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카호. 철충에 맞서는 마지막 인간을 필두로 한 저항군의 본거지이자 기함.




그리고 그 오르카호의 사령관이자 마지막 인간은 휴게실에서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주인님."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리리스? 여긴 어쩐 일로?"




리리스라고 불린 은발에 제복을 차려입은 여성은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에이, 전 경호 담당이잖아요. 경호 대상인 주인님을 따라 다니는 건 당연하죠."




남자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리리스를 바라보며 답했다.




"너, 반지에 대해서 말하러 온 거지?"




"어머."




"어머는 무슨. 요즘 업무 말고 다들 그거 이야기만 꺼내거든?"




반지. 얼마 전 탐사대가 가져온 멸망 전의 물자 속에 섞여 있던 서약의 반지 이야기다.




사실 주 용도는 착용한 바이오로이드의 힘을 끌어내는 보조 도구지만 그 외형과 이름 덕에 멸망 전 부호들은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바이오로이드에게 이 물건을 끼워 주려고 거금을 아낌없이 지불했었다.




내재된 힘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주인과 서약을 하는 반지라니. 오르카의 수많은 바이오로이드가 이걸 탐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하지만 사령관은 당장 이걸 끼워줄 바이오로이드를 선택하지 않았다.




친한 바이오로이드는 꽤나 많았지만 특별히 총애하는 바이오로이드가 있는 건 아니었고 그 상황에서 대뚬 적당한 이에게 끼워주기엔 다른 이들이 들고 일어날 게 뻔했으니.




"에이, 그렇게 고민하지 마시고 주인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 항상 있는 저에게 끼워주시면 되잖아요~"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한 문제였으면 이미 진작에 해결되지 않았을-"




"랄라랄라~ 짐이 행차하신다네~"




사령관과 리리스가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을 무렵 휴게실 앞 복도에서 노래를 부르며 한 꼬마 바이오로이드가 지나갔다.




"LRL 녀석, 오늘따라 기분이 엄청 좋아보이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겠죠. 아이들은 다 그렇잖아요."




안대를 쓴 꼬맹이 - LRL은 기분좋게 흥얼대며 복도를 지나가다 앞으로 왼손을 뻗어서 포즈를 취했다. 마치 자신이 낀 반지를 자랑하려는 듯이.




"...근데 주인님, LRL에게 무슨 장난감 반지라도 주신 건가요?"




"아니, 그럴 리가. 에이미나 다른 누군가가 선물로 줬겠지. 근데 많이 본 거 같은..."




"반지의 진조~ 사우만 프린세스께서 중간계를 지배하실 거라네~"




그렇게 흥얼대며 지나가는 LRL의 왼손에 낀 반지의 모양을 사령관은 잠시 생각하다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 저게 왜 저 녀석 손에 있는거야?!"




"어머."




서약의 반지. 분명 사령관실 탁자에 뒀을 그 반지는 자신을 반지의 진조라고 부르는 꼬맹이의 손에 끼워져 있었다.




리리스는 사령관을 바라보며 불만스런 표정으로 볼을 부풀렸다.




"너무해요 주인님. 아무리 그래도 어린 아이와의 서약은 좀 심한 거 아닌가요?"




"아냐! 난 절대 누구에게도 반지를 준 적이 없어! LRL이라면 더더욱 줄 리가 없지!"




사령관은 애써 해명했지만 리리스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녜요. 주인님의 취향이니까 착한 리리스는 다 이해할 수 있어요. 비록 주인님의 취향이 멸망 전 구인류와 비슷하다고 해도 리리스는 주인님을 섬길게요."




"사람이 말하면 좀 믿어! 그런 취향 없다니까!"




"어머, 벌써 컴패니언 중간 점호 시간이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착한 리리스는 점호를 마치고 돌아올게요~"




"리리스! 야! 내 말을 좀 믿으라고!"




리리스는 웃고 있었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휴게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사령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사색에 잠기기 시작했다.




'이거 큰일났다. 빨리 회수하지 않으면 난 끝이야!'




함내에 사령관이 어린 아이에게 반지를 줬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 여파는 커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성인 바이오로이드. 특히 지휘관급 개체들은 자신들의 매력이 그 꼬마아이보다도 못하냐면서 청문회를 요구할 게 분명했고 어리다는 이유로 번번이 동침을 거부당하고 있는 닥터는 이걸 빌미로 본격적으로 들이댈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사령관의 위상이 저항군을 통솔하는 훌륭한 분에서 어린아이를 탐하는 구인류 수준으로 추락하게 되는 건 분명한 문제였기에 빨리 수습해야만 했다.




