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프 너머로

 

 마지막 날에, 그 외계의 벌레들은 기계를 파먹고, 인간을 죽였다. 그리고 하늘이 검고 붉은 무리로 덮이자 거대한 인간의 도시들 또한 그 빛을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때 각종 기계와 사람의 소음으로 시끄럽게 숨쉬던 도시는 죽은지 오래고, 이제는 회색빛 정적만이 흐르는, 싸늘한 돌덩이들의 무덤만이 남아 있었다. 

지금 T-14 미호가 엎드려 있는 폐건물의 옥상에서 보이는 것은 그게 다였다. 죽어버린, 묘비가 되어버린 텅 빈 건물들.

 

휴…

 

더러운 분홍 머리의 소녀는 한숨을 쉬며 허리춤의 수통을 더듬거렸다. 미호는 스코프를 계속 주시하면서 익숙하게 녹슨 수통의 뚜껑을 튕겨버렸다. 꿀꺽꿀꺽. 소녀 저격수는 물을 홀짝거리면서도 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린 턱선을 타고 차가운 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만약 하늘에서 누군가가 미호를 보고 있다면 얼마나 크게 웃어대고 있을까? 미호의 머리 위로는 탁 트인, 푸른 하늘이 온 도시를 덮고 있었지만, 소녀의 관심은 동전 하나보다도 좁은 유리조각에 쏠려 있었다. 마치 온 집안이 불타고 있는데도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람처럼, 소녀의 눈에는 기이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지금 미호는 분명히, 다 부서져가는 건물의 옥상이 아닌, 스코프 저 너머- 푸른 잔디밭 위에서 거닐고 있었다.

 

미호의 시선에 끝에는 자그맣고 새파란 잔디밭이 있었다. 미호가 지금 엎드려 있는, 회색 콘크리트 폐건물과는 정 반대로 생기가 넘치는 잔디밭이. 그 아름다운 잔디밭 위에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거닐고 있었다. 아주 어린 소녀부터, 장신의 미녀까지. 하객들은 여자밖에 없었지만, 모두가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정말 다들 진심이었을까?

 

미호는 쓰라리게 웃었다. 사령관이 드디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식당의 모두가 웃고, 환희하고, 신나게 떠들었다. 그 경호대장조차도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띄우며 자신의 주인을 축하하고 있었다. 모두가... 아마 한 사람만 빼고.

 

정말 나만 믿지 못했던 걸까 착각이었던 걸까?

 

그 동안 스코프 너머로, 미호는 항상 사령관의 옆에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미호는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억지로 미소 지으며 축하했다. 모두 축하하고 기뻐하는 분위기 속에서, 가면을 쓰고 웃었다.

 

에이됐어.

 

미호는 고개를 털었다. 이제 다 끝난 일, 더 이상 생각해서 무엇하랴. 미호는 홀린 듯이 다시 스코프 너머로 돌아갔다. 잔디밭 좌우로 놓인 새하얀 장식품들.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바람에 흔들린다. 하얗고 거대한 책상들과 그 주위에 놓인 접이식 의자들. 장난스러운 미소를 띈 소녀들이 몰래몰래 책상 위의 음식들을 주워 먹고 있었다. ... 드라코핀토분명 엄마한테 혼날꺼야

 

그리고 그 사이로,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미호의 입가에 이상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 미호는 분명 그 곳에 있었다. 예식장의 잔디밭 위에서 미소지으며 걷고 있었고, 장식품들 사이로 뛰어다니며 웃음을 터뜨렸다. 핀토와 드라코와 함께 음식들을 훔쳐먹다 엄마- 홍련에게 혼나면서도 행복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붉은 길을 걸을 때까지, 한 남자가 계속 미호의 옆에서 걷고, 먹고, 웃고 있었다.

 

삐익-!

 

망상에 빠져 있던 미호의 귀에 날카로운 경고음이 들려왔다. 미호는 황급히 귀에 들어있는 무전기를 수신 모드로 바꿨다. 이윽고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경호대장 리리스. 곧 신랑신부가 입장합니다. 경호팀은 경계를 늦추지 마세요!”

 

다시 현실로 돌아온 미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배 밑에서 차가운 콘크리트의 감촉이 느껴졌다. 너무 오랜 시간 한 곳에 머무른 탓에 골격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미호는 찡그린 얼굴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미호 주위로 흙먼지가 잔뜩 일어났다. 요란하게 재채기를 하는 것도 잠시, 미호는 황급하게 스코프를 고쳐 잡았다. 이걸 놓칠 수는 없지!

 

푸른 잔디밭 사이로, 융단 위를 걸어오는 신부와 신랑의 모습이 보였다. 눈처럼 순수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옆에서 홍조를 띄우고, 부끄러워하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

 

미호는 스코프의 배율을 조였다. 확실히 잘생겼어흐리게 보이던 그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미호는 콧노래를 부르며 미소 지었다.

 

“...오늘  자리에... 영원한...”

 

 스코프를 살짝 돌리자, 검은 수녀복을 입고 주례를 보는 여자의 입술이 보였다. 

...영원한...블라블라미호는 독순술로 읽어낸 주례를 웅얼거리며 따라했다. 동시에, 그녀의 오른 손은 먼지로 더러워진 분홍색 저격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달칵.  

 

 “... 맹세합니까?”

주례의 마지막 순서. 미호의 입술에 함박 웃음이 떠올랐다. 스코프 너머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가 보였다. 분홍 머리의 소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

 “네! 맹세합니다!”

 

타앙! 삐이익-!

 

한 발의 총성이,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귀에서는 미친 듯이 경고음이 울린다.

 

 “... 비상사태 발생비상사태 발생저격이다위치를 파악해라!”

 

시끄러워라.

미호는 그대로 귀에서 이어폰을 잡아 뽑았다. 거칠게 집어던져진 이어폰이 저 빌딩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미호는 흥미가 없다는 듯이, 그대로 저격총도 빌딩 밑으로 차서 떨어뜨렸다. 

미호는 그대로 옥상 위에 누웠다. 하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



남의 연애를 스코프로 맨날 보면 ㅈ같지 않을까?

이 글의 미호는 지금 탈영한 상태임. 나름 반전이라고 넣은 건데 잘 전달됬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