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카호에서 맞이하는 첫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전에 나는 발키리와 약혼을 했다.


- 결혼 축하해 발키리!


평소답지 않게 들뜬 목소리로 레오나가 폭죽을 터트린다.


작은 탁자 위에 붉은 천을 덮은 조촐한 자리. 레오나와 내가 발키를 위해 준비한 파티. 어설프게 만들어진 금색 샹들리에만이 이 방이 파티 장소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탁자 위에는 독한 술병이 초콜릿을 에워싸고 있었다.

안주는 초콜릿이 전부. 발할라 다웠다.


- 감사합니다, 대장. 결혼식까지 아직 열흘이나 남았는데, 축하를 받으니 조금 쑥스럽습니다...


나와 함께 파티장으로 들어온 발키리는 머리에 붙은 얇은 색종이들을 떼어 내면서 환하게 웃었다. 레오나는 주머니에서 폭죽을 하나 더 꺼내더니 나를 향해 터트렸다.


형형색색의 색종이 사이로 보이는 레오나는 갈색 드레스를 입은 발키리와는 대조적이었다. 하얀색 남성용 정장에 평소에 신던 하이힐이 아닌 남성용 구두. 그것마저도 하얀색.


예쁘다고, 어울린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내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레오나가 몸을 돌려 우리를 자리로 안내한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발이 레오나의 하얀 어깨선을 스친다. 


눈을 뗼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깨운 건 발키리였다. 굳은살이 박힌 따스한 손이 내 손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깍지를 끼고 발키리가 나를 파티 테이블로 이끈다.


북방의 경계를 지키던 발할라는 이름 그대로 술, 그리고 전투와 서약한 여자들이었다. 한 병만 마셔도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매스꺼워지는 술을 마치 맥주처럼 비우는 전사들이다.


레오나가 주도하는 건배사와 잔이 부딪히고 서로의 술잔에 술이 섞인다. 레오나의 술이 내 술잔에 섞인다. 


눈이 그 장면을 포착하고 만다.


그 덕에 술을 넘길 떄 마다 긴장되고, 발키리보다도 래오나를 향해 시선이 움직인다. 그녀가 내 긴장을 눈치 챘을까봐. 


걱정은 기우였다.


레오나의 미소는 항상 발키리에게 향했고, 내게 돌아오는 건 냉소와 농담이 썩인 핀잔이었다.


- 대장님과 사령관 각하께서 함께 파티자리를 만드는 상황은 상상도 해 본적이 없어서,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발키리의 눈빛은 말과는 정반대였다. 조금이 아니었다. 레오나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발키리의 눈은 항상 나와 레오나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 뭐, 내가 사령관과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점은 인정해. 하지만 발키리, 그건 능력적인 부분에 한해서야. 


- 레오나, 능력적 부분이라고 뭉뚱그리기에는 내게 한 행동들을 한 번 객관적으로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 어머, 사령관의 능력이, 내 기대에 못 미쳤던건 사실이야. 


능력적인 부분으로 태클을 거는 레오나에게 나는 어떤 반론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나는 지휘에 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으니까.


지금은 그래도 전황을 보는 눈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대장급 바이오로이드들에 비하면 한 참은 부족했다. 


- 나, 나름대로 노력했어, 레오나.


- 인간 복원이 목표인 최후의 인간이 '나름대로 노력했어요' 라니, 전시상황이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사령관? 인류복원을 위해서는 나름대로 노력한 인간이 아니라 완벽한 인간이 필요해..


- 그래, 나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 레오나. 부족해서 미안해.


- 대, 대장님, 사령관 각하꼐서는 밤을 세면서까지 전술을...


- 알아, 발키리, 그냥 한 번 놀려 본거야. 미래의 남편을 건드렸다고 너무 과민반응하는 거 아니야? 너무한데, 그것도 자매인 나에게. 


레오나는 당황하는 발키리를 보며 웃었다. 발키리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발키리의 어깨를 붙잡고 내 쪽으로 당겼다. 레오나의 눈동자가 술잔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 발키리, 레오나가 항상 치는 장난이잖아. 너무 신경 쓰지 마.


- 장난? 사령관은 자신의 능력 부족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게 어떨끼?.


- 레오나, 넌 타인에 대한 기대치를 낮게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어.


한 마디도 지지 안으려는 레오나는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여전히 시선은 술잔을 향해있다. 우리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레오나의 핀잔과, 그 핀잔을 핑계 삼아 어떻게든 말을 붙여보려는 나. 


좁혀지는 일 없는 평행선.


이 달콤한 평행선을 만들어준 바이오로드가 발키리였다.


발키리가 아니었다면 내가 레오나와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는 현재는 없었을 거다. 완벽하지 않은 남자의 매달림을 좋아할 레오나가 아니란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발키리의 고백으로 시작된 교제. 발키리의 마음을 훤히 알면서, 그걸 핑계로 삼아 두드린 레오나의 방문.


'레오나 발키리가 좋아할 만한 선물이 뭐가 있을까? 곧 생일이기도 하고...'


긴 침묵 끝에 단 한번도 열리지 않았던 레오나의 방문이 그날 처음으로 열렸다. 


'연인의 마음도 모르다니, 심지어 그걸 다른 여성에서 물어보려는 사령관은 정말 센스가 부족해, 완벽한 남자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어. 실격이야.'


비굴하게, 억지로 웃으며 바닥을 내려다보는 내게 던져진 한 마디가 


'들어와 사령관, 자매가 사령관이 주는 한심한 선물을 받고 실망하는 모습을 나는 못 봐'


가슴속에 처박아두었던 미련을 부풀렸다. 


