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추억 여행중 읽은 소설SKT 와 비슷한 묘사가 많이 들어간 글입니다.





오르카호의 유일한 사령관으로서 업무량은 살인적일 정도다.

이유야 말할 것도 없이, 쉼없이 밀려드는 서류에 최종 승인 도장을 찍을 사람이 나 혼자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회의를 마치고 사령관실로 들어온 내 손에는 초코바나 참치캔 같은 것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최고의 요리사를 곁에 둔 주제에 이런 간편식으로 식사를 때우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웃기지만 시간은 없고 일은 많으니 방법이 없다.

나는 언제나처럼 봉투를 내려놓고 옷을 벗었다.

그런데 막 셔츠를 벗어던지려는 찰나, 

나는 그대로 굳어버려야 했다.



"....".



누가 지금 날 봤더라면 놀란 토끼눈 이라는 진부한 비유를 꺼냈을 거다.

내 당황한 시선은 소파위에 걸터앉아 있는 분홍머리의 소녀를 향해 있었다.


"에...에밀리?"


콘스탄챠는 어디가고 에밀리가 여기에? 

하는 내 의문 가득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머쓱해진 나는 다시 옷을 입고는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옷가지들을 발로 슥슥 밀어 치웠다. 

그런 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에밀리가 조용히 다가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사령관, 부탁할게 있어서 왔어."


나는 난데없는 방문객에 대해 호의를 베풀 정도로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였지만 에밀리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에밀리는 환한 표정으로 손을 쪽 내밀었다.

그녀의 작은 손에는 '동침권'이라고 적힌 종이 몇장이 고이 쥐어져 있었다.


"...."


순간 아스널의 '와하하하' 하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은 내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난 잠시 잊었던 피로가 밀려오는것을 느끼며 머리를 짚었다.

하아..이제 이런말 하기도 지치지만..

아스널! 이번엔 애한테 대체 뭘 가르친거야!

으르렁거리는 듯한 내 표정을 본 에밀리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안되는..거야…?"


"...그게…"


난 난감한 표정으로 우물쭈물거렸다. 

오르카 호 안에서 화폐로 쓰이기도 하는 이 동침권은 모종의 약속 같은 것이라,

내 권한으로 찍어낸 것이라고 해도 함부로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힐끗 시선을 돌려 캐미솔 사이로 비치는 뽀얀 살결을 훔쳐보았다. 

조금 더 고개를 내리자 짧은 바지 탓에 드러난 허벅지가 눈에 들어온다. 

언제 보아도 감탄이 나오는 매력적인 몸매다.

하지만…


"음...미안해 에밀리."


미안한 말이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녀의 존재는 안드바리나 LRL과 다를바 없었다.

그러니까 도무지 욕정이 끓어오르지가 않는단 말이지.

거절의 말에 시무룩해진 에밀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사령관이랑 같이 꽃놀이 가고 싶었는데…"


"그러니까 역시 그건 좀 이르다고 생각해..어?"


우리는 눈을 깜빡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2


동침권에는 작은 소원을 들어줄수 있는 기능도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실제로 그것으로 참치나 초콜릿을 받아가는 아이도 있었으니까.

상황을 파악한 나는 즉시 자리에 앉아 펜을 굴리기 시작했다.

이쯤 되는 자리에 앉아있으면 잠깐 나가는 것에도 복잡한 서류가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그때 에밀리의 손이 펜을 슬쩍 잡아챘다.


"사령관..이거.."


"어..어?"


나는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또 에밀리다운 엉뚱한 행동이었다...일줄 알았는데 쭉 내민 손에는 도무지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서류 뭉치가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콘스탄챠가 이거..읽으면 산책 갈수 있다 했어."


에밀리는 묘하게 기대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앞에 종이들을 들이밀었다.

서류에는 철충이 소탕된 지역이나 호위를 맡을 수 있는 인원같은 외출에 꼭 필요한 목록들이 정성스럽게 적혀 있었다.

대부분의 단정한 글씨는 콘스탄챠의 것이었지만 그 중 자기 주장이 강해 보이는 글씨들은 분명 에밀리의 것이었다.

