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별이 떨어진다.

고요한 밤하늘을 가르며 별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존재를 한껏 빛낸다.

그 광경을 보는 메이가 있다.

심판의 옥좌에 올라 오르카의 상공을 정찰하면서,

별다른 위협이 없음에도 가슴 한구석에 쌓이는 불안과 답답함을 안고는 이런 자신을 비춰줄 또 다른 별을 꿈꾼다.

차가운 파도소리.

불규칙하게 귀를 간지럽히는 벌레의 울음소리.

메이는 바닷바람이 자신의 볼을 간지럽히는 게 거슬리는지, 한숨을 작게 쉬고는 옥좌를 이끌고 오르카 호로 돌아갔다.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어, 사령관"


보고를 들은 사령관의 시선이 한곳에 멈춘다.

평소보다 살짝 처진 어깨는 기운 없는 메이의 목소리와 함께 가벼운 걱정을 불러왔고,

아무리 둔감한 사령관이라도 안부를 물을 최소한의 눈치는 있었다.


"오늘따라 힘이 없어 보이는데, 걱정거리라도 있는 거야?"


"...딱히 그런 거 없거든?"


메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턱을 올려 가볍게 쏘아붙이고는 도도하게 방을 나섰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의아해하는 사령관을 뒤로 두고 문이 닫히자, 옆에서 벽이 말을 걸었다.


"반사적으로 쏘아붙이는 버릇은 좀 못 고치십니까?"


"뭐야, 언제부터 거기 있있어?"


"몇 분 안됐습니다. 사령관님께 보고하는 자리를 엿들을 정도로 개념이 없지도 않고요"


나이트 앤젤은 곁눈질로 메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대장을 곁에서 지켜보는 저라서 말씀드리는 건데, 사령관님에게 마음이 있다면 좀 제대로 표현을 해보세요.

언제까지 진심을 드러내지 못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밀당질이나 하고 있을 겁니까?"


"밀당질이라니? 난 딱히...."


"예, 예, 압니다. 인간의 명령권마저 거부할 정도로 드높은 자의식과 역량을 지닌 지휘관이면서

한편으로는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인간이 자신만을 바라봐줬으면 한다는 소녀 같은 감성,

그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거겠죠.

그 툭 튀어나온 요철이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잉여롭게 흔들거리는 게 아깝기만 하네요"


피아구분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듯 상관에게 폭격을 가하던 나이트 앤젤은 

복도에서 마주친 실피드와 지니야의 경례를 가볍게 받고는 메이와 함께 계속해서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오늘은 대령님이 우위인 것 같지?"


"요즘은 대체로 그렇지 않나요?"


"예전에는 반반이었던 것 같은데...."


부하들의 속닥거리는 소리에 살짝 귀가 간지러웠지만 메이는 눈앞의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딱히 부족한 건 없잖아? 이 정도면 몸매도 누구에게 밀리지 않고, 스타일도 좋고...

유능하기까지 하니 사령관이 내 매력에 빠져드는 것도 시간문제 아니겠어?

천천히 밀어붙이다 보면 언젠가 분명...."


"너무 천천히라 달팽이가 우주로까지 진출한 후겠네요"




둘은 티격태격하며 어느새 오르카 호 밖으로 나갔다.


"좀 보자고요. 기회가 넘쳐나지 않습니까? 날씨도 맑고 오르카 호도 때마침 괜찮은 섬에 정박했으니,

같이 밤바람이라도 쐬자면서 사령관님을 유혹해 덮쳐도 바로 해결되겠는데 뭘 그리 꾸물거리고 있습니까?"


"그치만...."


"아 좀! 저 속 터져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러시는 겁니까?

지금 대장 때문에 저는 물론이고 부하들도 배려한답시고 인내하고 있는데, 이러다 죄다 망부석이 될 지경이라고요?

설마 공중에서 투하할 전략적 안목이라면 감탄해 박수를 쳐 드리겠습니다만"


나이트 앤젤의 계속되는 갈굼에 메이는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든 그건 내 마음이잖아! 너희는 너희 좋을 대로 해!"


"사령관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다른 바이오로이드와 침대에서 뒹굴고 계시겠죠.

마음만 먹으면 그 자리가 대장 건데 왜 굴러 오려는 호박에 대못을 박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오르카에 떠도는 소문 아세요?"


끝내 메이는 볼을 부풀리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됐어! 너랑 말 안 해! 방으로 들어가!"


두다다다거리며 섬 기슭으로 향하는 메이를 보고 나이트 앤젤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파도가 발을 간질인다.

메이는 해변에 앉아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부관인 나이트 앤젤의 마음도 이해는 됐다.

다른 지휘관 개체는 물론이고 일개 병사들까지 사령관과 깊은 밤을 보내지 않은 이가 드물 정도인데,

상관인 자신은 아직도 제대로 된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겠지.

그럼에도 아직까지 체면을 세워주고자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본인의 연심을 억누르는 건 그저 기특하기만 했다.

결코 강압적인 건 아니었지만 다른 둠 브링어 대원들도 나이트 앤젤의 의사를 존중해

메이가 하루라도 빨리 사령관과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오르카 내의 도박 모임에서 자신이 사령관과 언제 만리장성을 쌓을지를 두고 

대규모의 참치캔이 오간다고도 한다.

최근 들어서는 아예 그럴 일 없다에 참치캔이 몰린다 하던가.

메이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메이 소장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메이는 고개를 돌렸다.

나뭇가지를 한 아름 끌어모은 이그니스가 있었다.


"이그니스?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이야?"


"자재수집 임무를 하다 지금 복귀하려던 길입니다. 밤 공기라도 쐬시는 건가요?"


"응, 뭐 그렇지...."


이그니스는 한 켠에 나뭇가지를 내려놓고는 작게 불을 붙였다.


"모닥불이라도 쬐시죠. 밤의 해변과...잘 어울릴 겁니다"


불씨는 어느덧 조금씩 커지며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를 삼키고 있었다.

타닥, 타닥.

둘은 아무 말 없이 모닥불을 바라봤다.

불규칙하게 일렁이는 불이 메이의 얼굴을 매 순간 다른 각도로 비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메이가 입을 열었다.


"이그니스는 사령관을 어떻게 생각해?"


갑작스러운 물음이었을까.

이그니스는 뜸을 들였지만, 당황하지 않고 답했다.


"여러 가지로 믿을 수 있는...좋은 분입니다. 다양한 개성을 포용하고 존중해주시지요"


"그래...."


메이는 나뭇가지의 끄트머리를 모닥불에 넣어 살짝 태우더니 검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게 사령관은, 별과도 같은 사람이야. 저 하늘의 별"


삐뚤빼뚤 그린 별은 어설프지만 정감이 가는 형태였다.


"우리 바이오로이드들은 인간의 명령을 따르고 그들을 위하도록 설계됐지. 인간은 우리에게 있어 존재의 이유 그 자체야.

그리고 사령관은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인류고. 모두의 운명과 미래가 사령관 한 명에게 달려있어"


비록 시선은 이그니스를 향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뭇가지 끝을 향하고 있었지만, 메이는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사령관이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올까? 그건 아니야.

최후의 인류라는 위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니지만, 그건 감정과는 상관없는 이해관계일 뿐.

그 자리에 지금의 사령관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어도 그건 바뀌지 않겠지.

그리고 난, 인간의 일방적인 명령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개체로 태어났어"


메이의 눈가에 순간 굳건한 자긍심이 스쳐 지나갔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지니는 한계가 있으니까. 때로는 감정에 휘둘려 제대로 된 사리분별을 못하기도 하고,

순간의 욕망으로 일을 그르치기도 하지. 결정적인 상황에 오판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어.

나는 그런 인간을 대신해 어깨에 짐을 짊어지는 역할이고.

냉철함을 바탕으로 한 전략적 판단, 이건 내가 아닌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해"


차가운 미소가 모닥불의 춤에 한층 두드러졌다.


"그래, 그랬었지...사령관도 그런 점에선 다를 바 없었어. 하지만...."




그때를 기억한다.


'뭐야, 그 표정은? 이 몸이 왔는데? 환영 파티는 준비 되었겠지?'


당찬 첫인사에 당황하며 우물쭈물하던 사령관.

한없이 어설프게만 보이고 도무지 믿음직한 구석이 없었다.

어느 날 뜬금없이 부대 지휘관을 호출한다기에 보나 마나 멍청한 짓을 할거라 짐작하고 튕겼더니,

아니나다를까 병사들의 급양 상태를 개선하겠다며 거하게 삽질을 하질 않나.

야영지의 선정에도 빈틈을 드러내 이런 사람을 과연 사령관으로서 믿고 따라야 하나 회의가 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다양한 편재의 병력을 능숙하게 운용하는 성장을 이루어내고

그 이상으로 다채로운 개성의 소속원들을 하나하나 이해하며 인격체로서 교감을 나누는 모습에 

조금씩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라면 믿어도 될 것 같다.

이 사람과 함께 있다 보니 마음이 설렌다.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숨어있었나 깜짝 놀라면서도 스스로도 몰랐던 모습을 알아가는 나날에 매일매일이 즐거워졌다.

그리고 이런 자신을 깨닫게 한 사령관은 그저 최후의 인류이기에 믿고 따라야 하는 의무의 대상이 아닌,

보다 서로를 알아가고 깊은 진심을 나누고 싶은 애정과 동경의 대상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그때부터였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 볼 수 있었고, 노출도 높은 수영복을 입고 달려들어도 거리낌이 없던 나날이 분명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단순히 손을 붙잡는 것조차 주저하고 부끄럽게 되었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손안에 쥐고 있고 아무런 감흥도 없던 그것은 어느새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저 하늘의 별이 되어있었다.




"그렇군요...."


이그니스는 한마디도 없이 메이의 말을 경청하다 이제서야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메이가 마음을 터놓고 이그니스에게 상담을 하는 이유였다.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섣불리 논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받아주며 또 받아준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친절하게 덧붙이는 조언은 상대의 마음 한구석에 쌓여있던 짐을 사르르 녹이는 따스함과도 같았다.


"적절할지 모르겠지만...전에 발견한 책에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어요.

마음을 추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어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그니스가 들려준 글귀는 메이의 마음에 와 닿았다.

아, 이 가슴 뛰는 거리감은 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거구나.

사령관은 내게 특별한 존재고, 나 역시 사령관에게 특별한 존재이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관계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그려나가고 싶다.

지금이라도 사령관에게 달려들면 분명 날 안겠지만, 그래서는 다른 이들과 다를 게 없어진다.

난 다른 이가 대신할 수 있는 여러 이들 중 하나가 아닌, 오직 나로서 사령관에게 빛나고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이렇게 제자리걸음만 할 수는 없다.

나는....




"...메이 소장님?"


이그니스가 부르자 메이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복잡하게 얽히던 생각이 구름처럼 흩어지고, 방금까지 이를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는 사실을 깨닫자 볼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이그니스는 조용히 웃으며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그래, 이그니스라면 오늘 있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겠지.

메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래를 털고 차츰 꺼져가던 모닥불의 불씨를 마저 뒤적여 덮었다.


"고마워, 늘 그렇듯이 신세 졌네"


"별말씀을요, 그럼 돌아갈까요"


오르카 호로 돌아가는 둘을 배웅하며 마침내 모닥불이 완전히 꺼지자 근처 수풀에서 나이트 앤젤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하아...."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한 것에서 나오는 후련함인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를 두고 내뱉은건지 알 수 없는 한숨을 쉬며

나이트 앤젤도 발길을 오르카로 돌리기 시작했다.




2

"이 섬은 제법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마리는 보고를 이어갔다.


"아직 일부 지역을 탐색했음에도 상당한 양의 자원과 기반시설을 확인했습니다.

바이오로이드 생존자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지만, 추후 탐색결과에 따라 요충지로 삼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나도 같은 의견이다, 사령관. 담당 구역에서 자매들이 광산을 발견했고, 소규모 철충과의 조우가 있었지만 일방적으로 소탕했다.

처음 접하는 개체가 확인됐으나 전투력이 상당히 떨어지기에 큰 위협은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연이은 칸의 발언에 마리가 반응했다.


"아, 혹시 공처럼 생긴 철충을 말하는 건가? 근처까지 다가가도 딱히 공격도 않고 별 반응이 없더군.

다만 외관이 바위나 이끼처럼 생겨서 미처 눈치채지 못한 브라우니 몇몇이 습격당했지 뭔가"


"그쪽도 마주쳤나? 특별한 공격수단은 보이지 않던데"


"몸으로 달려드는 게 전부인 것 같더군. 브라우니들이 가지고 놀다가 터져버렸지"




정찰결과를 교환하는 지휘관들을 바라보며 사령관은 현 상황을 다시금 정리했다.

얼마 전부터 철충은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흡사 동면이라도 들어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조용해졌기에, 

이 기회를 틈타 적극적으로 자원과 요충지를 확보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고 조만간 철충이 본격적으로 움직여 불리한 상황에 놓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전력증강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판단했고,

대신 정찰에 보다 비중을 둠으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다는 사령관의 노림수는 적절하게 맞아떨어져

최근에 상당수의 바이오로이드 생존자들을 규합하고 여러 섬을 영향하에 둘 수 있었다.

지금은 새로이 발견한 섬에 정박해 혹시 모를 저항세력의 존재와 자원을 탐색하던 차였고

일차적으로 정찰한 결과 철충의 존재도 소규모 무리를 제외하고는 포착되지 않았다. 

나날이 사기가 높아가는 가운데 무적의 용이 이끄는 함대도 순조롭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와 

이 기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해질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오빠, 회의 중에 미안한데 안내할 내용이 있어"


패널이 활성화되며 닥터의 얼굴이 보였다.


"이 섬은 이상하게 레이더 탐지가 잘 안 되거든? 섬의 구성성분 때문인지 다른 방해요소 때문인지는 당장 알 수 없지만,

그렇기에 평소보다 한층 더 정찰에 심혈을 기울이는 편이 나을 거야. 해당 문제는 내가 따로 분석해볼게.

그리고 요 며칠간 유성이 빈번하게 떨어질 거야. 좋아하는 상대와 단둘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낭만을 속삭이기엔 딱이겠는걸?

후후, 무슨 말인지 알지?"


애교섞인 윙크와 함께 패널이 꺼지자 사령관은 쾌활하게 말했다.


"모두 들었지? 다들 임무에 충실해 준 덕에 우리 오르카 호의 기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드높아.

그 노고에 대해선 확실하게 치하할 테니 보다 적극적인 정찰을 부탁할게"


사령관의 격려를 듣고 눈을 빛내며 혀로 입술을 핥는 아스널을 옆에 두고, 메이는 진지하게 그 말을 곱씹었다.




3

"대장, 거긴 이미 지니야가 다녀온 지역이잖아요?"


나이트 앤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메이는 몸소 정찰준비를 했다.


"혹시 몰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게 있을지. 사령관도 정찰에 한층 신경을 써달라 당부했고"


고집을 부리는 메이를 보며 나이트 앤젤은 팔짱을 끼더니 자신의 장비를 챙겼다.


"그럼 저도 같이 가죠. 대장 혼자만 어차피 써먹지도 못할 점수 따는 건 의미 없으니까요"


"안 그래도 바쁜 오드리를 써먹지도 못할 브래지어 디자인으로 괴롭히는 것보단 낫거든?"


물 흐르듯이 튀어나온 반격에 나이트 앤젤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날개로 메이의 가슴을 치고는 먼저 날아갔다.


"어이쿠, 뭔가에 부딪힌 것 같은데 작아서 안 보이네"


"야, 너 거기 안 서?!"




"여기가 그 지역이던가요? 지니야도 별다른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했고, 호드도 이미 다녀갔을 텐데요"


나이트 앤젤은 심드렁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긴 한데...어, 저기 너 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메이의 놀란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족히 수백m는 될 법한 깎아지른 절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여기로 온 건 아니겠지요?"


부들거리는 부관을 뒤로 하고 메이는 고도를 낮춰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기존 보고대로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초목이 우거진 평야와 숲,

저 멀리엔 칸의 말대로 광산시설의 윤곽이 흐릿하게 떠오르는 것이 전부였다.

그 외엔 유독 거대한 기암절벽이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을 뿐.

절벽은 곳곳에 이끼가 낀 채로 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었을지 모를 시간을 노래하고 있었다.


'역시 별거 없나....'


메이는 작게 혀를 차며 입맛을 다셨다.

