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한다.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된 인간은 어찌 행동해야하는가?
지금의 내가 그렇다. 호라이즌 네 자매들. 네레이드, 운디네, 세이렌, 테티스 모두 내 손을 만지작 거리며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 어필한다.
마치 작은 고양이들 같이 간절한 눈빛을 차마 지나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모두를 쓰다듬기에는 손이 부족했다.
곤란한 상황을 타개해보고자 무적의 용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나는 자충수를 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을 배배꼬며 갈구하는 저 눈빛.
인생은 고달픈 법이었다.
그녀의 낭창낭창한 걸음걸이는 마치 손에 들고있는 술같이 찰랑거렸다. 갈색병에 담겨 독하고 감미로운 향을 내뿜는 독약. 키르케는 그것을 마시는 행위가 진정한 용기라고 여겼다.
물론 그녀만의 생각이었지만 종종 그녀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면 격무에 시달려 스트레스를 풀어야하는 유미라던가. 혹은 섬기는 이와 대적하는 자 사이에서 중재를 해야하는 베로니카 라던가.
하지만 그녀들은 현재 부재중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복도를 헤집으며 같이 독을 마셔줄 이를 찾고있었다.
예를들면 사령관이라던가.
그렇게 그녀는 자연스레 사령관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술잔을 채워넣을 뿐, 그의 의견은 중요치 않았다. 그 후의 일은 사령관의 의지일테지만.
사령관은 기록을 좋아했다. 유능한 지휘관은 서류와 싸운다는 말처럼 기록된 종이는 그 무엇보다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업무를 용이하게 만드는 자료였으므로.
물론 그런 자료들이 업무에만 치중된 것은 아니었다. 멸망 전 인간들은 '소설'이라는 형태의 글차뭉치들도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니까.
사령관은 그것에 흥미가 생겼다. 최근 합류한 뮤즈와 흐레스..머시기도 강력하게 권유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는 가볍게 읽을 만한 소설로 관능 소설을 선택했다. '아르곤출신 메이드'라는 제목의 소설. 하지만 그 책을 만지는 순간 느낌이 좋지 않음을 받았다.
끈적거리는 액체. 익숙한 향기. 점액질. 그가 밤마다 묻히는 겔 형태의 액체였다.
사령관은 문득 닥터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르페이아가 자로보관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그는 그 즉시 책을 덮고 자료보관실을 나섰다. 그 예의없는 금발에게 개인면담이 필요했기에. 그 사이에서 남녀간의 행위는 필수불가결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밤이 깊었다. 바람은 산들산들 불었고 풀은 조용히 흔들렸다. 좁게 난 산책길에 켈베로스와 사령관은 나지막히 서로를 의지한채 걷고있었다.
분명 날이 덥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하다고 느낄정도의 기온이었지만 둘의 얼굴은 상기되어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사령관은 그저 이 상황이 두근거렸다. 켈베로스도 그저 제 가슴에 사령관의 팔을 끼우고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담한 여자였다. 조금 더 관계의 진전을 바랬고 더 나아가 육체의 관계까지 원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수갑을 채워넣는 뒷 주머니에서 개목걸이와 줄을 꺼내 제 목에 매었다.
"사령관님... 산책 더 하실래요?"
오르카호의 대원들에게 있어 사령관과의 동침은 언제나 설레고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인원은 무수히 많았지만 사령관은 한 명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종종 대회를 통해 서로의 우열을 가렸고 대회의 우승자는 사령관을 쟁취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물론 사령관의 의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짜피 결과는 매한가지였을테니.
