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모음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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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암컷들은 그대의 진정한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가면 뒤에 숨어 있는 그대를 말입니다.

 

“..내 진짜 모습?”

 

 거대한 동굴의 안, 약한 빛에는 거두어지지 않는 칙칙한 어둠과 동굴의 눅진한 습기가 맴도는 동굴의 내부에 한 인간과 한 로봇이 서로 마주 보고 섰다.

 거대한 박쥐를 연상시키는 검은색 베이스에 금색의 파츠를 두른 AGS, RF87 로크의 물음에 사령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그의 앞에서 둥둥 뜬 채 어두운 동굴을 붉은 안광으로 연신 밝혀대는 RF87 로크는 거대한 날개에 비해 작은 두상을 끄덕이며 딱딱한 기계음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습니다. 범인(凡人) 주제에 원치 않게 높은 자리에 앉아 스스로 깔려가는 그대의 모습을 그녀들이 본 적이 있습니까?

 

“...”

 

 그 물음에 사령관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앞을 가득 메운 이 거대한 AGS는, 지금 그가 쓴 가면을 벗겨내려 하고 있었다.

 RF87 로크의 물음이 비수가 되어 자신의 가슴을 찌르자 사령관은 함장모 아래 가려진 눈썹을 위로 한껏 치켜세운 채 로크의 두상 파츠를 노려보았다.

 그토록 자신이 염원하던 로크와의 만남이었으나 그는 오히려 이것을 완전히 부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런 파괴 충동 아래, 그는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자신을 향한 원망과 증오가 다시금 가슴 위로 솟아오르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범재(凡才)인 자신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 있었다.


36) Day 5 AM 11:35

 

타-닥! 타-닥!

 

 흰색 페인트와 흰 조명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함 내의 복도를 나는 쉼 없이 내달렸다.

 도대체 이 함은 얼마나 큰 걸까, 몇 분째 전력으로 이 가느다란 다리로 내달린 걸까. 문득 머릿속에 이렇게 열심히 달려본 기억이 군대 훈련소 이외에는 잘 없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미 여러 층의 계단과 여러 개의 코너를 지나쳐 쉬지도 않고 달려왔음에도 도착지는 한참 남았다는 생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진짜, 복도! 더럽게 기네!’

 

“허억! 허억!”

 

 턱까지 차오른 숨을 가쁘게 내쉬며 나는 왼손에는 태블릿을 쥔 채 오른손을 연신 허공에 휘적대었다.

 분명 이틀 전에도 이렇게 달렸던 거 같은데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통증들이 내 몸 여기저기를 쑤시기 시작했다. 차츰 산소가 부족해져 핑 도는 머릿속에 이곳이 게임 속과 같이 마냥 행복한 공간이 아니라는 현실적인 생각이 들자 나는 질끈 감은 두 눈을 부릅떠 아무도 없는 복도의 한가운데서 큰 목소리를 내었다.

 

“허억! 허억! 수색팀이 벌써 돌아왔다고? 리리스!”

 

 눈앞에 T자형 코너가 곧 보이자 나는 억지로 목젖을 쳐가며 내 뒤에 따라붙고 있을 여성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소리소문없이 한 여성이 내 왼쪽 시야 안으로 슥 모습을 드러내었다.

 딱히 거울을 보지 않아도 울상일 터인 나와 달리 내 왼편의 그녀는 그저 평온한 얼굴 위로 미소를 걸은 채 내 부름에 답해 주었다.

 

“네, 주인님. 착한 리리스는 여기 있답니다~”

 

탁! 타-닥!

 

“여기..너무 넓잖아! 이게..이게 5분 거리냐아아! 날 속였어!”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보자 도리어 크나큰 배신감이 들었다. 분명 5분이라고 해놓고! 얼추 내달려온 시간만 해도 벌써 10분은 되었겠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걸까, 블랙 리리스는 분노가 섞인 내 말에 입가의 미소를 더욱 크게 그리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날 유혹하기 시작했다.

 

“어머, 주인님. 정 힘드시면 제가 업어서..”

 

“됐거든요! 싫거든요! 죽어도 싫거든요!”

 

 달콤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내 귓가를 간질이는 그녀의 유혹에 나는 뜀박질에 오히려 가속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온 지 겨우 5일이다. 그런데 경호원한테 업혀서 다니는 꼬라지를, 몇 없는 함 내 인원들에게 보여줬다가는 앞으로의 내 이미지는 불 보듯 뻔했다.

 

‘가뜩이나 이틀 전까지 온갖 폐급행세를 다 했는데! 업혀 가기라도 했다간 사회적으로 죽어!’

 

“힝, 그렇게 싫다고 하실 필요까지야..”

 

 내 강한 거부 의사에 왼편의 짤막한 시야 너머로 그녀의 부루퉁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 저런 얼굴 하나는 너무 사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심코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방금 그녀의 만행이 떠올라 발걸음을 놀린 채 그녀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 표정 지어봤자 거든! 애초에 이렇게 늦은 이유가 누구 때문인데!”

 

“그..그건! 그 여자가 저한테 갑자기 해충이라고 먼저 도발해서..!”

 

“그렇다고 대뜸 총부터 꺼내기냐!”

 

 짜증이 넘치다 못해 화가 치밀어 오른 내 목소리에 그녀는 이제 아예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울상마저 귀엽다니, 외모 하나는 사기적인 그녀였지만 동시에 방금 그녀가 저지른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자 도리어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뜀박질을 계속했다.

 

‘리제랑 리리스가 사이가 좋지 않을 거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만나자마자 제조실 반파라니!’

 

“..흐아아..”

 

 기념비적인 첫 바이오로이드 제조실 개방날, 나는 부푼 가슴을 안고 포츈의 안내를 받아 제조실에 입장했다. 거대한 원형통과 여러 장치가 눈에 들어왔었지만 대부분 아직 사용하기에는 어려웠고 흔히들 게임 속에서 말하는 일반 제조만이 가능했었다.

 

‘포츈, 이걸로 제조식을 조정하면 되는 거야?’

 

‘그렇거든? 동생! 바로 알아보다니, 동생 너무 기특한 거거든?’

 

‘그렇다면..부품, 영양, 전력 모두 690으로 조정해서..’

 

‘어머, 그렇게 많이 쓰면 안 되거든?!’

 

 이전 세상에서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모든 자원을 690으로 조정해 넣으려 했지만 이내 함 내에 적재된 자원의 양이 그리 많지 않음을 지적당해 적당히 자원을 집어넣고는 그대로 뭐라도 뜨겠지라는 생각으로 첫 제조에 시도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처음 맞이한 이들은-

 

‘헤헤, 드디어 합류했지 말입니다!’

 

‘헤헤, 드디어 합류..어?’

 

 갈색의 머리칼과 녹색과 갈색의 배합이 돋보이는 군용 슈트를 입은 두 여성, 브라우니들이었다. 그녀들의 당찬 목소리와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본 나는 그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브..브라우니 2연속이라니! 첫 제조에 브라우니만 둘이라니! 아무리 전투 인력이 부족하다지만, 브라우니 둘이라니...아차.’

 

 재빨리 그녀들에게 실례되는 행동으로 보일까 싶어 무릎을 짚고 일어서는 내 귀로 그녀들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서로의 첫 만남에 기뻐하는 그녀들의 해맑은 얼굴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이야! 제 동기임까? 함께 잘해보는 거지 말입니다!’

 

‘헤헤, 이거 외롭지는 않겠슴다!’

 

 어느새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살갑게 서로 웃는 이들을 보고 나서야 나는 실망감을 떨쳐내며 반성의 의미로 내 양쪽 볼을 두들겼다. 그래, 브라우니면 어떨까. 지금 이 함에는 전투 인원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마침 노움 1021도 있고, 레프리콘 219도 있다. 그녀들과 함께 지내게 하는 것이 좋겠지.

 나는 연신 서로 떠들고 있는 그녀들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그 둘 역시 어깨동무를 풀고 차렷 자세와 함께 경례 자세를 취했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나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살갑게 대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내가 생각해도 어물쩍한 목소리로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만나서 반가워. 브라우니..어..’

 

 순간 이들을 어떻게 구분을 지어야 하는지 몰라 뒷말을 흐리자 포츈이 내 귓가로 와서 속삭였다.

 

‘동생? 앞으로 우리 함에서 제조되는 애들한테는 별개의 일련번호를 주는 게 어떨까 하거든?’

 

‘오, 좋은 생각이야. 포츈. 브라우니 1호, 2호. 난 여기 함장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그녀의 기막힌 아이디어에 나는 환한 웃음과 함께 그녀들에게 내민 오른손을 그녀들 앞으로 더욱 밀어 넣었다. 그녀들은 잠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 이내 내가 내민 오른손을 서로 맞잡으며 그녀들다운 환한 웃음으로 회답해주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는 거지 말임다!’

 

‘헤헤, 좋은 인간님이 저희 대장인 거 같아서 다행임다!’

 

‘..그래, 함께 잘해보자.’

 

 좋은 인간이라, 나도 날 잘 모르는 판국에 그녀들이 나에게 내린 평가에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었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후후, 만나서 반가워요, 주인님.’

 

‘힉! 뭐..뭐지 말임다.’

 

‘사..사령관님, 뒤에 누가 있슴다!’

 

‘..응?’

 

 어느새 내 뒤로 온 걸까. 나긋한 여성의 음성과 그녀의 숨결이 내 귓가에 닿는 그 순간, 내 온몸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철혈의 레오나와 다른 느낌의 차가운 음성, 비교하자면 블랙 리리스와 닮은 음흉함이 담긴 그런 목소리였다.

 나는 눈앞의 브라우니들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곤 나사가 어디 빠져버린 듯 삐걱대는 목을 돌리자 갈색의 머리칼 위에 흰색의 프릴을 단 여성의 얼굴이 내 눈앞에 바로 들어왔다.

 언제 나온 걸까, 아니. 제조되자마자 내 뒤로 다가온 걸까.

 

‘너..넌..’

 

‘후훗, 저는 시저스 리제라고 해요. 주인님. 제 이름을 잊지 말아 주세요.’

 

‘그..그래, 만나서 반가워. 리제..양?’

 

‘리제면 되요. 저의 주인님.’

 

 두 눈을 감은 채 그저 나를 바라보면서 웃는 시저스 리제였지만 그런 그녀와 달리 내 눈꼬리의 씰룩임은 멈출 줄을 몰랐다.

 

뚜벅-

 

‘후후..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뚜벅-

 

‘너무 기뻐요. 주인님.’

 

 무의식적으로 그녀와의 간격을 벌리기 위해 뒷걸음질을 치는 나였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등 뒤의 반투명 날개를 퍼덕이며 내게 더욱더 가까이 붙어왔고, 이윽고 두 브라우니와 부딪힐 때쯤, 제조실의 천장에서 누군가 사뿐히 내려와 리제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리..리리스!’

