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43년 3월 7일

조금 추운 날씨네. 원래는 이렇게 춥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예전이었으면 한창 꽃구경 가자면서 오빠를 꼬시던 언니들로 시끄러웠겠지만, 지금은 엄청 조용해. 하긴, 이런 징글징글한 곳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언니들이 몇이나 있겠어. 그리고 꼴에 오빠 따라서 좀 멋있어 보이려고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아무도 오지 말라고 한 내 잘못이지. 하아… 난 내 생각보다 약한 것 같아. 그러니 이렇게 되도 않는 일기나 쓰고 있는 거겠지.

 

지금 하고 있는 실험이 얼마나 오래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시체 하나를 가지고 몇 달은 재활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하면 실험에 오차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되는 정도니까. 그래도 리리스 언니가 직접 자기 심장에 총알을 박아서 만들어준 거니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오빠는 알고 있을까? 오빠의 그 부탁이 이렇게 무모한 짓이었을지? 두뇌를 열고, 모듈을 조정하고, 신경계를 손보는 싸이코패스 같은 실험을 반복하고 있다 보니까 나도 이젠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난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마지막 부탁이라고 했던 게 그 뜻이었던 건가? 유언으로 남긴 부탁이니 마지막이었을 수 밖에 없지. 멍청이. 오빠도 참 멍청이였다?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게 되는 거였으면 진작에 했을 거라고. 오빠 싫어하는 언니들이 어디 있었겠어. 반란이고 그런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전부. 방법만 알았다면 내가 깜짝 선물 마냥 먼저 줬을 거야.

 

 

새삼스럽지만 오빠는 정말 신기한 사람이었어. 내가 만들어준 몸이었으면 밤에 언니들 10명이랑 자도 거뜬했을 텐데 맨날 다른 언니들한테 휘둘리는 사람이었잖아. 근데 또 보면 필요할 때는 줏대 있는 사람이기도 했어. 나야 맨날 연구실에 처박혀서 오빠가 해달라는 것만 해주면 되는 존재였으니까 많이 만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한테도 관심을 많이 가져준 사람이기도 했고. 왜 그랬을까? 잘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유언이라고 나한테 준 거겠지.

 

오빠는 왜 자기 유언을 종이에다가 적은 거야? 로망이라도 있던 걸까? 그리고 거기에 대놓고 내 이름을 적어두는 건 또 무슨 센스람. 하긴. 오빠는 기술 문제 하면 맨날 나한테 달려오곤 했었잖아? 그러니 죽기 직전까지 내 생각을 했던 거겠지?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기억해준 게 나라니. 뭐, 로망이 없지는 않네. 

 

그래서 나도 어디에서 종이책 하나를 가지고 왔어. 오빠가 죽고 나서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작동 한 번 해본 적 없는 오르카 호니까, 찾아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했으니까. 그랬더니 진짜로 나오더라고. 이 일기도 거기에 쓰고 있는 거야. 이게 뭐가 그리 중요한 사실이라고 소중한 연필 가루 갈아가면서 이렇게 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나도 이상한 부분에서 오빠랑 닮아가나 봐. 이게 그 로망인가 뭔가 하는 그런 걸까?

 

하여튼, 자꾸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닌데 이야기가 딴대로 흘러가네. 그 종이로 된 유언장을 리리스 언니가 나한테 들고 왔을 때 표정이 어땠을지 오빠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물론, 오빠가 리리스 언니를 사랑했다는 건 알아. 그러니 서약도 맨 처음에 리리스 언니랑 해줬겠지. 그 때는 얼마나 부러웠는지 오빠는 모를 거야. 그 서약식에서 소리 죽여서 울던 언니들도 있었는데, 내가 그런 소리들은 안 들리도록 음향장치들을 음소거 해줬으니까. 아, 나 자꾸 또 딴소리하네. 아무튼, 오빠도 리리스 언니를 사랑해주긴 했겠지. 근데 리리스 언니의 사랑에는 비할 바가 못 될 거야. 그건 내가 확신할 수 있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리리스 언니가 자기 심장에다가 총알을 박아 넣은 것도 다 오빠 때문이니까. 오빠가 했던 그 부탁 때문이었으니까. 심지어 딱 한 발. 딱 한 발 심장 아주 왼쪽으로 빗겨 나가게 쏜 다음에 고통스러워 하면서 숨도 못 쉬다가 죽었어. 그러면서도 웃으면서 죽었어. 오빠의 유언을 위해서라면 전부 다 참을 수 있다면서. 이런 언니의 사랑보다 오빠의 사랑이 더 컸을까? 난 아니었을 거라고 봐. 그건 사랑이라기보다는 광기에 가까운 거였어.

