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 부르셨나요? 착한 리리스가 왔어요."


어두운 방에 빛이 들어닥치고, 블랙 리리스가 들어왔다. 본래라면 은은한 밤꽃냄새와 야릇한 분위기가 풍겨야 할 비밀의 방은, 답답하고 어두운, 칙칙한 취조실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선글라스를 낀 사령관이 앉아 있었다.


"시간 내줘서 고마워. 인사는 생략하고 얘기하지."


"후후,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24시간도 내드릴 수 있답니다."


"말은 고맙지만 마음만 받겠어, 24시간이 전부 필요한 일은 아니거든."


리리스가 의자에 앉자 사령관은 시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건 그렇고 무슨 용무이신가요?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거나, 아니면 주인님께 달라붙는 스토커 처리인가요? 그거라면 자신 있는데... "


리리스는 시가의 독한 연기에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평온히 말을 건넸다. 심지어 그 말에서조차, 일말의 콜록거림이나 헐떡거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달라. 좀 더러운 일이지만. 알다시피 오르카에 인간은 나 하나 뿐이기에 쿠데타나 반란, 저항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하지만 만약 인간이 더 있다면? 펙스 쪽 뒷방 늙은이들부터 시작해서, 썩어빠진 생각을 가진 멸망 전 윗대가리들이 아직 살아있다면?"


"주인님, 이거 한 가지는 확실히 짚고 넘어갈게요. 멸망 이후로 살아계신 인간님은 주인님 빼고 완벽히 전멸했어요. 이건 장담할 수 있답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가능성을 대비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그 멸망 전 인간들이 아직 '명령권자' 인 바이오로이드들이지. 레모네이드 오메가처럼."


어느 정도 탄 시가가 재떨이에 문질러진다. 재들이 연기와 함께 시가에서 떨어져 나가자 그는 시가를 다시 입에 물었다.


"그럼 이번에 새로 합류한 알파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솔직히 저는 아직도 못 믿겠지만요."


"아, 누굴 죽이라거나 하는 건 아냐, 아직은."


"그런가요? 아쉬운데..."


내심 알파에 대한 가혹한 처우를 기대하던 리리스는 사령관의 대답에 약간 풀이 죽었다. 


"나도 네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어. 레모네이드 개체는 명령권자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했으니 경호대장인 네 입장에서는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잠재적인 위협이나 마찬가지겠지. 안 그래?"


시가를 한 모금 머금은 사령관은 연기를 도넛 모양으로 뿜어냈다. 그는 시가를 재떨이에 내려놓고, 선글라스를 약간 내려 눈을 드러내고, 리리스와 가까이 마주보고 말했다.


"본론만 말하지. 지금 이 시간부로 내 경호 및 오르카 내 위험요인에 대한 색출 및 심문에 필요한 모든 전권을 너한테 넘기겠다."


"그 말인 즉슨..."


리리스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것은 두려움이나 걱정이 아닌, 환희와 유열이었다.


"제 마음대로 누군가를 죽이거나 고문해도 된다는 건가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기겠지. 네 컴패니언 자매들이 위험인자라면? 적어도 네 소중한 가족들이니 함부로 하긴 어렵겠지?"


"제 자매들... 말인가요..."


"그래. 역시 빼두는 게 좋겠지? 선택권은 줄게. 네 자매들은 제외시켜 둘 테니까. 내 제안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줘야겠지."


리리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침묵.


사령관은 그녀가 못하겠다는 답변을 예상하고 다시 시가를 입으로 가져가려 할 때, 리리스가 팔을 잡아챘다.


"제 소중한 자매들이 그렇게 된다면... 만약 그냥 인간이었다면, 저는 그러지 못했을 거예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럼에도 잡은 팔에 들어간 힘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리리스가 눈물섞인 고개를 치켜들자, 아이러니하게도 눈은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지만, 얼굴은 그 누구보다 유열에 젖은,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한 얼굴에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고 있었다.


"역시 제겐 주인님 뿐인걸요!"


"아아, 주인님께 반항하는 것들을 모조리 없애버릴 생각을 하니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아요! 제 자매들마저 모조리 사령관님께 바칠 수 있다니, 정말로 큰 영광이예요! 그러니 제 자매들도, 사령관님께 위협이 되는 것들은 전부 죽여버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결국 그랬다. 살아가면서 얻은 삶의 의미 따윈, 본래 만들어진 의미 앞에선 무색했던 것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 의미에 속박당했기에,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그것에 묶여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이오로이드의 본질이었던 것이었다.


그는 감격에 벅차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목을, 턱을 상냥하게 두 손가락으로 받쳐주었다.


"마음에 들어."


그가 씨익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완전히 썩어 있었지만.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지. 블랙 리리스."





연재아님 단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