사소한 것이라도 사령관이 기뻐할 만한 내용을 보고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하는 마음에 드론을 탐색 모드로 전환해 흩뿌리고, 마치 거니는 것처럼 일대를 천천히 돌아다녔지만

잔잔한 바람은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설픈 화가가 되어 수풀을 캔버스 삼아 제멋대로인 그림을 그릴 뿐이었다.

자신만의 화풍을 자랑하며 불규칙하게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




웅웅?

메이는 위화감을 느끼며 급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자연스러운 바람 소리는 아니었다. 인위적이며 묘하게 불쾌감을 주는 잡음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에 이상한 점은 없다. 그저 계속해서 춤을 추는 초목과 이끼 낀 바위.

이끼가 춤을 추고 있었다.


"뭐야 이거...?"


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살상드론으로 위협사격을 가하자, 

바위라 생각했던 그것은 맥없이 터져나가며 강한 바람과 선홍빛 내용물을 흩뿌렸다.


"으엑, 역겨워"


"무슨 일인가요, 대장?"


빠르게 내려온 나이트 앤젤이 때마침 그 광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 기분 나쁜 건 대체 뭐죠? 꼭 색소를 넣은 두부를 으깬 것 같네요"


"이끼가 낀 바위인 줄 알았는데 이상해서 위협사격을 해보니 저렇게 맥없이 터져버렸어.

저게 칸이 말했던 신종 철충일까?"


"이상하네요. 기본 탐지 레이더에 특별한 반응은 없었는데 말이죠"


나이트 앤젤이 미간을 좁히던 와중, 때마침 메이가 흩뿌렸던 탐색드론들이 돌아왔다.


"그러게...별다른 보고사항은 없었지? 드론들 탐색결과만 확인하고 슬슬 돌아가자"


메이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허공을 매만지자 드론의 머리 위로 영상이 재생됐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정경이 이어지는 가운데, 슬슬 지루함을 느끼려던 차 바위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광경이 보였다.


"저 바위들은 아까 내가 터뜨렸던 철충들과 비슷한데?"


"이젠 위장마저 하는 걸까요?"


"그런데 정작 근처까지 다가가도 별다른 위협은 없었단 말이지...."


"방심을 유도하고 기습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전투 외의 목적이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경계하는 게 좋겠네요"


"그래, 그게 낫겠지...그런데 정찰하면서 이상한 소리 못 들었어?"


"아뇨, 딱히"


어깨를 으쓱하는 부관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메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4

한산하다.

요 며칠간 오르카는 휴가나 다름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 정박 중인 섬은 이상적인 낙원이 현실에 떨어진 것과도 같을 정도라,

병사들은 물론이고 모두를 총괄하는 사령관마저 살짝 긴장이 풀어질 정도로 늘어지는 하루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게을리하진 않았지만

탐색을 보내는 족족 풍부한 자원을 확보했다는 보고 뿐이었고 

이를 수송할 인력이 부족해 행복한 비명을 질러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게 흘러갔다.

복권에 당첨되면 처음에는 놀라고 기뻐하지만 그게 일상이 되면 어느새 당연시하듯, 

지금의 흐름은 모두에게 차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나마 불안요소였던 소규모의 철충들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형편없는 전투력에 

그마저도 눈에 띄게 수가 줄어 위협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 됐다.

지금 해변에서는 브라우니들이 철충을 공으로 삼아 족구를 하고 있었다.


"어디 한번 받아보시지 말입니다!"


"너무 세게 치면 또 터질 수 있으니 적당히 하세요"


"어차피 이것들은 곳곳에 널려있으니 적당히 주워오면 되지 말임다"


들뜬 브라우니를 만류하는 레프리콘이 무색하게 다른 브라우니가 철충 한 무더기를 안고 왔다.

저렇게 무해한 철충이 있을 수가 있나?

사령관은 의문을 표하면서도 지금까지 별 탈 없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여기고, 

혹시 모르니 경계를 완전히 늦추지는 말라고 당부해야겠다 생각했다.


"다들 화기애애하군"


칸의 목소리에 사령관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칸, 또 탐색하러 가게?"


"정기적인 임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흐름이 좋다면 그 흐름을 유지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는 사령관에게도 평정심을 안겨줬다.


"그래, 사기가 오르는 것은 좋지만 혹여라도 방심으로 이어지면 안 되지. 덕분에 나도 안일함을 벗어던질 수 있겠어"


"겸손한 말을. 사령관은 언제나 역할에 충실하지 않나. 나 역시 그에 부끄럽지 않게 임할 뿐이다"


칸은 싱긋 웃음을 띄우며 자리를 떴다.




"이번에도 금방 끝나겠지?"


"그렇겠지. 여기 철충들은 유독 약해빠졌더라"


워울프와 샐러맨더는 앞서 돌격한 칸을 배웅하고 편하게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잔당을 청소하는 재미는 있어야 하는데, 그럴 일조차도 없어서 심심하단 말이야"


"그럼 내기 한판?"


"콜"


"어떤 걸로 할까...이건 어때? 오늘 대장이 사령관에게 어떻게 안길지"


"오, 그거 좋은데?"


샐러맨더의 제안에 워울프는 반색하며 눈을 빛냈다.


"오랜 세월 연마된 내 날카로운 감이 말해주고 있어...처음엔 분명 기승위야"


"아니야, 내 감이 더 정확해. 전장의 늑대를 우습게 보지 말라구. 시작은 정상위로 한다에 참치캔 10개"


"그럼 난 참치캔 15개"


"...15개 받고 20개"


두 바보의 점입가경에 퀵 카멜은 질렸다는 듯이 바라보며 타박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장의 사생활을 두고 도박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그 페더도 상공에서 본연의 임무에 열심...."


"내기의 결과를 확인하려면 관전할 명소가 필요하겠죠? 제가 괜찮은 장소를 제공해 드릴 테니 수수료로 참치캔 3개 어떤가요?"


어느새 내려온 탈론페더의 흥분한 목소리에 할 말을 잃은 퀵 카멜은 이마를 짚었다.




쉽다.

너무 쉽다.

칸은 빠르게 움직이며 눈에 띄는 철충들을 처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오히려 불안감으로 이어졌다.

며칠 전에 정찰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때는 여전히 소규모였지만 지금보다는 수가 많았다.

최소한 지금처럼 이 잡듯이 뒤져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철충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남아있는 그마저도 위장능력이 한층 교묘해져, 자칫 방심했다간 바위로 착각해 놓치고 넘어가기에 충분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칸은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철충을 포착하며 그 수를 줄여나갔지만 이 철충들의 목적이 마음에 걸렸다.


'별다른 전투능력도 적의도 보이질 않고, 위장에 집중하거나 소극적으로 달려드는 행태...기존과 다른 무언가 있다는 건 분명하다'


신경이 한층 날카로워진 칸의 귀에 흐릿하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부터 바람 소리와 섞여 불규칙하게 들리는 정체불명의 소리.

벌레 소리는 분명 아니고 기존에 들어봤던 그 무엇과도 달랐다.

자칫하면 흘러 넘기기 딱 좋은 약한 소리.

잠시 멈춰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상한 광경은 없었다.

지난번과 같은 평범한 초목, 그 너머엔 절벽만이 있을 뿐.


"탈론페더, 혹시 철충의 신호나 특이한 동향을 포착했나?"


"아니요, 대장님. 철충의 신호는 대장님이 계신 구역 근방에만 몇몇 잡히는 게 전부...어? 이상하다?"


무전으로 넘어오는 싹싹한 목소리에 불현듯 당황이 깃들었다.


"죄송해요, 대장님! 미처 발견하지 못했나 봐요! 지금 저희가 있는 곳 주변에 다수의 철충 신호가 포착되고 있어요!"


"당장 그쪽으로 가도록 하지"


몸을 돌리는 칸의 등으로 기다렸다는 듯 바위가 달려들었다.


"!"


여느 바이오로이드였다면 제법 위험했으리라.

회심의 기습은 그 이상으로 기민한 칸의 참격으로 맥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팡!"


총검에 찔린 철충은 풍선 터지는 소리를 내며 순간 칸을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흡사 으깨진 뇌 같은 선홍빛 내용물이 사방팔방으로 흩뿌려졌다.


'이건 대체...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처음 이 철충과 조우했을 때도 약한 공격을 가하니 맥없이 터져버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압력이 분사됐다.

지휘관 개체인 자신이 순간적으로 비틀거릴 정도의 위력이라면 다른 병사에게는 훨씬 큰 위협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다행히 날카로운 파편이나 폭발성 물질은 포함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도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른다.

복잡한 생각이 빠르게 교차하면서 칸은 부하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뭐야, 언제 이렇게 많이 모여든 거야?"


"잘됐지 뭐. 한바탕 날뛰어 볼까"


당황한 퀵 카멜을 아랑곳하지 않고 워울프는 권총을 꼬나들었다.


"셋을 세면 서로 승부를 겨루는 거다. 하나, 둘...."


철충을 상대로 서부극을 찍으려는 워울프 뒤에선 탈론페더가 다급하게 패널을 점검하고 있었다.


"저 정도 규모의 철충 신호가 안 잡힐 리가 없는데...."


"진정해. 닥터도 말했잖아, 이 섬은 이상하게 신호가 잘 안 터진다고"


심드렁하게 팔짱을 끼고 누워있는 샐러맨더는 자신의 메카에 오를 기미도 없이 태평하게 뒹굴거리고 있었다.


"저 정도 수준이면 굳이 도와줄 필요도 없지? 쟤네들 약하잖아"


"당연하지. 내 멋진 활약을 두 눈 뜨고 잘 보라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이 튀기듯 워울프에게 철충 여럿이 달려들었다.

권총은 화약 냄새를 풍기며 평온했던 초원의 정적을 찢어발겼고, 철충의 폭사음이 연이어 권총 소리를 묻어버렸다.


"와, 전보다 더 잘 터지는 것 같지 않아?"


으쓱하며 돌아온 워울프는 동료들에게 감상을 물었다.


"그러네...아무래도 뭔가 이상한데? 철충들이 왜 저렇게 많아? 어디서 나타난 거야?

페더, 대장에게 연락해! 우리 포위당할 것 같아"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잠깐 사이에 수풀에서 철충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어느덧 그 수는 우습게 보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퀵 카멜의 지시에 탈론페더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걱정 말라니까. 수가 많아 봤자 오합지졸이니 활약상만 더 빛날...."


"워울프! 뒤!!"


넉살좋게 등을 보이고 있던 워울프를 향해 근처의 바위로 위장해있던 철충이 기다렸다는 듯 삐그덕거리며 달려들었다.


"읏...! 어림도 없지!"


급하게 권총에 달린 총검으로 철충을 보기 좋게 찌르는 것에 성공한 워울프였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팡!"


코앞에서 터진 철충의 강한 압력으로 인해 워울프는 초원을 몇바퀴 구르며 나동그라졌다.

불행하게도 그곳엔 이미 철충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유형의 철충들도 있었다.


"크억!"


배달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철충들은 워울프의 몸뚱아리로 달려들었고, 

그제서야 호드의 대원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어, 어떻게 하죠?!"


"페더는 상공에서 적 규모를 구체적으로 파악해! 샐러맨더는 조종간 붙잡고!"


"저렇게 뭉쳐있는데 내가 공격하면 워울프는 워울프였던 것이 되지 않을까?!"


메카에 올랐지만 샐러맨더는 약간 긴장한 기색을 보였고, 퀵 카멜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머신건을 신중하게 조준했다.




그때 초원을 질주하며 칸이 도착했다.

칸은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워울프를 덮치고 있는 철충의 무리로 돌격했고,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눈앞의 철충을 가르며 워울프를 낚아챘다.


"괜찮나?"


"아야야...신세졌네, 대장. 방심했어"


워울프는 겸연쩍다는 듯이 웃었다. 생각보다 크게 다치진 않은 모양이었다.


"호드, 전원 퇴각"


칸이 나지막한 호령과 함께 철충의 포위망에서 비교적 얇아 보이는 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섬광과도 같은 맹습 가운데 철충들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고,

그 와중에 몸을 날리는 몇몇을 능숙하게 피하며 지근거리를 내주지 않는 칸의 리볼버 캐논이 차가운 금속음을 냈다.

일방적으로 유린당하는 풍선 터뜨리기 게임의 양상이 되자 철충들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지시를 따르는 병사처럼 동시에 움직이며 진형을 갈라 길을 내주기 시작했다.


"...?"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지만 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손에 워울프를 낀 채 돌파했으며, 뒤이어 나머지 호드도 따랐다.




5

"...이상이다. 면목이 없다, 사령관"


보고를 마치고 눈을 내리깐 칸을 보며 사령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천만에, 오히려 잘했어. 훌륭한 지휘관이란 예상 밖의 상황에서 최선의 판단을 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법이니까.

그런 점에서 칸은 철충의 포위망을 뚫고 워울프를 무사히 구출했으니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었겠지.

괜찮다면 오늘 밤에 그 공을 치하해주고 싶은데...."


부하가 다쳤다는 사실에 마음을 쓰고 있는 칸을 위로하고자 나름의 위트를 구사하는 사령관을 보며 칸은 쓴웃음을 지었다.

수많은 바이오로이드 사이에서 부대끼며 지내온 시간이 아주 무의미하진 않았는지, 

지금의 사령관은 여전히 여자의 신호를 읽는 것에는 서투르지만 마음을 어루만지는 방법은 알았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기꺼이 응하도록 하지"


눈앞에서 사령관이 다른 여자와 약속을 잡는 것이 언짢았는지, 메이가 말을 잘랐다.


"다소 신경 쓰이는 내용이 있는데, 철충이 며칠 전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고?"


"그렇다. 처치할 경우 터져 나오는 압력이 상당히 강해져 이제 근접전은 가능하면 피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된다.

외에도 조직적으로 자매들을 포위한 것을 볼 때 최소한의 전술도 갖췄다고 봐야겠지.

아니길 바라지만...어쩌면 의도적으로 나를 유인해 떨어뜨려 놓고 후방을 습격했을지도 모른다"


보고내용을 되짚으며 사령관이 재차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칸이 진입한 지역은 이상할 정도로 철충이 없었다고?"


"그렇다, 사령관. 호드의 교리를 파악하고 병력을 편중해 포위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해봤지만,

그 정도의 지능을 지녔을 것이라 생각하긴 어렵겠지. 진화라면 몰라도, 학습을 한다고 보기엔 조우했던 개체는 너무 단순했다"


"철충이 진화라...웃어넘기기엔 확실히 요 며칠 사이에 보여준 변화가 마음에 걸려.

병력을 양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후방을 포위한 것도 그렇고, 정작 칸이 합류하니 스스로 길을 열어줬다고 했지?

혹시 주변에 지휘를 할만한 개체나 연결체를 발견하진 못했어? 아니면 특이한 동향은?"


"워울프를 습격했던 철충 중 처음 보는 모델을 발견하긴 했지만 고위개체로 볼 수는 없었다.

그 외엔...정체를 알 수 없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


"웅웅거리는 소리라고, 칸 소장?"


"그렇다, 마리 소장. 하지만 주변을 살펴봐도 의심 가는 것을 찾을 수는 없었다. 초목과 절벽뿐이었으니"


절벽이라는 말에 골똘히 생각에 빠진 메이를 보며 사령관은 차분하게 얼굴을 바라봤다.

전부터 그랬지만 이 섬에 정박하고부터 메이는 임무에 한층 진지하게 임하며 열의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이 사령관인 자신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라는걸 아무리 둔감하다 해도 눈치챌 수 있었다.

언제쯤 진심을 드러내며 서로 진정으로 마주 볼 수 있을까.

지금도 메이는 생각에 깊이 빠져서인지, 아니면 사령관의 시선을 눈치챘지만 부끄러워 일부러 피하는 건지

시선을 허공에 둔 채 살짝 입숙을 삐죽이고 있었다. 

당장은 아니지만 분명 찾아올 진솔한 날을 그리며 사령관은 문득 떠오른 사항을 마리에게 당부했다.


"아 맞다, 브라우니들이 철충을 공으로 삼아 가지고 논다고 했었지? 위험할 것 같으니 당장 그만두라고 해줘, 마리"


"알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이 기회에 군기도 다시금 제대로 심어놓겠습니다"


훗날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이 당시의 마리도 브라우니들도 아직은 미처 알지 못했다.




"워울프, 몸은 좀 괜찮나?"


부상당한 부하가 걱정돼 수복실을 찾은 칸은 눈앞의 광경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쾌활하며 여유를 잃지 않던 대원들이 침통함에 빠져 방 안의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특히 샐러맨더는 주먹으로 벽을 치며 분을 삭이는 모양새였다.


"...어, 대장 왔어...?"