지금도 레오나의 방에 들어갔을 때 맡은 향기를 기억한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의 레오나의 체취와는 다른 바다 냄새.


활짝 열려있었던 창문.


그날은 오르카가 점검을 위해 해변에 상륙한 날이었다. 


그리고 레오나는 내가 혼자 멋대로 품은 희망을 완벽하게 밟아 뭉갰다. 내 미련에는 착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발키리의 취향을 십이 분간 설명한 후 레오나가 문을 가리키며 한 마디를 기억한다.


'설명은 끝났어, 이제 나가줘 사령관'


발키리를 핑계로 삼은 연애 상담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한달 전에 발키리의 프러포즈로, 약혼으로 끝을 맺었다.


-흡!


정강이에서 올라오는 통증과 눈앞에서 번쩍이는 불빛.


나는 자동적으로 찌그러지는 미간을 억지로 펴며 테이블 밑을 발키리에게 들키지 않도록 몰래 내려다봤다.


하얀 남성용 구두가 내 정강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나는 구두 밑창을 걷어차려고 했지만, 구두는 솜씨 좋게 내 발길질을 피해간다.


나는 시선을 들고 구두의 주인을 노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발키리한테 집중해 사령관'


발키리에게 눈웃음 짓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레오나가 턱을 괴면서 소리 없이 말한다.


나는 레오나를 쳐다보면서 발키리의 손을 잡았다. 발키리의 손이 부끄럽다는 듯이 빠지려고 했지만, 내가 붙잡았다. 혼자만의 미련에서 부터 나를 지켜주는 부적인 것처럼.


우리는 다시 셋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전투와 일상과 부대원에 관한 이야기와 그리고 약간의 뒷담.


뒷담이 중심화제가 되려 하면, 발키리는 뒷담의 대상이 가진 장점을 꺼냄으로써 화제를 무마시키려 했다.


뒷담을 중심주제로 가지고 오려는 파티의 구성원은 당연히 레오나.


나를 보고 악동처럼 씩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레오나, 파인 보조개가 이뻤다. 


- 발키리, 이런 기회 흔치 않아, 미래의 남편에게 궁금한 것 없어?


시답지 않은 이야기의 나열 속에서 갑자기 찾아온 변주. 이야기의 중심이 나를 향해 갑작스럽게 핸들을 꺾는, 급회전이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땀 때문에 손바닥이 미끈거린다.


- 레오나, 갑자기 이야기가 왜 그런 쪽으로 빠지는 거야.


거울이 눈앞에 있다면, 나는 굉장히 비굴한 웃음을 짓고 있으리라. 누구에게나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하나쯤은 있다. 그 비밀을 레오나가 파해칠 것 같다는 예감이 가슴 한켠을 깊숙히 찌른다.


- 사령관, 부부 사이에 비밀이란 건 존재해서는 안 돼.


- 그런 거 없어, 발키리가 보기에는 어떄? 내가 비밀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


목덜미에 식은땀이 흐른다. 나는 쑥스러움을 가장해서 땀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절대로 들켜서는 안되는 비밀이 하나. 


-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발키리가 몸을 꼬며 내 시선을 피한다. 볼이 붉다. 깍지를 끼고 양손의 엄지가 서로를 문지른다.


- 거봐, 레오나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어.


나는 단호하게 이상 속의 사랑, 소설 속의 사랑을 맹세한다.


- 그럴 리가. 결혼하기 전의 남자는 여기에 비밀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고 책에서 읽었는걸.


레오나의 손가락이 내 가슴 위에서 아래로 길게 세로 선을 긋는다.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 나는 레오나의 손가락으로부터 몸을 뒤로 뺐다. 들켰을까?


- 흐음,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니까 더 의심되는데 사령관.


- 착각이야 레오나.


나는 쓴웃음을 억지로 얼굴에 띄운다. 지금 이 순간은 발키리를 위한 시간이었다, 발키리를 위해 기획된 파티다. 


앞으로도, 기약 없는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 저.. 그럼 제가 궁금한게 있습니다, 대장님.


- 미래의 남편이 될 사람의 비밀보다 더?


- 네, 왜 일부일처제를 주장하신 건지... 솔직히 저는 아직 이해되지 않습니다.


- 내가 원한 분위기와는 다르지만, 좋아, 설명해 줄게. 우리 부관은 프러포즈를 했고 사령관은 받아들였어. 오르카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벌어진 거야, 둘은 머리가 꽃밭이라 수습할 생각이 없었겠지만.


- 수습이라니?


나는 레오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사령관, 생각해봐. 오르카는 내가 사령관의 첫째 부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바이오로이드들이 모인 집단이야. 뭐, 인류 복원이라는 사명에 진지하게 목을 매는 바이오로이드는 드물어.


하얀 장갑을 손에서 벗겨내고 엄지와 검지로 초콜릿을 살포시 잡은 레오나는 혀끝으로 초콜릿을 살짝 맛본뒤 입 속으로 숨겼다.


- 지금까지 사령관의 공식적인 옆자리는 비어있었어. 그게 이번에 채워지게 된 거고. 사령관의 옆자리가 공석이었기에 개성 강한 바이오로이드들이 사령관의 강제적인 명령이 없어도 협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응.


- 그래, 그게 사령관이지. 발키리가 사령관 옆을 차지하게 됐으니 다음은 누군가 하는 문제가 오르카를 휩쓸 거야. 분란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어. 저 여자만 없다면 혹시 내가? 하는 식으로.


