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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 안에서 화원이라니 조금 안 어울릴만 하다. 특히 그 화원이 엄청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면 더더욱. 바이오로이드의 숙소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넓은 화원은 페어리 시리즈의 바이오로이드가 관리하고 있다. 그저 관상용 화원만 있는 곳이 아닌 식량으로 쓸 열매와 채소들을 수확하는 곳이기도 하며 카페에서 차를 우릴 때 쓸 잎들을 얻어내고, 신선한 커피콩 역시 나오는 곳이다. 이 넓은 화원에 물을 주고 바람을 쐬게 하는 바이오로이드는 단 한 명이다. 오베로니아 레아.


지금처럼 코나는 마이크로봇으로 비구름을 만들어 화원의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있는 레아를 보았다. 닥터는 식물이 성장할 수 있는 조건 중 태양빛을 위해 화원에 태양빛을 공급해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식물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생그럽게 자라고 있었다. 레아가 마이크로봇을 조작하면서 물을 뿌리고, 아쿠아도 그런 큰 언니를 도와 물을 뿌려주고, 드리아드는 가지를 쳐주면서 식물이 더 아름답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고 리제는 잠수함 안에서도 꼬이는 병충해들을 방지하고 있었다. 화원이 커지다 보니 페어리 시리즈들이 하는 일들이 덩달아 많아졌고 그녀들이 오르카 호 복도에 보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 될 정도가 되었다.


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서 바구니에 담고 있는 다프네는 누군가 왔다는 것을 알아채고 뒤를 돌아보았다. 코나가 있는 것을 보자 다프네는 공중에서 내려왔다. 땀을 스윽 닦으며 다프네가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주인님. 요정 화원에."


다프네의 인사를 받아주면서


"안녕하세요, 다프네 씨."


그녀도 다프네에게 인사했다. 코나의 인사에 살짝 치마를 올리면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아준 다프네가 물었다.


"화원을 보러 오셨나요? 아직 레아 언니의 물 뿌리기가 다 끝나지 않아서..."


"레아를 보러 왔는데...."


"언니를요? 불러올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다프네가 레아를 부르려고 다시 날아오르려고 할 때 코나는 다프네의 옷깃을 잡아 그녀를 말렸다.


"아, 그게....그....본인에게 직접 물어보기엔 살짝 그래서...."


"무슨 용무시길래...?"


코나는 마침 다프네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녀에게 묻기로 하였다.


"혹시 최근에 레아가 좀 안색이 안 좋거나 한 적이 있었나요?"


"언니가요? 음..."


다프네는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리제를 주로 케어하긴 하지만 아쿠아, 드리아드, 레아와도 사이가 두루 좋은 그녀이기에 코나는 레아에게 직접 묻는 거 보단 다프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다프네는 코나의 질문에 최근 레아가 이상했던 적이 있었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기억으론 그런 적은 없었다. 다프네는 느낀대로 대답해주었다.


"아뇨. 레아 언니는 항상 똑같으셔서."


"정말 조금의 변화도 없었나요?"


"네...제가 알기로는요. 레아 언니는 저희들에게 약한 모습을 안 보이려고 하니..."


동생들에게 모범이 되는 큰 언니이자 항상 동생들의 버팀목, 안식처가 되고자 하는 그녀이기 때문에 레아는 자매들은 물론 다른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과거 그가 동생들을 연달아 다치게 했다는 것을 뺀다면 레아는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코나는 다프네도 모른다고 하니 결국 레아에게 직접 물어봐야하나 하고 고민했지만


"어? 주인님?"


뒤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리자 당장 뒤를 돌아보면서


"이게 누구야?"


아쿠아가 달려오자 그녀를 껴안아주고 들어올려주었다.


"아쿠아잖아?"


"안녕, 주인님? 아쿠아가 왔어!"


오르카에서 제일 먼저 친해진 아쿠아이니 코나와 아쿠아는 누가 봐도 자매일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자신만의 작은 화원을 열심히 가꾸면서도 이 요정 화원 관리를 소홀히 하지도 않는 아쿠아는 코나는 물론 다른 누가 보기에도 기특했다. 자신의 화원을 항상 코나에게 자랑하면서도 이젠 언니들에게 숨기지 않고 보여주니 아쿠아는 이전까지 있었던 언니들에게 가진 열등감이 꽤 사라졌다. 너무 바빠져서 또래 아이들과 놀 시간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아쿠아는 즐거웠다. 다프네는 물에 열매를 깨끗하게 씻어서 아쿠아와 코나에게 건냈고 둘은 동시, 똑같은 타이밍에 열매를 가득 베어물었다.


열매의 넘치는 과즙과 달콤함에 코나와 아쿠아는 매우 행복해했다.


"맛있다! 맛있어 언니!"


특히 아쿠아가 아주 좋아했다. 다프네는 우물우물거리는 아쿠아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인지 코나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 열매로 파이를 만들면 맛있을 것 같네..."


아쿠아가 저리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이번 열매는 아주 잘 나온 거라 생각된 다프네는 이 열매로 파이, 주스, 잼 등을 만들 생각을 하니 또 일거리가 생겨서 바빠진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보람차다는 느낌이 들었다. 코나와 아쿠아가 그늘 아래에 앉아서 과일을 즐기고 있을 때 드리아드가 날아왔다.


"다프네 언니!"


그녀도 코나를 보자 꾸벅 인사했고 코나는 과일을 베어물려다가 그녀를 보면서 손으로 인사해주었다. 다프네는 드리아드가 이렇게 급하게 온 이유를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니? 그리 급하게..."


"갑자기 진드기들이 많아졌어요. 리제 언니가 힘쓰고 있는데 혼자서는...."


