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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흐응~ 그래, 오늘은 이 연애 박사 드라코 님께 어떤 고민이 있어서 찾아오셨을까나~?"

 

 드라코는 나름대로 지적인 분위기를 내겠답시고 신경 써서 입은 내근복을 과시하며 의자 위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그 여파로 발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순백색 하이힐이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툭, 하고 굴러떨어졌다. 다리를 꼬아서 요염하면서도 능숙한 분위기를 연출해보겠다는 노력은 가상했지만, 의욕이 지나쳐서 포즈를 과장되게 취한 나머지 스타킹 너머의 팬티가 내게 훤히 보인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겠지. 하지만, 눈에 이득이었으므로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키키킥……."

 

 뻔뻔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그 표정은, 지금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똑똑해 보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짓은 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쏘아붙여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열 받게도 내근복에 감싸인 발칙한 몸매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쏙 들어가게 했다. 몽구스 팀의 제식인 레오타드형 기동복과는 색다른 매력을 가진 산뜻한 하얀색 기조의 세미정장이 어쭙잖게 발돋움하면서 되지도 않는 허영을 부리는 그녀의 태도조차도 귀엽게 돋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나는 콩깍지가 제대로 쓰인 것을 체감하며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원래 먼저 반한 쪽이 지는 것이라고 했었지……. 깊은 체념을 뒤로하고, 그래도 나만 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 싫어서 소심하게 일격을 가해보았다.

 

 "드라코, 내근복은 처음 보는데……. 꽤 귀엽네?"

 "아하하! 그래. 바로 그거야! 이성의 옷을 칭찬해서 점수를 따는 법! 사령관도 제법인데~?"

 

 철벽을 치는 것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었다. 만약, 드라코가 진짜 노리고 이러는 것이라면…… 나는 사령관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인간불신에 걸려서 평생 틀어박힐 자신이 있었다.

 

 복잡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드라코는 기대에 가득 차서 나를 재촉했다.

 

 “그래서, 고민이 뭔데? 몽구스 최고의 인텔리인 이 몸에게 맡기면 다 껌이지!”

 

 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런 직설적인 어필들은 예전에 이미 수없이 깨지고 진압당한 전적이 있었다. 여기선 조금 돌아가 보기로 했다.

 

 “그, 걔랑 안 지는 꽤 됐고……. 같이 운동도 몇 번 하고 밥도 먹었는데, 다음으로 못 넘어가겠어.”

 “오호~ 다음? 다음이면…… 스킬십? 내가 또 스킬 하면 끝내주지!”

 

 그런 말을 한 드라코는, 별안간 손바닥이 하늘을 보도록 뒤집고 중지와 약지만 구부려 올리며 꿈틀대는 시늉을 했다. 그 상스러운 손짓에 나는 아연실색하며 외쳤다.

 

 “야! 너 그런 거 어디서 배웠어!”

 “에? 워울프가…… 아니아니! 내, 내가 스스로 터득했지! 이거면 다 훅 간다고 하던데, 아니야?”

 

 물론 내가 워울프에게 비슷한 짓을 했던 적은 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적합한 주제는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드라코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곤 손가락을 두어 번 더 까딱였다. 부끄러운 손짓 앞에서 내 얼굴이 저절로 화끈거렸다. 견디다 못한 나는, 칸에게 남길 건의사항을 머릿속에 추가하며 그 봐주기 힘든 손가락질을 억지로 잡아 내렸다.

 

 “이게 뭔데 그래?”

 “뭔지 모르면 함부로 하지 마……. 그리고, 스킬십이 아니라 스킨십이야.”

 “그래! 그 말 하려고 한 거야! 뭐, 어쨌든 그게 그거지! ……근데 스킨십이 왜?”

 “그게, 아직도 손을 못 잡아봐서…… 응?”

 

 나는 내 손아귀 안에서 가지런히 붙잡혀 있는 드라코의 손가락을 느꼈다.

 

 “……손은 잡았는데, 더 가까워지질 않네. 그다음으로 나아가고 싶어서.”

 “음…….”

