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https://arca.live/b/lastorigin/22938492


"어젠 안 춥더니 오늘은 진짜 춥네"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에는 겨울보다 여름을 더 싫어했었다.

 

아마도, 엄마가 유달리 벌레를 싫어했던 영향이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집에는 참 벌레가 많이 나온다.

 

엄마도 참, 반평생을 그 집에서 살아 놓고서도 끝까지 벌레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벌레는 추위를 싫어하고, 더운 것을 좋아한다.

 

어린 마음에, 벌레가 나올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엄마의 모습은 큰 충격이었고,

 

나는 벌레가 많이 나오는 여름을 싫어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겨울이 더 싫다.

 

겨울은 춥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겨울에 나돌아 다니지 않는 것을 택한다.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하지만 나는 비가 내리든 눈이 오든 불평할 처지가 아니다.

 

그러다 보면 좋든 싫든 여름밤의 더위도, 겨울밤의 추위도 다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밤의 벌레소리와, 그리고 미지근하게 불어오는 바람. 그건 솔직히 나쁘지 않다.

 

최소한 겨울밤의 에는 듯이 불어오는 칼바람에 비교하면 볼멘소리를 할 생각도 사라지게 된다.

 

알루미늄제 야구 방망이의 한기를 온 손바닥에 느끼면서 한 시간 가량을 돌아다니다 집에 오면,

 

손바닥의 감각 따위는 없고, 발가락은 붙어서 서로 떨어지지를 않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집어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지만,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단 하루도 이 야간 순찰을 빼먹은 적 따위는 없었다.

 

이 짓을 한 것도 어느새 3년이 넘었다. 그럼 지나온 날밤은 천이 넘는다.

 

나는 이걸 천 번이나 반복한 거다.

 

그동안, 그때의 그 단추조각 이외에는 단 하나도.

 

그 자식에 대한 정말 자그마한 단 하나의 단서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젠 안심해도 좋은 것이 아닐까.

 

애초에 나와 핀토 사이의 일이 생기자마자 바로 사라져 버린 간도 작은 놈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잊어버릴 때도 되었다.

 

천 번을 찾아도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지금 이렇게 나와서 골목길을 샅샅이 찾아보는 나 스스로도, 반쯤은 내일에 대한 긴장과 기대를 다스리려는 마음이다.

 

미호와의 관계에는 내일 결착을 내기로 했다.

 

나는 내일 미호에게, 놀이 공원에서 고백한다.

 

그걸 위해서 여러가지로 준비를 많이 했다. 모아놓은 돈의 절반을 들여서 반지도 샀다.

 

나는 미호가 좋다.

 

그리고 아마도,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미호도 나와 같겠지.

 

그렇다면 우리 둘 사이가 내일, 조금 더 나아가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내가 미호의 마음속에, 그리고 그녀의 생활 속에 조금 더 파고 들어도 문제는 없을 거다.

 

미호의 남자친구가 되어서 내가 항상 미호를 보호하면 그만이다.

 

너와 대등한 위치에서 너를 지켜주겠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섰으니까.

 

"....."

 

'니가 하는 짓이 더 스토커다 임마'

 

그래, 이 짓도 오늘이 마지막인 것이다.

 

이런 스토커 새끼나 할 만한 짓거리는 오늘이 끝이다. 해방되는 거다.

 

정말로, 정말로 이따위 짓은 그만두고 싶었다.

 

처음에는 내가 감히 미호에게 말을 걸 수 없다는 생각과, 

 

또 이딴 근본도 모를 단추 쪼가리 하나로는 경찰의 힘도 빌릴 수 없을 거라는 판단 때문에 너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한 가지 이유를 더 들자면, 너에게 스토커 따위가 붙었단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내 잘못으로 크게 상심한 너에게, 굳이 새롭게 놀랄 일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것보다도 더.

 

미호가 이런 내 모습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 생각에 괴로워했다.

 

말로는 "너를 스토커에게서 지키고 싶으니까"라고 하면서,

 

역설적으로 남의 눈을 피해 밤의 어둠 속에서 돌아다니는, 스토커같은 나의 모습을 네가 본다면.

