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뱀, 근데 이 노래는 제목이 멉니까?


이뱀은 가사 다 외우셨습니까?


이뱀~!





"...병장님!"


"....이프리트 병장님...!"


"므엏?!"


화들짝 놀라 일어난 이프리트에 눈에 비친것은 손전등빛이 세어나오지 않게 손으로 가린채

피곤한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같은 분대의 레프리콘이었다.


"오늘 취사지원이십니다."


"...어...?어어..."


아-맞다 시발...


군인은 절대 기분 좋은 기상을 할 수 없다.

보통의 일과시간은 그 지랄 맞은 나팔소리와 함께 시작되거나 긴급 출동 태세정비를 명목으로

화스트 페이스를 걸어버리는 레드후드의 고함과 함께 시작된다.


슥하고 손목에 메어진 시계를 바라보니 새벽4시40분.

당일 취사지원을 신청한 인원은 45분까지 행정반에 보고 후 5시까지 식당 급양실로 가야한다.


"아아 시발..."


오르카호의 취사지원은 어디까지나 자발적 지원으로 돌아가기에 누군가 강제로 시킨거도 아니건만

그냥 하루가 시작되버린것이 이프리트에게는 그저 좆같을 따름이었다.


국방색 침낭 속에 웅크린채 연신 시발시발 중얼거리는 이프리트를 잠시 바라보던 레프리콘은

내심 헛웃음을 흘리면서 원래 근무 위치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윽고 이프리트는 구깃구깃 침낭을 대충 돌돌 말아서 관물대 안으로 쑤셔넣은뒤

침상 아래를 더듬거려 찾은 운동화를 구겨신었다.

복도에서 흘러나오는 어렴풋한 빛을 따라 나가기 직전 이프리트는 생활관을 둘러보았다.


일반 승조원들은 단체생활을 하는 오르카호지만 한 방에 열댓명이 모여사는 스틸라인은 그중에서도 특이했다.

보통 분대, 소대급 인원으로 합류한 다른 저항군 부대와 다르게 마리 4호의 구출과 함께 들어온

연대급 인원이 한꺼번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숙소로는 감당이 안됐다.


다행히도 그당시 라비아타는 오르카호를 전투용 잠수함에서 최후의 방주로 기능을 전환하던 시기였고

잠수함 안에 적재되있던 수많은 무기들을 최소한만 남겨놓고 모두 제거하자

함내의 대부분의 방이 텅빈 공간으로 남아돌게 되었다.


겸사겸사 창고로 쓰이던 거대한 방들을 스틸라인의 생활관으로 개조하였고 

침상과 각자의 전투장비, 항상 메고 다니던 군장을 풀어 막사로 정비하는 과정은 참으로 험난했다.

솔직히 멸망전후에 있었던 치열한 전투나 참호전이 따위로 느껴질 정도로 골치아프고 피곤했다.


그와중에 병사와 간부들과 같은 생활관을 이용하겠다고 의지표명을 한 마리 4호를 설득하고

홀로 연장을 챙겨 개인 숙소를 지어준 옆중대 이프리트 1224는 아직까지도 전설로 회자되고 있었다.

심지어 그때 이프리트 1224가 정비한 간부 숙소는 지금까지 이어져 지휘관급 숙소 건설의 표준이 되었다.


이런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스틸라인의 생활관은 한마디로 짬통 표준규격이었다.


"드르렁..."

"음냐음냐"

"고롱고롱..."


국방색 담요를 걷어 차며 이를 갈거나 코를 고는 브라우니들과

비교적 얌전한 자세로 수면을 취하는 레프리콘을 둘러본 이프리트는 한숨을 쉬었다.


끼익


다른 숙소와 다르게 급조한 방들이라 오르카호에서 보편적인 자동문이 아닌 녹슨 철로 된 문을 열었다.


창백한 흰색의 전등빛이 눈을 찌르자 잠시 얼굴을 찌푸렸던 이프리트는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곱과 함께 흐릿했던 시야가 돌아오자 행정반을 향해 팔자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브라우니들로 북적북적한 복도에는 새벽 특유의 한기와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고

아까 자신을 깨워주웠던 레프리콘이 불침번 근무를 서면서 성실하게 온도계등을 체크하고 있었다.


