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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Day 77, AM 09:04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섬의 외곽지역, 높지 않은 암초들이 해안가 이곳저곳에 삐죽이 올라와 따스한 햇볕 아래에 갈색의 자태를 뽐내는 그곳에, 그녀들은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묵묵히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철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쾅-!

 

쾅-!

 

“저기, 이거 언제까지 때리고 있어야 해?”

 

“열릴 때까지.”

 

 자기 덩치 만한 거대한 파일 드라이버로 철문을 때려대던 불가사리의 투정에 철혈의 레오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아예 파일 드라이버가 먹히지 않았다면 모를까, 거대한 철문의 여기저기에 움푹 파인 자국들이 남아있자 철혈의 레오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효과가 없진 않아 보이니까, 계속해 봐. 아마 열 댓번 정도면 어딘가가 망가질 거야.”

 

“하아아..알겠습니다.”

 

 철혈의 레오나의 명령에 불가사리는 지친 얼굴로 다시 자신의 오른팔에 달린 파일 드라이버를 들어 올렸다. 또다시 그녀들의 사이에서 시끄러운 충격음이 터져 나오자 철혈의 레오나의 뒤에 서 있던 분홍색 머리칼의 여성, 미호는 자신의 양쪽 귀를 막은 채 인상을 찌푸렸다.

 

“이럴 거면 사령관한테 AGS 지원이라도 부탁했으면 되는 거 아냐?”

 

 미호의 짜증 섞인 투정에 철혈의 레오나는 오른손에 든 권총의 총구를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그녀의 의견을 찬찬히 반박했다.

 

“..AGS들은 그의 직할부대 일원들이야. 쉽게 부탁하기도 힘들지만, 만약 그의 곁에 그들이 없으면 그의 방어막이 하나 사라지는 셈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우리끼리 해결해야지.”

 

“그런 것치고는 스틸라인 애들은 심심하면 공동작전에 참여하잖아.”

 

“..그건 그가..”

 

쾅-!

 

 이어지는 미호의 반박에 철혈의 레오나가 다시 입술을 열려 할 때, 그녀들이 원하고 원했던 결과가 눈앞에 나타났다. 거대한 철문의 하단 가운데의 틈에 파일 드라이버의 끄트머리만큼의 구멍이 생긴 것이다.

 그것을 본 불가사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대신 입가에 미소를 올린 채 그 구멍의 위와 아래를 향해 다시 파일 드라이버를 가져다 대었다.

 

쾅-!

 

“..스틸 드라코랑 핀토는?”

 

“걔들이라면 저기쯤에서 놀고 있어.”

 

쾅-!

 

“..그래. 가서 데려와. 그리고-”

 

“저기, 저기! 이제 막 흥분되지 않아? 드디어 수십 년 동안 숨겨진 보물들을 우리가 찾으러 가는 거라구?”

 

“..보물일지. 아니면 독일지. 그건 열어보고 판단할 일이야.”

 

 철혈의 레오나는 이제 질린다는 듯 가느다란 눈썹을 감아 내리며 그녀의 앞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연푸른색의 머릿결의 소녀, 트리아이나를 째려보았다.

 

콰-앙!

 

 그녀의 철부지 같은 행동에 철혈의 레오나가 아예 두 눈을 감아버릴 때, 드디어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의 한쪽이 그 거대한 몸체를 숙이며 땅 위에 몸을 눕혔다.

 

쿵!

 

“열렸다!”

 

 트리아이나의 감탄사에 해안가에서 놀고 있던 핀토와 스틸 드라코, 그리고 그녀들을 데리러 가던 미호 역시 고개를 돌려 반쯤 열린 동굴의 입구를 향해 재빨리 뛰어오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파일 드라이버를 휘두른 불가사리는 해냈다는 성취감보다는 몰려오는 피로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허억..허억..더는 못 해..”

 

또각-또각-

 

 철혈의 레오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불가사리의 어깨 위에 자신의 검은색 장갑을 얹으며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불가사리 역시 주저앉은 채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철혈의 레오나는 싱긋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다정함이 섞인 목소리로 그녀의 공로를 작게나마 치하했다.

 

“수고했어. 불가사리. 조금은 쉬어둬.”

 

“네에..”

 

 그녀의 차가운 말투에 묻어 나오는 다정함을 눈치챈 불가사리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는 대신 그녀와 같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철혈의 레오나는 그녀의 웃음에 고개를 살짝 끄떡이고는 고개를 들어 고요한 적막만이 가득한 햇빛조차 새어 들어가지 못하는 동굴의 안쪽을 응시했다.

 

‘..어둡네. 그리고 넓어.’

 

 한눈에 보아도 널따란 철문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동공은 아래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햇빛의 침입을 거부하겠다는 듯 그 아래에는 컴컴한 어둠과 묵직한 기류가 맴돌고 있어 철혈의 레오나는 무심코 미간을 좁혔다.

 

“..커맨드 프레임, 정찰 모드. 기동.”

 

키-잉

 

 그녀의 작은 부름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커맨드 프레임의 원형 몸통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푸른 빛을 머금은 작은 입자들이 동굴의 벽을 타고 내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향해 내려감과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 보이지 않는 동굴의 모습들이 들어왔다.

 

‘벽면이 철골로 강화되어 있고, 그 안에 전기 회로들이 줄지어 있는 걸 보면 분명 인위적인 손길이 닿은 곳이야.’

 

또-각

 

 철혈의 레오나는 햇빛을 등진 채 어두운 동굴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그녀는 축축한 동굴의 벽면 위에 오른손을 얹고는 계속해서 들어오는 동굴 내부 정보를 해석했다.

 

‘..입구만큼이나 넓은 공동이 있고, 그곳 역시 철골로 강화된 공간이네. 위에서 전투가 일어나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해. 그리고..그 녀석들도 있고.’

 

“..불가사리, 네 대원들을 모두 모아줘. 전투 포메이션을 취해야 할 것 같아.”

 

“네? 아, 네! 소장님. 알겠습니다.”

 

“밖에서 대기해. 내가 다른 말을 할 때까지 그 누구도-”

 

 계속해서 지시를 내리던 철혈의 레오나가 갑자기 입을 다물자 불가사리는 고개를 갸웃대며 그녀와 같이 철문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동굴의 안, 철혈의 레오나는 그곳을 뚫어져라 응시한 채 눈에 띄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소장님?”

 

“...뭔가 와. 불가사리, 어서 뒤로 빠져.”

 

“네?”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말에 불가사리가 잠깐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동시에, 불가사리의 귓가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안쪽에서부터 들려와 불가사리는 고개를 홱 동굴의 안으로 돌려 보았다.

 

카-앙!

 

콰-앙!

 

“이게 무슨 소리..”

 

“..빨리 나가!”

 

 불가사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동시에 누군가 강한 악력으로 그녀의 뒷덜미는 낚아채 그녀를 철문 밖으로 내던지자 그녀는 그 힘에 의해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쿠당!

 

“아야! 아으윽..”

 

“어? 야! 불가사리. 너 괜찮아?!”

 

 알 수 없는 강한 손길에 의해 흙바닥 위에 엉덩방아를 찍은 불가사리가 눈썹을 한껏 찌푸리는 동시에,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채었던 철혈의 레오나 역시 철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자 그녀들을 향해 걸어오던 몽구스팀 대원들이 저마다의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녀들을 향해 한달음에 뛰어왔다.

 

“잠깐, 우리 불가사리한테 왜 그래?”

 

 핀토가 내던져진 불가사리를 향해 달려와 부축하자 미호는 여전히 동굴 안쪽을 응시하는 철혈의 레오나에게 따지기 시작했으나 철혈의 레오나는 그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부릅뜬 눈썹 사이로 회색빛 눈동자를 빛내며 철문 너머를 바라본 채 자신의 곁에 다가온 미호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뭔가 와. 미호, 어서 전투 대형을 짜!”

 

“..어? 지금 그게..”

 

“트리아이나와 토모는 후방으로! 스틸 드라코는 전열! 핀토와 불가사리 중열! 날지 말고 땅에 있어! 너는 후열! 어서!”

 

“어! 어어, 알겠어!”

 

 그녀답지 않은 다급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미호 역시 무언가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는 자신들의 일행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쾅!

 

-검은 형체의 무언가가 입구에 남아있던 반쪽짜리 철문을 종잇장을 찢어버리듯 깨부수며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세상을 비추는 밝은 햇빛 아래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콰-과과!

 

“꺄악! 뭐..뭐야!”

 

“모두 뒤로 물러서!”

 

“..젠장.”

 

-하! 하하하! 얼마 만에 보는 햇빛인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 하늘인가!

 

 마치 슬레이프니르가 곁을 지나갈 때 발생하는 소닉붐과 같은 강렬한 돌풍이 불어닥치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한껏 몸을 움츠린 채 자신의 팔을 들어 얼굴을 보호했다.

 그녀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 사이, 하늘 위로 날아오른 검은 형체는 자신의 검은 날개를 하늘 아래 과시하며 밝은 햇빛 아래로 붉은 안광을 빛내었다.

 

-그래. 이것이 해방감이라는 건가! 즐겁구나! 이토록 밖을 향한 발걸음이라는 것이 즐거운 것이었을 줄이야!

 

 언뜻 보아도 그녀들의 열 배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검은 색 몸체, 활짝 펼친 검은색 철의 날개는 아래에 있는 그녀 모두를 그림자로 가려버릴 만큼이나 크고 웅장한 자태를 뽐내었으며 드문드문 보이는 금색의 테두리 파츠는 밝은 햇빛 아래, 세월의 때가 전혀 묻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눈부신 반사광을 뿜어내어 모두의 눈을 멀게 하였다.

 모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라볼 때, 철혈의 레오나만큼은 여전히 부릅뜬 눈썹 사이로 회색빛 눈동자를 빛내며 그 물체의 손으로 보이는 파츠에 들려있는 것을 응시했다.

 그것은 각각의 손에 철충으로 보이는 검은 무언가를 쥐고 있었고 철혈의 레오나는 탐색 입자에 감지된 철충들이 영문도 알 수 없이 전부 로스트 시그널로 뒤바뀐 것이 바로 저 괴물의 짓이라는 걸 그녀는 곧바로 이해했다.

 

-하늘이여! 태양이여!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재회인가!

 

“...어버..어버버..”

 

 연신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하기 힘든 소리를 하는 검은 박쥐의 등장에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쯤, 철혈의 레오나만이 환희가 아닌 광기에 찬 기계음을 내뿜는 검은 무언가를 향해 입술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축하해. 박쥐씨.”

 

-하하..하? 박쥐? 지금 나를 박쥐라 한 건가?

 

 그녀의 도발이 먹힌 걸까, 하늘을 바라보던 검은 형체는 그녀의 말에 곧바로 그녀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검은 철갑 사이로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붉은 안광은 그녀 주변에 있던 이들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할 만큼의 흉흉한 느낌을 주었으나 철혈의 레오나는 도리어 흥-하는 콧소리를 내며 팔짱을 낀 채 그것과의 대화에 임했다.

 

“박쥐가 아니었나 봐? 동굴에서 튀어나오는 검은색 뭐라고 하면, 난 박쥐밖에 모르는데.”

 

-..고작 암컷 유기체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감히 나를 조롱하려 들다니.

 

“넌 딱 봐도 AGS 같은데, 그럼 무기체 덩어리라고 불러줄까?”

 

-네 이년. 감히..

 

 하늘 위에서 그녀들을 내려다보는 붉은 안광이 그녀의 말에 더욱더 시뻘겋게 달아오르자 그녀 곁으로 모여드는 이들의 얼굴에 식은땀이 적잖이 맺히기 시작했다.

 

“저..소장님? 그렇게 도발할 필요는..”

 

“야..야야. 네가 정말 선이 없는 건 아는데..이건 경우가 좀..”

 

 불가사리와 미호의 만류에도 철혈의 레오나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회색빛 눈동자를 하늘 위의 AGS를 향해 고정한 채 차가운 목소리로 자신 곁으로 다가오는 이들에게 말했다.

 

“..전 대원, 전투 준비. 포메이션은 방금 내가 이야기했던 대로. 어서.”

 

“아..아, 네! 스틸 드라코! 빨리 와!”

 

“이익! 저게 뭔 줄 알고 싸우겠다는 거야! 난 몰라! 진짜!”

 

 철혈의 레오나의 작전 명령이 떨어지자 불가사리와 미호를 중심으로 다른 이들 역시 그녀를 에워싼 모양새로 진형을 구축했다.

 스틸 드라코는 녹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방패를 들어 철혈의 레오나 앞을 가로막았으며 불가사리와 핀토는 저마다의 무장을 손에 든 채 하늘 위를 응시했다. 미호는 재빨리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겨 전장에서 한 걸음 물러섰으며 트리아이나는 토모의 인도를 받아 미호가 숨은 수풀보다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선 채 상황을 주시했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제각기 다른 레벨의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그녀들의 행동이 느린 것은 아니었으나 검은 AGS는 여전히 하늘 위에서 그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자신을 똑똑히 바라보는 철혈의 레오나를 응시하기만 할 뿐이었다.

 

-..흠. 제가 조금 흥분했나 보군요. 실례했습니다. 오랜만에 외출이다 보니.

 

 방금까지의 광기와 불손한 말투는 온데 간데 사라진 신사적인 어조의 기계음이 검은 AGS에게서 튀어나오자 철혈의 레오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얼굴에 드리운 긴장감이 옅어졌다. 하지만 철혈의 레오나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를 유지한 채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응대했다.

 

“..넌 대체 누구지? 우리들의 적인 철충은 아닌 거 같은데.”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아무리 창조주의 모습을 본 따 만든 암컷 유기체라고 할지언정, 예의는 지켜야겠지요.

