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내보는게 어떻겠나?"

"네?휴가요?"


세이렌은 지휘관급들의 아침조례가 끝나자 무적의 용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언제나처럼 노크를 하고 용의 집무실로 들어가서 인사를 하자 들려온 말이었다.


"..."


일단 원래 용에게 제출해야하는 보고서를 조용히 건네준 뒤

세이렌은 잠시 우물쭈물 서있었다.

용은 건네받은 보고서를 훑어 보면서 말을 이었다.


"요 몇달간 자네의 도움이 있었기에 전투인원을 재편성하는데 큰도움을 받았네."


용은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아무래도 작년에 막 깨어난 본관보다 1년 먼저 오르카에 합류한 자네가 더 사정에 밝았기 때문이지."

"네에..."


세이렌은 대체 그거랑 휴가랑 무슨 상관이지?하는 의문이 머리에 스칠 쯤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참 많은 일이 겹쳐 지휘관으로서 부하를 혹사시켰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일세." 

"..."


보고서를 마지막까지 훑어본 용은 살짝 미소지으며 세이렌을 보았다.


"덕분에 많은 일들을 해결할 수 있었어. 고맙네."

"아닙니다. 큰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음."


잠시 침묵이 흐르고 펜을 놀리는 소리만 울렸다.

이윽고 결재가 모두 끝나자 용은 다시 보고서를 건냈다.


"참으로 치열한 전쟁이지만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싸운다네."

"네 명심하고 있습니다."


기특하다는듯 미소지으며 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해했겠지?"

"...네?"


세이렌은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는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은 나름 회심의 명언이라 생각했지만 통하지 않자 살짝 당황했다.


크흠...


"그,그렇니깐 너무 일만 시키니 미안하다는걸세."

"엣? 아닙니다! 저는..."

"그만."


세이렌은 잠시 항의 하듯 몸을 앞으로 굽히며 반론하려 했지만 

용의 제지에 다시 차렷자세로 돌아갔다.


"우리는 바이오로이드로서 싸우기 위해 태어났네 그건 틀림없어."

"..."

"하지만 각하는 우리에게 선택과 기회를 강조했네."

"..."

"소관은...짊어진 것이 너무 많기에 감히 그말에 동의하지 못했지만..."


용은 마치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으로 세이렌은 바라보았다.


"자네는...자네들에게는 각하가 허락한 것이 주어져야 한다는게 소관의 생각일세."

"대장님..."

"한동안 일에 대한건 내려놓고 하고 싶은 일을 해보게나."

"네, 알겠습니다!"


용은 이만 퇴실해도 좋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렌은 경례를 한 후 보고서를 든채 밖으로 나갔다.


위잉-


자동문이 조용히 닫히자 집무실엔 고요함이 흘렀다.


"자유라..."


용은 잠시 창문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지휘함의 창문 밖으로 수많은 함선들과 바쁘게 돌아다니는 휘하의 병사들이 보였다.




후우...

일단 휴가 보고를 행정실에 올리고 온 것 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아주 큰 문제가 생겼다.


"할게 없네..."


근무복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아무도 없는 생활관을 서성거렸다.


세이렌은 멸망전쟁 시기에 제조되자마자 함선에 투입되었다.

당시에도 무적의 용 휘하 부대에 있었긴 했지만 별로 얼굴을 마주칠 기회는 없었다.


전쟁의 막바지에 급하게 제조된 세이렌은 함장대리로서 네레이드, 운디네 등을 이끌고

바다 한가운데까지 출진한 것은 좋았지만 이미 전쟁은 끝난 뒤였다.


모든 신호는 끊기고 철충들은 무심하게 지나쳤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바다를 떠다니는 함선을 떠맡은 세이렌은 몇달 후 함선 동결이라는 결단을 내린다.

자동 항로를 설정 한뒤 언젠가 나타날 통수권자의 지휘를 기다리며 잠에 들었다.


그렇게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고 잠을 깨어났을때

눈 앞에는 오르카호의 모습이 보였다.


수십년의 외로운 항해 끝에 유령선처럼 변한 함선을 정리하고 오르카호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사령관을 만났다.


"휴우...네리나 운디네는 탐색이고 테티스는 훈련인가?"


보통 서로가 없으면 나갔거니 하고 여기는 동기들이지만 

세이렌은 동기들의 일정표를 하나하나 기억했다.


"어쩌지...할게 없네..."


사령관에게 가볼까?

마침 전투인원 재편성을 위해 오르카호는 가까운 부두에 정박했다고 들었다.


"음...음...대,대장님이 부재할시 가장 가까운 상위부대에 합류하는게 원칙이니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는듯이 세이렌은 휴가증을 손에 들고 밖으로 나갔다.


세이렌은 애초에 무적의 용이 부재하지도 않고 자신은 일과에서 제외된 휴가 상태이며

자신의 일벌레 성향을 잘아는 용이 미리 사령관에게 연락했을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다.