 

 새하얀 머릿결을 휘날리는 블랙 리리스의 뒷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곧바로 그녀의 등장이 썩 달가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들의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깨달았다.

 

‘갓 나온 아가씨치고는 제 주인님께 무례하기 짝이 없군요. 당신.’

 

‘..내 주인님? 아니. 내 주인님은 네 주인님이 아니야. 너나 내 주인님 앞에서 비켜. 해충’

 

‘...어..잠깐. 얘들아?’

 

 블랙 리리스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양손이 그녀 허리춤 뒤에 달린 쌍권총 홀스터로 향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그거 쌍권총 맞지? 크기가 내가 아는 권총 크기가 아닌데.

 멍한 얼굴로 그녀가 홀스터에서 쌍권총을 꺼내 드는 것을 보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곤 무언가가 잘못되어감을 직감했다. 나보다 먼저 위기감을 눈치를 챈 브라우니 1호, 2호는 어느새 내 뒤에 꽁꽁 숨어 내 티셔츠 아랫단을 쭉 붙잡고 있었다.

 

‘얘들 군인 맞지? 나 애들 대장 맞지?’

 

 별의별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던 중 나는 다급히 리리스의 어깨를 붙잡으며 큰 목소리로 그녀들을 불렀으나 이미 버스는 지나간 후였다.

 

‘리..리리스! 리제! 둘 다 잠ㄲ..’

 

철-컥

 

‘당신에게는 예의범절부터 알려드릴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챙-

 

‘흐응-예의범절이라, 해충 주제에 잘난 척이 심하구나.’

 

 리리스의 어깨너머에는 어디서 꺼낸 줄도 모를 거대한 가위를 분리해 양손에 쥔 시저스 리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눈 떴다. 저거.

 

‘...어?’

 

탁-탁-

 

“너희들 덕분에 오늘 처음 가동한 제조실이 반파되었잖아아아!”

 

“그..그건,..” 

 

“허억..허억..변명하기 전에 나올 때 울상이 된 포츈의 얼굴부터 떠올려 봐.”

 

 나는 점차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입술을 달싹이는 블랙 리리스를 노려보며 허공을 휘젓던 오른손을 들어 머리를 쥐어 잡았다.

 머리 죽지가 쭉쭉 당겨지는 감각 너머로 강한 두통이 밀려와 나는 또다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며 앞으로의 일들을 하나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제조실은 포츈 말대로라면 이틀은 못 쓸 거고 수복실, 수복실은 가동이 된다고 했었나? AGS 연구는 닥터한테 일임했고. 자원, 자원 관리는..’

 

탁-탁-

 

“아아아! 머리 아파! 아악! 못해 먹겠어! 함장짓 못해 먹겠어!”

 

“주..주인님! 잠깐만요! 두통약이 분명..”

 

“너 때문에 머리 아파!”

 

“예?! 히잉..”

 

 내 호된 호통에 허리춤의 응급도구가 담긴 백을 뒤지던 블랙 리리스는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진짜 사기적인 외모다. 화가 나도 곧바로 씻겨 나가는 거 같잖아.

 하지만 그녀가 저지른 행동 탓에 함에 올라탄 지 5일 만에 주요 설비가 박살이 나다 못해 장비를 재설치해야 한다니. 나는 무심코 머리카락을 당겨대던 오른손으로 땀범벅이 된 얼굴을 부여잡았다.

 

“흐어어..진짜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이내 T자형 코너를 재빠르게 꺾어 돌아야 할 타이밍이 오자 나는 왼손에 든 태블릿으로 눈을 돌렸다. 태블릿 스크린 위에는 간략하게나마 함 내부의 이동 경로를 알려주는 지도가 올라와 있었기에 저 코너의 오른편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맨 외부 출격포트 입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그제에 왔던 곳이었지만 그때는 기억도 잘 나지도 않고, 오히려 이 함이 얼마나 큰지를 오늘 다시 실감했다.

 

‘다음부터는 무조건 일찍 다닌다. 무조건. 더럽게 넓네. 진짜.’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는 걸 안 나는 쉬지도 않고 달려온 다리를 천천히 멈추며 이내 코너의 벽에 오른팔을 기대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진짜, 쉴 틈도 없네.”

 

“주인님, 잠깐만요. 여기 분명 수통을..”

 

 연신 이마에 흐르는 땀이 눈썹까지 내려온 갈색의 머리카락의 끄트머리를 타고 내려와 새하얀 복도의 위에 툭툭 떨어지는 것을 보던 나는 가슴팍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왼손에 태블릿을 든 채로 쇄골 부근의 티셔츠 죽지를 쭉 당기는 걸 반복했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르자 산소가 정상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얼굴도 안 보이는 인물이 한 명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주인님, 여기 물 좀 드세요.”

 

“어..고마워, 리리스. 근데 말이야, 철혈의 레오나는..”

 

또각-또각-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도의 오른편에서 딱딱한 하이힐의 구두굽 소리가 내 귓속을 파고 들어왔다. 설마 그럴 리 없겠지 싶어 머리를 살짝 코너 너머로 내미는 순간, 어느새 코너를 돌아 내 앞으로 당도한 철혈의 레오나의 회색빛 눈동자와 내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5분이나 늦었어. 사령관.”

 

“...”

 

 땀범벅이 되어 지친 내 얼굴과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그 어떠한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밝다고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새하얀 그녀의 얼굴이 환한 전등 아래 더욱 돋보여 나는 그만 말문이 턱하고 막히고 말았다.

 그녀의 회색빛 눈동자가 마치 나를 스캔하는 것처럼 내 위아래를 훑기 시작하자 나는 그제야 정신을 다잡고는 가쁘게 몰아쉬는 숨을 참아가며 천천히 물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야? 철혈의 레오나?”

 

“..당연한 걸 묻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물론 10분 전부터 와 있었지.”

 

“허어...”

 

 계속해서 숨을 헐떡이던 내 입속에서 탄식 아닌 탄식이 새어 나왔다. 명색의 부관이라는 여성이 제 상관을 두고 다닌다고? 그녀가 이상한 걸까, 아니면 늦게 도착한 내가 잘못한 걸까.

 철혈의 레오나는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왼편으로 눕혀가며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뭘 하다가 이렇게 늦은 거야? 기껏해야 제조 3회하고 오는 거였는데. 수색하러 나갔던 애들이 지금 당신을 기다리느라 몇 분째 저기서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아?”

 

“..미안하게 됐어. 잠깐 제조실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가..”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아니라 저 입구 너머에 있을 그녀들에게 해. 그리고 변명하는 남자는 꼴사나워.”

 

“...”

 

 무덤덤한 목소리와 달리 가슴을 푹푹 찔러대는 그녀의 타박에 나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근 5일간, 그녀와 함께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그녀는 타협이라곤 절대 하지 않는 여성이라는 것. 당장에 3일 전, 내가 HMD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곧바로 나를 집무실에 데려다 앉히고는 업무를 개시시켰었다.

 2일 전에는 처음 보는 홀로그램 스크린을 조작하는 것에만 오전 오후 내내 고생했고 어제는 전략 전술 교본을 들고 사령관실을 찾아와 잠들기 전까지 공부를 시켰고, 오늘은 뭐-

 

‘대뜸 제조실을 가동하라라고 하고, 수색부대 출격까지..스케쥴이 너무 빡빡해.’

 

 그녀가 건넨 스케쥴 표는 빡빡하다 못해 살인적이기까지 했다. 오전 8시부터 수색부대 편성과 출격을 도맡게 했고 이후에는 제조실 가동까지. 다행이라면 그녀가 수색부대 작전 지휘를 나 대신 맡아주었다는 건데, 그것도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날 물로 보지마는 무슨. 물이었어. 난. 씨발.’

 

 분명 이틀 전에는 날 도발해오는 그녀를 향해 당찬 포부를 날렸었는데, 아. 그냥 그때 제안을 받아들일걸. 괜히 나댔다.

 

“당신, 철혈의 레오나. 제가 몇 번이고 말하지만 주인님께 무례하게 계속 굴면 더는 주인님께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겠어요.”

 

“어머, 나는 상관없는데, 그는 과연 그럴까? 지금 이 함에서 그에게 전략적, 전술적 조언을 해 줄 이는 나밖에 없을 텐데.”

 

 갑자기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에 뺨을 타고 흐르던 땀방울 너머로 시원한 감각이 들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분명 제조실에서 느꼈던 그 서늘함이다.

 

철-컥

 

“..하, 좋아요. 안 그래도 방금 몸을 덜 풀고 와서 뻐근하던 참이었는데. 제 몸풀기에 좀 어울려 주시겠어요?” 

 

철-컥

 

“좋아. 나도 복원되고 난 이후부터 전투다운 전투를 못 해본 참이었거든. 네 제안을 받아들일게.”

 

“잠까아안! 스탑! 스타압!”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두 여자 사이에 나는 지친 몸을 내던져 둘 사이에 서서 양팔을 쭉 펼쳐 그녀들의 간격을 넓혀내었다. 그런 나의 행동이 양쪽 다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녀들 모두 차가운 눈빛으로 사이에 낀 나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기 시작했다.

 

‘흐아아..상성이 안 좋은 게 리제랑 리리스뿐만이 아녔어.’

 

 정말 숨돌릴 틈조차 주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자 옅어지던 피로함이 다시금 몰려와 눈썹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제까지 새로운 인생이니, 전생이니.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나 자신이 또다시 너무 한심스러워졌다.

 

‘이게 함장이냐. 종놈이지. 종놈.’

 

“...흥. 재미없네.”

 

“주인님을 봐서 이번만 넘어 가드릴게요. 쳇.”

 

 나의 과장이 섞인 행동이 먹힌 걸까,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그녀들은 저마다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다시 홀스터 안으로 집어넣으며 서로를 향한 싸늘한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들이 시선을 거두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다시 몸을 앞으로 축 늘어뜨리며 앞으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어떤 장치를 해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행여나 이번처럼 내 시야 밖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답도 없을 것이다. 결심을 굳힌 나는 그녀들을 번갈아 보며 최대한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함 내에서 긴급 상황을 제외하고 일체 화기류 및 개인 무기를 장비하지 말 것. 어때? 둘 다 동의해?”

 

 내 작은 중얼거림에 그녀들은 저마다 다른 반응을 내비쳤다. 철혈의 레오나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블랙 리리스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한껏 구기며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흐응. 뭔가 일이 벌써 있었나 보네. 나쁘지 않은 안건이야. 당신이 그런 아이디어를 내놓다니. 다시 봤어.”

 

“주인님! 저는 주인님의 경호대장이에요! 만일의 사태에 항상 대비해야 한다고요! 그런데 무기를 소지를 금지하시면 리리스는..리리스는!”