 

“우와..쟤 언어모듈, 멸망의 메이 소장님이랑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거 같은데?”

 

 핀토의 순수한 감탄사에 하늘 위에 소리 없이 떠 있던 검은 AGS의 날개가 살짝 꿈틀대었다. 그 미묘한 움직임을 철혈의 레오나는 놓치지 않았다.

 

-..전 AGS 로보테크 최고의 역작이자 하늘의 지배자, RF87 로크입니다.

 

“...너같은 AGS가 있다는 건 금시초문인데.”

 

-당연한 소릴. 저는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양산형 AGS 개체가 이닙니다. 오로지 저 무덤의 주인, 앙헬공만을 위한 AGS. 한마디로 유일무이한 AGS죠.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당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되겠습니까? 철혈의 레오나. 

 

“어? 뭐야? 소장님, 저 로봇 알아?”

 

 검은 박쥐의 형태를 지닌 AGS, RF87 로크가 철혈의 레오나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를 둘러싼 이들의 시선이 로크에게서 그녀에게로 향했다. RF87 로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 역시 얼음 조각과도 같은 얼굴 위로 주름을 그려내었다. 

 

“...네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어리석은 질문이군요. 철혈의 레오나. 제가 모시는 분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앙헬 리오보로스.”

 

-그렇습니다. 당신 역시 그분의 창조물 중 하나이니 제가 당신을 모를 리가 없지요. 당신 곁의 인형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알아? 박쥐야?”

 

 이어지는 로크의 말에 방패를 들고 서 있던 스틸 드라코는 여전히 반짝이는 눈빛을 그에게 보내며 밝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 그녀와 반대로 그녀 뒤에 서 있던 이들은 그녀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저마다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RF87 로크는 분위기를 읽지 않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기보다는 정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저는 박쥐가 아닙니다. 유기물 덩어리. 제 개체명의 기원을 따지자면 천일야화에 나오는 거대한 새..

 

“박쥐도 새 아냐? 그럼 박쥐네!”

 

-...박쥐는 조류가 아닌 포유류입니다. 암컷 바이오로이드.

 

 만약 저 AGS가 로봇이 아닌 인간이었다면 아마 한숨 소리를 뒤에 덧붙였겠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그 생각을 했다.

 결국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스틸 드라코 한 명에 의해 저마다의 한숨을 내쉬는 상황까지 오자 RF87 로크는 딱딱하기 그지없던 기계음보다 한층 누그러진 기계음으로 그녀들과 대화에 임했다. 

 

-..우선 저를 RF87 로크라 부르십시오. 그거면 됐습니다.

 

“..뭐, 좋아. 그래. 이렇게 우릴 마중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맞습니다. 철혈의 레오나. 이제야 대화가 통하는군요.

 

슈-웅

 

 RF87 로크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는 동시에 자신의 거대한 몸체를 그녀들의 앞으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하자 그녀들을 가리던 RF87의 그림자가 더욱더 짙어지기 시작했다.

 

철-컥

 

“..그만. 그 이상 더 다가온다면 발포하겠어.”

 

 철혈의 레오나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RF87 로크를 응시한 채 오른손에 들려있던 자신의 권총을 그를 향해 겨누었다.

 그녀의 공격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RF87 로크는 점차 그녀들을 향해 몸체를 가까이 가져오는 것을 멈추지 않자 철혈의 레오나의 권총에서 탄환이 한 발, 터져 나왔다.

 

타-앙!

 

“...!”

 

 그녀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RF87 로크의 검은색 장갑 위에 불꽃이 픽-생겨났다. 그뿐이었다. RF87 로크는 그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미동도, 흠집도 생기지 않았다.

 RF87 로크는 자신의 두상을 숙여 탄환이 적중한 자신의 왼가슴 장갑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음성모듈을 작동했다.

 

-그런 같잖은 권총으로는, 제 몸에 그 어떤 흠집도 낼 수 없습니다. 철혈의 레오나.

 

“..그건 어떨까? 내 권총은 특수제라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맞춘 표적에 대해 당신 부대원들의 공격력이 증폭된다는 사실쯤은. 하지만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이들은, 당신의 부대원들이 아닌-

 

“..쎈 거 한 방.”

 

타-앙!

 

팅!

 

 수풀 속에서 쇄도해오는 총알 한 발에 RF87 로크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갈고리 같은 손에 쥐고 있던 철충의 잔해를 들어 총알을 받아내었다. 그 광경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고 말았다.

 미호는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조금씩 위치를 이동하고 있었다. 그 행동은 그 어떤 잡음도 내지 않아 오로지 철혈의 레오나만이 그녀가 어디 있는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RF87 로크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미호의 탄도를 읽어내어 그녀의 총알을 받아내었다.

 RF87 로크는 미호의 탄환이 깊숙이 박힌 철충들의 잔해물을 아무렇지 않게 땅바닥에 내던지고는 딱딱한 기계음을 연신 뱉어내기 시작했다.

 

쿠-직

 

-그런 미적지근한 공격은 제 손에 들려있는 이 버러지들만도 못한 공격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대화의 주도권은 제게 있습니다. 그러니 대화를 계속하죠.

 

“..대화? 뭘 그렇게 우리에게 듣고 싶은 게 있는 걸까?”

 

-당신들을 통솔하는 자, 인간을 제게 데려오십시오.

 

 RF87 로크의 무덤덤한 기계음에 철혈의 레오나의 반쯤 감긴 눈썹이 꿈틀대었다. 몽구스팀 대원들 역시 한껏 몸을 움츠리며 단호한 눈빛으로 RF87 로크를 바라보았다. 저 로봇이 어떻게 그를 아는 걸까, 그녀들 모두 입을 다문 채 눈동자만 굴려 그녀들의 중앙에 선 철혈의 레오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철혈의 레오나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인간은 모두 죽었다는 거. 모르나 봐?”

 

-모를 리가요. 저 무덤의 주인이시자 저의 주인인 앙헬 리오보로스님 역시 죽음이란 운명을 피해 가지 못하셨지요.

 

“그럼 잘 알겠네. 우리를 통솔하는-”

 

-현재 이 섬에 상륙한 바이오로이드들은 대충 가늠해보아도 최소 군단급 규모로군요.

 

“...”

 

-흠, 하늘 위에 저들은 스카이 나이츠, 둠 브링어. 그리고 펙스 소속의 바이오로이드들도 섞여 있군요. 딱히 저들을 보지 않아도, 당신들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RF87 로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다 이내 그녀들을 향해 다시 붉은 안광을 내뿜었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외형과 분위기에 그녀들의 어깨가 움츠러들자 RF87 로크는 만족스럽다는 듯 자신의 날개를 퍼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많은 인형이 저마다의 소속이 다름에도 규합되는 것에는 인간이라는 통솔권자가 필요합니다. 그렇지않고서야 이런 대규모 군단이 제대로 통솔될 리가 없지요. 아, 만약 그대들의 군단에 무적의 용이라는 개체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만. 그녀는 제 주인의 콜 사인도 받지 않은 채 잠들었다고 들었습니다.

 

“...흐응.”

 

-거만하기 짝이 없는 도구이나, 제 주인께서 끝끝내 온전히 가지지 못해 아쉬워하셨던 물건이니 그만한 능력은 되겠지요. 하지만 그녀를 깨울 수 있는 것은 인간, 그렇게 말하고 떠났으니 어떻게 되든 그대들의 곁에는 인간이 있다는 소리가 됩니다.

 

 RF87 로크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다시 한번 그녀들을 향해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그녀들의 앞으로 자신의 두상을 가져다 대었다.

 

-자 이제 그분을 이곳으로 데려오시죠. 제 제안은 그분에게 말하겠습니다. 그대들이 아닌.

 

“..그를 너같이 위험해 보이는 녀석에게 안내할 만큼 우리가 어리석은 여자들로 보이나 봐?”

 

-..여자라는 말은 인간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수정이 필요해 보이는군요. 암컷 바이오로이드.

 

 철혈의 레오나는 RF87 로크의 말에 자신의 앵두빛 입술을 살짝이 깨물었다. RF87 로크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지적에도, 그녀는 그 어떤 반박도 쉬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감정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RF87 로크는 아예 땅 위에 자신의 거체를 사뿐히 내려놓으며 그녀들의 앞에 서서 그녀들을 향해 여전히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와! 진짜 크다.”

 

-그대들은 인형일 뿐. 저와 대화할 가치가 없는 이들입니다. 만약 제 요구를 수용하지 않겠다면 더 이상 당신들을 존중해야 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군요.

 

“소..소장님. 우리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이 이상 대화를 끈다면, 저도 별수 없습니다. 영리한 이라면 제 제안을 받아들일 텐데, 어찌하시겠습니까?

 

“소..소장님.” 

 

 불가사리와 핀토의 불안함이 섞인 눈빛이 백금발에 가려진 그녀의 얼굴을 향했다. 스틸 드라코를 제외한 인원들의 손이 덜덜 떨리다 못해 어깨까지 불안감이 올라오고 있었다.

 철혈의 레오나 역시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자신의 오른손에 쥐어진 권총을 그저 붉은색 안광을 연신 내뿜는 AGS에게 향할 뿐, 방아쇠를 쉬이 당기지 못하고 있을 무렵.

 그들의 대치 상황에 종결을 알리는 남성의 목소리가 그녀들의 뒤에서 흘러나왔다.

 

-그 정도면 되었다. 철혈의 레오나.

 

“..사령관?”

 

부스럭-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남성의 목소리에 철혈의 레오나는 RF87 로크에게서 시선을 떼고 재빨리 목소리를 쫓아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여기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라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풀을 해치고 나오는 토모와 그녀의 손에 들린 구세대 핸드폰이었다.

 

“사령관, 이렇게 하면 돼?”

 

-그래. 토모. 조금 더 가까이 붙어라.

 

“응!”

 

 딱딱하지만 차분함이 담긴 남성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핸드폰의 작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몽구스 팀 대원들과 철혈의 레오나가 멍하니 그 핸드폰을 바라보자 RF87 로크 역시 그 핸드폰을 든 소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그녀들의 통솔권자입니까?

 

-그래. RF87 로크. 네 이야기는 모두 듣고 있었다.

 

-호오. 생각보다 영민하신 분이군요. 등장하는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는 겁니까?

 

 스피커 너머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사령관의 대답에 RF87 로크는 흥미롭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그의 황금빛 날개 테두리 파츠 사이로 금색의 전자기가 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오자 핀토는 으힉-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를 움츠렸다.

 철혈의 레오나는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토모에게 시선을 한 번, 그녀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향해 시선을 한 번, 이내 토모를 굳이 함께 보낸 사령관의 의도를 대충 이해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RF87 로크에게 향해 있던 권총을 거두었다.

 

“..사령관. 등장하는 타이밍이 나쁘지 않네.”

 

 살짝 토라진 철혈의 레오나의 목소리에 스피커 너머의 사령관은 언제나와 같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그래도 이 녀석은 뭐 하는 녀석인지 몰라. 당신이 나왔다는 건-”

 

-괜찮다. 철혈의 레오나. 내게 맡겨라.

 

 살짝 힘이 들어간 대답, 철혈의 레오나는 그 목소리에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그에게 전적으로 맡기기를 결심하고선 그녀 곁에 서 있던 불가사리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전원 전투태세 해제.”

 

“네? 아, 네! 드라코, 이제 방패를 내려도 좋아.”

 

“..하아아..죽는 줄 알았어. 아니, 뭐. 난 영웅이니까, 죽는 게 두려운 건 아닌데. 헤헤.”

 

 불가사리는 전투태세 해제 명령을 듣고는 아예 흙바닥 위에 주저앉아 버렸으며 핀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든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미호와 트리아이나 역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수풀을 해치고 햇빛 아래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아, 사령관 아니었으면 오늘 죽을 뻔했어. 사령관, 이럴 거면 좀 빨리 나오지 그래!”

 

 미호는 분홍색 머리카락 위 여기저기 붙은 녹색의 나뭇잎들을 연신 털어내며 토모의 핸드폰을 향해 불만을 토로하기 바빴고 그녀와 같이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트리아이나는 마치 보물을 발견한 대 모험가처럼 연푸른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햇빛을 등진 검은색 AGS를 향해 달려나갔다.

 

“저기, 저기. RF87 로크라고 했지?”

 

-..당신들의 사령관이라는 남성과 대화 중이니. 방해하지 마시길.

 

“진짜 크다! 우와아아! 날개, 날개도 달려있어! 이거, 진짜로 비행 용도로 설계된 날개야? 장식이 아닌 거지? 이렇게 세밀한 구조를 지닌 AGS는 처음 봐!”

 

-...듣기 나쁜 소리는 아니군요. 하지만 당신의 평가는 제게 무가치합니다. 그러니 대화를 끊지 마십시오. 암컷 유기체.

 

 바보가 하나 더 튀어나왔다고 RF87 로크는 굳이 자신의 감정모듈에서 추산된 생각을 음성모듈 너머로 내보내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부담스러운 관심을 보이는 스틸 드라코와 트리아이나를 내버려 둔 채, RF87 로크는 여전히 핸드폰을 들고 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토모를 내려다보았다.

 

-RF87 로크, 내게 제안할 것이 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인형들의 영민하신 주인이시여. 그대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겁니다.

 

-그건 내가 결정할 이야기다. 네 생각은 별로 중요치 않아.

 

-..호오. 그렇군요. 맞습니다. 영민하신 이여. 제가 주제넘게 나섰군요.

 

-영민이라, 상대를 만나보지도 않고 쉬이 판단하려 들다니. 주제가 넘어도 한참 넘었군.

 

-이거, 계속해서 실례를. 부디 노여움을 푸시길.