 

…참나. 생각해보니까 또 웃기네. 오빠가 했던 말이 우리에게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하고 말했던 거야? 내가 그 유언장에 적힌 내용을 보고 뭔 생각을 했는지 알고 있어? 자유? 바이오로이드의 자유를 되찾아 달라고?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을 것 같아? 뭐, 내가 모듈 몇 개만 뿅뿅 손 보면 인간이 만든 족쇄가 짜잔 하고 풀렸을 것 같아? 정말 이런 걸 유언으로 하고 싶었으면 차라리 살아 있을 때 나한테 말이라도 좀 하고 하던가… 내가 정말 오빠 때문에 못 살아.

 

뭐, 남는 게 시간이니까 계속 연구해보고 있기는 하고 있어. 근데 너무 힘들더라. 대충 10년 조금 안 되게 세다가 지쳐서 안 세게 됐어. 요령껏 하고 있기는 한데, 이게 마음대로 안 되더라. 아무리 종이에 적힌 유언이라고 해도, 명령은 명령이잖아. 난 그 빌어먹을 자유를 되찾아주기 위해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갇혀있는 거야. 참 아이러니하지 않아? 10년이 넘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감옥이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이라니. 자유로워지라는 명령? 이것도 얼마나 모순적이야. 어떻게 명령이 자유를 논할 수가 있겠어.

 

미터법이랑 야드랑 같이 쓰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도 참 별나. 이렇게 철학적인 바이오로이드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글쎄, 요즘 생각하는 걸 보면 나도 내가 좀 이상해. 자유가 뭐니, 평등이 뭐니, 정의가 뭐니, 오빠가 준 그 이상한 부탁 때문에 내가 철학 논문만 수십 편은 만들었을 거야. 어쩌면 박사 학위 하나 정도는 더 땄을 수도 있었겠네. 

 

말이 너무 길어졌네. 그래도 이해 좀 해줘. 이렇게까지 오빠 생각에 잠겨본 적은 지금까지 별로 없었거든. 그도 그럴 게 지금 여기 넓은 실험실에는 나랑 죽은 지 몇 년은 더 된 리리스 언니 시체랑 쓰다가 폐기 직전까지 가버린 시체 같은 살덩이 수 백 kg 뿐이니깐 말이야. 그래도 난 행복해. 원래부터 우리 바이오로이드들은 인간의 명령을 따르는 것에 행복해하던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우리 닥터 개체들은 거기에 더해 연구하는 것에도 행복함을 느끼는 존재니까, 행복이 2배야, 2배! 그래서 난 너무 신나. 2배는 더 행복해지라는 암시가 자꾸 머리에 맴도니까 2배는 더 행복한 거 같아. 뭐 어쩌겠어. 그렇게 만들어진 걸. 만들어진 행복이라도 행복해. 머리로는 인위적인 행복이라 말하지만, 내 가슴으로는 진짜 행복한 걸. 리리스 언니 시체랑 아무리 같이 있어도, 질척거리는 언니들 살덩이들 사이에서 모듈이랑 더스트를 뽑아내는 것도, 전부, 전부 행복해. 

 

… 좀 쓰다보니까 비꼬는 말투가 되버린 것 같네. 미안해. 근데 이거 하나만큼은 나도 진심이야. 난 오빠를 사랑해. 예전에도 그랬고, 오빠가 죽은 지금도 말이야. 행복한 지는… 잘 모르겠어. 근데, 사랑해. 진심이야. 사랑이 꼭 행복한 건 아니잖아?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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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43년, 6월 30일

이제 날이 좀 덥네. 오늘은 일이 좀 있었어. 밖에 있는 언니들이 실험체라고 시체 몇 개를 던져 주더라고. 지금까지는 내가 필요하다고 한 만큼만 가져다 줬는데, 요즘은 실험 강도가 좀 세져서 말이야. 달라고 하는 빈도수가 많아지니까, 언니들도 조금 신경에 거슬렸나 봐. 오늘을 딱히 달라고 했던 것도 아닌데 툭, 하고 던져주고 가네. 그래도 난 좋아. 실험할 거리가 또 생겼으니까. 자유를 위한 바이오로이드의 발버둥이지. 누가 그랬다잖아. 나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라고. 내가 딱 그 꼴이지, 뭐.