 

 억울함이 반, 짜증이 반의 반, 나머지는 아마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나에 대한 서러움. 블랙 리리스는 곧 울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발을 연신 철제 바닥 위로 동동 굴러대었다. 확실히 그녀는 내 경호원인데, 무기를 들지 말라는 건 좀 그런가.

 

“..리리스, 좋아. 그럼 너는 네 개인 장비를 착용해도 좋아. 다만, 위급한 상황이 아닐 시임에도 오늘처럼 막무가내로 행동하면 너도 포함이야. 알겠어?”

 

“..제 자매들도 허락해주세요. 아직 제조되지는 않았지만 그녀들도 주인님의 경호원들인걸요.”

 

“..오케이. 알겠어. 컴페니언 시리즈는 인정.”

 

“..네에. 감사해요. 주인님.”

 

 마치 버려진 멍멍이마냥 풀이 죽은 그녀의 모습에 나는 내심 나쁜 놈이 된 것만 같아 애써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그녀들과 떠들다 보니 어느새 머리와 가슴께를 적시던 땀이 다 식어내려 으슬으슬한 한기가 내 피부 위를 덮쳐오는 것이 느껴져 나는 무의식적으로 양팔을 끌어안았다.

 

“..으. 추워라.”

 

 내가 양팔을 끌어안은 채 몸의 온기로 땀에 젖은 티셔츠를 말리려 하자 오른편에 서 있던 철혈의 레오나가 내 몸을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또 왜 이래. 그녀가 저런 행동을 보일 때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대사들이 날라온다는 걸 나는 근 3일간, 온몸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예상은 언제나 적중하기 마련이다. 철혈의 레오나가 눈썹을 가늘게 뜨며 나를 째려보기 시작하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사령관, 복장이 그게 뭐야? 당신 개인실에 분명 함장용 제복과 군모를 두었을 텐데. 그건 어디 두고 온 거야?”

 

“..그게, 어..입는 법을 잘 모르겠더라고. 불편하기도 하고. 하..하하.”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라면. 당신, 가만 안 둬.”

 

“...넵. 다음부터는 꼭 입고 다니겠습니다.”

 

“머리카락도 깔끔하게 정돈해. 군모를 써야 하는데 그렇게 길어두면 오히려 꼴불견이야.”

 

 마치 복장검사를 하는 중고등학교 선생님처럼 구는 그녀의 언행에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하나가 정론이다. 반박할 여지가 일도 없다는 것에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철혈의 레오나는 그것만으로 부족했는지 땀에 젖어 눅진해진 내 머리카락을 한가닥 한가닥 들어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것을 주시했다.

 

“함 내에 미용사가 있던가. 당신 이발은 메이드에게 맡기는 편이 낫겠네. 그 콘스탄챠라면..”

 

“주인님! 주인님의 이발은 저에게 맡겨주세요! 저 역시 이래 봬도 메이드랍니다?”

 

“...콘스탄챠에게 부탁할게.”

 

 나는 애써 리리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부정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 어디 메이드가 쌍권총을 들고 제조실을 부수냐.

 철혈의 레오나가 내 대답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외부 출격 포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나 역시 그녀의 등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나쁜 리리스가 가요옷..”

 

 등 뒤에서 왠지 모를 섬뜩한 한기가 느껴지지만, 무시하자. 그래, 꼭 공포영화에서 이럴 때 등을 돌아봐서 망하잖아? 그래. 무시하자.

 

“근데 철혈의 레오나. 수색부대 애들은 진짜 아직 기다리고..”

 

“..이제쯤 도착했겠네. 어서 가서 맞이해줘. 저번처럼 허둥대지 말고.”

 

“...야이..”

 

37) Day 5 AM 11:59

 

“우와, 여기가 오르카 1호? 무지 넓다...”

 

“앞으로 여기서 지내면 돼? 지하는 아니어서 좋네..”

 

 회색빛의 구조물들이 천장과 벽을 한가득 메운 공간, 여기저기 널려 있는 녹색의 컨테이너 사이에 여러 인영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며 오르카 1호의 외부 출격 포트의 웅장함에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을 향해 뚜벅이는 운동화의 발소리와 또각대는 하이힐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어서 와! 오르카 1호는 처음이지?”

 

“어? 이건..남자 목소리?”

 

 넓은 외부 출격 포트 안에 한껏 울려 퍼지는 남성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던 이들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왼손에 태블릿을 든 갈색 머릿결의 남성과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흰 제복의 여성, 그리고 은발의 메이드가 그녀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일 선두에 선 남성은 그녀들의 시선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난 여기 오르카 1호의 함장이자 현 오르카 저항군의 사령관이야. 만나서 반가워.”

 

“이..인간님? 아니, 잠깐. 뇌파가..”

 

“그를 밖에 있는 괴물들과 헷갈려선 곤란해. 그는 엄연한 인간이야. 당신들이 구조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덕분이잖아?”

 

 그의 뇌파를 탐지한 이들이 크게 수군거리자 그의 곁에 서 있던 철혈의 레오나가 그녀들의 불안을 캐치해 곧바로 수정해주었다. 사령관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이래 봬도 사람이야. 걱정하지 마.”

 

“어..네. 인간님? 아니면 함장님?”

 

“사령관님이라 불러야 하나?”

 

“편할 대로 불러. 사령관이든, 함장님이든.”

 

 수군대는 무리 중 검은 피부에 갈색의 머리칼, 경찰 제복을 입은 여성이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난감해하자 사령관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속으로는 자신도 무어라 불러주어야 할지 몰라 그녀들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이지만.

 그것을 눈치챈 이는 그의 곁에 서 있던 철혈의 레오나 뿐이었다.

 

“사령관, 어지간하면 사령관이라 불러.”

 

 그녀들을 향해 건넨 말이었으나 그녀의 눈빛은 머쓱한 웃음을 짓는 사령관을 향해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사령관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어갔다.

 

“콘스탄챠? 거기 있어?”

 

“네! 주인님. 저 여기 있어요.”

 

 그의 부름에 웅성대는 무리 사이를 뚫고 갈색의 머리카락에 녹빛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지닌 메이드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령관은 재빨리 그녀의 위아래를 훑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걸까, 콘스탄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몸 여기저기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몸에는 수풀을 해치다 생긴 자잘하게 긁힌 자국만 있을 뿐, 별다른 상처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 총상이 나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사령관은 크게 후-하고 땅을 향해 숨을 내쉬었다.

 그의 행동에 이곳에 처음 온 이들은 저마다의 눈빛을 교환하며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들었으나 그 행동은 이내 차갑기 그지없는 철혈의 레오나의 말에 의해 중단되었다.

 

“사령관, 우선 인원 체크부터 해.”

 

“어..어응. 알겠어.”

 

“..대답은 한 번만.”

 

“넵. 알겠습니다.”

 

 철혈의 레오나의 타박에 사령관은 어깨를 으쓱이며 왼손에 들린 태블릿의 화면을 켜고 구조 인원들의 목록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녀들이 구조된 곳은 탄광과 그 인근에 설치된 인부 건물. 구조인원은 세이프티 2개체..아, 아니. 두 명과 켈베로스 1명. 그리고..’

 

“..인간? 인간이야?”

 

“응?”

 

 한창 태블릿의 구조인원을 훑던 사령관의 시선이 노란색 안전모를 쓴 소녀의 프로필을 읽어갈 때쯤, 무리를 제치고 그 프로필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의 힘없는 목소리에 사령관이 번뜩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어느새 그의 앞으로 걸어 나온 노란색 안전모의 소녀, 더치걸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걸어왔다.

 

“..인간 맞지?”

 

“..어, 그래. 잠시만. 일련번호가..”

 

“..109. 더치걸 109야.”

 

 한눈에 보아도 힘이 쭉 빠진 그녀의 말소리와 눈빛, 얼굴 여기저기에 탄광에서 묻어나온 땟자국. 심지어 그녀의 머리에 걸친 것인지 아니면 쓰고 있는 것이지 모를 노란색 안전모는 세월의 흐름 탓에 여기저기 깨져 있어 그녀의 처량한 분위기에 무거움을 부각했다.

 사령관이 그런 그녀의 눈빛에 크게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자 그의 오른편에 서 있던 블랙 리리스가 그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신원이 확인되기 전까지 주인님께 함부로 다가오지 마세요.”

 

“리..리리스!”

 

 블랙 리리스의 차가운 말소리에 사령관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자신과 더치걸 109 사이를 가로막은 블랙 리리스의 정수리를 응시했다. 사령관이 그녀를 밀어내려 어깨를 붙잡아 밀어도 그녀는 마치 목석처럼 꿋꿋이 그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사령관이 크게 당황하는 것과 달리 더치걸 109는 오히려 힘없는 미소를 거무죽죽한 얼굴 위에 띄우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알겠어.”

 

“사령관, 인원 체크부터 얼른 끝내.”

 

“..하아. 알겠어. 우선 더치걸 109, 그리고 켈베로스 117..” 

 

“네! 사령관님! 켈베로스에요!”

 

 일련의 소동 탓에 사령관이 지친 목소리를 내자 그와 반대로 활달한 여성의 목소리가 외부 출격 포트에 울려 퍼졌다. 무리 속에서 환한 미소를 짓는 주홍빛이 섞인 갈색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닌 소녀의 모습에 사령관은 피식하고 콧소리를 내며 그녀들 한명 한명을 호명했다.

 켈베로스의 당찬 기합소리 덕분일까, 아까까지의 싸늘한 공기 대신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사령관은 구조 인원의 체크를 마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차례를 밟고자 했다.

 

“자, 이제 모두 오르카 1호의 탑승 인원으로 등록되었어. 이제부터는 각자의 숙소를 배정..”

 

“저기, 이제 물어봐도 될까? 사령관..님?”

 

 사령관이 이내 구조 인원들의 인원 체크가 끝나 그녀들을 배웅하려던 찰나, 방금 물러섰던 더치걸 109가 그의 앞으로 다시 한걸음 다가왔다.

 

“..또 주인님께 무슨..”

 

“리리스. 그만. 내가 할게.”

 

 블랙 리리스는 여전히 그녀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으나 이번에는 사령관이 먼저 나서 그녀를 제지했다. 사령관이 한팔로 자신을 밀어내자 블랙 리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번에는 한 걸음 그의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녀의 오른손은 어느새 허리춤 뒤에 가려진 홀스터로 향해 있었다.

 그런 그녀의 낌새를 눈치를 챈 철혈의 레오나와 시티가드 소속, 세이프티와 켈베로스의 얼굴에는 짐짓 긴장감이 피어올랐으나 그것을 모르는 사령관은 무릎을 굽혀 더치걸 109와 눈높이를 맞추며 힘든 미소를 지은 채 대화에 임하기 시작했다.

 

“응. 더치걸 109. 무얼 물어보고 싶은 거야?”

 

“나, 어디로 가면 될까? 광산? 동굴?”

 

“..뭐?”