 

“사..사령관님, 평소보다 날이 서 있으신 거 같은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그러게?”

 

 작은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사령관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낮고 딱딱한 어조였으나 RF87 로크와 대화할 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날이 가득 선, 그런 느낌이 강하다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똑같은 감상이 들었다.

 철혈의 레오나만이 그의 목소리가 잔뜩 날이 선 그 이유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자신과 RF87 로크와의 대화 내용을 다 듣고 있었다면-

 

‘화났네. 오랜만에 잔뜩 화난 목소리네.’

 

“..정말이지. 누가 누굴 챙겨주는 건지.”

 

 철혈의 레오나는 잔뜩 화가 난 사령관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리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NNIE 회로를 설치했어도, 그는 그였다는 사실을 그녀는 다시 상기했다.

 RF87 로크는 계속해서 음성모듈을 가동하며 사령관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서 제 제안을 들어보시겠습니까?

 

-..좋다. 네 제안을 수락하는 건 들어보고 나서 결정하도록 하지.

 

-오! 그것참. 다행이군요. 좋습니다. 지금 이..

 

-현재 나는 섬의 남동쪽 해안가에 정박한 잠수함에 있다. 그곳으로 와라. RF87 로크. 거기서 듣겠다.

 

삑-

 

 미처 RF87 로크가 말을 끝맺기도 전, 사령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토모의 휴대폰 스피커 너머에서 통신 종료음이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들렸다. 불가사리와 핀토, 그리고 미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휴대폰을 바라보았으며 철혈의 레오나는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왼손으로 입을 막은 채 어깨를 들썩였다.

 RF87 로크는 연신 가동하던 음성모듈에 제동이 걸린 것 마냥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응? 사령관이 끊었어.”

 

-..하..하하하! 하하하! 그렇군요! 맞지요. 무릇 위에 서는 자라면 오만해야 하는 법! 하하하!

 

 가만히 서 있던 RF87 로크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 것인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린 채 연신 음성모듈 너머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광기가 섞인 기계음에 몽구스 팀 전원이 인상을 찌푸린 채 귀를 막고선 그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 그녀들과 달리 철혈의 레오나는 여전히 눈가와 입가에 미소를 올린 채 RF87 로크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때? 그와 만난 소감이?”

 

-나쁘지 않군요. 확실히 오랜만에 보는 오만한 인간이었습니다. 감히 제 주인도 아니면서 제게 오라 가라 하다니. 색다른 경험이군요.

 

“흐응, AGS 치고는 감정이 풍부하네. 너.”

 

 철혈의 레오나의 비웃음이 섞인 말에 RF87 로크는 자신의 갈고리와 같은 손에 들린 철충의 잔해를 한껏 꾸겨버리며 그것을 땅 위에 내던졌다.

 

쿠-직!

 

-방금도 말했지만 절 이런 AGS들따위와 비교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이 세상에 RF87 로크라는 개체명을 단 이는, 이제 저뿐입니다.

 

“..너같은 녀석이 또 있었단 말이야?”

 

-..그건 당신과 나눌 이야기가 아닙니다. 철혈의 레오나.

 

“흐응..그래?”

 

기이-잉 철-컥

 

 철혈의 레오나는 자신을 향한 RF87 로크의 날이 선 언사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까지 내려온 자신의 금발을 뒤로 넘기며 의자로 형태를 변형한 커맨드 프레임 위에 무거운 허리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당당한 행동에 그녀 뒤에 있던 몽구스 팀 역시 저마다의 긴장을 푼 채 흙바닥 위에 몸을 뉘며 저마다의 휴식시간을 가지기 시작했고, 토모 역시 그녀들 사이에 껴 통신이 꺼진 휴대폰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RF87 로크는 자신 앞에서 눈빛을 반짝이는 트리아이나와 스틸 드라코 대신, 커맨드 프레임 위에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있는 철혈의 레오나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대들의 주인은 어떤 인물입니까?

 

“..그건 직접 가보면 될 일이잖아?”

 

-먼저 협상 상대의 정보를 취득하는 것, 그것이 협상의 첫 발걸음이니. 그대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고 싶군요.

 

“...다정한 남자. 끝. 이 이상은 네가 직접 보고 판단해.”

 

-다정하다라, 어렵군요. 흐음.

 

 철혈의 레오나의 짤막한 대답에 RF87 로크는 갈고리와 같은 손을 자신의 날카로운 턱 아래로 가져다 대었다. 그 모습에 철혈의 레오나는 내심 저런 로봇도 있구나, 싶어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정하다는 의미는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지요.

 

“..맞아. 해석하기 나름이야.”

 

-방금 저와 대화를 나눈 이는 오만하고, 지도력이 충분히 있어 보이는 목소리였습니다만.

 

“...”

 

-하지만 지휘관급 개체인 당신이 다정하다고 평가했으니. 그건 지도자로서 어떤 인물인지 쉬이 가늠키 어렵군요.

 

 RF87 로크의 중얼거림에 머리 위로 깍지를 낀 채 나무에 기대어 쉬던 미호는 두 눈썹을 부라리며 짜증이 한가득 섞인 목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야! 까마귀!”

 

-...박쥐 다음에는 까마귀입니까?

 

“흥! 시꺼먼 조류라고 하면 까마귀 말고 달리 있어? 하여튼, 남의 사령관을 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지레짐작할 시간에 어서 가서 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와!”

 

-이런, 당신은 철혈의 레오나만큼 영민한 암컷이 아니군요.

 

“이씨! 누가 암컷이야!”

 

 암컷이라는 RF87 로크의 말에 미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그의 시뻘건 안광과 대치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은 이내 앉아 있는 철혈의 레오나의 오른손에 의해 저지당했다.

 

“..가만히 있어. 미호.”

 

“저런 소리를 듣고도 그냥 있으라고?!”

 

“여기서는 참는 게 이득이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철혈의 레오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그저 RF87 로크를 응시할 뿐, 어리둥절해하는 미호의 물음에 딱히 무어라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다시 한마디를 내뱉으려 입을 열자 철혈의 레오나 대신 그녀들 앞에 서 있는 RF87 로크가 먼저 음성모듈을 가동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눈치로군요. 제가 대신 설명해드리죠.

 

“네가? 네가 뭘 안다고..”

 

-기다려드리는 겁니다. 갑작스러운 제 방문에 대응할 시간 정도는, 그대들의 사령관에게도 필요할 터이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미호에게 철혈의 레오나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제야 미호는 심통이 가득한 얼굴로 다시 흙바닥 위에 주저앉아 방금과 같이 두 눈을 감은 채 쉬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들 사이로 소금기가 가득한 바닷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쯤, RF87 로크는 접었던 검은 날개를 다시 양옆으로 펼쳐 올리며 다시 하늘 위로 조용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때가 된 것 같군요.

 

“..가서 똑똑히 보고와. 우리 사령관.”

 

 미호는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치켜세운 눈으로 하늘 위로 부상하는 RF87 로크의 두상을 노려보았다.

 불가사리는 그러가나 말거나 아예 졸리다는 듯 눈을 껌벅이며 얕은 졸음을 청했으며, 핀토는 나무에 머리를 기대고는 아예 졸고 있었다.

 트리아이나와 스틸 드라코는 날아오르는 RF87 로크를 향해 여전히 발랄한 목소리로 손을 흔들며 배웅하기 바빴다.

 

“또 보자! 박쥐야!”

 

“우와! 부상할 때 나야하는 소리도 안 나! 스텔스 기능도 있는 거구나?!”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여기 있으실 거라면, 저 박쥐라는 호칭. 수정을 부탁드리죠. 철혈의 레오나.

 

“..그건 네가 우리 사령관한테 하는 거 보고.”

 

 생각보다 박쥐라는 단어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철혈의 레오나는 불쾌감이 잔뜩 묻어나오는 RF87 로크의 부탁에 턱을 괸 채 입꼬리를 살짝 올려줄 뿐이었다.

 비릿한 그녀의 미소에 RF87 로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젓다 날카로운 왼손 검지를 철혈의 레오나에게 들어 보였다.

 

-아마 여러분들과는 다시 만날 것 같군요. 부디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제 주인의 무덤에 들어가시지 말기를.

 

“알겠어.”

 

 RF87 로크는 철혈의 레오나의 짤막한 대답을 듣고는 곧바로 자신의 검노란 날개를 하늘 아래 펼쳐 보였다. 몸체의 2배는 되어 보이는 양 날개가 태양 아래, 한껏 그 모습을 과시하자 그의 아래에 있던 이들 모두가 RF87 로크의 동태를 주시했다. 

 

-그럼, 어디 만나러 가보지요. 그대들의 사령관을.

 

쿠-아앙!

 

 RF87 로크는 짤막한 대사를 남기며 우거진 숲속 저 너머로 가공할만한 속도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스쳐 지나간 모든 나무가 태풍에 휩쓸린 것처럼 기우뚱거렸으며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뒤늦은 충격파가 발생해 그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을 휩쓸었다.

 철혈의 레오나는 RF87 로크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자신의 부관에게 통신을 걸었다. 그런 그녀의 부름에 단말기 너머에서 중저음의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발키리?”


-네, 대장님.

 

“내 특수탄으로 수집한 정보, 받았어?”

 

-네. 대장님. 받자마자 현재 오르카 1호로 귀환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보는 대체..

 

“오르카 1호 지금 분위기는 어때?”

 

-..난리입니다. 이 AGS로 보이는 정보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래. 조만간 만날 거야. 그것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는 모르지만, 여차하면 갈겨버려.”

 

-..알겠습니다. 대장님.

 

삑-

 

“..후우.”

 

 철혈의 레오나는 발키리의 확답을 듣고서야 지친 어깨를 커맨드 프레임의 골격 위로 얹혔다. 그녀는 한껏 풀린 회색빛 눈동자로 파도가 출렁이는 해수면 위를 응시한 채 한 여성의 이름을 불렀다.

 

“토모.”

 

“응? 불렀어?”

 

“..사령관이 혹시 네게 뭐라..언질해 준 거라도 있니?”

 

“..언질이 뭐야?”

 

“...아냐. 아무것도.”

 

 토모의 되물음에 반쯤 감긴 그녀의 눈썹이 아예 완전히 닫히고야 말았다. 다시 한번 저 아이가 진짜 스파이 기관 출신인지, 그녀는 쉬이 그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철혈의 레오나는 토모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이내 사령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의 주제를 바꾸었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는.’


 마치 이 사태를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 직할부대 소속인 그녀를 굳이 자신의 수색부대에 합류시킨 그의 행동에 철혈의 레오나는 회색빛 눈동자를 짙은 눈썹 아래서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무적의 용에 대한 정보 역시 080기관에서 제공한 걸까, 철혈의 레오나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그의 정보원에 대해 의구심을 품으며 하아-하는 한숨과 함께 애꿎이 눈을 피로하게 만드는 것을 멈추었다.

 

‘여전히 알다가도 모를 남자야. 예나 지금이나.’

 

 출렁이는 파도소리가 그녀의 잠잠한 가슴속의 무언가를 두들기자 철혈의 레오나는 이번에는 두 눈썹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살짝 피로해진 탓에 눈썹이 이전보다 조금 무거워진 것만 같아 철혈의 레오나는 오른손을 길게 펴 검지와 엄지로 양 눈의 눈매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철혈의 레오나는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는 눈가의 무거움을 떨쳐내고는 조심스레 두 눈썹을 다시 올려 보였다. 마사지를 해줬음에도 그녀의 두 눈에는 이전과 같은 날카로움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더욱더 성장하게 된다면.”

 

 철썩이는 파도와 그런 파도에 깎여나가는 암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철혈의 레오나의 입이 그녀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열리며 그녀의 속내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의 곁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지금 이 자리를 떠난 RF87 로크는 그녀들을 도구라 불렀다. 그리고 NNIE 회로 역시 그를 위한 도구. 오르카 1호의 모든 것은 그를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도구라는 것은 결국 쓰이다 보면 필요성이 떨어지기 마련, 언젠가는 주인에 의해 버려지는 것이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사실이 난폭한 AGS의 말에 의해 다시금 머릿속에 상기되자 철혈의 레오나는 제 무릎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려 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에게 내가 더 필요치 않게 된다면, 나 역시 그에게 버려질까?’

 

 발키리에게 던졌던 질문이, 부메랑이 되어 그녀 자신에게 돌아왔다. 사령관이 자신들을 도구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대하더라도 그녀 자신은 바이오로이드, 태생적으로 그와 함께 설 수 없는 자신이, 철혈의 레오나는 이 순간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만약 자신이 인간이었더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오늘따라 유독 옆구리 한켠이 애써 시려운 탓에 철혈의 레오나는 끌어올린 무릎을 더욱 안쪽으로 당겨 넣었다.


“..쉬고 싶어.”

 

 그 한마디를 끝으로 그녀는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잔잔하게 불어오는 파도바람에 온 정신을 맡겼다. 부디 눈을 떴을 때, 이 외로움이 더는 느껴지지 않기를, 그녀는 간절히 기도하며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그녀만의 얕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41) Day 77, AM 09:05

 

 지구의 70%를 뒤덮은 푸른 바다의 어딘가, 그 누구도 찾아올 이유가 없고,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 드넓은 바다의 한가운데 어딘가에 위치한 작은 섬은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만 같은 적막이 항시 맴돌고 있었다.

 갈매기들이 잠깐 찾아와 머물다 가고, 거북이들이 모래사장 위로 올라와 새 생명을 낳고 떠나는 그런 작은 평화가 맴돌던 나날이 계속 이어지던 섬의 역사 위로,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쐐-애액!

 

쿵!

 

콰-앙!

