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T-8 W 발키리-21호는 그 어떤 것에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오로지 혹한 지역에서의 전술적인 운용을 위해 설계된 전투형 바이오로이드.

 

전장은 생과 사를 오가는 긴박한 순간이 연속인 만큼 사적인 의문과 감정 따위는 방해가 될 뿐이었다.

 

 

“…….”

 

 

그런데도 어째서일까?

 

피투성이가 되어 ‘기능이 정지된’ 레오나 대장의 싸늘한 주검을 껴안은 뒤로 자꾸만 가슴 한 컨이 저며 오는 것은.

 

정부와의 대립이 있었던 1차 연합 전쟁 시기에 생산되어, 수많은 전장에서 살아남은 발키리-21호에 있어 지금의 감정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휘관 개체를 잃은 것이 문제인가?

 

아니다.

 

앞선 전투들에서 발키리는 이미 수많은 자매를 잃었다. 당연하게도 그중에는 보다 오랜 시간 전장을 함께해온 지휘관 개체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때도 지금과 같이 모듈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렇담 자신의 전투, 인식 관련 모듈에 이상이 생긴 것인가?

 

그 또한 아니다.

 

28회에 걸친 크고 작은 전투에서 살아 돌아올 때마다 발키리-21호는 주기적인 전투 인식 검사를 맡았고 28회 모두 정상 판정을 받았다.

 

오죽하면 담당 연구원마저 수많은 전장을 겪으면서도 아무런 오염이 없는 그녀의 모듈이 특이하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렇담, 대체 무엇이 문제지?’

 

 

발키리는 피에 젖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일순간 레오나의 새하얀 손이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기에 발키리는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기댈 곳이 없어진 레오나의 싸늘한 주검이 붉게 물든 눈밭 위로 엎어진다.

 

발키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시 한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엔 얼어붙은 핏자국 외엔 그 어떤 흔적도 없었다. 당연히 이미 기능이 정지된 레오나가 움직이는 일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발키리는 몸을 털고 일어났다. 본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니 여전히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수차례 본대와 연락하려 했으나 연락되지 않은 걸 보면 본대 역시 적들의 공습에 당했다고 봐야겠지.

 

 

“…크흣.”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벗어나려던 발키리는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현기증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서히 흐려지는 시야에 떨리는 손으로 오른 눈에 박혀있는 오큘러리를 짚었다.

 

 

‘발키리, 너는 어떻게 생각해?’

 

 

레오나의 목소리였다.

 

거친 숨소리.

불규칙적으로 요동치는 심장 소리.

산골짜기 사이로 울리는 총소리.

하늘을 찢는 비명.

 

몰려오는 혼란 속에 흩트려져 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발키리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 위험에서 벗어났다 할지라도 적들에게 위치가 노출되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머리를 흔들어 겨우 현실로 돌아온 발키리의 시선 끝에 차가운 눈밭에 쓰러져 있는 레오나의 모습이 보였다.

 

인식 모듈에 문제가 생긴 탓일까, 검붉은 핏자국이 스며든 눈밭 위에 누워있는 레오나의 모습이 마치 화사하게 피어난 장미밭 속에 파묻힌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 당신은, 일개 병사인 나를 위해….

 

―대신 몸을 던진 거지?

 

의문은 곧 반동이 되어 돌아왔기에 발키리는 머리를 흔들어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지금은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만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완전히 몸을 일으킨 발키리의 눈앞에 들어온 것은 상공을 찢으며 자신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 포탄이었다.

 

아무런 색도, 소리도 없는 마지막 순간.

 

 

“발키리, 난 네가 발할라에 가는 걸 원치 않아.”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레오나의 마지막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1.

 

“모든 인간님들은 죽으면 천국이라는 곳에 간다고 하지. 그렇담 우리 바이오로이드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3번째 지휘관이었던 레오나 개체가 줄 곳 입에 담던 질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3번째 레오나 개체는 조금 특이했다.

 

지나치게 호기심이 많다고 해야 할까, 좀 더 감상적이라고 해야 할까.

 

연구원들의 말을 빌리자면 감정 모듈에 결함이 있는 불량품이었다.

 

당시에 레오나의 결함을 알아차린 연구원들은 해당 개체의 기억을 초기화시키고 다시 재교육할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곧바로 2차 연합전쟁이 터져버리는 바람에 그녀는 아무런 조정 없이 전장에 투입되었다.

 

인간님들 기준에서는 다소 결함이 있는 지휘관이었으나 발키리는 그 사실에 별다른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저 전 대장들에 비해 조금 말이 많을 뿐이었다.

