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낭만으로 가득찬 그 이름.

수많은 기사들의 무훈시에서 주인공과 자웅을 겨루는 강력한 지고의 존재이자 영웅들의 숙적, 마지막 관문.

뭐, 이야기에 따라서는 '큭……. 이 몸을 쓰러트리다니 ……! 1만년만에 본녀의 낭군이 될 남자를 찾았구나!' 라는 식으로 드래곤의 남편이 되는 패턴도 많지만 그건 그것대로 낭만이다. 드래곤 아내라니 얼마나 가슴 떨리는 단어의 조합인가!

숙명의 적수나 화끈한 아내가 아니어도 좋다. 조력자, 스승, 친구 등. 드래곤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든다. 이 정도로 낭만적인 존재는 저 동방에서 온 닌자 말고는 없을 것이다.

"알겠니, 바닐라? 그러니까 드래곤은 낭만으로 가득찬 종족이란다."

“주인님의 텅텅 빈 머리가 그 낭만이라는 땔감으로도 못 쓸 쓰레기로 가득찼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바닐라가 내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가 아름답다 생각하며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바닐라는 자주 눈매를 전혀 움직이지 않고 미소 짓곤 했다. 습관인가?

가을이 다가와 금새 사방이 어둑어둑해진 숲 속에서, 바닐라가 피운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봤다. 밤공기가 차가운지 두꺼운 로브를 입었음에도 바닐라의 미소는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것도 귀엽다 생각해 미소가 짙어졌다. 내가 마주 웃어주면 바닐라는 지금처럼 그 고운 아미를 찡그리곤 한다. 부끄러워서 그런 것일까 생각하며 난 다시 입을 열었다.

“바닐라, 나의 지혜로운 시종. 너의 총명한 머리는 분명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을 것이다. 허나 네 수줍음이 내 말을 인정하지 않는구나.”

“주인님의 호두만한 뇌는 자기 할 말만 가득차고 남의 말을 이해하는 기능은 없으니 더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제 기분이라도 풀기 위해 마지막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느샌가 바닐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 자리를 분노와 짜증의 아들이 두려움과 결혼하면 태어날 법한 표정이 대신했다. 저걸 뭐라고 부르지?

바닐라가 입을 열었다.

“새 노래를 만들기 위해 야생 드래곤을 찾아간다는 발상은 미치광이도 안 할 또라이 짓입니다.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서 발 닦고 잠이나 주무십시오.”

나는 진지하게 그 말을 곱씹고 대답했다.

“나의 사랑스러운 시종, 바닐라. 뒷골목 잡배나 할 험한 단어로 그 귀여운 입을 더럽히지 말아줘.”

“아, 제기랄.”

바닐라는 인상을 찌푸리다 토할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아까 저녁에 먹은 스튜가 얹힌 걸까? 내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자 그녀는 우리가 이 여정을 떠나고 몇 번이나 맞이했던 결말을 되풀이했다. 로브를 푹 뒤집어 쓰고 돌아 누워 대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로브를 뒤집어 쓴 모습이 머리를 숨긴 거북이 같아서 귀엽다.

태생이 수다쟁이인 나는 더 이야기를 못 하게 된 것이 불만족스럽지만 저 상태가 된 바닐라는 무슨 말을 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다음 날이 되야 뚱한 표정으로 시중을 들 것이다. 별 수 없이 첫 불침번을 내가 서기로 했다. 일행이 둘 밖에 없기 때문에 한명씩 불침번을 서야 했다.

말벗도 없이 밤을 지새우는 것은 나 같은 수다쟁이에게 지겨움을 넘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이 야밤에 류트를 연주했다간 거북이 아가씨가 내일도 이야기를 안 들어줄테니 참아야 한다.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소리를 박자 삼아 머릿 속으로 새 곡을 만들고 있으니 시간 죽이기는 됐다. 오, 방금 건 좀 오졌는데? 잠깐, 마음 속으로라도 그런 상스러운 표현은 자제하게나. 속으로 하는 얘긴데 뭐 어때. 자고로 진정한 우아함이란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것일세. 아, 이런 꼰대 같으니라고.

나와의 싸움이 전설 속 무훈시에 비견될 대전쟁으로 비화하고 있을 때 쯤, 인기척을 느꼈다. 풀어뒀던 칼에 눈길을 주며 그들을 기다렸다. 속으로 몇 곡 부를 시간이 지나자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심까! 위대한 황제 폐하께 승리의 영광을! 불 좀 같이 쬘 수 있슴까?”