왠지 저 멀리서 햇츙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걸 다프네와 코나가 느꼈다. 리제는 실제로 정원에 드글거리는 벌레들을 구제하는데에 아주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드리아드가 보기엔 혼자서 하기엔 진드기들이 너무 많았다. 다프네는 코나에게 서둘러 가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드리아드와 함께 현장으로 다급히 향했다. 아쿠아와 코나만 남았다.


"주인님, 여긴 무슨 일이야? 아쿠아를 보러 온 거야?"


"으음, 아쿠아도 보러 왔고 다프네도 보러 왔고 리제도 보러 왔고 레아도 보러 왔고 드리아드도 보러 왔고, 다 보러 왔지."


"그렇구나! 요정 화원에 어서와! 여기에 아쿠아가 열심히 기른 꽃들이 있어! 보여줄까? 응? 응?"


실컷 들뜬 아쿠아를 귀엽게 쓰다듬으면서 코나는 아쿠아를 따라 아쿠아가 가꾼 꽃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코나는 저번에 대지에 있었을 때 아쿠아가 몰래 가꾼 작은 화원이 생각났다. 아쿠아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관리했던 그 작은 화원은 지금도 코나가 기억할 정도로 좋은 곳이었다. 고블린 침공으로 그 작은 화원이 전부 짓뭉게졌지만 아쿠아는 슬퍼하거나 풀 죽지 않고 새로운 화원을 만들어냈다. 오르카 호 MK2의 안에서 만든 아쿠아의 화원은 바로 여기 요정 화원에 있었다. 코나는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는데 아쿠아의 두번째 화원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본 적이 없었구나 했다. 워낙 일이 바빠서 방문할 시간이 없던 것이었다. 아쿠아가 이번에는 어떤 화원을 가꿨을지 궁금한 그녀는 아쿠아의 안내에 따라 걸었다.


아쿠아는 노란색과 하얀색, 분홍색 꽃들이 가득한 큰 화원을 보여주면서 팔을 활짝 벌렸다.


"자! 여기가 아쿠아의 화원이야!"


아쿠아는 작은 화원이 뭉게졌을 때 크게 슬퍼했지만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아쿠아 자신만의 화원을 가꿔보았다. 이전에는 언니들에게 꼭꼭 숨겼지만 이번에는 언니들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화원을 가꿨다. 단, 아쿠아는 언니들의 말만 들었고 언니들이 직접 도와주는 것을 거부하면서 가꿔보았다. 아쿠아 스스로 가꾸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화원이 탄생했고 모든 언니들이 아쿠아의 화원을 칭찬해주었다. 특히 아쿠아가 가장 동경하고 있던 레아도 아쿠아의 화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자 아쿠아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면서 정말 잘 했다고, 수고했다고 칭찬해주었다. 심지어 그 리제마저도 아쿠아의 화원 만큼은 해충이 꼬이지 않게 하기 위해 무척 열심히 구제 중이다.


"와아....이뻐라...."


"어때? 대단하지!"


아쿠아의 머리를 아주 빠르게 쓰다듬는 것으로 답하자 아쿠아는 베시시 웃었다. 코나는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동생으로 두고 있는 페어리 시리즈의 바이오로이드가 솔직히 부러웠다. 아쿠아가 언니들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혼자' 가꾼 이 화원은 이전의 그 화원보다 몇 십배는 더 컸고 더 향기로웠다. 코나는 아쿠아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정말 잘 했어, 아쿠아. 너무 훌륭한 화원이야."


그때, 코나는 아쿠아의 눈에 아주 조금 돋아난 혈관을 보았다. 아쿠아는 영문도 모른 체 코나에게 눈이 벌려졌고


"으응...왜 그래...?"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코나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코나는 아쿠아의 눈에 손을 때면서 물었다.


"졸려?"


"응? 어떻게 알았어?"


아쿠아는 졸립지만 꾹 참으면서 언니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다른 언니들처럼 밤을 새본 적이 없고, 잠을 설친 적도 없는 아쿠아는 항상 편하게 잠들고 일어난다. 그래서 다른 언니보다 조금 게으르다고 할 수 있었다. 정원사의 아침은 빠르지만 아쿠아는 아직 몸이 어려 그러지 못 한 것일 뿐이지만 말이다. 코나는 아쿠아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물었다.


"나쁜 꿈이라도 꿨니? 아님 잠자리가 맘에 안 들었니?"


"어? 으음....비, 비밀이야!"


비밀이라고 말하면서 말을 하지 않으려는 아쿠아의 태도가 뭔가 수상해서 코나는 아쿠아의 말을 자연스레 유도하고자 했다. 근처 밴치에 앉아 아쿠아를 옆에 앉히고 코나가 말했다.


"나랑 아쿠아는 친구잖아, 그치? 친구한테도 비밀인 거야?"


"으, 으음...하지만 레아 언니가 비밀로 하랬는데...."


"그럼 나한테만 알려줄래?"


아직 어린아이니까 정에 호소하는 것에 약하니까 코나는 아쿠아와 자신 간의 친분과 우정을 말하면서 넌지시 유도했다. 아쿠아는 자신도 모르게 레아와의 비밀이라는 것을 말하였고 코나는 레아와 아쿠아 사이의 비밀이 무엇인지 빠르게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아쿠아가 말해줄지도 모르니까 자신도 비밀로 하겠으니 자신에게만 알려달라고 요청하자 아쿠아는


"음...주인님은 내 친구니까 괜찮을 거야. 응, 말해줄게."


그녀는 자신의 친구니까 알려줘도 된다 생각해서 승낙했다. 물론


"아, 하지만 꼭 비밀로 해야 돼? 약속이야?"