 

이따금 훈련할 때 찾아와 이전의 전투에 대한 감상을 구구절절 늘여놓아 집중을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제하자면 딱히 불편할 것도 없었다.

 

레오나는 발키리를 발할라의 저격수로,

 

발키리는 레오나를 발할라의 지휘관으로.

 

주어진 임무대로 특별할 것도 없는 그뿐인 관계―, 일터였다.

 

 

 

2.

 

“허업―, 켁, 컥.”

 

 

발키리는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갑작스럽게 들어찬 공기에 마른기침이 나왔다.

 

제일 먼저 의식을 차렸을 때 느껴지는 것은 폐가 타들어 가는 고통.

 

전신의 반절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리는 통증.

 

 

“생각보다 빨리 일어났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키리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다 전신에 느껴지는 통증에 몸을 움츠렸다. 팔과 다리, 가슴께까지 전신 대부분이 하얀 붕대로 감겨있었다.

 

 

“무리하지 않는 편이 좋아.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여기 시설이 많이 열악해서 말이야. 일반적인 수복을 생각하고 움직였다간 다시 정신을 잃게 될걸?”

 

 

목소리는 불투명한 비닐 커튼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커튼 너머로 이상한 형상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하얀 가운을 두른 손이 커튼을 젖히며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의사 가운과 대조되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곱슬머리를 뒤로 묶어 올린 여성이었다.

 

바이오로이드들은 선천적으로 인간의 뇌파를 인지할 수 있기에 자세히 보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인간이었다.

 

 

“…인간님이시군요.”

 

“꽤 의외라는 목소리네? 왜? 아닌 거 같았어?”

 

“아뇨, 뇌파로 파악하지 않아도 한눈에 인간님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만…,”

 

 

발키리는 그제야 여성의 의상이 일반적인 의료종사자와는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여성은 허리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으나, 안에는 깔깔이에 다리 한쪽이 반쯤 접혀 올라간 추리닝 바지라는 어울리지 않는 복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 이외에도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마치 정비소에서나 날 것 같은 진득한, 기름 냄새.

 

 

“다만?”

 

 

여성의 목소리에 발키리는 잡념에서 깨어났다.

 

분명 잡념에 빠지는 동안 날카로운 시선은 감출 수 없었을 텐데, 그런데도 여성은 아랑곳없이 김이 나는 곰돌이 커피잔을 홀짝이며 발키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만…, 제가 잠시 의문을 품은 것은 이곳은 인간님들이 살아가기에 상당히 열악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기업에서도 이곳에 거주하는 민간인은―.”

 

“민간인은 없다―. 라고 못 박았겠지. 뭐, 그 치들이야 자기들 제품 팔아주는 높으신 고객님들이 아닌 이상 같은 인간으로 취급이나 해주겠냐마는. 쯧.”

 

 

짧게 혀를 차며 기업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는 여성의 모습에 발키리는 입을 다물었다.

 

발키리는 지금껏 겪어온 수많은 전장만큼 수많은 인간님을 만난 경험이 있었다.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간님에서부터 장난감 취급하는 인간님.

 

두려워하는 인간님, 신의 사자라며 칭송하는 인간님.

 

그리고 모든 불행이 그들 탓인 마냥 기업과 바이오로이드들을 증오하는 인간님들까지.

 

그리고 그중에는 기업에 대한 증오와 악의를 바이오로이드들에게 푸는 인간님들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발키리는 공적인 일로 테마파크를 방문했을 당시 인간님들의 손에 유린당하여 안식을 얻지도 못한 채 그저 숨만 붙어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눈도 귀도 닫은 체, 하나 남은 세 치 혀로 제발 죽여 달라, 허공을 향해 애원하고 있었다.

 

 

“…….”

 

 

어쩌면 그들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죽음이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죽음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고통은 일상만큼 익숙했다. 그렇지만 절차에 따라 할 말은 해야 했다.

 

 

“…인간님,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블랙 리버 휘하 712 소속의 바이오로이드로써, 사설 보유가 금지된 제품입니다.

 

인간님께서 저를 고문하시거나 해부하셔도 얻는 경제적 이득은 매우 미미할 것이며, 오히려 군용 제품 손괴에 따른―,”

 

“얘는 또 뭐라는 거니?”

 

 

정말 어이없다는 듯 냉소 섞인 목소리였다. 여성은 정말로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떤 망상을 하는 진 모르겠는데, 난 널 해부할 생각도 없고 고문할 생각은 더더욱 없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으면 널 고치려 들지도 않았을걸? 네 말대로 돈도 안 되는 걸 내가 왜?”