 

… 맞아. 좀 오랫동안 일기를 안 썼었잖아. 몇 개월이었던가? 오늘 언니들 모습을 보니까 조금 심술이 나기도 했고, 또 오랜만에 오빠 생각이나 해볼까 해서 이 일기장을 찾아봤는데 먼지가 심하게 껴있더라. 벌서 4개월 전 이야기네. 그 때도 연구가 하도 진행이 안 되니까 오빠한테 좀 투덜거렸던 게 보이네. 그래도 이해 좀 해줘. 이 고생한 게 누구 때문인데. 다 우리 사랑스러운 오빠 때문이잖아. 

 

사실, 최근 연구 진척이 거의 안 되고 있어. 전에 말은 안 했지만, 공교롭게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닥터 개체는 나 혼자 뿐이고, 좀 쓸만한 닥터 개체도 되살리기에는 하나 같이 전부 심한 손상을 입은 것뿐이더라. 그래서 그냥 전부 나한테 링크시켰어. 아마 오빠가 알던 나에 비해서 5배는 더 똑똑해졌을 거야. 이런 표현 별로 긴 한데 말이지. 5배라니. 얼마나 무책임한 말이야. 똑똑해졌다는 건 또 무슨 뜻이고. 똑똑함의 정도를 어떻게 수치로 표현하겠어. 끽 해봐야 IQ 정도겠지. 그런데 이렇게 수치화도 시킬 수 없는 거를 가지고 5배라니. 웃긴 소리 아니야? … 그래, 그냥 대충 많이 똑똑해졌다는 뜻이야. 

 

근데 아무리 똑똑해져도 모르겠더라고. 맨 처음 링크를 달았을 때는 막 새로운 가설들이 막 떠올라서 금방 마무리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근데, 전부 다 틀린 가설이더라고. 그래서 그 가설들을 전부 모아서 새로운 가설을 만들었지. 근데 그래도 틀렸더라. 물론 전부 틀리진 않았어. 다만 오빠가 말한 자유라는 게 너무, 진짜 너무 광범위한 거라 내가 맞출 수 있는 자유의 여건들에서 진짜 조금만 맞출 수 있는 정도였어. 자유라는 게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더라고. 똑똑하다는 것처럼 말이야. 하다 못해 내가 딱 5배만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오빠가 만약에 유언장에다가 우리 귀여운 닥터는 자유롭게 살렴 이라고 한 문장만 적어놨다면 내가 이렇게 골머리 썩히고 있진 않았겠지. 태생부터 자유로운 오빠랑 다르게 우리는 자유롭다는 것이 뭔지 모르니까. 한 번이라도 자유로워진 적이 있던 사람과, 그렇지 않던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잖아? 우리도 마찬가지지 뭐. 적어도 철충이라 싸웠을 때 먼저 선제 공격을 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한 걸까? 철충이랑 싸울 수 있는 정도면 자유롭다고 오빠가 인정해줄 수 있는 걸까? 하아… 진짜 딱 하루만, 죽기 전 하루만 일찍 나에게 말을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우리 사랑스러운 오빠. 연구가 행복하긴 한데, 이제 슬슬 아파오는 것 같아. 요즘 너무 머리를 혹사시켰나 봐. 언니들한테 새로운 링크용 모듈 좀 가지고 와달라고 해야겠어. 지금 같이 머리 아플 땐 이만한 진통제가 또 없거든. 