서류를 훑어 보던 나는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로 감탄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짜여진 문서라는 것도 놀랍지만 콘스탄챠의 도움을 받았다 해도 이것을 단 하루만에 완성했다는 신속성은 내가 봐도 대단했던 것이다.


"...사령관이 도장만 찍어주면 된다고 했어."


내가 멍하니 서류를 바라만 보고 있자 에밀리가 재촉하듯 말했다.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도장을 찍으려던 내 시선이 산처럼 수북하게 쌓인 서류더미에 고정되었다.

'오늘까지 처리해야 해요' 라는 콘스탄챠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했다.

하아, 몇일 뒤라면 몰라도 역시 지금 당장은 무리다.


"저..미안하지만 밀린 일이 너무 많아서…"


내 말에 그녀는 맹한 분홍빛 눈동자로 '그래서?' 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라니! 콘스탄챠가 검수한 서류를 들고왔다고 해도 오늘 이 일 처리를 못하면 오르카호가 당장 마비된다니까 그러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마주보는것이 아닌가.


...내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콘스탄챠가 쓴 서류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말이지.


"....정말 나가자고?"


"응."


"...콘스탄챠도 이거 알고 있는거지?"


"응."


"...허락도 받았고?"


"응."


"그..그럼..가지 뭐."


나는 뭔가에 홀린 기분으로 주섬 주섬 옷을 주워 입었다.





3




우리는 포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길게 뻗은 길을 따라 걷자 달콤한 꽃향기가 섞인 바람이 솔솔 불어왔고, 겨울이 다 지나가 따뜻해진 햇살이 그 위에 반짝반짝 뿌려지고 있었다.


“사령관, 저기, 저기.”


에밀리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작게 폴짝거리며 손가락으로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난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며 에밀리가 다치지 않도록 손을 꼭 잡아주었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잔뜩 피어난 대다가 나비들까지 날아다니는 걸 보니 확실히 봄이라는 느낌이 물씬 들긴 한다. 하지만...


"하아…"


 나는 에밀리가 듣지 못하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내 마음에 여유가 있었더라면 '드디어 봄이네, 놀러나오기 좋은 날씨구만' 하며 즐거워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격무에 시달린 내 머리는 '꽃잎과 꽃가루 때문에 정찰이 힘들어지겠군' 하는 생각만 멋대로 떠올릴 뿐이였다.


"..."


돌아가는대로 새로운 정찰계획을 짜야겠군.

나는 머리에 달라붙어오는 꽃잎을 때어내며 그렇게 생각했다. 

굳이 장황한 정론을 늘어놓지 않더라도 철처한 정찰은 승리를 위한 필수요소니까.

나는 안전한 항로를 계산하며 걷다가 이젠 만성이 되어버린 두통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 에밀리의 발걸음이 멈췄다. 

나 역시 그녀와 손을 잡고 있던 탓에 동시에 멈춰서야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꽤 많이 걸어온 듯 주변의 풍경은 처음 산책을 나섰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적어도 오르카호가 정박된 곳 근처에서 벚나무를 본 적은 없었으니까 이건 확실하다.

멍한 눈빛으로 늘어선 나무나 꽃 같은 것들을 바라보고 있자 에밀리가 내 허리를 콕콕 찔렀다.


"사령관...도착했어."


"...”


도착이라고? 이 산책에 목적지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고 생각하던 내 몸이 흠칫하고 굳었다. 


“...저기..이거…말인데.”


난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가늘게 떨리는 눈빛으로 에밀리를 돌아보았다.

왜냐하면 에밀리가 가리키고 있는 커다란 나무 밑에하트 모양으로 소복하게 쌓인 벚꽃잎 더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는 시트까지 덮여 있었고 주변에 늘어선 양초들은 수상한 향을 풍기고 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자연경관으로 봐주기는 어려운 풍경이었다.

용케도 내 감정을 읽은 에밀리가 작은 목소리로 ‘아스널 대장이랑 파니가 도와줬어’ 하고 속삭였다.


‘저 악취미적인 모양의 리본은 대체…’


나는 새삼 캐노니어 부대의 막내사랑을 느끼며 화려한 리본들로 꾸며진 꽃잎 침대를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르카호에서 걸어서 삼십분도 더 걸리는 숲속에 러브호텔풍 침대라니 이건 광기에 가깝잖아!

