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모음 링크


--------------------------------------------------------------------------------------------------------------------------------------------

42) Day 77, AM 09:32

 

“정말이지. 언제나 기대 이상의 활약상을 보여주는군, AGS부대는.”

 

 작전이 시작된 지 2시간 남짓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불굴의 마리는 그 어느 때보다 원활하게 흘러가는 전장의 상황을 두 눈에 담은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쿠-웅!

 

쿵!

 

 지축을 뒤흔드는 묵직한 발걸음, 가히 수십 톤에 육박하는 거구의 발걸음이 흙먼지가 휘날리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울려 퍼지자 그 뒤로 수십에 달하는 병사들이 저마다의 군홧발 소리를 떠들어대며 그 거구의 그림자를 뒤따랐다.

 

-기간테스 001. 전투 개시하겠음.

 

-기간테스 002. 마찬가지임.

 

 연한 녹빛을 띈 페인트 아래로 자신을 기간테스라 칭한 거구의 로봇들은 적색의 안광을 내뿜으며 제 몸체만큼이나 육중한 양팔을 앞세워 포화가 난무하는 전장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투-두두두!

 

팅!

 

팅!

 

 희뿌연 흙먼지 너머로 빗발쳐 오는 포화에도 불구하고 기간테스들은 그 육중한 발걸음을 멈출 줄 모른다는 듯이 제 가슴을 양팔에 달린 거대한 방패로 막아내며 거침없이 전장의 중앙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 광경에 힘을 얻은 것일까, 그 뒤를 따르던 스틸라인의 병사들 역시 저마다의 얼굴에 비장한 기색을 띄우며 그 뒤를 따라 기간테스들이 만들어 준 작은 틈 사이로 총구를 들이밀며 대응 사격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투-두두두!

 

 양쪽 모두에서 쏟아지는 수십, 수백의 불꽃 속에서 기간테스들이 계속해서 걸음걸이를 멈추지 않고 걸어나가자 하늘 위에서 그들의 걸음걸이를 축하하는 축포가 그들을 막아서는 철충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꺄하하핫! 화창한 하늘에 걸맞은 시원한 포격을 선사할게! 이 벌레들아!”

 

투-팡!

 

 푸르른 하늘 위를 자유로이 날고 있던 연녹빛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녀, 피닉스는 제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주포를 들어 기간테스의 정면을 막아서는 나이트 칙 무리를 향해 포구를 들이밀자 그녀의 주포에서 화려한 불길이 터져 나왔다.

 

콰-광!

 

 그녀의 주포가 내뿜는 불꽃만큼이나 화려하게 터져나가는 나이트 칙의 파편들이 하늘 위로 솟아오르자 그녀는 자신의 가녀린 어깨를 파르르 떨며 새침한 얼굴 위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정말! 저런 애들이 우리 부대 애들이 아니라니. 대장? 저 기간테스들 우리 부대에 전입시키면 안 될까?”

 

“그건 내 권한 밖의 일이다. 피닉스 중령.”

 

 불굴의 마리는 단말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피닉스의 물음에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녀의 요구 아닌 요구에 불굴의 마리 역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확실히 전선을 유지하고 점진적인 전선 제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전과 달리, 각하의 AGS 지원을 통해 파격적인 전진 속도가 가능하게 되었지.’

 

 불굴의 마리는 계속해서 전장의 한가운데를 걸어나가는 기간테스들의 등을 주시한 채 자신도 흙바닥 위로 살짝 몸을 띄운 뒤 그 그림자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그녀가 전장의 그늘에서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철충들의 화력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쇄도하였다.

 

“음.”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무수히 많은 총격에도 불굴의 마리는 그저 미간을 찌푸릴 뿐 담담히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의 푸르른 눈동자 너머로 그 색과 같은 푸른 전자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같잖은 것들이 반항이 심하구나.”

 

파-직!

