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인간이 후회물을 읽었다.


작성자는 사령관, 작성일자는 부사령관이 합류하기 전의 날짜였다. 그래서 그녀들이 그토록 자신을 경계하는 것인가 하며 그는 먼지가 가득 쌓인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두번째 인간의 음모와 이간질에 추방당한 사령관, 두번째 인간의 아랫도리를 광나도록 햝아대는 지휘관들, 어이없게 죽어버린 두번째 인간을 두고 후회하며 분열하는 대원들.


부랴부랴 사령관에게 찾아가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겠다며 통곡하며 용서를 구하는 지휘관들...그리고 예전과는 다르게 뭔가 변해버린 사령관...


  망설임없이 대원들을 지휘하고 바이오로이드들 하나하나 아껴주는 모습, 고집스리만치 절대적인 이상을 추구하며 동시에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모두다 이끌고 가려는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며 멸망전의 인류들이 추구해야했던 궁극적 표상을 사령관에게서 보았던 부사령관 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완벽한 그 모습에 어딘가 불안함을 느낀 부사령관이었다.


  "...부사령관님"

"이게 무슨짓이지 레드후드?"


  오르카호의 극비리 기록보관소를 뒤적거리며 폐기목록에 있던 책 하나를 집어든게 화근이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레드후드는 대뜸 권총을 남자에게 들이밀었다.


  "쏠건가?"

"규정상으론 그리해야합니다."

"나를?, 인류 유일한 희망의 유일한 이해자인 나를?"


  두번째 인류이자 부사령관인 그는 여유롭게 읽고있던 책을 제자리에 가져다놓았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사살 할수도 있습니다."

"그래그래"


  입에서 나오는 말과는 반대로 부사령관은 건들거리며 레드후드를 지나쳤다.


'이 가엾은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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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의 아이, 펙스세력, 철충...철의 왕자...이 세개의 세력들을 상대로 싸워나가는 것은 쉬운일이 아닐것이다. 동시에, 압박감도 엄청날것이며 스트레스도 엄청날것이다. 이 3세력들속에서 사상자 없이 저항군을 키워나가고 있는 사령관의 능력은 두말할것이 없었다. 인성또한 흠잡을 것이 없었다. 뜬금없이 요리대회를 개최한다거나 자신에겐 여동생이 없다느니 가끔 헛소리를 하는 사령관이었지만 말이다.


  "부사령관님"

"ㅇㅇ"


  저녁시간, 제법 시끌시끌한 휴게실에 정적을 가져오며 부사령관의 옆자리에 앉은 마리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레드후드가 오늘 문제가 있었다 하더군요"

"나도 들었어"


  마리는 속으로 혀를 찼다. 부사령관이자 오르카호 최고의 능구렁이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듣고싶다면 정면돌파밖에 없었다.


  "각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왠일로?"


  부사령관은 놀랐다. 놀랄만도 했다, 그간 사령관과 부사령관의 사이는 암묵적으로 언급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들이었다.


"...질문이 잘못된것 같은데"


  부사령관이 손짓하자 아우로라는 마리에게 술을 내어주었다. 멍하니 술잔을 쳐다보다 다시 부사령관을 쳐다보는 마리는 여전히 대답을 원하는 듯한 눈치였다. 하지만 부사령관은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냐고 묻는게 정상아닌가?"

"어디까지냐니..그게 무슨..."


  불굴의 마리, 스틸라인의 지휘관이자 21스쿼드와 더불어 사령관이 오르카호에 합류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그의 곁을 지킨 믿음직한 지휘관... 불굴의 마리는 사령관의 최측근이자 부사령관을 가장 경계하는 지휘관이었다. 오르카호에 파란을 가져왔던 서류가 어떻게 아직까지 파쇄되지 않았는지는 차후에 논할 문제였다. 문제는 그 금서를 부사령관이 열람했다는것이었다.


  부사령관은 합류후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대원들의 보급일정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사령관은 그를 믿었다. 그가 집필했던 소설과 똑같이 그를 믿고있다. 그리고 그녀들도 그 소설속 두번째인간과 부사령관은 다른사람인것은 진작에 알고있었다. 그는 자신의 보신을 위해 움직이는 소시민적인 인물이며 권력이나 색욕, 어느쪽에도 치우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은 만약이었다.


"저는 각하를 오랫동안 섬겨왔습니다."

"각하를 오랬동안 섬겼구나"


  빈정대는 부사령관은 안주거리들을 깨작깨작 집어먹었다. 목이 막히면 술로 목을 축이고 마리의 눈초리는 전혀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 서류를 열람한것은 1급 범죄에 해당합니다. 기록말살을 위해 규정상 부사령관님을 사살해야합니다. 헌데 어째서 그토록 태평하십니까?"

"부사령관이라...."


  그는 자신을 부사령관이라 부르는것이 싫었다. 좋아서 이짓을 해먹고 있는것이 아니었다. 단지 살기위해서일뿐이다. 멸망해버린 인류문명속에서 이정도의 호사를 누릴수 있는것은 천만다행이며 그는 이 호사를 가능한 계속 누리고 싶었다. 


  "사령관이 사령관이 아닌 모습을 상상해본적이 있나?"


지적이며, 이성적이고, 때론 고집이 강하며...어쩔때는 바보같을 정도로 순진한 사령관의 모습을 생각하며 마리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이내 답을 내놓으려는 찰나, 마리는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처럼 굳어버렸다.