- 대장님, 그게 큰 문제가 되는 겁니까?


- 그래서 발키리 내가 널 무르다고 한 거야. 사령관은 생각이 없고. 무적의 용과 함대를 찾는 큰 목표를 설정해두고 분란은 좋지 않아.싹을 자르는게 최선이지.


- 약혼은 진행됐고, 결혼은 기정사실이야. 분란을 지우는 방법은 하나. 원인이 될 두 번째 자리를 없애버리는 거야.


- 이틀 전에,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두 번째 부인은 없다는 사령관의 선언이 내가 생각한 방법이야. 그럼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전쟁 후에 사령관의 두 번째로 선택받기 위해서 당분간 잠잠해질 테니까. 서로 다퉜다간 사령관의 눈밖에 날 수도 있잖아?


- 결혼식이라는 큰 이벤트 후에 오르카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꺼야. 발키리에게 화살을 쏘아대는 질투심 강한 바이오로이드가 여전히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막아주는 게 남편의 역할 아니겠어?


- 아무튼 이게 내가 저번 대장회의 때 일부일처를 주장한 이유야. 눈치 빠른 대장들 덕에 사건을 해결하기가 쉬웠어.


- 발키리가 무르다는 건?


- 사령관, 발키리는 내가 잘 알아. 일부일처가 아니었더라면 사령관의 부인이 무적의 용과 호라이즌의 함대를 찾기 전까지 다가오는 바이오로이드들을 처내야해. 두 번째를 놓고 분란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사령관이 오르카호에 강제적인 명령을 내리는 게 가장 쉬운방법이긴 하지만, 사령관 그런 걸 원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 그럼 발키리가 해야 하는데, 발키리는... 그렇게 못해. 너무 착해. 근본이 따뜻해서 그런 짓 못 해.


- 저, 저도 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에게 칭찬을 들은 탓인지 발키리는 평소보다도 많은 술을 빠르게 마셨다. 취기가 올라온 볼이 붉게 물들고 몸이 좌우로 조금씩 흔들린다.


- 그래? 그럼 확인해 볼까?


그렇게 말한 레오나가 내 왼팔을 끌어안았다. 발키리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는 것 같았다. 발키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눈앞이 흐릿해진다. 발키리가 보이지 않아. 온몸의 신경이 왼팔로 옮겨간 느낌. 부드러움과 따스함. 그리고 술과 뒤섞인 레오나의 살냄새.


지금 이대로 세상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거봐, 못하잖아.


달콤한 순간은 눈처럼 내려앉았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팔뚝이 허전했다. 레오나는 턱을 괴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발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쉬워서 나도 모르게 레오나와 눈을 맞추고 말았다.  레오나의 귓불이 붉다. 착각일까? 다시 한번 확인하려고 했지만, 머리카락이 그녀의 귀를 가려버렸다.


- 뭘 그렇게 놀라 사령관? 장난이야. 그보다 발키리 좀 봐.


발키리를 뭔가를 말하려다가 굳은 상태였다. 입이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발키리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 내가 일부일처라는 안전장치를 마련한 이유. 난 발할라의 대장이기 이전에 자매야. 자매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나는 보고 싶지 않아.


착한 발키리, 따뜻한 발키리. 그래 레오나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혼자 끙끙 앓던 내게 다가와 준 바이오로이드..


대장 회의에 참석해 멍청한 의견을 제시하고, 엉터리 전술을 주장해서 완전히 박살 난 어느 날에, 자료실 구석에 박혀 한심하게 우는 나를 찾아 이유도 묻지 않고 위로해준 게 발키리였다.


전쟁과 전략 그리고 전술에 대한 안목의 부족을 당연하다고, 처음으로 긍정해준 것도 발키리였다.


기대가 조금도 담기지 않은 호의 역시 발키리가 처음이었다.


지금의 나도 괜찮다는 일방적인 긍정.


그때 나는 발키리의 어깨에 사람으로서 울었다.


-..........첫사랑 말이야.


벼락과도 같은 단어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한다.


과거에서 나를 끄집어내 냉수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같은 아찔함.


첫사랑? 그게 왜 여기서 나오는 거지? 


발키리를 위한 파티에서 왜?


레오나, 네가 왜 그 주제를 꺼내려는 거야?


- 대장님?


발키리가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왜 첫사랑이라는 화두가 파티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머리를 굴렸다.


- 첫사랑, 첫사랑......


발키리가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그런 발키리의 몸이 바람을 맞은 갈대처럼 흔들린다.


- 대장님, 저의 첫사랑은 뻔하지 않습니까....


볼을 붉히고 눈을 반쯤 뜬 채 나를 바라보는 발키리. 나는 흔들리는 발키리의 어깨를 잡았다.


- 흐음... 우리 부관은 내가 부관의 첫사랑을 궁금해 할 거라고 생각해?


나는 레오나의 구두를 향해 힘껏 발을 휘둘렀으나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발키리의 머릿결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빗는 것으로 대답을 막을 수 있었다.


나는 정강이에서 올라오는 통증과 맞바꾼 찰나의 틈에 발키리를 보며 말했다.


- 발키리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네.


- 각하, 그..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결혼식전에 살짝 다듬었는데...


- 응, 어울려.


내 정강이를 힘껏 걷어찬 레오나는 발키리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는 시선을 조금도 주지 않은채. 그래서 나는 레오나를 훔쳐봤다.


리본이 어제와는 다르게 붉은색으로 바뀌었고 손톱이 조금 짧아져 있었다. 다크서클은 어제보다 짙었다.