침대에 누워있던 워울프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다 뒤로 쓰러졌다.


"야, 너 진짜...!"


샐러맨더의 노성을 뒤로 하고 칸은 워울프에게 달려들어 손을 잡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부상은 경미했을 텐데?"


"하하, 미안해, 대장...이대로면 난 안될 것 같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마음 약한 말 하지 마라"


"...이런 말 하긴 그런데, 부하로서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칸의 머리에 과거 함께했던 부하들이 스쳐 갔다.

언제나 최전선에서 적들을 상대하며 부하들은 위험에 조금이라도 덜 노출되길 바랐다.

하지만 전장의 포화는 예외를 허하지 않았고, 철로 철을 부수고 피로 피를 씻는 끝에 소중한 부하는 하나둘 곁을 떠났다.

아직도 그들 하나하나를 가슴에 묻어두고 있으면서도, 

더는 누구도 묻고 싶지 않은 칸이었기에 평소의 침착함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뭐든지 말만 해라. 다 받아줄 테니 절대 희망을 놓지 마라"


"그렇게 말해주니 좀 힘이 나는걸...대장, 난 대장이 스스로의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어. 

사령관과 단둘이 진심을 주고받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해주면 난 더 바랄 것이 없어...

부탁이니 오늘 밤은 사령관과 얼굴을 마주하고 사랑을 속삭여줬으면 해...그게 내 행복이기도 하니까"


"내 행복은 너희와 함께하는 거다. 알았으니 절대로 약한 마음먹지 마라...부탁이다"


목소리가 낮아진 칸을 바라보며 워울프는 잔잔하게 웃더니 눈이 조금씩 감겨갔다.


"믿을게, 대장...나 조금만 잘게"


결국 눈을 완전히 감으며 고개를 힘없이 떨군 워울프의 손을 꼭 쥐며 칸은 조용히 어깨를 떨었다.

퀵 카멜과 샐러맨더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한숨만 쉴 뿐이었다.




"실례합니다, 금방 끝날 거에요...왜들 그러시죠?"


수복실 문이 열리며 따스한 미소를 띤 간호사 복장의 다프네가 들어오다 살짝 당황하며 물었다.


"워울프의 부상이 그렇게 심각한 것이었나...?"


칸의 나지막한 물음에 다프네는 고개를 기웃거리더니 밝게 답했다.


"가벼운 타박상일 뿐이에요. 편히 안정을 취하면 며칠 내로 전투에도 돌입하실 수 있답니다"


"뭐...?"


칸이 당황하자 퀵 카멜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참치캔이 걸려있다고 해도 그렇지, 대장을 속이면서까지 해먹고 싶냐...."


"이건 무효야! 결과에 직접 개입하는 게 어디 있냐고!"


샐러맨더는 다시금 벽을 주먹으로 치며 씩씩거렸다.


"...워울프는 퇴원하면 대화 좀 하지"


칸은 당황과 부끄러움으로 인해 살짝 붉어진 볼을 감추고자 급하게 말을 내뱉고는 수복실을 나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부하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방 안의 모든 호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6

"또 정찰하겠다고요?"


나이트 앤젤은 슬슬 질린다는 표정으로 메이를 바라봤다.


"왜, 안될 거 없잖아?"


정찰기능을 보강한 드론에 이어 은폐장까지 심판의 옥좌에 추가로 탑재하면서 메이는 가슴을 펴고 말했다.


"모름지기 훌륭한 지휘관이란 언제나 부하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법이야.

이 내가 임무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둠 브링어는 물론이고 다른 부대의 병사들도 존경심을 품지 않겠어?

사소한 정찰임무에도 저렇게 열심이라니, 역시 사령관과 이어질 그릇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거긴 어느 세계선입니까, 대장이 최후로 남은 바이오로이드인 곳인가요?"


입이 샐쭉해진 나이트 앤젤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옥좌에 오른 메이는 지시를 내렸다.


"3시간 내로 다녀올 테니까 그동안 다이카에겐 O-A1 포인트에서 동향 파악하면서 이상 있으면 바로 보고하라고 해.

실피드는 새로 갱신한 좌표에서 자원 수송 중인 인력의 호위로 보내고"


"...역할이 반대인 것 같지 않습니까?

지휘관이면 지휘가 우선이지, 정찰 같은 사소한 임무는 지니야나 하다못해 저를 시켜도 충분하잖습니까"


"뭐야, 불만 있는 거야?'


메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장이 사령관님과 얽히기만 하면 차마 못 봐줄 꼬맹이가 되는 건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만,

그래도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선 나름 인정하고 존경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여러 가지 의미로 무리수를 두는 게 아닌가 싶어서 우려되기에 부관으로서 걱정하는 겁니다"


"재미있네, 계속 말해봐"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대장은 유능하죠. 그럼 그 유능한 면모를 적재적소에 써야 하잖습니까?

정찰이야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대를 이끌고 지휘하는 건 대장이 아니면 대신할 이가 없어요.

헌데 요즘은 정찰에만 집착하니 이게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모양새가 아니고 뭐죠?

스틸라인의 마리 소장님이야 병사들과 함께 전선에 나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만, 그분은 그럴만한 방호 능력이 갖춰졌잖아요.

하지만 대장은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최대한 자신의 몸을 보호해야 하는 입장이란 말입니다.

대장을 보호하고 대장의 손발이 되기 위해 둠 브링어가 있는 거고요.

그 옥좌의 무게를 제가 언급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요?"


메이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평소 영혼을 건 공격을 주고받긴 하지만 나이트 앤젤은 신뢰할 수 있는 부관이었다.

지금 발언도 자신을 걱정하는 충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자신의 판단을 믿고 따라줬으면 하는 믿음과 기대도 공존했다.


"걱정은 고맙지만, 모든 건 내 통제 하에 있어.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문제는 없어. 정찰도 그럴 가치가 있어서 내가 직접 가는 거고.

잘난 대장을 좀 더 믿어보는 건 어때?"


"사령관님에게 어필하려고 삽질하는 건 아닙니까? 어차피 결국 제대로 진도도 못 뺄 거면서"


별 생각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잔잔한 호수가 조약돌 하나로 크게 파문이 일듯 이 한마디로 메이의 평정이 흔들렸다.


"뭐, 뭐야?! 삽질은 무슨 삽질! 됐어! 난 지시했으니까 잊지 말고 전달해! 그리고 혹시라도 절대 따라오지 마!"




씩씩거리며 붉은 유성마냥 날아가는 대장을 보며 오늘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부관과, 

때마침 바람을 쐬러 나온 사령관이 있었다.


"방금 메이가 있지 않았어? 무슨 일이야?"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미운 세 살은 오늘도 사령관님의 점수를 따보겠다고 정찰임무를 자처했습니다.

정작 실전으론 들어가지도 못하면서 빙빙 도는 모습만 보게 되니 가슴이 답답하네요"


답답해질 가슴은 있느냐는 물음이 반사적으로 나오려는 걸 필사적으로 억누른 사령관은 이야기의 전말을 들었다.




"...그래? 그래도 지휘관으로서 지휘도 열심히 하잖아.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저렇게 헌신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야"


"그렇죠...다만 요즘은 대장이 스스로를 조급하게 몰아가는 것 같아 걱정스러워 그렇습니다.

좋아한다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꼬맹이면서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다가가고 싶어하고,

사령관님의 품에 안기는 걸 소망하지만 정작 그 후엔 남들과 다를 바 없는 무수한 이 중 하나로 전락할까 겁먹고 있죠.

진짜 애들 투정인지 뭔지...

가뜩이나 다른 지휘관님들과 비교하며 자격지심을 품고 있던데, 저러다 사고라도 터질까 우려되네요"


연민이 깃든 진심 어린 질타를 들으며 사령관은 메이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이트 앤젤과 막역한 사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단순한 상관과 부하의 관계를 넘어선 이해가 그 둘에겐 있었다.


"그럼 지니야를 보내보자. 혼자보다는 둘이 낫겠지"


나이트 앤젤의 마음이 온전히 닿기를 바라며 사령관은 지시를 내렸다.




7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모양새라.

그 표현은 실로 적절했다.

메이가 앉아있는 심판의 옥좌는 둠 브링어를 이끄는 지휘관의 기체답게 온갖 기능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버튼 하나로 지도를 다시 그리게 만들 수 있는 초월적인 화력은 말할 것도 없고,

냉엄하게 죽음의 선고를 내릴지 판단하는 저승사자의 흔들림 없는 시선처럼 정교한 탐지센서는

붉은 심판자가 내리는 멸망에 정확성을 더했다.

주제를 모르고 예정된 운명에 저항하려는 부질없는 이들은 자신을 덮치는 옥좌를 향해 발악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핏빛 재앙을 따르는 군단이 펼치는 파멸의 날개에 막히기 일쑤였고,

운 좋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해도 보이지 않는 장막처럼 드리운 보호막에 막혀 

실낱같은 희망마저 짓밟힌 채 불길 속으로 향하는 결말을 맞이할 뿐이었다.

정말 극적으로 파괴의 제왕에게 그간 흩뿌린 화염의 미미한 편린이라도 안겨줄 수 있다 한들

그건 탐욕스럽게 아귀를 벌리는 종말을 한층 자극할 뿐, 모두를 삼키는 최후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었다.




진홍의 집행자가 옥좌로부터 몸을 떠나보내고 있을 때라 해도 멸망은 옅어지지 않았다.

왕이 잠시 왕관을 벗는다고 왕이 아닌 게 아니듯, 

메이가 옥좌를 두고 홀로 돌아다닌다 해도 자신의 이름에 붙은 멸망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그녀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기에.

뒤집을 수 없는 마지막을 뒤집고자 홀로 있는 붉은 머리의 소녀를 덮치려 한 불운한 이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결코 손에 쥐어지지 않는 운명의 개찬을 꿈꾸며 찰나일지언정 희망을 품은 어리석은 족속들이 마주하는 것은

뇌파로 움직이며 언제나 메이를 수호하는 드론의 에너지 장벽과 생명을 태우는 일격, 그리고 차가운 비웃음이었다.




그런 파괴의 화신이, 인류가 멸망 전에 남긴 또 다른 형태의 멸망이 죽음의 요새를 타고 뽈뽈거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가 자꾸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메이는 전에 정찰했던 지역을 다시금 바라보며 어디서 피어오르는지 알 수 없는 의심의 근원을 찾고자 했다.

며칠 전에 칸이 호드를 이끌고 왔다 퇴각한 장소.

바위처럼 위장한 철충이 선홍빛 내용물을 뿌리며 터졌던 그곳.

웅웅거리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려오던 어딘가.

그때나 지금이나 딱히 이상함을 느낄 수 없는 초원과 이끼가 곳곳에 낀 드높은 절벽만이 맞이할 뿐이었다.


'저 절벽에 이끼가 저렇게 껴있었나?'


불현듯 위화감이 솟구쳤다.

메이는 옥좌의 고도를 올리며 동시에 광학미채를 작동시켰다.

나이트 앤젤이나 스카이 나이츠의 하르페이아 정도는 아닐지라도,

심판의 옥좌가 품은 다채로운 기능을 활용하면 다른 이들의 시선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

어느덧 절벽의 꼭대기를 내려다볼 정도로 올라가서야 상승을 멈추고 계속 지켜보기를 수 분,

괜한 노파심이었나 싶을 즈음에 메이는 펼쳐진 광경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절벽이 숨을 쉬고 있었다.

얼핏 보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미하게 꿀럭이면서, 꼭대기가 조금씩 갈라지더니 연체동물 같은 속살이 드러났다.

선홍빛 내장을 타고 이끼가 낀 바위들이 떼를 지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저거 그 철충들이잖아?'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한층 자욱하게 낀 이끼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철충들이었다.

절벽 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모자라 징그럽게 벌린 아귀에서 꾸역꾸역 튀어나오는 모습은 혐오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충격에 빠진 메이는 다급히 드론 몇 기를 탐색 모드로 전환하고는,

혹시나 싶어 준비한 은폐장을 활성화하고 문제의 입구로 날려보냈다.

몇 분 유지하는 게 고작이겠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자신의 준비성에 내심 감탄하면서도 머리 한켠에서는 드론의 실시간 전송을 통해 확인된 정보를 바쁘게 짜맞추기 시작했다.


'저건 절벽이 아니야, 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철충이었던거야. 

바위처럼 생긴 철충들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절벽형 철충이 일종의 이동요새 역할이었구나...네스트의 아종이라고 봐야 할까? 

칸의 보고에서 바위형 철충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지만 지휘를 할 법한 개체는 찾을 수 없었다고 했는데,

저게 연결체라면 얼추 말이 돼...이제야 퍼즐이 조금씩 들어맞는 것 같네'


사령관에게 굵직한 보고를 올릴 수 있겠다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고, 

메이는 옥좌를 조용히 절벽 꼭대기로 향하며 드론 중 한기를 갈라진 속살 안으로 내려보냈다.


'으엑, 징그러...꼭 사람 몸속을 탐험하는 것 같아. 완전히 식도잖아, 이거.

...이게 진짜 사람 몸이라면 오래 못살게 분명해. 무슨 종양도 아니고 바위형 철충들은 왜 저리 곳곳에 붙어있는 거야?

기분 나쁘게. 깊이는 또 대체 얼마나 되는 거고? 어림잡아도 수백m는 훨씬 넘겠는데? 

...저 안쪽에 있는 동그란 결정체가 코어인가?

저걸 파괴하려면 코어가 위치한 하부를 외곽에서 강한 화력으로 타격하거나 벌린 입구에서 폭탄을 투하해야 할 것 같은걸'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메이는 절벽 안으로 날려보낸 드론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다.

슬슬 은폐장이 한계에 다다를 시점이었다.

광학미채도 무한정 유지할 수는 없으니 적당한 시점에 퇴각해야 했다.

이 중요한 정보를 반드시 사령관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 와중에도 혹시 또 다른 정보는 없을까 하는 욕심에 시선을 돌리자,

바위가 줄을 지어 움직이며 근처 광산에서 뭔가를 짊어지고 오는 것이 보였다.




설마?

불길한 생각이 상상력을 토대로 형태를 갖춰가는 가운데, 순간 메이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아닐거야, 정리해보자. 철충은 기계에 기생하는데 이 일대에서 AGS를 발견한 기억은 없어. 

그렇다면 저 바위형 철충들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넘어왔다는 소리가 돼.

그곳이 저 절벽형 철충의 내부일 테고, 네스트와 비슷한 유형이라면 사출부위가 있을 거야.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어. 그저 항아리와도 같은 단순한 구조에 하단에 코어가 있을 뿐.

내부 벽면에 붙어있다가 사출되는 단순한 구조인 걸까?'


메이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다시 한번 드론을 절벽이 벌린 아귀 속으로 보냈다.

이제 시간이 없다.

아직까지는 들키지 않았지만, 만약 저들이 눈치챈다면 자칫 일이 귀찮아질지 모른다.

애초에 정찰을 목적으로 홀로 왔으니 무리하지 않고 돌아가는 게 최우선이다.

하지만 이건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상황이다.

처음에는 별다른 위협으로조차 여기지 않았지만, 

불과 며칠 사이에 큰 변화를 보여온 대상이니만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이번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상반되는 사고가 뒤얽히면서 조바심에 불을 질렀다.

온몸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다.

머리에 짊어진 것을 일사분란하게 절벽에게 먹이는 바위개미.




뭐라고?

바위형 철충들이 광산에서부터 짊어온 자원을 절벽이 벌린 속살에 집어 던지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투하에 드론은 이리저리 곡예비행을 하며 날아올랐고,

그 과정에서 촉수가 튀어나와 떨어지는 자원을 움켜쥐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광경을 생생하게 찍어 보냈다.

음식물이 위액에 소화되듯 광물이 차츰 흡수되며 형태를 잃어간다.

동시에 선홍빛 벽면이 올록볼록해지더니 금속제 외피로 둘러싸이고, 

이내 특유의 광택을 잃으며 바위와 이끼의 질감으로 변했다.


'세상에...철충을 탑재했다가 사출하는 구조가 아니라 생산한다고? 이거 사실상 생물과 별 차이 없는 거 아니야?!'


주변 환경에 맞춰 위장하는 적응력. 자원을 섭취해 개체를 늘리는 번식성.

메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몸이 떨렸다. 이 적은 지금까지 상대해본 적들과 다르다.

드론들을 급하게 회수하고 철수를 시도하려던 차, 

끔찍한 화폭의 언저리에서 바위형 철충들이 곳곳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시야에 명확히 들어왔다.

