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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학부모 참관의 날로, 학교의 분위기는 묘하게 달아 있었다.

 

하지만 마냥 신이 나서 밝게 떠드는 뭇 아이들과는 정 반대로,

 

철남이의 표정은 그 날이 다가올수록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얼추 짐작은 갔다. 철남이네 집에는 여유가 없으니까.

 

아마도 부모님께서 참석하시기가 힘이 드는 거겠지.

 

나도 철남이도, 지금까지 한 번도 부모님이 오시지 못했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부모님께서 바쁘시다 보니 오시지 못한 것 뿐,

 

오히려 올해는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먼저 말하셨다.

 

슬슬 사업도 안정 궤도에 들었으니 올해는 미호네 학교에 가 봐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철남이네 부모님께선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으시는 모양이었다.

 

사실 난, 철남이와 함께 있다는 것이 좋으면서도,

 

동시에 철남이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고서 있는 것이 철남이를 속이는 것처럼 느껴져서 스스로 불편한 마음이었다.

 

불편한 마음은 죄책감이 되어 가슴 속 깊은 곳부터 점점 쌓여만 가고,

 

눈치 채고 보면 그건 어느새 내 가슴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서 학부모 참관일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부모님께서는 잔뜩 들떠선 나를 데리고서 새 옷을 사러 가셨다.

 

하지만 철남이는 마냥 차려입은 보람이 없게도 내 옷을 보면서 복잡한 표정을 하는 것이었다.

 

"....."

 

"왜 그래, 철남아?"

 

"아니, 너 이 옷 꽤나...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왜 저러는 거지.

 

그렇게, 그 때는 별로 시덥잖게 생각하면서 철남이와 헤어졌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지 철남이가 기운을 차리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철남이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장레식은 조촐하게 치뤄졌다.

 

그다지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철남이네 아저씨와 철남이만이 덤덤하게 자리를 지켰다.

 

나는 철남이의 얼굴을 직시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나이에 맞게 울고불고 떼를 써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나를 보고도 억지로 웃으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쓰는 너의 모습을 보고서, 웃기게도 내가 먼저 울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내 등을 토닥이면서, 오히려 철남이는 나를 위로해 주었던 것이다.

 

"...나 진짜 괜찮아, 미호야. 다음 주에 학교도 똑같이 갈 거고. 신경 너무 쓰지 마라"

 

 

 

 

 

 

 

 

 

 

그리고, 학부모 참관 당일.

 

모든 아이들도, 그리고 어른들도, 숨길 생각도 없이 철남이를 보면서 수근거렸다.

 

철남이는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나 강해 보이던 철남이가 이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항상 나에게 웃어주던 철남이가 저렇게 우울해져 있는 것에 나도 울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철남이의 옆에 붙어서 하루 종일 녀석을 웃게 해 보려고 여러 가지로 시도해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특히 아빠와 인사를 나누고부터는 아예 아무 말도 하지를 않았다.

 

마지막으로 시도해 본 것은 같이 저녁을 먹자고 권유한 것이었다.

 

철남이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그 다음엔 아빠의 차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서 말했다.

 

"미호야 고맙다. 근데 진짜 괜찮다. 신경 안 써도 된다. 어차피 아버지랑 할 말도 많아서... 밥 맛있게 먹어라."

 

“....그래, 내일 보자”

 

내가 철남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내 눈치를 보며 억지로 웃어 보이는 철남이의 모습을 보고서 깨달았다.

 

지금 나는 철남이에게 오히려 부담스럽게만 느껴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날 밤.

 

영 맛이 느껴지지 않는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도로 저쪽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누구지, 시간이 꽤나 늦었는데. 뭐하는 거야, 저 사람은.

 

그렇게 약간 짜증이 나서 쳐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철남이였다.

 

비참한 표정을 하고 달리는 철남이가 차 옆으로 지나가고.

 

나는, 아빠에게 내려달라고 해서는 철남이의 뒤를 쫓아갔다.

 

철남이 녀석은 좀처럼 보이지를 않았다.

 

조그만 게 발은 대체 왜 이렇게나 빠른 거야.

 

한참을, 정말로 한참을 찾아다녔다.

 

"...으흑, 흐윽 흑, 흐어억 끅, 크억 컥"

 

"으흫 흐읗 흐흐읗 흐... 흑흑... 윽... 엄마아... 엄마아아아..."

 

그러다가, 동네 한 구석의 돌계단에 앉아서 울고 있는 철남이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철남아.“

 

철남이가 뒤로 돌아서 나를 쳐다봤다.

 

얼굴이 엉망진창이잖아, 철남아. 눈물에 콧물에, 얼굴에 마른 부분이 없다.