하지만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예의 그 '침대' 위로 쪼르르 달려가 앉은 에밀리가 옆자리를 팡팡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여기..같이 앉아.”


...솔직히 가기 좀 무서웠지만 에밀리의 부탁을 거절할 순 없었다.

그 짧은 말에 난 엉거주춤 다가가 앉았고 그런 내 모습을 만족스러운 미소로 바라보던 에밀리는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저 낡은 자루, 아까부터 신경 쓰였어. 

아무리 생각해도 봄 소풍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런데 설마, 아스널.. 이상한 거라도 넣어둔건 아니겠지.

잠시 후 그녀가 그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까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것은 소풍에 꽤 어울리는 통에 담긴 도시락이었다. 


쉽게 쏟아지지 않도록 꼭 덮인 뚜껑을 열자 정성스럽게 준비했을 음식들이 하나하나 그 모습을 보였다.

잘 익은 딸기와 양배추를 썰어 발사믹 드레싱을 양껏 뿌린 신선한 샐러드, 그리고 그것에 아몬드와 두부를 넣어 포만감을 더했다.

늘상 먹어 자칫 질릴 수 있는 참치 대신 연어를 훈제시켜 흰 양파와 곁들인 크로와상 샌드위치는 한 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있었고, 투명한 유리병 가득 담긴 음료수는 기포를 톡톡 터트리며 청량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직접 만든 건가..’


난 뿌듯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에밀리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어서 먹어보란 듯한 눈빛에 못 이겨 집어든 샌드위치를 슬쩍 베어물자 고소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맛있어..”


생각보다 훨씬 더 훌륭한 맛이였다.

솔직히 발렌타인데이의 악몽 때문에 조금 걱정했는데...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초콜릿 괴물과의 끔찍한 추억을 털어버리고 샌드위치를 한입에 꿀꺽 삼켰다.

식도를 타고 음식물이 내려가는 느낌이 들며 묘한 만족감이 차오른다.


“아...”


적은 양의 음식에 자극받은 위가 꼬르륵 소리를 내며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나는 오늘 내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


나와 단 둘이 식사를 하게 된 에밀리는 무척이나 즐거운 것 같았다. 

비록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매우 서툴지만 쫑긋거리는 머리카락이라던가 뺨에 떠오른 홍조 만으로도 그녀가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아주 오랜만에 인스턴트가 아닌 음식으로 느긋하게 식사를 하게 되어 그녀 만큼이나 즐거운 기분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에밀리도…”


준비한 음식의 양은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후식으로 준비한 과자까지 모조리 먹어치운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두드렸다.

정신없이 먹은 탓에 주변은 빈 그릇과 음식 부스러기로 엉망이였다.


물론 잔뜩 어지르고 떠난다 해도 뭐라고 할 사람도 바이오로이드도 없었지만 놀러온 주제에 쓰래기를 버리고 가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나는 주변을 치우려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에밀리가 나를 가로막았다.


"사령관은..앉아 있어.." 


"어,..나도 도와줄게."


"괜찮아." 


답지 않게 단호한 목소리에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이건 그러니까 나름…


'..에밀리의 배려?'


나는 열심히 뛰어다니며 어질러진 유리병이나 컵이니 하는 것들을 주섬주섬 치우고 있는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굳게 앙다문 입에서는 절대 나를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기특한 의지가 엿보였다. 

순식간에 주변을 깨끗이 청소한 에밀리가 뿌듯한 얼굴로 침대로 올라왔다.


"...이제 나도 잘 할 수 있어."


"응..그러네..하하."


초콜릿 대신 내 손을 썰고 먼지떨이 대신 제녹스로 청소하려던 에밀리의 기행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이지 장족의 발전이다.

나는 기특해하는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었고 에밀리는 고양이처럼 엉겨붙어왔다.

한동안 잊고 있던 기분좋은 포만감이 몰려온다.


“하암…”


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고는 침대 위에 풀썩 누웠다. 

에밀리는 이미 내 어깨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두 사람의 무게에 눌린 침대에서 떨어진 꽃잎이 날리며 벚꽃 향이 피어올랐다.

선선한 나무그늘은 내리쬐는 태양을 막아주고 있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변을 빈틈없이 지키고 있는 몽구스 팀 덕에 주변엔 철충은 커녕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휴가를 받은 듯 느긋한 기분이었다.