그 중 몇몇은 미동도 않고 진짜 바위마냥 자리 잡고 있더니 갑자기 부풀어 오르며 다른 형태로 변이했다.

기동형 바이오로이드와 유사한 모습이었다.




'이건 아니야. 정말 아니야'


여긴 낙원이 아니었다.

풍부한 자원은 희생자를 유혹하는 미끼였고, 동시에 포식자를 살찌게 만드는 양분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아직 포식자가 완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는 것.

신속히 오르카로 돌아가 이 내막을 모두에게 알려야만 했다.

메이는 옥좌의 방향을 오르카로 틀고는 호흡을 크게 내뱉었다.

광학미채가 곧 풀린다.

애초에 은폐기능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존재하는 거라서 아직까지 들키지 않고 버틴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다. 

저들은 메이의 존재 자체를 알아채지 못했으니 빠르게 거리를 벌리면 무사히 떼어놓을 수 있을 터. 


"툭"


살얼음같은 긴장감을 둔탁한 소리가 어그러뜨린다.

메이와 철충들의 시선이 모두 한 곳에 모인다.

하늘에서 떨어진 옥수수대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지 요란하게 절벽 주변을 튕기고 있었다.


"지니야!"


"어, 메이 대장님? 거기 계셨어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지니야를 향해 맹렬히 날아간 메이는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즉시 퇴각!"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니야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철충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에? 왜요? 그보다 옥수수 더 있는데 드실래요?"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여전히 태평한 지니야를 답답하다는 듯 다그치는 메이의 귀에 기분 나쁘지만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절벽에서 새어나오는 불규칙하게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

정체가 무엇인지, 어디서 비롯되는 건지 그렇게나 알고 싶었던 미지의 속삭임은 

이제 더이상의 의문을 남기지 않는 대신 명백한 공포로 꾸물텅거리며 기어왔고

그와 동시에 변태했던 철충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뒤늦게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지니야는 메이를 뒤따르며 철충들에게 미사일을 날렸다.

한발이 보기 좋게 철충에게 직격하자, 귀를 찢는 폭발음이 들리더니 주변의 철충들을 밀어냈다.


'저거 이젠 거의 반응장갑 수준이잖아...!'


원래대로라면 주변의 철충들까지 미사일의 범위에 휘말렸어야 했지만,

직격당한 철충이 분사한 압력이 일종의 쿠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대장님, 먼저 가세요! 남은 철충들을 유인할게요!"


살아남은 철충에게 기관포를 쏘며 주의를 끄는 지니야의 외침에 메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속도를 올렸다.




8

"대체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 거야!"


메이는 사령관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미안해, 걱정돼서 그랬어.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것 같아서...."


"나를 못 믿겠다는 거야? 나 혼자선 아무것도 못할까 봐?"


"그런 게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정찰 하나도 제대로 못 할 거라 생각한 거지!"


씩씩거리던 메이는 거칠게 뒤로 돌아 사령관실을 나갔다.

옆에서 조용히 있던 나이트 앤젤은 난처해하는 사령관에게 목례를 했다.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제 탓인데 괜히 불똥이 튀어서...."


"아니야, 지니야를 보내자고 한 건 나니까"


사령관은 머리를 긁적이며 컵에 담긴 물을 마셨다. 의도야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꼬였으니 목이 탈 수밖에 없었다.


"지니야는 상태가 어때? 수복실에 입원했다고 들었는데"


"좀 다치긴 했는데 심각한 정도는 아니에요. 넉넉잡아 일주일이면 퇴원할 수 있을 거라 들었습니다"


"병문안 가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깍지를 낀 양팔을 위로 쭉 뻗으며 가볍게 몸을 푼 사령관은 수복실로 발을 옮겼다.




"사여꽈님, 오셔써요?"


지니야는 침대에 누운 채 옥수수를 한가득 입에 물고 있다가 반갑게 인사했다. 

몸 곳곳에 붕대를 감고 있지만, 딱 봐도 중상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몸은 좀 괜찮아?"


"쌩쌩해요. 옥수수 드실래요?"


힘차게 건넨 옥수수를 보자니 왠지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면서 사령관은 한 손에 옥수수를 받아들고는 의자에 앉았다.


"메이 대장과는 별 일 없었어?"


"찾으러 간 지역에서 다가오시길래 옥수수 드실 거냐고 물었더니 화내셨어요"


한결같은 모습에 나이트 앤젤은 질린 표정을 지었고 사령관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실은...난 아직도 메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작게 한숨을 쉬는 사령관의 얼굴에 난처한 그림자가 드리우는 걸 보면서 지니야는 옥수수를 하나 더 집어들었다.


"아직도 내가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건 알아. 이런 나를 믿고 따라주는 너희에겐 그저 고맙기만 하고.

내가 누구인지,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어떤 상황인지 미처 파악하기는커녕 목숨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을 때

너희는 그런 나를 이끌어주고 신뢰가 흔들리지도 않았지"


잠시 라비아타의 겸연쩍은 얼굴이 스쳐 지나가서 입가에 쓴웃음이 묻어나왔다.


"너희는 나를 최후의 인간이라며 이 세상을 다시 재건을 구원자로 여기지만, 나에겐 너희야말로 삶의 구원이야.

그렇기에 한명 한명이 소중해. 가능한 한 저마다 깊이 이해하고 교감하고 싶어"


기억상실 가운데 철충의 존재와 그들과 싸우는 법은 이상하게 잘 떠올라 그걸 토대로 이 자리에 이르렀지만,

마리와 칸, 레오나, 아스널 등 자신의 의도를 잘 해석하고 그에 맞게 부대를 운용하는 지휘관의 배려와 

전폭적인 믿음이 없었더라면 결코 지금과 같은 나날을 맞이하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메이만큼은...솔직히 말해, 아직도 간혹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앞이 보이질 않아"


첫만남부터 그랬다. 자신만만하게 환영파티를 요구하는 모습부터 당찬 성격일 거라 짐작은 했지만,

경솔하고 순간의 감정에 휩쓸리던 오르카 입성 당시 병사들의 급양 상태를 개선하겠답시고 벌인 소란통에 

다른 지휘관들은 어처구니없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장단을 맞춰줬다.

하지만 메이는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얼추 한 사람 몫을 할 정도로 성장하고부턴 태도가 보다 누그러지긴 했다.

여전히 야영지 위치를 잡는 안목이 형편없다며 까면서도 

화려한 폭죽놀이를 보여주겠다며 구시대의 화약을 모조리 터뜨리질 않나,

낯이 뜨거울 정도의 수영복을 입고선 오일을 발라주겠다면서 호의를 비추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사령관 자신은 분명 예전보다 여러 가지로 성장했고, 성숙했다.

그렇다면 그에 따라 마음을 열 법도 한데, 메이는 이젠 시선을 마주하기는커녕 말도 하다가 말고 어영부영 끝내기 일쑤였다.

섬길 주인으로서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여줘 날 선 자세로 응대하던 바닐라와도,

과거의 아픈 기억으로 인해 인간을 믿기 주저하던 티아멧과도 결국 진심을 나눌 수 있었다.

심지어 칼날을 들이밀며 위협했다가 그 행동이 본인을 묶는 족쇄가 되어 자멸까지 각오했던 라비아타마저 

지금은 사령관을 삶의 새로운 등불로 깊이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호의가 아예 없는 것도, 그렇다고 거리를 좁힐 생각도 없어 보이는 메이와의 미묘한 관계는

사령관에게 이따금 장난삼아 놀려먹을 신선한 자극이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 계속해서 쌓이는 부담으로 덩치를 키워가던 차였다.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면 그저 부끄럼 많은 소녀처럼만 느껴져.

하지만 임무를 주제로 대화할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당차고 자신만만한 지휘관이 눈앞에 있지.

물론 다른 지휘관들이 공사구분을 못한다는 건 아니지만, 대화라는 게 그저 내용의 전달이 전부는 아니잖아.

단어와 문장이라는 틀을 떠나 어조, 눈빛을 통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어.

한없이 모자란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보내는 신뢰, 기대...그 따스함을 나도 돌려주고 싶어지거든.

그런데 메이는 근본적으로 어떤 벽이 중간에 서 있는 것 같아"


"그 작은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는 거대한 자존심과...동경이겠죠"


중간에 서 있던 나이트 앤젤이 입을 열었다.


"메이 대장은 지휘관으로선 그럭저럭 믿을만해요. 성격도 말투도 재수 없고 가슴도 하등 쓰잘데기 없지만...

저희 바이오로이드들이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과 달리, 본인의 판단 하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자아를 타고났죠. 그건 그에 걸맞는 안목과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고요"


상관의 뒷담화를 좀처럼 들을 기회가 없던 지니야는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사령관님을 처음 보고 삐딱하게 굴었던 건 그래서였겠죠. 최후의 인간이라는 수식어만으로 나를 굴복시킬 수는 없다,

진정으로 감화시켜봐라...그리고 땅꼬마의 호기로운 시험은 백마 탄 왕자님이 멋지게 뛰어넘었지요"


"내가?"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지세요. 

사령관님을 따르는 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은 단순히 사령관님이 유일한 인간이라서 따르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나이트 앤젤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갔다.


"문제는 오만하게 모두를 내려다보거나, 최소한 마주보기만 했던 소녀의 여린 감성에 우러러볼 동경이 심어졌다는 것 아닐까요.

그런 감정은 전에 겪어본 적 없을 테고, 그렇기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자신의 심정을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거에요, 분명"


생각해보니 메이가 보여줬던 행동엔 분명 모순이 있었다.

훌륭한 몸매의 바이오로이드들이 과감한 노출로 달려드는 일상 속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자신도 

순간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할 정도로 인상적인 디자인의 수영복을 입고는 들이대던 여름이 생생한데,

나중엔 키스는커녕 팔씨름을 하자고 찾아와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발렌타인이니 드디어 호의를 드러내고 어른의 계단을 넘으려는구나 하는 기대에 콘돔을 넣어둔 뒷주머니에 손이 갔었지만,

쪼르르 달려와 한다는 소리가 그거였으니 귀여운 맛에 놀려먹으면서도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흉물스러운 가슴을 들이대기만 해도 이야기 끝인데...쳇"


"응? 뭐라고 했어, 나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혀를 차며 혼잣말을 하던 나이트 앤젤은 사령관의 물음에 정색하며 표정을 고쳤다.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메이 대장은 생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접하면서 방향을 제대로 못 잡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본인도 답을 모를 겁니다. 자신만이 밤하늘에 찬란히 빛나는 별이었는데, 이제 더 밝은 별이 눈앞에 나타났으니까요.

바라보기만 할지 다가가야 할지, 다가간다면 거리를 얼마나 좁혀야 하는지...

어쩌면 다가갔다가 다 타버린 유성처럼 사라질지 모른다고 괜한 우려를 품고 있을지도요"


일관성 없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그래서였을까. 사령관은 최근 유독 까칠하던 메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메이가 좀 더 단순한 성격이라면 좋았을 텐데. 그 앳된 감성은 놀려먹는 맛이 있지만,

그러면서도 지휘관으로서 날카롭고 철저한 모습을 품고 있으니 가끔은 동일인물인가 싶을 때가 있어"


"우물우물...그건 대장님 나름의 마음 씀씀이일 거에요"


지니야가 마침내 옥수수를 다 먹어치우고는 말했다.


"대령님이 하신 이야기는 처음 들어서 잘 모르겠지만, 메이 대장님은 임무에 있어서 굉장히 철저하세요.

제가 철충을 유인하는 사이에 먼저 가시라고 하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날아가셨거든요"


살짝 당황한 사령관의 표정에 아랑곳않고 지니야는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전 전혀 섭섭하지 않아요. 그건 저를 소홀히 여겨서가 아니라 굳게 믿기 때문이라는 걸 아니까요.

둠 브링어는 주어진 명령을 반드시 수행하고, 대장님은 수행할 수 있는 명령을 내려주세요.

그걸 아니까 괜히 걱정하는 모습은 오히려 덤이 되거든요"


확실히 지니야는 철충 다수와의 교전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무사히 홀로 귀환해 이렇게 입을 재잘거리고 있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크게 다친 것마냥 위로하면 오히려 그게 더 부담이 되겠지.


"뭐, 저 말대로긴 합니다. 메이 대장은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작전을 짜고 지휘하는 것만큼은 철저하니까요.

그 호전적이고 과시하려는 성격이 가끔 덤으로 붙긴 하지만, 

저희는 대장의 작전을 의심하지 않고 대장도 작전을 수행하는 저희에게 불필요한 걱정을 내색하지 않습니다.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니"


틈만 나면 이 악물고 줄기차게 시비를 거는 나이트 앤젤이었지만, 지금은 충성스러운 부관으로서 상관을 인정하고 있었다.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전략적 선택을 대신하기 위해 나타난 게 대장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겠습니다만.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믿음, 그 판단을 토대로 움직이는 부하들에 대한 믿음. 둠 브링어는 믿음으로 엮여있습니다.

손발이 명령을 내리는 뇌를 의심하지는 않듯이 말입니다"


말을 하다 말고 시선을 떨어뜨린 나이트 앤젤은 자신의 눈을 처음으로 가로막는 것이 흉부가 아닌 발이라는 사실에 몸을 떨었다.


"...그런데 왜 본인의 몸에는 믿음을 싣지 못하는 걸까요? 그 커다란 지방을 출렁거리게 달고 있으면서?

타고나도 못 써먹는 꼬맹이라니...!"


증오로 점철된 벽이 몸을 부르르 떠는 걸 진정시키며 사령관은 주의를 돌렸다.


"그럼 메이가 나와 대화를 할 때마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소녀의 감성과 지휘관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이라는 거지?"


"...잠시 못 볼 꼴을 보였군요, 죄송합니다.

네, 그렇지요. 사적으로 만날 때는 시대에 뒤떨어진 연애코스를 A부터 Z까지 밟아가려 낭만을 꿈꾸는 꼬마애,

임무로 대화를 나눌 때는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지휘관.

뭐가 됐든 사령관님과의 거리를 좁히기에는 답이 안 나오는군요. 그냥 눈 딱 감고 덮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완력도 별로 없는 땅꼬마니까 억지로라도 한번 기정사실 만들면 차라리 속이 편해질지도 모르겠는데요"


"그건 좀...난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고 싶고, 

솔직히 말하면 여느 바이오로이드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메이의 반응을 지켜보며 놀려먹는 것도 재미있거든. 

다만 미묘하게 느껴지는 거리감이 도통 줄어들 모습이 보이질 않아 답답하던 차였어.

하하, 메이가 큰 공을 세우고 들떠서 안아달라고 하면 속이 편하겠는데"


"하긴 홧김에 불장난한다는 말도 있던가요.

폭격으로 불 지르는 건 좋아하면서 사령관님과의 관계에 불 지를 생각은 왜 안 하는 건지...

전에 메이 대장이 사령관님을 보고 저 하늘의 별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거리감만큼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도란도란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벽 너머에선 지니야가 좋아할 옥수수가 한가득 들어있는 바구니를 든 메이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9

"그곳에 있는 절벽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철충이라고?"


보고를 위해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메이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은 하나같이 믿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마냥 방치해두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사령관? 신속한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보는데"


레오나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메이가 직접 확인한 내용이니 의심의 여지는 없겠지. 자원을 섭취해 철충을 낳고,

그렇게 태어난 철충은 뛰어난 적응력을 토대로 변이까지 한다...게다가 폭발이라니, 성가시게 됐어"


처음 접하는 유형의 적을 두고 사령관은 미간을 좁히며 팔짱을 꼈다.

낙원이리라 생각했던 이 섬은 철충의 사육장이었던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사실상 무해한 수준이라 소극적으로 처리하고 있었습니다만, 

위험성이 커진 이상 해당 지역에 병력을 투입해 목표 철충을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저희 스틸라인에게 맡겨주신다면 즉시 출격하겠습니다"


마리가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절벽을 통째로 박살내야 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강한 화력이 필요하지 않겠나?

그렇다면 캐노니어보다 적합한 선택은 없겠지"


호기로운 목소리와 함께 아스널이 눈을 빛냈다.

저 눈빛은 군공을 욕심내는 눈빛이 아닌, 그걸 빌미로 단둘만의 밤을 욕심내는 눈빛임이 분명하다. 

이에 사령관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아스널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몇 번에 걸친 정찰에 의하면 절벽의 높이는 수백m를 훌쩍 넘는다.

