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로이드들은,제조되어 눈을 뜨는 그 시간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엘븐 모델들이 그녀들이 본 적도 없는 품종의 나무를 가꾸고,방금 만들어진 바닐라 모델이 능숙하게 가사를 맡을 수 있는 거겠지요.


제가 태어날 때 받은 역할은...직설적으로 말하면 자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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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2시 방향에 매머드!"


제가 소속된 부대는 제공권을 점령하고,남아도는 화력을 지상에 쏟아붓는 역할입니다.

스카이나이츠,그리고 저희,공중에서 활약할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의 수는 적으니 하나하나가 귀중한 병력이죠.


"철충이 후방 병력에 조준을 하고 있습니다.여력이 남는 사람이 견제를 해주시길."

"알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폭격입니다.

하지만 대령님처럼 은밀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대장님처럼 자리에 앉아 버튼 하나만 눌러서 쑥대밭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제 장비는 근접해야 제 성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속도를 높여 강하를 하니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울리는 사이렌에 아무 소리도 안 들립니다.



철충이 눈치를 채고 포구를 돌리지만,이미 늦었습니다.

철충에 미사일을 발사한 뒤 제 폭격에 스스로 휘말리지 않게 서둘러 선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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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

"다들 고생했어!어쩐지 오늘따라 많은 거 같았는데."

"보기보다 눈치는 있으셨네요 대장.그러면서 왜 사령관을 볼 때만..."

"야!거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셨...."


"......"

옷을 벗어 흙먼지를 털면서 동료들을 지켜봅니다.

방금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던 모습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기애애합니다.


"어?사령관!"

"말 돌리지 마요 대장...어 진짜네??"

"오셨습니까.87구역은 다 정리해 놨습니다."


저희가 임무를 마칠 때마다 사령관님이 직접 나오셔서 칭찬합니다.

익숙하진 않으니 조용히 숙소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밴시!고생했어.다행히 상처입은 곳도 없네."

"...감사합니다."


멸망 전 인류들은 상처 없이 돌아오는 걸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조하는 것보다 재무장을 시켜 보내는 게 싸게 먹혔을 테니까요.


...사령관님도 그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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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출격이 없는 날.저는 실피드와 숙소에서 널브러져 있습니다.

얼굴에 팩을 하고 코를 고는 실피드를 바라보며 노트를 꺼냅니다.


노트에는 제가 태어난 첫 날부터 적었던 여러가지 글들이 적혀 있습니다.전부 버킷 리스트입니다.

기록 속의 저희 기종은 수명이 길었던 적이 별로 없습니다.변변한 장갑도 없으면서 근접전을 강요받는 무장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인지 다들 죽기 전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 놓는 편이었습니다.시간을 때우기엔 좋아 보이기에 저도 여러가지 적었습니다.


"저기..누구 있어?"


누군가가 숙소 문을 노크합니다.하지만 지금 숙소엔 저랑 자고 있는 실피드 밖에 없습니다.

문을 열자 건장한 남성이 저를 내려다봅니다.


"오셨습니까 사령관님,지금 메이 대장님은 안 계십니다."

"그래?....너희 둘 밖에 없는 거야?"

"그렇습니다."


사령관님은 자고 있는 실피드를 보더니 숙소 안으로 들어옵니다.


"잠깐 시간 돼?이야기 좀 하려고 그래."

"알겠습니다."


제 옆에 걸터앉은 사령관님은 제가 적던 노트를 바라봅니다.


"이건 뭘 적어놓은 거야?"

"....저희 기종은 버킷 리스트를 많이 작성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그래서인지 무의식적으로 저도 하고 있습니다."

"흠...."


리스트를 바라보던 사령관님은 이내 절 바라봅니다.무슨 얘기를 하러 온 걸까요.


"밴시,지금 생활은 어때?"

"...보시다시피 괜찮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야.힘들면 쉴 수도 있어."

"힘들지 않습니다."


말을 몇 마디 나누던 사령관님께선 저한테 몸 조심하라며 나갔습니다.

...그는 왜 이런 양산형 기체까지 걱정해주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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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87 밴시,도착했습니다.무슨 일이십니까?"

"소완이 힘 좀 써줬지.여기 앉아,같이 먹자."