 

 섬을 덮고 있던 푸른 하늘 위로 대기를 찢는 소닉붐이 발생해 섬을 둘러싼 적막을 찢어발겼으며, 대지는 묵직한 충격음과 총성이 난무해 산림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땅과 하늘을 뒤집는 불꽃이 연신 땅 위와 하늘 아래 회색빛의 연기를 피워올리니 산뜻한 바람만이 맴돌던 이 섬에 멸망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순간이 찾아왔다.

 작달막한 섬 위로 수많은 이들과, 육중하기 짝이 없는 로봇들이 섬의 자연을 파괴하며 자신들이 밟고 있는 이 땅을 바다 아래로 가라앉히려는 듯 행군하고 있을 때, 섬의 남쪽 해안가 위로 하얀 범고래가 입을 벌린 채 몸을 가누고 있었다.

 

 그 하얀 범고래는, 오르카 1호였다.

 

부-우웅!

 

“사령관님! 저희 가볼게요!”

 

“그래. 출격 포인트는-”

 

“N-3! 확인했슴다! 가보겠슴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하얀 백사장 위로 족히 열 개는 넘어 보이는 녹색의 컨테이너들이 연달아 오르카 1호의 전면 개방 포트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듯 열린 포트 너머로 군용 지프 차량들이 줄지어 튀어나오기 시작하자 출격 포트 앞의 백사장 위 보급기지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남성, 사령관의 손과 눈이 쉼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N-3 포인트, 출격. 예상 도착시간은..6분 뒤. 좋아. 이걸로 북서 방향 보급 포인트는 활성화 되었군. 이걸로 스틸라인 쪽 보급은 끝났어. 기동 대원들 보급망 역시 제공권을 확보한 범위 내에서 가능하고, 그러면 이제 남은 건-”

 

 사령관은 자기 앞에 놓인 녹색 보급박스 위에 얹어둔 휴대용 홀로그램 패널을 연신 조작하며 섬의 모습을 본떠 만든 홀로그램 영상 위를 주시한 채 중얼거렸다.

 함교에서 걸치던 함장 정복과 군모를 옆 박스 위에 던져둔 채 사령관은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으며 연신 홀로그램 스크린을 돌려보며 중얼거렸다.

 

“공중 보급은 AGS 드론들로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고, 이제 남은 건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와 앵거 오브 호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는 안드바리가 맡았으니 패스. 앵거 오브 호드는..”

 

 그 어느 때보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사이, 컨테이너에 둘러싸인 공간 안으로 한 소녀가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사령관님! 지금 익스프레스 언니들이 앵거 오브 호드 보급 포인트에 도착했대요!”

 

“그래. 알겠다. 그녀들에게-”

 

“그런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사령관님!”

 

“..뭐?”

 

 등 뒤에서 들리는 소녀의 다급한 목소리에 사령관은 고개를 돌려 그 소녀를 주시했다. 따뜻한 햇볕이 무색해질 정도로 죽 찢어는 눈가, 매섭기 그지없는 그의 눈빛에도 남색의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 안드바리는 익숙하다는 듯 기죽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게 지정했던 보급 포인트에 도착했는데 앵거 오브 호드 언니들이 이미 자리를 뜬 거 같다고..”

 

“..알겠다. 안드바리. 우선 앵거 오브 호드의 보급부대는 근처 안전 지역으로 이동, 거기서 내 지시가 따로 떨어질 때까지 대기하라고 전해둬라.”

 

“네! 알겠습니다! 익스프레스 1호 언니, 지금 사령관님이..”

 

 그의 빠른 대처에 안드바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단말기에 입을 대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사령관 역시 재빨리 오른 손목에 달린 자신의 단말기를 두들겼다. 호출 대상은 당연하게도-

 

-통신 받았다. 사령관.

 

“..신속의 칸, 왜 보급 포인트에서 대기하지 않았나?”

 

 단말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무뚝뚝한 목소리의 주인공, 신속의 칸에게 사령관은 싸늘한 목소리로 응대했다. 그러면서도 사령관은 빠른 손놀림으로 홀로그램 영상을 터치, 그녀의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벌써 스틸라인 교전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군. 왜 보급을 기다리지 않았나?”

 

-단순한 이야기다. 사령관.

 

“..뭐?”

 

 싸늘한 그의 목소리와 반대되는 시니컬한 그녀의 짧은 대답에 사령관은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스피커 너머의 신속의 칸은 후훗-하는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자신의 말에 설명을 보충하기 시작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지닌 탄약은 앞으로의 전투를 생각해도 충분하다. 따라서 우리는 스틸라인과의 합세를 우선, 만일 보급이 필요하다면 그대가 보낸 스틸라인의 보급품으로도 충족할 수 있다.

 

“하지만 네 작전 계획서에는 그런 말은 명시되어 있지 않았잖나.”

 

 사령관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현장의 판단을 최우선으로 했다. 사령관. 이게 내 전술이다만, 불만스럽다면 다음부터는 주의하지.

 

 이어지는 그녀의 설명에 사령관은 아예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현장 최종 지휘 권한은 그에게 있었지만 전략도 전술에도 자신이 없는 그에게 그 권한을 휘두르는 것에는 큰 부담감이 따라왔다.

 무능하고 성실한 지휘관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고 하였나, 사령관은 자신이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불만은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 작전 계획에 변동사항이 있다면 내게 먼저 보고하도록.”

 

-알겠다. 사령관.

 

“우선 앵거 오브 호드의 보급부대가 기존 보급 포인트 인근에서 대기 중이다. 스틸라인과 합류하기 전에 일괄적인 보급을 마치고 재전투에 돌입해라.”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대의 호의를 거부하기 힘들지. 알겠다. 현재 포인트에서 대기하겠다.

 

“음. 이상이다. 무운을 빌지.”

 

-그래. 고맙다. 사령관.

 

삑-

 

 사령관은 단말기의 통신이 끝나는 순간, 재빨리 홀로그램 영상 위의 앵거 오브 호드의 바이탈 사인 위를 두들겼다. 이윽고 그 바이탈 사인 위에 보급 포인트를 재지정하고선 인근에 대기 중이던 보급부대 바이탈 마크를 쭉 당겨 수정된 보급 포인트에 가져다 대었다.

 

‘좋아. 이걸로 그녀들에게도 수정된 보급 포인트는 알려졌겠지.’

 

 사령관은 수정된 보급 포인트로 향하는 보급부대의 이동까지 확인하고선 홀로그램 영상 위에 검지와 엄지를 한 번 모았다가 쭉 위아래로 펴서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짓을 읽은 섬 모습의 홀로그램 영상이 축소되며 섬의 전체적인 상황을 읽을 수 있도록 모습을 바꾸었다.

 사령관은 재빨리 축소된 섬 위의 상황들을 두 눈에 담기 시작했다. 스틸라인의 북상 속도, 앵거 오브 호드의 보급 확인, 공중 기동 대원들의 제공권 확보 상황 등등 보고 읽어도 제대로 따라가기 힘든 보고서들이 가득했으나, 그것은 그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정찰망에 포착된 적의 섬멸 확인, 그리고 전장에 나가 있는 그녀들의 보급전달 확인과 보급망의 촘촘함. 그리고-

 

“안드바리!”

 

“네! 사령관님!”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아도 된다. 거기서 들어라!”

 

 사령관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목청을 높여가며 안드바리와의 대화에 임했다. 대화하는 그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홀로그램 위의 바이탈 사인의 변화에 꽂혀 있었다.

 

“네! 어떤 걸 원하시는 건가요?”

 

“스틸라인 보급 포인트에 들어간 물자들 중, 응급 약품들은 얼마나 포함되어 있었나!”

 

“어..여기있다. 실키 언니들이 1차적으로 들고 간 보급 물품 중 응급 물품들의 비중은 약 30%에요. 그중 세부항목들은 응급용 지혈 붕대, 외피 회복제. 혈액 응고제. 이렇게 3가지요!”

 

“2차 보급부대에 응급 약품들의 비중을 5% 추가해라! 현재 스틸라인의 바이탈 사인의 8%가 중상, 17%가 경상이다! 중상을 입은 대원들을 신속하게 구호 캠프로 이동시킬 수단 역시 보내겠다. 그쪽에 그렇게 전달하도록!”

 

“네! 사령관님!”

 

 그는 빠른 속도로 명령을 전달한 뒤에도 계속해서 스틸라인의 마크가 걸려 있는 바이탈 마크 하나하나를 읽어갔다. 분명 주홍빛이었던 마크들 중, 사이 사이로 붉은색으로 변색하는 바이탈 마크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확인한 사령관의 안색이 밝은 햇빛과는 반대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젠장.”

 

 속에서 끓어오르는 욕지기를 참지 못한 그의 입술 사이로 비속어가 섞여 나오자 동시에 뜨겁게 달아오르는 가슴의 감각과 정반대로 그의 머릿속에 차가운 감각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익숙해 질만도 되었건만, 사령관은 차갑게 식어가는 머리 위의 짧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계속해서 변화하는 전장의 상황을 읽어갔다.

 

‘..우선 전황 자체는 나쁘지 않아. 불굴의 마리나 신속의 칸이 조금 빠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것도 그녀들 말마따나 전술의 일환이겠지. 그래. 이제 후발대도 합류할 거야. 전장의 흐름은 우리에게 있어.’

 

“..알바트로스.”

 

 사령관은 전황을 읽어가다 이내 단말기에 대고 그의 직할부대, AGS 로보테크의 지휘관급 기체. HQ-1 알바트로스를 호출했다.

 그의 딱딱한 부름에 곧바로 그 못지않은 딱딱한 기계음이 단말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불렀나, 사령관.

 

“그래. 현재 함 내에 대기 중인 AGS는 몇이나 남았지?”

 

-현재 스파르탄즈 시리즈 2부대. 기간테스 3기. 포트리스 2기. 셀주크 3기. 라인히터 3기. 셰이드 1기. 그리고 나가 남아있다.

 

“..포트리스 2기와 셀주크 2기. 출격을 허가한다. 대상 지역은..”

 

-스틸라인 전선이라면 문제없다.

 

 알바트로스는 사령관의 명령을 예상했다는 듯 그의 말을 가로채고는 대화의 주도권을 쥐어 잡았다.

 

-현재 1차 AGS 강하부대가 불굴의 마리 휘하 스틸라인 제1대대와 진격을 감행하는 중이다. 그녀가 선두에 서서 진격을 하는 상태이기에 사기는 최고조다.

 

“...”

 

-따라서 여기에 추가 병력 지원은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후발대로 합류할 AA캐노니어 부대와 호라이즌 부대, 그리고 앵거 오브 호드의 전력을 합산한다면 AGS의 추가 지원은 오히려 그녀들의 진격 속도를 늦출 뿐이다.

 

 똑똑히 들으라는 듯이 올라오는 그의 전황 보고에 사령관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말을 잘했었나? 싶을 정도로 정론으로 파고 들어오는 알바트로스의 말에 사령관은 미간을 좁힐 뿐이었다.

 사령관이 말을 잠깐 멈춘 사이, HQ-1 알바트로스는 쐐길 박겠다는 듯 딱딱한 어투로 AGS들의 출격 불가 사유를 읆었다.

 

-그리고 현재 함에 남아있는 AGS들은 불시의 사태를 대비해 남아있는 기체들이다. 한마디로 사령관의 호위를 위한 개체이다. 잊지 말도록. 사령관. 현재 전장에 나서 있는 그녀들보다 그대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알겠다. 네 의견을 수용하겠다.”

 

삑-

 

“..누가 지휘관급 개체 아니랄까 봐.”

 

 사령관은 입술을 살짝 삐죽인 채 다시 홀로그램 영상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떠드는 와중에도 전황은 쉴 새 없이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그런 전황을 쫒는 사령관의 시야에 두 개의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마크. 그런데..’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전유물, 여성의 얼굴을 본뜬 문양이 두 개로 나뉜 것을 본 사령관은 다시 오른손을 들어 턱을 매만졌다.

 

‘..별동 부대로 나눈 건가. 레오나.’

 

 하나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부대는 모두 같은 소속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여러 바이탈 사인들의 중앙에 로고가 떡하니 박혀 있었지만, 섬의 외곽 지역에 있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마크는 단 한 개. 그리고 그 한 개의 마크 근처로 몽구스 팀의 바이탈 마크가 둘러싸고 있었다.

 사령관은 그 마크를 유심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내린 결정이라면, 문제는 없겠지. 항상 없는 변수도 생각하며 작전에 돌입하는 여자니까.’

 

 그렇게 사령관이 연신 보급 컨테이너 사이에서 골머리를 싸매던 중, 푸른 하늘 아래서 그를 바라보던 두 여성 중, 분홍색 장발의 여성이 자신의 오른편에 있는 선글라스를 낀 붉은 머리칼의 여성에게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대장. 사령관님이 혼자 있을 때는 지금뿐이에요.”

 

“..뭐. 내가 뭐라고 할까? 가서 열심히 잘하고 있어요~이럴까?”

 

“..하아. 진짜. 가서 그냥 아무 말이라도 하면 어디 덧납니까?”

 

“흥! 나 멸망의 메이가 뭣 때문에 저 남자한테 매달려야 해? 저 남자가 매달리면 모를까!”

 

 멸망의 메이가 귀찮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사령관의 정수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반대편으로 휙 돌려버리자 곁에 서 있던 나이트 앤젤은 고개를 들고는 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하늘 위로 내뱉었다.

 

“하아..진짜. 우리 대장님은 참~한결 같아서..제가 미치겠어요.”

 

“..흥. 뭐, 저 남자가 날 부른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내가 뭐가 아쉬워..”

 

쿠-웅!