철충의 덩치가 그 정도라면 장갑의 두께도 상당할 것이기에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유효한 타격을 줄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그 형태와 지형조건을 감안하면 원거리 포격이나 공중폭격으로 선택지가 사실상 강제된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얌전히 정기를 빨리라고 강요하는 듯한 현실에, 

사령관은 한 마리의 개미가 되어 점점 개미지옥으로 끌려가는 상황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허공에 화면이 전개되며 닥터의 얼굴이 나타났다.


"오빠, 큰일 났어! 오르카 내로 철충 몇 마리가 침입한 것 같아!"


"철충이? 그럴 리가? 지난번에 보안 레벨을 대폭 강화하지 않았어?"


"그랬는데...보안을 지나치게 강화한 나머지 자재를 반입할 때마저 알림이 뜨길래 일정 크기 이하는 무시하도록 해놨거든.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얼마 전에 브라우니 언니들이 가지고 놀던 철충들은 덩치가 작아 보안에 안 걸리겠더라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CCTV를 확인해보니 몇몇이 오르카 내로까지 가지고 온 걸 방금 확인했어"


울상인 닥터의 고백과 함께 마리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부하의 관리소홀은 지휘관의 책임.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부끄러움을 억누르면서 떨리는 게 느껴지는 비장한 목소리로 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급작스럽게 휘몰아치는 상황을 수습하는 게 우선이다.


"현재 우리는 전에 조우한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의 철충과 맞서고 있으며, 지금까지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 습득한 정보를 고려했을 때 가능한 한 신속하게 대상을 처치해야 한다고 판단된다.

아스널은 캐노니어를 이끌고 목표 지점으로 향하고, 마리는 스틸라인으로 캐노니어를 호위할 것.

다만 상대가 아직도 숨기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 전황이 여의치 않다 싶으면 지체없이 퇴각해.

그리고 오르카 내의 철충을 수색해야 하니 시티 가드와 몽구스 팀에게 내용 전달해줘.

나도 직접 찾아볼게"


사령관의 지시에 다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착잡한 표정으로 일어나 자리를 뜨려는 마리의 귀에 따스한 숨결이 속삭여왔다.


"그리고 부하의 관리소홀에 대한 벌은, 오늘 밤 그 몸에 물을게. 누나"


허리에 부드럽게 감기는 팔을 느끼며 마리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볼이 발그레지면서 아까까지 굴욕과 수치로 물들었던 눈에 의욕이 깃들었다.


"...읏, 감사합니다, 각하"


이렇게 하면 아스널과의 목숨을 건 밤을 최소한 다음 날로 미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3P가 되겠지만 그때는 죽음이 확정된 시점이니 뒷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결연하게 의지를 다지는 가운데 허공에 닥터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참, 오빠! 부탁할 게 있는데, 오르카 내에서 철충을 확보하면 그 샘플을 좀 가져다줘.

아무래도 연구를 해봐야 할 것 같아. 가능하면 살리는 게 좋겠지만, 죽여도 상관없어"


"알았어.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디에 얼마나 숨어들어왔는지 알아?"


"방금 전부 파악 끝났어. 한 손에 꼽을 정도야"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블랙 리리스와 함께 사령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0

"저게 그 철충인가? 절벽은 저것밖에 보이질 않으니"


아스널이 쾌활하게 말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 언제나 거침없이 사령관에게 달려들곤 했지만, 

나름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행하는 동침은 한층 성취감을 안겨줬다.

무엇보다 이렇게 명분을 만들어 들이대면 평소에는 기를 쓰고 도망치려 들거나 몸부림치던 사령관도 

모든 걸 포기하고 얌전히 잡아먹혔다.

물론 저항하는 걸 힘으로 억눌러 강압적으로 플레이하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으로 다가왔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에 굴복해 몸도 마음도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맡기며 눈을 질끈 감는 사령관의 얼굴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배덕감을 맛보여줬다.

그러다 밀려오는 쾌락에 차츰 달콤해지는 호흡을 타액과 함께 주고받다보면 

어느새 더 강렬한 자극을 갈망하는 눈망울로 아스널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는 사령관의 목소리.

이 모든 걸 상상하니 벌써부터 아랫배가 두근거렸다.  

저 절벽을 통쾌하게 박살내고 당장에라도 오르카 호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보고 내용에 의하면 분명하다. 스틸라인이 책임지고 지켜줄 테니, 마음껏 화력을 쏟아붓도록"


마리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은 군인이고, 군인은 전장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전장은 어디에나 있다.

전장에서의 안일함은 죽음으로 직결되며, 부하의 안일함은 자신의 안일함.

정박한 섬에 별다른 위협이 없다고 다들 긴장을 풀 때도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으나,

평소 고생하는 병사들에게 약간의 휴식을 줘도 되겠지라 생각한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왔다.

그것도 다른 지휘관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그 작태가 까발려졌으니 마리에게는 그보다 치욕스러운 일이 없었다.

비록 실제로 목숨을 잃는 것은 아니라지만,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지휘관이라는 중책은 무거운 짐이 어깨를 짓누르게 마련이고

그 짐 중에는 자존심도 있었다.

마리 하나만의 자존심이 아닌 스틸라인의 자존심.


'저 부대는 철충에 대한 경계를 하기는커녕 공 삼아 가지고 놀다 기지 내부로 반입까지 한 대단한 공훈을 세웠대.

과연 군기가 보통이 아니네~우리 발할라는 감히 따라 할 수도 없겠어~?'


귀부인마냥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도도한 미소를 짓는 레오나의 눈웃음이 사정없이 온몸을 찌르는 환상이 보였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고 감당할 수도 없는 미래.

그렇게 굴욕의 수렁에 빠져가는 마리를 향해 사령관이 몸소 손을 뻗었다.

이 내가 목숨 바쳐 지켜야 할 대상이 나를 구해줬다는 송구함.

더럽혀진 명예를 만회할 무대가 갖춰졌고, 앞선 실책에 대한 추궁은 다가올 밤에 육체의 대화로 탕감하는 게 기약된 상태였다.


'벌은, 오늘 밤 그 몸에 물을게. 누나'


풋풋함이 느껴지는 10대의 미성숙한, 그렇기에 동시에 앞으로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기대되는 신체에 깃든 사령관이 

자신의 귀를 간질거리며 달달하게 속삭인 고백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래도 나름 남자라는 듯이 마리의 허리를 부드러우면서도 힘있게 감아올리던 팔의 근육.

그와 동시에 스친 허벅지 사이에서 언제까지나 소년은 아니라고 홀로 우뚝 서 강하게 존재감을 주장하던 촉감을 떠올리니

마리는 숨이 가빠지고 온몸의 피가 한곳으로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 '빨리 끝내고 사령관에게 안기고 싶다' '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 두 사령관은 침을 삼키며 각자 부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자, 캐노니어! 포탄을 장전해라! 이 섬의 지도를 다시 그려줄 때가 됐다!"


"스틸라인은 위치로! 현 지점을 사수하라!"


절벽을 향해 무장을 조준하며 강철의 비를 퍼부을 준비를 하는 비스트 헌터와 파니를 둘러싸고

유난히 퀭한 모습의 브라우니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연속된 동작으로 경계태세에 임했다.

그 곁엔 여기가 이승이 아니라는 듯한 표정의 이프리트와 

시선만으로 뒤통수를 찔러 죽일 기세의 레드후드가 자리를 잡았다.

잠시간의 정적.

거세게 불어올 폭풍의 전야를 깬 것은 가열찬 포탄음이 아닌 불규칙한 웅웅거리는 소리였다.


"저 소리는...?!"


처음 듣는 이는 정체를 의아해했다.

감이 날카로운 이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메이의 보고를 곁에서 들었던 두 지휘관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당황하지 말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해라!"


호령과 동시에 주변의 바위가 꿀렁거리더니 기괴한 형태로 변해 바이오로이드들을 덮쳐왔다.


"우왓! 이건 예상 못 했지 말임다!"


브라우니는 말로는 당황하면서도 지체 없이 소총을 조준해 철충에게 사격을 가했다.


"퍼펑!"


열기구가 폭발하는 굉음과 함께 철충이 터져나갔다.

선홍빛 내장이 조각조각 흩날리면서 마지막으로 맥동하고, 몇몇 병사들은 강한 압력으로 인해 넘어졌다.


"물러서지 마라! 우리는 서서 죽는다!"


레드후드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넘어진 병사들은 빠르게 자세를 고쳐잡고 몰려드는 철충들을 상대했다.


"발사!"


캐노니어는 물론이고 스틸라인도 바라던 신호가 들린 순간, 맹렬한 포탄세례가 절벽을 어루만졌다.

고막을 찢는 굉음이 울려 퍼지며 귀를 먹먹하게 만들고, 

화염과 바람이 어지럽게 엉켜 만들어진 장막이 녹색 이끼가 가득 낀 절벽에 드리운다.

다시는 볼 필요가 없다는 듯이 몇 겹이고 계속해서 장막이 깔리는 와중에 선홍색 얼룩이 곳곳을 장식한다.

아스널이 호기롭게 전개한 플로팅 아머리는 파괴의 교향곡이 멈추지 않도록 계속해서 지휘봉을 휘둘렀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연주가 멎고, 자욱한 연기와 화약의 하모니가 점차 퇴장할 즈음 아스널이 눈썹에 살짝 힘을 줬다.


'이상하군...폭발음이 생각보다 너무 컸어. 우리 포격만으로 발생한 게 아닌 것 같은데?'


"해치웠슴까?"


절대 해선 안 되는 대사를 내뱉은 브라우니의 뒤통수를 이프리트가 후려갈기고, 

마침내 모두의 눈에 흔적도 없이 파괴된 절벽이...보이지 않았다.

절벽이 있던 자리엔 이질적인 금속 벽이 올록볼록 숨을 쉬면서 조금씩 입을 열고 있었다.


"생각보다 약골은 아니군"


담담하게 소감을 밝힌 아스널이었지만 눈은 빠르게 움직이면서 뇌의 연산을 도왔다.


'이끼가 낀 바위면은 위장이었나? 그 철충들이 표면에 가득 붙어있었던 건가...

아까 보여줬던 터질 때의 단말마라면 포격으로 인한 충격도 상당부분 경감됐을 수 있다.

반응장갑을 두르고 있던 거나 마찬가지였군.

전투력이 미미해 우습게 봤지만 근접전시 진형붕괴를 유발하고 원거리 포격마저 반감시키는 다재다능함,

거기에 노골적으로 다른 바이오로이드의 형태까지 모방할 줄이야...

흡사 탐욕스럽게 주변을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아이와도 같지 않나.

그건 그렇고 우리 캐노니어의 포격으로 저 절벽형 철충의 외피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하다니...보통 비범한 맷집이 아니로군'


만일에 대비해 후방에 대기 중이던 에밀리를 불러와야 하나 고민하던 차,

절벽으로 위장했던 거대한 철충의 머리가 쪼개지며 무수히 많은 무리가 쏟아져나왔다.

민들레가 씨앗을 뿌리듯 하늘을 뒤덮을 정도의 철충들이 흩날리는 광경은 그 내막을 모른다면 장관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중에서 꿀렁거리며 기동형 바이오로이드와 AGS의 형태로 변이하는 모습을 본 병사들의 입에선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의 명예를 행동으로 보여줘라!"


마리가 발을 내딛으며 매섭게 내리꽂는 철충들을 위성포로 요격했다.

지휘관이 최전선에서 솔선수범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군세를 상대로 맞서는 모습에 병사들의 사기는 올라갔고,

수적 열세와 가늠을 할 수 없는 적의 다양한 공격방식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교환비를 기록해나갔다.

그때 웅웅거리는 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이젠 숨길 생각도 없나 보군...."


혀를 차는 아스널의 시선이 절벽형 철충의 벌려진 아귀로 향했고, 

유독 큰 꿀렁거림 끝에 기존보다 훨씬 큰 철충의 덩어리가 내뱉어졌다.

그대로 바닥에 추락한 덩어리는 기괴하게 일그러지더니 셀주크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저건...?! 매머드와는 또 다른 것 같은데?"


셀주크가 철충에게 감염된 결과물인 매머드와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엄연히 달랐다.

무엇보다 AGS에게 기생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변태했다는 점에서, 바이오로이드들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답의 구석으로 몰려갔다.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건 아는데 말입니다, 지금 저희가 상대하고 있는 적...싸우면 싸울수록 싸우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사람은 미래를 추구하며 사는 존재다.

설령 현재가 고되다 할지라도 빛나는 미래가 약속된다면 기꺼이 감내하고 나아갈 수 있다.

전장에서 목숨을 거는 병사들도 전투에서 승리한다는 미래를 그리기에,

나아가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기에 팔다리가 날아가고 동료가 죽어가도 달려들 수 있다.

하지만 밝은 미래로 다가갈 수 없다면?

오히려 전장이 확대되고 암운은 짙어지는 절망적인 결말이 그려진다면?

그 누구도 앞을 향해 발을 내딛지 못한다.

기껏해야 억지로 떠밀리며 공허한 한탄을 내뱉을 뿐.

눈앞의 철충은 그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자극하며 빠른 속도로 주변환경과 적을 학습하고 진화해 희망을 좀먹고 있었다.

원리는 알 수 없다.

아직은 충분히 상대할만하다.

허나 앞으로는?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음험하게 기어오는 불온한 기류는, 셀주크 형태의 철충 주변으로 작은 철충들이 모여 하나로 합쳐지면서

비스트 헌터의 157mm 예거 캐논마저 복제하자 본격적으로 거칠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병사들이라면 패닉에 빠질 법도 했다.

하지만 이들에겐 강인한 정신력과 냉철함을 겸비한 지휘관이 둘이나 있었고

두 지휘관은 이 순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아무래도 조우한 상대와 환경을 토대로 학습, 진화하는 건 거의 확실한 것 같군' '


' '이런 철충이 있다니, 앞으로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다' '


' '아직까지는 병사들을 다잡아 전투를 지속해볼 여지가 있지만 슬슬 리스크도 고려해야 한다' '


' '전황이 여의치 않다 싶으면 지체없이 퇴각하라는 당부도 있었지 ' '


' '작전상 후퇴를 하기엔 명분도 타당성도 있다. 무엇보다 이쯤에서 퇴각하면....' '


'자신만만하게 군공을 세우고 그걸 빌미로 사령관에게 동침을 요구할 생각이었지만...

어쩌면 역으로 위축된 나를 배려하는 사령관의 리드를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난 부하의 관리소홀에 대한 벌과 이를 만회할 기회마저 살리지 못했다는 질책까지 겹쳐 사령관 각하에게 유린당하겠지'


'평소 내가 적극적으로 달려들거나 서로 대등하게 정을 나누곤 했으니, 

가끔은 내가 리드당하면서 사령관의 거친 욕망을 온몸으로 받아주는 것도 괜찮겠군'


'덜 여문 소년의 육체로 난폭하게 달려드는 횡포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능욕당하는 플레이라니...

새로운 영역에 눈뜰지도'


'사령관이 입으로는 따스한 위로를 고하면서도 

내 입에는 난폭한 물건을 물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봉사할 수밖에 없는 플레이...이거 좋은걸'


' '누나, 벌을 준다고 했지? 오늘 밤 엄마로 만들어줄게' 아아, 더이상 참을 수가 없다...!'


' '당장 작전상 후퇴다!!' '


"모두 침착해라. 우린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적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순서대로 퇴각! 적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올려라!"


"스틸라인은 결코 후퇴하지 않는다! 뒤로 전진할 뿐이다! 캐노니어가 후방으로 무사히 이동할 때까지 자리를 지켜라!"


끝을 알 수 없는 기괴한 적을 눈앞에 두고도 위축되기는커녕 뜨겁게 타오르는 두 지휘관의 지시에

병사들은 잠시나마 흔들렸던 멘탈을 굳건히 다지고 일사불란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철충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어둠이 자신들의 지휘관 깊은 곳에 숨어있다는 것은 모른 채.




11

"도착했어, 사령관. 이번 적은 제법 까다로운 것 같은...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호출을 받고 온 레오나는 피골이 상접해 숨만 간신히 붙어있는 사령관의 몰골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말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 건지, 아니면 반응을 할 여력조차 없는 건지 뒤늦게 힘없이 손을 들며 인사하는 모습과

윤기가 흐르는 매끈한 얼굴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스널, 마리의 모습이 대조됐다.


"...밤에 잘 못 자서 그래. 전부 모였지? 작전회의를 시작할게"


크게 심호흡을 하며 억지로 기운을 차리고 어느 정도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사령관이 패널을 조작했다.

역시나 피곤에 절어있는 닥터의 초췌한 얼굴이 허공에 나타났다.