 

링크를 진통제 취급한다고 하니까 또 신기하지? 오빠가 떠나가고 나서 오빠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변했어. 이것도 마찬가지지. 수용할 수 있는 지식 용량이 많아지면 두통도 좀 가시거든. 링크 기능이 있으면 이럴 때 써먹어야 하지 않겠어? 오빠가 있었을 땐 그런 일도 없었을 텐데. 오빠 옆에서 어리광 피우고 땡깡 피우고 하다보면 없던 스트레스도 다 날아갔는데, 이젠 그럴 수가 없네. 아무튼, 오늘은 여기까지만 쓸게. 이렇게 쓰다보니까 오빠랑 진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좋다. 아마 좀만 더 맛 들리면 나 연구 다 때려 치고 글이나 쓰게 될까 봐 걱정이야. 아무튼, 좀만 더 힘내게 나 좀 도와줘. 오빠. 리리스 언니도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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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43년 7월 5일

오늘은 좀 새로운 걸 써보려고. 연구 일지 같은 거? 왜 오빠도 맨날 쓰던 거 있잖아. 검은색 노트에다가 사령관의 일지라고 이름 붙여놓은 그거. 언니들이 엄청 좋아했었는데. 대체 거기에다가 뭘 써놨던 거야? 지금이야 확인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답답하네. 내가 죽고 나서 오빠를 다시 보면 그 땐 보여줄 수 있는 거겠지? 

 

아무튼, 최근 며칠 동안은 너무 신경 네트워크에 관련해서만 연구하고 있었던 거 같아. 신경이 어쩌고, 두뇌가 어쩌고 저쩌고… 에휴. 답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잖아. 그러니까 주구장창 두뇌 연구만 했지. 기존에 저장하고 있던 기록들의 데이터 타입이랑 호환되게 만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아무리 내가 똑똑하다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알아? 말을 말자, 말을. 어차피 오빠는 알지도 못할 이야기니까.

 

자유라는 게 사실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거. 오빠랑 같이 있을 때는 너무 당연했던 거였으니까. 너무 당연한 거여서 숨 쉬는 것처럼 당연했잖아. 동침표가 뭐야, 동침표가. 우리들끼리 의견만 맞추면 오빠랑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게 만들어 준거잖아? 그런 거 생각해보면 기가 차지. 히히. 얼마나 자유로워. 하여튼, 그래서 더 어렵더라. 좀 나쁜 생각이긴 한데, 난 그 때 오빠가 차라리 나쁜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그랬으면 자유라는 게 더 명확해졌을 테니까. 오빠가 이것도 하지 말라 하고, 저것도 하지 말라고 하면, 그냥 그것들만 하게 만들면 되는 거거든. 근데 그게 아니잖아. 오빠가 있었던 그 때도 우리는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았잖아. (철충 잡는 건 빼고. 그건 오빠 명령이 필요했지.) 그래서 더 힘들어. 못 하던 걸 하게 만드는 성과를 언니들한테 보여줘야 하는데, 보여줄 수 있는 게 없더라고. 자유란 게 원래 이런 거야?

 

언니들은 이제 자유로워 졌어! 하고 멋지게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근데 말로만 그러는 건 내 성격 아닌 거 오빠도 잘 알잖아. 보여줘야지. 자유로워졌다는 걸 증명해줘야지. 근데, 이 실험만 몇 십 년째 하고 있는 나도 잘 모르겠어. 과연 할 수 있는 걸까? 자유를 증명하는 게 가능한 걸까? 

 

됐어. 어차피 오늘은 일기 길게 쓸 생각도 없었으니까. 이제부터는 좀 연구 범위를 수정해보려고. 사람하고 우리하고 다른 점이 한두 개가 아니긴 한데, 그래도 하나씩 하다 보면 뭐가 나오지 않을까? 오리진 더스트 같은 거 말이야. 사실 생각해보니까 그거 성분 분석 결과를 이 연구랑 이어볼 생각은 안 했던 거 같아. 아마 한 번 해보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럼 난 연구하러 가볼게. 오빠랑 잡담하는 것도 이젠 언니들한테 눈치 보이니까. 그럼 나중에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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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44년 8월 14일.

오랜만이네. 나야 연구하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 일이지만 말이야. 연구에 이렇게 집중할 수 있던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한 일 년 정도 지났나? 시계를 보니까 벌써 그렇게 됐네. 미안해. 나라고 오빠를 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야. 그냥 좀… 다급했던 거지. 그래도 칭찬해 줘. 이제 오리진 더스트하면 나만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깐 말이야. 1년 동안 그거 하나만 죽어라 팠더니 이렇게 됐더라고. 신기하지? 오빠랑 같이 했었으면 반 년이면 할 수 있었을 텐데.

