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년.


  한 단어에 담을 수 있는 의미가 이토록 함축적이라는 사실에, 한글의 위대함을 재차 깨달았다. 그렇다. 내 앞에 있는 이 여자는 미친년임이 분명하다. 불과 1시간 전까지만 해도 날 신나게 팼던 주제에 이젠 합장한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사죄하고 있다.


  “미안, 왓슨!”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들끓는 속을 진정시키고자 얼음이 담긴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봤지만 진정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냉수에 딸려온 얼음알갱이들을 어금니로 와그작와그작 씹으니 리앤이 이쪽의 눈치를 살펴왔다. 괜히 더 눈에 힘을 줬다. 그러자 헤헤, 하고 리앤이 멋쩍게 웃어왔다.


 “용서해주는 거야?”

 “퍽이나 그러겠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치자 입에 담겨있던 얼음 조각이 튀어나왔다.


 혼난 리앤은 언제나처럼 사근사근한 미소를 보내왔다. 뭐, 어때. 우리 사이에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데 전혀 공감할 수 없다. 메뉴판을 펼쳐 보이는 리앤에게 싸늘히 경고했다.


 “네 손버릇이 그렇게 안 좋을 줄 몰랐어.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내가 질색하는데.”

 “맞아, 왓슨 말이 맞아.”

 “상냥한 어투로 맞장구친다고 네가 한 잘못이 사라지진 않거든?”

 “그래서 내가 성의를 표현하고 있잖아.”


 한쪽 눈으로 윙크해 온 리앤이 메뉴판을 건넸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고급 고깃집이었다. 무한리필 같이 호주산 돼지고기를 파는 곳이 아니라 진짜 한우만을 취급하는 진짜 고깃집. 사죄할 겸 대접한다는 가해자의 말에 피해자인 나는 무턱대고 카페에서부터 따라왔다.


 할 수 없잖아. 리앤과는 좋은 정, 싫은 정이 생겨 인간관계에 법적인 선을 긋고 싶진 않았다. 실제로 좋은 친구기도 하고.


 그래도 남자로서 얻어맞은 게 쪽팔려 강한 척 메뉴판을 집었다. 와, 비싸다. 이걸 제 돈 주고 사 먹는 사람은 무조건 부자일 거야. 리앤이 돈이 많은 아이였던가? 이걸 감당할 수 있나?


 합의금 대신 얻어먹는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자꾸만 그녀의 통장을 걱정하게 된다. 괜히 양심에 찔려 비교적 싼 한우고기에 시선을 가져가자 리앤이 침음을 흘렸다.


 “내 지갑 걱정하지 않아도 돼. 먹고 싶은 거 시켜.”

 “뭐? 진짜?”

 “당연하지.”


 리앤이 어깨로 너스레 떨었다.


 “뭐든 시켜.”

 “그럼 갈비살로-”

 “특수 부위도 시켜, 왓슨. 제발.”

 “뭐라고?”


 곤혹스러워하는 리앤에게 큰 소리로 되물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토끼처럼 뜬 눈으로 당황했다.


 “트, 특수부위도 된다니까, 왓슨?”

 “천사인가...?”


 맞아서 흘린 눈물과 다른 감성의 눈물이 새어 나왔다. 취업 준비를 오래 한 탓에, 먹지 못했던 걸 먹을 수 있어 기쁘기도 했지만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 받았다. 왜 네가 취직을 못하는 거야. 어서 대기업에라도 취직해버려.


 쉼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가며 등심살을 추가하니 리앤이 메뉴판을 도로 가져갔다. 평생 먹어보지도 못한 특수 부위를 리앤이 주문했는데, 그녀의 돈으로 계산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부담스러운 가격대에 발이 덜덜 떨렸다.


 리앤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한우고기가 올려진 접시를 받아들었다. 고급스럽게 마감된 불판에 소기름으로 기름칠하자 새까만 불판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꼭 여름 밤하늘을 보는 듯했다.


 오랜만에 맡아 본 고기 냄새와 식감을 자극하는 고기 굽는 소리.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인다. 까만 밤하늘에 선홍빛 꽃이 떨어지자 은은한 연기와 단백질이 변성되는 현상이 향기롭게 어우러졌다.


 빨리 익는 갈비살을 집어 든 리앤이 웃는 표정으로 다 익은 고기를 건네왔다. 먼저 먹어. 턱이 얼얼한 것도 까먹고 냅다 집어먹었다. 소고기 특유의 진득한 기름기가 혓바닥 위에서 잔잔하게 스며들었다. 송곳니와 어금니로 짐승처럼 육질을 탐하니 맛의 농축액이 페스티발 퍼레이드 폭죽처럼 사방으로 팡팡 터졌다.


 걸신들린 사람처럼 고기를 먹는 나를 리앤이 턱을 괸 채로 바라봐왔다.


 “어때, 맛있어?”

 “응, 맛있어, 맛있어. 고마워!”

 “아까 때린 건 미안했어, 왓슨.”


 참나, 그게 뭐라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쩌면 고기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맛있어서 웃는 걸 수도 있다.


 “친구끼리 뭘. 서로 다투고 그럴 수도 있지.”

 “친구라...”