 

너는 날 어떤 눈으로 볼 것인지 두려웠다.

 

너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고, 그리고 너와 화해하게 된 때에는 이미 너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있었으니까.

 

너에게 스토커의 이야기를 꺼내버렸다가는, 내가 한 짓도 숨길 수는 없으니까.

 

.....내가 한 짓이 알려져서, 너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다.

 

있지도 않은 범인을 찾아 떳떳하지 못하게 숨어 다니면서, 헛수고나 하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너에게 거짓말을 더 이상 할 필요도 없겠지.

 

생각이 많아서인지, 어느 새 온 동네를 다 뒤져보고 집에 돌아왔다.

 

나는 개운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있을 미호와의 데이트를 기대하면서.

 

 

 

 

 

 

"...많이 기다렸어, 철남아?"

 

"아니, 별로. 생각보다 일찍 왔네, 미호야"

 

"응... 설레서"

 

그러냐.

 

그럼 내가 너보다 훨씬 더 많이 설렌 셈이구나.

 

나도 너무나 설렌 나머지 약속시간보다 한시간이나 먼저 나와 있었거든.

 

미호의 얼굴이 붉다.

 

아마 내 얼굴도 저렇게 붉겠지.

 

우리는 왠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어 땅바닥만 서로 보면서도,

 

서로의 손을 슬쩍 하고 잡을 수는 있었다.

 

미호의 손바닥은, 부드럽고... 그리고 따뜻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놀이공원에 왔다.

 

나는 너무나도 설렜다.

 

그 곳은 마치 내가 어린 시절 항상 꿈꾸던... 그러나 결코 현실에선 볼 수 없었던 꿈나라 같았다.

 

풍선, 솜사탕, 그리고 부모님의 손을 잡고 걷는 아이들.

 

어릴 때 이 광경을 몇 번이나 바랬었던가.

 

부모님과 함께 놀이공원에 오고 싶다는 어린 이철남의 꿈은 지켜지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 내 옆에서 손을 잡아주고 있는 미호가, 옆을 볼 때면 웃어주고 있다.

 

"철남아, 뭐 타고 싶어?"

 

"음... 나 완전 놀이공원 초짜라서... 니한테 전부 맡겨도 되나?"

 

"ㅋㅋㅋㅋ 그래, 이 누나한테 전부 맡겨라"

 

미호가 내 손을 이끌고 앞서 나가며 나를 돌아본다.

 

밝게 웃는 너의 얼굴이 좋다.

 

언제까지라도, 너의 웃는 모습만을 보고 싶어.

 

그러니까 니가 원하는 곳은 어디라도 따라갈 거다.

 

나는 조금만 더 세게 미호의 손을 잡으면서, 미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

 

"...철남아... 롤러코스터 많이 힘들었구나..."

 

죄송합니다, 허세였어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뭐가 ‘어디라도 따라갈 거다(찡긋)‘ 이냐.

 

나는 롤러코스터 한 방에 격침당하고 말았다.

 

비싼 돈을 내고 이런 미친 기계를 타러 다니는 인간의 생각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눈물이 흐르고 콧물이 흘렀다.

 

미호 앞에서 이런 꼴볼견인 모습 따위를 보이다니... 게다가 이런 날에.

 

"미호야..."

 

"ㅋㅋ 이철남 얼굴 완전 웃겨"

 

그래도 니가 웃어주면 된 건가. 아니, 이런 식으로 웃기고 싶지는 않았는데.

 

"자, 여기 손수건"

 

미호가 내 얼굴을 닦아 준다.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벌떡 일어난다.

 

"...얼굴은 내가 직접 닦아도 돼"

 

"아니, 내가 닦아주는 게 좋아서 하는 거야. 뭔가 이렇게 손수건으로 너한테 이렇게 해 주는 거... 여친 같지 않아?"

 

그런가. 확실히 좋네, 그거.

 

왜 놀이 공원에 오는지 좀 알 것 같다.

 

나는 다시 심기일전해서, 놀이기구들에 도전할 용기를 냈다.