꼭 비밀로 하라는 당부 역시 잊지 않았다. 코나는 아쿠아와 손가락 깍지를 끼고 약속했고 아쿠아는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레아 언니, 어제 엄청 무서운 꿈을 꿨었어."


"레아가?"


"응. 레아 언니가 나한테 와서 같이 자달라고 해서 아쿠아랑 같이 잤어. 레아 언니랑 같이 자는 거 너무 오랜만이라 아쿠아는 좋았거든? 근데...레아 언니가 계속 울었어."


"왜 울었니?"


레아는 겉도 속도 강한 아이라 우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라고 지금까지 생각했지만 그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막내와 함께 자면서 울었다는 말에 조금 놀랐다. 아쿠아는 레아가 왜 울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레아 언니가 자면서 잠꼬대를 했었어. 울면서, 주인님을 불렀어."


"나를?"


"주인님 말고 옛날 주인님."


코나는 그 말에 몸을 살짝 움찔했다. 그렇다면 레아가 아쿠아랑 같이 자고자 했던 것은 그에 대한 악몽을 꾸었던 것이라고 유추해낼 수 있었다. 아쿠아가 졸린 거는 레아의 잠꼬대에 잠을 못 잔 것이다.


"레아 언니는 옛날 주인님이 보고 싶은가봐..."


아쿠아가 다시 화원을 가꿀 때 가장 조언을 많이 구했던 레아였으니 아쿠아는 큰 언니를 무척 걱정하였다. 아쿠아의 표정과 목소리가 슬퍼지자 코나는 조심스레 아쿠아의 동태를 살피면서 물었다.


"...아쿠아는?"


왜 이런 질문을 한 거지? 하면서 코나가 생각했다. 이 오르카 호에서 그를 그리워하지 않는 아이가 어딨다고? 그의 축출에 반대했던 찬성했던 중립이었던 간에 모든 바이오로이드가 그를 그리워한다. 이걸 잘 알고 있지만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선 코나는 여전히 몰랐다.


아쿠아는 고개를 저은 후 말했다.


"아쿠아도 옛날 주인님이 보고 싶어. 그치만, 옛날 주인님은 돌아오지 못 할 거야. 아쿠아도 잘 알고 있어. 죽는다는 거 말야."


"...."


코나는 입술을 입 속으로 말리면서 씹었다. 갑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감이 증폭하기 시작했다. 이런 어린아이에게 죽음이라는 것을 뭔지 알려준 과거의 자신이, 한때 자신이었던 코나가 무척이나 미웠다. 아쿠아는 고개를 들어 힘들어하는 코나의 허벅지에 머리를 눕혔다. 코나와 아쿠아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래도 아쿠아는 힘낼 거야. 옛날 주인님이 하늘나라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울지 않을 거야. 그니까 주인님도 울지마. 옛날 주인님도 주인님 안 미워할 거야."


"....만약, 미워한다면?"


"그럼 아쿠아가 혼내줄게!"


싱긋 웃는 아쿠아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훌쩍거리는 시작하자 아쿠아는 손수건으로 코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코나는 이렇게 울면서도 모르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혐오감을 항상 가지고 있다. 한때 자신이었던 괴물은 물론이고 감히 그런 괴물과 자신은 별개의 인물이라고 생각해버린 자신에게 가진 혐오감이다. 그녀의 마음은 황폐해졌고 아무리 미움받는다 해도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일까? 황폐해진 마음이 더 황폐해지고 갈라질 뿐이다. 그녀는 영원히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아쿠아가 자신을 이렇게 위로해주니 코나는 그만 울음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그 후 코나는 레아가 요정 화원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레아는 숨을 내쉬며 힘든 오늘을 마무리하기 위해 몸을 닦으려고 했다. 그 때, 코나를 보자 레아는 코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좋은 오후네요, 주인님."


코나는 마음이 다시 깨지는 것 같았다. 코나는 말하고 싶었다. 나 때문에 울었으면서, 내가 매튜를 죽여서 너에게 큰 상처를 줬는데도 왜 나한테 그렇게 웃어줄 수 있는 거야? 하지만 그녀는 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레아가 눈치채지도 못 할 속도로 달려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코나는 울음 때문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레아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주, 주인님?"


레아는 왜 코나가 자신을 끌어안고 사과하는지 영문을 몰랐다. 코나는 레아가 고통스럽지 않을 힘으로 그녀를 끌어안기만 했다. 레아는 손을 허둥지둥거렸지만 곧 코나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무엇 때문에 저에게 사과하시는건지 모르겠지만....힘드신 일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정말 미안해요..."


"괜찮아요."


코나는 레아의 품이 너무나 편안했다. 이렇게 편한 품을 가진 사람에게 큰 상처를 준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레아에게 사과하고 싶었지만 코나는 방법을 몰랐다. 이렇게 포옹하고 사과하는 거는 결코 사과가 아니다. 코나는 레아에게 사과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봤다. 이렇게 자신을 부드럽게 맞아주는 사람에게 보답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레아를 비롯한 모두가 그녀를 용서했음에도 코나는 아직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다.


네오딤, 아우로라, 티아멧, 레이시, 팬텀, 스카디, 에키드나, 레아가 악몽을 꾼다. 이는 자신의 탓이고 자신은 여기에 보상을 해야만 한다. 그 때, 코나는 머리 속에서 무언가가 번뜩이는 것이 떠올랐고 레아를 끌어안은 것을 그만두고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만일, 이게...그저 그리움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면...."


"네?"


"어쩌면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어. 모두가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것을 꾸는 것은 우연이라기엔 너무 작위적이야...."


"네? 무슨...말씀이세요?"


영문모를 소리만 하는 코나가 걱정스러워진 레아가 무슨 말이냐고 묻자마자 코나는 레아의 어깨를 잡으면서 웃으며 말했다.