신속히 미래에 일어날 대참사를 예지한 사령관은 즉시 LRL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똑 똑.




"짐의 처소를 침범하려는 이가 누구더냐!"




노크를 하자 안에서 LRL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야, 문 좀 열어줘."




"궈, 권속? 지금은 안 된다! 돌아가라!"




LRL은 당황했는지 순간 말을 더듬으며 답했다.




"미안, LRL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들어갈게."




사령관은 그대로 카드키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LRL이 당황한 표정으로 사령관을 맞이했다




그리고 LRL이 왼손에 낀 반지. 확실히 서약의 반지다.




"권속이여, 짐의 처소는 허가 없이 함부로 침범해도 되는 곳이 아니다."




"LRL, 그 반지 말인데 그거 원래 내 거라 돌려받으러 온 거야."




LRL은 깜짝 놀라며 반지를 낀 왼손을 등 뒤로 감추며 답했다.




"무무무 무슨소리냐! 이것은 반지의 진조인 사우만 프린세스의 유일반지이니라! 권속의 물건이 아닌 것이다!"




"그럼 반지 확인만 할테니 일단 보여줘!"




"절대 안된다!"




"한번만 보면 된다고! 제발 보여줘!"




사령관은 냅다 LRL의 왼팔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평상시의 그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해당 물건의 가치와 회수하지 못했을 경우에 닥쳐올 여파에 그런 이성적인 판단은 사라졌다.




LRL도 지지 않고 팔을 뒤로 당겼다. 본래라면 어린 바이오로이드인 LRL이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된 인간인 사령관의 힘을 당해낼 수 없겠지만 반지의 힘으로 강화된 신체능력과 사령관의 돌발행동에 깜짝 놀란 LRL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둘 모두 낑낑대며 그 자세 그대로인 상태가 계속됐다.




"놔라, 권속! 짐에게 계속 이러면 파멸의 마견이 도래할 것이다!"




"못 놔... 확인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뭐, 권속이 죽어?!"




순간 당황한 LRL이 문득 힘을 빼면서 양자간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대로 LRL을 당기던 힘 그대로 사령관은 넘어지며 LRL을 잡아당기며 내동댕이쳤다.




"흐앗!"




"으헉!"




그리고 방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진 LRL과 넘어진 사령관.




"LRL! 괜찮아?!"




사령관은 즉시 일어나 LRL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LRL은-




"으...으흑....짐에게 왜 이러는 것이냐 권속..."




갑자기 달려들었던 사령관에 대한 두려움과 내동댕이쳐진 아픔으로 울기 시작한 LRL.




사령관은 LRL을 달래기 시작했다.




"아니, 울지 마.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뚝하자 뚝-"




"시티가드 도착! 이게 대체 무슨 일-"




그 사이 소동이 일어난 걸 감지했는지 켈베로스가 완전 무장 상태로 방에 들어왔다.




"아."




"사령관님...?"




켈베로스의 눈에 들어온 건 뭔가 난장판이 된 방과 구석에 내동댕이쳐져서 옷이 흐트러진 채로 흐느끼는 LRL.




그리고 그 앞에 다소 흥분한 듯한 사령관까지.




"아, 켈베로스. 이건 다른 게 아니라...헉."




사령관은 무언가 해명을 하려다 입을 다물어 버렸다.




켈베로스의 시선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생물을 보는 눈이었다.




그리고-




"흐윽...권속이...권속이...나를!"




누가 그랬던가. 눈물이 증거라고.




"사령관님..."




"아, 아냐! 그런 게 아니라고! 이건 내가 제대로 잘 설명할 수 있-"




"변태!!!"




사령관이 미처 말하기도 전에 켈베로스는 진압봉을 그대로 사령관에게 휘둘렀다.




파지지지직!




"끼야아오오오오옥!!!!!!!"




몽둥이의 타격음과 사령관의 비명이 방 내에 울려퍼지며 사령관은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것도 파혼에 포함 되나?

그 전에 파혼이란 주제를 요렇게 표현해도 되나?

아무튼 일단 올려보는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