이프리트는 잠시 화장실을 들렀다 갈까 고민했지만 굳이 마렵지도 않고 

혹여나 늦기라도 하면 유독 자신을 집중마크하는 임펫 중사의 잔소리를 들을께 뻔하기에 그냥 그대로 지나쳤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심까."


행정반에서 임펫 중사에게 간단한 보고를 하고 오늘 취사지원을 신청한 3중대 브라우니 두명과 함께 식당으로 왔다.

시간은 아침 5시이건만 급양실에서는 벌써부터 대규모 조리 특유의 수증기로 가득차있었다.


빨간색 머리를 찰랑거리면서 대형 솥을 손보고 있던 포티아가 생글거리면서 반겨주었고

곧 오늘의 할일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은 샌드위치에요!  브라우니 두분께서는 큰 포장지를 뜯어서 빵들을 여기 쟁반위에 올려주세요."


빵식이었군.

사실 빵은 토스터기나 후라이팬을 이용하여 하나씩 조리해먹는것이 가장 맛있지만

수천명의 인원이 먹는 식사에선 어림도 없는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커다란 찜통에 물을 채워 삶는 방식으로 데우는것이 가장 유효했다.


소완이 들어오기 전에는 참치캔을 나눠주거나 간혹 들어오는 대용량 식품을 봉지채로 데워서 배급했지만

그것을 본 소완이 기겁하면서 아무리 주인의 하인들이어도 내 눈 앞에서 그딴 무식한 조리법을 하는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소리지르며 금지했다고 한다.


"어이쿠"


이프리트가 등에 느껴지는 충격에 살짝 뒤돌아보니 빵봉지를 한아름 든채 미안해하는 또다른 포티아가 있었다.


"죄,죄송해요! 앞이 안보여서..."

"아님다."


물 채우랴 솥 데우랴 빵 가져오랴

급양실 안은 수많은 포티아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브라우니 두명이 빵봉지를 그대로 이어받아 임무수행을 위해 어디론가 가버리자 

한창 설명해주던 포티아가 이프리트에게 다가왔다.


"이프리트씨는 마요네즈랑 야채들을 이걸로 섞어 주세요. 원으로 돌리지말고 위아래로 저으면 좀 편할거에요!"


이프리트는 조리용 삽을 건네주면서 조언을 해준 포티아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용량 마요네즈 통을 들어서 저기 손질 되있는 과일,야채로 가득한 고무대야 쪽으로 걸어갔다.


주어진 일을 시작하기 전에 슬쩍 눈치를 살핀 이프리트는 주머니에 몰래 가지고온 MP3의 이어폰을 꼽았다.

물론 한쪽 귀에만 연결하고 MP3출력 설정을 모노로 바꾸는 센스 또한 짬에서 우러나오는 바이브였다.


오르카호의 전자기기 사정은 의외로 풍족한 편이었다. 

탐색이나 삼안 공장 점령을 통해 수많은 단말기와 가전제품을 공급할 수 있었고

개인 단말기가 망가지면 새로 받으면 될정도로 여유분을 가지고 다녔으며 

함내에 있는 삼안영업소에 AS를 부탁하면 일정량의 참치캔을 대가로 수리를 해주었다.


최후의 방주로 전환하면서 가져온 기록보관소에는 각종 영화, 애니,드라마,연극 등의 영상자료도 포함되었고

바이오로이드들의 여가와 편의를 최대한 신경쓰는 사령관의 배려가 있었다.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각종 데이터를 복원하는 이들 덕에 승조원들의 여가시간은 풍부해졌다.


하지만 그런 승조원 중에서도 이프리트가 가지고 다니는 MP3는 특이했다.

최소 스마트폰이 보급된 오르카호 안에서도 유독 구닥다리였기 때문이다.


"흥~흥~"


조그만 화면위에 노래제목과 간단한 메뉴만 표시되는 구형 MP3는 

인류가 음악을 디지털 매개체로 즐기기 시작한 태동기의 물건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구조덕에 약간의 수리와 관리 만으로도

몇백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멸망전쟁 당시 같은 분대 소속으로 부사수였던 브라우니와 함께 

시가지를 벌이던 도중에 우연히 주운 물건이었다.



이뱀! 여기 신기한게 있슴다!



멈칫


음악에 몸을 맡기면서 샐러드를 만들던 이프리트의 손이 잠시 멈췄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떠오른 얼굴이었다.

폐급전설을 찍는 브라우니 개체 중에서도 드물게 레프리콘만큼 성실했던 브라우니였다.