이번 대회는 오르카 함내 최고의 엉덩이를 뽑는 미스 엉덩이 대회였다. 수많은 참가자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낸 이는 최근, 오르카에 합류한 뮤즈를 꼽을 수 있었다. 적당한 굴곡과 풍만한 골반. 그리고 적당한 살집. 원피스로 시작되는 라인은 모두를 홀렸고 모두 그녀의 우승을 점찍었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그녀는 미스 애스(Miss Ass)에 당선되었고 사령관의 동침이 허락되었다. 그녀는 감동과 함께 모든이들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렀다. 떨리는 목소리에는 기쁨이 잔뜩 묻어나왔다. 드디어 그녀가 즐겨보던 관능소설의 여주인공이 되어 남자주인공에게 안기는 상상.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그에 반대로 심란하고 자괴감이 든 나이트엔젤이 있었다. 흉부가 거의 없다시피한 그녀에게 유일한 자랑거리는 오드리마저 극찬한 우아한 골반 라인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것 또한 자랑이 되지 못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원망했고 모두를 원망했다. 축하의 시선 대신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무대뒤에서 쳐다보았다. 저 자리가 자신의 것이었으면 하는 바램 또한 있었다. 이젠 아니었지만. 그런 그녀는 나지막하게 읆조렸다.
"인생 씨발... 다 나가죽어라 썅년들아..."
네레이드, 운디네, 세이렌은 취침 시간마다 서로 한 침대에 모여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예를 들자면 그날 나온 간식의 맛이라던가 아니면 새로 등장한 바이오로이드의 첫 인상. 혹은 자신들의 지휘관인 무적의 용에 대한 예찬 등.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사령관의 매력을 이야기하는데 치중되었다. 그녀들에게 있어 사령관은 애정의 대상이자 동경에 대상이었기에.
네레이드는 사령관의 듬직한 모습을 좋아했다. 그를 믿을 수 있기에 그녀의 활달한 성격을 전장에서도 내비출 수 있었을 뿐더러 모두를 지휘하는 모습은 마치 동경하는 무적의 용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운디네는 사령관의 애정이 가득한 모습을 좋아했다.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를 선사한 사령관의 따듯한 손길과 배려심 넘치는 말과 행동. 사령관에게 안긴 그 날, 무조건적으로 그녀는 그런 점을 좋아할 수 밖에 없었다.
세이렌은 사령관의 섬세함을 좋아했다. 그 수많은 인원들 중에서도 하나하나 걱정해주고 특징을 고려해서 배려해주는 배려심. 그녀에게 있어 그것은 최고의 미약이었고 애정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 소녀의 이야기는 언제나 평행선이었다. 교점이라고는 오직 사령관에 대한 애정일 뿐. 각기 다른 사령관의 매력은 언제나 결과를 내지 못하는 토론이었다.
그렇지만 그날은 달랐다. 문이 열리고 등장한 사령관은 소녀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분명 그녀들의 목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나갔기 때문이었다.
네레이드는 사령관을 보자마자 싱긋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운디네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했고, 세이렌은 깜짝 놀라며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령관은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의자에 앉아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세 소녀들 사이에 접점이 생겼다. 사령관의 매력은 얼굴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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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내일 씀 ㅈㄴ 힘드네
발키리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애정을 갈구하는 편이었다. 사령관에게 안긴 그 날 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시도 그의 사랑을 잊은 적이 없었고 갈망했다. 하지만 그는 인류의 증강을 위해 다른 이들과 몸을 섞어야 했고 그 사실은 그녀를 가슴 아프게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납득할 정도는 되었다. 독점하지 못할 성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 자신의 상관이자 전우였던 발키리. 그녀에게 빼앗기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는 사령관에게 먼저 안겼고, 레오나는 그것을 시기와 질투로 표현했다. 소위 말하는 앙금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떻게든 그 여자를 골탕먹이고 싶어했다. 그렇게 생각해낸 방법은, 아주 단순한 방법이었다.
행복감의 원천을 붕괴시키는 법. 사령관과의 첫 날밤을 무산시키면 되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레오나에게 달려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거의 포기하다시피 헐떡이던 그때, 기적처럼 레오나를 만났다.
기쁨에 가득찬 미소와 붉으스름한 홍조. 누가 보아도 기대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발키리는 그 역겨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대뜸 품 안에 있던 작은 약 하나를 레오나의 손에 꾹 하고 쥐어주었다.
"발키리? 이건...?"