 

 더치걸 109의 예상외의 질문에 사령관은 눈썹을 한껏 찌푸렸다. 이 소녀가 대체 무얼 말하는 걸까, 사령관은 그녀의 질문의 의중을 파악하려 들었으나 그것은 이내 소녀의 이어지는 말에 의해 그는 깨닫고 말았다.

 

“나는 평생을 광산에서 지냈어. 그러니까, 광산 일을 잘 해.”

 

“...”

 

“저기, 부탁이 있는데...”

 

 더치걸 109의 말에 사령관은 이전 세계에서 보았던 그녀의 상세 배경 설정을 떠올렸다. 분명 그녀는 좁은 광산 통로에서도 유연한 작업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 LRL과 같이 작은 체구의 소녀였으나, 이 소녀는 평생을 광산에서 지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사령관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듣기 힘들어 무심코 그녀의 노란색 안전모 위에 오른손을 가져가려 했다.

 

“저, 더치걸 109..”

 

“히익-”

 

 그가 자신에게 손길을 뻗어오자 더치걸 109는 눈에 띄게 질겁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노란색 안전모 아래 뻗어진 그림자 아래로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두려움이 비치자 사령관은 아차하는 심정으로 뻗었던 오른손을 거두었다.

 그와 그녀의 대화가 잠깐 멈추자 외부 출격 포트는 마치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그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을 머뭇대던 사령관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그녀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심해에 그런 곳은 없어.”

 

“...그럼 난 어디로 가면 될까? 인간님?”

 

 사령관에서 인간님으로 호칭이 바뀌는 것을 인지한 사령관의 얼굴에 그녀와 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의 이어지는 질문에 사령관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또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눈앞의 소녀가 지닌 상처는 매우 크고 깊었다.

 

“..먼저 씻고, 밥 먹고, 숙소로 가서 푹 자. 해야 할 일은 내일 알려줄게.”

 

“...정말? 정말 그거면 돼?”

 

“물론. 오늘은 푹 쉬어. 원한다면 함 내를 둘러봐도 좋아.”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당장 이 소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자신은 영리한 사람이 아녔다.

 그래도 그의 대답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던 탓일까, 더치걸 109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콘스탄챠, 그녀들의 인도를 부탁해.”

 

“네, 주인님. 맡겨만 주세요.”

 

 작전을 마치고 왔음에도 콘스탄챠는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은 채 미소를 머금고 그의 명령에 따라 구조 인원들을 이끌고 외부 출격 포트를 떠나가기 시작했다.

 사령관이 그런 그녀들의 뒤를 바라보자 방금까지 그와 대화한 더치걸 109가 살짝 자신을 돌려보는 것에 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철혈의 레오나는 후-하고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주의를 돌렸다.

 

“사령관, 애써 웃지 않아도 돼.”

 

“...그런 거 아냐.”

 

“아니긴, 곧바로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해봐야 설득력이 없어.”

 

“...철혈의 레오나. 그녀들을 구출한 곳은 방치되어 있던 탄광, 맞지?”

 

“맞아. 인류가 절멸한 이후로 인간의 출입이 없던 곳이었어. 덕분에 그녀들이 여태껏 살아..”

 

“왜 거길 떠나지 않은 거야. 저들은.”

 

“...”

 

 자신 못지않게 차가운 음성, 갈색의 머리칼에 가려져 있던 그의 눈매가 철혈의 레오나의 눈에 비쳐 들어왔다. 제법 매서운 눈매라고 그녀는 생각하며 별수 없다는 듯 그가 원하는 대답을 무덤덤이 말해주었다.

 

“명령이었겠지. 전 소유주들에 의한.”

 

“..죽었잖아. 휩노스 병이든, 철충에 의해서든. 그 자식들이 죽었는데도 못 떠난다고?”

 

“당연한 거야. 사령관. 그녀들의 소유주는 그것을 원했을 테니.”

 

“그게 뭔 개소리야?”

 

 눈에 띄게 험악해지는 그의 눈빛과 말투에 철혈의 레오나의 미간 역시 좁혀졌다. 곧바로 터질 것만 같은 활화산과 같이 사령관의 눈동자에는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들을 미끼로 쓰려 했던 거겠지.”

 

“미끼? 미끼라고?”

 

“그래. 세이프티나 켈베로스 같은 경호 요원들도 남겨둔 걸 보면, 탄광을 중심으로 그녀들을 모아 둔 채 시간을 벌게 하고 자기들은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려 했던 거겠지. 물론 철충들은 일부러 막아서는 바이오로이드가 아닌 이상 인간의 뇌파를 최우선으로 하니, 정작 죽은 건 그 인간들이었을 테고.”

 

“...그럼 그녀들은 내가..”

 

“맞아. 당신이 구조하기 전까지, 즉 오늘까지 그 탄광에서 머물고 있었을 거야. 그게 그녀들에게 내려진 마지막 명령이었을 테니까. 뭐,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

 

까득-

 

 무덤덤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철혈의 레오나와 달리, 칠판을 긁어대는 듯한 소리가 악다문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자 철혈의 레오나는 그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와 말을 이어갔다.

 

“왜 당신이 화를 내?”

 

“..그 새끼들이 정상이야? 어? 그녀들을 무려 몇십 년이나 가둬 둔 거야. 방금..”

 

“..더치걸 개체를 보니까,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만 같아서 그래?”

 

“...”

 

 핵심을 찔러오는 그녀의 말에 사령관은 애써 시선을 그녀에게서 돌렸다. 그런 그의 행동에 철혈의 레오나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쓸데없는 자책은 삼가는 게 좋을 거야. 그녀들은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 굳이 철충들과 교전을 하지 않았어도 됐으니. 그리고 그게 그녀들의 일이야. 사령관.”

 

“..몇십 년간 탄광과 인근 도시에서 못 벗어나는 게 그녀들의 일이라고? 그걸 지금..”

 

“그게 바이오로이드야. 사령관.”

 

“...뭐?”

 

 그녀의 무덤덤한 목소리 사이에 섞인 한 마디에 사령관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인간의 명령 없이는 할 수 있는 행동이 정해져 있어.”

 

“...”

 

“그녀들은 그리고 그 명령을 수행한 것뿐이야. 당신은 기억이 없으니 당신과 그녀들의 차이를..”

 

“그만, 그만!”

 

 사령관의 크나큰 목소리가 외부 출격 포트 안에 울려 퍼지자 그의 곁에 있던 두 바이오로이드들은 저마다의 생각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블랙 리리스는 걱정이 담긴 눈빛, 철혈의 레오나는 눈썹을 한껏 찌푸린 한기가 서린 눈빛. 사령관은 그런 그녀들의 눈빛을 무시한 채 오른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마구 휘저었다.

 그는 여전히 격노가 담긴 말투로 제 말을 이어갔다.

 

“그게 정상이라고? 그걸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게, 그게 정상이라고?”

 

“...”

 

“웃기지 마. 그건..그건 시발.”

 

“..그래. 도구지.”

 

 철혈의 레오나의 무심한 한마디, 그 한마디에 사령관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또다시 한 가지 사실을 머릿속에 상기했다.

 그녀들은 새장 속의 새, 생명에게 본디 주어지는 자유라는 단어를 애초에 지니지 않은 채 태어나는 도구. 평생을 자신과 같은 인간에게 부려지며 살아야 하는, 그런 이들이었다.

 

‘이미 이 세상이 게임 속과 같이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사령관은 지난 4일간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첫날에는 총에 맞아 죽을 뻔했다. 둘째 날에는 HMD를 사용하지 못해 좌절했다. 셋째 날에는 콘스탄챠의 부상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넷째 날에는 전날의 일 때문에 미친 듯이 홀로그램 지휘패널을 조작하는 것을 익히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이 세계는 너무나 잔혹하고 아름다웠다. 5일째 되는 날. 사령관은 그녀들을 옭아맨 속박 아닌 속박을 실감했다.

 그녀들은 새장 속의 새였다. 3일째 되던 날, 철혈의 레오나의 말에 떠올렸던 생각이었지만, 더치걸 109와 그 일행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온몸으로 실감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 새장 속의 새들의 주인, 그 자체였다.

 

‘대체 얼마나 날 더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는 세계야.’

 

“후우..”

 

 갑갑해지는 가슴에 사령관은 연신 쇄골 부근 티셔츠 옷깃을 잡았다 떼는 반복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현기증이 밀려오는 것을 꾹 참으며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철혈의 레오나에게 물었다.

 

“철혈의 레오나, 구조 신호가 더 들어오는 곳, 있어?”

 

“...뭐. 방금 들어온 애들을 끝으로 오는 신호는 없어. 다만 눈에 띄는 적이 하나 있지.”

 

“적?”

 

“그래. 연결체라고, 내가 올린 보고서에 있었을 텐데, 혹시 기억해?” 

 

‘저거 저번처럼 보고서 안 봤으면 한 소리할 생각으로 묻는 거구만.’

 

 철혈의 레오나의 샐쭉이 늘어난 눈가를 보자 사령관은 단박에 그녀의 의중을 알아채었다. 한시도 틈을 놓을 수 없는 그녀 탓에 사령관은 온간 힘을 다해 정신줄을 부여잡았다.

 

“물론. 철충들 중에서도 유독 강한 통솔형 개체, 기억하고 말고. 암.”

 

“..흐응.”

 

 힘이 살짝 들어간 사령관의 대답에 철혈의 레오나는 오히려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와 반대로 사령관은 입꼬리를 살짝이 위로 올렸다. 그런 그들만의 설전에 블랙 리리스는 소외된 것만 같아 부루퉁한 얼굴로 그 둘을 연신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그 연결체의 코드네임은? 기억해?”

 

“물론. 스토커라고 한다지? 그 녀석의 특이한 전술 탓에 라비아타 통령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는 전투 기록도 확인했어.”

 

“...좋아. 합격. 생각보다 본격적으로 확인했구나?”

 

“물론이지.”

 

‘사실 게임 속에서 본 설정을 읊은 거지만. 뭐, 이것도 하나의 선행학습이라고 봐야겠지.’

 

 그녀의 보고서를 그가 보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스토커의 전략과 전술, 거기에 신체적 특징까지. 합쳐서 40페이지가 넘는 보고서를 다 외우기에는 사령관 본인의 의지가 떨어졌다.

 그녀와 떠드는 사이, 가슴을 짓누르던 감각이 무뎌지자 사령관은 재빨리 태블릿을 들어 구조 인원들과 함께 들어온 수색 물자들을 확인했다. 지금은 뭐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께가 다시 아플 것만 같아 억지로 다른 일에 집중하고자 사령관은 빠른 손놀림으로 보고서를 내려보았다.

 

“..그래. 우선 어디 보자. 생각보다 영양 자원이 제법 많네. 자잘한 실용품들도 제법 확보했고.”

