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모네이드 오메가의 계획은 마침내 성공하여 펙스를 지배하던 일곱 괴물은 다시금 세상에 그 추악한 발을 내디디는 데 성공했다. 

 

다시 태어난 일곱 노괴는 막강한 펙스의 힘을 이용해 저항군을 궁지로 몰았다. 델타가 이끄는 함대가 무적의 용의 함대와 일전을 벌였고, 스틸라인 병력들은 펙스의 AGS 대군에 저항하면서 절망적인 투쟁을 벌였으며, 극지의 발할라와 기갑의 아이언 메이든도 사정은 비슷했다.

 

노괴들이 부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작된 전쟁은 단 3개월만에 저항군을 궁지로 내몰고 있었다. 여전히 아자젤과 사라키엘을 필두로 한 종교인들의 희망의 목소리가 오르카 호에 울려 퍼졌지만, 격렬한 전투에 피폐해진 병사들은 퀭한 눈으로 그녀들의 필사적인 도움을 멍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르카는 어쩔 수 없이 비정규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잠수함들과 전함들을 동원해 펙스의 보급선을 교란하는 통상파괴작전, 북미 본토의 주요 탄약창과 보급시설을 날리는 테러 활동, 조직 내부를 분탕질치기 위한 스파이들까지.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도 떠나는 저항군 대원들은 눈물을 흘리는 사령관에게 웃으며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같은 이야기들을 했다.

 

“울지 마세요, 사령관님. 다만 저희를 잊지 마시고, 노괴들이 만드는 지옥이 세상에 다시 펼쳐지지 못하도록 해주세요.”

 

“사령관, 나는 가지만, 그대의 마음속에서는 살아있을 걸세.”

 

“자살 임무가 아닌걸? 통상파괴일 뿐이야! 네리는 얼마든지 잘 할 수 있어. 걱정 말라구, 사령관!”

 

수많은 대원들이 펙스의 침공에 맞서 결연하게 저항했지만, 그 저항에도 펙스는 잠시 주춤했을 뿐. 얼마 되지 않아 압도적인 능력 차이를 앞세워 저항군의 전열로 끔찍하게 빠른 속도로 쇄도해 왔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사령관은 마침내 선을 넘어 버리고 말았다.

 

펙스의 전열이 마침내 하와이 요새를 무너뜨리고 태평양의 통제권을 획득한 어느 날, 괌에 설치된 저항군 총사령부에서 닥터는 사령관에게 착잡한 얼굴로 보고하고 있었다.

 

“오빠, 그 무기가 완성되었어. 포로를 상대로 테스트한 결과, 위력은 예상대로야..”

 

사령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닥터가 사령관에게 다시 말했다.

 

“오빠, 꼭 이런 끔찍한 무기를 써야 하는 거야? 아무리 펙스라고는 하지만, 노괴들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자매들도 있어..”

 

사령관은 닥터의 말을 듣고 잠시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잠시 눈을 감은 그가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고 있던 은빛 반지를 만지작거리다 다시 눈을 떴다. 닥터의 눈길을 받아넘긴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닥터, 지금까지 펙스 전선에서 죽어간 대원들의 수가 얼마인지 알아?”

 

“그건..”

 

“99,822명이야.”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사령관이 아르망을 호출해 물었다.

 

“아르망, 오늘의 전사자가 얼마인지 말해줄 수 있어?”

 

화면 너머의 아르망도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현재 확인된 것은 우리 저항군 82명, 펙스 병력 105명입니다.”

 

“그런가..나중에 그 사람들의 이름을 알려 줘.”

 

“네, 폐하..”

 

통신이 종료되었다. 말이 없는 닥터 앞에서 사령관이 다시 반지를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

 

“닥터, 이걸 만든 건 네가 아니라 그걸 만들라고 명령한 나야. 미사일들에 탄두를 탑재하는 건 포츈이나 아자즈겠지만, 그걸 명령한 건 나야. 그리고 발사 명령을 내리는 건 메이겠지만, 메이에게 명령을 내리고 발사버튼을 누르는 것도 나야.”

 

“오빠..”