 

 드라코는 턱을 들고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드라코를 쳐다보던 나는, 문득 매우 진귀한 광경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려 생각하는 드라코라니!

 

 나름대로 골똘한 생각을 끝낸 드라코는, 씩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사실, 생산성 있는 조언을 기대하고 상담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드라코의 해답은 뜻밖이었다.

 

 “다이어트라도 신청해보는 건 어때?”

 “……다이어트가 아니고, 데이트 말하는 거지? 뭐야, 왜 정상적인데?”

 “허허어~ 드라코 님을 뭘로 보는 거야? 사령관의 고민이니까 특별히 신경 써서 깊게 생각해 주는 거지!”

 

 그렇게 특별하게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렇다면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서 내 마음을 눈치채주었으면 했다. 그 바람을 가슴에 안고, 나는 한 발짝 더 나아갔다.

 

 “……혹시 다음 주 저녁 비어?”

 “음, 운동 끝나면 아무것도 없을걸?”

 “그럼 계속 비워 둬.”

 “왜?”

 “나 데이트 연습하게 상대역 좀 해줘. 끝까지 도와준다고 했잖아?”

 

 드라코는 의아한 듯 살짝 고개를 갸웃하더니, 작게 끄덕였다. 열이 아직 꺼지지 않은 내 얼굴을 보는 드라코의 입가에 능글맞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후후~ 사령관이 이렇게까지 하는 거 보니까, 상대가 누군지 궁금해지는데?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

 “응.”

 “오오~ 누군데 누군데~?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살짝만! 알려주면 안 돼?”

 

 드라코라도 역시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애답게 연애담에 흥미가 동했는지, 눈을 반짝이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호기심에 빛나는 드라코의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며 나는 툭 던지듯 뱉었다.

 

 “너야.”

 “에?”

 

 드라코의 입가가 놀란 듯이 굳으며 눈썹이 한껏 치켜올라갔다. 하지만, 곧 장난스럽게 내려가며 입꼬리에 실실거리는 웃음이 돌아왔다.

 

 “히이~ 지금 몽구스 팀의 최고 인텔리를 놀려먹으려고 하는 거야? 미안하지만, 나 정도의 지능을 속이는 일은 쉽지 않을걸?”

 “……그래, 쉽지 않네.”

 

 나는 씁쓸한 웃음을 삼키며 일어났다. 드라코도 같이 일어나며 나를 마중해주기 위해 쪼르르 따라나섰다.

 

 “다음 주 저녁에 보는 거다? 드라코, 잊지 마?”

 “물론이지! 날 뭘로 보고!”

 

 여유만만하게 외치며 손을 흔드는 드라코가 문을 닫고 들어갈 때까지 지켜본 나는, 머릿속으로 함내에 데이트할 만한 장소를 끊임없이 궁리하며 몸을 돌렸다.

 

 

**

 

 

 대망의 데이트 날.

 

 "드라코, 혹시 이후에 시간 있어?"

 

 체단실에서 마지막 루틴을 끝내고 숨을 고르며 목에 건 수건으로 땀을 훔치는 드라코에게 다가간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차가운 이온 음료를 건넸다. 생각해보면 데이트는 거의 신청만 받는 입장이어서 내가 먼저 권유한 적은 별로 없었다.

 

 "오오? 사령관 아니야! 별일이네~ 잘 마실게!"

 

 드라코는 사양도 없이 낚아채듯 내 손에서 병을 빼앗아 들고는, 목이 많이 말랐는지 허겁지겁 들이켰다. 눈을 꼭 감고 땀이 맺힌 고개를 한껏 젖힌 드라코의 울대가 얕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나는 드라코의 목을 타고 흘러내려 가슴골로 쏙 들어가는 물줄기를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크햐아~ 시원타!"

 

 적지 않은 양이었을 텐데도 드라코는 한 번에 비우고 나서 청량감을 만끽하며 몸을 떨었다. 나는 뜨끔한 나머지 음흉한 시선을 재빨리 거뒀다.