 

“영양 자원이 만성 부족이던 우리에게는 좋은 이야기야. 이걸로 어느 정도 생활 물자는 확보했어.”

 

“그러게. 부품은 좀 적더라도, 조금씩 자원 생산에도 박차를 가하면 나쁘지 않겠네.”

 

“흐응, 그래도 5일이나 있어 보니. 모양새는 좀 잡힌 것 같네. 당신.”

 

“흥! 아무렴요. 그 누가 뭐라 해도 제가 인정한 주인님인걸요?”

 

 사령관을 향한 칭찬에 도리어 으쓱해대는 블랙 리리스의 모습을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철혈의 레오나는 이윽고 무언가를 상기한 듯 반쯤 감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사령관에게 한 가지 사실을 물어보았다.

 

“사령관. 그러고 보니 오늘 제조실 첫 가동이었지?”

 

움찔-

 

“...어. 어, 그랬지. 어.”

 

“다행이네. 아직 함 내의 전투 인원이 부족한 마당이었는데. 영양 자원이 넉넉해졌으니 그걸 기반으로 제조를 더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곧장 제조실로..”

 

“어..아..아니! 그건 별로 좋지 않은..”

 

“...주..주인님. 우선 점심 식사부터 하시는 게 어떨까요?”

 

“? 뭐야, 둘 다 왜 그러는 거야?”

 

 자신의 물음에 눈앞에 있는 이들이 눈에 띄게 당황하자 철혈의 레오나는 조각 같은 얼굴을 찡그리며 애써 자신의 시선을 피하려는 한 인간과, 한 바이오로이드를 번갈아 보았다.

 무언가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고, 그녀는 자신의 이명답게 냉정하게 이 상황을 파악했다.

 

“당신. 내게 뭐 숨기는 거 있지?”

 

“예? 그런 거 없..없어!”

 

 철혈의 레오나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사령관은 눈에 띄게 당황해하며 왼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등 뒤로 숨긴 채 그녀에게서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서기 시작했다.

 블랙 리리스 역시 유리구슬 같은 이마 위로 식은땀을 흘려가며 사령관의 곁에 딱 달라붙은 채 그의 발걸음에 맞추어 철혈의 레오나의 곁을 떠나려 들자 철혈의 레오나는 그들과 반대로 한 걸음 그들에게 다가갔다.

 

“..태블릿.”

 

 철혈의 레오나의 백금색 머릿결 아래,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눈으로 사령관을 응시하며 오른손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그녀의 짧은 단어 속에 묻어나오는 매섭게 불어오는 겨울바람 같은 한기에, 사령관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저, 저기. 철혈의 레오나?”

 

“태.블.릿.”

 

“우선 이건 내 잘못이 아니거든? 진짜거든?”

 

 말투는 전염이 된다던가, 어느새 사령관이 포츈의 말투를 따라 하기 시작하자 철혈의 레오나는 더욱더 그를 차가운 눈으로 째려보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블랙 리리스는 어느새 사령관의 뒤로 쏙 숨어버린 채 철혈의 레오나의 시야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자 사령관은 그런 그녀를 배신자를 보듯 째려보았다.

 

‘리리스, 야! 네가 벌린 일이잖아. 근데 왜 내가..’

 

“태-블-릿”

 

“그..그게 제조실에서 사고가..”

 

“애초에 오늘 가동한 곳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나? 당신,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빨리 내놔.”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의 매서운 눈빛에 사령관은 어쩔 수 없이 결국 그녀의 손에 자신의 태블릿을 넘겨주고 말았다. 태블릿을 받아든 철혈의 레오나는 빠른 손놀림으로 태블릿에 올라온 보고서들을 연신 넘겨 가며 읽어내리다 이윽고, 어느 순간 손을 멈추었다. 이마까지 내려온 그녀의 앞머리 탓에 그녀의 얼굴이 그의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사령관은 직감했다.

 

‘이거 진짜 열받은 거..맞지?’

 

 여태까지 그녀가 보여줬던 그 어떤 모습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한기가, 그녀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자 사령관의 좁은 어깨가 더욱더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런 사령관의 오들오들 떨리는 어깨너머로 작금의 사태의 원인 제공자, 블랙 리리스는 어느새 사령관의 등에서 몸을 떼고는 총총걸음으로 그의 곁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주인님, 착한 리리스는 주인님 점심 식사를 들고 올게요. 기다려주세요!”

 

“야! 리리스! 너마저..!”

 

 설마 너까지 도망갈 줄 몰랐다, 사령관의 애처로운 눈빛에 블랙 리리스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외부 출격 포트를 떠나가자 사령관은 흩날리는 그녀의 은발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서늘한 알래스카의 북풍을 연상시키는 매서운 한기가 가득 묻어나오는, 철혈의 레오나의 목소리가 그의 직함을 불렀다.

 

“..사령관.”

 

“...네?”

 

“앉아.”

 

“저, 여기 철판인데요?”

 

“앉.아.”

 

“...넵.”

 

 그 이후, 구조 인원들을 모두 숙소로 들여보낸 콘스탄챠가 외부 출격 포트에 두고 온 개인 소총을 가지러 올 때까지, 사령관은 싸늘한 철판 위에 무릎 꿇고 앉은 채 철혈의 레오나의 잔소리를 듣고 있어야만 했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피 쏠림 탓일까, 인생 최악의 나날이 매일매일 갱신되는 탓일까. 결국에 그는 질끈 감은 눈썹 사이로 작은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야 말았다.

 

‘함장짓, 못해 먹겠네. 진짜!’

 

38) Day 5 PM 12:38 

 

뚜벅-뚜벅

 

“..여긴 정말 새하얀 공간이구나. 탄광이랑은 달라.”

 

 나는 고개를 들어 위부터 아래까지 전부 새하얗기 그지없는 복도의 광경에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었다. 방금 콘스탄챠라 불린 아름다운 메이드 바이오로이드가 소개해준 것처럼, 이 함은 넓다 못해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넓은 곳이었다.

 거의 몇십 년째 지냈던 탄광도 이렇게 넓은 곳이었지만, 사뭇 다른 공간에 내던져진 기분에 나는 더러운 장갑을 벗은 채 딱딱하지만 차가운 복도의 벽을 매만지며 걸음을 계속해서 옮겼다.

 

‘..다른 애들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지내던 탄광에는 나 이외의 동형기들이 다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저마다 생을 달리했다. 어떤 녀석은 탄광에 내버려 졌다는 사실에 미쳐서 밖을 뛰쳐나갔다가 철충에게 총을 맞아 죽고 말았다. 어떤 녀석은 자신의 삶을 한탄하다 끝이 없는 탄광 속으로 사라져 더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나는 겁쟁이였다. 명령모듈을 무시한 채 밖으로 뛰쳐나가 죽음을 맞이할 용기도, 매캐한 공기만이 맴도는 탄광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 죽을 용기도. 그 무엇도 없었다.

 

“..나 혼자 이렇게 살아남아도 되는 걸까.”

 

 나는 무심코 고개를 내려 내 옷매무새를 바라보았다. 여기저기가 탄광의 석탄에 얼룩져 더럽기 짝이 없는, 여기저기가 찢어져 멜빵은 어깨 아래로 축 늘어진. 마치 지금의 나와 같이 더럽고 추하기 짝이 없는 옷이었다.

 새하얀 이 공간과 정반대인 추한 모습이었다.

 

“..더럽고 추해. 그래. 그게 나야.”

 

 얼마나 걸은 걸까, 메이드가 알려준 숙소로 차마 들어가지 못해 나는 계속해서 끝없이 이어진 이 함의 복도를 걸어 다녔다. 세이프티와 켈베로스가 나를 따라오려 했었지만 나는 그걸 거부했다. 그녀들과 함께 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녀들은 나를 걱정할 테지만 나는 그것이 부담스러웠다.

 

“..여기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홀로 남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혼잣말을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세이프티와 켈베로스가 탄광에 홀로 남겨진 날 찾아와 꺼내줄 때까지 나는 홀로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살아왔다.

 이제는 항상 들고 다니던 내 덩치만한 드릴도 없다. 아니. 이제는 필요가 없는 걸까.

 

‘...심해에 그런 곳은 없어’

 

“그럼..나는 뭘하면 될까.”

 

 몇십 년 만에 만난 인간, 그 인간은 더는 내게 시킬 일이 없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럼 나는 무얼 하면 될까? 하다못해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말은 그 말에 끊겨 이어지지 못했다.

 미웠다. 그 탄광 속에서 벗어나게 해준 이임에도, 그 탄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고맙고 또 미웠다.

 

“우린..평생 인간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하는 걸까?”

 

 세이프티들은 경찰로서 살아가는 것이, 경호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만족스럽다고 이야기했다. 켈베로스 역시 세이프티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산책을 자주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바램 속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어야 했다.

 

“인간을 지키고, 인간을 따르고. 우린 그런 존재밖에 될 수 없어.”

 

 오래 살아온 탓일까, 아니면 홀로 어둠 속에서 살아온 탓일까. 나는 더 이상 인간이라는 존재를 좋게 바라보기 힘들었다.

 아니다.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인간이 너무 미웠다.

 

‘야! 임마! 109. 일 똑바로 못해? 하나, 진짜..’

 

‘죄..죄송해요. 관리자님.’

 

‘죄송? 씨발, 기분 좆같게 하네. 야, 미안하다면 다야? 도구 주제에 씨발.’

 

“하아..하아..”

 

 애써 묻어두었던,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자 나는 가슴께를 움켜쥐고는 거친 숨을 연달아 내뱉었다.

 내가 기억하는 인간들은, 절대로 우리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친절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를 쓰다 버리는 물건만도 못하게 취급했다.

 

‘오늘부로 87은 은퇴다. 다들 박수!’

 

‘..안녕. 애들아. 우리..꼭 다시 만나자.’

 

 관리자의 박수를 치란 명령에 우린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87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은퇴 이틀 전, 무너진 탄광 천장에 깔려, 팔을 한쪽 잃었다.

 관리자는 우리가 모를 거라 생각을 했나 보다. 대충은 알고 있었다. 쓸모없는 도구는 폐기, 그녀의 은퇴식은 그녀의 죽음을 의미했을 거란 걸. 당연하게도 그 이후, 그녀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87..191..흐윽..흑..”

 

 잊고 싶었던, 하지만 내가 아니면 더는 기억해 줄 이가 없는 그녀들의 일련번호를 나는 작게나마 읊어가며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새하얀 복도 위로 떨구었다. 구조받았다. 하지만 그건 또다시 찾아올 인간의 명령에 의한 죽음이라고, 나는 평생 이 운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럴거면..차라리 나도..”

 

“...괜찮아? 더치걸 109.”

 

“..어?”

 

 갑자기 앞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울먹이던 것도 멈추고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머리 위에 쓴 안전모가 흐트러졌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아니. 무서운 것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방금 만난 인간 남성이었다.