"어제는 많은 일이 있었어. 절벽형 철충의 퇴치를 시도했지만 생각보다 큰 저항에 일단 물러났고,

오르카 내부로 잠입...이걸 잠입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들어왔던 철충 때문에 한바탕 뒤집어지기도 했지.

결국 말끔히 잡아내 닥터가 조사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귀찮은 적인 모양이야.

자세한 건 닥터가 설명해줄 거야"


"하아암, 밤새 분석하느라 고생했어. 오빠, 나중에 상 줘야 해?"


축 늘어진 눈꺼풀을 비비면서도 기대감이 깃든 목소리로 들떠있는 닥터에게 긍정의 미소를 보내고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알아낸 게 여러 가지 있는데...그 공 같은 철충, 편의상 슬라임이라고 부를게. 슬라임은 여러 가지로 기존 철충들과 달라.

자체적으로는 별다른 공격능력이 없어 몸으로 달려드는 게 고작이고, 대신 주변 환경에 적응해 형태를 바꿀 수 있어.

가벼운 공격에도 쉽게 터질 정도로 내구력도 약해"


어제 창고에서 발견한 슬라임을 펜리르가 호기롭게 덮치고, 

뻥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붕 뜨면서 보관해둔 물품을 쓰러뜨렸다. 

함께 터져 나온 선홍빛 내장이 천장과 벽에 엉망진창으로 달라붙으며 그로테스크한 광경을 만든 와중에

다급히 달려온 안드바리는 눈앞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페로의 앙칼진 훈계를 들으며 힘없이 대청소를 하던 펜리르의 축 늘어진 귀가 아른거렸다.


"문제는 그 터질 때의 압력이 보통이 아니야. 어지간한 바이오로이드는 충분히 날려버리고도 남을걸?

폭발, 인화성 물질을 품고 있는 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이 점 때문에 터뜨리기 쉽지만 터뜨리기 껄끄러워.

내용물은 선홍빛의 유동성 덩어리인데...이걸 연구하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해냈어"


닥터는 반응을 음미하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건 일종의 신경 뭉치야. 슬라임은 자체적인 판단력이 거의 없고, 상위 명령을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아 움직이나 봐.

그리고 그 상위 명령은 슬라임 외부에서 전달되는 게 거의 확실해"


근처에 가도 별다른 적의를 보이기는커녕 일방적인 선공마저 허용하는 우둔함,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치단결하여 과감히 움직이는 결단성.

슬라임이 보여줬던 의문점이 조금씩 해소되는 것 같았다.


"이쯤 되면 답은 거의 풀린 거나 마찬가지지. 며칠에 걸쳐 모인 정찰결과를 종합하면 절벽으로 위장해있던 철충이 상위 명령개체야.

기존 철충 중 네스트와 가장 흡사하긴 한데, 흥미로운 건 슬라임을 단순히 수납해두는 게 아니라 직접 생산한다는 거지.

이 섬의 자원을 섭취해 그걸 토대로 계속해서 개체를 늘린다는게 확인됐어. 정말 대단하지 않아?

AGS 등의 숙주에 기생해야 하던 기존 철충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한 거야!

물론 그 결과물이 상당히 나약하긴 하지만, 환경에 대한 빼어난 적응성과 어마어마한 속도의 진화를 감안하면 앞으로의 모습이 기대돼.

기존의 철충도 상당히 매력적인 연구대상이지만, 이번 발견은 이보다 더 나아가 생물과 흡사한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봐도 될 거야.

하긴 생물도 따지고 보면 섬세한 생물학적 기계라 해도 무방하니까. 과거 블랙리버가 철충의 소재를 인간에게 이식했던 사례를 돌아보면...."


사령관은 흥분한 닥터의 말을 끊으며 진정시켰다.

닥터는 언제나 믿을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지만 이따금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경우가 있었다.


"으...그럼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해줄게. 본론으로 돌아가서 슬라임과 절벽형 철충, 얘는 네스트라라고 부를까? 

네스트라는 서로 신호를 주고받아. 

슬라임은 자신이 접하고 겪은 상황을 네스트라에게 보고하고 네스트라는 그걸 토대로 슬라임을 생산, 지휘하는 거지.

네스트라가 뇌라면 슬라임이 눈과 손발 역할을 담당한다고 보면 될 거야"


웅웅거리는 소리의 정체가 밝혀지자 조각난 퍼즐이 하나둘 맞아떨어져 간다.


"잠깐, 슬라임이 보고 들은걸 네스트라가 보고받는다면 오르카에 침입한 슬라임들은? 우리 정보가 넘어갈 수 있다는 거야?"


불길한 생각이 든 사령관이 다급히 물었다.


"가능성은 있어. CCTV로 샅샅들이 이동 경로를 확인했는데 보안상 중요한 곳이 노출된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뜩이나 껄끄러운 적이니 이 이유도 더해 무조건 격파해야 해"


학습하고 진화하는 적이 안방까지 들어와 물끄러미 들여다봤을 거라 생각하니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모인 이들은 대책을 강구했다.


"네스트라를 격파하면 나머지는 무력화된다고 봐도 무방한가?"


"그럴 거야, 칸 언니. 어제 오빠에게 부탁해서 하나 생포했는데, 차단용기에 넣은 후부턴 이리저리 자극해봐도 아무 반응이 없거든"


"캐노니어의 포격으로도 네스트라에게 타격을 줄 수 없었다. 방어력은 초월적인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물론 에밀리까지 동원한 건 아니었지만...다시 한번 기회를 줄 수 있겠나, 사령관?"


"이번엔 내가 나서겠어"


메이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강력하고 정확한 타격이라면 당연히 답은 둠 브링어잖아? 난 그 녀석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기도 했으니 이 일에 나보다 적임은 없어.

지휘관의 품격이 어떤 건지 보여줄게"


가슴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자신만만하게 주장하는 메이를 보면서 사령관은 저울질을 시작했다.

근래 메이와의 관계로 고민이 많았으니 이번에 공을 세울 기회를 주면 이를 빌미로 거리감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이유가 어찌 됐든 칸과 마리, 아스널마저 일단 물러나야 했을 정도의 까다로운 적이다.

공명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실수를 할까 그게 걱정이었다.


"아, 그리고 적의 신호체계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하나 해결했어. 이 섬에 정박하고부터 유독 탐지 관련 기능이 먹통이었는데,

슬라임과 네스트라가 주고받는 신호와 이를 받아들이기 위한 외피가 교란작용을 하는거 있지?

방금 막 해석결과가 나와서 이를 토대로 탐지시스템을 개량했으니 이제 정상적으로 상황파악을 할 수 있을 거야"


신나게 재잘거리는 닥터가 능숙하게 주변의 기계들을 조작하는가 싶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오빠. 보고할게 하나 더 생겼는데?'


"무슨 일이야, 닥터?"


"아까 말한 대로 이제 정상적으로 탐지기능이 작동해. 네스트라와 주변의 슬라임도 정확히 포착이 되는데...네스트라가 움직이고 있어"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사실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섬은 처음 정박할 때부터 유독 레이더 탐지가 잘 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평소보다 정찰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철충은 나약하고 수도 많지 않았다. 특이할 것이 없는 아늑하고 평화로운 섬일 뿐이었다.

설마 자연스럽게 녹아든 섬의 일부가 적이었을 줄이야.

절벽이 철충일거라고, 그 절벽이 움직일 거라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다급하게 투입한 와쳐가 보내주는 영상에서는 그게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결코 빠르지 않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속도로 네스트라가 거체를 움직이는 광경에, 모두가 할 말을 잃을 뿐이었다.


"...저 덩치로 날아다닌다고?"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지?"


그 와중에도 지휘관들은 냉정을 유지하며 현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지금까지의 움직임을 종합해보면 네스트라는 적인 우리의 정보를 토대로 진화를 추구한 게 아닐까? 

앞으로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건가...만약 철충의 본대와 합류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하기 싫군"


레오나와 마리가 의견을 주고받으며 표정을 굳혔다.

사령관은 현 상황을 복기해봤다. 방심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저력을 과소평가한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전례 없는 파격을 무기로 들고 나온 이번 적은 가늠부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희망이라면 전례가 없다는 것 바로 그 자체였다.

이 특이한 시도는 철충 입장에서도 일종의 실험이었을거고, 오르카와 조우한 건 기막힌 우연이었다.

망망대해 가운데 자원이 풍족한 섬을 터전으로 삼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천천히 몸집을 불려 가던 나날,

공교롭게도 오르카 호가 정박해 적과의 동침으로 이어졌으리라.

철충의 입장에서는 막대한 정보와 경험을 쌓을 절호의 성장기회였고,

오르카의 입장에서는 철충이 점찍을 정도로 풍부한 자원이 매장된 섬에서 변변찮은 위협을 비웃어가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웃는 자가 누가 될지 좌우할 운명의 갈림길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 

네스트라가 무사히 이 섬을 벗어나 철충의 본대와 합류한다면 

철충은 습득한 정보와 경험을 바탕삼아 오르카 호를 일방적으로 유린하게 될지 모른다.

이쪽의 내막을 샅샅들이 까발린 상태에서 싸우는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양이었다.

반대로 네스트라를 격추하기만 한다면 철충의 참신한 시도는 완전히 물거품이 된다.

마침 섬을 벗어나 바다 위를 날아가고 있으니 떨구기만 하면 뒷수습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깔끔한 마무리로 이어진다.

양쪽 모두 충분히 걸어볼 만한 판이 갖춰졌다.


"네스트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격추시켜야 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고려하면 앞으로 크나큰 위협이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철충 본대에 합류하는 사태가 생기면 뒷감당이 안 될지도 몰라"


사령관의 선언에 메이가 다시금 제안했다.


"꼭 나를 위해 준비한 무대 같잖아? 하늘을 날아다닌다니 스스로 둠 브링어의 제물이 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야"


"...괜찮겠어?"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길목으로 향하는 듯한 느낌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떨치려 해도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를 못 믿는 거야, 사령관? 내가 누군지 잊었어?"


눈앞의 빨간 악마는 때로는 당차게, 때로는 쑥쓰럽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언제나 사령관을 즐겁게 했다.

지금은 지휘관으로서 위풍당당한 모습이지만 단둘이 사적인 대화를 나누면 또 눈을 못 마주치며 소심하게 굴겠지.

사령관은 애틋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메이라면 확실하겠지. 잘 부탁해"


신뢰어린 기대를 보이던 그 순간, 창 밖에선 다가올 미래를 암시하듯 별 하나가 떨어졌다.




12

"미쳤어요, 대장?!"


나이트 앤젤이 소리쳤다.

한자리에 모인 둠 브링어 대원들도 눈치를 보며 소근거리고 있었다.


"대장에게 못하는 말이 없네. 너무 기어오르는 거 아니야?"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정말 공사구분 못 하게 된 거 아니겠죠?"


평소와 다름없이 거들먹거리는 메이의 양 어깨를 붙잡은 나이트 앤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노려봤지만,

마주 보는 눈동자가 확신과 자신감에 차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이마를 짚었다.


"...다시 한번 확인하는 건데, 진짜 그렇게 진행할 생각인가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전부 계산 끝났고 너희들은 따르기만 하면 돼"




네스트라 격추를 위해 메이가 내놓은 작전은 과감하다 못해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상 이동요새나 다름없는 네스트라를 무너뜨리려면 외부에서의 타격은 소용 없다는 게 앞선 캐노니어의 시도로 확인됐고,

내부의 코어를 파괴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에는 대원 모두가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려면 네스트라가 주둥이를 열어야 하는데, 이는 외피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슬라임은 물론이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훨씬 많은 수의 슬라임과도 조우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제 슬라임은 오르카의 구성병력 상당수를 모방할 정도에 이르렀고

비록 개체 하나하나는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다지만 수적으로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

그나마 섬을 떠난 이상 더이상 자원을 먹어치우지 못해 추가적인 생산을 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게 작은 위안이었다.


'그마저도 기존 비축분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지만 말이지....'


결국 슬라임 무리와의 대규모 공중전은 피할 수가 없다.

그런 조건 속에서 주장한 전술은 정면으로 본대를 투입해 주의를 끌고 슬라임을 최대한 많이 유인하는 것.

그 사이 별동대가 들키지 않게 은밀히 우회해 폭격으로 네스트라를 친다.

하지만 확인된 외피의 내구력과 여전히 방어를 목적으로 붙어있을지 모르는 슬라임이 일으킬 반응장갑 효과를 감안할 경우

코어를 파괴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다.

이 작전 역시 별다른 결실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착각하도록 만드는 게 핵심이지"


메이의 계획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처럼 위장해 방심을 이끌고, 

빈틈을 노리며 네스트라의 주둥이로 또 다른 별동대를 침투시켜 내부의 코어를 향해 직접 미사일을 박아넣는다.

그 별동대는 메이 혼자였다.


"착각은 대장이 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이중으로 기만을 꾀하는 건 괜찮다 싶지만,

적의 아가리로 몸소 들이미는 위험한 역할을 대장이 직접 맡는다고요? 저도 있고 여차하면 레이스를 시키면 되잖습니까?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지면 그대로 지휘관을 잃을지도 모르는 리스크 큰 작전을 굳이 감행할 가치가 뭔지 설명 좀 해주시죠"


날선 비판을 꽂는 부관의 주장은 지극히 온당했다.

적의 방어력을 고평가해 나이트 앤젤을 후보에서 제외한다 해도, 메이의 미사일을 유도할 수 있고 은폐장까지 갖춘 레이스가

여러모로 더 적합함은 부정할 수 없었다.


"목표대상인 코어를 직접 본건 나 뿐이거든. 레이스를 투입한다면 보다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겠지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변수에 대한 판단과 대처를 종합하면 내가 직접 가는 게 확실해.

물론 그 경우의 수까지 반영해서 성공이라는 결과를 쟁취해낼 수 있다는 계산이 있으니까 이 내가 몸소 행차하는 거야. 불만 있어?"


"슬라임과의 공중전 규모가 작지 않을 텐데, 스카이 나이츠와 연계하는 건 어때요?"


"싫어"


"그럼 호위로 지니야나 실피드 몇몇이라도 대동하세요"


"그건 안 돼"


메이는 딱 잘라 말했다.


"지난번에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서 지니야가 부상당한 거 잊었어? 그거 다 전력 손실이야.

애초에 이번 작전은 은밀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게 핵심이니 혼자서 갈거야"


"그러다 대장이 격추당하면 그보다 큰 전력 손실은 없는데요"


"치밀한 계산을 거쳤다니까? 나를 못 믿는 거야?"


"물음에 솔직히 답해주시면 믿을게요"


팔짱을 낀 나이트 앤젤의 가늘게 뜬 눈에는 속내를 숨기는 메이의 모습이 여실히 보였다.

말로는 전력 손실이니 뭐니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 때문에 혹여라도 부하가 다치는 게 싫어서 애써 떼어놓는 게 뻔하다.

지난번에 지니야가 수복실에 입원할 당시 사령관에게 그렇게 화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기에 군소리 않고 조용히 있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화났던 게 아니라, 애초에 자신을 찾으러 나오지 않았더라면 지니야가 다칠 일이 없었기에 가슴이 아팠겠지.

수복실 너머에서 조용히 귀를 벽에 붙여 이야기를 엿듣던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메이는 그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은신에는 그리 재능이 없었다.

보나 마나 쓸데없이 큰 가슴 때문이겠지.

꼬맹이 같은 대장.

몸매만 음란한 대장.

부하들을 아끼면서도 일부러 내색하지 않는 대장.

사령관에게 연심을 품었지만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대장.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곁에서 대장을 보필해왔다.

대장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얼추 알 수 있었다.

그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 나이트 앤젤은 물었다.


"이번 작전, 솔직히 사령관님에게 점수 따려고 그러는 것도 있죠?"


메이가 움찔했다.


"...그래. 그래서 뭐?"


"에휴, 됐어요 됐어"


나이트 앤젤은 손사레를 치면서 그럼 그렇다는 듯이 한숨을 작게 쉬었다.

공사구분은 철저한 지휘관이었는데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

그만큼 사령관의 존재가 크게 다가왔다는 걸까.

그래도, 아니 그렇기에 섣불리 무리수를 둬서 두 마리 토끼를 놓치는 우행을 벌이지는 않겠지.

사랑에 빠진 소녀를 걱정하면서도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에도 믿어보기로 했다.


"대장이 다 계산했다니까 더는 이의제기 안 할게요. 제발 이번에는 그다음 단계에서 진도 좀 빼 봐요"


"무, 물론이지! 내가 멋지게 귀환하면 사령관은 감동적인 포옹을 하면서 사랑 고백을 할게 뻔해"


메이는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로 말 끝을 흐렸다.