 

그 얼굴을 보고서 나는 깨달았다.

 

지금 철남이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나다.

 

불합리한 현실로 머리가 가득 차서,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섣불리 다가서는 그 누구라도 매몰차게 밀어낼 거다.

 

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애달프게 바라고 있다. 애처롭게 요구하고 있다.

 

나를 도와줘. 위로해줘.

 

응, 이번에는 내가 너의 손을 잡아줄게.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가 너를 위로해 줄게.

 

내가 누구보다도 힘들어하던 그 때 내 옆에 있어주던 너처럼. 이번에는 내가 너를 도와줄게.

 

"...괜찮다면서."

 

"괜찮아."

 

거짓말. 숨길 생각도 없는, 성의조차 없는 거짓말. 아무도 속지 않을 거다.

 

나는, 어째서일지 그 언젠가 철남이와 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철남이는 제일 싫어하는 게 뭐야?'

 

'거짓말.'

 

철남아. 그럼 지금 너는 너 자신이 미운 거야?

 

얼마나? 절대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울었잖아."

 

"눈에 먼지가 좀 들어가서."

 

만약에, 네가 너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거짓말 좀 하지 마 이철남. 누가 먼지 좀 들어갔다고 그렇게 울어?“

 

“너 거짓말이 제일 싫은 거 아니었어?"

 

그래도 괜찮아, 내가 용서해 줄게. 나는 신경쓰지 않아. 너도 널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해야 한다.

 

"여긴 왜 왔어?"

 

"아까 밥 먹고 집에 들어가는데, 니가 뛰어가는 걸 봤어. 그런 걸 보여주고 왜 물어봐 그딴 걸..."

 

"야, 거짓말해서 미안해. 사실 좀 힘들었어. 근데 이제 울고 나니까 개운해."

 

나는 이렇게나 너를 도와주고 싶은데, 고집을 부리는 철남이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조바심이 났다.

 

"그럼 왜 밥 먹으러 안 왔었던 건데? 힘들었잖아? 거짓말은 왜 한 건데? 응?"

 

"밥은 먹은 거 맞아? 설마 계속 뛰었던 거야 지금까지? 아빠는 어디 가셨는데?"

 

"왜 그랬어... 나 정말 신경 안 쓰는데, 뭐가 그렇게 불편했는데?"

 

"니네 집이 가난해서 나 신경 써 준거야? 불편할까봐? 응? 말 좀 해봐"

 

흥분해서 두서없이 말을 쏟아내다가, 철남이의 표정을 보고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야, 철남아. 아니야.

 

"..."

 

"야. 김미호."

 

"누가 여기 와 달랬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데? 내가 불쌍하냐? 만만하냐?"

 

철남아, 정말 아니야. 나 그런 생각 절대 안 했어.

 

미안해, 사과할게.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그런 표정 하지 마, 철남아.

 

"엄마 없는 새끼 챙겨주니까 좀 착해진 거 같냐? 거지새끼한테 동전 하나 던져준 기분이라도 들었냐?"

 

너, 지금 울고 있어. 엉망진창으로 울고 있다고.

 

"같이 거지 동네 사는 것들끼리 잘 지내자고 친한 척 엉겨붙는 새끼 보고 속으로 비웃으면서, 응? 재미있었어?"

 

철남아, 제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철남이는, 지금 자기가 무슨 표정으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도 제대로 모를 거다.

 

나는 알고 있다. 지금 철남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이미 한번 거쳐 왔던 길이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내가 철남이를 붙들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말해줘야 한다.

 

다 괜찮다고. 내가 여기에 있지 않느냐고. 내 품에서 울어도 좋다고.

 

알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다 알고 있는데.

 

항상 웃어주던 철남이가 이렇게 슬프게 울면서 내게 소리치는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서.

 

겁이 나서, 나는 차마 철남이가 내미는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나는, 철남이가 누구보다도 힘들 때에 철남이의 마음을 배신해 버리고 만 거다.

 

그 뿐 아니라, 나는 철남이의 큰 상처도 헤집어 버리고 말았다.

 

가난하다니, 철남이가 가장 신경쓰고 있던 말이었는데.

 

철남이의 가치는 돈 따위로 셀 수도 없는데.

 

"...집에 가라. 나 혼자 있고 싶으니까."

 

격앙한 감정을 모두 쏟아낸 철남이가, 뒤돌아서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서 멀어져 간다.

 

나는 감히 멀어져 가는 철남이를 붙잡지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철남이는 잠시 자리에 멈추더니 뒤를 돌아서 나를 바라봤다.

 

뒤돌아보는 그 표정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