 

“이..인간님. 이건..이건 그러니까, 내가 닦을게! 그러니까..”

 

“...”

 

 이 남성은 이 함의 함장이라고 그 메이드가 말했었다. 그렇다는 건 이 함에서 가장 높은 인간, 매번 보았던 말단 관리자였던 인간보다 훨씬 높은 사람. 그런 인간이 나를 말 없이 내려 다 보고 있었다.

 혹여 내가 흘린 눈물 탓에 이 새하얀 복도 아래가 더러워진걸 신경쓰는 걸까, 아니면 내 옷에서 묻어나오는 석탄 먼지가, 아니면 내 몸에서 나는 냄새가 공기를 더럽게 하는 것을 불쾌하게 느끼는 걸까.

 인간 남성은 여전히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갈색의 머리카락 아래로 가려진 그의 눈이 보이지 않아 나는 더욱더 무서워졌다.

 어떻게 죽는 걸까, 탄광보다 더 깊은 심해에 가라앉혀지는 걸까, 아니면 분쇄기에 갈리는 걸까. 앞으로 닥쳐올 죽음을 생각하니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인간님.”

 

“..응. 그래. 더치걸 109.”

 

“이..인간님. 나..햇빛이 드는 곳에서 죽으면 안 될까?”

 

 덜덜 떨리는 양손을 움켜쥔 채 나는 고개를 떨구곤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내 마지막 소원을 힘겹게 입 밖으로 내뱉었다.

 탄광에서 나왔을 때, 어둡고 추운 탄광과 달리 환하고 따뜻한 햇볕이란 것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기분은, 정말 천국이란 곳이 있다면 저런 햇볕이 내리쬐는 곳이겠구나 싶었다. 하다못해 그 햇볕 아래서, 나는 죽고 싶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갱도도, 무엇이 도사리는지 모를 심해도 싫었다. 제발, 제발 햇볕 아래서-

 

“잠깐만. 더치걸 109.”

 

“...인간님?”

 

 무언가가 내 턱을 잡아 올리려 하자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그 햇볕과 같이 따뜻한 손길에 무심코 고개를 맡겼다. 내 눈앞에 있던 인간은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다가와 무릎을 꿇은 채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 좀 닦아줄게. 다치게 하려는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

 

 어디서 꺼낸 지도 모를 새하얀 손수건이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 내 얼굴로 다가왔다. 무심코 옛 기억이 떠올라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상냥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말에 나는 이빨을 꽉 깨문 채 고개를 여전히 그의 손 위에 올려두었다.

 이내 눈앞의 인간은, 내가 제조되고 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얼굴 위에 손수건을 올려 내 눈가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뭐..뭐하는 거야?”

 

“..이쁜 얼굴이 다 망가졌네. 닦아줄게. 조금만 참아.”

 

“...”

 

 곧 죽을지도 모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내 머릿속이 속내를 알 수 없는 인간의 행동으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걸까, 분명 거기서 자기 입으로 이런 심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나는 흐린 시야 너머로 그를 응시했다.

 그런데 왜 그는 저렇게 웃고 있는 걸까, 그것도 내가 억지로 웃는 것처럼. 왜 애처롭게 웃는 걸까. 그는 인간인데, 나처럼 바이오로이드가 아닌데. 왜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것처럼 웃고 있는 걸까.

 

“..자, 다 닦았다. 그리고 바닥은 너무 걱정하지 마. 까짓것 눈물 자국 좀 생겼다고 누가 뭐라 하겠어?”

 

“...왜 나한테..”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걸까. 혹시 이렇게 나를 챙겨주는 척하다가 날 폐기하려는 걸까, 끝끝내 사라지지 않는 인간에 대한 나의 불신이, 그의 호의를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아섰다.

 하지만 이 인간은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내 얼굴 탓에 새까매진 손수건을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여전히 애처로운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다시 불렀다.

 

“그것보다, 더치걸 109.”

 

“..응?”

 

“너 혹시, 흡연하니?”

 

“응?”

 

 갑작스러운 그의 물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어느새 손수건 대신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모를 담뱃갑 하나를 쥔 채 이번에는 환한 웃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근처에 흡연실이 있거든. 그거 때문에 돌아다닌 거 아냐? 가는 김에 같이 가자.”

 

“..어?”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린 채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내가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자 그 남자는 몇 걸음을 더 옮기다 이내 다시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더치걸 109?”

 

“..어, 응. 알았어.”

 

 인간의 말소리라면 너무 무서웠는데, 그의 부름은 왠지 모르게. 나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마치 그 따뜻한 햇볕과도 같은 그런 따뜻함에 나도 모르게 그의 등을 쫓기 시작했다.

 

39) Day 5 PM 12:46

 

“어, 콘스탄챠. 더치걸 109는 찾았어. 여기? 어..그러니까 2층 B동이네.”

 

 사령관은 왼손에는 태블릿을, 오른손에는 담뱃갑을 든 채 귀에 꽂힌 이어폰을 누르며 앞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갔다. 환한 전등빛이 내리쬐는 새하얀 복도 위를 걷는 이는 그와 그의 뒤를 따르는 더치걸 109뿐이었다.

 

“어, 너무 걱정하지 마. 태블릿에 지도가 있으니까 헤맬 일은 없을 거야. 어어. 다른 인원들 식사가 끝나는 대로..어? 여기로 직접 오겠다고? 그러면 지금..”

 

 반갑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걸까, 사령관의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오자 더치걸 109는 그의 옆모습을 살며시 올려다보았다. 아까와 마찬가지인 억지로 짓는 웃음에 더치걸109는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인간도 저렇게 웃을 수 있구나.’

 

“..어. 알겠어. 조금 늦게 와도 되니까, 너무 급하게 올 필요는 없어. 그것보다 리리스랑 리제한테 만약 수통을 내리면 이틀은 날 못 볼 줄 알라고 전해줘. 알겠지? 철혈의 레오나한테는 점심시간이니까 좀 쉬다 온다고 해주고.”

 

 함장이라는 직함 탓에 하는 이야기도 많구나, 라고 더치걸 109는 이내 지레짐작하며 그의 옆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그의 등 뒤 대신 그의 곁에 함께 서서 걷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웠다.

 

‘인간에 대한 호감 같은 건 옛적에 사라진 줄 알았는데.’

 

“후, 이제야 끝났네. 미안해. 더치걸 109.”

 

“..응?”

 

 사령관은 여전히 입가에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 그녀를 향해 사죄를 건네었다. 제조된 지 한참이 된 더치걸 109는 만들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인간의 사죄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사령관은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어갔다.

 

“방금까지 조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아, 콘스탄챠가 너 어딨는지도 찾아달래서 이야기해줬어. 조금 있다 마중 올 거야. 앞으로 점심 시간에는 식당으로 와.”

 

“...날 왜 찾아?”

 

“아, 아직 함 내 인원이 얼마 없다 보니 식사를 일제히 하지 않으면 한 명 한 명 챙겨주기가 힘들거든. 그래서 어지간하면 다 같이 식사를..”

 

“겨우 그거 때문에? 그냥 나 같은 거 없이 밥 먹어도 되지 않아?”

 

“...나 같은 거라니. 떽.”

 

 더치걸 109의 물음에 사령관은 더치걸의 안전모 위로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하며 입가에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이 방금 보았던 억지로 짓는 미소라는 것을 더치걸 109는 눈치채었다. 그러나 그녀는 굳이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몇 걸음을 더 걷자 사령관은 어느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딱딱한 철판 문과 다른 반투명한 유리문 위에는 담배 기호가 붙어있었다.

 

“어후, 드디어 도착했네. 자, 들어가자.”

 

“응.”

 

 두꺼운 벽과 달리 얇은 유리문을 사령관이 열고 들어가자 더치걸 109 역시 그의 뒤를 따라 흡연실 안으로 들어섰다.

 좁고 어두운 탄광과는 다른 넓고 벽에 뚫려있는 창문 너머로 햇볕이 새어 들어오는 흡연실 내부의 분위기에 더치걸 109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천지라는 것이 이런 곳일까, 더치걸 109가 멍하니 흡연실 안을 둘러볼 때쯤, 사령관은 익숙하게 중앙에 놓인 원통 재떨이를 끌어다 창문 근처의 벤치 앞으로 가져왔다.

 

“더치걸 109, 담배는 이것밖에 없는데, 괜찮아?”

 

“..이건.”

 

 사령관이 내민 담뱃갑의 모양새는 그녀가 익히 보던 담뱃갑이었다. 흰색 바탕에 빨간색 테두리, 그녀가 소싯적 동료들과 자주 나누어 피던 담배였다.

 사령관은 그녀에게 담배를 한 개비 건네고는 자신도 입에 담배 하나를 문 채 딱딱한 벤치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더치걸 109는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는 다 낡은 주머니를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아마 여기에 하나 두었던 거 같은데.’

 

 계속해서 주머니를 뒤적이는 더치걸 109를 사령관은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그와 그녀 사이에 위치한 창문 너머로, 해수면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만이 어두운 흡연실의 내부를 밝게 비추었다. 

 얼마나 뒤적였을까, 더치걸 109는 이내 먼지만이 수북이 쌓인 주머니에서 라이터 하나를 꺼내었다.

 

“..인간님은 라이터 없어?”

 

“하하, 담배 챙길 생각은 했는데. 라이터는 깜박했지 뭐야.”

 

“..자.”

 

칙-

 

 사령관이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더치걸 109는 익숙하게 그의 앞에다 라이터의 불을 들이밀었다. 자주 동료들과 돌려 써가며 쓴 라이터는, 오랜 세월에도 안에 가스가 남아있었는지 약하지만 밝은 불꽃을 피워올렸다.

 더치걸 109가 내민 라이터의 불꽃에 사령관은 입에 문 담배의 끄트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이윽고 끄트머리가 붉게 타오르는 것과 동시에 사령관의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가 새어 나왔다.

 

“..쿨럭, 쿨럭.”

 

“인간님? 담배 안 피웠어?”

 

 메케한 담배 연기에 사령관이 연신 기침을 해대자 더치걸 109는 또다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건 담배를 처음 피는 사람들이 연기의 독함을 참지 못해 생기는 기침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는 굳이 담배를 자신 때문에 챙겨온 것일까, 더치걸 109는 설마 그럴리 없겠지라는 생각을 한 채 자기 입에 물린 담배에 라이터의 미약한 불꽃을 가져다 대었다.

 

“아, 아니. 아마 오랜만에 피워서 그런 걸 거야. 정신을 차린 후부터 담배는 무지 땡겼거든. 몸이 안 받아주네. 아아.”

 

“..정신을 차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 너는 모르겠구나. 사실 나도 여기 온 지는 5일밖에 안 되었거든.”