 리앤이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고기 굽는 손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거기서 리앤의 손에 멍이 든 걸 발견했다. 때리는 사람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거다. 세상 어딘가에 있을 건물주보다 눈앞에 있는 쩐주가 더 위대하다고 느낀 나는 리앤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고기 굽던 리앤이 깜짝 놀라 이상한 소리를 냈지만, 나는 진지하게 그녀의 손만 내려다봤다.


 “언제 다쳤어? 걱정되게.”

 “왓슨, 그건 내가 널 패느라...”

 “집게 줘. 이제 내가 구울게. 아까부터 한 입도 안 먹었잖아.”

 “...괜찮은데.”


 말은 그렇게 해도 집게를 집은 그녀의 손은 실타래처럼 부드럽게 풀렸다. 집게를 받아 고기를 구웠다. 맛깔나게 생긴 놈들을 그녀의 접시로 옮기며 나 또한 고기를 마구마구 집어 먹었다.


 오늘 처음으로 고기를 먹은 리앤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맛있네. 맛집 검색만 하고 와서 몰랐는데, 실제로 와서 먹으니 더 맛있다.”

 “그치? 맞지?”


 괜히 고기 구운 내가 더 뿌듯했다.


 “자, 자, 많이 먹어. 여기. 꽃등심.”

 “하나씩 먹자, 왓슨. 근데 목이 좀 마르네. 음료수 하나 시킬까?”

 “그래? 그럼 나는 콜라로.”

 “저기요, 사장님. 여기 소주 2병이랑 맥주 4병이요.”

 “술? 술 먹게? 너 여기서 집까지 멀다고 하지 않았어?”

 “취하면 택시 타고 가면 되지. 자, 자, 고기 타겠다.”

 “금보다 귀한 한우인데 타도 먹으면 돼. 티비에서 봤는데 탄 고기로 암걸리려면 배 터지도록 먹어도 힘들다다던데 봤어?”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많아. 그래도 유발할 수 있다는 취지의 경고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아, 술 왔다. 말아줄까?”

 “소맥? 나 말아 먹으면 금방 취해서 좀 그런데.”

 “뭐, 어때. 오늘 같은 날에. 자, 여기.”

 “? 술 색깔이 투명하네. 섞은 거 맞지?”

 “뭐야, 왓슨. 냄새만 맡고 취했어? 남자가 그 정돈 마셔야지.”

 “아니, 이건 아닌 거 같아. 소주만 탔잖아. 너 먼저 마셔봐.”

 “그래.”

 “와, 그걸 다 마시네.”

 “크하~! 그럼 이제 왓슨이 마실 차례네?”

 “야, 맥주도 좀 넣어. 야!”

 “마셔라! 마셔라!”

 “유치하게 왜 박수 치고 그래, 그만해. 마실게, 마실게. ...크하아!”

 “자, 아! 안주 먹어야지.”

 “그러지 마, 부끄러.”

 “나도 아~.”

 “못 봤어.”

 “아~!”

 “알았어. 먹여줄게.”

 

 /

 

 “그, 그러니까, 나, 난, 공부 되게, 여, 열심히 했는, 데...”

 “그래, 왓슨. 내가 알지. 공부 열심히 한 거, 내가 다 알아.”

 “그, 근데 합격이 안 되니까, 나, 자신이 없어서...”

 “울지마, 뚝. 널 몰라주는 회사가 잘못한 거야. 회사에서 인재를 몰라봐 주네.”

 “그, 그치? 내가 잘못한 거, 아니지?”

 “서로 안 맞아서 그런 걸 수도 있지. 뭐... 정 아니면 우리 회사 올래?”

 “우, 우리 회사?”

 “육체노동이 없다는 게 장점이긴 한데, 서류업무가 좀 힘들긴 해. 누가 내 옆에서 보좌해줬으면 하는데, 마땅한 사람 구하기가 힘드네.”

 “너, 너 취업 준비하려고, 공부하던 거 아니었어?”

 “아니? 나는 자기계발이 목적이라고 말했는데.”

 “그럼, 왜 스터디그룹에 들어왔냐?”

 “쓸만한 인재가 있으면 뽑아서 쓰려고 했지.”

 “애, 애들 농락한 게 미안하지도 않아?!”

 “그 인재가 너야, 왓슨. 내 밑에서 일해보지 않을래?”

 “사장님, 절 받으십시오! 어, 언제부터 추, 출근... 아, 혀 너무 꼬인다. 술 너무 많이 마신 거 같아... 머리 아프고 배도 부르고... 졸려...”

 “그래? 그럼 우리 잠시 쉬었다 갈까? 근처에 쉬기 좋은 장소를 내가 잘 알고 있는데.”

 “부, 부탁해, 리앤. 너무 졸려...”

 

 /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내 옆에 리앤이 발가벗은 채로 잠들었지? 나는 왜 발가벗었지? 여긴 대체 어디지? 이렇게 고급스러운 호텔에 체크인해 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인데.


 ...설마 나, 코 꿴 거야?


 당황스러운 나머지 실소를 흘렸더니 잠에서 깬 리앤이 날 올려다 봐왔다. 그 어느 때보다 달콤한 미소를 짓는 그녀가 내게 처음으로 건넨 한 마디는 전형적인 클리셰였다.


 “잘 잤어, 왓슨?”




3편은 필요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