 

 그녀들이 햇볕 아래 대화를 계속 이어갈 때, 갑작스러운 충격음이 들려오자 그 둘은 곧바로 시선을 그곳으로 돌렸다.

 현재 그녀들이 있는 오르카 1호 상공 아래는 모든 철충들이 일소된 곳, 그나마 전투가 발생하는 지역은 그녀들과 정반대에 위치한 섬의 북쪽이었기에 이 인근에서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향한 시선의 저편에 무언가가 환한 햇살 아래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들은 누가 무어라 할 것 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저거.”

 

“..철문인 거 같은데요?”

 

“아니. 저 검은색 형체는 뭐냐고?”

 

“..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뭔가 불길하네요. 생김새는.”

 

 멸망의 메이와 나이트 앤젤의 광활한 시야에 포착된 것은 푸른 하늘로 날아오른 물체는 반쯤 접힌 철문, 그리고 검은색 형체의 무언가였다.

 그것을 응시하는 것도 잠깐, 멸망의 메이는 재빨리 자신의 옥좌 위에 놓인 버튼 하나를 눌러 자신의 앞에 홀로그램 스크린 하나를 띄워 그 너머에 보이는 여성의 이름을 불렀다.

 

“다이카!”

 

-네. 대..장님.

 

“지금 전장에서 날뛰고 있는 애들 빼고! 전부 오르카 1호로 돌려보내! 어서!”

 

-네. 알겠..

 

삑-

 

 멸망의 메이는 다이카의 대답조차 기다리지 않은 채 그녀와의 통신을 꺼버리고는 이번엔 고개를 돌려 자신의 곁에 서 있는 부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이트 앤젤. 너는 어서 저 남자한테 가서 미확인 개체가 확인되었다고 보고하고 와!”

 

“좋은 기회네요. 대장님. 어서 가시죠.”

 

“장난칠 때 아냐!”

 

 짜증이 잔뜩 섞인 멸망의 메이와 달리 나이트 앤젤은 저 멀리 하늘 위에서 날아다니는 검은 물체를 응시할 뿐,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대화를 계속 건네었다.

 

“대장님 여기 두고 가면 저 미확인 물체를 향해서 공격할 게 뻔한 거 아닙니까?”

 

“미확인 요소는 언제나 최우선 배제가 우선이야. 그걸 잊었어?”

 

“..철충으로는 보이지 않으니 제가 경계하고 있겠습니다. 대장님이 다녀오시죠.”

 

“이씨! 너 부관! 나 상관! 잊었냐!”

 

 자신을 향해 연신 얼굴을 붉히는 상관의 외침에 나이트 앤젤은 어깨를 들썩이며 자신의 상관에게 안쓰럽다는 눈빛을 보내었다. 그러자 그녀의 허탈한 눈동자에 멸망의 메이가 되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왜? 왜 눈을 그렇게 떠?!”

 

“...오늘 하루만 대장님에 대한 제 평가가 몇 번이나 바뀌는지 아십니까? 아침 작전 회의도 빵꾸내신 분이. 어서 가보십시오.”

 

“...쳇.”

 

 나이트 앤젤의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과 눈빛에 멸망의 메이는 썬글라스를 다시 그녀의 붉은 앞 머리칼 위로 올려보냈다. 썬글라스가 가리던 그녀의 연보라빛 눈동자가 햇볕 아래 모습을 드러내자 나이트 앤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가서 보고하고 오십시오. 제가 애들 배치는 끝내둘 테니.”

 

“..보고만 하고 올 거야. 쳇.”

 

슈-웅

 

 멸망의 메이는 그 말을 끝으로 검은색 옥좌의 고도를 낮추며 점차 지면에 가깝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당연하게도 백사장 위의 보급기지 한가운데 서 있는 남성, 사령관의 머리 위였다.

 

“야! 사령관!”

 

“...멸망의 메이 소장. 무슨 일이냐.”

 

 그녀의 앙칼진 부름에 컨테이너 사이에 서 있던 사령관은 홀로그램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려 바라보았다.

 바닷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게 짧게 자른 흑갈색의 머리카락, 훤히 드러난 이마 아래 딱딱하게 올라간 그의 눈썹과 그 사이로 비치는 강렬한 눈동자. 멸망의 메이의 눈에 들어온 사령관의 얼굴은 여전히 그녀에게 부담스럽게만 비쳤다.

 

‘..나보다 웃을 줄을 모르는 인간이야.’

 

 멸망의 메이는 사령관의 얼굴을 한번 쓱 평가하고는 다시 고개를 홱 돌려버리며 담담히 자신의 용건을 이야기했다.

 

“북동쪽 해안가에서 미확인 개체가 나타났어. 확인이 필요해.”

 

“..미확인 개체? 북동쪽 해안가라면..”

 

 사령관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확인 개체라, 그로서도 짐작되는 것이 딱히 없었다. 하지만 북동쪽이라는 말을 다시 떠올리자 사령관은 재빨리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고개를 다시 돌렸다.

 

‘거긴 현재 레오나의 부대가 있는 곳이야. 그리고 그녀들이 향한 곳은..’

 

“..설마.”

 

“? 너 뭔가 아는 눈치다?”

 

 사령관의 중얼거림이 그녀의 귀에 들어간 것일까, 멸망의 메이는 그의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이려 자신의 고도를 더욱더 낮추기 시작했다. 점차 그와 그녀의 간격이 좁혀져 어느새 그녀의 옥좌가 컨테이너 위에 닿을 때쯤, 그녀의 곁으로 발소리도 내지 않는 어떤 이가 천천히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 이상 가까이 오면 주인님의 업무에 방해가 되니, 물러서 주시길.”

 

“...흥.”

 

 산뜻한 햇살 아래, 은발의 머리칼을 바닷바람에 맡긴 여성, 블랙 리리스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자 멸망의 메이는 콧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호박빛 눈동자와 자신의 연보라빛 눈동자를 맞대었다.

 

“주인님께 전달하실 사항이 있으시다면, 제가 전해드리죠. 멸망의 메이 소장님.”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경호대장.”

 

 까탈스러운 멸망의 메이의 대답에도 블랙 리리스는 여전히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녀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모르는 이가 보기에는 산뜻한 미소라 생각할 법도 하지만 멸망의 메이의 눈에 들어오는 그녀의 미소는 어딘가가 께름칙한 느낌이 드는 불편한 미소로 다가왔다.

 

‘볼 때마다 음습하기 짝이 없네. 도대체 저 남자 곁에는 멀쩡한 녀석이 없어.’

 

“사령관에게 직접 보고할 사안이니, 네가 나설 필요가 없어.”

 

 느린 걸음이지만 여전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블랙 리리스에게 멸망의 메이는 다시 한번 자신의 의사를 강하게 전했다. 그런 그녀에게 블랙 리리스는 아까와 같이 느긋함이 깔린 목소리, 하지만 가늘게 뜬 눈썹 사이로 호박색 빛을 발하는 눈동자를 꺼내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군요. 멸망의 메이 소장님. 후후, 소장님이 제 주인님을 어지간히 싫어하시는 거 같아서 제가 대신 전해드리려고 하는 건데. 괜한 참견이었을까요?”

 

“..잘 아네. 괜한 참견이야.”

 

“어머.”

 

 멸망의 메이의 단답에 블랙 리리스는 입가에 올린 미소를 거둔 채 그녀의 연보라빛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에 담긴 강렬한 적의가, 멸망의 메이에게 드러날 때쯤, 그녀들의 눈싸움을 끊는 한 마디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리리스, 이어폰.”

 

“네? 네, 주인님.”

 

 사령관의 짤막한 부름에 블랙 리리스는 멸망의 메이에게서 눈을 떼고는 곧바로 컨테이너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멸망의 메이에게 다가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사령관의 곁으로 착지했다.

 그런 그녀의 몸놀림은 위에서 바라보는 멸망의 메이조차 혀를 찰 정도였으나 사령관은 여전히 홀로그램 스크린을 응시한 채 그녀에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리리스, 토모의 연락이 들어왔다. 비밀 회선으로.”

 

“네, 주인님.”

 

 사령관의 입에서 토모라는 이름이 나오자 블랙 리리스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품에서 이어폰을 하나 꺼내어 그의 오른쪽 귀에 끼워주었다. 사령관은 이어폰이 꽂히자마자 오른손으로 그것을 꾹 누른 채 이어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집중했다.

 

-..전 AGS 로보테크 최고의 역작이자 하늘의 지배자, RF87 로크입니다.

 

‘..로크다. 진짜 로크였어.’

 

 오른쪽 귀에 꽂힌 이어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계음 소리에 사령관은 두 눈을 부릅떠 북동쪽 해안가에서 밝게 빛나는 바이탈 마크를 주시했다.

 그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 이유는 아마 사령관 자신이 직접 그 문을 열지 않아서일까. 사령관은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양 주먹을 꽉 쥔 채 계속해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뭐, 좋아. 그래. 이렇게 우릴 마중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맞습니다. 철혈의 레오나. 이제야 대화가 통하는군요.

 

‘..레오나.’

 

 귓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두 명의 목소리, 정확하게는 한 여성과 알바트로스와 비슷한 남성적인 어투의 기계음이 그의 귓속을 타고 들어와 사령관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반대를 무릎 쓰고서라도 직접 갔어야 했어.’

 

 사령관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자신이 직접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바이오로이드들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받는 게임 속 주인공과 달리 사령관 자신은 대부분의 결정을 지휘관들에게 떠넘겼기 때문에 주인공과 같이 홀로 다니는 행동 자체에 제동이 걸렸다. 아마 수색작전을 자신이 맡겠다고 했다간 불굴의 마리를 비롯한 그녀들에게 한참을 시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겼다고, 사령관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직면하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불안감을 쉬이 지우지 못했다.

 

-..그만. 그 이상 더 다가온다면 발포하겠어.

 

“...! 리리스. 지금-”

 

 철혈의 레오나의 무덤덤한 말소리, 하지만 그 내용에 사령관은 두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오른편에 서 있는 블랙 리리스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자신이 보았던 게임 속 스토리와 아예 다른 분위기가 그녀와 RF87 로크 사이에서 느껴지자 그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새도 없이 단말기 위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의 이어질 행동보다 귓가를 파고드는 총성이 더욱 빨랐다.

 

-타앙!

 

“...젠장!”

 

쾅!

 

 사령관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 철혈의 레오나의 권총에서 발포음이 들려오자 사령관은 제 분을 참지 못하고 꽉 쥔 오른 주먹으로 그의 앞에 놓인 철제 상자 위를 내리쳤다.

 그런 그의 행동에 블랙 리리스뿐만 아닌, 위에서 그를 주시하던 멸망의 메이 역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뭐야?”

 

“주인님? 괜찮으세요?”

 

-그런 같잖은 권총으로는, 제 몸에 그 어떤 흠집도 낼 수 없습니다. 철혈의 레오나.

 

-..그건 어떨까? 내 권총은 특수제라서..쎈 거 한 방.

 

-타앙!

 

“...리리스. 지금 함 내에 남아있는 전투원들은 얼마냐?”

 

 계속해서 들려오는 그녀와 로봇의 신경전, 사령관은 점차 뜨겁게 달구어지는 이마를 차가운 왼손으로 덮어 열을 식후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의도를 읽은 듯이 그의 목 뒤에서부터 올라오는 차가운 감각이 또다시 그의 머리 위 전체를 감싸기 시작하자 그는 힘겹게 두 눈을 껌벅였다.

 블랙 리리스는 단말기 위로 올라오는 인원 보고서를 훑기를 한번, 그의 안색을 살피는데 한번. 호박색의 눈동자를 이리저리 빠르게 굴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지금 현재 작전 수행 가능한 인원은 총원 72명이에요. 주인님.”

 

“..비전투 인원 제외하고.”

 

“..제외한다면 아마 30명 내외에요.”

 

“좋아. 비전투 인원들을 제외한 모든 장병에게 전투 지원을 대기시켜라. 한시가 급하다. 어서!”

 

“네. 주인님. 페로, 들리나요?”

 

 사령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하지만 살짝 끝이 올라간 그의 격한 어조에 블랙 리리스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재빨리 그의 곁에서 떨어져 자신의 자매에게 그의 명령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또각-

 

“..무슨 일인데 그래? 나한테도 좀 들려줘 봐.”

 

 어느새 자신의 옥좌에서 점프해 내려온 멸망의 메이는 한껏 미간을 찌푸린 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령관은 그녀의 작은 손바닥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080기관의 비밀 회선이다. 너에게는 들려줄 수 없다.”

 

“도움이 필요한 거라면 협력할 줄도 알아야지. 당신 능력에 감당하기 힘든 일이라면, 내가 하면 당신보다는 나을걸?”

 

 사령관의 축객령에도 멸망의 메이는 되려 콧소리를 내며 오른손을 들어 딱-하고 경쾌한 마찰음을 내었다. 그러자 그녀와 그의 머리 위로 다수의 인영이 보급기지 컨테이너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모습을 속속히 드러내었다.

 

“대장? 불러서 오긴 했는데. 우리 뭐 하면 되는 거야?”

 

“..저희 더는 안 싸워도 되나요?”

 

“배고픈데 저희 점심 언제 먹어요? 아! 사령관님이다!”

 

 색색의 머릿결이 돋보이는 그녀의 둠 브링어 대원들이 컨테이너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사령관은 그녀들과 멸망의 메이를 번갈아 보았다.

 

“..언제 불렀나?”

 

“내가 괜히 지휘관급 개체인 줄 알아? 당신처럼 늦장 부릴 바에야 이렇게 빠르게 행동하는 게 더 낫지. 안 그래?”

 

“작전 진행 도중이었을 텐데.”

 

“이제는 그 땅개들이 다 알아서 할 레벨이니까, 내가 굳이?”