"레아 씨!"


"ㄴ, 네?"


"제가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릴게요! 어쩌면 아직...!"


그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뱉기도 전에 코나는 서둘러 어딘가로 뛰어갔다. 레아는 그런 코나를 붙잡기도 전에 눈에서 놓쳐버렸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가 왜 갑자기 저러는 건지 그녀로선 감도 안 왔다.



☆ ★ ☆ ★



눈을 감고, 자는 것처럼 가만히 있는 아르망의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아르망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 문을 연 존재가 누군지 알고,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방 문을 연 것은 코나였다.


"아르망 씨!"


"좋은 밤입니다, 폐하."


"노크 안 하고 들어온 것은 죄송해요. 하지만 정말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요!"


아르망은 미래를 알 수 있지만 누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 한다. 그녀는 예언자이지, 독심술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르망이 고개를 갸웃하며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코나가 조심스럽게, 조용히 말하였다.


"어쩌면....아직 그는 살아있을 수도 있어요."


"...."


눈이 번쩍 뜨여진 아르망은 코나를 올려다보았다. 크리스마스 축제를 앞 둔 아이처럼 들뜬 표정과 자신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는 눈동자. 아르망은 딱히 독심술사가 아니어도 코나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폐하. 제 능력은 그런 데에 쓸 수 없습니다."


"부탁이에요. 시도라도 해주세요."


"여러 번 해보았기에 아는 것이랍니다."


아르망은 일어서서 소파에 앉았고 소파의 옆을 툭 툭 치면서 코나에게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코나는 앉지 않았다.


"저 역시, 선제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항상 제 능력을 써보았습니다. 언젠가 그 분께서 우리의 품으로 돌아오시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품었지요. 하지만, 제 예언은 차갑게 말해주었습니다. 그 분께서 귀환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부디 다시 한 번만 더 해주세요."


"폐하..."


"그는 살아있어요!"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코나를 보면서 아르망은 뭔가 울컥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르망은 여전히 미래를 예지하는 중이고 마침 코나가 그런 생각을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예언이 나타났다. 아르망은 이 예언대로 움직였다.


"나중에 닥터 양에게 찾아가실 생각이실테죠. 닥터 양에게, 제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선제께서 여전히 생존해계신다 말씀하실 생각이실테죠. 닥터 양이 부정하셔도 폐하는 결코 의지를 꺾지 않을 것일 겁니다. 하지만 폐하, 그리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분이 돌아가신 것은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오르카 호의 모든 분들이 그 상처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계십니다. 모든 분들이 가지신 상처를 다시 건드릴 생각이십니까?"


"그 상처는 전부 저 때문에 받은 상처에요!"


코나 역시 울컥하면서 외쳤다. 아르망은 눈을 다시 슬며시 떴다가 다시 감았다. 코나는 아르망에게 다가가면서 말하였다.


"저 때문에 그 분이 죽었고, 그의 죽음으로 모두가 상처를 입었죠. 그 상처는 전부 저 때문에 생겨난 상처에요. 책임은 전부 저한테 있다구요. 저는 그가 살아있는 것을 입증하고 그를 다시 여기로 데려올 의무가 있어요. 그래서 여기에 온 거라구요!"


"왜 선제를 찾으려고 하시죠? 죄책감 때문인가요? 아니면....그렇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나요?"


그 말에 코나의 입이 닫혔다. 그녀의 말을 비수로 찌르는 말이겠지만, 비록 그럴지라도 아르망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거짓 구원에 목이 메어 그릇된 일을 하시려고 하시는군요. 모두의 신뢰와 사랑을 잃을 겁니다. 왜 그런 허상된 것에 모든 것을 걸려고 하시는지요? 폐하는 이미 구원받으셨고 이미 용서받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자신이 구원받지 못 했다는 허상된 마음을 품고 거짓 구원에 매달리려고 하시다니...."


아르망의 예언대로라면 코나는 이제 왜 그가 살아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 말할 것이다. 코나의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코나는 레아의 포옹을 떠올렸다. 자신을 향해 괜찮다고, 의지해달라는 그 말. 그녀에게 있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말이었지만 동시에 그러한 일을 겪게 했음에도 자신에게 품을 허락해주는 레아와 그러한 일과 상처를 겪게 하였음에도 자신을 사령관, 주인님이라 불러주는 모두. 코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목으로 눈물을 훔치고 말했다.


"저 때문에 그런 상처를 받으신 모든 분들이....그런 일을 겪게 만든 장본인인 저에게....주인님이라 불러주고, 사령관님이라 불러주고, 권속이라 불러주고....맛있는 것도 주고, 시원한 것도 주고! 저 같은 죄인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는 모두에게 아직 제대로 된 사과도 못 했어요."


"선제를 찾는 것이 속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속죄가 아니에요. 상처를 치료하는 일이죠. 아르망 씨도, 레아 씨도, 모두가 가진 상처를 치료하는 일이에요. 제가 그어버린 상처니까 제가 치료할 수 있게 해주세요."


코나의 목소리엔 결의가 담겨있었다. 아르망은 고개를 저으면서 코나의 눈이 서서히 찡그려지게 하고, 눈썹이 슬프게 내려가지게 만들었다.


"...폐하가 남긴 상처가 아닙니다."


"제가 남긴 상처가 맞아요. 제가 치료할 수 있게 해주세요."


"선제께서 돌아가신 일은 폐하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저를 보세요, 폐하. 정확한 미래예지가 가능하게 설계된 저도 그 분이 축출되고 돌아가시는 미래를 예지하지 못 했습니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모두가 서로에게 남긴 상처인 겁니다. 폐하만의 과오가 아니에요."


"...아니요. 여러분들은 무죄에요."


