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리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고 챈에 올라왔던 여러 소설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 든 생각들을 싸질러보는 거야.
우리가 가지는 경험, 기억, 추억 그리고 성격은 과연 나 혼자서 만들어지는 걸까? 아니면 내 주변에 가족들과 친구들, 여러 상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후자가 더 크지 않나 싶어.
그럼 바이오로이드들도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들도 자신이 의지할 만한 동료가 있고, 그들과 함께한 추억이 있고, 각자의 성격이 있고, 그러한 것들의 원인을 제공할 환경들도 있고 말이야.
또 죽는 거에 관해서 생각해봤어. 죽음은 어찌 보면 인간이 가지는 특권이라고 생각해. 우리는 살다가 죽잖아. 그게 누군가가 우리가 죽을 때가 되었는데 ‘야 너 아직 죽으면 안 돼! 죽지마!’ 이러거나 ‘야 왜 더 살라 그래? 이제 충분하잖아. 죽어!’처럼 누군가의 맘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즉, 내 삶에 내가 권리를 가지는 걸 극명하게 나타내는 게 죽음이 아닌가 해.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럼 자살하는 사람들은 뭐냐? 자살을 미화하는 거냐?’라고 지적하면 할 말은 없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 즉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몰린 사람에게 다른 선택지를 주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다가 죽을 기회를 주는 게, 그가 사람이기에 그의 선택을 존중한 게 아닐까?
그래서 몇몇 소설에서 사령관들이 바이오로이드들이 죽는 것에 민감한 것이 단순 책임감을 떠나 그네들을 인간으로 인식해서 그런 거겠지? 그럼 우리 바이오로이드들은 인간을 위해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반문한다면 뭐라고 반박할 수 있을까?
존 스칼지 의 노인과 전쟁이란 소설에 보면 왜 싸우냐? 라는 질문을 받은 주인공은 크게는 인간을 위해 그러나 그 속에는 내 전우와 소대, 부대를 위해, 그들이 나를 살려주었으니 나도 그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대답을 해 그 질문을 한 애는 일종의 기니피그로 온갖 개조가 이루어진 인조인간 특수부대이거든. 그러면서 개가 이렇게 대답을 해.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싸우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점이 저와 소위님을 한 인간으로 묶어주는군요.” 내가 정확히 기억해서 적은 건지 모르지만 이런 분위기였어.
Band of Brothers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할만하다고 생각해. 오늘 우리는 이 싸움을 통해 흘린 피로 하나 된 형제다. 비록 우리는 죽을지라도 후대의 사람들은 술집에서 여러 곳에서 우리의 승리와 무용담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이런 내용인 걸로 기억해.
스틸 라인의 브라우니들의 예를 들면서 그녀들이 싸우는 것은 인간을 위해서도 있지만, 그 옆의 자매들을 위해서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너희들을 지휘하는 것은 너희들이 나를 위해 싸워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죽음을 피하고 도피하라는 것은 아니다. 더욱 확실히 죽기 위해 개같이 죽을 상황을 피해 살아남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 죽어간 자매들을 기억하라. 우리가 죽을 수 있는 건 우리를 기억하고 이야기해줄 누군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먼저 간 자매들을 잊었는가? 아니라면 그녀가 우리의 추억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살아남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죽는다 해도 나는 나를 기억해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살아갈 것이기에 담담히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이다. 그러니 살아라. 그것이 먼저 간 자들에 대한 예의이지 않겠나?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말의 두서가 없는데 그냥 이런 느낌이 들어서 써 본 거야. 물론 우리 똑똑한 철남 사령관들은 아무리 내가 개떡같이 짖어도 찰떡처럼 알아듣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