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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호와 함께하는 여름 방학은 너무나도 짧았다.

 

순식간에 8월은 거의 끝이 났다.

 

다 때려치우고 미호와 계속 있고 싶었다.

 

"철남아... 돌아가도 맨날 전화해야 돼...?"

 

미호가 이런 소리를 해도, 약해질 수는 없었다.

 

미호야. 너를 한 동안 볼 수 없게 되더라도, 마음은 떠나지 않아.

 

하지만 그럼에도 날 볼 수 없단 사실이 네 맘을 불안하게 한다면,

 

그러면 내가 매일 전화할게. 그러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

 

 

 

 

 

 

그리고 여름 방학의 마지막 주말이 되었다.

 

나는 미호네 집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거다. 오늘은 미호네 가족들과 전부 만나게 되겠지.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 왔어요"

 

"그래, 철남아. 오랜만이네"

 

"그래, 니가 그 철남이냐? 미호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다."

 

이 엄청 기 세 보이게 생기신 할아버지가 미호네 외할아버지인가 보다.

 

"네, 안녕하세요."

 

"자네랑 만나서 말이지,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다고 했다고 들었는데, 아범이"

 

"예, 장인어른. 이 친구가 보기보다 아주 성실하고 바른 친구라"

 

"그럼 거기에 내가 좀 껴도 상관없겠지?"

 

"네? 장인어른, 그래도 의사가 술은 자제하라고 하셨는데"

 

"많이만 안 마시면 되지 않겠나. 사람이 좀 융통성이 있어야지"

 

"네, 그래도 조심하셔야 됩니다, 장인어른"

 

나랑 아저씨는, 서로를 쳐다보며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할아버지, 술 마시고 철남이 너무 괴롭히지 마요"

 

"그래그래, 미호야. 이 할애비 술 많이 안 먹는다"

 

 

 

 

 

 

 

 

 

영감님께서는, 정말로 술을 얼마 드시지 않으셨다.

 

뭔가, 술을 마시는 내내 나를 평가하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시다가,

 

'...역시, 의사가 하지 말란 짓은 하는 게 아닌데 말이지. 나 먼저 들어가 보마, 아범아'

 

하고는, 정말로 들어가 버리셨다.

 

'...미호야, 이 놈 하고 결혼까지 갈 거냐?'

 

'응. 나 철남이 아니면 절대 시집 안 갈 거야'

 

'그래. 니가 그렇게 좋으면 됐다. 나 죽기 전에는 손주 보여주고'

 

그런 말을 남기시고는 말이다.

 

...미호한테 들은 바로는, 과거에 미호네 부모님의 결혼을 엄청 반대하셨다고 해서,

 

나는 최고의 장애요소를 저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안도과 함께 의문을 느꼈다.

 

"미호야, 시간도 늦었는데 먼저 들어가서 자라"

 

"뭐? 아빠, 술도 약한데 너무 그러지 말고 슬슬 자야지"

 

"아니, 술은 아빠가 조절할 거고, 이 친구랑 둘이서 이야기나 좀 하려고"

 

"알았어, 철남이 너무 괴롭히지 마"

 

"아빠 걱정은 안 하냐, 이 기집애야"

 

"아빠도 너무 술 많이 드시지 마세요"

 

그리고 미호는 자러 갔다.

 

아저씨는 미호가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돌려서 나를 쳐다보았다.

 

아, 이제부터인가. 긴장된다.

 

 

 

 

 

 

 

 

 

 

 

"나는 말이야, 어려서부터 정말로 가난했거든, 너처럼"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미호에게 들어서 아는 이야기다.

 

"옛날 이야기를 좀 하자면... 그래서 내 결혼은 순탄치가 않았어"

 

"장인어른께서 말이야, 엄청 반대를 하셔가지고... 도망쳐야만 했어, 내 아내는"

 

"나는 그것 때문에 엄청나게 열등감을 가지고 살았어, 너라면 이해하겠지?"

 

나는 열과 성을 다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암요. 이해하고 말고요.

 

"그래서 나는 이 지겨워빠진 가난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그리고 가족에게 멋진 아빠가 되고 싶었어"

 

"하지만 그건 내 욕심이었나 보더라고, 지금 생각하면"

 

"철남이 넌... 소박한 하루하루의 중요함을 잘 알고 있는 아이라고 생각해, 나랑은 다르게"

 

"똑같이 가난으로 시작했어도, 네가 나보다 훨씬 나은 거지, 나는 미호한테 이런 꼴이나 보여주고"

 

"아니요, 미호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어요.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되고 계십니다"

 

"그건 미호가 내 딸이고... 그리고 가족을 아끼는 아이니까 그렇지. 내 생각은 달라."