그날 MP3를 주워서 둘이서 이어폰 한짝씩 끼워 노래를 듣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강렬한 기타 소리와 비트 위에서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남자의 곡이었다.


처음으로 음악이라는 것을 제대로 접한 이프리트가 흥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당시에 얼마 남아있지 않았던 인간장교가 알려주길 인류사에서 가장 유명한 팝가수의 노래였다고 한다.

그 가수보다 큰 상업적 성공을 이룬 이들은 계속해서 나왔지만 

여전히 모든 이들이 가장 위대한 가수라고 꼽는다고 했다.


별로 말을 나눠보지 못한 장교여서 예에하면서 말을 흐렸지만

그 장교는 그날 밤부터 악몽에 시달리며 전투불능이 되었기에 

이프리트는 적어도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더 들어볼걸하고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그것이 인간과 대화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뒤로도 부사수 브라우니와 함께 이어폰 한짝씩 나눠 끼우며 노래를 감상하였는데

MP3의 주인은 그다지 모범적인 소비자는 아니었는지 제목이 표시되지 않는 불법 음원이 많았다.

그런 상황이 오면 언제나 브라우니와 함께 가사를 통해 노래 제목을 맞춰보는 놀이를 하였다.


애초에 정답이랄께 없는 놀이였지만 

오늘은 오늘의 전우가 죽고 내일은 내일의 전우가 죽는 전장에서

유일하게 웃으면서 나눌 수 있는 주제였다.


슥슥


우울한 생각을 떨쳐내듯 다시 이프리트는 음악에 맞춰 흥얼거리면서 샐러드를 섞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당근이 많지? 사과가 더 맛있는데...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무난하게 끝난 아침식사 후 식판 설거지까지 완료한 이프리트에게 주스와 과자를 안겨주며

아우로라와 포티아가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한없이 순둥순둥한 그녀들의 배려가 멋적은듯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 이프리트는 다시 생활관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원래 취사지원은 하루에 한끼씩 돌아가면서 하는것이 원칙이었지만

"우연히도" 그날은 아침식사 후 바로 나가야하는 훈련이 잡혀 있었고

"우연히도" 취사지원 인원은 설거지까지 마치려면 해당 훈련을 빼야했기에

그날만큼은 저녁식사 취사지원까지 도맡아 해야했다.


이프리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이것이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사실 행정반의 당직이었던 노움을 닥달해서 얻어낸 일정 정보였지만 말이다.


과자와 주스를 적당히 관물함에 짱박은 이프리트는 한적한 복도를 서성거렸다.


원래 일정을 땡땡이 친 날은 비장의 장소에서 은신하는것이 기본이지만

오늘의 이프리트는 무려 합법적인 제외인원이었기에 누구보다 당당했다.

 

친한 타부대 인원들의 숙소에 놀러갈까?

싸지방에서 스틸라인 온라인의 PVE 모드를 할까?

영상자료실에서 마법소녀 모모를 볼까?


여러 생각이 들었던 이프리트는 문득 아침에 생각난 추억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어느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앗 이프리트씨! 안녕!"

"안녕~"


분홍색 머리가 인상적인 캐럴라이나였다.

마침 무언가 음원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목에 헤드폰을 두르고

방안에 각종 음향기기들이 늘어져 있었다.


"바쁜거 아냐?"


같은 분홍머리지만 헌옷 수거함에 놓여진 토끼인형마냥 칙칙한 분홍색인 자신의 머리와 다르게

그야말로 분홍색임을 주장하는듯한 맑은 색의 핑크머리는 좀 부러웠다.

아니다 자기도 그런색이면 임펫중사한테 짱박힐때마다 들킬것이다.


좋게 생각하자 응...


"아아~ 스카이나이츠 여러분들이 부탁한 음원 믹싱을 하고 있었는데 다끝나가."

"스카이나이츠?"


최소 소위 이상인 엘리트 부대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음원이라니?


"아이돌 활동을 하고 싶다고 전대장님이 부탁해서..."

"...뭐어?"


뭔 펭귄이 날아다니는 헛소리가 다있지?

아이돌? 

스카이나이츠가 덴세츠 출신이던가?


"음~그게"


캐럴라이나가 역시나 예상했다는듯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폰씨나 블랙하운드씨도 의아해 하는것 같았지만 전대장님이 너무 하고싶다고..."


