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의 경우

레오나의 경우



C-77 홍련. 대테러진압부대 '몽구스 팀'의 작전관.

대규모 전투 부대인 스틸라인이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와 비교하자면 그녀가 이끄는 부대는 규모가 작고, 그만큼 부대원간의 친밀감이 높다.

전투 규모는 작지만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 대 테러 작전인 만큼, 몽구스 팀의 팀원들은 각자 돌출적인 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몸처럼 움직이는 유대를 자랑한다. 그러나 그 반동으로 규율이나 명령 체계가 느슨해질 수 있기에, 홍련은 엄격하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칼같이 대응할 수 있게. 작은 손실조차 발생하지 않게.

그런 그녀의 위기 관리 능력은 오르카의 전투부대 지휘관 중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일 것이다.

...그럴 터였다.


"하아, 이를 어쩐담..."


사령관 주재 지휘관 회의가 끝난 후, 대회의실 옆 화장실.

홍련은 지금 그곳에 갇혀 있었다.


저번 주에도 마리와 레오나가 그랬듯, 이번 회의도 다른 지휘관들이 의견 차이로 인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둠브링어와 캐노니어가 자신들의 화력이 우위라는 식으로 싸움이 붙는가 싶더니, 스카이나이츠와 아머드메이든까지 얼떨결에 말려들어가면서 공군vs포병 구도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사령관은 새로운 방안을 찾기 위해서라면 격한 논쟁도 때로는 필요하다며 지켜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말리는 것은 당연히 다른 지휘관들의 몫이었다. 특히 홍련이 반쯤 토론의 사회자 역할까지 맡아가며 메이와 아스널을 최대한 자제시킨 덕분에, 다행히 인신공격이나 육두문자가 튀어나오는 감정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전투 능력에 못지 않게 협상 기술 또한 갖추고 있는 홍련이었기에 진정시킬 수 있었던, 어찌 보면 일촉즉발이었던 상황. 아무리 프로라고 해도 당시의 홍련 역시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난 후 그 반동으로 긴장이 한껏 풀어진 채 돌아가던 중, 잠시 화장실에 가볍게 들렀다가... 휴지가 없어서 나오지 못하는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나도 오늘 참 지쳤나 보네. 이런 것도 제대로 확인 못하다니."


물론 홍련이라고 해서 언제나 엄격, 냉정, 진지한 것은 아니다.

비번인 경우라면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팀원들과 스스럼없이 진짜 모녀처럼 어울릴 정도로, 그녀 역시 풀어질 때는 풀어질 줄 아는 바이오로이드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평소에도 주위에 세심하게 신경쓰는 자신이 이런 걸 놓쳤다는 것에 한숨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얼마나 창피하고 당황스럽더라도, 어떻게든 해결해야하는 상황인 것도 분명하긴 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홍련의 머리에 곧바로 몇가지 방안이 떠오른다.

근처의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기엔 누가 자주 지나갈만한 위치도 아니고, 그 경우 가장 조우 확률이 높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근처 사령관실에 있는 사령관일 것이다. 기각.

그렇다고 스타킹 등으로 어떻게든 처리하고 나올 정도로 다급한 상황은 아니다. 필요 이상으로 자존감을 깎아먹으면서 혼자 해결하고 싶지는 않으니 이것도 기각.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연락해서 불러내는 것 정도인데...


"그 애들이 얌전히 와줄까...?"


역시 가장 편하게 부를 수 있는 건 몽구스 팀의 아이들이라고, 홍련은 판단했다.

이런 일로 심부름을 시키는 것 때문에 자신의 위신이 깎일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고, 이런 사소한 일로 야단법석을 떠는 아이도 있으니 괜히 시끄러워지는 거 아닐까 들었지만...


"미호, 혹시 지금 바쁜가요?"

[응? 엄마? 무슨 일이에요?]


그나마 가장 상식적인 대응을 할 것으로 생각되는 팀원 중 1명에게 통신을 보내자, 곧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답이 돌아왔다.


"아, 혹시 식사중이었나요?"