 

 연신 콜록대는 입을 왼손으로 막은 채 사령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더치걸 109는 그런 사령관의 말에 갈색의 눈동자 사이로 흥미로운 눈길을 그에게 보내었다. 사령관은 그 눈길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첫째 날, 어느 건물 폐허에서 콘스탄챠와 그리폰에게 구조되어 여기까지 다 같이 온 이야기. 둘째 날, HMD라는 걸 써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었다는 이야기. 셋째 날, 처음 지휘를 잡았다가 개판친 이야기. 넷째 날, 보고서에 파묻혀 죽을 뻔 했다는 이야기.

 마치 동화를 듣는 것처럼 더치걸 109는 그의 4일밖에 되지 않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 공중에 뜬 양다리를 휘저어가며 연신 불만을 토로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인간도 나름대로 고생하는구나.’

 

“아, 오늘 또 하나 일이 터졌었지. 그게 블랙 리리스라고 내 경호원, 너도 봤지? 내 뒤에 있던..”

 

“..금발의 아가씨?”

 

“아니, 걔는 내 부관이야. 성격이 무진장 무서워서 내가 윗사람인지 걔가 윗사람인지 모를 정도라니까? 에휴..”

 

“..그래도 바이오로이드잖아. 인간님이 명령만 하면..”

 

“...그냥 사는 거지. 뭐. 성격 안 맞다고 일일이 명령같은 걸 하고 살면 내가 더 스트레스야.”

 

 명령이라는 단어에 사령관의 입가에 물린 담배가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어딘가 화가 난 듯한 그의 목소리에 더치걸 109는 쉬이 그의 행동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른 인간들은 잘만 명령했는데..’

 

“..자, 내 이야기를 해줬으니까. 이제 더치걸 109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응? 내 이야기 같은거..들어봐야 재미없을 텐데.”

 

“그거야 듣는 사람 나름이지. 후우-쿨럭, 쿨럭. 아오, 이 담배 독하네.”

 

 여전히 담배 연기에 익숙치 않은 건지, 사령관은 연기를 뿜어낼 때마다 연신 기침을 해대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더치걸 109는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자신도 그와 같이 손에 걸린 담배를 입에 물고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탄광이었어.”

 

“...”

 

“거기서 오늘 구조되기 전까지, 거의 몇십 년을 지냈었지. 처음에는 동형기인 자매들도 있었고, 토미워커라는 AGS도 있었는데. 어느샌가 탄광이 점점 좁아지기 시작하면서 토미워커는 밖으로,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어.”

 

“...”

 

 그녀의 입에서 말이 나올 때마다 사령관은 기침 소리 대신 연신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것만 반복했다. 더치걸 109는 무심코 그의 얼굴을 향해 돌아보았으나 눈까지 내려온 그의 갈색 머리카락 탓에 그의 눈이 가려져 어떤 얼굴인지를 알 수 없었다.

 

“..좁아지는 탄광만큼, 우리의 작업도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다들 그걸 참아가며 일했어. 초창기에는 햇빛이 새어 들어오는 작업장에서 일했으니까, 다시 거기로 돌아갈 수 있겠지. 그런 생각만 가득했거든.”

 

“...”

 

“그런데, 어느 날부터 관리자인 인간님이 더욱더 깊숙이 들어가라는 거야.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를 부리던 회사가 경영난? 아무튼, 뭐 그런 거라 작업 할당량이 배로 늘어난 거지.”

 

“후우-”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사령관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멍하니 앞만을 응시하며 담배 연기를 계속해서 뿜어내었다. 이내 불꽃이 담배 필터까지 올라오자 그는 눈앞의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비비며 집어넣고는 새로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런 그의 행동을 눈으로 쫓던 더치걸 109는 또다시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약한 라이터의 불꽃이 새어 들어오는 햇빛 아래로 강한 자기주장을 하자 사령관은 다시 라이터의 불꽃에 담배를 가져다 대었다.

 

“땡큐.”

 

“아냐. 하여튼 우리는 늘어만 가는 작업량에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자주 사고도 당하고. 그렇게 동료들도 한 명씩 사라지고, 늘어나고를 반복하다가 이내 그 탄광에 모두 버려졌어.”

 

“..버려졌다고?”

 

“응. 어느순간부터 관리자 인간님이 찾아오지 않으시더니, 작업장 전화기로 명령이 내려왔어. 지금부터 전부 거기에 있으라고.”

 

“...”

 

딱-

 

 그녀의 말에 사령관은 무심코 오른손에 든 담뱃갑을 딱딱한 벤치 위에 두들겼다. 딱딱거리는 소리가, 적막과 햇빛만이 맴도는 흡연실 안을 가득 메우자 더치걸 109는 그런 그의 행동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간님?”

 

“..아, 아냐. 어, 그래서?”

 

“..그러고 모두 흩어졌어. 탄광 여기저기로.”

 

“...”

 

“어떤 애는 몇십 일을 버티다 계속해서 탄광을 뚫고 들어가다 죽고, 어떤 애는 명령모듈이 낡아서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그 뒤로 모습을 볼 수 없었고.”

 

딱-

 

“나머지도 다 비슷했어. 앞서 간 동료들을 뒤따라, 사라졌어.”

 

딱-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굶는 것도 한계에 도달했을 때, 누군가 탄광 안으로 들어섰어.”

 

“...누군데?”

 

“오늘 같이 온 세이프티들이랑, 켈베로스.”

 

“그녀들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밖으로 먼저 나간 애들이 있었다고 했잖아?”

 

“..어.”

 

“걔들이, 철충의 총에 맞고 죽어가는 걸 그녀들이 발견했대.”

 

“...그래서?”

 

“탄광 안에, 동료들이 있다고. 제발 구해달라고. 그렇게..그렇게 말했대.”

 

 어느새 더치걸 109의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간 동료들에게 대한 슬픔일까, 아니면 그녀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연명해온 자신에 대한 한탄일까. 사령관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정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이 탄광 안에 들어서고, 식량을 내게 넘겨줬어. 그래도 밖으로 못 나갔지. 왜냐면..”

 

“..인간의 명령 때문에?”

 

“..응. 우리가 마지막으로 받은 명령은 그곳에서 대기하라는 거였으니까.”

 

“...나머지 동료들은?”

 

“나 이외의 얘들은, 그녀들이 찾아왔을 때 이미 대부분..흐윽.”

 

딱-

 

 사각형의 담뱃갑 끄트머리가 찌그러질 때쯤, 사령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흐느끼는 더치걸 109에게 다가갔다.

 여기저기가 깨진 노란색 안전모와 허름하기 짝이 없는 옷매무새, 그녀의 고통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몸 위의 상처들. 사령관은 흐느끼는 더치걸의 얼굴에 방금 꺼내었던 새하얀 손수건의 반대쪽으로 또다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인..흐윽, 더러워져. 흐윽.”

 

“..그럼 뚝. 어이구, 또 이쁜 얼굴 다 망가지네.”

 

슥-

 

 그의 따뜻한 손길 덕분일까, 더치걸 109의 들썩이는 어깨가 이내 잠잠해지자 사령관은 그제야 그녀의 앞에서 떠나 다시 벤치 위에 엉덩이를 얹었다.

 그렇게 그 둘은 한참을 가만히 앉아 그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한 시간 같은 1분이 지나고 나서야 사령관은 이내 입을 열었다.

 

“더치걸 109.”

 

“..응. 인간님.”

 

“..내가 뭐 다른 건 장담하지는 못하겠고 이것 하나만 장담할게.”

 

“..어떤 거?”

 

“명령, 너에게 죽으라는 그런 명령은. 절대 안 할게.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고. 내가 살기 위해서 너희들이 죽으라는, 그런 명령은 안 할게.”

 

“...”

 

“아마 그 무서-운 부관 언니가, 아. 아닌가. 걔가 너보다 더 나이가 있어 보이지만 너는 몇십 년을 더 살았으니 네가 언닌가?”

 

“..헤헤, 뭐야. 그게.”

 

 사령관의 실없는 소리에 더치걸 109는 퉁퉁 부은 눈가 위로 눈웃음을 지었다. 사령관은 훨씬 밝아진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그 무서운 부관님이 이런 말을 들었으면 아주 속 편한 소리하고 자빠져 있다고 할 테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모두가 죽지 않고 살아갈 방법이. 꼭 있을 거야. 응, 있고말고.”

 

 꿈만 같은 소리, 더치걸 109는 그렇게 생각했다. 탄광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그녀가 바깥 사정에 아예 까막눈인 건 아니었다. 항상 탄광 아래까지 내려와 식자재를 옮겨주던 세이프티들과 켈베로스 덕분에 바깥에는 무시무시한 철충들이 우글거린다는 걸.

 그리고 그 철충들이 노리는 건 바로 자기 눈앞의 남자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웃었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헤헤.”

 

“물론. 내가 누구냐, 바로 함장이자 이곳의 사령관 아니냐! 해내야지. 암. 나만 믿어.”

 

“응. 인간님...아니.”

 

 더치걸 109는 겨우 만난 지 몇십 분밖에 되지 않은 이 남자의 목소리가 마치 지저귀는 새의 소리처럼,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같이 세상에 처음 나와 들었던 기분좋은 소리처럼 다가왔다.

 

‘매번 들었던 남성의 목소리는, 그 관리자 밖에 없었으니까.’

 

“..헤헤. 앞으로 잘 부탁해. 사령관.”

 

“..그래. 맡겨만 줘.”

 

 배시시 웃음을 짓는 더치걸의 모습에 사령관은 무심결에 손을 들어 그녀의 안전모 위에 손바닥을 덮어씌웠다. 차갑고 거친 안전모 겉면의 느낌에 사령관이 아차하는 심정으로 손을 떼려 들었으나 더치걸 109는 외부 출격 포트 때와는 달리,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

 

똑-똑-

 

“주인님, 더치걸양을 인도하러 왔습니다.”

 

“아, 콘스탄챠. 여기야.”

 

 유리문 너머로 들려오는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에 사령관은 반색하며 유리문 너머의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콘스탄챠는 그런 그를 보고선 미소를 지으며 메케한 담배 연기가 그득한 흡연실의 풍경에 눈썹을 찌푸리는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와, 저런 것도 가능하구나.’

 

 순수하게 더치걸이 그녀의 얼굴을 보고 감탄하고 있자 콘스탄챠는 조심히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오른 손목에 손목시계 같은 것을 채워주었다.

 

“이게..뭐야?”

 

“이건 저희 함에서 사용하실 단말기에요. 이게 있으시면 함 내 인원들과 통화도 하실 수 있고. 또..”

 

“오늘처럼 인원을 놓칠 일도 없지. 흐흐, 그게 있으면 누가 어딨는지 다 알 수 있거든.”

 

 사령관의 능글맞은 웃음소리에 더치걸 109는 들어오기 전과 달리 환한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콘스탄챠는 그런 더치걸 109의 손을 맞잡고는 마치 아이를 데리러 온 어머니와 같이 미소를 지은 채 벤치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사령관에게 말을 걸었다.