저번에 버킷리스트에 적어놨던 걸 본 걸까요.

사령관님은 저랑 1대1로 밥을 먹으려고 절 부른 것 같습니다.


"성의는 감사합니다만,아마 이런 자리인 걸 보니 잘못 부르신 것 같습니다.그럼 이만.."

"가지 마,너 부른 거 맞으니까."


앉아서 고기를 칼로 썰어 입에 가져갑니다.맛있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면 한 줄 지워야겠네요.


"밴시,기록들을 좀 읽어 봤어."

"그렇습니까."

"맡고 있는 역할에 비례하는 높은 실적,하지만 몸이 성히 돌아오는 일이 거의 없지."

"..수복 비용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야.난 너가 몸을 조금 더 아끼길 바래."


전 아마 그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봤던 것 같습니다.


"기록을 봤으면 아시겠지만 저희 기종한테 무사귀환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밴시..."

"무사귀환하면 값싸게 재무장 시킬 수 있으니 좋으시긴 할 겁니다."


사령관님이 고개를 숙입니다.너무 심하게 말한 걸까요.

하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현실을 말해 줄 뿐입니다.


"용건이 더 없으시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잠깐만 내 얘기를 좀 들어줄 순 없을까?"


사령관님이 제 손을 잡았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까 밴시,너가 좋다."

"?"

"너가 다칠 때마다 불안한 것도,상처 하나 없이 돌아오는 게 반가운 것도 다 걱정되서 그랬어.이건 진심이야."

"과거하곤 달라,너가 진심으로 원한다면 그렇게 목숨을 내던지듯이 폭격할 필요는 없어."

"이건 저희 기종이 태어날 때부터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너의 동의 하에 전투 모듈을 뗄 수도 있어.옆에서 비서로 남을 수 있는거지."

"전 그런 부담스런 자리는 맡을 수 없습니다."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전 그런 그의 어깨를 토닥여 줍니다.


"사령관님.한 명 한 명의 죽음에 동요해선 훌룡한 지휘관이 될 수 없습니다.더군다나 저희처럼 위험한 일에 자원한 사람들이면 더욱이 그렇습니다."

"마음은 감사합니다만...그런 자리는 대장님한테 권유하시는 게 더 좋으실 것 같습니다."


일어나 나가려던 찰나,


"그럼 이렇게 가끔씩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줘."

"...알겠습니다."


저희 사령관님은 인간적이어서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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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저희보다 빨리 날아가,어느덧 몇 달이 지났습니다.

십수 번의 출격,십수 번의 데이트.사령관님은 저랑 붙어있는 걸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좀 부담스러웠지만,저는 굳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지금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대령님이 대장님의 얼굴에 케이크를 박았습니다."

"와,메이 성격에 그런 걸 맞으면 노발대발 했을 텐데."

"다행히 제가 발사 코드를 치워놔서 별 일은 없었습니다."

"잠깐 진짜 오르카 호 안에서 쏘려 했다고?"


밥을 먹고,밖에서 걷고,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 수록 사령관님이 점점 가까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사령관이 가까워질 수록,제 마음 속의 두려움 역시 커져갑니다.


"밴시,예전에 했던 제의 생각 해 봤어?"

"마음은 감사합니다만..아직 퇴역할 시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령관님이 제 어깨를 시원하게 주물러 줍니다.


"오늘은 좀 특별한 이유 때문에 불렀어.밥 먹으러 가자."

"알겠습니다."


방에 들어가자 익숙한 풍경이 보입니다.몇 달 전에 처음 부르셨을 때 봤던 그 풍경입니다.

저는 다시금 앉아 칼로 고기를 썰어 입에 넣습니다.맛있습니다.


"특별한 일이라 하심은..."

"아 그거, 나 굉장히 큰 다짐을 했거든."


그가 손을 뻗어 저한테 무언가를 내밉니다.

이것은....

"리리스가 울면서 내 다리를 붙잡고 따라오려 하더라고.바지가 찣어질 뻔했어."


이것은 반지입니다.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도록 설계된 저입니다만,지금 느끼는 것이 굉장히 북받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걸까요.


"ㅅ...사령관님,저는.."

"싫으면 강요하진 않을게,관계가 부담스러우면 어쩔 수 없거든."

"아닙니다.감사합니다."