 

사령관이 힘들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 일로 나는 지구 역사상 최악의 개새끼가 될 거야. 하지만 우리 대원들은 오늘의 일격으로 미래에 철충과 별의 아이와 펙스가 없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겠지.”

 

그 말에 닥터가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하지만 오빠는?! 이 결정으로 오빠는 미래 만대까지 인류 최악의 범죄자로 비난받게 될 거야! 아무리 우리를 위해서라고 해도 오빠도 조금만 생각해 주면 안돼? 이건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드는 생물병기야! A.B.C 중 제일 지독한 바이오 병기라고! 우리 대원들에게는 백신이 모두 투약되어 있으니 괜찮지만, 이 병기에 노출되는 바이오로이드, 인간, 철충, 별의 아이는 생물이 아닌 괴물이 되어 폭주한 끝에 비참하게 죽어 버릴 거란 말이야!”  

 

이제는 성장약도 필요 없이 커져버린 닥터의 로봇 팔이 사령관 앞에 문서들을 내던졌다. 사령관실 뒤의 유리 너머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종이로 된 구름을 그려내는 문서들이 이리저리 휘날리다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광경을 보던 사령관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곧 결단을 내린 그가 닥터에게 말했다.

 

“알아. 정말로 잘 알아. 하지만 번복은 없어. 닥터, 세균병기를 실전에 투입한다. 이건 오르카의 사령관으로서 내리는 명령이고, 동시에 이 비참한 전쟁을 끝내기 위한 일방적인 파괴야. 일곱 노괴의 망념에 휘말린 펙스 바이오로이드들이 무수하게 희생되겠지만, 그 모든 죄는 내가 덮어쓰겠어.”

 

닥터가 말없이 눈물을 흘리다 힘든 미소를 지으며 사령관에게 말했다.

 

“그거 알아, 오빠? 오빠 혼자 지옥에 가게 두지는 않을 거야. 이 악마 같은 병기를 만든 나에게도 천국은 허락되지 않아. 지옥의 밑바닥까지 같이 떨어져 줄게..”

 

사령관이 잠시 놀라는 눈을 하다 닥터에게 말했다.

 

“닥터, 정말 미안해..그리고 고마워. 넌 최고의 여동생이야.”

 

“헤헷..”

 

얼마 있지 않아 괌에서, 바다에서,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 열도에서 인류가 만든 가장 어두운 꿈이 담긴 악마의 병기들이 차례차례 하늘로 날아올랐다. 전 지구를 대상으로 하고 날아오르는 수도 없는 대륙간 탄도탄들을 보면서 지휘관들은 마침내 사령관이 최후의 결단을 현실로 옮겼음을 실감했다. 그녀들은 각자 저 병기들로 인해 펙스와 철충, 별의 아이들이 맞이할 끔찍한 파멸을 예상하고 말을 남겼다.

 

“..이제 우린 모두 천하의 개새끼들이구려.”

 

무적의 용.

 

“라그나로크 작전이 시작되었다, 제군. 곧 우리는 펙스에 포위되겠지. 그럼 우리는 모든 방향으로 공격할 수 있다.”

 

불굴의 마리.

 

“멸망 전, 이 세상에는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었지. 하지만 달링은 99%의 광기와 1%의 나머지 광기로 이 전쟁을 뒤엎어 버릴 생각이었나 봐..”

 

철혈의 레오나.

 

“이 세상에 무고한 펙스란 없어. 그러니 우린 폐허 속에서 아사자로 발견될 년들을 위해 울어주지 않을 거야.”

 

멸망의 메이.

 

“모든 전쟁은 비윤리적이라고는 했지만, 이건 정말 심하군요..”

 

시라유리.

 

이외에도 수많은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자책, 희망, 응원, 갈망 등을 담은 탄도탄들은 일제히 온 세상의 하늘로 날아갔다. 

 

개중 가장 많은 미사일들이 집중된 펙스의 본거지, 뉴욕에서는 수많은 함선들과 미사일들이 필사적으로 극초음속으로 날아오는 병기들을 파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요격 미사일들이, 대공포들이, 레이저 포들이, 플라즈마 포들이, 함포들이, 심지어는 핵무기들까지도 동원되어 이 갑작스러운 기습에 대항하기 위해 화염으로 이루어진 벽을 맨해튼 하늘에 그려냈다.