 

“주인님, 저는 이대로 더치걸양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러 갈 생각인데 주인님께서는..”

 

“아아, 난 괜찮아. 요새 속이 좀 더부룩해서.”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주인님.”

 

“응. 더치걸 109. 여기 밥 맛있으니까, 더 먹고 싶으면 콘스탄챠에게 말해. 알겠지?”

 

“응..고마워. 사령관.”

 

 콘스탄챠에 손에 이끌려 흡연실 밖을 나서는 더치걸 109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령관은 이내 그녀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담뱃갑에서 새로운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엉덩이를 들어 뒷주머니에서 반들반들한 겉면을 자랑하는 라이터를 꺼내 능숙하게 불을 지폈다.

 

칙-

 

“..콜록, 콜록. 아씨, 몸이 달라서 그런가..잘 받네. 진짜.”

 

 방금까지 활기찼던 목소리는 어디 가고, 사령관은 온몸을 축 늘어뜨린 채 담배 탓에 흐릿해지는 시야를 천장에 고정했다.

 더치걸 109가 떠난 흡연실 안에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담배연기와 창밖에서 들어오는 미약한 햇빛, 그리고 지친 얼굴의 사령관만이 있었다.

 

‘명령..그래. LRL도 명령을 받았더랬지. 등대를 지키라고.’

 

“후우-”

 

 이 세계로 넘어와 처음으로 들어온 흡연실, 잊고 있었던 담배의 존재를 사령관은 오늘에서야 떠올렸다. 더치걸 109 덕분이었다.

 왼손에 들린 담배 한 개비를 사령관은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전 세계에서 살았던 자신의 존재를 떠올렸다.

 

‘..불과 며칠 전에만 해도 아무 생각 없이 피우던 담밴데.’

 

“..존나게 독하네. 진짜.”

 

 밥 먹고 난 이후, 직장에 들어가기 이전, 일하다가 동료들과, 시도 때도 없이 태우던 담배인데 이걸 왜 잊고 있었을까, 사령관은 점점 무거워지는 공기 속에 더욱더 몸을 내던졌다.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햇빛만이 그의 지친 심신을 달래 줄 뿐이었다. 

 

‘..어깨가 무겁네.’

 

 사령관은 이미 자리를 떠난 더치걸 109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가 앉아 있었던 딱딱한 벤치 위를 매만졌다. 아직 따스한 그 아이의 온기가 남아 그의 손바닥 위를 데우자 사령관은 또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후우-”

 

‘진짜 거지 같은 세계야.’ 

 

“내가..잘 할 수 있을까.”

 

 더치걸 109에게 호언장담했던 것과 달리 사령관은 자신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중얼거림이 사방을 둘러싼 벽에 부딪혀 자신의 귓속으로 흘러들어옴과 동시에 사령관은 눈을 계속해서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눈썹이 마치 며칠은 자지 못했던 것처럼, 눈썹이 철근을 매단 것처럼 무겁기 짝이 없었다.

 

‘주인공은 어떻게 한 걸까. 이걸 두 눈에 담고..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단 말이야?’

 

“하아아..”

 

 사령관은 덮쳐오는 피로감에 양손을 들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손에 묻은 담배 잿가루가 눈썹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눈이 따가워졌음에도 그는 손바닥을 치울 줄을 몰랐다.

 

‘나 때문에, 그녀들이 다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쉬고 싶어.’

 

 그가 자신의 진정한 소망을 입밖으로 내뱉지 못한 채,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를 헤맬 때쯤. 그 적막은 이윽고 누군가의 방문으로 깨지고 말았다.

 

똑-똑-

 

“...? 콘스탄챠, 내가..”

 

 또다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사령관은 얼굴을 덮은 양손을 치우고 흡연실의 입구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 검은색과 흰색의 메이드 복장을 한 여성이 서 있을 거란 그의 예상과 달리, 하얀 바탕의 제복을 입은 금발의 여성이 회색빛 눈동자를 빛내며 벽에 기대어 있었다.

 

“..철혈의 레오나?”

 

“그래.”

 

“네가 왜 여기에..”

 

“부관이 가면 어딜 가겠어?”

 

 사령관의 어눌한 물음에 철혈의 레오나는 그와 달리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굳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아마 담배 연기 때문일 것이라, 사령관은 짐작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이 맞는지, 철혈의 레오나는 흡연실을 가득 메운 담배 연기를 눈으로 훑으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령관, 지금 해야 할 업무가 얼만지는 알아? 당신의 그 경호대장 덕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

 

“...으엑.”

 

“어서 나와. 휴식시간은 충분히 가졌잖아?”

 

“..예이. 예이.”

 

 유리문 너머로 매섭게 들어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사령관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는 다 타버린 담배꽁초를 재떨이 위에 비비고는 벤치 위에 던져두었던 태블릿을 챙긴 후에야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가 문을 열고 나오자 철혈의 레오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등짝 위를 세게 후려쳤다.

 

짜-악!

 

“악! 아, 왜! 진짜!”

 

“..그냥. 멋들어진 대사는 실컷 쳐놓고 혼자 온갖 궁상은 다 떨길래.”

 

“..어?”

 

 철혈의 레오나의 말에 사령관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멍하니 응시했다. 지금 이 여자가 뭐라는 걸까, 사령관은 문득 방금 흡연실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 유리문..방음이..’

 

“..혹시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 철혈의 레오나.”

 

“뭔데?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까 2개까지 대답해 줄게.”

 

 철혈의 레오나는 보기 드물게, 아니. 그가 함에 탑승한 이후, 근 5일간 보지 못했던 환한 미소를 입가에 걸은 채 어깨가 부들거리는 사령관의 질문을 기다렸다.

 

“..언제 왔습니까? 여기.”

 

“콘스탄챠와 함께 도착한 게 아마. 3분 전쯤이려나?”

 

“..혹시 다 들었습니까?”

 

“뭐, 당신이 당신 살겠다고 우리보고 죽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건. 들었지.”

 

“...”

 

“뭐, 날 무서운 여자라고 평가한 건. 당신의 큰 포부를 봐서 넘어가 줄게. 후훗.”

 

 그녀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말에 사령관은 새하얀 복도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지금의 그는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거기로 쏙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만큼, 지금 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그럼 콘스탄챠도 들었다는 소리잖아. 시발..시발..’

 

“자, 당신이 그녀에게 약속한 걸 지키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일부터 해야겠지? 어서 일어나. 앞으로 업무를 마치기 전까지 당신에게 쉬는 시간은 없어.”

 

“..흐윽. 앞으로 콘스탄챠를 어떻게 봐..”

 

 아예 복도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부들거리는 사령관의 등을 철혈의 레오나는 여전히 환한 눈웃음을 지으며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의 각오를 들은 콘스탄챠가 소리 없이 울다 갔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 자신도 그의 결단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정말, 다정하기 짝이 없는 남자네.’

 

“흐어어어..날 죽여줘. 제발..”

 

“안돼. 당신이 죽으면 우린 전부 끝장이거든. 자, 가자.”

 

“으어어어..”

 

 철혈의 레오나는 여전히 웅크린 채 쓰러져 있는 사령관의 뒷목을 잡아 그를 바닥에 질질 끌며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마대자루마냥 힘없이 끌려가는 사령관의 처량한 모습과 달리 그녀는 밝은 미소를 지은 채 가볍게 그를 끌고서는 또각대는 하이힐 소리와 함께 새하얀 복도 위를 걸어갔다.

 

“당신이 장담한 포부를 이룰 수 있을 만큼의 성장을 기대할게. 사령관.”

 

“..죽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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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 정리를 이쯤에서 해야 할 것 같다.


Day 1~22. 사령관이 NNIE 회로를 설치하기 이전의 시간대.

 ㄴ>20일 시술 제의=>21일 시술 제의 동의=>23일 회로 시술.

Day 23~ 여기서부터 NNIE 회로를 설치한 이후의 시간대.

 ㄴ>Day 32. 불굴의 마리 합류=> Day 40. 신속의 칸 합류=> Day 51. 멸망의 메이 복원=> Day 53. 무적의 용 수색 개시=>  Day 68. 소완 합류=> Day 75. 트리아이나 합류=> Day 77. 로크 합류(12편 이후 주무대)


Day 91. 무적의 용 합류=>Day 105. 로열 아스널 제조=>Day 116. 라비아타 합류=>Day 117. 에바 등장. 사령관 기절.=>Day 118. 지휘관급 1차 회의=>Day 119. 지휘관급 2차 회의=>Day 121. 생체 복원 장비 확보 작전 개시. 기승의 주무대.


우선 내가 기승 조질 때 썼던 시간대별 상황이..어 대충 이렇네. 씨발 놈. 존나 쓸게 천진데 이걸 역전개를 고집했네. 덕분에 뒤에 쓰는 내 대가리 터지잖아.

보면 알겠지만 뭐가 많다. 이걸 어떻게 써야 하나 진짜 고민했는데..결국 서사의 구심점이 되는 사령관의 정신상태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전단계는 따라서 사령관의 정신상태가 가장 멀쩡했던 순간, 초창기 합류 시절이랑 리오보로스 때부터 시작해서 NNIE 회로 설치 직전 상황, 그리고 파국으로 치닫는 사령관의 정신 상태. 이렇게 갈 거다.

 따라서 18~20까지는 리오보로스, 로크와 사령관이 대면하고 이야기 하는 부분. 20~22? 까지는 NNIE 회로를 설치하게 되는 사령관의 Day20 이전의 상황. 23~25까지는 무적의 용부터 로열 아스널, 그리고 아마 C구역이 나올 거고. 25~28? 까지는 에바의 등장부터 기승 단계에서 존나게 떡밥을 뿌린 생체 재건 설비 확보 작전이 주된 내용이 되겠지.

 한마디로 121일, 11편 막바지 장면과 이어지는 장면은 결단계가 된다. 아마 한참 안 나오겠지, 그 이후 시간대는. 물론 어떤 내용이 주가 될 지는 써둔 상태라. 쓸려면 쓸 수 있는데, 너무 급전개야. 거긴 아껴둘 거다.

 사실 몰라. 씨발. 뭔가 떡밥 정리 하다가 번뜩하고 떠오르는 게 있으면 그 파트 쓰고, 쓰다가 아 이거 이렇게 쓰면 노잼인데 싶어서 폐기하고. 몰라, 몰라. 사실 저거 다 쓸 자신도 없다. 저번 댓글에 여름까지 가자는 말이 있었는데, 씨발 진짜 이 속도면 여름까지 가겠네.

레오나 애끼기 더럽게 힘드네. 진짜. 레오나 시점도 써야 하고 매끄럽게 이어질려면 다른 지휘관들 시점도 써야하는데..씨발..40편 거뜬히 넘겠네. 죽겠다. 아.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