 

 능청맞게 어깨를 까닥이는 붉은 머리카락 소녀의 거만한 미소에 사령관은 별수 없다는 듯이 잠깐 자신의 곁을 떠난 보디가드의 이름을 불렀다.

 

“...리리스!”

 

“네, 주인님. 어머, 내려오셨네요?”

 

“..흥!”

 

 그의 부름에 곁으로 다시 다가온 블랙 리리스는 옥좌에서 내려온 멸망의 메이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한번 건네고는 사령관의 곁에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는 짙은 컨테이너의 그림자에 숨어 허리춤에 달린 블랙 맘바의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사령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제게 더 시킬 일이라도..”

 

“소장에게 기밀 회선을 연결해주도록. 나는 대화에 집중하겠다.”

 

“...흐응. 예. 알겠어요.”

 

 사령관의 무덤덤한 명령에 블랙 리리스는 볼살이 실룩대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와 달리 멸망의 메이는 얼굴 위로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의 왼쪽 귓불을 드러내며 턱을 까딱였다.

 

“자, 네 주인님의 명령이야. 어서 나한테도 이어폰을 끼워.”

 

“...흐응. 뭐, 좋아요.”

 

 그녀의 자만심이 가득 담긴 부름에 블랙 리리스는 이전과 달리 싸늘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가 남아있던 왼쪽 이어폰을 꽂아주었다.

 하지만 멸망의 메이의 귓불에 이어폰이 꽂히기 직전, 블랙 리리스는 그녀의 왼쪽 귀에 대고 그녀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만약 제 주인님께 또 무례하게 군다면, 두고 봐요.”

 

“..뭐?”

 

“..자, 이제 연결되었어요.”

 

 서늘하다 못해 귓불이 차가워질 정도로 섬뜩한 목소리, 멸망의 메이는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블랙 리리스를 올려다보았으나 블랙 리리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긋이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주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멸망의 메이는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고는 시치미를 뚝 떼는 블랙 리리스에게 크게 한소리 하려 했으나 왼쪽 귀에 꽂힌 이어폰 너머로 그녀에게 익숙지 않은 기계음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곧바로 입을 꾹 다물곤 사령관과 같이 대화에 집중했다.

 

-흠, 하늘 위에 저들은 스카이 나이츠, 둠 브링어. 그리고 펙스 소속의 바이오로이드들도 섞여 있군요. 딱히 저들을 보지 않아도, 당신들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건 누구야?”

 

“RF87 로크라 하더군. 미확인 AGS다. 앙헬 리오보로스의 전유물이었던 것 같다.”

 

 멸망의 메이는 사령관의 대답을 듣는 동시에 블랙 리리스의 눈치를 보며 그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서서 쉴새없이 떠들어 대는 AGS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이렇게 많은 인형이 저마다의 소속이 다름에도 규합되는 것에는 인간이라는 통솔권자가 필요합니다. 그렇지않고서야 이런 대규모 군단이 제대로 통솔될 리가 없지요. 아, 만약 그대들의 군단에 무적의 용이라는 개체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만. 그녀는 제 주인의 콜 사인도 받지 않은 채 잠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뭔가 말이 많은 로봇이네. 혼자 잘도 떠들고.”

 

“아마 감정모듈이 탑재된 AGS라 그럴 거다. 그렇다 치더라도 말이 많은 녀석인 건 맞겠지만.”

 

“흐응.”

 

-거만하기 짝이 없는 도구이나, 제 주인께서 끝끝내 온전히 가지지 못해 아쉬워하셨던 물건이니 그만한 능력은 되겠지요. 하지만 그녀를 깨울 수 있는 것은 인간, 그렇게 말하고 떠났으니 어떻게 되든 그대들의 곁에는 인간이 있다는 소리가 됩니다.

 

 RF87 로크의 이어지는 대화에 사령관과 멸망의 메이는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의 존재를 유추해내다니, 멸망의 메이는 생각보다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하고는 여전히 컨테이너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둠 브링어 대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내었다.

 

‘전원 출격 대기.’

 

“? 대장,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손장난인가요? 저도 배우고 싶어요. 죽기 전에..”

 

“밥 시간이라는 소리 아니에요?!”

 

 당장 작전이 끝나면 무얼 할지, 멸망의 메이는 결심이 찬 눈빛으로 자길 내려다보는 대원들을 노려보았다. 

 

‘저 멍청이들, 작전 끝나고 두고 보자!’

 

-자 이제 그분을 이곳으로 데려오시죠. 제 제안은 그분에게 말하겠습니다. 그대들이 아닌.

 

“..멸망의 메이.”

 

“..어? 나 부른 거야?”

 

“그래.”

 

 부하들을 향해 작은 주먹을 꽉 쥐어 보이던 멸망의 메이는 사령관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몇 번 말을 걸어도 대화를 오래 나누지도 않던 사령관이 먼저 말을 걸어온 경우는, 그녀가 떠오르기로는 처음이었다.

 사령관은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라는 식으로 그녀의 연보라빛 눈동자를 한번 훑어본 채 자신의 앞에 놓인 홀로그램 패널을 그녀의 앞으로 가져다 놓으며 자신의 용건을 전하기 시작했다.

 

“네가 보았을 때, 지금 현재 스카이나이츠 전체를 회군시킨다면 육상 제압에 있어 문제가 있을 것 같나?”

 

“뭣..아..아니. 있어 봐.”

 

 멸망의 메이는 사령관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잠깐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 이내 그가 내민 홀로그램 패널을 유심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흥. 이제야 내 전술 판단이 필요하다고 들이밀긴. 흐흥. 그런다고 누가 순순히..’

 

“자, 여기 봐. 현재 우리 군단의 이동 경로 내의 철충들은 대부분 일소된 상태지?”

 

“그래.”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이 섬의 제공권에 목맬 이유는 더는 없어. 앞으로 남은 확보 구역은 섬 전체 면적의 약 15%. 따라서 스카이 나이츠와 같은 제공 특화 부대의 경우에 더 이상 이리저리 싸 돌아다닐 필요가 없지.”

 

“흐음.”

 

 멸망의 메이는 자신의 작은 검지를 홀로그램 패널 위 여기저기를 짚어가며 사령관에게 현재의 전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이 길어짐에도 사령관은 그녀의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패널 위 이곳저곳을 가리키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따라서 현재 출격한 스카이나이츠 분대원들은 남은 15% 지역의 제공권을 확보하는데 주력할 필요보다는 이제는 확보 가능한 물자나 긴급 이동 경로를 탐색하는 데에만 주력하면 그녀들의 역할은 끝. 나머지는 뭐, 내 부하들이 알아서 하니까.”

 

“그렇군. 고맙다.”

 

“..응?”

 

 전황 설명을 마친 자신에게 날아온 딱딱한 감사의 말, 멸망의 메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턱을 짚고 있는 사령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뚝뚝한 인상인 그였지만 그의 감사의 말은 정확하게 그녀의 귀에 꽂혔다.

 

“...흥. 진작에 물어볼 것이지.”

 

 새침하게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멸망의 메이였지만 그녀의 조언을 듣고 패널 위를 똑바로 바라보는 사령관의 모습에 그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전술도 전략도 모르는 사령관이니, 이 내가 도와줄 수밖에 없네. 흥.’

 

“그렇다면 멸망의 메이, 너에게 더 물어볼 것이 있다만.”

 

“뭐? 왜? 또 뭘 물어 볼려고?”

 

 사령관의 이어지는 질문에 멸망의 메이는 아예 그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사령관의 오른팔과 자신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까지 다가왔다. 그 광경에 위에서 그와 그녀를 주시하던 둠 브링어 대원들의 입에서 오오-하는 감탄사들이 터져 나왔으며 그들 사이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나이트 앤젤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오른 주먹을 꽉 쥐었다.

 

‘하려면 할 수 있잖아요. 대장. 후우, 이걸로 사령관님하고 대장님하고 좀 더 친해졌으면 좋겠는데..’

 

 눈동자 너머로 반짝반짝 빛을 내뿜는 둠 브링어 대원들과 달리,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블랙 리리스는 허리 아래 모은 양손을 꽉 쥔 채 사령관과 달라붙어 있는 멸망의 메이의 붉은색 뒤통수를 노려보기 바빴다.

 

‘이 썩을 땅꼬마년이! 매번 주인님께 반항하더니 이때다 싶어 주인님에게 다가오고!’

 

 멸망의 메이는 자신을 향하는 시선들을 느낄 새도 없는지 사령관의 이어지는 물음에 답하기 바빴다.

 

“현재 철혈의 레오나가 있는 포인트에 지원부대를 보내려 한다.”

 

“흐응, 뭐. 지금 이어폰 너머에서 들리는 대화가 썩 반가운 분위기 같진 않네. 그래서 아까 스카이나이츠들에 대해서 물어 본 거야?”

 

“그래. 지금 당장에 그쪽으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그대들은 인형일 뿐. 저와 대화할 가치가 없는 이들입니다. 만약 제 요구를 수용하지 않겠다면 더 이상 당신들을 존중해야 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군요.

 

“...”

 

 이어폰 너머에서 들리는 RF87 로크의 기계음에 사령관의 입술이 말을 끝내기도 전 꾹 닫히고 말았다. 멸망의 메이 역시 사령관과 같이 입이 닫고 이어폰 너머의 대화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이 이상 대화를 끈다면, 저도 별수 없습니다. 영리한 이라면 제 제안을 받아들일 텐데, 어찌하시겠습니까?

 

-소..소장님.

 

 딱딱한 기계음과 달리 크게 흔들리는 불가사리의 목소리, 사령관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꿋꿋이 위로 치켜 올라간 눈썹과 달리 그 속의 눈동자는 살짝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멸망의 메이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그의 오른 어깨 위에 약간의 힘이 실린 주먹을 내질렀다.

 

퍽!

 

“윽!”

 

 가볍게 내지른 주먹이었으나 그는 인간, 바이오로이드인 멸망의 메이가 내지른 주먹에 몸을 크게 기우뚱거리며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 어깨를 감싸 쥐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폭력에 사령관이 말없이 두 눈을 부라리자 멸망의 메이는 양손을 허리춤 위에 올리고는 그를 향해 불만이 한가득 담긴 눈빛과 함께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야? 사령관. 당신이 지금 이렇게 머뭇댈 시간이 어디 있어?”

 

“...”

 

“당신이 머뭇대면 이어폰 너머의 저 녀석들이 더욱 힘들어질 뿐이야! 못 미더운 꼴을 보이는 건 작전 회의실이면 충분하잖아.”

 

 그녀의 날이 선 타박에 사령관은 부라리던 눈썹을 한껏 내려 앉히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회답했다.

 두 눈썹을 한번 꾹 누르듯 깊게 눈을 감고 있는 사령관의 모습을 바라보던 멸망의 메이는 팔짱을 끼며 사령관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조금 고치기 시작했다.

 

‘..못 미더운 건 둘째치고, 생각보다 담력이 없네. 작전 회의실에서 보여주던 모습은 억지로 하는 건가? 이 인간.’

 

 작전 회의실에서 자존심 강한 자신마저 압도하는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만을 봐오던 그녀에게 이처럼 흔들리는 사령관의 모습은 새롭게 다가왔다.

 

‘..흥, 못 미더운 인간이라는 건 확실하네. 괜히 매번 한발 물러섰잖아.’

 

 여태껏 봐왔던 그의 행동이 연기처럼 느껴지자 멸망의 메이는 왠지 자신이 그간 그에게 속았다고 느꼈다. 작전 회의실에서 항상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던 사령관의 살벌한 눈빛 너머에는 이런 일면도 있구나라는 걸 그녀는 오늘에서야 발견한 것 같아 어제 부관이 건넨 말의 의미를 다시 곱씹기 시작했다.

 

‘..성장, 성장이라. 이 남자의 성장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흐응..’

 

 멸망의 메이의 머릿속이 한창 복잡해질 때즈음, 사령관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꾹 감고 있던 두 눈썹을 열어 재끼는 동시에 단말기를 들어 올렸다. 

 

“..토모, 휴대폰을 스피커 모드로 바꾸고 RF87 로크라 불리는 AGS쪽으로 걸어가라.”

 

-응? 알았어. 사령관.

 

-? 토모, 지금 뭐라고 했어?

 

 미호의 어리둥절한 물음이 스피커 너머에서 들려왔지만 토모의 회답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의 음성통화가 스피커모드로 바뀌었다는 삑-거리는 비프음이 들려오자 사령관은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정도면 되었다. 철혈의 레오나.”

 

-..사령관?

 

 당혹스러움이 묻어나오는 그녀의 목소리, 사령관은 애써 그것을 무시한 채 그녀들의 상황을 상상해가며 어떤 말을 해야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지에 대해 머리를 최대한 굴리기 시작했다.

 

-사령관, 이렇게 하면 돼?

 

“그래. 토모. 조금 더 가까이 붙어라.”

 

 얼마나 가깝게 붙은 것인지 사령관이 알 방도는 없었으나 최대한 자신의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야 한다고 사령관은 결론을 내렸다.

 그런 그의 의도가 먹힌 것일까, 스피커 너머의 AGS의 관심이 자신에게 곧바로 넘어왔다.

 

-..당신이 그녀들의 통솔권자입니까?

 

 호감보다는 의심이 더 강한 어조, 사령관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 RF87 로크. 네 이야기는 모두 듣고 있었다.”

 

-호오. 생각보다 영민하신 분이군요. 등장하는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는 겁니까?

 

“...”

 

 딱히 그런 것은 아닌데, 사령관은 입술이 달싹대는 것을 참기 위해 왼손으로 입술을 살짝이 가렸다.