솔직히 다 아무래도 좋고 그냥 뭔가 할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응? 할거? 없는데?"

"앗...어...그런가요?"


너무나도 단호하게 돌아온 대답에 세이렌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렇지? 콘스탄챠?"

"네 맞아요."

"딱히 탐색 인원에게서 보고사항도 없고 아직 철충들의 움직임도 없으니깐 말야."

"네 맞아요."

"그러니깐 세이렌은 편히 쉬어."

"맞아요. 아셨죠?"


현란하게 주고받는 대화끝에 두사람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세이렌은 잠시 당황했다,


뭐지 이 상황은?


콘스탄챠는 아까부터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고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었고

사령관은 가벼운 말투로 문제없는데~?를 반복하면서 여지를 주지 않고 있었다.


경험상 이 두사람이 이런 태도로 말할 때에는 뭔 말을 하든

정말 씨알도 안먹히는 것을 아는 세이렌은 풀이 죽었다. 


"알,알겠습니다...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그래."


시무룩한 표정으로 착 소리 나게 경례를 하고 나가는 세이렌이었다.


"아 잠깐."


휙!


뭔가 시킬게 있나?


아주 약간의 기대는 있었는지 세이렌은 눈을 똘망이면서 돌아봤다.


"카페테리아 쪽에서 쉬는건 어때? 거기 커피가 맛있어."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주인님."

"...생각해보겠습니다."


에이씨 놀리는건가?


사령관은 그럴줄 알았다는듯 히죽이고 있었고

콘스탄챠도 비슷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세이렌이 퇴장하자 사령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난번 여름때 조금은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바이오로이드가 성향을 바꾸는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응...그렇지"


콘스탄챠는 사령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주인님께서 미래의 일을 생각하시는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직 모두에게 시도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령관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언젠가 너희들에게 자유를 주고싶어."

"주인님..."

"너희들이 하고픈 일을 너희 스스로 찾아내는 '자유'말야..."


콘스탄챠는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다.

역시 아직은 먼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씩이나마 전쟁 이후를 생각하는 주인에게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두사람은 잠시 손을 잡고 있었다.





"카페테리아라..."


용 함대에서 순환 근무를 하다가 간만에 돌아온 오르카호는 여전히 떠들썩했다.


세이렌은 복도를 지나다니는 익숙한 얼굴들에게 인사하며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약간 새콤한 향이 들어있는 커피향은 마치 공기 그자체가 갈색빛을 띄고 있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풍겨오는 편안한 커피향과 느긋한 음악소리.

수많은 이들의 웃음과 수다소리.

그리고 간간히 울려퍼지는 먹고 마시는 소리.


"와..."


자신이 용 휘하의 함대로 갔을때만 해도 조그마한 휴게실 정도였지만

요 몇달새 대대적인 정비를 했는지 카페테리아는 놀라울정도로 아늑했다.


세이렌은 정신없이 지나다니는 군중 속에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멍하니 있지 말고 주문이나 하시죠?"

"앗 바닐라씨..."


잠시 자리에 앉아 내부를 둘러보는 사이에 다가온 바닐라가 주문을 받았다.

오르카호 생활을 하면서 바닐라의 말투에 적응해서 딱히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뭐부터 주문해야할지 몰라서..."

"아~"


바닐라는 세이렌이 순환근무를 위해 오르카호를 나갔다 왔음을 기억하고

그전의 초라한 휴게실에선 딱히 주문따위 받지 않았다는것도 기억해냈다.


"진짜 커피는 먹어본적도 없는 사람에게 에스프레소를 내줄 순 없는데 말이죠."


슥슥 

바닐라는 무언가 메모지에 적었다.


-세이렌씨는 쓴것을 잘드시나요?


"아뇨...애초에 커피는 잘 몰라서..."


바닐라 특유의 독설이 대화 진행에 방해가 될때

이렇게 필담을 통해 언어 모듈 제한의 허점을 이용하곤 했다.

사령관이 있을때는 사랑의 힘(이라 주장하지만 사실 훈련)을 통해 극복했지만

바이오로이드간 대화는 아직도 언어모듈의 제약을 크게 받는 바닐라였다.


"역시 애새끼네요. 집에가서 아이스크림이라도 먹는건 어때요?"


-그러면 아이스크림에 에스프레소를 끼얹은 아포카토는 어때요? 맛있어요.


"아 그러면 그걸로 주세요."


"원하시는 콩을 골라야 하는데 뭐가 있는지는 알아요?"


-처음 드시는 분은 남미지방의 콩을 추천해요. 혹시 산미있는걸 원하시나요?


세이렌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무난한 것으로 주세요...그 처음에 말씀해주신거..."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정중하게 인사를 마친 바닐라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맛있네."


처음들어보는 메뉴라서 살짝 걱정한 세이렌이었지만 

바닐라가 가져온 아포카토는 생각보다 무척 맛있었다.


부드러운 우유맛 아이스크림 위로 씁쓸한 에스프레소가 어우러져서 

시중에서 파는 커피 아이스크림과는 다른 풍성한 향이 특징이었다.