  마리가 방금 내놓으려 했던 답은 오르카호의 사령관으로서의 첫번째 인류의 모습이었지 그 이상의 대답을 내놓을순 없었기 때문이다. 저항군의 지휘관으로서, 가장 곁에서 사령관의 검이 되어 전쟁을 치루고있는 그녀는 정작 사령관이 아닌 첫번째 인류의 모습을 상상할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러하다면 다른 저항군 대원들도 모두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리는 입을 다물수 밖에 없었다.


"그게 니 대답이구나"


그 금단의 서류를 읽었을때는 사령관에게 더욱더 다가고싶었다. 하지만, 그건 마리가 알던 사령관의 모습에 더 다가갈 뿐이었지 정작 그녀는 사령관이 아닌 첫번째 인류에겐 다가가지 못했다.


  부사령관은 사령관의 고독을 헤아릴수 있겠냐고 마리를 타박하고싶었지만 그럴필요는 없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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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령관은?"

"지금은 집무중이십니다."


  리리스는 둘째가라면 서러울정도로 부사령관을 경계했다.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선 그를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오르카호의 경호팀장이라는 직책이 그녀가 필요 이상으로 경계심을 지니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늦은시간까지 안자고 뭐하는거야 그녀석은..."


  사디어스가 소지품 수색을 끝마지고 곤란하다는듯 부사령관이 들고있는 양주를 바라보았다. 이미 개봉한 흔적이 있는 양주는 아무리봐도 꺼림칙했다. 하치코와 펜리르의 허가가 떨어지고 부사령관은 취기가 올라온 몸으로 사령실로 들어갔다.


  리리스는 습관적으로 맘바 피스톨의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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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잔한거야?"

"ㅇㅇ"


오르카호는 금주령이 떨어져있지만 부사령관은 그걸 지킬정도로 모범적인 인류가 아니었다. 부사령관은 사령관의 서류더미속에 짱박혀 있던 술잔 두개를 꺼내 양주를 잔을 채우고 사령관에게 건냈다.


"아직까지 안자는거야?"


  책상밑에서 묘하게 끈적이는 소리가 나는것같지만 일단 신경쓰진 않기로 한 부사령관이었다. 누굴까?, 아스널? 샬럿?, 엘리스?


"오늘 동침 누구야?"


  사령관의 뺨이 책상 밑의 끈적이는 소리와 함께 잠깐 움찔거렸지만 부사령관은 그정도는 관대하게 넘어갔다. 사실 폭소를 참느라 힘든 부사령관이었다. 지금쯤 대화내용을 듣고있을 리리스가 이빨을 빠득빠득 갈고 있었겠지만 그것또한 관대하게 넘어갔다. 부사령관은 자신의 책임소지가 없는 문제라면 관대하게 넘어갈수있는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부사령관은 그의 고독을 달래줄 유일한 존재였다. 완벽한 존재는 없다. 사령관이 썼던 그 소설은 언젠가 자신보다 더 나은 인류가 나타날때 자신은 부품처럼 대체되어 버려질것이라는 불안감에 기인한 것이었다. 자신이 부품처럼 갈아끼워질것이라는 불안감은 정말로 소모품처럼 쓰였던 바이오로이드들을 사람과 똑같이 대우해주는 사령관의 인품속에 숨겨진 동전의 뒷면일지도 모른다고 부사령관은 생각했다.


  자신이 부품처럼 대체되어 버릴 것 이라는 불안감, 그리고 저항군 총사령관이라는 무거운 무게를 지고 나아가는 모습을 원하는 그녀들의 시선을 견뎌내는 스트레스에서 기인하는 고독을 부사령관은 감히 헤아릴수 없었다.


"세명이었네?"


  잔뜩 취기가 오른 사령관은 못참겠다는듯 책상 아래에 있던 아스널, 엘리스, 살럿 모두를 데리고 비밀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세명이 들어간거야? 기둥뒤에 공간이라도 있나?


  사령실 접견 테이블에 앉아 남은 술을 홀로 비우며 부사령관은 생각에 빠졌다.


인류 최후의 희망인 사령관은 소인배인 부사령관은 감히 우러러볼수 없을정도의 존재 였다.


하지만 왠지 부사령관은 그를 감히 동정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대원들이 사령관이 아닌, 첫번째 인류의 고독함을 헤아리게 될 날이 오길 바랄뿐이었다.


사령관이 아닌, 그저 한명의 인간의 모습인 그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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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

"예, 지휘관님들과 사령관님은 요안나 아일랜드로 2주 동안 휴가를 떠나셨습니다."

"갑작스럽네"

"예...저도 갑작스럽습니다만, 그것보다 업무를 수행하셔야합니다."

"??? 무슨업무????"

"사령관님께서 부재중일시 대신 맡으셔야할 오늘 하루일과목록입니다."

"이 씨발새끼...!"


  지휘관들에게 2주동안 바짝 쥐여짜여 돌아오는게 아닌가 걱정하던 부사령관은 사령관이 떠넘기고 간 서류들을 보며 머리를 쥐어짰다. 하지만, 어째선지 기분은 그리 썩 나쁘지 않았다. 레드후드는 마리가 사령관의 업무를 돕던것 처럼 부사령관의 업무를 돕기 시작했다. 그때의 일로 마리가 뭔가 느꼈던 것이 있는지 대뜸 지휘관들과 상의해 사령관과 개인적인 시간을 갖기로 한것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사령관이 아닌, 첫번째 인류이자 자신들의 반려를 좀더 이해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것이다.


"그래서, 그때 이야기좀 해줄래?"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우선 아스널 대장님은 사령관님을 비밀의 방으로 끌고가 3일동안..."


  업무를 해치우며 레드후드에게서 당시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부사령관은 탄식과 폭소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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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된 자는, 이끌어야하는 자는 고독할수밖에 없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