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안 된 것들 있음 당장 내려가라. 한 명쯤은 대충 커버 칠 수 있겠지."

조명을 아직 비추지 않은 무대 위. 아무도 내려가지 않았다.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지금 발 빼면 그동안 해온 노력이 물거품이 되잖아?"

"긴장되긴 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어요!"


"펭귄년, 괜히 엿 먹이겠다고 망칠 건 아니겠지."

노인이 못마땅한 얼굴로 슬레이프니르의 옷을 가리켰다. 그 촌스런 옷을 지독히 싫어했던 그녀는 기어코 오드리의 도움을 받아 그 옷을 리폼하는 데 성공했었다.


"말 참 심하게 하시네. 너가 아무리 싫어도 공연을 망칠 생각은 없거든? 이건 스카이 나이츠 전대장의 자존심이야."

옷을 바꿔서 그런지 자신감도 인내심도 꽉 채운 그녀는 씨익 웃으며 목 근육을 풀었다.


"자자, 잡담은 그만하고. 스프리건 말 끝나간다."


스프리건의 유창한 말과 함께 스피커에서 조금씩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미나, 레이븐, 럼버제인이 박자를 타기 시작했고, 슬레이프니르도 톡톡 스텝을 밟았다.


"첫 번째 곡 시작합니다! Boney M의, Rasputin."



저 곡이 실제 인물을 모티프로 했다고 했었나?

아스널.


저런 내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불렀던 걸 보면, 200년 전의 인류도 은근히 방탕했었군 그래.


노인이 말했는데, 70년대엔 많은 일이 있었던 변화기라서.. 그렇다고 하더라.


...멜로디보단 가사를 더 좋아하는 눈치인데?


아하하, 어쩔 수 없지 않나. 저런 건 또 많이 흥미로우니.


원한다면 저런 방탕한 곡 좀 더 구해다줄까?


음, 부탁하지!

에휴.


....


"수고하셨어요!" "물, 누구 물 없어?"

가수들이 공연의 성공을 만끽하고 축하하러 온 사령관에게 달라붙는 사이, 노인은 홀로 앉아있는 슬레이프니르의 앞에 다가갔다.


"축하한다. 빚은 이제 끝났다."

"하나도 안 기쁘거든."

샐쭉 입을 내민 그녀는 피로에 기지개를 켠 뒤 사령관에게 가려고 했다. 그때,


"생각보다 잘 했다. 원작자들도 분명 천국에서 기쁘게 봤을 거다."

노인의 입에서 의외로 부드러운 말이 나왔다. 여전히 웃음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지만, 평소 언제 혈압이 터질지 모르던 그 느낌이 없었다.


"그그그그, 그렇게 칭찬해도 하나도 안 기쁘거든?"

뭘 잘못 먹었나? 예상치 못한 모습이 연달아 나오자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래도 기분은 한껏 좋아졌는지 빨개진 얼굴에서 헤실거리는 웃음이 계속 삐져나왔다.


"그래서 말인데,"

"응?"


"넌 분명 재능이 있다. 다른 것도 해볼 생각 없냐?"





"안 해."



- 에필로그 -


"응? 새벽에만 펴서 꽃 피는 걸 못 볼텐데?"

"상관없다."


노인은 페어리의 정원에서 받은 꽃을 책상 위 꽃병에 꽂았다. 아쿠아라는 꼬맹이가 관리하긴 했지만, 꼴에 정원 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라 그런지 제법 잘 길렀었다.

노트를 폈다. 그 맨 끝장엔 이름을 펜으로 썼다가 다시 지운 걸로 꽉 차있었다.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가족의 이름을 떠올리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씨발."


끝장을 부욱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30초도 안 되어 그걸 다시 꺼내곤 서랍에 넣었다.

팔을 너무 길게 뻗었는지 팔꿈치가 시큰거렸다.


"어라? 웬 나팔꽃이야?"

그새 딸을 닮은 그년이 들어왔다. 나팔꽃, 딸이었는지 아내였는지. 한 명이 이걸 좋아했던 것 같았는데.


"...방에 냄새 나서 하나 넣었다."

그래도 언젠간 떠오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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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이 벌써 끝나버렸네. 다음 3막도 기대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