"특제 미약입니다. 대장님. 저희 발할라 대원들은 대장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물론 진실 하나 섞이지 않은 거짓말이었다. 지난번, 그녀는 닥터가 실패한 설사약 하나를 빼돌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이 행동이 제 딴에는 어긋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복수였다. 아주 사소한 복수.
그 뿐이었다.
레오나를 떠나보내고 발키리는 뿌듯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발키리는 세 발의 총탄을 받았다.
사령관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래야만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을테니.
첫째. 그는 소파 위에서 자고 있었다. 굳이 편한 침대를 놔두고 자신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소파 위에서 자고 있는 사실을 생각해내야 했다.
둘 째. 널부러져 있는 술병과 먹다 남은 안주들. 첫 번째 상황의 의구심이 어느 정도 해결 된 느낌이었다. 술을 많이 마셨기에 소파에서 누워 자고 있었다. 합당한 이유였다.
셋 째. 리엔이 나체의 상태로 사령관의 가슴 위에서 그를 껴안고 자고 있었다. 이것 또한 마찬가지로 합당한 이유를 들어낼 수 있었다. 어제 리엔과 흥청망청 마시고 놀다가 둘 다 소파위에서 잤다. 물론 그럴 수 있었다. 소파는 작았고 두명이 자야 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그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고 아랫도리는 축축한 상태였다. 허벅지에서도 느껴지는 끈끈한 점액질. 그는 모든 논거들을 종합한 결과를 나지막히 내뱉었다.
"했네. 했어."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물론 리엔에게 흥미가 없엇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처음을 가져가기 싫었을 뿐. 그는 한숨을 푹 쉬며 머리를 긁을 뿐이었다.
그는 가슴 쪽에서 움찔거리는 느낌이 받고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리엔은 눈은 감고 있었지만, 입이 조금씩 달싹거리는 것이 보였다.
".... 깨어있어?"
".... 좋은 아침... 왓슨..."
사령관은 리엔의 얼굴이 붉으스름한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알몸의 상태였던 것과 어젯밤의 일. 리엔이라면 기억해 내도고 남을 기억력의 소유자였으므로. 하지만 서로에게 감도는 어색한 기운은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서로 멋쩍게 움찔거리며 헛기침만 낼 뿐이었다. 그러는 도중, 리엔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왓슨... 아래..."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아침이 오면, 건장한 남자에게서 오는 생리현상. 사령관은 당황 속에 말을 이으려했다. 하지만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그의 몸을 흝고 있던 리엔이 먼저 말했다.
"한 번... 더? 열 번... 못채웠...?"
그는 그녀와 열번을 넘겼다.
피곤해서 침대 위에 눕는데 하필 머리에 장치가 자꾸만 걸려서 잠을 며칠동안 불편하게 잔 레이시. 레이시의 피곤한 기색을 느낀 사령관은 레이시의 숙면을 위해 밤에 레이시와 거친 육체 관계를 맺음. 레이시의 불면증은 그 한방에 해결! 사령관 쥬지파워로 숙면을 취한 레이시는 다음날 깔끔하게 웃는 얼굴로 생활을 시작함
레이시는 지독한 불면증이었다. 물론 그녀의 탓은 아니었다. 사령관에게 구조된 후 좋은 침대와 부드럽고 푹신한 배게 그리고 조용한 방까지. 숙면을 취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그런 점은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가장 큰 문제인 그녀의 서클렛은 숙면에 있어 걸리적거리는 존재를 떠나 끔찍한 물건이었다.
물론 그녀 스스로도 이 아이러니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장치가 생명을 갉아먹는 장치가 되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을 것이다. 사령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대려온 순간 부터 레이시의 서클렛은 언젠가 큰 장애가 될 것이라고 여겼기에.
그래서 사령관은 갖은 수를 써보기 시작했다. 잠이 잘오게 만드는 허브차부터 수면제, 동화책 읽어주기, 숙면 음악 틀기 등. 결국 모두 도움이 안되는 가짓수들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와 관계를 맺은 모든 대원들 모두 조용히 잠을 청했다는 것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생각이었다. 결국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육체의 피로감을 쌓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생명체는 피로감이 쌓이면 잠을 청한다. 이 황당하지만 들어맞는 논리를 시작으로 그는 레이시와 관계를 맺었다.
