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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호야, 나... 너 좋아해. 널 처음 봤을 때 한 눈에 반했어."

 

"그리고 내가 한눈에 반한 걸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서 계속 너를 지켜봤어."

 

"하지만 나는 내가 너한테 반한 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다는 걸 확신했어."

 

"그리고 지금은, 난 너랑 좀 더 나아간 관계가 되고 싶어"

 

"미호야, 내 맘을 받아줄 수 있을까?"

 

미남이가 나에게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짐작하던 바였다. 난 미남이의 고백을 거절했다.

 

"미남아, 나는... 미안해."

 

"그렇구나"

 

고백은 거절하는 측에게도 힘든 일이다. 불편함을 느낀 나는, 황급히 자리를 뒤로 하려고 했다.

 

"미안해, 미남아. 앞으로도 친구로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

 

"미호야, 그건 불가능해"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조만간 전학 갈 거거든."

 

"그럼 왜 나한테 고백한 거야? 원거리연애라도 할 생각이었어?"

 

"아니, 좋아한단 건 진짜야. 그래도 난 너랑 사귀려고 고백한 건 아냐"

 

"그게 무슨 말인데"

 

"너, 철남이 때문에 날 거절한 거지?"

 

정확하다.

 

"...."

 

"아니, 주제넘은 참견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나, 더 이상 너희들을 두고 볼 수가 없었어"

 

"너에게 이런 이야기는 부끄러워서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난 철남이를 내 최고의 친구로 생각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이건, 그야말로 내 주제넘은 참견이야. 지금 내가 기분 나쁘면 날 내버려두고 가도 상관없어"

 

"하지만 말이야. 네가 나를 아무렇게나 대하더라도 상관없지만, 철남이한테는 잘 해 줬으면 해"

 

"철남이 말야, 널 정말이지 끔찍이도 아끼는 녀석이야. 절대로 그 녀석 상처입게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그렇게도 너를 아끼는 철남이가 널 피하는 건 자기가 너보다 한참 못하다고 생각해서 그럴 거야."

 

"웃기지? 사실 나도 처음 알고서는 웃어버렸어. 사람 사귀는 데 누가 우월하고 말고가 대체 어디 있다는 건데."

 

"아마도 뭐, 옛날에 뭔가 있었겠지. 나는 그만큼 그 녀석이랑 오래된 관계는 아니라서 그 부분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

 

"그러니까 미호야, 너에게 철남이를 부탁하고 싶어. 좋은 녀석이야. 정말로, 잘 부탁해"

 

"바람도 센데 오랫동안 붙잡아 둬서 미안했다. 들어가 볼게."

 

...미남아, 너 좋은 녀석이었구나.

 

오해해서 미안해.

 

 

 

 

 

 

 

미남이에게서 철남이의 모든 진심을 전해들은 나는 재차 마음을 먹었다.

 

그래, 내가 생각했던 3번의 여름, 그 다짐.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나는 이번 기말고사에서 최고의 성적으로 당당히 철남이에게 권유할 거다.

 

그리고, 그 곳에서 너에게 고백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던 나에게 철남이가 찾아왔다.

 

"철남아, 무슨 일이야?"

 

"김미호. 이번 기말고사, 나랑 승부하자"

 

"...어? 너 뭐, 농담하는 거야? 아니, 내가 하자고 할 생각이긴 했는데, 네가 왜?"

 

"그럴 이유가 생겼으니까. 그러니까 승부하자. 이기는 사람이 원하는 거, 하나 들어주는 걸로."

 

"...엄청 비장하네... 알았어, 서로 봐주기 절대 없기다"

 

"당연하지"

 

철남이의 비장한 눈빛을 눈앞에 두고, 나는 나대로 진지하게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철남이의 결의가 나의 마음을 능가했었던 것인지.

 

나는 철남이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내 인생을 건 도박이었는데.

 

나는, 그 도박에 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철남이의 말은 무엇이라도 들어 줄 거다.

 

말 그대로, 목숨을 바치라고 하더라도.

 

"미호야... 나랑 같이 놋대 랜드로 가자. 이번 겨울 방학에"

 

그리고, 철남이가 나에게 바란 소원은, 그야말로 내가 바라던 소원 그 자체였다.

 

게다가 철남이는, 나와 했었던 이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굳이 소원을 미뤄주기까지 한 것이다.

 

난 철남이에게 가능한 모든 지원을 쏟아부었고,

 

철남이는 당당히 스마고등학교에 합격했다.

 

나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기뻤다.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이제 단 한 발자국. 마지막 한 발자국만이 남았다.

 

놀이 공원에서, 나는 너와 함께 그 한 발자국을 나아가겠어.