일이 많다면 도와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 요즘 일이 많은가 봐 레오나?


- 한 달 뒤에 있을 크리스마스 파티 덕에 일이 추가되긴 했지만, 난 괜찮아.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 사령관, 나니까 괜찮은 거야. 도와줄 거면 스틸라인 쪽을 도와줘. 첫 크리스마스 파티라고 단체로 신난 브라우니들이 마리의 골머리를 썩이는 모양이야. 뭐 그년은 그렇게 당해도 싸지만.


완곡한 거절과 함께 기분 좋게 웃는 레오나, 술이 들어간 탓인지 단어선택이 강했다.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던 레오나의 취한 모습. 의외였다.


연애 상담을 핑계로 둘이서 술을 마실 자리를 내가 만들면, 먼저 떨어져 나가는 쪽은 항상 나였다. 


술기운이 나를 완전히 잠식해 눈앞이 흐릿해졌을 때도 레오나는 다리를 꼬고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린 채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레오나가 마시고 밑에 놓아둔 술병을 손에 들었다.


내가 마신 것과 같은 종류였다. 


겨우 네 병. 박스를 비우는 북방의 암사자가 취하기에는 적은 양이었다.


나는 레오나의 손에서 술병을 뺏으려고 했다. 천장에 매달려있는 샹들리에는 술의 도수를 강하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단순히 파티 분위기 때문에 레오나가 취하다니.


레오나는 병을 뺏으려는 내 손을 가볍게 피하고 반대편 손으로 손목을 찰싹 때렸다.


그러곤 반병을 그대로 들이켰다. 입술을 닦으며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턱을 괴는 레오나.


입술에 닦이지 못한 물방울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령관?


살짝 꼬인 발음으로 말하는 레오나. 생소한 레오나. 


- 뭐가?


- 첫사랑 말이야, 첫사랑.


- .......


- 저 대장님, 각하께서 곤란하신 것 같습니다.


발키리가 레오나의 팔을 살짝 잡고 제지했다. 나는 오른손으로 내 뺨을 쓸었다. 차가웠다. 가장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가 다시금 떠오른다.


- 아니야, 이 기회에 알아내야 해 발키리. 첫사랑은 결혼생활을 위태롭게 만드는 가장 큰 위협 중 하나야. 앞으로 사령관과 첫사랑이 만날 낌새가 보이면 니가 막아야 해.


발키리의 제지를 뿌리친 레오나. 허리에 손을 얻고 당당한 자세로 말하는 레오나.


니가 옆에서 막아주면 안 되는 거냐고, 그렇게 무심코 말할 뻔했다.


- 그리고 불공평한 것도 사실이잖아. 생각해봐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의 첫사랑은 뻔해. 바로 사령관.


-.......


- 대장, 각하를 놀리는 건 그만 해주시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각하의 안색이...


- 이건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야 발키리. 완벽한 결혼생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단계기도 하고. 너와 사령관이 결혼하고 나면 나는 너의 곁에 없을 테니까.


왜? 어째서? 나는 레오나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고 말았다.


- 나는 발키리 너를 더 이상 지켜줄 수가 없어. 우수한 부관이 시집을 가면 빈 곳 을 내가 채워야 하잖아.


겨우 그런 이유로...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는게 전부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레오나와의 관계가 발키리와 교제하기 이전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내 가슴을 휘감는다.


- 자, 그러니까 말해봐, 사령관. 첫사랑이 누군지.


-.......


나는 입을 다물었다. 구두가 내 정강이를 걷어찼지만, 강도는 파티 시작과는 다르게 확연히 약해져 있었다.


레오나와 발키리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입술과 혀가 바짝바짝 마른다. 술을 입에 머금고 가글을 하듯이 두 번 조용히 거품을 일으켰다.


알코올 냄새가 너무 강해 그대로 쏟아 낼뻔했지만 간신히 참고 삼켰다.


- 발키리....



발키리의 이마가 내 가슴에 떨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레오나를 쳐다봤다. 레오나의 눈은 더는 나를 향해있지 않았다. 술잔을 샹들리에가 만들어내는 빛에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 레오나, 발키리를 재우고 올게.


나는 발키리를 앞으로 안아 들면서 말했다.


- 아니야 사령관. 파티는 끝이야.


- 뒷정리 도와줄게. 기다리고 있어.


- 사령관 난 필요 없다고 말했어, 가서 돌아오지 마. 발키리와 함께 있어 줘.


- 뒷정리까지 전부 우리 손으로 하는 조건으로 빌린 방이니까 내가 치우는 건 당연한 일이야.


- 술에 취한 아내를 혼자 두는 건 완벽한 남편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야. 전부 내가 해. 뒷정리도 그리고 파티 마무리도.....


- 레오나....


- 사령관. 돌아오지 마. 내일 보는 거야. 잘가, 이제 작별이야.


레오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완강한 자세를 취했다. 


어쩔 수 없이 파티장을 빠져나와 발키리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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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침대 위의 이불을 정리하고 발키리를 살포시 내려두었다. 내게 벗어나기 싫다는 듯이 목을 끌어안는 발키리의 볼에 입을 맞춘다. 


그제야 내 목을 감싼 발키리의 팔이 풀린다. 우리는 입을 맞췄다.


술과 초콜릿 그리고, 체취가 썩인 긴 키스. 살짝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발키리.


그 눈을 볼 때마다 마음속의 죄책감이 커진다. 내 마음속에 자리잡은 레오나를 들킬까봐 겁이 난다. 


