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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은 현실을 이길 수 없지만 소소한 현실에도 낭만이 끼어들 순 있다.

구체적으로는 지쳐서 깜빡 잠들었다 일어나보니 화장을 지워주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 준 배우자 같은 부분에서. 

부스스한 머리를 손빗으로 대충 가다듬으며 방을 나선 리제에게, 사령관은 커피잔을 든 채로 인사를 건네었다.


"일어났어?"


나뭇잎과 창으로 걸러진 햇빛이 비춰지는 모습이 참으로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그림이라 생각하며 뭔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결국 어제는 그냥 피로에 지쳐 잠든 것이 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사실혼과 다를 것 없는 관계였다지만 그래도 서약한 첫날 밤이었는데.


자신의 당황을 표정만으로 읽어낸 사내가 다시 미소만으로 괜찮다고 대답해주긴 했지만 부채감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도 없어서 내밀어지는 찻잔을 받아들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 멋진 곳이네요."

"그러네. 로크에게는 감사해야겠어."


앙헬한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제령으로 소금이라도 뿌리는 게 어떨까요.

시답잖은 이야기에 서로 맞장구를 쳐주는 것 만으로도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하던 리제는, 문득 사령관이 답지 않게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의문을 담은 눈짓을 보내자 짧은 헛기침을 섞은 후에야 대답이 돌아온다.


"그… 어제, 잠들기 전에 했던 이야기 말인데."

"……?"


피곤에 절어서 기억이 애매한데…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사령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리제의 머리는 추론을 통해 사령관이 말을 돌리기 전에 답을 찾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들어서 깊지는 않더라도 수시로 돌아보곤 하던 고민이었으니까.


"혹시, 아이 이야기라도 꺼냈나요?"

"…응."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또 입이 멋대로 나불거렸구나 생각하면서도, 리제의 내심은 여전히 평온했다.

바로 이야기를 꺼낼 생각은 없었지만,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서약까지 한 배우자를 앞에 두고 혼자 담아두겠다고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겠지.

입술만 축이던 찻잔을 내려놓고, 사령관에게 다가가 손끝만을 맞잡은 채 시선을 마주한다.


"전에, 평화로워지기 전까지는 가지고 싶지 않다고 했었죠."

"응."


그리고 자칫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자신의 의견에, 사내는 가타부타 하는 말도 없이 - 아니, 밤의 행동으로 따지면 좀 과하게 많았던 것도 같지만 - 수긍해주었다.

되새긴 기억에 작은 미소를 띄우며 리제는 말을 이었다.


"……무서웠어요. 많은 것들이."


아이를 가진다는 미지의 영역 자체가.

그것에 대해 과할 만큼 밀려오는 자신에 대한 기대가.

아무리 여유가 생겼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는 전시 상황인 현재의 환경이.

그리고 그것들조차 곁가지에 불가할 만큼―

사령관이 아이를 가지는 것은 평화가 찾아온 후의 일일 것이라는, '원작의 설정'이 두려웠다.

리오보로스의 유산에 섣불리 관여하러 들었으면 세이렌을 놓칠 수도 있었다는 아찔한 경험이 그 우려를 더욱 강하게 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고 생각해요."


생각해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이전부터 그랬던 것이다.

일기토 끝에 형제를 쓰러뜨리며 스스로를 구원한 로크보다도 전에.

자신이 이뤄낸 것들을 돌아보라는 말을 듣고 진실한 사랑에 눈을 뜬 소완보다도 전에.

여섯 지역을 거치며 그와 사랑에 빠지기도 전에.

자신이 등장한 시점에서 이미 이 이야기는 원작과 비슷한 흐름을 타고 있을지언정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그는 언제나 최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청혼을 한 보람이 있었던 걸까?"

"으응, 물론 기뻤지만 그것과는 별개예요."


이 '외부인'으로서의 시점 만큼은, 아무리 그라 해도 눈치챌 수 없겠지.

그러니 자신의 고백은 반쪽짜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좀 더 간단한 이야기."


그렇다면, 적어도 이 말에는 모든 진심을 담자.


"믿고 있으니까요."

"……비슷한 이야기는 훨씬 전부터 하지 않았어?"

"그 때와는 달라요.

 마지막 인간 님이 아니라, 오르카 호의 사령관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침략자는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와 땅을 뒤덮었으며, 영혼을 먹어치우는 악몽의 신이 우주와 심해를 버젓이 유영하고 있는 이 자그마한 세계는.

한 번 멸망했고, 다시 피어난 지금도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하기 그지없지만.


"당신이라는 사람을 믿고 있으니까.."


과거의 리제는 '원작'의 '주인공'인 그라면 이 모든 난관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 믿어왔다.

지금의 리제는 그가 이 모든 난관을 넘어설 수 있기에 '원작'의 '주인공'이 된 것이라고 믿는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것이었다.


*   *   *


"…아, 그렇지만 바이오로이드와 인간 사이의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려면 최고급 바이오로이드에 맞먹을 만큼 비싼 수술이 몇 번이고 필요하다니까, 지금 당장은 역시 무리일지도."


"뭐…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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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상태가 안 좋아셔 그 후의 허니문 야스신까지 쓰려고 했던 걸 못 쓰고 이 부분에서 끊게 되었스빈다

결과적으로 다음편까지도 Ex이빈다



다음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4119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