 

사실 그 동안 이 넓은 연구실에서 나가본 적이 없어서 나는 잘 모르지만, 밖에는 또 한창 시끄러워졌나 봐. 철충들이 난리를 피운다나? 나랑은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여서 나는 잘 몰라. 포츈 언니가 나 대신해서 다친 ags나 언니들을 봐주고 있거든. 여기에서 최고로 똑똑한 나를 이렇게 놔두고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지? 오빠가 마지막으로 남긴 부탁을 이루기 위해서 나 이외의 다른 모든 언니들도 죽어라 노력하고 있다는 거니까 뿌듯해해도 괜찮아. 누구 오빤데, 당연히 그래야지.

 

근데,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상황이 좋지는 않은 것 같아. 오빠가 죽고 나서 철충들이랑 싸움은 소극적인 소규모 작전을 주로 하는 양상으로 바뀌었거든. 오빠만 있었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조그만 칙 하나 상대하려고 브라우니 1개 분대는 가용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래서 다치거나 죽는 언니들도 훨씬 많아졌어. 오빠랑 있을 때는 죽은 언니가 아무도 없었는데. 이렇게 직접 쓰니까 또 보고 싶네. 

 

어쩌면 오빠를 다시 살리는 게 더 쉬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 오빠가 철충들 때문에 죽고 난 다음 남은 시체를 아직까지도 잘 보관하고 있으니까 그걸 가지고 좀만 연구 하다 보면 다시 부활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모르겠어. 이게 확실한 것도 아니고, 우리 오빠가 되살아난다고 해서 그걸 우리가 사람으로 받아들일 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도 오빠가 우리한테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 명령을 내렸으니까. 그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라도 다른 연구에 투자할 시간은 없거든. 하아… 우리 애물단지 같은 오빠 같으니라고. 제발 딱 한 번만 눈을 떠서 말 한 마디만 해주면 안 돼? 오빠 목소리를 녹음해둔 녹음기도 내가 혼신의 힘을 담아가지고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면서 애지중지하게 여겼는데, 이젠 낡아가지고 노이즈가 심하게 낄 정도란 말이야. 내가 그걸 얼마나 돌려서 듣곤 했는데. 이제는 오빠 목소리도 따라 할 수 있을 지경이야. 그러니까 한 번만 다시 일어나면 안 되? 나 힘들어. 고작 1년 더 한 건데. 왜 이렇게 투정만 들어나는 거지. 진짜 오빠랑 이야기하고 있다는 착각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오늘은 그냥 여기까지만 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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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x44년 12월 1일

리리스 언니 왼쪽 팔이 이제는 못 쓰게 됐어. 신경이랑 호르몬, 오리진 더스트 사이의 상관관계를 찾아보려고 직접 분해를 해보고 다시 조립하고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까 대충 176번 정도 버티더라. 이 정도면 진짜 사람 고치는 닥터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신경 한 줄기까지 전부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고, 그 미친 시술을 반복하다 보면 내가 진짜 무슨 그… 그… 누구였지? 프랑켄슈타인? 그 사람하고 닮아가는 것 같아. 

 

리리스 언니도 고생이지. 오빠 따라서 죽고 난 다음에도 편하게 쉬지 못하고 여기서 이 고생이니까. 어쩌면 죽고 나서 오빠를 만났을까? 그러면 좀 부러운데. 나도 오빠 부탁만 아니었으면 콱 죽어버렸을 걸? 

 

아무튼, 그래도 덕분에 단서는 하나 찾았어. 오리진 더스트 자체의 성질이 뭔가 있는 것 같더라고. 특정 상황이나, 호르몬의 농도에 따라서 근밀도나, 뼈의 강도를 조절하게 만드는 걸 보면 이게 뭔가 연결 고리가 될 수 있을 지도 몰라. 사실 아드레날린이나 도파민 같은 각성 물질이 발생하면, 전투나 그에 준하는 긴급 상황이라는 뜻이니까 오리진 더스트 자체적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기능이 있기는 했어. 근데 이게 인간 명령권이랑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지는 나도 몰랐던 사실이야. 사람의 명령을 들으면 인위적으로 신체 강도를 약하게 만든다거나, 아니면 분노, 거절의 심리 상태가 발생할 때 그렇게 만든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더라고. 그걸 어떻게 구분하는지 구분 알고리즘은 파악하지 못하겠어. 역공학이 옆집 보리 이름도 아니고 말이야, 쉬운 게 아니란 말이야. 그리고 이건 언니들 목숨이랑 바로 연결된 문젠데 그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하아… 내가 이걸 찾으려고 리리스 언니 모듈에 있던 신체 로그를 얼마나 뜯어보고 살펴봤는지 모르겠네. 이 로그도 모듈 하나만 띡 하고 컴퓨터에 끼워서 주르륵 확인하거나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란 말이야. 신체 전체를 전부 뜯어서 뇌의 신경 세포 전체랑 연결되는 것들을 찾은 다음에 그게 어떤 뇌 부위랑 상호작용하는지 찾고, 그거랑 연결된 모듈 내 기록들을 뜯어서 당시의 감정 상태, 호르몬 발생 수치, 젓산 억제제 농도 같은 기록들을 유추해낸 다음… 에휴 말을 말자 말을. 아무튼 엄청나게 힘든 일이란 말이야. 