그 결과, 사령관은 자신의 절륜함을 증명할 수 있었고 레이시는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물론 땀이 식고 시트가 젖어 조금 추웠지만, 충분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 사실 만으로도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해결책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고 있는 사령관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보았다. 허리가 조금 욱신거렸지만, 어느 정도 참을만 했다.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청명한 하늘 아래 빛나는 두 개의 꽃이 있었다. 하나는 붉은 빛의 장미. 가시가 있지만 그 무엇보다 화려한 꽃이었다. 다른 하나는 바닷가에 핀 노란 데이지였다. 순수함을 가득 머금은 채 웃어보이는 작은 꽃. 그녀들, 메이와 세이렌은 그런 꽃들이었다.
오늘은 유난히도 화창한 날이었다. 시원한 바람과 안심이 되는 바다내음. 그리고, 사령관을 기다리는 그녀들. 사령관은 목을 가다듬고 제 목에 걸려있는 넥타이를 매만졌다. 손에 쥐어진 두 개의 반지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긴장한 티를 역력히 내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그녀들에게 있어 오늘은 기억에 남을 만한 날이었다. 서로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하고 각인 시키는 날. 결혼식이라는 성대한 약속의 장으로 사령관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그녀들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히려 사령관 보다 더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를 못하는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두 작은 꽃들은 사랑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맹목적인 끌림에 따라서 이끌렸을 뿐. 하지만 그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그녀들은 절실했기에.
사령관은 그녀들의 가운데 서서 싱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베로니카의 서약에 따라 서로의 약속을 읆고 맹세했다. 하나씩 준비된 약속의 증표를 각각 손에 끼워주었다.
하나의 장미꽃은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는 언제나처럼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에 속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으면서 사랑을 속삭였다.
"드디어 날 특별 대우해줄 마음이 들었나보네? 뭐, 일단은 받아줄게. 사령관이 날 위해 애써 준비해줬는데 버리는 건 좀 그러니까. 그리고… 기, 기념할만한 날이니까 조금 더… 같이… 있어 줄 수도 있어. 정말로."
다른 하나의 데이지 꽃은 침착하게, 그리고 온화하게 사령관에게 말했다. 제 진심이 사령관에게 전해지기를 빌며.
"사령관님? 제 손을 잡아주시겠어요? 고마워요. 언제나 제 어리광을 받아주셔서. 오늘은,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니까 좀 더 안아주시면 안될까요?"
오늘은, 유난히 화창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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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약대사는 보이스 인용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나는 실패했다. 분명하게 실패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를 의심했고 기만했다. 귓속에 울려퍼지던 억울함의 비명도 흘려보냈다. 마지막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가증스런 악어의 눈물이라고 치부했다. 그래서 그녀를 죽였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죽었다.
그 빌어먹을 갈보년의 농간에 넘어간 내가 멍청한놈이었다. 어리석었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변명거리였다. 그녀가 나를 믿은 만큼 나는 그녀를 믿지 못했다. 그뿐이었다.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언젠가 닥터가 나에게 말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냐고.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바로잡을 수 있겠냐며. 타임 패러독스 따위는 신경쓰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그 떄에 나는 분명히 말했다.
나에겐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은 정해져 있었고 나는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이 작은 관 같은 기계에 누워 눈을 뜨면 그녀가 앞에 있을 것이다. 과거인지, 사후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오히려 그것도 좋을 것이다. 내가 지옥에서 부르짖는 것도 어울릴테니.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는 내 앞에 있었다. 그래. 그는 사령관이었다. 모든 이들의 통솔권자였고 어깨에 오르카호의 모든이들의 목숨을 등에 업은 남자. 그리고 가증스러운 의심암귀. 내가 반드시 막아야 할 마지막 인간.
그는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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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불특정 다수. 아무나 끼워 넣으면 될듯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