 

 

기업을 언급할 때와 같이 불쾌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자세한 이유는 몰랐으나 방금 자신의 발언이 어쩌면 생명의 은인이었을지 모를 인간님을 화나게 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럴 때는 어떤 방식의 매뉴얼을 참고하면 됐었지?

 

 

“죄송합니다. 일의 순서가 맞질 않았군요. 우선 기업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무사히 부대로 돌아가게 된다면 기업에서도 분명 합당한 사례를―,”

 

“쯧, 이래서 바이로이드들이란.”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듯, 여성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발키리에게 달려들었다.

 

 

“…….”

 

“너 뭐하냐?”

 

 

…정확히 말하자면 달려들었다고 하기보다는 다가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환자의 상태를 살피기 위한 일련의 행동.

 

그러나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낯선 곳에서 마주한 여성에 대한 경계심으로 인해 발키리의 사고는 예민해져 있었다.

 

팔짱을 끼며 자신을 무심히 내려다보는 여성의 시선에 발키리는 천천히 올렸던 방어 자세를 풀었다.

 

 

“거참, 까칠한 녀석일세.”

 

“…….”

 

“꼴값 떨지 말고 팔 내리고 똑바로 누워, 상태 체크해야 되니까.”

 

 

여성은 짧게 혀를 차며 다소 거칠게 발키리의 팔을 치웠다.

 

팔과 어깨로부터 화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으나, 인상만 짧게 찌푸릴 뿐. 발키리는 짧은 침음조차 내지 않았다.

 

여성은 주머니에서 꺼낸 후레쉬로 발키리의 얼굴과 환부를 비추며 살피기 시작했다.

 

환한 빛에 눈이 부실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흐려진 시야 너머의 빛은 별로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화상이 심해서 살짝 걱정했는데, 다행히 2차 감염 증상은 보이지 않네. 이럴 때 보면 오리진 더스트라는 거, 참 좋다니까.

 

어지간한 감염은 면역이지, 신체 능력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지, 어지간한 상처 정도는 알아서 치료되기까지. 정말 신이 내린 기적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아.”

 

 

여성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발키리의 팔에 감긴 붕대를 갈아주었다. 피가 배어든 붕대 아래로 딱지가 굳은 팔이 보인다.

 

 

“…정작 아파 죽어가는 사람들은 구하지도 못한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어쩐지 상처 위로 감는 붕대에 힘이 더 들어간 것 같았으나 발키리는 마찬가지로 통증을 참았다.

 

 

“감사합니다.”

 

 

붕대 교체가 끝난 직후,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는 여성에게 발키리가 말했다.

 

매뉴얼에는 없는 내용이었으나, 어째선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 없어, 그냥 고맙다고. 그 한마디면 충분하니까.’

 

…이것도 레오나 대장의 영향일까.

 

예상 못 한 감사 인사에 여성은 적잖이 놀란 듯 보였다.

 

 

“저희 기업과 바이오로이드들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갖고 계신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님께서는 빈사에 빠진 저를 구해주시고 치료해주셨죠.

 

이건 제 개인적인 감사입니다. 제가 무사히 기업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반드시 이 사례를―,”

 

“아, 그건 힘들 텐데.”

 

 

발키리는 고갤 들어 여성을 올려다보았다. 여성은 마치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얘기한 듯, 자신의 손으로 입을 때리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 이내 여성은 짧게 혀를 차며 서랍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발키리에게 건넸다.

 

철제 케이스 안에는 타들어 간 인식 칩과 손상된 인공 안구 오큘러리 임플란트 가 있었다.

 

발키리는 그제야 자신의 시야가 이전과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천천히 붕대에 감긴 손을 들어 오큘러리가 박혀 있어야 할 오른쪽 눈두덩을 만지자 까칠한 거즈와 붕대의 감촉이 느껴진다.

 

 

“왼쪽보다 상대적으로 오른쪽에 피해가 컸어. 폭발에 직접적으로 휘말린 부분일 테지.

 

나름 다시 살려보려 애썼긴 했다마는…. 이미 고온에 노출되어 완전히 망가지기도 했고 주변 생체조직까지 피해를 주고 있어서 제거했어.

 

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내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여기 시설의 한계 때문이니까 원망할 생각은 말라고.

 

뭐…, 어차피 너희들에게 있어 원망 같은 감정은 없겠지만.”