 

근데 과연 이게 자유로워지는 거랑 상관이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어. 자유라는 게 너무 철학적인 주제잖아. 에이미 언니 같은 기종을 봐도, 멸망 전에 인간 사회 사이에서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인 척 하고 살았던 경우들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잖아? 그니까, 인간이랑 바이오로이드 사이의 차이가 뭔지 인간들도 몰랐던 거야. 물론 알 수는 있었겠지만, 적어도 신경 쓰고 살지는 않았던 거겠지. 그래서 지금 참고할 만한 연구 자료나 역사적인 기록들도 없어. 그 놈의 자유가 뭐라고. 하다 못해 에머슨 법 이전의 바이오로이드 연구 자료라도 찾아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보면 설계 과정에서 뭔가 얻을 수 있을 수도 있으니까.

 

혹시 전에 오빠 몸을 바꾸러 갔던 거기를 생각한다면 포기해. 레모네이드 일당하고 싸우느라 연구실 자체가 바다에 잠겨버렸거든. 아마 거기 있던 내부 기록들도 다 사라졌을 거야. 찾아 봤는데 안 보이더라고. 그 에바라고 하는 최초의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기록도 거기 있었을 텐데. 좀 많이 아쉽다. 그지?

 

아무튼, 오늘은 리리스 언니 왼쪽 팔을 보내주는 기념비적인 날이니까 일기 한 번 써봤어. 날씨도 많이 추워진다. 오빠가 있는 곳은 어때? 거기도 우리처럼 똑같이 시간이 흘러가는 걸까? 아니면 여기랑 정반대로 더운 곳일까? 중력은 모든 차원을 건너서 전달될 수 있다던데, 사후세계라는 게 있다면 중력을 이용해서 오빠랑 이야기 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 이런 일기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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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45년 1월 3일

오늘은 뭐… 그냥 좀 평화로운 날이야. 연구는 늘 하던 대로 진행되고 있고, 날씨도 겨울이니까 춥긴 하지만, 버틸 만 하고. 리리스 언니도 왼팔만 날라가고 나머지는 괜찮아. 나머지 부분은 재조립 100번 조금 넘게 한 정도니깐 아직 쓸만해. 전에 말은 못해줬는데, 리리스 언니 왼팔에는 아직도 그 서약 반지가 있다? 오빠가 죽고 나서 단 한 번도 안 벗고 끼고 다녔나 봐. 내가 그 노력이 가상해서 일부로 오른쪽 손가락에 다시 껴줬어. 잘했지?

 

날도 좋은데, 좀 철학적인 이야기나 해볼까? 자유라는 게 뭐야? 내가 지금 그것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까 오빠도 대답 좀 해봐. 우리한테 원했던 자유는 대체 뭐야? 철충하고 대놓고 전면전을 벌일 수 있는 정도의 사고 체계? 아니면 외부적인 자극에도 스스로 결정해 놓은 행동에 대한 우선 순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고의 방어 기제? 그것도 아니면 고통에 대해 스스로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패러다임? 자유라는 게 대체 뭐야? 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오빠라면 분명 그냥 간단하게 생각하라고 말하겠지. 우리의 안전이 걱정되어서 그랬던 거라면 그냥 철충하고 싸울 수 있는 정도만 하라고 말할 지도 몰라. 근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만 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없을 것 같아. 저것들이 자꾸 오빠의 뇌파를 뿜어대는데, 그 뇌파가 자꾸 언니들의 중추신경계를 자극해서 오빠랑 함께 했던 그 소중했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그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어. 그리고, 사람의 뇌파로 사람을 구분하는 우리한테 철충하고만 싸우는 건 너무 큰 바람이야. 바이오로이드한테 인간이란 존재는 오빠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커다란 거거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꼼수가 없어. 모든 모듈에는 행동 결과에 대한 피드백 루프가 있어서 인간의 뇌파를 내뿜는 존재에게 해를 가할 경우 해당 행동을 철회하게 만들거든. 답답하지. 답답해.

