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초목이 한층 더 싱그러워져 가는 무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저는 늘 그랬듯이 다른 자매들과 함께 요안나 아일랜드의 농장을 가꾸며 바쁘지만 보람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 계절엔 특히 포도가 맛있지요. 저와 자매들은 그것을 한창 수확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습니다. 슬슬 토마토도 수확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에서부터 생활관을 새로 신축하지 않으면 잠자리가 부족해질지도 모른 다는 것까지 여러 이야기가 오갔지만 그중 제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역시 주인님의 소식이었습니다

 

 아아, 멋지신 저희 주인님. 주인님에 대한 것이 화제에 오를 때면 저는 열심히 손을 움직이면서도 귀를 세우고 그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최근 초콜릿을 많이 드셔서 운동 중이시라 거나 여우 꼬리를 쓰다듬는 것에 푹 빠지셨다 거나 메이님과 서약은 하셨지만 잠자리는 아직이라는 등 사소한 것 하나라도 빠지지 않고 듣고 있다 보면 어느새 제 얼굴엔 배시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세상에서 저희 주인님만큼 멋지신 분은 없을 것입니다. 멸망 전부터 살아온 저지만 그 분만큼 상냥하신 인간님은 뵌 적이 없습니다. 웃으실 때 그 얼굴은 마치 환한 태양 같으시고 그 목소리는 감미로운 천사의 노랫소리와 같으신 분입니다. 전 그 분에 대한 것을 들었다는 것이, 조금이라도 그 분에 대한 것을 알았다는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그러고 보니 곧 오르카호가 올 시기이지 말임다.”

“그렇슴다. 이번 환영회도 기대되지 말임다.”

 

 여름 수확철이 마무리 지어갈 때쯤 그 수확물을 보급 받기 위해 정기적으로 오르카호는 요안나 아일랜드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열리는 환영회는 이 섬에선 얼마 없는 즐길 거리이기 때문에 수확을 도와주던 브라우니들이 들뜬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멀리서 나마 사령관님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한층 더 바삐 손을 움직였습니다.

 

“아쿠아, 빨리 일어나야지”

“으음…좀 더 잘래…”

“그럼, 환영회에 늦을 지도 모르는데?”

“아!”

 

그날은 어젯밤 환영회에 들뜬 나머지 늦게 잠들어 버린 아쿠아를 깨우고 아침 준비를 도와주며 바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아침 일찍 오르카호가 도착했고,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할 일은 전투를 원하지 않고 이곳으로 오는 것을 선택한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이곳에서의 생활을 소개하고 배정된 방으로 안내하는 일이었습니다. 섬 곳곳을 안내하고 숙소로 오니 벌써 해는 거의 다 저물어간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주인님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 분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만족스러웠던 하루라 생각했습니다.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몸이 피곤했건만 이상하게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어쩌면 주인님이 오셨다는 사실이 너무 설레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릅니다. 잠시 침대에서 뒤척이던 저는 일어나 아쿠아의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곤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곤 잠시 과수원 근처를 걷다가 너른 들판으로 가서 앉아 하늘을 보았습니다. 제가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언제나 하던 행동이었습니다. 늘 상 바라보는 밤하늘이지만 그래도 저는 볼 때마다 새로운 정취를 느끼곤 했습니다. 멸망 전엔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었고, 인간님들이 모두 사라진 이후에도 제가 본래 지키던 정원을 밤낮으로 보호하느라 마음 편히 하늘을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 별들이 마치 주인님만큼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한참 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또 다른 이가 잠이 오질 않아 길을 헤매다 여기까지 온 것일까 하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던 저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주인님이 제 눈 앞에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주인님을 너무나 생각한 나머지 환상이라도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였습니다.

 

“다프네구나. 나도 옆에 앉아도 될까?”

 

그러나 주인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전 곳 현실이라고 자각했습니다. 비록 구조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멀리서 밖에 못 들어봤지만 한 번이라도 들으면 잊지 못할 그 목소리를 헷갈릴 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주인님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얼굴을 붉힌 채 우왕좌왕할 뿐이었습니다. 그때가 밤이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아, 혹시 내가 방해했니? 가보는게 좋을까?”

“아! 아니요 주인님! 부…부디 제 여…옆에 앉아주세요!”

 

그런 제 상황을 모르는 주인님께서 방해한 것 같아 무안한 듯 돌아서시려고 하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이고 말았습니다. 주인님께선 조금 놀라신 듯하시면서도 곧 다정하게 웃으시며 제 곁에 앉으셨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주인님께서도 잠이 오시 질 않아 밤산책을 나서셨다가 우연히 제가 여기 앉아있는 걸 보시곤 말을 거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둘은 과수원에서 따온 포도를 같이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중간중간 혀가 꼬이거나 말실수를 했던 기분도 듭니다. 확실하게 기억 나는 것은 주인님과 같이 먹었던 그 포도는 제가 먹었던 그 어떤 과일보다도 달콤했단 것입니다.

 

“네…그리고 그건 꺄앗…! 주…주인님?!”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게 멍하니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어깨에 무언가 닿은 것 같아 바라보니 어느새 주인님께서 제가 기대어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저는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 주인님을 깨워보려 했지만 주무시고 계시는 그 얼굴을 보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곤 언제나 저희를 위해 노력하시느라 피곤하실 주인님께서 제 무릎을 베실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쳤습니다. 그리곤 동이 틀 때까지 주인님의 보드라운 머릿결을 때때로 쓰다듬으며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언제까지고 바라보았습니다.

 

다음날, 마치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은 주인님의 온기를 기억하며 오르카호가 다시 철충들과 싸우러 바다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마 공사다망하신 주인님께선 어젯밤 일 정돈 금방 잊으시겠지요.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저라도 영원히 기억하려고 합니다. 저 하늘의 어떤 별보다 아름다운 별을 제 품 속에서 쉬게 했던 그 날 밤의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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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의 별이 생각나서 써 본 소설


주인공은 수많은 다프네 모델 중 한 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