나는 립스틱이 번진 발키리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포시 쓸었다. 발키리의 눈은 진즉에 풀려있었다. 내 품에 안길 때부터. 


발키리의 구두를 벗기고, 머리카락을 정리해준 다음, 배개를 목 아래에 넣어주었다.


그 순간 발키리의 양팔이 내 목을 감싼다. 부드럽게, 그러나 사슬과 같이.


발키리의 눈이 젖어있었다. 결혼식을 열흘 남기고 신부의 눈을 적시는 신랑이라니, 레오나가 본다면 한소리를 할게 틀림없다.


허리를 숙여 발키리의 눈 밑에 입을 맞춘 후 천천히 내려와 입술에서 썩였다. 입술이 떨어지고 긴 입맞춤의 흔적이 입술과 입술 사이를 투명하게 이어준다.


우리는 여운에 젖어 서로의 눈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발키리가 살며시 내 옷깃을 잡았다.


- 가지 마십시요... 각하...


나는 발키리의 그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제 결단을 해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결혼식을 열흘 앞둔 오늘. 발키리가 아닌 레오나에게 끌리는 나를 확인한 오늘. 


오르카호를 위해, 스스로 만든 첫사랑의 해저에서 벗어나지도 못하는 나를 바라봐주는 발키리를 위해.


나를 좋아하는 발키리를 위해


나를 사랑하는 발키리를 위해


나와 결혼할 발키리를 위해


내가 사랑해야 할 발키리를 위해


첫사랑을, 일방적인 내 미련을 털어내기 위한 결심이 이제야 섰다.


- 발키리, 금방 돌아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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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는 파티가 남기고 간 연붉은 여운 속에서 허리를 의자에 느슨히 기대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파티장으로 다시 들어가자 레오나의 얼굴이 이쪽을 향해 살짝 움직인다.


급조한 샹들리에가 흔들리고 눈부신 금발이, 아름다운 장발이 바닥을 사락 쓸었다.


- 잘가와 작별이라는 단어의 뜻을 잊어먹은 거야? 파티는 끝났어. 사령관이 여기 올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사령관을 위해 총각파티를 열어줄 남자가 없는걸.


레오나는 레오나 답지 않은 엉터리 농담을 입에 담았다.


나는 레오나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고향을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설국으로 다가가는 듯한 착각이 느껴졌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 사령관, 내 말 못 들었어? 파티는 끝이야. 미래의 신부를 혼자 두고 다시 이곳에 오다니. 완벽한 신랑에서 탈락이야.


북방의 암사자라는 별명과 어울리지 않는 가늘고 긴 손가락이 나를 가리킨다.


나는 바닥에서 살랑거리는 레오나의 머리카락을 걷어서 앞으로 정리해주었다.


- 사령관, 방금 그 행동, 아내 이외의 여자에게 해줄 만한 게 아니야. 조심해. 여자는 금방 착각해 버리는 생물이니까. 오르카처럼 특수환 환경이라면 더욱.


발키리와의 관계가 없었다면 이런 행동, 장난, 꿈에서나 해봤을 거야. 


발키리가 없었다면 너와 나의 접점은 영에 수렴했을 테니까.


무시와 핀잔으로 무장한 너에게 다가가기에는 난 너의 이상과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남자니까. 


'아내 이외의 여자.'


입술을 바짝 마르게 하는 단어였다.


- 완벽한 남편에서 또 한걸음 후퇴했네.


차갑게 웃는 레오나. 발키리와 함께 있을 때 보여주던 미소가 아니었다. 맞은 편에 앉은 나는 아직 술이 남은 술병을 찾아 테이블 위를 뒤적였다.


우연인지 반쯤 남은 술 한 병이 내 발치에 있었다.


- 레오나, 상담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맨정신으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에 독한 술을 그대로 위로 넘겼다. 속이 화끈거리고 머리가 뜨겁다.


레오나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거기에 연민도 썩여 있을까. 그 이상이 담겨 있을까. 


- 레오나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의 첫사랑이 나라고 했잖아. 혹시...


- 훗,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사령관? 내 이상형은 완벽한 남자야. 사령관 같이 부족한 남자가 아니라.


그래. 그렇구나... 다행이야...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겠어.


- 레오나 내 첫사랑 말이야...


- 목소리가 작아지는 게 발키리 앞에서는 하기 힘든 이야기 였나보네. 내가 맞춰볼까 사령관? 발키리가 알게 되면 부담스러운 이름 같은데.. 칸? 콘스타챠? 마리? ...설마 마리 그년이야?


술기운에 말하는 거야


- 하아.. 사령관의 첫사랑이 그 양파 냄새 나는 년이었다니.


너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테니까


- 그래, 마리 정도면 발키리가 들었을 때 부담이.....



내 진심은



- 너 였어, 내 첫사랑.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레오나. 


그런 표정을 보여주면, 내가... 멈출 수가 없잖아. 


장난이었다고 흘려 넘길 수가 없잖아.


- 첫눈에 반했어, 아찔했어. 눈 앞이 번쩍이고...여기가...


너에게 고백했더라면,  내가 네가 만족할 만한 남자가 될 수 있었다면.


- 세차게 뛰었어, 


이런 감정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 텐데. 네가 만족할 만한 남자였다면, 이런 싸구려 같은 대사는 내뱉지 않았을 텐데.


있잖아 레오나, 나 아파.


그래서 말하는 거야. 최악이라는 거 알지만, 못난 남자라는 거 알지만, 완벽이랑 동떨어진 남자라는 거 알지만.