아르망은 그 말에 눈을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르망은 그녀의 목소리로부터 무언가를 느꼈다. 이 감각은 기억을 잃기 전, 인격을 잃기 전 코나를 볼 때마다 느껴졌던 감각이었다. 보기만 해도 모독적이고 끔찍한 악마가 눈 앞에 있는 감각. 하지만 지금의 코나는 그러한 악마가 아니었다. 아르망은 코나의 목소리에서 느꼈다. 과거의 그녀의 광기가 서려있다는 걸. 코나는 광기 섞인 웃음을 보이면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는 살아있고, 제가 데리고 올 거에요. 그가 돌아온다면....다시 저를 친구로 받아주세요. 아르망 씨는 시대극에 많이 출현했다 하셨죠? 그렇다면 저는 속죄를 향해 달려가는 죄인이겠군요. 그래요, 죄인이요!"


"폐하는 죄인이 아닙니다. 제발 눈을 뜨세요."


"전 죄인이에요.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선 저에게 내려진 소명을 완수해야만 해요. 아르망 씨, 부디 예지해주세요. 전 닥터에게 가볼게요."


아르망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중대한 심각성을 느끼고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해주려고 했지만 코나는 이미 가고 없었다. 아르망은 그녀가 사라진 것을 알자 바로 마리에게 연락을 걸었다.



☆ ★ ☆ ★



컴퓨터로 어느 헬맷의 디자인을 정하고 있는 닥터가 집중하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닥터가 화들짝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갑자기 확 들어온 사람이 코나라는 것을 알자마자 닥터는 놀란 마음을 쓸어넘겼다.


"언니였어? 난 또...."


"닥터, 바빠?"


"아니, 전혀."


"잘 됐네."


코나가 닥터에게 접근했고 닥터는 왠지 눈 앞의 코나가 평소의 그녀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 물었다.


"괜....찮지, 언니?"


"응. 너무 괜찮지. 뭘 만들고 있는 거야?"


평소대로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오는 코나이기에 닥터는 잠시 안심했다. 닥터는 곧바로 컴퓨터로 그녀에게 무언가를 디자인하는지 보여주었다.


"아직 디자인 단계야. 언니한테 줄 택티컬 헬맷을 만들려고."


"나한테?"


"이제 전장에 참가할 수 있잖아? 맨 머리랑 맨 눈으로 나가면 큰일나. 언니를 위한 특별 맞춤제작이야."


"와아! 성능은?"


"언니의 사격을 보조할 바이저도 있고, 헬맷 자체의 내구도도 헤비 스카우트의 기관포의 전탄을 막아줄 정도야. 통신을 위한 통신장치도 설치되어있고 유독성 가스를 비롯한 생화학 공격을 막아줄 방독면 기능은 물론이고 언니의 몸이 받은 데미지를 수치화하는 기능도 있어."


"헬맷만 만드는 거야?"


"당연히 방호복도 만들어야지. 일단 헬맷 먼저 만들고 말야."


순간 느껴졌던 불안감이 괜한 것이었다, 라고 생각한 닥터에게 코나가 한 가지 말을 건냈다.


"닥터, 꿈 말이야."


"꿈? 왠 꿈?"


"닥터가 보기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한 사람이 나타나는 꿈을 꾸는 건 어떻게 생각해?"


닥터는 갑작스러운 질문을 하는 코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묻기보다 일단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소견을 말해주었다.


"정말로, 아주 극악의 확률로 그럴 가능성은 있어. 불가능한 건 아니야."


"그런데, 그 꿈을...좀 개조된 사람들이 꾼다면? 다른 사람들은 안 꾸는데 개조된 전적이 있는 사람들만 꾸는 거. 그건 어떻게 생각해?"


"...무슨 일이야, 언니?"


결국 무슨 일인지 물어보는 닥터의 질문에 코나는 아르망에게 했던 것처럼 말하였다.


"어쩌면 전 사령관이 아직 살아있을 수 있어서."


닥터는 그 말에 고글을 벗어서 책상 위로 휙 던지고 미간을 잡으면서 골치 아픈 것을 그대로 드러냈다. 방금 말은 부디 자신이 잘 못 들은 말이길 빌었다. 하지만 닥터는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아직 그가 살아있을 수 있다는 말이 헛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알았다.


"....무슨 근거로?"


일단 왜 그리 생각하는지 알아야 하니 닥터는 근거를 물었고 코나는 닥터의 지능을 알고 있으니 설명없이 바로 근거를 말했다.


"티아멧, 레이시, 네오딤을 비롯한 개조된 전적이 있는 아이들이 모두 같은 꿈을 꿔. 자세한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공통점이 있어. 그에 대한 꿈이라는 거지. 나도 그저 그리움 때문이라고 생각해봤어. 하지만 그렇지 않아보여. 만약 그리움 때문에 꾸게 되는 꿈이라면 컴패니언 아이들은 그런 꿈을 꾼 적이 없어. 생체개조된 아이들만 그에 대한 꿈을 꾸고 있어. 그리고...."


"그리고?"


"레이시의 꿈이 특히 기묘해. 레이시가 꾼 꿈을 그대로 표현하자면....어떤 철갑을 두른 병사들을 옆에 두고, 엄청난 숫자의 AGS와 바이오로이드를 거느리고 있었다 했어. 그 때....그의 뇌파가 아주 이상했다고 했지. 이건 분명 ㅁ"


"거기까지."


닥터가 그녀의 말을 가로채서 강제로 중단했다. 코나는 닥터의 반응을 살폈다. 닥터는 아까 미간을 잡았지만 이번엔 손바닥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문질렀다. 문지르면서 한숨같은 것을 푸욱 내쉬는 것은 물론,


"기분탓인 줄 알았는데...."