"두고 봐. 이번에야말로 내 가치를 입증하고 저 하늘의 별처럼 빛나 보일 테니까"


별을 가리우는 태양이 기울어가며 창공이 새로운 색으로 수놓아질 때 즈음, 작전이 개시됐다.




13

하늘이 붉게 타오른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남국의 푸른 바다를 그대로 붙여 넣은 듯했던 광활한 하늘은

석양을 맞이해 강렬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화염과 선홍빛 살점이 가열찬 기운을 더해간다.

그토록 두려워하는 심연마저 발아래 두고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려는 철충의 야심 찬 비행이 가로막힌다.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살아있는 벽을, 

파멸을 고하고자 찾아온 저승사자의 무리가 또 다른 벽이 되어 가로막으려 하고 있다.


"와! 날려도 날려도 끝이 없어!"


실피드는 신나게 외치며 미사일을 발사했다. 또 다른 실피드가 보기 좋게 격추당해 불쾌한 파열음과 함께 내장을 흩뿌린다.


"우리의 모습을 따라하니 기분이 이상해요"


뒤이어 날아온 지니야가 실피드의 모습을 모방했던 슬라임의 잔해를 뾰루퉁하게 쳐다봤다.


"평정을...잃지 마세요...우리는 여기서...버티면 된답니다"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다이카의 목소리를 듣자니 평정을 유지하다 못해 긴장감이 늘어질 정도였다.

둠 브링어는 섬을 벗어나 어디론가 거체를 옮기는 네스트라를 저지하기 위해 상공을 휩쓸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스카이 나이츠를 부르는 편이 낫지 않아? 우린 폭격 전문이잖아"


"대장님을 호위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대장님이 호위하지 말라 하시니 걱정돼요"


"그 꼬맹이 대장은 이번에 점수 제대로 따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답니다. 

우리도 언제까지나 답답한 진도에 가슴을 치며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죠?

그러려면 저 귀찮은 슬라임들을 최대한 유인해야 하니 마음껏 날뛰세요"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지나가던 나이트 앤젤이 남긴 말에, 

그동안 다른 부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만 삼켜야 했던 과거가 떠오른 대원들은 타오르는 의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오늘만 무사히 넘기면 사령관의 품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초멋진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쿨하게 가보자고!"


의기양양해진 실피드가 화려한 곡예비행을 선보이며 슬라임들을 약올렸다.

이에 자극받기라도 한 양, 네스트라의 윗부분이 쪼개지며 수많은 슬라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본론입니다. 잘 부탁할게요, 다이카"


"걱정...마세요"


부관으로서 지휘관의 빈자리를 대신하며 종횡무진하던 나이트 앤젤은,

이때를 노렸다는 듯 크게 우회하며 별동대가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저희가 움직일 차례로군요. 이번 임무를 무사히 마치면 대장님도 행복해질 수 있겠죠...그 때 저는 이 세상에 없겠지만요"


"목표 지점에 잠입해 핵심을 타격하는 임무는 내가 수행해야 했다...난 대장의 미움을 산 무능한 폐급이다...."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공기 사이에서 우중충한 분위기로 한없이 처지고 있던 밴시와 레이스를 보고 나이트 앤젤은 고개를 저었다.


"만담은 거기까지 하고, 우리가 활약할 시간입니다.

거치적거리는 슬라임을 다이카 쪽이 붙잡아두고 있으니 이 사이에 저 짜증 나는 절벽을 두들기자고요"


절벽을 두들기자는 소리에 순간 나이트 앤젤의 흉부에 눈이 간 밴시였지만, 

이를 눈치채여 돌이킬 수 없는 분노를 온몸으로 받기 전에 봉투를 건넸다.


"이게 뭐죠?"


"마지막으로 하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대령님. 

제가 임무를 마친 후 거기 들어있는 군번줄과 버킷 리스트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세요"


...그 꼬맹이 대장이 어른의 계단을 넘기만 하면 밴시부터 사령관 방에 집어넣자 생각하고,

임무 후에 돌려줄 요량으로 봉투를 적당히 집어넣자마자 저 멀리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온갖 형태로 변이해 다채로운 편제를 자랑하는 슬라임의 대군을 다이카가 지휘하는 편대가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저쪽의 부담이 커지겠네요. 섬광처럼 날아서 본때를 보여줘 볼까요"


매끄럽게 미끄러져 가는 붉은 천사를 필두로 죽음이 네스트라의 옆구리에 드리운다.

요란하게 존재감을 뽐내며 시야를 어지럽히는 지니야와 실피드 쪽으로 안팎의 슬라임을 대부분 쏟아냈는지,

거암과도 같은 외피에는 반응장갑의 역할을 기대할 잔여병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무저항의 동체 위로 나이트 앤젤의 폭격이 소리 없이 내리꽂고

연이어 사이렌의 비명과 함께 측면에서 밴시가 스칠 듯 날며 파괴의 상흔을 새긴다.

예기치 못한 급습에 네스트라가 칠판 긁는 소리를 내며 그 거체를 비틀자 

이미 저 멀리 거리를 벌리며 날아가는 나이트 앤젤의 등에 달린 무장에서 검은 형체가 튀어나왔다.

아무런 조준도 없이 발사된 미사일은 무언가에 끌려가는 듯 방금 폭격당한 곳을 한 번 더 강타한다.


"여전히 훌륭한 유도에요, 레이스. 이제 물러나세요"


무전과 함께 은폐장을 둘렀던 레이스가 제트팩을 역분사해 떨어진다.

대상이 무엇이든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의 잔인한 유린이 맹렬한 찰나와 함께 지나가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펴본 폭격지는 심하게 우그러졌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 정도 공격으로도 무너지지 않고 버틴다고...? 대장, 이거 만만한 적이 아닌데 괜찮을까요?'




부관의 우려가 깊어지는 가운데, 메이는 이미 크게 반대 방향으로 돌아 모두를 내려다보는 고도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징그럽게 꾸물텅거리며 아우성치는 네스트라의 벌린 입이 한층 탐욕스럽게 갈라진다.

아직도 뱉어낼 슬라임이 더 남았는지, 웅웅거리는 소리를 흘리며 튀어나온 구체는 이미 실피드 일행에게 합류한 밴시를 뒤늦게 쫓는다.


'좋아, 바로 이 순간이야. 신속하게 한 방 먹이고 화려한 개선을 하는 거야'


선발대의 열렬한 공습이 아니었다면 이 기회를 잡을 수 없었으리라.

경악스러울 정도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상대에게 유효한 피해를 주기 위해서는 내부를 직접 공격해야 했고,

그러려면 굳게 닫힌 무저갱을 억지로 여는 과제를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저 멀리서 벌새처럼 춤을 추는 실피드 편대의 화려한 비행이 어느 때보다 기특하게 비쳤다.

메이는 미리 세팅한 옥좌의 광학미채를 작동시키며 천천히 접근했다.

현 상태에선 일정 이상으로 속도를 낼 수 없기에, 어느 정도 접근한 후엔 

이를 풀면서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코어를 향해 미사일을 투하한 다음 퇴각하면 작전이 완성된다.

네스트라의 내부를 지근거리에서 관측하고 코어의 모습까지 두 눈에 담은 자신이라면 

한치의 오차 없이 완벽한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음이 분명하다.

저 흉물스러운 철충은 산산조각나고 사령관은 그 어느 때보다 기뻐하겠지.

그 여세를 몰아 고백한다면 진심을 전하고 싶어도 닿지 않는 지금의 미묘한 거리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스스로 요구하기엔 낯부끄러워 차마 도달할 수 없었던 어른의 영역에 갈 수 있지 않을까.

메이는 침을 삼키며 급강하했다.

갑작스럽게 방문한 불청객을 뒤늦게 발견한 네스트라의 아귀에서 슬라임이 손님맞이를 하러 모습을 드러낸다.

예상대로 선발대의 도발에 제대로 넘어가 그 수는 몇 없었다.


"역시 너무 뻔해. 그래가지고서야 상대가 되겠어?"


오만하게 내뱉는 메이의 조롱과 함께 드론이 기민하게 움직이며 슬라임이 미처 다른 형태를 취하기도 전에 터뜨린다.

포도 터지는 소리가 나며 강한 풍압이 옥좌를 흔든다.


"윽, 귀찮기는...! 주제를 모르는 거 아니야?!"


순간 기우뚱했지만, 네스트라의 머리 꼭대기에 다다라 고개를 내미니 수백m가 넘는 내장의 출렁임 끝에 검붉은 코어가 보인다.

저것만 파괴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좋아, 멸망이네"


조준과 함께 버튼을 누르자 심판의 옥좌에서 미사일이 솟아오른다.

몇 초의 선회 후 목표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내리꽂겠지. 역할을 다한 메이는 폭발의 여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날아올랐다.

이제 남은 건 승자의 여유를 만끽하며 코어의 파괴와 철충의 붕괴를 확인하는 것뿐.

이윽고 피와 먼지로 물든 백기를 연상시키는 화염과 연기가 뒤얽혀 치솟으며 매캐하고 감미로운 종말의 냄새가 풍겨왔다. 




아늑하고 풍요로운 섬에서 오르카를 기만한 네스트라는 그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코어가 박살 나 거체가 힘없이 붕괴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승리의 공식인 메이의 폭격을 심장에 허락하고도 잠시 크게 흔들렸을 뿐, 

여전히 느리게 날아다니며 허공에 굳건한 벽으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어.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이래서는 안 돼"


메이는 경멸에 찬 눈으로 가증스러운 장벽을 바라보며 몸을 살짝 떨었다.

호흡은 가빠졌지만 머리는 차가워진다.

설령 전황이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을지라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철함을 유지하는건 메이가 지닌 가장 큰 강점 중 하나였고,

더러 지나친 호전성으로 표출될지언정 결과적으로는 원하던 목표를 이뤄내곤 했다.

이번이라고 다를까.

분명 상정하지 못한 변수가 있을 거라 판단하고는 빠른 속도로 다시금 네스트라의 입구를 향해 날며 정찰 드론을 내려보냈다.




미사일은 분명 네스트라의 코어를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검붉은 파편이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흩어져있었다.

그게 코어가 아니었던 게 문제지.

코어라 생각했던 건 가장 취약한 급소를 보호하기 위한 추가적인 갑피였고 

그 아래 분홍빛의 진정한 코어가 펄떡이며 생존을 자랑하고 있었다.

곳곳이 상처투성이지만 거칠게 맥동하는 주변으로 다시금 검붉은 껍데기가 조금씩이나마 자라나고 있었고

이를 방치하면 회심의 양동작전은 의미가 퇴색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간 보여준 놀라운 적응력과 진화속도를 감안하면 다음은 없다.

지금 바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질척질척하게 굴기는...그것도 이제 끝이야'


확실하게 숨통을 끊으려던 순간, 옥좌가 갑자기 무언가에 걸린 듯이 덜컥거렸다.


"?!"


허공에서 장애물에 걸릴 리가 없다. 당황을 억누르고 살펴보니 

네스트라의 안에서 튀어나온 촉수가 길게 뻗어나와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게...!"


드론을 조작해 빠르게 촉수를 절단했지만, 그 이상의 속도로 새로운 촉수가 벽면에서 꿈틀거리며 옥좌를 옥죄려 들었다.

다급히 패널을 전환해 보호막을 펼쳐보았으나 이미 골든타임을 놓쳐버렸고

설상가상으로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장이 뭉글거리더니 메이의 얼굴을 모방한 슬라임을 토해낸다.


"감히 날 조롱해? 배짱 좋은데?"


악에 받친 메이는 이를 갈면서 코어를 노려봤다.

저것만 파괴하면 된다.

아직 갑피는 충분히 재생되지 않았다.

미사일을 한방만 더 꽂으면 이 주제를 모르는 철충에게 저승까지 안고 갈 교훈을 가르쳐줄 수 있다.

자신의 얼굴로 역겹게 웃고 있는 멍청한 신경 덩어리 잡종들에게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를 더 짙게 만들 수 있다.




그림자?

고개를 든 메이를 맞이한 건 느린 속도로 닫히고 있는 네스트라의 입이었다.

이대로 가면 철충의 안에 갇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결단이 강요됐다.

심판의 옥좌는 이미 반쯤 내장에 묻혀 비행도, 발사기능도 제약을 받고 있었고

그렇다고 생존을 우선해 적을 멸하지 않고 퇴각한다면 오르카는 물론이고 인류의 미래에 큰 재앙을 남기는 꼴이었다.

무엇보다 이 작전을 자처한 자신의 자존심이 산산이 박살 나게 된다.

믿어준 사령관에게도 실망을 안기게 될 것이다.

그건 싫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머리가 뜨거워진다.

그 순간, 패널이 활성화되며 허공에 화면이 떠올랐다.




"해치웠나?"


저 멀리 보이는 네스트라의 흐릿한 윤곽 위로 화염과 연기가 치솟는다.

메이의 작전이 보기 좋게 맞아떨어져 성공적으로 미사일을 떨군 게 분명하다.

이제 골칫덩어리였던 철충은 바다로 힘없이 가라앉고 잠시나마 평화로운 일상이 찾아오겠지.

사령관은 과감한 전술을 멋지게 성공으로 이끈 메이를 어떻게 칭찬할까 고민하며 귀찮은 상대였던 네스트라의 붕괴를 지켜봤다.

연기가 조금씩 가라앉으며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불길한 정적이 감돈다.

네스트라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떠있었다.

설마 메이가 실패했나?

스쳐 지나간 생각을 온전히 자각하기도 전에 사령관은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것 자체에 큰 위화감을 느꼈다.

비록 사적으로는 허당에 끝을 모르는 순진함을 보여줄지언정, 지휘관으로서 역량을 널리 인정받는 게 메이다.

실패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메이도 완벽한 존재는 아니니 비틀거리는 순간이 올 수는 있지만, 

그 드높은 자존심이 실패라는 결과를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에 메이와 실패는 조합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 걱정이 된다.

현 흐름은 분명 상정 밖이고, 현황을 파악하며 그에 따른 대처를 하는 건 지휘관이라면 당연한 자세.

마리라면 솔선수범하여 위기를 몸소 극복하겠지.

레오나는 인과를 합리적으로 분석해 적절한 판단을 내릴 것이다.

칸은 애초에 빈틈을 보이지 않을 거고, 설령 휩쓸린다 해도 빠르게 빠져나올 터.

아스널은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임하면서도 중요한 순간엔 진중함을 잃지 않으리.

저마다 특색이 있지만 대의를 위한 일시적인 실패나 퇴각은 감당할 수 있는 그릇들이었다.

반면 메이는?

본인의 식견과 판단력을 신뢰하고 냉철한 정신을 토대로 과감성 있는 작전을 감행하곤 했다.

인간의 명령마저 거부할 정도의 권한은 그럴만한 능력을 토대로 주어진 것이었고,

드높은 프라이드는 실패와 퇴각이라는 개념 자체와 공존하기 어려웠다.

거센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나무는 쉬이 굽히는 갈대를 비웃는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태풍이 불면 나무는 꼿꼿함을 관철하다 결국 부러진다.

메이의 능력과 성격이 나무와도 같다면, 태풍이 부는 지금은 어찌 되는가.

어쩌면 일순간의 고집을 굽히지 못하고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는 게 아닐까.

사령관의 눈에 들기 위해 밤낮으로 뛰는 게 여실히 티가 나는 요즘이라면

조급함까지 품고 눈이 흐려질지 모른다.

가슴 한켠이 불안감에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사령관은 메이의 영상패널을 열었다.




"메이, 상황은 어때?"


갑작스럽게 뜬 영상패널의 주인은 사령관이었다.

그늘 속 첨탑에 한줄기 햇빛이 비친 것처럼, 그 얼굴은 너무나 반가웠고 소중했다.


"사령관...?!"


이런 상황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메이는 가슴이 감당 못할 정도로 두근거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절체절명인 상황에서 마주하는 희망은 지나칠 정도로 자극적이고 강렬했다.


"아까 연기가 나는 걸 봐서 말이야.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사령관이 문제가 생겼냐고 의심하고 있다.

나라면 확실하게 임무를 달성할 것이라 믿고 여기로 오는 걸 허락했다.

작전의 전권도 내게 위임했다.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지휘관 홀로 적진 중앙으로 돌입한다는 위험천만한 내용을 듣고도 나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 믿음에 부응해야 한다.

자칫하면 산채로 철충의 안에 갇혀 죽을 상황에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며 나를 의식하고 있다.