 

 

 

 

 

 

"...아, 잘 먹었다"

 

"잘 먹었다니 진짜 다행이네"

 

"음... 아까 나 니 얼굴 닦아주면서 여친 같아서 좋다 그랬는데. 가끔 보면 철남이 니가 더 여자친구같애"

 

"...? 뭔 소린데, 이런 상남자도 잘 없구만"

 

"철남이 너 이렇게 도시락도 다 싸오고, 그것도 무지 아기자기하게... 완전 소녀 감성 인데 ㅋㅋ"

 

"그냥 조그맣게 여러 가지 채우고 싶었던 거뿐인데"

 

"그리고 무지 맛있었어. 고마워, 철남아. 잘 먹었어 정말"

 

"그렇게 고마우면 저기 나 풍선이나 한 개 해 주라"

 

"...풍선? 너 가끔 진짜 애 같애"

 

"...나 어릴 때 부모님이랑 놀이공원 가는 상상 할 때"

 

"응?"

 

"상상 속에서 놀이공원 가면 나... 풍선 들고 돌아다니는 게 제일 하고 싶었어"

 

"...그렇게 말해버리면 미안하잖아..."

 

"아, 미안. 신경쓰지마라... 그, 이건 그..."

 

"내가 이런 생각 했었던 것도 너한텐 별로 숨길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뿐이고"

 

"그리고 이게 그, 나한텐 이제 제일 놀이공원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란 게"

 

"우리 아버지보다도 너랑 단 둘이서 놀이공원 가고 싶단 말 하고 싶었던 거라"

 

"아...."

 

"그러니까 너랑 같이 풍선 들고 돌아다니고 싶어"

 

"...응"

 

 

 

 

 

 

 

미호와 함께, 커플로 색깔까지 맞춰서 풍선을 받았다.

 

미호는 하는 김에, 라면서 웬 머리띠까지 받아와서는 그걸 같이 쓰자고 했다.

 

부끄러운 행색을 하는 것은 꺼려졌지만, 저 녀석이 저렇게나 좋아하니 원. 나는 못 이기는 척 머리띠를 찼다.

 

"어때? 귀엽지"

 

"응. 이뻐"

 

미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확실하게 말해주자 미호는 갑자기 눈을 돌려버렸다.

 

뭐야 너. 내가 이만큼 칭찬했으면 이제 니가 나 칭찬할 차례 아니냐?

 

"....너도 그, 생각보다 잘 어울려, 귀여워"

 

"고맙다"

 

그리고 잠시 손을 걷고 산책한다.

 

추운 날씨도, 손을 맞잡으면 이렇게나 따뜻하구나.

 

한 발짝을 뗄 때마다 흔들리는 풍선이, 간질간질한 내 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하다.

 

놀이공원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풍선을 들고 돌아다니고 싶었던 내 어린 날의 꿈은 이루어졌다.

 

미호도 나름대로 만족하는 눈치고, 오늘 놀이공원 계획은 지금까지는 제법 성공적이다.

 

나는 이 좋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저녁까지 연결시키고 싶었다.

 

음... 그러려면 어디로 가는 게 제일 좋을지.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구나. 선택지가 너무 많으니 오히려 갈 곳이 없는 모순.

 

난제를 풀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겠지.

 

마음 내키는 곳에는 하나하나 다 가 봐야겠다.

 

"미호야, 저 앞에 저거 한번 타자"

 

"그래"

 

 

 

 

 

 

 

"....."

 

뭔가 좀 이상하다.

 

그렇게 처음 생각한 것은 대충 두어 시간 쯤 전이었을까.

 

계속 해서 묘하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워낙에 사람이 많은 곳이니까, 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묘한 불쾌감은 가실 생각은 않고 점점 커지기만 했다.

 

찝찝하다. 너무 찝찝하다.

 

옆을 보면, 세상 신나는 얼굴을 한 미호가 있다.

 

이 녀석이 둔한 건지, 아니면 내 생각이 지나친 건지.

 

나는 내가 과민한 거겠지, 하고 석연치 않은 기분을 억지로 정리했다.

 

"철남아, 저기 사이클론 타자! 저거저거"

 

...괜찮겠지.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그럼 한번 타 볼까"

 

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