 

그렇게 결의하며, 나는 놀이 공원으로 향했다.

 

 

 

 

 

 

 

"....미호야."

 

"...한동안 나랑 떨어져서 지내야겠어"

 

단 하루만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이럴까.

 

철남아, 너 표정이 대체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잠시 사이에.

 

너무 걱정이 된다. 제발 나한테 말해 줘.

 

하지만 철남이의 거부는 너무나 강했다.

 

그 녀석은 끝끝내, 절대로 혼자서는 다니지 말라는 말만을 남기고선 가 버렸다.

 

낮까지는 그렇게나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나는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철남아, 나도 고집이라면 너한테 지지 않아.

 

네가 나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런 일을 한다면, 뭔가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어.

 

나는 내 나름대로 상황을 알아보기로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도 철남이는 여전히 나를 멀리하면서 꺼렸지만,

 

나는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다.

 

물론 마음이 아프기는 했지만, 철남이의 표정을 보면 절대 자의로 그러는 게 아님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보았다.

 

노리고 본 것은 아니었다.

 

그냥, 새벽에 눈이 떠져서 물을 마시러 나오다가 창밖을 보았을 뿐이다.

 

철남이가, 야구방망이를 들고서 우리 집 앞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직감했다.

 

뭔가,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게 직감한 나의 행동은 빨랐다.

 

며칠을 더 관찰해 본 결과, 철남이가 학교를 마치자마자 방망이를 챙겨서는 동네를 돌아다닌단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건... 나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녁마다 일부러 돌아다녔다.

 

철남이한테는 미안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철남이의 무거운 입을 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즉각 반응이 와서, 아저씨까지 나서더니 한명은 나를 따라다니고, 한 명은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뜬금없게도 학교에서 나와 철남이가 사귄다는 소문이 몹시 크게 터졌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 소문을 부인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귀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그리고, 초여름의 어느 날 저녁.

 

죽어도 잊을 수 없을 그 날 밤이 찾아왔다.

 

 

 

 

 

 

 

 

나는, 슬슬 이 연기를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저기 뒤에, 아저씨가 나를 좇아오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저 덩치를 어떻게 숨겨.

 

모른 척 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이 짓이 촌극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뒤로 돌아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아저씨."

 

"우왓"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 응, 미호야. 웬 일이냐 이런 늦은 시간에"

 

아니, 당신 내 뒤를 그렇게 열심히 쫓아와 놓고 무슨 소리야.

 

"뭐에요, 진짜, 계속 쫓아오셨으면서...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왜 이렇게 하신건지, 다 말씀해주세요"

 

"으아.... 미안하다 철남아..."

 

 

 

 

 

 

나는 아저씨에게서 설명을 듣고서 몹시 화가 났다.

 

"대체 왜 우리 집에 말 안한 건데요!"

 

"아니, 그 놈이 하도 부탁을 해서..."

 

"니네 부모님도 일하느라 바쁘시고, 경찰에도 몇 번이나 단추를 들고 가 봐도 안 움직여서"

 

"괜히 걱정 끼치기 싫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가 책임지고 싶었대"

 

...진짜, 이철남.

 

넌 정말 멍청이야.

 

나는 화가 나서 철남이를 빨리 찾아내서 따지기로 하고,

 

그리고 그 순간.

 

 

 

 

옆 골목에서 묘하게 기분 나쁜 타격음이 울렸다.

 

"".....철남아""

 

 

 

 

 

 

 

 

그 뒤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철남이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져 있고,

 

흉물스러운 물건을 든 추악한 남자가, 일그러진 웃음을 짓고 철남이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철남아!!!!"

 

안 돼.

 

제발.

 

아니라고 해 줘.

 

철남아.

 

이정도 피 난 건 별 거 아니지?

 

제발, 정신 차려.

 

제발... 철남아.

 

너에게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아.

 

눈을 떠 줘.

 

 

 

 

 

 

 


불행 중 다행으로 철남이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그리고 후유증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충격이 심해서, 환자가 언제쯤 의식을 회복할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죽지도 않는다며. 후유증도 없다며.

 

그런데 왜 철남이는 눈을 뜨지 않는 건데?

 

차갑게 내밀어진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차가운 병실의 기계음 속에 철남이를 홀로 내버려두고 가 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매일 철남이의 병실에 다녔다.

 

 

 

 

 

 

철남이의 병실에 다니는 것을 불편하게 여긴 적은,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나는 지금까지의 철남이에 대한 채무를 갚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편했다.

 

철남이가 평생 깨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이 곳에 나와야 하더라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불행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고 하던가.

 

나에게 일이 생겨서, 나는 더 이상 철남이를 찾아올 수 없게 되었다.

 

 

 

 

 

아빠의 사업이, 망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