갈색 단발 머리 아가씨가 수풀을 헤치고 나타나 내게 말을 걸었다. 어깨에 걸친 할버드와 등에 멘 둥근 방패. 룬 문자를 새긴 갬비슨(솜을 채운 누비갑옷)에 이곳 저곳 상처가 나고 투구가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지만 제국군의 기본 무장이었다. 

“브라우니! 먼저 가지 마십시오!”

그녀의 뒤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내 예상대로 빨간 머리의 레프리콘이었다. 두 집요정은 정반대의 태도로 다가왔다. 브라우니는 거리낌 없이 불 쪽으로 다가오려 했고 레프리콘은 우릴 경계하는 듯 했다.

난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경계할 것 없네, 레프리콘 양.”

한 쪽에 던져둔 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그들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오히려 그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와! 남자다!”

브라우니가 호들갑을 떨었지만 레프리콘은 침착했다. 아니, 침착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실례합니다. 스틸라인 군단 소속의 상병 레프리콘입니다.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저와 제 분대원이 합석해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제국을 지키는 용사님들의 동석 요청이라니, 오히려 내가 영광이라네. 하지만 내 길동무가 잠들어 있으니 조용히 해주면 감사하겠네.”

나는 그들에게 기꺼이 불가의 온기를 내주었다. 가을밤의 차가운 공기가 그들을 할퀴고 갔던 건지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불가에서 살핀 그들의 행색은 남루했다. 곳곳이 찢긴 옷과 얼굴에 난 상처는 그들의 여정이 평탄치는 않았음을 암시했다. 안색이 창백한 브라우니가 모닥불 쪽에 손바닥과 손등을 번갈아 쬐며 온기를 즐겼다. 레프리콘도 내게 살짝 목례한 후 브라우니와 같이 온기를 쬐었다.

온기를 쬐어 살만해진건지, 혈색이 도는 브라우니가 내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남자분이 이런 외진 숲에는 왜 오신 검까?”

그녀의 말에 악의는 없었다. 지극히 존엄하고 현명하며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제국의 성비는 10대 1이 안 된다. 때문에 남자는 안전한 도시에서 자손 번영을 위한 생산활동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다.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스틸라인 군단에 입대했을 브라우니에게는 남자를 본 경험조차 드물 것이다.

나는 선선히 대답했다.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일세.”

브라우니는 영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곁에 있던 류트를 들어 보여줬다.

“난 음유시인일세. 그리고 새로운 곡의 영감을 얻기 위해 이 숲으로 왔네.”

그제야 브라우니는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레프리콘은 달리 생각한 모양이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이 숲은 철충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제국에 편입되지 않은 야생 드래곤이 배회한다는 소문이 도는 위험지입니다. 민간인이 이런 곳에 들어오면 안 됩니다.”

“하하, 바로 그걸세.”

“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가는 고리타분한 곳에서 어떻게 멋진 곡을 만들겠나? 최고의 소재가 살아 숨쉬는 땅에서 같이 호흡해야 멋진 노래를 만들 수 있다네.”

레프리콘은 바닐라가 나를 향해 자주 짓곤 하는 익숙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브라우니가 대화에 다시 끼어들었다.

“그것 참, 멋지면서 정신 나간 것 같은 이야기지 말임다.”

나는 브라우니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브라우니도 내게 웃어줬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스틸라인 병사 아가씨들은 왜 여기 둘만 있는 건가?”

내 말에 레프리콘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브라우니 또한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셋 중에 하나가 묻고 둘이 말을 잊자 모닥불이 타는 소리만 허공을 맴돌았다.

한참 동안 입을 닫고 있던 레프리콘이 씹던 것을 뱉어내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 습격이…….”

레프리콘의 목소리는 가을 밤하늘보다 어두웠다.

“습격이 있었습니다. 대규모 철충 무리가 이동하는 저희 소대를 습격했고 저희 소대는 흩어졌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와 브라우니만 남아 있었습니다.”

“…….”

나는 해 줄 말이 없었다. 내가 입을 닫자 잠시 적막이 흘렀다. 나와 레프리콘의 눈치를 살피던 브라우니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전 레프리콘 상병님 덕분에 살았슴다. 상병님 아니었으면 전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검다.”

브라우니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레프리콘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녀는 어떤 죄책감을 짓눌린 표정이었다.

그녀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브라우니, 당신의 목숨을 살린 건 너무나도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내 어깨에는 당신 말고도 책임져야 할 생명이 8명이나 있었습니다. 당신과 나 같은 집요정들이 아무리 마석만 있다면 탄생하는 값싼 목숨이라도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는 않습니다.”

레프리콘의 작은 어깨가 축 처졌다. 처진 어깨에 달린 분대장 견장이 무거워 보였다.