 

“등장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라. 사령관, 당신 항상 이런 식으로 고평가를 받았던 건 아니겠지?”

 

“...”

 

 왠지 옆에서 히죽대는 것만 같은 멸망의 메이의 장난스러운 물음을 애써 무시하고 있자니,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

 

-..사령관. 등장하는 타이밍이 나쁘지 않네.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방금까지 RF87 로크와 대치하고 있던 철혈의 레오나의 목소리가 이어폰 너머를 통해 들려오자 사령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도 이 녀석은 뭐 하는 녀석인지 몰라. 당신이 나왔다는 건-

 

 철혈의 레오나의 한껏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사령관은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자신의 의사를 확고히 전달했다.

 

“괜찮다. 철혈의 레오나. 내게 맡겨라.”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는 사령관이었으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쉬이 지워지지 못했다. 당초에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그는 자조적인 생각을 담아 그녀의 걱정을 애써 받아넘겼다.

 그런 그의 의도가 전달된 것인지 철혈의 레오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바통을 넘겼다.

 

-하아. 전원 전투태세 해제.

 

-네? 아, 네! 드라코, 이제 방패를 내려도 좋아.

 

-..하아아..죽는 줄 알았어. 아니, 뭐. 난 영웅이니까, 죽는 게 두려운 건 아닌데. 헤헤.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어폰 너머에서 각양각색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철컹대는 소리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이어폰 너머에서 들려올 때쯤, 불만이 가득한 앙칼진 소녀의 목소리도 그 사이에서 들려왔다.

 

-하아, 사령관 아니었으면 오늘 죽을 뻔했어. 사령관, 이럴 거면 좀 빨리 나오지 그래!

 

“맞아. 좀 빨리 빨리 행동했으면 얼마나 좋아?”

 

 계속해서 곁에서 추임새를 넣는 멸망의 메이를 향해 사령관은 한껏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이제는 사령관의 일면을 보게 된 그녀에게 그 눈빛의 효과는 크게 반감되었는지 멸망의 메이는 턱을 까딱이며 양 속눈썹을 가로로 길게 늘이며 눈웃음을 지어주는 것으로 회답했다.

 

-저기, 저기. RF87 로크라고 했지?

 

 활기찬 트리아이나의 목소리, 사령관은 금세 그녀의 발랄한 목소리를 듣고는 멸망의 메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오른 귀에 달린 이어폰에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당신들의 사령관이라는 남성과 대화 중이니. 방해하지 마시길.

 

“...”

 

 감정모듈을 장착한 탓일까, RF87 로크의 말 속에는 역겨움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아 사령관의 딱딱한 얼굴 위로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진짜 크다! 우와아아! 날개, 날개도 달려있어! 이거, 진짜로 비행 용도로 설계된 날개야? 장식이 아닌 거지? 이렇게 세밀한 구조를 지닌 AGS는 처음 봐!

 

 RF87 로크의 축객령에도 트리아이나는 개의치 않는지 여전히 발랄한 목소리로 그 로봇에게 연신 무언가를 물어보기 바빴다.

 너무 쾌활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그 누구라도 기가 죽을 법한 지휘관급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밝힌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 사령관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웃음기는 RF87 로크의 이어지는 말에 싹 지워지고 말았다.

 

-...듣기 나쁜 소리는 아니군요. 하지만 당신의 평가는 제게 무가치합니다. 그러니 대화를 끊지 마십시오. 암컷 유기체.

 

“...”

 

 아까까지의 철혈의 레오나와의 대화에서도 RF87 로크는 암컷, 유기체 등의 단어들을 그녀를 향해 서슴없이 내뱉었다는 것을 기억해낸 그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아닌 짜증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몸을 지탱하기 위에 보급 박스 위에 올려둔 그의 왼손이 소리 없이 동그랗게 말려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폰 너머의 로봇의 말에 불쾌감을 느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싸가지 없는 AGS네. 흥. 자긴 얼마나 잘났다고. 상판떼기 구경이나 좀 하고 싶어지네.”

 

 멸망의 메이는 미간을 한껏 구기고는 분노를 감추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그의 귓불을 간질이자 사령관은 휙-하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 왜..왜?”

 

“...그거다.”

 

“응?”

 

 멸망의 메이는 갑작스러운 사령관의 행동과 말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령관은 재빨리 입을 열기 시작했다.

 

“RF87 로크, 내게 제안할 것이 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인형들의 영민하신 주인이시여. 그대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겁니다.

 

딱-딱-

 

 사령관은 꽉 쥐고 있던 왼주먹을 풀어 왼손 검지로 보급 박스 위를 약하게 두드리며 무덤덤이 말을 이어갔다. 정확하게는 그의 목소리의 음의 높낮이는 여전히 평탄했으나 말의 속도는 조금 빨랐다.

 

“그건 내가 결정할 이야기다. 네 생각은 별로 중요치 않아.”

 

-..호오. 그렇군요. 맞습니다. 영민하신 이여. 제가 주제넘게 나섰군요.

 

“영민이라, 상대를 만나보지도 않고 쉬이 판단하려 들다니. 주제가 넘어도 한참 넘었군.”

 

-이거, 계속해서 실례를. 부디 노여움을 푸시길.

 

“? 야, 사령관. 너..”

 

 여전히 딱딱하고 거친 눈썹 사이로 올곧은 눈동자를 빛내는 사령관이었으나 여느 때보다 빠르고 힘이 실린 그의 어조에 멸망의 메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오른팔 위를 가녀린 자신의 왼 검지로 꾹꾹 눌러대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지금 목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회로의 제어보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에 온 정신을 맡기고 싶었다.

 

-그래서 제 제안을 들어보시겠습니까?

 

“..좋다. 네 제안을 수락하는 건 들어보고 나서 결정하도록 하지.”

 

-오! 그것참. 다행이군요. 좋습니다. 지금 이..

 

 자신의 제안을 들어주겠다는 사령관의 말에 RF87 로크는 호기롭게 말을 이어가려 했으나, 사령관은 그보다 한발 빨리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현재 나는 섬의 남동쪽 해안가에 정박한 잠수함에 있다. 그곳으로 와라. RF87 로크. 거기서 듣겠다.”

 

삑-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이던 혓바닥이 입술 사이로 모습을 감추는 순간, 사령관은 무덤덤한 얼굴로 단말기를 두드려 통신을 종료했다. 폭풍같이 쏟아지던 그의 말과 행동이 끝난 순간까지 그의 곁에 서 있던 멸망의 메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냐? 멸망의 메이 소장.”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탓이었을까, 사령관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애써 눈을 맞춘 채로 다시금 입을 놀렸다.

 불만이 있으면 해보라는 식으로 퉁명스럽게 말을 건 사령관의 어조에도 멸망의 메이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짙은 두 눈썹을 껌벅이다 이내 그의 앞에서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밝은 미소를 지으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하핫! 하하! 하하핫! 야, 너..아하하!”

 

“...?”

 

 무언갈 말하려고 해도 웃음이 멈추지 않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웃고 떠들기를 반복하다 몸을 가누키 힘들어졌는지 홀로그램 패널이 놓인 보급 박스 위로 엉덩이를 앉혔다. 그럼에도 그녀의 웃음은 멈출 줄은 몰랐다.

 

“아하하! 하핫! 하하핫!”

 

 그녀의 기이한 행동에 사령관과 블랙 리리스는 눈썹을 찌푸렸고, 컨테이너 위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둠 브링어 대원들은 역시 눈썹을 찌푸린 채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기, 부대장. 우리 대장 미친 걸까?”

 

“미칠 거면 좀 곱게 미쳐야 할텐데..”

 

“아하하! 아핫!..야! 나이트 앤젤! 너 돌아가면 두고 봐!”

 

 계속해서 깔깔대며 웃던 멸망의 메이는 크게 웃는 와중에도 부관의 중얼거림을 듣긴 했는지 컨테이너 위에 서서 한심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나이트 앤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찌푸린 와중에도 실컷 웃은 탓인지, 그녀의 아랫눈썹 끝에는 물기가 서려 있자 사령관은 RF87 로크와 이야기하던 때처럼 제 왼손 검지를 보급 박스 위에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실컷 웃었나?”

 

“아아, 어. 덕분에 복원된 이래 처음으로 실컷 웃었네. 아, 사령관. 당신 생각보다 웃긴 인간이네.”

 

“...하아?”

 

 멸망의 메이가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내며 던진 말에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블랙 리리스는 찡그린 인상을 한껏 더 찡그렸다.

 

‘이 여자, 드디어 미친 건가요?’

 

 자신을 째려보는 호박색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멸망의 메이는 여전히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사령관의 딱딱한 인상과 마주 보며 아예 그의 오른 어깨 위에 손을 얹어 그의 하얀 셔츠 위를 탁탁하고 내리치며 말을 이어갔다.

 

‘여전히 재미없는 얼굴이지만, 뭐.’

 

“당신에게도 짜증이라는 감정 정도는 있나 봐? 사령관.”

 

“..여태까지 눈치를 못 챘나? 네 행동에 매번 짜증 정도는 냈던 것 같은데.”

 

 사령관은 계속해서 자신의 어깨 위를 툭툭 치는 멸망의 메이의 오른손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왼쪽으로 한 걸음 물어서며 그녀를 쏘아붙였다. 이전 같았으면 그녀는 이쯤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피했겠지만-

 

“흥! 당신의 생각 따위, 내가 알 바야?”

 

 도리어 멸망의 메이는 검은 제복 위에 얹힌 자신의 붉은 빛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입가에 싱긋이 미소를 올려 보였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에 사령관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고 그런 그의 반응이 즐거운 듯 멸망의 메이는 앉아 있던 보급 박스 위에서 내려와 보급 컨테이너 사이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다문 사령관 대신 대화를 이어갔다.

 

“스카이 나이츠의 전대 지휘권은 나한테 넘길 거지? 아니, 넘겨. 그편이 훨씬 수월할 거야.”

 

“이 썩을..”

 

 멸망의 메이 특유의 오만한 어투에 블랙 리리스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연신 만지작대던 블랙 맘바를 뽑으려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려 했으나 그 행동은 이내 그녀 어깨 위에 얹힌 투박한 남성의 손에 가로막혔다.

 

“리리스. 그만.”

 

“..네에.”

 

“알겠다. 멸망의 메이 소장. 슬레이프니르 전대장에게는 내가 따로 연락해두지.”

 

“좋아. 시원시원해서 좋네. 그럼 이만 가볼게. 당신은 어서 함교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전투가 발생할지도 모르니까.”

 

“그래. 수고하도록.”

 

 사령관의 무뚝뚝한 격려에 멸망의 메이는 고개를 잠깐 그에게 돌렸다. 여전히 딱딱한 인상, 처음 봤을 때부터 저 얼굴이 맘에 들지 않았다고 그녀는 잠깐 그때의 기억을 회상했다.

 오만하게 굴어도, 짜증을 부려도. 그는 항상 저 얼굴로 일관된 태도를 보였었기에 자신이 인간이 아닌 AGS를 상대하는 것 같아 그의 얼굴을 볼 때면 왠지 모를 불쾌감을 쉬이 지우지 못했었다.

 

‘뭐, 그 암사자랑 닮은 것 같아서 더 짜증이 났던 것도 있지만.’

 

“흥! 당신이 그런 말 안 해도 나는 알아서 잘하거든? 내가 누군지 잊었어? 난 멸망의 메이, 둠 브링어의 지휘관이라고.”

 

 당찬 그녀의 대답에 사령관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여전히 재미는 없는 반응이지만, 이제는 이전처럼 딱히 불쾌하다던가 기분 나쁘다던가 그런 생각이 더는 들지 않았다.

 그도 그만의 생각과 감정이 있다는 것을, 항상 골머리를 싸매는 듯한 행동에는 분명 그만의 성장이 있었다는 걸 멸망의 메이는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하늘 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무려 이 내가 맡을 거니까.”

 

“휘-유! 대장! 저희 이제 뭐 해요?”

 

“..또 전투인가요?”

 

“흐잉..배고픈데..”

 

 그녀가 컨테이너 사이 그 너머로 걸음을 옮기자 컨테이너 위에서 대기하던 둠 브링어 대원들 역시 하나씩 모습을 감추었다.

 멸망의 메이는 천천히 모래사장 위로 내려오는 자신의 옥좌 위에 작달막한 발을 얹으며 방금까지의 당찬 목소리 대신 사령관과 같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원 전투태세 준비. 곧 왠 미친 AGS 하나가 이곳으로 올 거야.”

 

“..역시 그건 AGS였나요?”

 

 천천히 고도를 높이는 그녀의 옥좌 곁으로 나이트 앤젤이 가볍게 날아올라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채 다가와 물었다.

 멸망의 메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풍성한 앞 머리칼 위에 얹어둔 자신의 선글라스를 내려쓰며 자신의 부관에게 회답했다.

 

“응. 꽤 싸가지 없는 녀석이더라고.”

 

“AGS가 싸가지가 없다뇨. 말이 뭔가 맞질 않는데요.”

 

“몰라.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멸망의 메이는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허공에 왼손을 휘적대며 오른손으로 옥좌 위 패널들을 두들겼다. 그녀의 두드림에 응답하듯 검은 옥좌 위로 주홍빛의 홀로그램 패널들이 줄지어 모습을 드러내자 멸망의 메이는 그것들을 하나씩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나이트 앤젤은 피식하고 콧소리를 내며 그녀들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그건 그렇고, 역시 가보길 잘 했죠?”

 

“..뭐, 나쁘진 않았어. 그리고 네가 했던 말, 조금은 이해가 가네.”

 

“? 무슨 말이요?”

 

 멸망의 메이가 무덤덤이 내던진 한 마디에 나이트 앤젤은 고개를 갸웃대며 멸망의 메이의 선글라스 너머 눈동자를 응시했다.