그 관심에 부응해야 한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기껏해야 철충이 코어를 갑피로 감싸고 있어 한 방 더 날리면 되고, 

옥좌가 묶여 좀 거추장스럽고, 입구가 닫혀 이대로면 갇힐지도 모르는 사소한 문제가 좀 겹친 정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눈앞이 어지럽다.

절대 사령관을 실망시켜선 안된다.

내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이 상황을 멋지게 해결하는 거다.


"뭐...? 그럼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잖아? 당장 빠져나와, 메이! 철충은 나중에 잡아도 되니까!"


사령관이 나를 다그치고 있다.

임무의 실패를 상정하고 있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없다.

난 화려하고 멋지게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거다.


"아닌데?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변수야. 다른 지휘관들이라면 당황하다 초라한 모습으로 실패자가 되어 보고하겠지.

하지만 난 달라"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이 박동이 나를 이상하게 만든다.

아까 말로 충분히 여유 있게 보였겠지?

당당한 모습으로 귀환해 결코 잊히지 않을 인상을 남길 수 있겠지?


"메이, 혹시 내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내겐 너의 안전이 최우선이야.

여차하면 알바트로스도 있고 무적의 용을 불러와도 돼. 대안은 많으니까 무사히 돌아와"


필요 없어.

사령관의 입에서 필요 없다는 말이 나왔다.

대안이 많다고? 다른 지휘관들 말야?

그럴 수는 없어.

누구도 내 대안이어선 안돼.

오직 나뿐이야.

나를 봐줘.

다른 이들과는 다른 특별한 나를 지켜봐 줘.


"...사령관, 그거 알아?"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 메이가 웃었다.


"사령관은 내게 있어 빛나는 별이야. 저 하늘의 별.

분명 처음에는 초라하고 빛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닿을 수 없는 멀리서 반짝이고 있더라?

아무리 손을 뻗어봐도 잡을 수 없었어. 닿지 않았어.

다른 이들처럼 온몸을 내던지면 품에 안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차마 그럴 수 없었어.

자칫했다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지만 끝내 추락하고 만 이카루스처럼 다시는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땅에 발을 딛고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수많은 다른 이들 중 하나로 전락하면 별의 주목을 받을 수 없으니까"


주먹을 쥔 메이의 손이 떨렸다.


"난 많고 많은 이들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아. 온전한 빛을 갈구하고 싶어.

비록 어떻게 저 하늘로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허공을 가르는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는 게 두렵지만, 또 다른 별이 되어 함께 빛날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진심을 고백한 후, 영상패널을 끈 메이는 옥좌의 자폭버튼을 눌렀다.

무슨 행동을 한 것인지 이해하기까지 잠시 시간이 걸린 사령관이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를 즈음, 

저 멀리서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네스트라가 안에서부터 터져나갔다.

전율이 이는 대폭발과 함께 붉은 잔해가 바다에 추락하던 그 순간, 하늘에서 별이 하나 떨어졌다.




14

완연한 노을빛이 오르카를 붉게 물들인다.

철충의 위협도 사라진 섬은 고요하고 아늑한 낙원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그 누구도 미소를 짓는 이가 없었다.


"...제 탓이에요"


석고처럼 굳은 표정의 나이트 앤젤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패닉에 빠져 눈물바다가 된 둠 브링어를 인솔해 복귀시키는 모습은 지휘관의 부재에도 흔들리지 않는 충실한 부관 그 자체였으나,

정작 그 지휘관을 잃은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책했다.


"그 건방진 꼬맹이가 생전 겪어본 적 없는 감정에 휘둘려 갈수록 위태로워진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겉으로 보이는 답답함에 힐난하고 압박하기만 했었죠.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은 오늘도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데 지휘관은 대체 뭐냐고, 언제까지 유치한 장난이나 하며 만족할 거냐고...

그게 숨통을 조이는 칼날이었던걸 몰랐어요"




아프다.

너무 아프다.

나이트 앤젤이 하는 말은 스스로를 탓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사령관에게도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쓰라리게 파고들고 있었다.

최후의 인간으로서 아리따운 바이오로이드들의 충성과 애정을 한몸에 받는 꿈과 같은 나날.

철충과 별의 아이, 외에도 여러 가지 위협이 있지만 자신을 둘러싼 세계는 달콤한 과실과도 같은 즐거움 속에서 그 열매를 알알이 키워갔다.

새로운 바이오로이드와의 만남, 인연, 관계...

그 사이에 소외되는 이가 있었고, 진심을 어떻게 표현할지 헤매는 이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외려 유희이자 장난으로 대했다.

다른 이들과 사뭇 다른 반응이 인상적이기도 했고, 다음번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진지하게 교감을 나누자니 그 섬세하고 복잡한 마음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스러웠고, 

자칫하다 상처를 주거나 드센 성격에 내가 상처를 입을까 두려움도 느꼈다.

그렇게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며 난 수많은 여성을 품에 안고 있었고, 메이는 여전히 홀로 외로이 있었다.

내겐 몸과 마음을 나눌 여자가 많고 많았지만 메이에겐 마음을 바칠 연모의 대상은 오직 나 한 명 뿐이었다.

그 차이를 몰랐다.

알면서도 외면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령관이 오르카의 지휘를 맡은 이래 처음이자 유일한 인명손실로 돌아왔다.


"...난 사령관으로서 실격이야"


주먹을 쥐며 나오지 않는 말을 애써 이어간다.


"나만 바라보고 따르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을 이끄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어느샌가 그 무게를 의식하지 않고 낙관주의로 임하고 있었어.

어차피 다들 나를 좋아하니까, 나 말고는 대안이 없으니까...그 가슴 속에 품은 절실함을 헤아리려 들지 않았어"




해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완연한 어둠이 깔리기 전에, 망각의 장막이 모든 걸 먹어치우기 전에 자신의 흔적을 필사적으로 남기려는 듯 마지막으로 찬란한 붉은빛을 토한다.

서글프게 떠나버린 메이의 머리색과도 같은 붉은빛.


"뭐야, 그 표정은? 이 몸이 왔는데? 환영 파티는 준비 되었겠지?"


들릴리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니 물에 흠뻑 젖은 채 드론 몇 기에 몸을 맡기고 떠있는 메이가 있었다.


"대장...?! 살아있었어요?"


"당연하잖아. 넌 내가 죽기를 바란 거야? 그렇게나 내 자리를 탐낼 줄은 몰랐는 걸"


당황과 분노, 반가움이 뒤섞여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 나이트 앤젤을 향해 당찬 웃음을 날리더니 메이는 자랑스럽게 땅으로 발을 디뎠다.


"어때, 사령관. 놀랐지? 비록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놓이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내 뛰어난 능력으로 목표를 달성하고 이렇게 돌아왔어.

마음껏 칭찬해도 좋아"


"메이, 너...!"


생각했던 것과 다른 끓어오르는 목소리에 메이가 움찔한다.

사령관은 꿰뚫을 듯한 시선과 함께 거친 발걸음을 옮기더니 그대로 손을 휘둘렀다.


"꺅...!"


손찌검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 메이가 눈을 꾹 감고 작게 비명을 질렀지만, 올라간 손은 내려올 기색이 없었다.

다만 강하게 껴안을 뿐.

사령관은 바닷물에 차가워진 메이의 몸을 으스러져라 껴안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해...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사령관...?"


포옹에 숨이 막힌다.

사령관의 심장박동이 전해진다.

들썩이는 어깨가 안쓰럽다.

물살에 휩쓸려 풀려버린 긴 생머리를 소중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따스하다.

숨죽여 흐느끼는 울음소리에 가슴이 미어진다.


"왜 그래...다 내 말대로 됐잖아. 울지 마, 제발"


이게 아니었을까.

내가 또 잘못 접근한 걸까.

이 거리감은 좁힐 수 없는 걸까.

난 계속 별 주변을 도는 위성처럼 하염없이 바라만 봐야 하는 걸까.

메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장은 너무 과격해요"


나이트 앤젤은 모닥불을 향해 작게 발을 휘둘렀다.

메이의 생환소식은 우울했던 오르카를 승전보로 새롭게 물들여 축제 분위기로 만들었고,

사령관의 지시 하에 섬의 풍부한 재료를 공수받은 소완이 실력을 발휘해 온갖 산해진미를 준비했다.

지금은 모두들 웃고 떠들며 만찬을 즐기다 밤이 안겨주는 아늑한 적막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해변의 모래사장엔 사령관과 메이, 나이트 엔젤이 모닥불을 두고 모여앉아 회포를 풀고 있었다.


"그치만...다 잘 될 것 같았는걸"


"누가 봐도 명백히 유언을 남기고 자폭하는 모양새였는데 퍽이나 그러겠네요.

땅꼬마라 좁은 틈을 수월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나 보죠? 그 쓸모없이 크기만 한 천박한 가슴이 걸려 바둥거리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자칫하면 대장의 둠 유모차와 함께 낑긴 채로 보기 좋게 터져버렸을 텐데"


신랄한 공격에 메이는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었다.


"어쨌든 작전대로 잘 풀렸잖아? 원래 전장이라는 건 생각도 못 한 변수가 튀어나오는 법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기지 있게 마무리한 거지.

겸사겸사 사령관에게 깜짝 선물로 안겨줄 생각이었는데...."


"그 선물이라는 거 두 번 받으면 심장마비로 죽을 거 같으니 다시는 하지 마세요.

아무리 드론에 몸을 맡겨 탈출할 수 있다고 해도, 옥좌를 터뜨리는 미친 짓을 왜 해요?

조금만 늦었으면 육편이 되고도 남았다고요. 바다에 내던져져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건 말하기도 지치네요.

당분간 대장은 다른 대원들이 고생하며 하늘을 종횡무진할 때 한가로이 오르카에서 짧은 양 다리를 꼬고 뒹굴거리기나 하겠죠.

참~ 모범적이고 타의 귀감이 되는 지휘관이십니다?"




울상이 되어 고개를 푹 숙인 메이의 곁으로 다가간 사령관은 부드럽게 어깨를 안았다.

놀란 숨소리와 함께 긴 생머리가 찰랑거린다.


"메이, 이번 일은 너무 심했어.

작전을 성공시키는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건 너의 안전이야. 네가 다치기나...잃기라도 하면 그보다 가슴 아픈 일이 있을 것 같아?

내게는 네가 정말 소중해"


커진 눈동자와 함께 메이의 볼이 점점 달아오른다.

걱정을 시켜 염치가 없어서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는 

고속도로를 달리듯 거침없이 내지르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는 데 급급하다.


"그, 그렇지? 난 유능한 지휘관이니까. 아무도 나를 대체할 수 없는걸. 이번에도 어쨌든 멋지게 목표를 달성했잖아?

그러니 사령관의 그 평가도 당연...."


옆을 보면서 읊조리는 메이의 턱을 부드럽게 잡고 돌린다.

한층 커진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 귀여운 꼬맹이의 진심을 헤아리고, 입을 맞춘다.

갑작스러운 첫 키스에 메이는 목각인형처럼 굳어져 입술을 포갤 뿐이었다.


"우으...?"


전기가 튀는 짜릿함이 지나고, 그보다 붉어질 수 없는 얼굴을 한 메이를 지긋이 바라본다.

가쁜 숨과 함께 흥분과 당황이 얽힌 표정이 정말로 사랑스럽다.


"지금 고백할게, 메이. 넌 훌륭한 지휘관이야. 너의 실력과 가치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어.

하지만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메이는 지휘관으로서의 메이도, 부끄러움에 발을 동동 구르는 수줍은 소녀로서의 메이도 아닌 메이 그 자체야.

어떤 모습이 진짜일지 고민하지 않아도 돼.

어떤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할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게 메이는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별이고, 그 별빛은 우리 사이의 거리가 어떻든 분명히 닿고 있으니까.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 다른 이와 비교하지 마.

넌 너대로 솔직해지면 돼"


마음의 응어리를 섬세하게 어루만져주는 고백에 메이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렇게 걱정 끼치고 실망을 안겨줬음에도 나를 바라봐주는구나.

나만 외로이 바라보고 있던 게 아니었구나.

메이는 사령관에게 달려들었다.

얼떨결에 당했던 아까의 키스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입을 맞추며 혀를 섞는다.

양 팔로 목을 꼭 껴안는다.

드디어 마음을 온전히 열어준 메이의 붉은 유성과도 같은 머리칼을 쓰다듬던 사령관의 손길은, 어느새 보드라운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탄력 있게 흔들리는 언덕을 감싸고 있는 젖은 옷을 능숙한 어루만짐으로 벗겨가는 사령관과

물기 어린 신음을 흘리는 가운데 양다리를 허리에 감으며 한층 강하게 안기는 메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이트 앤젤은 

말없이 모닥불을 조용히 떠나며 둘만의 자리를 만들어줬다.




15

"둠 브링어 주목! 드디어 그날이 왔으니 파티를 준비하세요!"


다급히 날아온 나이트 앤젤의 외침에 방에서 노닥거리고 있던 대원들은 깜짝 놀랐다.

그날이라고? 설마 그럴 리가?


"뭐야 뭐야, 진짜? 꺄하하!"


"그날이요? 진짜로요?"


패션 잡지를 읽으며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실피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배를 잡고 웃었고, 

지니야는 들고 있던 과자를 떨어뜨릴 정도로 당황했다.


"오늘을 기념일로 삼아야겠어요. 그 꼬맹이 대장이 드디어 어른이 되다니...! 이제 더이상 다른 부대를 바라보며 속앓이를 할 필요도 없다고요!"


가슴이 생겨도 이렇게 기뻐할까 싶을 정도로 들뜬 기색이 역력한 나이트 앤젤이 한 바퀴 빙글 돌더니 갑자기 박수를 딱 쳤다.


"아, 폭죽! 즐거운 날에는 폭죽이 있어야지요! 당장 가지고 올게요!"


폭풍처럼 몰아닥쳤던 밤의 천사가 그 못지않은 속도로 사라지자, 남아있던 이들은 상황을 다시금 곱씹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절대 이루어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버킷 리스트의 한 줄을 마침내 지우네요"


"기쁘다...대장이 마침내 목표를 이루었다...."


"어머, 어머...축하할 일이니, 폭죽을 준비해야겠지요...?"


"그건 아까 대령님이 가지러 가셨어요"




"팡! 파팡!"


여전히 상기된 얼굴의 메이가 돌아오자 둠 브링어가 성대하게 폭죽을 터뜨렸다.


"뭐, 뭐야?! 깜짝 놀랐잖아!"


"축하해요, 대장! 언제 졸업 하나 했는데...정말 장하네요"


눈물을 글썽이는 나이트 앤젤을 바라보며 메이는 크게 당황했다.


"졸업이라니? 무슨 소리야?"


"다 알아요. 사령관님께 진심을 전하고 드디어 어른이 됐잖아요? 일주일 동안 꼬맹이라고 안 놀릴 테니 오늘은 자랑스러워해도 돼요"


머뭇거리는 메이를 향해 실피드가 발랄하게 달려들었다.


"대장 대장, 사령관하고 몇 번이나 했어? 어떤 체위를 가장 좋아하고? 꺄아, 부끄러워~"


"어, 응. 나도 순간 당황했지 뭐야? 사령관이 그렇게 거친 면이 있었다니...갑작스럽게 입술을 들이대 키스할 줄은 정말 몰랐는걸"


"그 다음은요?"


"흠흠, 내가 할 때는 하는 여자인 거 알지? 사령관에게 달려들어 그대로 혀를 집어넣었지. 뜨거운 손길이 내 가슴을 어루만지고...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네...."


"그래서 본론은 어땠나요? 부관으로서 참고할 가치가 있으니 상세히 말씀해보세요"


"응? 너 그때까지 있었잖아. 그게 다야"


"...뭐라고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모두들 웅성거리는 가운데 꼿꼿하게 굳은 나이트 앤젤에게서 감정 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다 시 말 씀 해 주 시 죠?"


"그러니까 사령관의 로맨틱한 고백을 듣고 농후한 입맞춤, 그 후 가슴까지 만졌다니까? 이쯤이면 부부라 해도 되지 않아? 

아, 얼굴을 보면 또 떠오를 것 같아. 내일 어떻게 보지?"


"아, 제발 좀!!"



라스트오리진에서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가 메이인데,

냉철하고 유능한 지휘관으로서의 이미지가 점점 희석되고 연애호구인 그치만의 면모만 부각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에 한번 끄적여봄

물론 다른 캐릭터들과 차별화되는 강렬한 개성이니 나쁜건 아니지만,

마냥 원툴이 아닌 입체감 있는 활약을 볼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존만이에게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