너무 큰 짐을 짊어지고 가다 쓰러진 소녀에게, 난 어설픈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기로 했다. 그녀 또한 그것을 바라지 않을테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저 미래를 물었다. 책임감에 무너지려는 작은 집요정에게 마지막 책임감을 상기시켰다.

“숲 밖으로……. 나갈 것입니다. 숲 밖으로 나가서 본대를 찾아 피해 상황을 알리고 복귀할 것입니다……. 그 후에는…….”

레프리콘은 입을 다물었다. 입술을 몇번 씹던 그녀가 허탈하게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가 태어난 이래로 군에 있는 것 이외의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전역을 해야한다면 그건……. 지금일 것 같습니다. 사제왕 프레스터 요안나님의 왕국이라도 가볼까요? 황제 폐하께서 그곳을 제국 제일의 곡창으로 만들기 위해 전역자들이 정착하길 장려하고 있다던데……. 제기랄, 생각해보니 전 농사를 지을 줄도 모릅니다. 저는……. 겨우 3년 밖에 안 살아봤어요. 철충과 싸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게 하나도 없어요.”

집요정은 성인의 몸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소녀는 이제야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마주하고 있었다. 성인의 몸으로 세상에 던져져 전쟁을 위해 소모되던 소녀가 마침내 사춘기를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레프리콘의 이야기를 듣고 세명과 자는 척 하는 한명 모두 깊은 생각에 빠졌다. 가을 바람에 베인 숲이 우는 소리와 모닥불 타들어가는 소리만 우리 사이를 메웠다.

제 몸을 태우는 불을 바라보던 브라우니가 적막을 깨고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는 모르겠슴다. 레프리콘 상병님이 3년 살았다면 전 1년도 못 살아봤슴다. 그래서 뭐가 맞고, 또 뭐가 틀린지도 잘 모르겠슴다. 하지만 전 전우들과 먹고, 자고, 노래하고, 싸우는 일상이 좋았슴다. 전 그래서 철충 놈들을……. 용서할 수 없슴다. 그 놈들 대가리를 다 박살내고 싶슴다. 황제 폐하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그러고 싶슴다.”

브라우니가 고개를 돌려 레프리콘에게 시선을 옮겼다. 레프리콘의 시선은 흔들리고 있었다.

“상병님이 어떤 선택을 하든 저는 상병님을 이해하고 존중함다.”

레프리콘의 혼란스러운 눈동자가 서서히 침잠했다. 브라우니의 말이 오히려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 같았다. 나는 마른 가지를 부러뜨려 모닥불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이만 자게나. 혹독한 시련을 겪었을 아가씨들에게 불침번을 맡길 순 없지. 바닐라, 잘 게 아니라면 일어나서 불침번 좀 서주겠니? 나도 눈 좀 붙여야 할 거 같아.”

바닐라가 스르륵 일어났다. 그리고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모닥불 근처에 앉아서 부지깽이로 불을 들쑤셨다. 난 피식 웃고는 망토를 둘러 잠 잘 준비를 했다.

브라우니와 레프리콘도 처음에는 한명이 불침번을 서려 했으나 -외부의 적 뿐만 아니라 나와 바닐라 또한 경계해야 했기에- 둘 다 가혹한 전투를 겪은 후 숲을 방황하며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결국 그들도 바닐라에게 불침번을 맡기고 잠들었다.

그들이 새근새근 소리내며 잠든 후 난 바닐라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 애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불을 응시하던 바닐라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글쎄요.”

그리고 잠든 레프리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차가운 눈에 깃든 감정은 미약한 혐오감이었다. 푸른 눈동자에 비친 것은 레프리콘었지만 그녀는 다른 누군가를 보는 듯 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데 행복해질 자격 따윈 없겠죠.”

그녀의 말에 전혀 동감하지 않았지만,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바닐라가 다시 날 바라봤다. 돌아본 얼굴에선 방금 전까지의 그늘은 없었다. 평소 같은 무표정으로 바닐라가 입을 열었다.

“이만 주무시죠. 주인님. 아침 해가 밝으면 또 그 빌어먹을 드래곤을 찾아다녀야 할테니까요.”

나는 빙긋 웃어주고 눈을 감았다. 바닐라는 웃지 않았다.



아침이 밝자 눈이 저절로 떠졌다. 동쪽에서 깨어난 하늘의 왕은 그 빛으로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레프리콘과 브라우니는 아직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다.

난 길을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허리춤에 칼을 차고 류트를 가방에 넣었다. 모닥불을 정리하려고 할 때 쯤 되어서야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이 깨어났다.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제 어느 쪽으로 갈 생각인가?”

레프리콘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 사실 어제 습격을 당한 후 정신없이 도망쳐서 여기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나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좋은 생각이 났다.