 

 보통 내 앞이라면 다른 아이들은 조금 더 행동거지에 신경을 쓰기 마련인데, 드라코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런 점 때문에 드라코를 좋아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드라코라서 그런 점도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호쾌하면서 담백한 감탄사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아, 시간 있냐고 물어봤지? 당연히 있지~ 왜, 같이 땀이라도 뺄까?"

 

 드라코는 고개를 문 방향으로 까딱이며 의미심장한 눈짓을 나에게 보냈다. 슬그머니 낮아지는 "같이 땀이라도 뺄까?" 하는 소리가 메아리치듯 귓가에서 반복적으로 울렸다. 돌림노래처럼 떠오르는 그 소리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구하면서 꾸밈없는 언동을 보였던 드라코였는데, 순식간에 거친 불장난을 요구하는 정열적이면서도 야성적인 표정으로 변모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언젠간 그렇고 그런 일까지 가게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드라코가 이렇게 단숨에 핵심까지 다가와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시, 사고방식이 남다른 드라코라서 몇 단계 건너뛰는 것쯤은 보통인 것일까? 아니면, 단계라는 게 내 생각과는 달랐던 걸까? 예를 들자면 프렌드-섹스프렌드-애인이라던가……. 그 왜, 멸망 전에 개방적인 나라에서는 몸을 먼저 맞춰 보고 연인이 되는 커플도 많더라고 샬럿이 그랬었다. 그렇게 오만 생각이 오가는 마음 한편에서 ‘설마, 설마?’ 하는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 그래. 좋지."

 "히히~ 빨리 가자!"

 

 의욕에 불타서 내 손목을 덥석 붙잡고 복도와 복도 사이로 나를 거칠게 리드하는 드라코의 머릿결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바람을 타고 건강하고 싱그러운 드라코의 향기가 느껴졌다. 일주일간 고심 끝에 짜낸 데이트 코스를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할 사고가 생긴 것 같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오히려 이런 즉흥은 환영이었다. 대책 없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드라코와 함께 코너를 돌자, 수없이 있는 비밀의 방 중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드라코는 그 문을 열-

 

 “좋아! 시작하자고!”

 

 지 않고, 그 옆의 배드민턴장의 문을 열어젖혔다.

 

 “…….”

 “왜 그래?”

 

 나는 골이 아파지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배드민턴장의 눈부신 조명이 조롱하듯 스포트라이트처럼 내게 쏟아졌다.

 

 '그럼 그렇지…… 그럼 그렇지……!!‘

 

 쓸데없이 들뜬 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드라코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한 쌍의 채와 셔틀콕을 챙겨오고 있었다. 운동을 끝냈어도, 놀이는 별개인 것 같았다.

 

 “자아~ 간다아아아!!!”

 

 아직도 팔팔한 드라코와 달리, 허탈감에 빠진 나는 설렁설렁 받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치다 보니 나도 경쟁심에 불이 붙어서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장장 5세트 간의 기나긴 접전 끝에, 우리 둘은 완전히 방전되어서 널따란 코트에 나란히 누워 숨을 고르게 되었다.

 

 내 옆에 바로 누운 드라코를 바라보며 나는 뒤늦게나마 하려던 말을 했다.

 

 “원래 오늘 데이트하기로 했는데 말이지.”

 “……아?!”

 “……그럼 그렇지. 까먹고 있었지?”

 “아, 아하하……. 미안…….”

 “됐고, 다음에 시간 비워 둬. 먹고 싶은 거 있어?”

 “고기!”

 

 즉답이었다.

 

 “음…… 포티아한테 부탁해서 스테이크라도 구워 달라고 할까?”

 “아니~ 저번에 엄마가 지휘관 만찬에서 남았다고 싸 온 거 먹어봤는데, 생각보다 별로더라. 삼겹살 먹자, 삼겹살!”

 “데이트하는데 삼겹살을 먹자고?”

 “뭐 어때~ 어차피 연습인데! 대신, 진짜로 할 때는 걔가 먹고 싶어 하는 걸로 사줘야 해?”

 “……알겠어. 삼겹살 좋네, 삼겹살.”

 “좋네~ 좋아~”

 

 기뻐서 누운 채로 방방 뛰는 드라코를 보니, 모든 것이 아무래도 좋아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