너무 아파, 여기가, 결혼식이 다가올 때마다 네가 생각나서 가슴이 아파. 너에게 시선을 자꾸 뺏겨.


- 그렇게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뛴 건 그때가 처음이야.


너무 괴로워서, 발키리를 배신하는 것 같아서 술기운에 이렇게 고백하는 거야. 나 앞으로 발키리와 살아야 해.


지금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오르카호를 위해 발키리만을 사랑해야 해.


- 그렇다고 오해하지는마....레오나, 나 발키리....좋아해, 진심이야. 그런데...


네가 자꾸 생각나.


발키리와 입을 맞출 때, 발키리를 끌어안을 때, 발키리와 관계를 가질 떄. 항상,항상,


- 네가 나타났다 사라져. 계속, 계속. 잊을 수가 없어.


사실 잊고 싶지 않아.


잊기 싫어, 너와 함께 하려고 어떻게던 짜내던 내 시간들, 완벽해지기 위해 쏟았던 내 노력들.


다 널위해서였으니까. 


그거 알아? 사실 발키리도 핑계였어. 네 곁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서.


너 발키리 많이 아끼잖아. 네가 발키리의 연애에 참견하면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까.


그런 핑계였는데, 이제 핑계가 커져 버렸어.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그래서 염치없지만, 이러면 안된다는 거 알지만 부탁 하나만 할게.


- 그러니까 레오나... 나좀... 차주라..

  

전부 잊을 수 있게. 발키리만을 바라볼 수 있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널 첫사랑으로 남겨둘 수 있게. 가끔 열어서 회상하는 그런 추억이 될 수 있도록.


부끄러운 고백을 마친 나는 레오나를 바라볼 수가 없어서 시선을 내렸다. 굴러다니는 빈 병이 발치에 채였다. 파티장이었던 곳에 내려앉은 침묵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받게 될 레오나의 멸시가 더 무서웠다. 


- 지금 그걸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야 사령관?


- 내가 너에 대한 미련을 때어내지 못해서, 그러지 못해서 발키리가 내 마음을 눈치채고 실망할까 봐, 내 마음은 아직도 널 향해 있는 게 들킬까 봐...그게..... 무서워....


- ....


- 너에게 나는 마지막 인간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으니까, 레오나는 나를 남자로 보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날 짓밟아줘. 내 미련을 뭉게 줘. 시선을 발키리에게로 고정 시킬 수 있게 도와줘. 오르카호를 위해. 발키리를 위해.... 부탁이야.


레오나가 나에게 품을 감정을 인정했는데, 그뿐인데 속이, 가슴사이가 갈갈이 찢기는 듯한 통증이 취기를 몰아낸다. 


품었던 미련이 하얀 안개가 되어 눈에 맺혔다가 떨어진다. 고개를 숙였다. 여자 앞에서 우는 건 이게 두 번째.


정말 꼴사납다.


고백을 하면 후련해진다는건 전부 거짓말. 사실을 인정하면 다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다. 아파서 고개를 들 수가 없고 눈물이 앞을 가려서 다음을 볼 수 조차 없다. 


레오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 불편한 침묵이 영원토록 계속되었으면.


머리와 몸이 곧 다가올 레오나의 대답에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 타인이 자신에게 품을 감정을 일방적으로 정의한 다음 고백하는 거 꼴사납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치 내 속을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그 말들, 인간으로서의 대화방식에 부적절하고 모자란다고 생각하지 않냐고 사령관. 


- 알아, 이런 거 잘못됐다는 거 알아. 하지만... 하지만 레오나 넌 나한테 어떤 감정을 느끼지 않잖아. 그게 사실이니까. 그래서 부탁하는...


- 최악이야.


- 정말 미안해......하지만 발키리를 위해서...


- 사령관은 최악의 남자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날카로운 레오나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내가 엉터리 전술을 제시했을 때도 짓지 않았던 레오나의 표정이 있었다.


고통스러워 보였다.


- 지금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아는 사령관이 왜 지금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사령관은, 그렇게 내 마음을 잘아는 사령관은 내가, 내가 왜 일부일처를 주장했는지, 오늘 파티를 제안했는지 모르겠어? 그래,  모를 거야, 난 아무 잘못 없어요, 몰라요 하는 멍청한 표정이나 짓겠지. 그게 사령관이니까! 


- 발키리를 축하해 주려고...


- 아니야! 작별이라고 말했잖아. 내가, 안녕이라고 말했잖아!


- 레오나, 나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작별이 뭔지 안녕이 뭔지.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단 말이야!


- 그걸 모르니까 내가 사령관을 무시하는거야! 


파티 마지막에서의 작별이라든 안녕이라든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레오나. 날 싫어하는 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나는 일차원으로 생각하는 방법밖에 모른단 말이야.


- 그럼, 알려줘....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려줘. 의미를 알려줘. 나는 몰라, 멍청하고 타인의 감정을 멋대로 정해버리는 그런 최악의 남자라서 모른다고....


- 곧 자매의 결혼식이야. 그런데 내가....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왜 레오나는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왜 고통스러운 표정인 걸까. 나에게 감정이 없을 레오나가 왜...


가슴 한 켠에 눌러 두었던 미련이 냄새를 맡고 고개를 쳐든다. 눌러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 거짓말..


- 사령관은 내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대장회의 때 일부일처를 주장한 레오나. 그리고 결혼식을 열흘 앞두고 만든 파티, 그 끝에서의 안녕과 작별, 어쩌면 레오나는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하는 달콤한 의심이 나를 휘감는다.