아까 그녀에게서 느껴졌던 이상함을 기분탓으로 치부한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 중얼거렸다. 코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닥터의 손을 잡았다.


"아니야, 닥터. 날 믿어줘. 아르망 씨한테도 갔다 왔는데 아르망 씨도 믿어주지 않았어."


"그걸 아르망 언니한테 말한 거야? 언니, 아르망 언니라면 오히려 나보다 더 정확할지도 몰라."


"이해가 안 돼. 닥터, 넌 아주 논리적이잖아?"


"맞아. 난 아주 논리적이야. 그 어떤 현상도 난 현존하는 모든 법칙을 따라 설명할 수 있어. 아르망 언니의 미래예지는 여러 가능성을 포함하는 거니까 믿을 수 있고. 하지만 방금 언니가 말한 건? 아주 비논리적이었어."


아르망과는 달리 닥터는 코나에게 큰 실망감을 가지고 표정까지 구겼다. 닥터는 대충 아르망이 그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아르망은 그녀의 기분을 배려하기 위해서 말을 억지로 하지 않은 것일 뿐이었고 닥터는 코나를 신랄하게 비판하기 위해서 말을 필터링 없이 그대로 내뱉었다.


"언니가 평소에 느끼는 콤플렉스를 생각해보자면 티아멧 언니나 레이시 언니 같이 개조받은 바이오로이드들이 오빠에 대한 꿈을 꾸고 거기에 괴로워하는 모든 원인이 바로 자기자신 때문이다, 고 생각하겠지. 안 그래?"


"....내 탓이 맞잖니."


"정말로 1부터 100까지 모두 언니 잘못이라면? 맞아. 그건 언니 탓이야. 그런데 언니가 50, 우리가 50이야. 쌍방과실이라고. 언니만 잘못한 게 아니라 우리도 잘못했어. 이 두 가지가 합쳐서 나타난 결과가....오빠의 죽음이라는 최악의 결론이었을 뿐이지."


"아니야. 닥터. 난 너희들이 아무런 죄가 없다고 믿어."


아까 들은 말도 황당했지만 지금 그녀가 뱉은 말이 가장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닥터는 아까 코나가 말했듯 아주 논리적이고 그가 살아있는 근거가 꿈이라는 아주 대단한 근거를 가진 코나의 의견과는 달리 왜 이게 그녀의 탓이 아님을 설명할 수 있었다.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려서 오빠를 몰아낸 언니들도 나빠. 거기서 자신도 더러워지기 싫어서 중립을 지킨 언니들도 나빠. 그리고 오빠의 축출을 반대했지만 결국 막지 못 한 언니들에게도 잘못이 있어. 언니, 좀 차갑게 들릴 수 있는 말일텐데 만약 언니가 발견되지 못 했더라도 오빠의 축출은 필연적인 일이었어. 지금보다 더 늦게 걸렸을 뿐이겠지. 그저 언니가 와서 시기가 빨라진 것일 뿐이고. 언니가 와서 오르카 호가 붕괴된 게 아니야. 오빠의 죽음은 오빠 스스로 자초한 것도 있어."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난 너희들에게 속죄해야해."


"말 끊지마, 언니. 난 오빠에게 휩노스 병의 증후가 보이길래 이전에 오빠의 몸에 있던 화학 물질들을 다시 배양시키기 위해서 온갖 시도를 다 해봤어. 내가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오빠가 가져간 그 약은 오빠의 몸에 있었던 화학 물질과 거의 비슷한 구조와 배열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빠의 몸에 긍정적인 영향만 끼쳤던 이전과는 다른 거였지. 난 그걸 가지고 오빠의 화학 물질에 더 다가가고자 했어. 어쩌면 언니들에게 투약해도 괜찮을 정도로 만들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오빠는 그걸 가져갔어.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생각하지도 않고."


닥터는 그의 비명으로 인해 가라앉기 시작했던 오르카 호를 기억했다. 비명에서 나온 충격파는 그 어떤 수압도 견딜 수 있는 오르카 호의 내구도를 단번에 약화시켰다. 그의 힘이 섞인 비명으로 오르카 호는 금이 간 달걀처럼 전체적인 내구도가 급감하였고 포츈과 에이다의 활약이 아니었더라면 모두 수장되었을 것이다. 닥터는 엄청난 량의 해수가 들이닥쳤던 때를 기억하면 지금도 잠을 설치는 건 마찬가지였다.


"...알바트로스 오빠가 아니었더라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오르카 호와 함께 수장? 아니면 오빠한테 전부 몰살? 어느 쪽이든 선택지가 없어. 이제 총합해볼까? 우리는 오빠의 축출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영향을 줬고, 오빠는 오르카 호의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 했고, 언니는 이런 사태를 유발했고. 누구 탓일까? 짠! 모두가 죄인이네? 전부 감옥에서 몇 년은 썩어야 하는 거야. 이래도 언니 탓이라고만 생각해?"


"...."


할 말을 잃었는지, 아님 할 말이 없는지 코나는 그 말 뒤에 계속 침묵했다. 닥터는 여기서 문득 생각했다. 만일 내가 오빠였다면....언니한테 뭐라 말했을까? 하고 말이다. 때론 좋은 말만 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는 직언과 조롱 역시 약이 될 수도 있다. 아르망은 그렇게 하지 못 할 정도로 마음씨가 곱고 착한 것일 뿐이고. 그에 비해 닥터는 비윤리적인 실험도 자주 해왔던 바이오로이드 '닥터' 이니 그녀를 향해 말할 수 있었다.


"용서받을려고 아주 열심히네. 그래봤자 오빠가 살아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살아있다니까?"