절 이리도 소중히 대해 준 사람한테 상처를 줄 순 없습니다.

반지를 받아 손가락에 낍니다.살짝 약지에 끼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어때?잘 맞아?"

"...그렇습니다.감사합니다."

"다행이다.난 아직도 너가 날 멀리 하려는 줄 알았어."


그가 멋쩍게 웃습니다.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약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사령관을 끌어안아 입을 맞췄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대장,벌써 몇 달 째입니까.제발 고백 좀 하라고요."

"아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사령관은 벌써 거의 다 넘어온 거란 말이야."

"뭘 넘어옵니까 넘어간 건 저기 밴시한테 넘어갔지.대가리에 갈 영양을 다 그 흉측한 가슴으로 끌어쳤으면 좀 제대로 어필을 하세요."

"윽...으그윽..."

"애초에 부하한테 밀리는 대장이 어딨습니까?이 참에 정실부인을 대장으로 쿠데타나 일으키는 게 좋겠네요."

"나애애앵!!!"


저희 부대는 티격대격 대면서 작전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손을 들어 약지에 껴진 반지를 봅니다.반짝이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밴시~참 부럽단 말야.난 언제쯤 불러 주려나~"

"실피드도 열심히 하고 계시니 곧 부르실 겁니다."

"그냥 해본 소리야.오늘도 끝나고 불려 가려나?부럽다 정말."

"그렇습니다.매일같이 불려 가는군요."


만담을 나누다 보니 철충이 보입니다.놀 땐 놀더라도 일은 진지하게,저희 부대는 능숙하게 적을 제압합니다.

12시 방향에 포격형 철충이 대장을 노리는 게 보입니다.저격하지 않으면.


"12시 방향에 매머드가 있습니다.견제하겠습니다."

"어?잠깐만!"


옆에서 뭔가 반짝여서 봅니다.포격형 철충이 더 있습니다.

아..포구 방향이 이쪽...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ㅅ.?..!!...ㅈ...!"

'......'


눈이 안 보입니다.고막이 터진 건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습니다.사지에 감각이 없습니다.

아무리 바이오로이드가 튼튼하다 한들 변변한 장겁도 없이 포탄에 맞으면 멀쩡할 수가 없습니다.


".ㅅ...밴시!정신이 들어?밴시!"

"빨리 수복해야 합니다.미리 설비 준비를 해주세요."

'............'


사령관님이 부릅니다.하지만 답하려 해도 입이 열리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포격을 맞고 왼팔이 떨어진 게 생각납니다.소중한 반지...아마 강에 떨어져 못 찾을 겁니다.

역시 사랑하는 이를 가까이 두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고통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다행히 수복이 가능한 정도의 부상이었습니다.재생된 눈이 빛에 익숙하지 않아 눈을 찌푸립니다.

아직 팔다리에 신경이 동기화 되지 않아 움직임이 굼뜹니다.느릿하게 팔을 들자 예상대로 반지가 없습니다.


"일어났군요,밴시.다들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프네 양."


일어나려는데 머리맡에 뭔가 걸려 내려다보니 븕은 덩어리가 보입니다.

대장입니다.


"그렇게 드센 메이 양이 울면서 옆에 붙어 떨어지질 않더라고요.못 일어나면 철충을 다 쓸어버릴 기세던데,무사해서 다행이에요."

"....."


감사하다 인사를 하고 일어나 정비실로 향합니다.


"아,사령관님께 연락을.."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네,그럼."


거짓말입니다.저는 장비를 입고 몰래 오르카 밖으로 나옵니다.

주위를 둘러 본 뒤 방파제에 앉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려고 애쓰던 도중,부드럽게 기류를 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오르카 호 내에서 이런 순항이 가능한 건 한 명 뿐입니다.


"여기 있었군요,밴시."

".....대령님."


대령님이 날아와 제 옆에 앉습니다.


"왜 보고도 안 하고 나온 겁니까?다들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데.더군다나 환자 아닙니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잠시 필요했습니다."


그녀는 말하려던 입을 다물고 제 얘기를 듣습니다.


"이번 포격은 위험했습니다.조금만 아래에 맞았어도 분명 죽었을 겁니다." 