아이고 짬앞에 장사없구나

속으로 혀를 찬 이프리트는 이내 원래 용건을 말했다.


"그...부탁이 있는데"

"응? 어떤 부탁?"


이프리트가 주머니 속에서 MP3를 꺼내들자 캐럴라이나의 큰눈이 더욱 커졌다.


"와~! 완전 구식!"

"...여기 있는 음원중에 하나 제목좀 알려줘"

"제목?"


분명 이 MP3는 제목도 표시될텐데?하고 쳐다본 캐럴라이나였다.


"...원래 주인이 불법으로 받은건지 제목표시도 안되고 가사도 없어."

"아아..."


캐럴라이나는 씩 웃은뒤 잠시 서랍을 뒤적거리다 이내 스피커에 연결한 출력단자를 찾아내었다. 


"자! 연결해봐!"


이어폰 단자를 뽑은뒤 새로운 출력단자에 연결하자 거슬리는 기계음이 치직 울렸다.


"잠깐만~ 앰프좀 손볼께~"


캐럴라이나가 바닥에 놓여진 은색 앰프를 이리저리 돌리자 이내 거슬리는 잡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적당히 재생한 노래가 방안 가득 울려퍼졌다.


조용한 피아노 음색이 울려퍼지자 캐럴라이나는 내심 클래식?하고 추정했지만 아니었다.

이어지는 트럼펫의 음색에 손뼉을 치며 외쳤다.


"재즈!"

"...재즈?'

"응! 이곡은 재즈곡이네! 원래 주인이 중후한 취향을 가졌나봐!"

"하지만 다른곡들은 전부 가요였는걸?"

"아 그런가? 헤헤..."


잠시 잡담을 나눈 둘은 다시 조용히 음악을 감상했다.

홀로 이어지는 트럼펫의 소리에 호응하듯 하나둘 새로운 악기의 소리가 추가되었고

어느새 위스키와 담배연기가 어울리는 하나의 음색으로 흘러갔다.


"음...마일즈?"

"어? 알어?"

"마일즈 데이비스! 들어본적 있어!"


거의 마무리 되어갈때쯤 캐럴라이나가 중얼거리듯 말하며 자신의 단말기에 저장된 목록을 검색했다.

이프리트의 MP3를 빼고 자신의 단말기로 바꾸었고 재생을 하자 아까와 똑같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제,제목! 제목 좀 알려줘!"


정말 드물게 커진 이프리트의 눈동자에 살짝 놀라면서도 캐럴라이나는 펜을 꺼내들어 메모지에 제목을 적었다.


"자 여기!"

"고마워!"


메모지를 휙하고 잡아챈 이프리트는 황급히 어디론가로 달려갔다.

정말 아주 드물게 보는 이프리트의 빠른 몸놀림에 멍하니 있던 캐럴라이나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뱀, 이 곡 정말 듣기 좋은데 제목을 모르는게 아쉽지 말임다.

자기전에 들으면 딱 좋습니다.


그러게...가사도 없고 제목도 안나오네 다른곡들은 전부 가사라도 있는데 


뭐 저희가 대충 지어보는건 어떻슴까?


예를들면?


"브라우니와 이프리트의 자장가"?


에이 시발 그게 뭐야...


하하하하...




야 시발 정신차려 새꺄! 피 너무 나온다!


이,이뱀 마지막으로 부탁하나만 해도 됩니까?


아 병신새꺄 그딴 말하면 진짜 뒤진다고! 가만히 있어!


헤헤, 그...그 곡 말임다 제목도 모르고 뒤지면 너무 억울할 것 같슴다.


그러니깐 안뒤지면 되잖아!


이,이뱀이...사...살아서 그 곡 제목 아시면 제 군번줄에다가 좀 써주십쇼...헤헤...헤...

 

야!!!야!!!......시발....




황급히 비어있는 생활관으로 돌아온 이프리트는 관물대를 뒤적거렸다.


아 여깄다.


찾아낸 군번줄은 녹슬고 오래됐다.


군번줄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가져온 송곳으로 슥슥 무언가를 적었다.


"약속 지켰다 새끼야."



<So What>



잠시 군번줄을 쳐다보던 이프리트는 다시 MP3에 이어폰을 꼽은뒤


다시한번 그 노래를 재생했다.


아침부터 설정해놓은 모노 사운드 설정 때문인지


오랜만에 그녀석이 옆에서 같이 듣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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