 

 

여성의 말대로 발키리는 원망이나 아쉬움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전투하기 조금 불편한 몸이 되었구나 하는 짧은 감상뿐이었다. 어차피 폭격으로 죽을 목숨, 인간님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났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어졌을 뿐이고.

 

발키리는 검게 타들어 간 회로 칩을 손에 들었다. 작은 손톱 크기 정도의 작은 칩이지만, 그녀가 병기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수많은 도움을 주는 장치였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만, 제 전투 모듈 인식 장치는 무사한가요?”

 

 

전투 모듈이 손상된다고 하더라도 머리 뒤쪽에 있는 인식 장치가 무사하다면 기업에서 새로운 전투 모듈을 받으면 해결될 일었다.

 

자신은 다른 개체들과는 다르게 오랫동안 전장에서 살아남은 개체이니 기업에서도 가치를 높게 사 새로운 전투 모듈을 공급해 줄지도 모르지 않는가.

 

 

“완전히 녹아서 일부를 제거했어. 아마 더는 인식 칩을 심을 수 없을 거야.”

 

 

일말의 기대는 암울한 여성의 답과 함께 사라졌다.

 

저격을 도와주는 오큘러리와 전투를 보조해주는 전투 회로가 망가진 발키리는 더 이상 발키리가 아니었다.

 

가늠자와 방아쇠가 없는 총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듯, 자신 또한 발할라의 저격수로서 역할을 맡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어떻게 하지?

 

발키리는 매뉴얼을 떠올렸다. 비록 칩이 사라지긴 했으나, 머릿속에 각인된 기억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매뉴얼에 따르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은 기업에 회수되어 그 가치를 다시금 재조명받고 완전히 폐기되거나, 다른 곳으로 재활용된다.

 

발키리는 다시금 테마파크에서 ‘재활용된’ 바이오로이드들을 떠올렸다.

 

결국엔 그들과 같은 결말인가…. 발키리는 눈을 감았다.

 

 

“다시 돌아갈 생각이야?”

 

 

여성의 물음에 발키리는 눈을 떴다.

 

여성은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피가 묻은 거즈와 붕대들을 정리하면서 마치 눈치를 살피듯 발키리에게 힐끗힐끗 시선을 두고 있었다.

 

 

“예.”

 

“기업에 돌아가면 폐기되거나 재활용될 뿐이야. 재활용도 말이 재활용이지 사실상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를 정도로 끔찍한 일을 당할 뿐이야.”

 

“…알고 있습니다.”

 

 

여성은 정리한 거즈와 붕대를 쓰레기통에 아무렇게나 쑤셔놓고는 뚜껑을 쾅, 하고 닫았다. 어째선지 발키리의 시선에 비친 인간님은 화가 난듯했다.

 

 

“…그래도 기업에서 마땅한 보상을 줄 수 있도록 제가 건의해보겠습니다.”

 

“내가 그놈들의 보상 때문에 널 살린 거라 생각해?”

 

“그건….”

 

“그럼 질문을 바꾸자고. 아까 왜 나한테 개인적으로 감사하다고 했지? 네 말대로 넌 그저 기업의 소모품일 뿐인데 말이야.”

 

 

발키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어째서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레오나의 죽음 이후로 발키리는 자신의 많은 것들이 달려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전에는 하지 않았을 생각을 하고, 잡념에 빠진다.

 

그래, 마치 자신의 품 안에서 죽어간 3번째 레오나처럼.

 

 

기약 없는 침묵이 또 다른 대답이 되었는지, 여성은 재차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여성은 짧게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지금 여기선 널 기업에 돌려주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그러니 그동안 생각을 정리해봐. 기업에 돌아가서 끝까지 인형으로 살다가 죽을지. 아니면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지.”

 

 

새로운 삶. 발키리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말을 반복했다.

 

자신에게 이상한 감정의 파문을 남겼던 레오나 개체도 새로운 삶에 관한 얘기를 줄곳 하곤 했다.

 

새로운 삶.

 

 

“…대체 새로운 삶이 뭔가요?”

 


여성에게 질문하기 위해 발키리는 고갤 들었으나, 이미 여성은 자리를 벗어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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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몇편을 써본 뒤 용기를 얻어 그동안 써보고 싶었던


멸망 전 이야기를 한번 써보려합니다.


개인적으로 겜 시작 부터 발키리에 대한 애정도가 높아서 첫 주인공은 발키리로 했고요.


장편을 써보는건 첨이지만 아무쪼록 재밌게 읽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피드백 적극적으로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