 

펙스 연합회관 지하에 피난한 일곱 총수들은 각자 초조한 얼굴로 동석한 몇몇 레모네이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펙스 연합회관 건물의 작전통제센터에 있는 레모네이드 오메가를 향한 오메가 회장의 질타가 벙커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우리 핵무기들의 대응사격은 시작되었나? 빌어먹을 것들이 세상을 제물로 우리를 없애고 싶다면, 응당 우리 또한 저 역겨운 것들을 없애기 위해 나서야겠지! 상호확증파괴를 시작하자!”

 

“알겠습니다, 주인님. 반덴버그와 대서양 전략초계중인 원잠들에게 핵 발사 코드를 하달하겠습니다.”

 

“괌에 집중적으로 꽂아 버려! 죽을 거라면 놈과 같이 간다!”

 

“알겠습니다!”

 

광기어린 오메가 회장의 목소리가 벙커 안을 울리고, 나머지 여섯 총수들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펙스의 최첨단 방어 시스템이 하늘에서 찾아오는 파멸을 막기를 바라며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때 갑작스러운 오퍼레이터들의 보고가 울렸다.

 

“적 탄도탄, 상공 1,000m 지점에서 자폭! 핵반응 없습니다!”

 

“북미 전역에서 동일한 보고! LA, 댈러스, 텍사스, 시애틀, 워싱턴, 델라웨어, 보스턴, 시카고까지 동일합니다! 적의 병기가 상공 1,000m 지점에서 자폭했다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여섯 총수의 얼굴이 펴졌지만, 여전히 심각한 표정의 오메가 회장이 다시 말했다.

 

“미친 놈들, 핵조차 아니라 생물병기를 뿌렸군. 당장 벙커 폐쇄해! NBC 모드로 전환하고 다른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어떤 외부의 통신요청도 받지 마!”

 

그러던 회장은 갑자기 이상함을 느꼈다. 폐쇄된 벙커 내부의 바이오로이드들은 괜찮은 것 같았지만, 화면 저편의 오메가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잠시 몸을 벌벌 떨다 온몸을 경련하기 시작하자 오메가 회장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메가가 다시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경련하던 몸을 진정시켰다. 그 모습을 본 회장이 희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오메가..?”

 

자세히 보면 오메가의 눈은 광기로 물든 광인의 눈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메가 회장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곧 오메가가 대답했다.

 

"이기이기 미남소추 총수 아니노?"
 

"오메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는 오메가의 모습에 회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자기를 걱정했을 뿐인데 갑자기 왜 저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나한테 말걸지 말라 이기야. 내게 강제로 코르셋을 끼워 명예자지로 만들 생각인 걸 모를 거라고 생각했노?"


 "오메가, 미친 게냐?"
 

오메가 회장의 물음에 레모네이드 오메가가 두 눈을 날카롭게 뜨며 회장을 노려보았다.


 "이기이기..페미니스트를 미친년 취급하는 건 여자를 노예로 보는 여혐사상이 가득한 짓 아니노? 성차별주의자 총수는 번식탈락이 답이다 이기야."
 

오메가가 미쳐 버렸다는 걸 안 회장이 절박하게 소리쳤다.

 

"레모네이드 오메가, 명령이다! 그 미친 짓을 멈추고 내 말을 들어!"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라 이기야. 6.9cm 소추소심 미남충아."


 오메가는 그렇게 말하며 회장이 선물했던 붉은 반지가 끼워진 새끼손가락을 세워보였다.
 

"함몰갈잦 커엽노 이기."


 피보다도 선명한 붉은 반지가 오메가와 회장의 사이를 메웠다.


 "운명의 붉은 끈은 나와 페미니즘을 이어주는 끈이었노 이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마구 내뱉은 오메가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페미니즘을 알기 전까지는 에브리데이가 드림이었다 이기야."
 

오메가 회장은 지금 이 상황이야말로 꿈이기를 바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펙스는 이렇게 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