만약 레오나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미련을 떠나보내기 위해 파티를 주선한 것이라면.


- 그치만! 레오나 넌 단 한 번도 날 따뜻하게 대해준 적이 없잖아... 항상 윽박지르고, 재촉하고, 무시하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멍청하고 둔한 내가 어떻게 눈치를 채냔 말이야!


- 난 원래 그런 여자야! 그럴 수밖에 없는 여자라고...


레오나의 눈에서 내게서 멈춰버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그녀가 울고 있었다. 


미련이 춤을 추며 귓가에 속삭인다. 어서 손을 뻗으라고, 눈물을 닦아 주라고. 약혼자는 잊어버리고. 알고 있다. 미련이라는 허상이 속삭이는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을.


이제 멈출 수 없다.


레오나의 뺨에 손을 뻗었다. 손목을 때리는 통증. 내 손을 뿌리친 레오나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물러서지 않은 채.


여기가 경계선. 멈추면 돌아갈 수 있다. 발키리의 곁으로 돌아가, 입을 맞추며 금방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도 오르카호의 평화도 발할라의 자매들도 지킬 수 있다. 


단 한 마디면 가능하다. '미안해 농담이야' 그러면 레오나가 냉소로 받아치고 모든 게 원래대로, 순리대로 흘러간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

.

.

.

레오나가 도망치지 못하게, 저항하지 못하게 양팔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레오나와의 키스는 피 맛이 나고 고통스러웠다. 입술을 뜯겼다. 하얀 구두가 사정없이 내 배를 걷어찬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레오나의 저항은 평소의 화풀이 할 때보다 명백하게 약했으니까.


숨이 차오를 때까지 긴 입맞춤. 


레오나의 저항이 멈추고, 마침내 키스가 끝났을 때 붉은 선이 레오나와 내 입술 사이를 이었다.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장갑을 낀 하얀 손이 내 뺨을 때린다.


- 이게.. 뭐하는 짓이야 사령관! 미쳤어! 결혼식이 열흘 후야, 일부일처를 선언한 오르카호의 사령관이 이런 짓을 했다가 들키는 날엔 끝이야. 다 끝난다고! 발키리를...

 

- 너를 좋아해, 레오나.


이제 돌이킬 수 없어. 


아니 돌아가고 싶지 않아.


- 사랑해 레오나.


내 눈을 피하는 레오나로부터 멀어진 거리를 다시 좁힌다. 사람 사이의 정상적인 사랑의 방식을 배우지 못한 마지막 인간이라서 미안해. 무드를 몰라서 미안해.


일방적인 인간이라 미안해.


- 사령관은 발키리를.... 발키리의 고백을 받아들였어. 사령관은 발키리를 좋아해. 발키리도 사령관을....


무릎을 모으고 웅크린 채, 고장이 난 기계처럼 초점을 잃고 자신을 세뇌하듯이 중얼거리는 레오나를 붙잡았다.


- 발키리가 날 좋아하고 있다는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고백하면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나는....


- 모르겠어, 난 모르겠어, 못 들은 거야.... 사령관, 이 시간은 없었던 걸로..


- 나는, 나는!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 고백을 끌었어! 그 시간이, 내 연애를 상담하는 그 시간만이 네가 유일하게 나를 따뜻하게 대해줄 때였으니까.


부정하고 멀어지려는 레오나에게 진실을 고백한다.


- 그럼.. 그럼 왜! 발키리의 고백을 받아들인 거야!


- 네가 날 좋아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항상, 항상 차갑게 대했잖아. 내가 희망을 품지 못하게 대했잖아. 나는., 나는 완벽하지 않아. 말하지 않으면 몰라, 모른다고... 발키리의 고백을 거절하면... 다시는 너와 말을 못 하게 될 줄 알았어. 상담 이전의 관계로 돌아가는 게..... 싫었어.


구차하게 매달린다. 일방적으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너는 똑똑하니까 바보같은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알고 있지? 나 이제 멈추지 않을거야, 레오나.


- 돌아가.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어, 사령관. 발키리에게로 돌아가 줘. 그럼 나도..나도 오늘 밤 일 전부 잊을 테니까.

 

나와 눈을 맞추고 떨리는 목소리로 단절을 읊조리는 레오나를 끌어안았다. 강하게. 다시는 엇갈리는 일이 없도록. 멍청한 내가 놓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 사령관, 꿈이라고 생각해


레오나의 눈물이 내 어깨를 적신다.


- 싫어


- 난... 발할라의 지휘관이야. 부대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 몰라.


- 아기처럼 칭얼거린다고 바뀌는 건 없어 사령관. 이 팔 풀어.


- 싫다고 말했잖아!


- 사령관!.... 제발... 이 이상 나를 힘들게 만들지 마.


싫어, 놓을 생각 없어. 지금 널 놓치면, 영원히 떠날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러니까 니가 때려도 놓치 않을 거야. 죽어도 놓지 않을 거야.


- 부대를 생각해 사령관. 오르카호를 생각해, 사령관. 이런 일... 일어나면 안 되는 거잖아.


알 바 아니야. 지금 그런 거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 발키리가 알면 슬퍼 할꺼야.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어떤 시선으로 사령관을 볼지도 생각해봐. 상상만 해도 아프잖아.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야 레오나. 난 아프지 않아. 지금 하나도 아프지 않아. 머릿속이 전부 너로 가득 차서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수조차 없어.


지금 니가 떠나면 나는..... 안돼


- 가지마.