"언니들이 그냥 개꿈 좀 꾼 걸로? 오빠 꿈이야 나도 꿔. 누가 안 꿀까? 전부 다 꿨을걸? 죽기 직전 오빠의 모습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이렇게 속죄하려고 해봤자 언니의 가치가 더 높아지는 건 아니야. 솔직히 말해봐, 우리한테 용서받고 싶어서 이러는 거 잖아? 언니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기 위해 여기에 목 매는 거 잖아. 그렇지?"


"...닥터."


코나가 목소리와 눈으로 주의를 줬지만 닥터는 오히려 이게 정곡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관계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질지도 모르지만 닥터는 또 다시 그녀가 오르카 호에서 다시 소외되는 것을 막을려면 차라리 그래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처럼 말했다.


"언니 입장에서는 별 뚱단지 같은 소리겠지. 기억도 잃었고 인격도 바꼈는데 과거의 자신이라고 하는 썅년이 온갖 개같은 짓거리는 다 했으니까. 못 믿을 수 있어. 하지만 우리들에겐, 그리고 오빠에겐 전부 사실이야. 사실 언니가 이러는 것도 좀 웃겨. 언니는 끝까지 오빠한테 상처만 줬거든. 우리를 이용해서 상처주고, 언니가 직접 상처주고. 이게 뭐야? '그 동안 때려서 미안해 화해하자' 뭐 이런 거야? 응? 듣기 좋네. 그럼 어서 오빠가 죽은 곳으로 가서 그렇게 말해봐. 오빠가 벌떡 일어날 거 같은데."


"닥터!!"


"우리들한테 너무 미안하니까 우리들 죄까지 전부 짊어지겠다니....아주 예수 그리스도 납셨어, 그치? 그럼 이제 내 생각을 말해볼까? 개짓거리 좀 하지마! 이러는 행동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 언니가 뭔데 구원자 행세를 하는 거야? 우리도 우리들 책임을 인지하고 있어. 내색하지 않을 뿐이지! 내색해봤자 우울해지기 밖에 못 하는데 뭐하러 내색해?! 오빠가 죽은 건 사실이야! 언니는 그 때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어서 몰랐겠지만 우린 오빠가 마지막 단말마로 내뱉은 비명을 들었어! 너무 아프다고 계속 말하면서 피부를 뜯어대는 오빠의 모습을 봤지! 그러다가....그러다가...."


그가 있던 자리가 쑥 내리앉으면서 그가 바다로 추방되는 것 마저 전부 봤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 닥터는 대신 눈에 눈물이 고여갔다. 이내 훌쩍거리면서 눈물을 뚝 뚝 떨어뜨리는 닥터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아프다는 소리, 괴롭다는 소리 한 번 한 적 없었던 오빠가 그렇게 아프다고 울 정도였으면 얼마나 아팠겠어....응? 그때 우리들이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알아? 오빠가 그렇게 아파하면서 죽어갔는데 우린 느낀 게 아무것도 없었을까? 언니가 코마일 때 우리들은 어땠을 거 같아? 그래. 우리 모두 망령에게 사로잡혀있어. 하지만 망령에게 사로잡힌 언니가 똑같이 사로잡힌 우리들을 구원하겠다는 그런 소리 하지마."


"...."


뭔가 깨달은 것이 있는지 코나는 입 안을 바싹 붙히면서 고개를 숙였다. 닥터는 울면서도 이게 통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표정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으니 이제 시간이 알려줄 것이다. 의도하고 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의 죽음의 과정을 떠올리니 슬프고 후회되기에 그러는 것이었다. 코나도 자신이 닥터를 울리고 말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닥터의 손을 그저 다시 놓아줄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아르망이 들어왔다.


"...."


감은 눈으로 몇 초간 침묵하더니 그녀는 무언가를 읊기 시작했다.


"그대여. 진정으로 구원을 바라는가? 그렇다면 그대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그대의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 죄책감은 망령이다. 망령에게 소속되어 있는 자는 절대로 천국의 땅을 밟지 못 하고 그 분의 빛을 보지 못 한다. 천국으로 가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넌 네 원수를 용서하고 이웃으로 대해야 한다. 네 적을 용서하라. 그럼 네 마음은 다시 깨끗해질 터이다. 네 죄를 참회하라. 그렇다면 천국의 땅을 밟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널 구원할 마지막 구원,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에도 성공한다면 천국의 그 분을 만나뵈어 죄의 영원한 사함을 받을 것이다. 진정으로 구원을 원한다면 그리 해야할테니...."


닥터와 코나가 아르망을 바라보았고 아르망은 곧 다시 입을 열면서 이 말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인류 멸망 이전의 저와 똑같은 아르망 추기경이 읊었던 구절 중 하나입니다. 자신의 죄가 너무 탁해서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가고 만다고 생각해 공포에 떠는 한 인물에게 해주었던 말입니다. 폐하의 경우와 하등 다를 바가 없군요. 폐하가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은 폐하가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서 과거를 잊지 않으나, 거기에 연연하지 않고 거기에 목 매지 않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 일테죠. 하지만 지금 폐하가 하는 일은 모두의 사랑과 신뢰를 져버릴 수 있습니다."


그녀가 눈을 뜨면서 맑은 하늘과 같은 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아르망이 다가오고, 그녀의 작은 손이 코나의 두 손을 잡았다. 악력이 약한 그녀이지만 아르망은 최대한 모든 힘을 주고 있었다. 코나에겐 아기가 잡는 거나 마찬가지일 정도였지만 말이다.


"지금처럼, 저희들과 친구가 되어준 폐하로 있어주신다면 폐하는 구원받을 겁니다. 폐하 스스로가 더 나은 가치를 위해서 망령에게서 나와 진정한 자신을 되찾으신다면 저희들은 그걸로 만족합니다. 선제께서도 그러실 겁니다."