 

"그러니까 말이지... 나는 솔직히 네가 미호와 교제하는 것에 완전히 찬성하고 있어, 철남이라면 환영이야"

 

"뭐, 내가 반대하더라도 미호는 그 사람 딸이니, 도망쳐버릴 거라는 계산도 없진 않지만..."

 

하하, 여기는 웃을 부분이지, 하고 덧붙이신다. 아니요, 이걸 듣고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장인어른께서 너희들의 교제를 방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한 달쯤 전까지는"

 

"장인어른께서도 여기까지의 일들을 보고... 아니, 어쩌면 그냥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후회하고 계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요즘 들어서"

 

"어쩌면, 당신의 말년에 손녀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처음으로 만나 본 손녀를 저렇게나 귀여워하신 당신이니까..."

 

"가시기 전에 말이지, 증손주를 보고 싶으신 마음이 내심 있으신 것 같아, 내가 보기에는"

 

"그러니까 철남아... 우리 미호, 절대로 버리지 마라"

 

"나는 너한테서 어느 정도 나 자신을 보고 있기도 하고, 솔직히 자네가 마음에 들거든"

 

"...우리 미호, 잘 좀 부탁할게. 많이 아파본 아이니까, 겁이 나서... 그래도 너한테는 맡길 수 있어"

 

"이건 내 부탁이고 장인어른의 소원이다. 미호를 부디, 끝까지 버리지 말아다오."

 

나는 똑바로 아저씨의 두 눈을 바라보다가,

 

술을 한 잔 들이킨 후에 말했다.

 

"미호가 절 버리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없습니다."

 

그러자, 아저씨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셨다.

 

묘하게 미호를 닮은 미소. 그 눈에는 살짝,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연락할게, 매일"

 

"응, 그런 표정 하지 마, 철남아. 나 괜찮아."

 

"그래"

 

"철남아."

 

"응?"

 

"나 말이야... 좋은 소식을 들었어, 기대해도 좋아."

 

"그러니까, 나 진짜로 괜찮아. 씩씩하게 가야지"

 

"알았어, 미호야. 나, 매일매일 전화할 테니까, 안 받으면 안 된다."

 

"당연하지"

 

기차에 타고 뒤돌아본 미호의 모습은, 

 

작은 점이 되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언제까지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좋은 소식을 들었어, 기대해도 좋아'

 

내가 그 소식이 무슨 이야기인지 알게 된 것은 조금 더 뒤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2학기가 시작되었다.

 

그 말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었을까.

 

나는 거기에 은근히 신경이 쓰이면서도, 

 

바쁘게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깊게 생각해보지는 못했다.

 

강의, 과제, 공부, 알바, ...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미호와의 연락은 빼놓을 수가 없었다.

 

"이철남 이 새끼 보소 ㅋㅋㅋㅋㅋ 미호 그렇게 잊고 살려고 지랄하더니 이번에는 아주그냥 미호 없다고 난리네"

 

"입 닥쳐라, 민성규. 예비 군바리는 빨리 가서 머리나 밀어라."

 

"하 이 새끼 진짜, 지가 면제라고 너무하는 거 아니냐?"

 

"꼬우면 니도 스토커 하나 찾아서 개 맞듯이 처맞아보던가 ㅋㅋ"

 

그래. 그 때, 나는 스토커에게 맞아서 죽을 뻔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고, 일상생활에도 큰 지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괜찮을 수는 없었는지, 갈비뼈 어느 쪽이 변형되었던 것이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너무 무리한 운동을 하는 것만 아니면 괜찮다고.

 

그리고 그 "무리한 운동"이라는 것도 실은 기준이 굉장히 높아서, 거의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그래서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체검사를 받아 보니 웬 일, 면제가 뜬 것이다.

 

성규는 이번 학기가 끝나고 겨울이면 군대에 가는데 말이지.

 

"하... 이걸 부럽다 할 수도 없고...."

 

"야, 기분 풀어라. 그래서 내가 한 턱 내는 건데"

 

"으아... 벌써 이렇게 좆같은데, 나 어떡하냐...? 나 진짜 탈영하는 거 아냐?"

 

"다 가는데 뭐... 참아야지"

 

"니는 안 가잖아"

 

"아 ㅎㅎ ㅋㅋ... ㅈㅅ!"

 

"그나저나 요새 미남이는 진짜 바쁜가 보네"

 

"아, 미남이 요새 무지 바쁘다더라. 뭐 대학 동기랑 이번 방학에 또 회사에서 만났다던가"

 

"진짜로?"