문득 난 피로에 찌든 내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에밀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별의 아이가 나타난 이후 긴장해서 조금 무리 하긴 했지.

난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끔..이렇게 쉬는것도...좋을지도.."


난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 옷자락을 꼭 붙잡고 잠든 에밀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확실히 같이 있으면 그 특유의 맹함이 전염되는 느낌이 드는 아이다.

그 느긋함이 옮아버린 듯 내 머릿속에도 이런 생각이 솔솔 피어올랐다.


'...나도 한두시간 정도는 자도 괜찮겠지?'


그리고 그 생각이 끝나자 마자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고, 나는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5




"으으...!"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물감으로 칠한 듯 새카만 어둠이었다. 

화들짝 고개를 들자 탁 트인 하늘 위로 별빛이 강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던거지?

분명 약속된 시간은 네시간 정도였는데..

황급히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려던 나는 허둥거리다 굴러 떨어질 뻔했다.


"으악!"


나는 허공에 마구 다리를 휘저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땅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허둥거리던 나는 땅바닥에 머리를 찍기 직전 간신히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이..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땅이 저절로 움직이다니..

황망한 표정으로 움직이고 있는 바닥을 내려다 보자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제녹스였다.

난 그제서야 주변의 풍경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별빛이 녹아든 바람이 에밀리의 뺨과 긴 머리를 쓸고 지나가고 있었다.

밤의 어둠 때문일까, 바람이 흩트린 분홍빛 머리칼 사이로 그녀의 인형같은 얼굴이 유달리 창백해 보였다. 

마치 흰 물감을 마구 짜내서 그린 초상화 처럼.

그녀는 오도카니 앉아 어둠 밖의 한 지점을 응시하다가 곧 생긋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사령관, 일어났어?"


"어..어.."


난 잠이 덜 깬 얼굴로 흐르는 침을 닦으며 멍청하게 답했다.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펴자 기분 좋게 뚜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말끔하다고 할 순 없었지만 과로와 수면 부족으로 쌓여 있던  피로도 조금 날아간 것 같다. 

낮잠이 이렇게나 도움이 될 줄이야.


“오늘...재미있었어?”


그 말에 하루종일 나를 위해 애썼던 에밀리의 모습들이 스쳐지나갔다.

확실히 그녀 덕분에 나는 문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봄 소풍을 즐길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내 희미한 미소를 본 에밀리 역시 마주 웃어 주었다.


“응..다행이야.”


활짝 핀 에밀리의 표정 넘어로 출발할 때 보았던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난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푸근함을 느꼈다.



6



돌아오자마자 날 반긴 것은 수북히 쌓여있던 서류더미였다.

내가 나가있는 동안 자가 증식이라도 했는지 책상 가득 쌓여있던 종이 더미는 바닥까지 흘러넘치고 있었고,

그 서류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던 콘스탄챠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는 일은 의외로 일어나지 않았다.


“...?”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서류는 전부 사라져 있었다.

 다소 지저분 했던 방 역시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지?’ 하는 표정으로 뒤따라 들어온 에밀리를 돌아보자 분홍빛 눈동자가 빙글 돌며 슬쩍 시선을 피한다.

확실히 처음 보았을 때보다 표정이 풍부해졌네, 확실히 보기 좋...아니 이게 중요한게 아니지.

내 생각이 맞다면 저건 뭔가를 숨길때 짓는 표정이다.


“에밀리? 여기 있던 서류...?”


“..그거 중요한거야?”


“당연하지!”


순간 난 에밀리가 방해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얼쩡거리던 파리에게 제녹스를 쏘려던 것을 떠올렸다. 

설마, 정말 그 이유 하나로 여기있는 서류를 싹다 태워버린건 아니겠지?

난 창백한 표정으로 사령관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 피곤한 몰골을 본 에밀리의 부탁으로 콘스탄챠와 라비아타가 밀린 서류를 모두 처리해 주었다고 한다.


하아, 장난까지 칠 정도로 성장하다니….

역시 애들이 크는 속도는 어마무시하구만.

그래도 늘어난 장난기만큼 남을 생각하는 마음도 같이 성장한 것 같아 다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베시시 웃는 에밀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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