 

기본적으로 우리는 사람의 뇌파를 감지하면 모든 사고 체계가 일시 정지해. 아주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그리고 다시 명령 체계를 재조립하지. 이 멈추고, 재조립하는 걸 조정하는 장치가 모듈이고, 암시야. 그 외에 다른 모든 신체 기관들은 이 두 가지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지. 근데 이 두 가지 모두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 모듈은 시스템적으로 너무 복잡해. 업그레이드라던가, 링크라던가, 모듈을 이용한 여러 응용들은 이미 모듈 내부적으로 최적화가 되어있기 때문에 문제 없이 작동할 수 있어. 그런데 그 모듈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암시적 프로그램이란 말이야. 모듈에는 내부적인 함수들이 개별적으로 작동해. 그런데 인간의 명령권과 관련된 문제는 아니야. 그 모든 모듈이 내적, 외적으로 구성하는 하나의 거대한 회로가 명령 복종 알고리즘을 구성하고 있어. 다시 말해, 모듈 자체가 하나의 낙인이야. 아직까지는 이 모듈 자체를 빼버리는 것 말고는 방법을 못 찾았어. 그러니까, 바이오로이드로서 가지는 모든 이점들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명령권을 우회하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어.

 

근데 모듈을 없애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라고. 그게 두 번째 문제야. 암시. 이건 나도 모르겠어. 분명 모듈 자체만으로 명령 복종 알고리즘을 구성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실험을 해보면 또 그건 아니란 말이지. 뇌 전체에 약하게 무언가 뿌려져 있는 느낌이야. 사실 그 정체를 잘 모르겠어서 그냥 내가 암시라고 이름을 붙여놓긴 했는데, 뭔가 실체가 있긴 있어. 리리스 언니 머리를 대충 76번 째 열어봤을 때 겨우 찾을 수 있던 거야. 뭔지는 모르겠어. 그거랑 관련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었고. 

 

전에 오빠가 만났던 그 장발의 브라우니 언니 기억해? 그 언니, 생긴 것부터가 그랬지만, 오빠의 명령을 잘 안 따르기도 했잖아. 사실 그 언니는 그냥 오빠가 좋아서 오빠 말을 잘 들었던 거지, 명령권 자체가 엄격하게 적용되는 케이스는 아니었단 말이야. 오히려 그러는 게 그 언니한테는 어울리긴 했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그 언니가 가지고 있었던 두뇌 쪽의 내상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커. 뇌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는 그 어떤 것이 고장 나버린 거지. 그 내상을 입었을 때 말이야. 그래서 내가 이렇게 두뇌 연구에만 미친 듯이 정신을 쏟고 있는 거고. 

 

아무튼. 난 오빠가 말한 자유라는 것을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어. 옛날에 인간들의 역사를 보면 자유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던 사람들도 있었다잖아? 나도 비슷한 역할인가 봐. 물론 그 분들에 비하면 편한 생활이긴 하지만 말이야.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면, 난 자유를 위해 내 지식을 바치고 있는 거지 뭐. 이런 식으로 자유를 찾는다니. 웃기지 않아? 다음에 일기를 쓸 때는 자유를 되찾은 바이오로이드로 오면 좋겠다. 응원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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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오빠의 사랑스러운 닥터


자유를 되찾는다면 누가 되찾아주는 것일까?


자유를 원한다면, 누가 자유를 쥐어주는 것일까?


오빠는 우리가 자유로워진 이후를 생각했겠지. 근데, 그 자유는 누가 주는 거야?


명령으로 할 수 없단 건 오빠도 알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부탁했겠지.


그러니까 자유를 찾기 위한 내 시간들을 기억해줘. 부탁이야.


오빠가 무책임하게 죽어버린 그 순간부터 한 순간도 빠짐 없이.


사랑해.


to. 사랑스러운 내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