“흠…….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건 어떤가?”

마저 모닥불을 정리하고 있던 바닐라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드래곤을 찾을 때 까지 우리와 같이 다니세. 어떤가?”

레프리콘은 또 해괴망측한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좀 상처인데…….

그때 브라우니가 입을 열었다.

“좋슴다. 그렇게 하죠.”

브라우니의 갑작스러운 말에 레프리콘이 당황하여 브라우니를 쳐다봤다. 브라우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금 떨어져서 레프리콘에게 귓속말을 시작했다.

“상병님, 어차피 드래곤을 만날 수 있을리가 없잖슴까? 적당히 숲을 돌아다니다가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검다.”

하지만 내 귀는 꽤나 밝아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브라우니의 말에 레프리콘이 입을 열었다.

“브라우니, 우리는 최대한 빨리 숲 밖의 부대로 돌아가야 하는 입장입니다. 괴멸한 우리 소대 상황을 알려야 합니다.”

“어차피 길도 모르니 이리 가나 저리 가나 똑같지 말임다. 그리고 시종을 데리고 다니는 거 보니 딱 봐도 귀족나리인데 안전히 호위하면 문책은 안 받을 것 같슴다.”

“예? 하지만 혹시라도…….”

“혹시라도 드래곤을 만난다 해도 민간인들끼리 만나는 것보다야 저희라도 있어야 저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이라도 벌지 않겠슴까? 또, 숲에 철충이 있으니 민간인들만 있으면 위험할 거 같슴다.”

그 말에 레프리콘의 얼굴에도 책임감이 깃들었다. 곧 전역을 생각하고 있다 해도 그녀는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다. 제국의 군인은 제국의 시민을 지킬 의무가 있다.

레프리콘이 다시 내게 다가왔다.

“함께 다니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나는 그들의 비밀 얘기를 들었다는 티를 내지 않고 빙긋 웃었다.

“하하, 탁월한 선택이네. 그러면 우리 이제 함께 다닐테니 통성명이나 하지. 난 칼이라고 부르게.”

“예, 칼님. 어제 말했듯 저는 레프리콘이고 저쪽은 브라우니입니다.”

대부분의 아인종들은 자기 이름을 짓는 문화가 없다. 그래서 아인종들은 이름 대신 자신의 종족명을 이름처럼 쓴다. 오히려 이름을 가진 아인종이 특이한 경우였는데, 스틸라인 군단의 군단장인 불굴의 마리가 그런 경우였다. 인간의 입장에서야 특이한 문화였지만 그들은 뇌파로 서로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나와 통성명을 끝낸 레프리콘은 바닐라를 바라봤다. 그러나 바닐라는 말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모닥불을 마저 정리하고 있었다. 레프리콘이 당활할 때 쯤 내가 입을 열었다.

“저기 저 귀여운 초록 머리 아가씨는 내 시종인 바닐라일세. 고슴도치 같이 따가운 매력이 넘치는…….”

“가시가 아니라 칼로 찌르기 전에 조용히 해주십시오, 주인님.”

“하하하, 봤지?”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에 레프리콘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바닐라는 크게 한숨을 한번 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그들에게 인사했다.

“위대한 황제 폐하께 승리의 영광을. 반갑습니다, 레프리콘 상병님, 브라우니 일병님. 칼님의 시종, 바닐라입니다.”

“예? 아, 예. 위대한 황제 폐하께 승리의 영광을."

레프리콘이 당황하며 바닐라의 제국군식 인사에 화답했다. 바닐라는 인사를 한 후 아까와 똑같이 그들을 무시했다. 레프리콘이 다시 당황하려하자 내가 그들의 주의를 돌렸다.

“자, 갈 길이 머니 어서 움직여야겠네.”

내 말에 그들도 짐을 챙겼다. 그리고 숲을 걷기 시작했다.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숲은 선선하니 기분이 좋았다. 새로운 동료들과 떠나는 드래곤을 찾아 떠나는 여정. 가슴이 두근거렸다.

흥이 오른 난 마음 속으로 해야할 말을 입으로 옮겼다.

“그렇게 노래꾼과 시종, 두 용사는 용을 찾는 여정길에 올랐다.”

바닐라와 레프리콘, 브라우니까지 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쪽을 바라봤다.

“어떤가? 노래에 쓸 가사를 만들고 있는데.”

“주인님은 가사를 쓰는 재능이 없으니 정 곡을 만들고 싶으시다면 비밀 작사가를 구하십시오.”

“…….”

정말 너무해…….

브라우니 외전 나오기 전부터 쓴건데 더 사탄마귀 같은 새끼로 바꿔야 하나 고민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