이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코나는 그대로 아르망의 몸에 얼굴을 박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 닥터는 싱긋 웃으면서 아르망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르망도 싱긋 웃어주면서 받아주었다. 원래, 마리를 불러 마리를 비롯한 지휘관들에게 그녀의 그릇된 생각을 뒤바꾸고자 그녀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마리는 내일 아침이 되자마자 그녀를 직접 찾아가겠다고만 말하고 그대려 연락을 끊었다. 아르망은 마리의 심각한 목소리와 주위에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뭔가가 일어났다는 생각을 했다. 마리와의 연락이 끊어지자마자 미래예지를 해보고 아르망은 한 가지를 확실하게 보았다.


"고마워요, 아르망 씨."


"그렇다면 저에게 보답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내일 아침, 불굴의 마리 양이 찾아오실 겁니다. 제 예지로 보건데 여러 부대의 지휘관들이 찾아오실 겁니다. 평화롭기만 할 줄 알았던 저희들의 앞날에 폭풍우가 생겼습니다. 폐하가 이걸 이겨내고 저희를 이끌어주시는 게, 보답입니다."


코나는 아르망이 시대극에 주로 출현했다는 것을 알았고 지금 그녀가 정말로 추기경처럼 말하고 있자 자신도 그녀가 말하였던 공포에 떠는 한 인물처럼 행동하고 말하였다.


"그리 하겠습니다. 반드시 그리 하겠습니다."


누가 보면 사령관의 명예가 실추될 수도 있는 행위였지만 주위엔 닥터와 아르망 밖에 없다. 그리고 둘은 설령 그녀의 명예가 실추됬다 하더라도 그녀의 곁에 있어줄 사람이니 아무런 상관없었다.



☆ ★ ☆ ★



대규모 자원 수급을 위해 정찰을 나가고 아직 주둔 중인 철충 잔존 세력을 모두 소탕하기 위해 나온 마리가 다른 지휘관들에게 카메라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마리는 물론 다른 지휘관들도 뭐라 말을 꺼낼 수도 없을 정도로 마리가 보고 있는 장면은 참혹하고 충격적이었다.


『이건....저번에도 봤던 것 아닌가?』


칸의 말에 마리는 칸이 옆에 없음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도 꽤나 놀란 목소리였다. 레오나에 비하면 덜 했지만 메이도 역시 어느 정도 공포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이게 너희들이 말했던....별의 아이야?』


마리를 비롯한 지휘관들이 보고 있는 것은 해변가에서 온 몸이 산산조각난 상태로 사망한 별의 아이의 시체였다. 레오나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이전에 별의 아이를 보고 패닉에 빠졌던 그녀였으니 다시 그 때가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용도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또 보게 되다니....죽었음에도 여전히 끔직하구려. 하지만 이번 개체는 그 때 죽었던 개체와는 다르군.』


용의 말에 그 때 현장에 있었던 칸이 말해주었다.


『총장의 말대로 이 개체는 이미 완전한 개체로군. 보다 크고....보다 끔찍하고....보다 더 강했을텐데.』


네스트와 별의 아이 아성체의 싸움은 막상막하였으나 네스트의 함재기들의 숫자가 너무나도 많아지다보니 그 전투의 승리는 네스트의 승리로 끝났었다. 그리고 피해를 크게 입은 네스트를 오르카가 쓰러뜨렸고, 시체를 조사하려던 때에 또 다른 별의 아이가 나타났으나 용의 함대의 포격에 물러난 틈을 타 오르카는 도망쳤다. 별의 아이는 보는 것 만으로 극심한 공포를 유발하는 존재이고 모든 지휘관들이 철충들의 뿌리를 뽑는다 한들 이후에 남아있는 별의 아이를 어찌 감당해야하는지 큰 고민을 했었다. 지금의 주적인 철충이니 미뤘을 뿐, 그녀들은 여전히 별의 아이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었다.


지금 마리가 보고 있고 마리의 카메라를 통해 지휘관들이 보고 있는 이 별의 아이는 완전히 자란 개체이다. 그러니, 아성체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강력한 것을 죽인 존재는 무엇일까? 용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지 그걸 모두에게 말해보았다.


『이 별의 아이의 강력함은 모두 다 잘 알고 있을 거라 믿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궁금해하는 건....그런 초월적인 강함을 지닌 것이 왜 여기서 죽어있는지 말이겠군.』


"심지어....주위엔 전투의 흔적이 안 보입니다."


마리는 눈동자를 둘러보면서,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해보았지만 다시 확인해보면서 별의 아이와 싸운 것들을 찾아보았다. 이전처럼 철충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철충들의 잔해들이 여기 저기에 남아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레모네이드인가? 레모네이드의 세력은 확실히 강대하지만 성체 별의 아이를 아무런 피해없이 쓰러뜨릴 정도로 막강한 건 아니다. 라비아타는 제3의 가능성을 말해보았다.


『별의 아이끼리의 내분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주위는 초토화 되었겠지.』


패닉에서 어느 정도 나아진 레오나가 별의 아이 사이의 혈투가 아니었을까 하는 라비아타의 추측을 지적하였다. 결국 그녀들은 그 누가 별의 아이를 죽였는지, 심지어 이전에 봤던 아성체보다 더 참혹하게 죽였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마리는 용을 포함한 모든 지휘관에게 말하였다.


"내일 아침, 각하와 급히 회의를 해야할 거 같다. 모두, 무조건적인 참석을 부탁하지."

지휘관들의 간이 미팅이 끝나고, 마리는 계속 별의 아이의 시체 조각들을 보았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체 누가....이 괴물을 죽인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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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