"죽을 위기를 겪고 나니까 왜 사령관 님이랑 거리를 두려 했는지 다시 떠올랐습니다,저는 상처를 주는 게 두려웠습니다."

"밴시,사령관은..."

"저희 기종은 위험부담이 큰 만큼 대부분 단명합니다.설령 돌아오더라도 다음에도 죽을 위기를 겪죠."


고개를 숙입니다.


"그래서..어차피 금방 갈 거 남들한테 정을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그런데 사령관님이 먼저 오신 겁니다."

"그게 두려웠습니다.이렇게 마음 속을 채워가다 덜컥 죽어버리면,곁에 있던 이들이 그 자리 만큼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


장갑 위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집니다.목소리가 조금씩 떨립니다.


"차마 사선에서 싸우는 동료들을 두고 혼자 비서같이 편한 자리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밴시."

"저는......저는...."

"밴시."


대령님이 절 끌어안습니다.


"밴시,주변을 둘러보세요.다들 당신을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다들 당신이 목숨을 걸고 폭격할 때마다 걱정합니다.멸망 전 인류들처럼 꼬라박고 죽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녀가 절 토닥입니다.


"마음 속에 너무 많은 부담을 질 필요는 없습니다.더 이상 머릿속의 자살코드에 얽매일 필요도 없어요."

"당신이 진정으로 사령관을,그리고 동료들을 소중하게 여긴다면,거리를 두지 말고 가까이 붙어 행복하게 해주는 게 옳습니다."

"저는...."

"그리고 당신이 정말로 하찮았으면 대장이 눈물콧물 질질 짜며 병실에 죽치고 있었겠어요?하여간 쿨한 척 하긴.."


"어?야 찾았어!애들 이리로 보내!"

끌어앉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저와 대령님을 얼굴이 퉁퉁 부은 메이 대장이 발견했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다음부턴 말도 없이 나가지 마세요 밴시,다들 찾고 있었습니다.진심으로 걱정했다고요!"

"알겠습니다..."

"정말,사령관님은 이런 애를 왜 정실로 둔 건지...."

"말버릇이 그게 뭐야 리리스."


경호대장님한테 혼나던 절 사령관님이 와서 말립니다.


"사령관님?전 그냥 가벼운 훈계를..."

"구속플레이 2주 압수."

"꺄아아아악!!"


...무슨 플레이?아무튼,사령관님은 울부짖는 그녀를 비밀스런 얘기를 해야 한다며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밴시,손 줘봐."

"사령관님,저 반지가...."

"빨리."


아직 선홍빛이 감도는 왼손을 내밀자 사령관님이 다시 약지에 반지를 끼워줬습니다.


"밴시.너가 며칠 누워있는 동안 우느라 얼굴 다 부었다."

"죄송합니다.사령관님."

"죄송할 게 어딨어.진짜로 죄송해야 할 건 네 아이지."


아이?


"수복중에 닥터가 발견한 건데,너 몇 달 전에 임신했더라.오르카 호의 첫 번째 애엄마가 된 걸 축하해."

"......."

"그런데 포격으로 죽을 뻔 했으니 애한테 사과를 해야 해?안 해야 해?어?"


눈이 뜨겁습니다.


"메이도 나앤도 얼마나...어?어디 아파?"

"사령관님..."

"미안하다 내가 말을 심하게 했-"


눈물을 흘리느라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사령관님의 허리가 부서져라 끌어안았습니다.

그이는 다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절 같이 껴안아 줄 뿐이었습니다.



저는 어리석었습니다.

왜 여태껏 이런 사람과 거리를 두려 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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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87기종은 태생적으로 감정표현이 더디고,염세적이며,죽음에 무덤덤합니다.

아마 몇십년 동안 쌓인 데이터가 저희들의 성격을 뒤틀어 버린 거겠지요.

오죽하면 저희의 역할이 자살이라는 말도 있었을까요.


저도 한 때는 그런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 죽을 지 모르기에 일할 때를 제외하면 사람들을 무감정하게 대했고,죽어 마음 속에 상처만 남길까 거리를 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그런 생각이 안 듭니다.

멸망 전과는 달리 내일도 살아갈 목표를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 생겼으니까요.


저는 줄이 빼곡하게 쳐진 버킷 리스트를 비행기로 접어 바다에 날렸습니다.

더 이상 필요할 일이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