비어있는 컵을 유심히 보던 세이렌은 이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까지 후식을 먹기위해 몰려들었던 인원으로 북적거렸던 카페테리아는

어느새 전부 빠져나가서 자신과 몇몇 테이블만 인원이 남아있었다.


옆에 비어있는 테이블을 슥슥 행주로 닦는 바닐라가 보였다.


"저...바닐라씨!"

"네?"


테이블을 닦고 더러워진 행주를 접어서 가져가려던 바닐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여기 일은 바쁜가요?"

"식사시간 이후에는 모두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해서 바쁘죠."

"도와드릴건 있을까요?"


바닐라는 놀랍다는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이렌 스스로도 놀랐다.

처음으로 와본 곳이건만 이상할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복도에서부터 물씬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도

먹고 마시며 떠드는 사람들의 소음도

느긋한 분위기의 음악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뭔가 하나만 찝어서 이게 좋다!하는 점은 없었지만

마음이 편안하고 호기심이 일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하는 생각이든 찰나

자신의 옆에서 일을 하는 바닐라에게 제안한것이다.


"..."


바닐라가 잠시 턱을 만지면서 생각했다.

콘스탄챠 언니와 사령관의 의향을 전에 들었지만

세이렌쪽에서 이런 제안을 해올줄은 몰랐다.


하지만...어쩌면 이건...


바닐라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좋죠. 내일부터 이곳에서 일해보실래요?"

"네...네?!"


설거지나 잡다한 심부름 정도 예상하던 세이렌이지만 

생각보다 본격적인 제안으로 돌아오자 조금 놀랐다.


"할생각 없거나 게으름 피울거면 그냥 가서 주무시죠?"

"아뇨!좋아요!할래요!"


예상했던 제안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카페테리아에서의 일이라면 할일이 없어 전전긍긍할 일도 없고

나름 다른 경험을 하게 되니 용 대장의 말도 따르는 셈이었다.


나쁠건 없었다.


바닐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복장으론 여기서 일하는게 티가 안나니 제옷을 빌려드리죠."

"아아..."


세이렌은 자신이 입고있는 호라이즌 특유의 색이 들어간 옷을 보았다.

카페테리아에 쉬러오는 손님들이 보기에 일반 승조원인지 직원인지 한눈에 구분하기 어려울것이다. 


"일단 오늘은 제방에 와서 간단하게 수선을 하고 내일부터 입고 와주세요."

"네!"

"게으름 피우면 각오하세요."

"네!"


바닐라는 씩 웃으면서 악수를 요청했다,


"내일부터 잘부탁드려요."

"그럼요!"


세이렌은 해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령관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잔 마시기 위해서

콘스탄챠를 데리고 카페테리아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사람이 많았다.


원래 이 시간대에 사람이 많긴 했지만 이정돈 아니었는데?


입구쪽에선 무언가 응원하는 목소리와 환호성이 간간히 나오고 있었고

탈론페더는 히죽거리면서 가게 안쪽을 촬영하고 있었다.


사령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카페테리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령관이 온것을 인지한 바이오로이드들이 간단한 인사와 함께 길을 터주자

어째서 이곳에 모인것인지 이해할수 있었다.


세이렌?


그곳에는 바닐라의 메이드복을 빌려입은채 주문을 받고 있는 세이렌이 있었다.


세상에...일을 하지 않아도 좋다했지만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할줄은...


"...참으로 우습지 않소?"

"용?"


북적거리는 인파속에서 용이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왔다.

그리고 한참 주문을 받으면서 바닐라에게 전달하는 세이렌을 보았다.


"단순히 바이오로이드를 임무로부터 떨어뜨려 선택을 생각해보게 하는 계획이었지만..."


세이렌은 주문을 잘못 받아서 바닐라에게 쓴소리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곤란한 표정 안에서 의욕이 느껴졌다.


"애초에 바이오로이드 또한 자기가 원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었나보오."

"..."

"소관은 바이오로이드들을 지휘하는 입장으로서 바이오로이드에 대해 통달했다 생각했었소."


용의 눈에는 자랑스러움이 비쳤다.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생각보다 스스로의 의지가 깊었나보오. 적어도 우리의 걱정보다는..."

"...그렇구나 우리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어."

"주인님의 계획에 조금 수정이 필요하겠네요."

"응, 적어도 바이오로이드는 주어진 명령에 대한 복종말고도 스스로의 의지가 있다는걸 확인했으니깐..."

"어머 원래부터 아셨다고 생각했는데"

"응?"


콘스탄챠는 눈을 새침하게 돌리며 말했다.


"저는 저 스스로 주인님을 사랑하는걸요?"

"..."


용이 쓴웃음을 짓고 사령관은 어색하게 볼을 긁적거렸다.

어색함을 지우려는듯 사령관은 카페테리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세이렌~ 나도 커피 한잔 줘!"


세이렌은 밝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