 

"어, 뭐 방학에 인턴으로 잠시 들어왔다던 거 같은데... 그 뒤로 이래저래 있나보지 뭐"

 

다들 열심히 살고 있나 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아버지의 현장으로 복귀했다.

 

마치 친정과도 같은 안심감. 아니, 우리 아빠네 나와바리니까 친정 맞나?

 

뭐, 잡생각 할 여유는 별로 없지. 일이나 해야겠다.

 

요즈음 들어 참 돈 필요한 데가 많아.

 

"철남아~ 점심 먹고 하자"

 

"예~"

 

 

 

 

 

 

"야, 철남아. 너... 여친 생겼다메?"

 

아... 뭐,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지.

 

"네. 뭐, 소꿉친구 같은 녀석인데, 어쩌다 보니까"

 

"와 소장님 진짜에요? 거짓말! 그럼 그거 다 진짜라고요?"

 

"내가 왜 거짓말을 하는데? 이 놈 완전 순정파라니까"

 

아버지 나 없는데서 대체 무슨 소리 하고 다닌 거야?

 

"사진 있냐? 사진"

 

"나도 그건 좀 궁금한데"

 

"아... 됐거든요? 식사나 해요"

 

"ㅋㅋㅋㅋ 까칠해 까칠해"

 

아오, 좀.

 

 

 

 

 

 

 

 

 

 

 

 

"우리 철남이, 완전 순정파잖아 ㅋㅋㅋㅋ"

 

"그만 놀리시고 일이나 하시죠..."

 

"너는 내가 지킨다! 이 빠따 하나로, 24시간 내내!"

 

"ㅋㅋㅋㅋㅋ"

 

아무래도 이번 방학에 내가 현장에 얼굴을 비추지 않다 보니까,

 

그 부분을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꽤나 많았던 모양이다.

 

현장에 나오는 사람들마다, 아버지에게 와서 성화도 아니었다고 한다.

 

아드님 무슨 일 있으시냐고.

 

하루 이틀은 아뇨, 그냥 별 일 아니에요. 하고 넘기던 아버지...

 

짜증이 나신 건지, 아니면 그저 아들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건지.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서 썰을 죄다 풀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남 연애하는 이야기가 뭐가 그리 재미있다는 건지, 구경꾼들은 계속 재촉하고,

 

아버지는 뭐, 이런 이야기 풀면 공짜로 술 얻어 마시는 셈이니 거리낄 것이 없었나 보다.

 

덕분에 나는, 아주 그냥 신나는 놀림거리가 되었다.

 

"철남아, 여자친구는 사랑하냐? 하늘만큼 땅만큼?"

 

"철남아, 나도 지켜줘어, 나 요즘 무서워어"

 

"아, 그만들 좀 하세요, 당신들이 무슨 미호야? 진짜."

 

"오~~~~~"

 

"여친 이름 미호?"

 

"이름 이쁘네"

 

아, 진짜.

 

"미호한테 너무 관심 가지지 마세요, 걔 진짜 낯 많이 가리니까"

 

"그리고 저 별로 미호에 대해서 할 말 없어요,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뭐야... 그럼 너 미호 크게 좋아서 사귀는 건 아닌거야? 나도 가능성 있나?"

 

"아! ...아니, 그래도 미호 좋아하거든요, 진짜 사랑이 뭔지 조금 알 것 같다고 해야 되나"

 

"ㅋㅋㅋㅋㅋㅋ 걸렸네"

 

"진짜 사랑이래 ㅋㅋ 현실에서 저런 말 하는 사람 처음 봤다 나"

 

"소름 돋네 진짜 ㅋㅋㅋㅋ"

 

"저, 알 거 같아요, ‘진짜 사랑‘이라는 녀석을... 랄까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시마이~"

 

"수고들 하셨습니다"

 

다들 헤어지고, 아버지와 돌아간다.

 

"철남아, 잘 됐다 오늘"

 

"뭐가."

 

"니 오늘 수당 평소보다 10만원 추가거든"

 

"뭐? 나 오늘 별로 한 거 없는 거 같은데"

 

"아니, 오늘 아저씨들이 무슨, 이야깃값이라면서 말이야"

 

"오늘은 돈 2만원씩 떼고 달라고 하더라고"

 

"니 덕에 번 돈이니까 니가 가져야지"

 

"이득 본 셈 쳐라, 어차피 돈 많이 필요하잖아?"

 

그건 그렇지...

 

그렇게 아버지에게 받은 돈뭉치는 평소보다 좀 더 두툼했다.

 

나는 오늘 하루를 실컷 놀려먹힌 주제에, 돈 앞에서는 금세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