[식사는 아니고, 그냥 애들이랑 모여서 군것질 좀요. 근데 왜요?]

[뭐야? 엄마야?]

[엄마? 무슨 일 있대?]


곧바로 미호 옆으로 옹기종기 모여드는 목소리가 통신모듈을 통해 들려왔다. 불가사리, 핀토, 스틸드라코까지.


[잠깐! 들러붙지 마! 나 아직 매니큐어 안말랐단 말이야!]

[아 그럼 엄마한테 직접 통신 연결해야겠다.]

[응? 미호한테 개인적으로 통신 연결한 거 아니야? 그래도 돼?]

[난 벌써 연결 했는데.]

[드라코 너 또!]


...타이밍을 잘못 잡은 걸까. 아무래도 다 같이 모여서 놀던 도중이었는지, 홍련의 통신모듈로 순식간의 몽구스 팀 전원의 통신이 연결되었다. 최대한 조용하고 은밀히 일을 해결하고 싶었던 홍련에게 핀토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세요, 엄마?]

"사실 지금 대회의실에, 아니 대회의실 옆에 있는 화장실에 있는데..."

[화장실? 아, 혹시 엄마 설마...]

[아, 혹시 휴지가 없어서 저 부른 거에요?]

[헉, 어떡해.]

[엌ㅋㅋㅋ 엄마가 휴지가 없어서 화장실에서 못나온뎈ㅋㅋㅋ]

[야 넌 이게 웃을 일이냐?]

[아이 씨, 왜 때려! 불가사리 너도 지금 웃음 터지려 그러잖아!]

[아니, 난 니가 웃으니까 그게 전염돼서... 푸훕!]

[작전관 님, 전 웃지 않았습니다.]


'낙엽만 굴러가도 웃음이 터진다는 사춘기'라는 말은 10대 수준으로 맞춰진 바이오로이드에게도 적용되는 것일까. 통신 건너편에선 웃음에 숨 넘어가는 소리, 등짝 후려치는 소리, 애써 정색하는 목소리까지 아주 난리가 났다.


"...어쨌든 누가 휴지 좀 갖다 줄래요?"

[내가 갈래요! 내가!]

[드라코 넌 절대 안돼! 넌 가면서 다 떠들고 다닐 게 분명하니까!]

[아 왜 나한테만 그래?]

[어, 엄마 급하신 거면, 내가 비행 장비라도 달고...]

[됐어. 내가 가고 있으니까 너넨 쉬고 있어.]

[뭐야? 미호 언제 나갔냐?]

[나 갔다오는 동안 떡볶이 다 먹으면 알지? 아, 추가로 엄마 것도 남겨둬!]

[오, 엄마도 떡볶이 파티 오는 거?]

"아뇨, 저는..."


자신의 의견을 빼놓고 갑작스레 굴러가는 이야기에 홍련은 반사적으로 거절하려고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업무가 좀 남아있긴 하지만 반드시 오늘 내로 끝내야할 저도로 급한 것도 아니니까. 계기가 좀 그렇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친목을 도모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좋아요. 그럼 휴지 좀 빨리 부탁 할게요, 우리 딸."

[네? ...네! 엄마!]

[헐 뭐야 나도 딸이라고 해줘요!]

[와 휴지 하나로 딸 소리 듣는 거 실화냐?]


여전히 왁자지껄한 통신을 들으며 홍련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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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을 당하는 바이오로이드가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기는 바이오로이드도 있어야 해... 그래야 우주의 균형이 맞을 것 아니냐...

사실 처음에는 뚱이랑 드라코가 화장실 문 박살내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레오나편이랑 스토리 겹쳐서 그만 뒀음

아무튼 쓰다보니 이전 것들보다 좀 길어진 홍련 편임. 2천자 정도로 짧은 게 컨셉인 시리즈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쓰고 나니 3천자 실화냐



어쩌다 부대 지휘관들이 나오고 있는데 딱히 부대별 컨셉 잡고 쓰는 건 아니라 아마 다음 편은 조금 의외인 캐릭터가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