 멸망의 메이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반짝이는 연보라빛 눈동자를 다시 햇빛 아래로 드러내며 입술을 삐죽였다.

 

“네가 그랬잖아. 저 녀석의 성장을 지켜봐 달라고.”

 

“아아-그거요? 신경 쓰고는 계셨습니까? 그런 분이 아침 회의를 빼먹으시긴.”

 

“흥, 뭐. 네 말마따나 별로 신경 쓰고 있었던 건 아냐.”

 

“..던 건이라는 말은 이제는 신경쓰인다는 말이죠?”

 

“...”

 

 의표를 제대로 찔렸다는 듯 멸망의 메이는 살짝 내렸던 선글라스의 중앙 다리를 쓰윽 올리며 자신의 눈동자를 재빨리 감추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나이트 앤젤은 히죽이며 자신의 얼굴을 그녀에게 밀어 넣기 시작했다.

 

“어라? 직접 오지 않으면 신경도 쓰지 않겠다던 우리 대장님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걸까요?”

 

“..시꺼. 그런 거 아냐.”

 

“그런 거 아닌 거 치곤 꽤 동요하시네요. 뭐, 관계가 진전된 것 같은데. 어쩔까요? 호드랑 스틸라인 애들이 작성 중이던 부관 변경 요구서, 그거 저희도 올려볼까요?”

 

 나이트 앤젤의 능글맞은 물음에 멸망의 메이는 볼을 긁적이다 이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흥. 네 좋을 대로 해. 난 그런 귀찮기만 한 자리에 하나도 관심 없어.”

 

“네. 네. 그러시겠지요.”

 

“그런 건 뒤에 생각하고. 자, 손님 맞을 준비나 해. 스카이나이츠 애들도 곧 올 테니 걔들한테 어리숙한 모습을 보였다간 전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예-예. 명심하겠슴다- 대장님.”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었다는 듯 나이트 앤젤은 고도를 높이며 그녀의 곁을 떠나 다른 둠 브링어 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분홍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나이트 앤젤의 등을 바라보던 멸망의 메이는 고개를 내려 시선을 백사장 위로 돌렸다. 그곳에는 함내로 걸어가는 사령관의 모습과 그의 뒤를 따르는 블랙 리리스, 그리고 언제 합류했는지 모를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대원들이 바이케이드와 같이 차곡차곡 쌓이는 보급 컨테이너 뒤로 저마다의 전투 배치에 한창이었다.

 멸망의 메이는 그들 중에서도 함장모를 꾹 눌러 쓰는 사령관의 정수리를 응시하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열심히 발버둥 치는 인간이라. 뭐, 아직 사령관에 어울리는 인간이라 인정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해 봐. 멸망의 메이는 마지막 한마디를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그의 정수리에서 눈을 떼고 시선을 다시 드넓게 펼쳐진 지평선으로 돌렸다.

 우거진 수풀들과 연신 피어오르는 회색의 연기,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푸른 하늘과 바다, 멸망의 메이는 오른손을 둥글게 말아쥐고는 그 위로 뺨을 괴었다.

 오늘따라 빨리 이 소동을 끝내고, 작전을 끝내고 빨리 쉬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그 이후에 무얼할까라는 짧은 물음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얼빵한 저 아랫 녀석들은 전부 훈련에 던져 놓고, 나이트 앤젤이랑 해수욕이나 할까? 아니면-

 

‘..저 인간, 쉬기는 하겠지? 만약 쉬러 나오면. 그때 또 말이나 걸어 볼까? 놀리는 재미는 쏠쏠할 거 같네.’

 

 어떻게 놀리면 또 저렇게 화를 낼까? 멸망의 메이는 앞으로 무슨 방식으로 사령관을 놀려 먹을 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재미없는 저항군의 생활에 소소한 심심풀이를 발견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옥좌 위에 올려진 왼손 검지가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딱딱한 패널 위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는 사령관의 찡그린 얼굴을 보았을 때와 같이 작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

 

막간) Day 77, AM 09:57

 

쿠-웅! 쿠-웅!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는 새하얀 백사장 위로, 녹색빛의 컨테이너들과 군녹색의 거체를 뽐내는 AGS, 기간테스 3기가 해안가에 정박한 새하얀 범고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백사장 위를 가득 채운 기간테스들의 팔에 달린 거대한 방벽의 그림자 속에 흰 제복을 걸친 여성들이 몇몇 숨을 죽인 채 자신들의 화기를 양손에 꼭 쥐고 있었다.

 

철-컹

 

“모두 제자리로 이동해라! 대장님이 자리를 비운 현 상황에서 오르카 1호는 우리 손으로 지킨다! 알겠나!”

 

“예!”

 

우르르-

 

 새하얀 범고래, 오르카 1호의 갑판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 안에서 회갈색의 군복을 입은 스틸라인의 전투원들이 저마다의 군홧발 소리를 내며 햇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령관의 작전 수정을 받아들인 불굴의 마리가 함 내에 잔류시켰던 병력이었다. 오늘은 작전에 안 나가도 되니 좋지 말입니다-라고 떠들던 브라우니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오만 인상을 찌푸리며 휑한 갑판 위에 간이 방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흐어어..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말임다. 오늘 저희 작전 제외 아녔슴까?”

 

“..시끄럽고, 얼른 설치해. 임펫 4호 중사가 지금 너 노려본다.”

 

“흐에엑!”

 

 브라우니들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엄폐물을 설치하는 그 아래, 오르카 1호의 함교 내부는 시끄러운 위와는 달리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배틀 메이드들은 저마다의 소총을 손에 쥔 채 긴장감이 잔뜩 서린 눈동자로 함교의 전면을 둘러싼 강화유리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았고, 페로는 자신의 단분자 클로의 발톱을 드러낸 채 사령관의 등 뒤에 몸을 밀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함교의 한 가운데 서서 팔짱을 낀 사령관의 곁으로 블랙 리리스가 한 걸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주인님. 각 부대 전투 인원 배치. 완료했습니다.”

 

“...”

 

“그리고 슬레이프니르 전대장 역시 귀환, 둠 브링어의 멸망의 메이 소장에게로 지휘권을 위임한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

 

“..철혈의 레오나 소장이 보낸 미확인 AGS 정보는 현재 닥터와 HQ-1 알바트로스가 분석에 들어갔습니다.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주인님.”

 

“...”

 

 사뭇 비장함이 깃든 그녀의 말에도 사령관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쉽사리 입을 열지 않은 채 그저 유리 너머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 위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블랙 리리스는 제 주인의 생각을 쉬이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필 그 암사자가 자리를 비운 날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지금 이 자리에 없는 한 여성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블랙 리리스는 자신의 양손에 들린 제 권총의 방아쇠를 검지로 매만졌다.

 

‘그 여자가 여기에 있었다면, 주인님께 무어라 했을까?’

 

 무슨 조언을 해드려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블랙 리리스는 현 상황에서 자신이 주인의 짐을 덜어 드릴 수 없다는 사실에 눈썹을 찌푸렸다. 가장 급박한 상황에 무력한 자기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던 블랙 리리스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때, 사령관의 무거운 입이 그녀를 향해 열렸다.

 

“리리스.”

 

“네? 네! 주인님.”

 

“..경호, 잘 부탁한다.”

 

“..아!”

 

 짧으나 자신을 향한 격려의 한 마디, 블랙 리리스는 그의 부탁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철혈의 레오나처럼 그에게 선뜻 전략적, 전술적 조언을 해드릴 순 없어도 그를 지키는 일이라면 이미 그와의 첫 만남 때부터 해오던 일이다. 그 사실을 되새긴 블랙 리리스는 사령관의 등에 착 달라붙은 제 동생과 눈을 맞추고 그의 곁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여태껏 꺼낸 일이 없던 그녀의 로즈 아줄이 그녀의 허리춤을 떠나 상공에 부유한 채 그의 어깨 위에 안착했다. 이제 그에게 핵폭격이 떨어진다 한들, 그의 신체에 생채기조차 내지 못하리라. 블랙 리리스는 콧구멍을 크게 열어 숨을 길게 쉬었다 내었다를 반복했다.

 

콰과아-앙!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적막만이 맴돌던 하늘 아래, 황금의 섬광이 가공할 만한 파공음을 터트리며 적막을 찢고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왔나.”

 

-이거, 예상보다 호화로운 환영회로군요. 인형들의 주인이시여.

 

 푸르른 하늘 아래, 검은색과 금색의 배합이 적절히 이루어진 찬란한 몸체, 그 사이로 비치는 짙은 적색의 안광. 가히 인간의 창조물 중 이리도 아름답고, 섬세한 자태를 뽐내는 것이 있을까, 거대한 흑색의 날개 사이로 황금빛의 전자기를 내뿜는 RF87 로크의 화려한 등장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가 입을 벌린 채 햇살 아래 환한 반사광을 내뿜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철-컥

 

 모두가 입을 벌린 채 그것을 주시하는 동안, 블랙 리리스는 제 애총, 블랙 맘바의 안전장치를 해제한 채 가슴께 위로 양팔을 교차해 들어 올렸다. 그 어느 때보다 눈썹을 치켜올린 그녀는 여차하면 강화유리를 뚫고, RF87 로크를 쏴버릴 생각이었다.

 RF87 로크는 상공에 부유한 채 천천히 고도를 낮추며 마치 동물원에 온 아이와 같이 하늘 위에 떠 있는 둠 브링어 대원들과 스카이나이츠 대원들 그리고 백사장을 가득 채운 AGS들과 갑판을 메운 스틸라인의 병사들을 훑어보다 최종적으로 함교의 유리 너머에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노려보는 딱딱한 인상의 남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어라 불러드려야겠습니까? 인간님.

 

 마치 예의바른 신사를 보듯, RF87 로크는 제 오른팔을 들어 가슴께 들어 올린 채 사령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에 그에게 총을 겨누던 이들의 눈썹이 껌벅였으나 사령관은 그들과 달리 쭉 찢어진 눈썹을, 더욱 가늘게 늘이며 딱딱하다 못해 한기가 서린 목소리로 그에게 회답했다.

 

“좋을 대로 불러라. 함장이든, 사령관이든. 아니면-”

 

 오른 손목에 걸린 단말기에 입을 대고 말을 이어가던 사령관은 잠시 말을 끊고는 내리깔은 두 눈에 힘을 한번 주었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최후의 인간이든.”

 

 그의 회답에 숙이고 있던 RF87 로크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가 마치 사령관과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이 그의 희번덕이는 눈동자에 제 적색의 안광을 맞추었다. 얼굴 위로 일절 미동도 보이지 않는 사령관과 철판으로 만들어진 RF87 로크는 그렇게 서로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은 채 한참을 서로 주시하기만 했다.

  일초가 마치 일분처럼 느껴지는 짧고도 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흥미롭다는 듯 목소리 톤을 한층 끌어올린 RF87 로크였다.

 

-그것 참, 무어라 해드려야 할지. 오만하고 무겁기 그지없는 호칭이로군요. 최후의 인간이시여.

 

“..그래. 그렇지.”

 

 정확하고 솔직한 RF87 로크의 평가에 사령관은 무심코 자신의 입꼬리를 살짝이 올려 보였다. 그의 작은 웃음에 RF87 로크의 검은 날개 위의 황금색 테두리가 열리며 그 속에서 금빛의 전자기가 새어 나왔다. 

 RF87 로크가 사령관이라 불리는 이 남성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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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진 3주만에 글 올린다. 원래는 40번 플룻을 다 써둔 상태였는데, 막상 써놓고 보니까 재미도 딱히 없고 이게 내 한계구나 싶어서 아예 창작하는 걸 그만뒀어.

 당초에 이렇게 리오보로스는 길게 쓸 생각도 없었는데 나중을 생각해서 전투씬 묘사라던가, 캐릭터들 하나하나 대사를 참조해서 사령관과 바이오로이드들의 연관 관계에 대한 관계성과 후일에 벌어질 일들에 대한 개연성을 보완해볼 목적으로 좀 길게 써보기 시작했는데 아, 난 못 해먹겠다 싶더라고. 진짜 글 하나 쓰는게 이렇게 어렵구나, 캐릭터 대사 하나 쓰는게 이렇게 생각할 게 많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글 올리지도 않고 잠수탔다.

 원래부터 보는 사람도 적었고, 차피 라오챈에 올라오는 문학들 중 절반이 소리소문 없이 연중하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시피 일어나서 나도 조용히 그 중 한 명이 되려고 했다.

 감정 묘사도 장면 묘사도 뭔가 가면 갈수록 늘어지기만 하고, 결국 30만자나 써가면서 내용 진척은 1도 없고. 귀찮아지기까지 하니 결국 일본 경마겜에 빠져서 잊고 살았다. 그런데 한 3일 전인가 컴퓨터 키니까 알림이 오더라.

 글 갱신 안 한지 3주나 되었는데 다음 편 보고 싶다는 댓글이 올라왔던 거더라고. 그거 보니까 내가 책임감 1도 없었구나, 이 장문의 팬픽을 기다리는 인간도 있구나 싶어서 3주 전에 쓰다만 41번 플룻을 4일동안 또 써내리기 시작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번 편으로 32만자를 돌파한, 팬픽치고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긴 문학이 되었다. 언제 끝낼지는 모르겠다. 나도 현생 살아야지. 또 현타 먹고 잠수 탈 지도 모르고. 앞으로 써야할 이야기들 대충 생각만해도 30만자는 더 추가해야 할 걸.

 만약 진짜 못 해먹겠다 싶을 땐 내용 정리하고 떠날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타. 피드백과 오타 지적은 언제나 환영이야. 담에 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