉망이라 참치캔까지는 아니더라도 싸구려 스프 한캔이나 담배 몇까치 정도는 바꿀 수 있을것이다. 

'뭐 그래도 트랩이 수류탄은 아니라 고맙네요.' 나란히 기대서 죽어있는 둘의 시체를 보며 그렇게 생각한 리리스는 다시 격벽문을 닫고 벙커 외부로 향했다.

그녀의 동공이 놀라움으로 살짝 커졌다. 시체가 한 구밖에 매달려있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최근에 만든걸로 보이는 무덤 몇개가 벙커의 뒤에 가지런히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소박하지만 들꽃도 몇개 놓여있었다. 리리스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 광경을 잠깐 바라보았다. 리리스도 아주 오래전에 이와 비슷한걸 만든적이 있었다. 하지만 떠오른 추억 때문에 눈물 흘리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오래된 일이었다. 다만 무릎을 꿇고 그녀의 목걸이의 끝에 걸린 속에 빈 방울에 한번 입맞추고 자리를 일어났다. 


안쪽에 철을 덧댄 전투화의 무거운 발자국 소리에 발키리는 눈을 떳다. 빠르게 시야가 돌아오자 손과 발목이 묶여 있다는것과 자신의 소총이 벽에 기대어져 있는게 보였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자신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유전자 씨앗의 어딘가가 고장나신게 확실해 보이시네요."

"..."

"죄책감쪽은 아직 안 고장나신 모양이네. 그러길래 왜 그런 짓을 했어요?"

리리스는 후훗하고 웃으며 허벅지에서 보위나이프를 꺼냈다.

"살고 싶어요?" 착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나이프의 면이 발키리의 뺨에 닿았다.

"죽여라." 발키리는 떨리는 눈빛으로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엔 실수였다지만 그 뒤에 온 자매들은 순전히 내 판단으로 죽였다. 날 죽여라."

"아아, 그래서 저한테는 그렇게 좆밥같이 잡혀주신건가요~"

리리스는 킥킥 웃으며 발키리의 뺨을 칼면으로 두어번 쳤다. 하지만 발키리의 목소리에는 동요가 없었다.

"...니 말대로 난 고장났다. 오히려 니가 온거에 감사를 하고있으니."

"당신들은 고장이 나도 정말 재미가 없네요"

리리스는 뺨에서 나이프를 떼어 내려두고 품속에서 담배갑을 꺼냈다. 그리고 발키리의 입에 물려주고 마지막 하나는 자신의 입에 물었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붙고 둘은 담배가 다 탈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전부 다 태우고 나자 리리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죽고싶다는건 바보같은 생각이에요."

아직 연기나는 꽁초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주인님이 없다고 복수를 위해 죽겠다니... 바보같지 않나요?" 리리스는 발키리를 슬쩍 봤다.

"뭘 말하고 싶은건지 모르겠군."

"뭐, 자매들을 죽였던 주인님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졌던, 죽음으로 몸을 내던지는게 이상하지 않나요?"

그제서야 발키리의 표정이 바뀌었다, 담담함에서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너희 리리스 모델들이 할 말은 아닌거 같은데"

"네~, 정답입니다."

리리스는 킥킥 웃으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전 고물 리리스에요, 완전히 고장난. 그래서 조금 밖에 안 고장난 당신이 좀 부럽네요."

그리고 살짝 손을 떨며 허리춤의 블랙맘바를 뽑아 들었다.

"뭐 그래서 당신이 꽤 마음에 들어요, 원망하지는 말아요. 이건 일이니까."

"..."

발키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격발음이 들렸다.

리리스는 들어올때와는 다르게 느긋하게 걸어나갔다.


리리스가 레오나에게 돌아온건 늦은 오후였다. 레오나는 잔에 술을 한잔 따라주며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서로 마주 앉자 리리스는 주머니에서 피로 젖은 의안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레오나는 그걸 이리저리 살펴보고 한숨을 쉬었다.

"수고했어, 총은?"

"아, 제가 잘못 쏴서 박살이 났더라고요."

"아깝네. 여기 약속했던거야. 오늘은 여기서 하루 쉬고 떠나도 좋아. 온수가 나오는 숙소를 준비했어."

레오나는 테이블 위에 약속했던 티타니움 합금판을 한장 올려놨다.

리리스는 오래있지 않고 독한 술 몇 모금을 넘기고 합금판을 챙긴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감사히."


플라잉 하치코와 짐은 관사에 맡겨두고 숙소로 가는 길에 경기관총을 처분해 스프 한 캔과 담배 3까치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한 리리스는 스프캔을 따 약한 불에 올려두고 창밖으로 뉘엇뉘엇 져가는 해를 보았다.

"하루가 또 지나가는데... 사는 의미는 더 찾기가 힘들어지네요,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