- 사령관은 지금 첫사랑이라는 단어에 흔들리고 있어.


- 휘둘리고 있지 않아.


- 첫사랑과의 키스로 휘둘리는 사랑을 가진 미숙한 남자 따위 나는 좋아하지 않아.


- 레오나, 나는 널..


- 그만! 그만하라고 말하잖아. 제발,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제발...


우리는 차갑게 식어버린 파티장에서 서로를 끌어 안았다. 레오나는 더 이상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러나 다가오지도 않았다.


일방적으로 다가가는 것은 나


레오나를 끌어안는 것도 나였고, 매달리는 것도 나였다. 


언젠가 새벽은 끝난다. 아침 햇살은 파티장을 비추고, 내 선택은 오르카호에 드러난다. 


다만 이어져 있는 이 순간이 좋아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느끼고 있다고 해도 달콤했다. 


- 내일 발키리에게 모두 말할 생각이야. 내 진심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레오나는 인형처럼 내 품에 안겨있을 뿐이다. 그녀의 숨과 어깨의 들썩임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흐느낌만이 내 품의 레오나가 실제한다고 말해준다.


현실이다. 꿈 같은게 아니다. 지금부터 벌어질 일 역시.


- 날 위해서 레오나 널... 가질 생각이야. 오르카와 발키리를 배신한다고 해도.


구차한 변명따위는 붙이지 않는다. 진정으로 레오나를 위하는 길은 발키리와 결혼해 오르카호의 평화를 지키는 것. 그걸 부정한 나와 레오나는 어디로 떨어질까.


고통스러운 길을 함께 걷자고 레오나에게 손을 내미는 꼴이다. 


끔찍한 자기만족.


- 레오나는 아무 잘못 없어. 앞으로 벌어질 일은 전부 내 책임야. 너에게 고백한 지금 이 시간도, 널 끌어안고 있는 이 순간도 전부...전부 내가 원했기에 벌어진 결과니까. 그러니까 레오나는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


무고한 레오나와 죄를 지은 나.


레오나의 죄의식을 희미하게 만들고 그 빈틈을 파고 드려는 끔직한 사람. 


사랑의 확인과 동시에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위해 엉망으로 헤집는 인간.


오랜시간동안 혼자 억눌러왔던 내 사랑은 아릅답지 않았다. 곪아서 고름이 뚝뚝 떨어지는 사랑은 끔찍했다. 


그건 레오나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으로부터 몇 광년이나 떨어져있었는 사실을 알고있다.


이제서야 직면하는 나의 정체.


- 끔찍한 인간이라 미안해, 역겨운 사람이라 미안해, 못난 사령관이라서 미안해 레오나.


열기가 사라진 파티장의 공기로부터 온기를 느끼기위해 레오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레오나의 목덜미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단 맛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입술을 달군다,


- 사령관


갈라지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레오나. 


- 응.


- 사령관은, 사령관과 발키리를 위해, 오르카호를 위해, 자신의 연심을 접어둔 수 많은 바이오로이드를 져버렸어.


- 알고있어.


- 그 중에서 발키리의 결혼식을 행복한 얼굴로 준비하는 내 자매들의 미소를 배신한거야.


- 각오했어.


- 발키리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사령관은 끔찍한 인간이야. 


- 맞아 난 끔찍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야.


레오나의 손이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며 천천히 내 팔을 자신의 몸에서 때어내기 시작했다. 레오나의 눈이 붉었고 살짝 부어있었다. 눈물자국이 진했다. 항상 단정하던 금발이 흐트러져있다. 


- 그 무엇보다 최악인건 뭔지 알아? 내가 사령관을 원한다는 거야. 오르카도, 자매들도, 발키리를 배신하면서까지..... 사령관을 원해.


나는 왼손의 손가락을 살짝 벌려 빗처럼 흐트러진 레오나의 금발을 손으로 빗었다. 레오나는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른팔을 붙잡고 있던 레오나의 손가락이 팔목을 타고 내려와 내 손을 파고든다.


- 나 왜 이런걸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당장 사령관을 밀어내야 하는데 감정이 통제가 되지 않아, 왜 난 지금 이성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걸까 사령관. 전장에서도 이런적이 없었는데.


레오나는 왼손의 장갑을 하얀 앞니로 살짝 깨물고 당겨서 벗었다. 내 목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면서 타고올라오는 레오나의 손끝은 내 입술에서 멈췄다. 입술을 쓰다듬는 손가락을 입술로 깨물고 싶다는 충동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 내가...내가 아닌 것 같아.


레오나의 손가락이 내 입술에서 떨어진다.


아쉽다고 생각한 순간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내 입술을 덮었다.


레오나의 입술은 독주보다 뜨겁고 더 달콤했다.  


내 입술을 파고든 레오나의 혀는 나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격렬하게 휘감았다. 배려가 보이지 않는 서툰 키스. 그러나 그건 발키리와 해왔던 어떤 키스보다 달콤했다.


단 한번의 키스가 발키리와 나누었던 사랑을 전혀 다른 색으로 덧칠하고 있었다. 


레오나는 서툴고 어색한 키스처럼 나를 거칠게 뒤로 밀어붙혔다. 물러설 곳이 없는 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누울 수 밖에 없었다. 


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레오나의 시선. 거친 숨결. 그리고 붉게 물든 볼.


- 사랑해, 레오나. 


오늘 오르카호를 배신한다. 일부일처를 인정하거 승낙해준 대장들의 신뢰를 배신한다. 발키리의 결혼을 축복해준 발할라를 배신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발키리를 배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