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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딱 3분 후.

리제는 침대에 쭈그리고 엎어져서 자기 머리를 양손으로 쥐어박고 있었음.

미친년, 미친년. 하는 자책과 묘하게 리듬감있게 어우러지는 소리였지.

제정신(?)을 차리게 된 계기는 의외로 간단했어.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그날 리제의 호위를 하고 있던 하치코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무슨 일이시냐고 물어봤거든.


- 아, 사령관과의 야스에 적응하기 위해 사령관 방에서 잔향을 한껏 맡으며 자기위로를 하려고 했단다.

라는 답이 뇌리에 떠오르는 순간 말 그대로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지.

사방팔방으로 눈동자를 굴리다가 수고가 많은 하치코한테 참치캔을 쥐어주러 나왔다는 즉석에서 튀어나온 변명을 하고,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못까지 박은 다음

다시 방에 틀어박혀서 지금까지 삽질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나마 마주친 게 하치코여서 천만 다행이다. 리리스는 둘째치고 묘하게 독설가 기질이 있는 페로였어도 무사하진 못했을 거다... 같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당연히 딱히 위안이 되지는 않았음.


그렇게 한참 궁상을 떤 덕분에 어느 정도 이성은 돌아왔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도 방금 전 일은 자폭에 가까웠어.

가뜩이나 브라우니를 위시한 오르카 호 내부의 이슈메이커인 몸.

정말로 사령관 방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왔으면 '기분나쁜 스토커 변태 부관'으로 소문이 퍼질 것이 뻔했으니까.


그렇다고 이 천금 같은 시간을 그냥 번뇌하다 보내는 것도 안될 말.

별 수 없다.

정면돌파를 하자.


머리를 너무 굴리다 과부하가 일어나서 엉뚱한 방향으로 폭주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도 오래간만의 일이었지만,

리제가 그걸 알아챌 도리는 없었지.


*   *   *


-라고 리제가 생각하는 동안, 알렉산드라는 아직 와병중인 사령관한테 간략한 브리핑을 하고 있었음.

리제 양이라면 진짜로 주인님의 방에 갈 확률도 적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하치코가 파수였던 것이 문제였을까요, 라는 코멘트까지 더해서.

(하치코가 말한 게 아니라 애초에 알렉산드라가 지켜보고 있던 거니까 약속을 어긴 건 아니기도 했음.)


뭐 하는 거야, 라고 사령관이 어이없어하거나 말거나 알렉산드라는 더없이 당당했다고 할까,

오히려 사령관을 질책하듯 말을 꺼냈어.

야스를 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주인님과 리제 양의 사이라면 연인간의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기능도 있지 않겠느냐.

지금의 리제 양은 그 소통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들으면 또 그럴듯해서 사령관도 진지한 자세로 되물었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알렉산드라는 대답함. 일단 내일 리제 양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고 결정하시지요.

어차피 며칠은 더 누워 계셔야 할 것 아닙니까.


참으로 리제가 알았다면 당장 유서를 쓰러 달려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

콘스탄챠와 의료 담당으로 남아있던 다프네가 그 말을 듣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았다면 유서고 나발이고 목부터 메달았으리란 점은 넘기더라도.


*   *   *


그리고 다음 날, 리제는 자신의 간호 시간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용건을 꺼냈음.


- 쓰던 이불 한 채라도 빌려주세요.


뭔가 요란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난 다음 다프네가 연신 사과를 하고 페로가 한숨을 내쉬면서 정리를 도와주거나 말거나, 이미 사고회로가 쇼트된 리제에겐 망설임이 없었음.

알렉산드라에게 주의를 듣긴 했지만 이 요구는 또 예상 외라 사령관은 몇 번 입을 벙긋거린 후에야 이유를 물을 수 있었어.

그리고 리제는 간단하게 대답했지.


- 외로운걸요.


어머, 하는 콘스탄챠의 감탄사는 넘겨두고, 사령관은 리제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시원스럽게 알겠다고 허락해주고

리제는 도와주겠다는 주변의 권유도 뿌리치고 혼자 이불을 끌어안은 채 당당히 개선함.


이미 그 시점에서 뇌내마약이 뿜뿜해서 반쯤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걸 눈치챌 수 있었으면 뇌내마약이 아니지.

그렇게 리제는 자기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사령관의 이불을 던지듯 펼친 다음 바로 다이브함.

그대로 구르면서 몸을 둘둘 휘감으니까 세상이 이리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는 거야.


한참을 발그레해진 얼굴로 싱글벙글하자니 알렉산드라의 '숙제'도 떠올랐지만 리제는 깔끔하게 무시하기로 했음.

지금 당장은 이것만으로도 감당이 어려울 만큼 만족스러웠던데다가,

굳이 순도(?)를 떨어뜨리는 건 그것대로 아까운 짓이니까.


그렇게 되어서 리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꿀잠을 자게 됨.

그리도 신경쓰던 소문이 '기분나쁜 스토커 변태'에서 '당당한 사랑꾼 변태'로만 바뀐 채 고스란히 퍼져나갔다는 것도,

사령관이 쾌유한 다음 리제의 '외로움'을 벌충해도 단단히 해야겠구나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도

오늘의 리제가 감당할 일은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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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클리셰대로 리제가 너무 몰두하다가 사령관한테 걸리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좀 더 좋은 시츄에이션이 생각났기에 보류하겠스빈다

기대는 하지 말고 기다려 주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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