 

 그녀의 말 한마디에 그녀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던 주시자의 눈들이 일제히 그녀 앞으로 날아가 원반 형태의 푸른 전자기망을 형성해 그녀를 향해 쇄도하던 총격들을 일제히 가로막았다.

 

지-직! 찍!

 

 총알의 철판과 그녀의 전자기가 충돌하자 날아오던 총알들은 일제히 그 속도를 잃고 그 전자기망을 뚫지 못한 채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방과 같이 들썩거리다 힘을 잃고 흙바닥 위로 천천히 떨어졌다.

 불굴의 마리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팔짱을 풀어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다부진 자신의 오른팔을 쭉 뻗었다.

 

“자 이번에는 내 차례로군. 어디 받아보게나.”

 

콰-직!

 

 그녀의 입가에 거만한 미소가 걸림과 동시에 그녀는 어깨에 걸친 검은색 장교 코트를 펄럭이며 오른팔에서 강렬한 에너지파를 방출했다.

 그 에너지파가 향한 곳은 전방의 풀숲이 아닌 그녀의 장비인 주시자의 눈, 그녀가 방출한 에너지를 그것들은 일제히 흡수해 내부에서 에너지를 환원함과 동시에 중앙에 뚫린 원형 방출구를 통해 일자형으로 빔을 내뱉기 시작했다.

 

피-융!

 

콰-직!

 

콰-앙!

 

 빔이 도달한 곳은 그 어디가 되었든 귀청을 찢어내는 가공할만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빔이 지나간 나무 등치에는 볼썽사나운 구멍이 뚫렸으며 빔이 관통한 바위들은 그 위로 완전히 터져나가 본래의 모습을 잃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빔을 정통으로 맞은 철충들 역시 바위와 같이 산산이 조각나 더는 움직이지 못했고 불굴의 마리는 그 광경을 두 눈에 담으며 자신의 입꼬리를 더욱더 올려보았다.

 

“한 번에 세 기인가. 나쁘지 않군.”

 

“우와..”

 

 그녀의 입자포가 빛을 발할 때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스틸라인의 병사들의 얼굴에는 환희와 경외, 그리고 질투 아닌 선망의 시선을 그녀에게 보내었다.

 언제나 선두에 나서 전투에 임하는 자신들의 대장이 보여주는 가공할만한 전투력은 그녀들의 가슴 속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뭣들 하나! 어서 공격하지 않고!”

 

 총성이 그친 전장의 상황에 불굴의 마리는 큰 목소리로 그녀의 등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일갈을 내던지자 그녀의 호통에 잠시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뗀 이들이 재빨리 다시금 총구에서 불을 내뿜기 시작했다.

 

투-두두두!

 

콰-앙!

 

쾅!

 

 푸르른 녹음(綠陰)으로 가득 차 있던 섬의 숲은 그 본래의 모습을 잃어 군데군데서 터져 나오는 불길에 휩싸여 족히 수십 수백년을 살아온 나무들은 그루터기만 남긴 채 힘없이 무너졌으며 그 사이로 메케한 연기가 쉼 없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그리고 철충들 역시 그 불길에 휩싸여 기동력을 상실해 거침없이 총알을 뿜어대는 그녀들의 화력에 휘말려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뒤로 밀려나 이내 숲속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흠. 후퇴했나?”

 

 철충들의 모습과 그들의 불쾌한 뇌파가 점차 멀어지는 것을 느낀 불굴의 마리는 기분이 언짢은 듯 가볍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각하께 어서 승전보를 올려야 하거늘. 벌레들이 귀찮게 구는군.”

 

 그녀는 약간의 조바심이 가슴 속에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팔짱을 낀 양팔에 더욱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약간 빠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이 정도의 강행군은 우리 스틸라인에게 있어 별것도 아니다.’

 

“전 대원! 2분 이내로 각자의 장비를 정비해라! 장교들은 각 부대의 불충분한 탄약을 확인하고 후방 보급부대에 연락을 취하도록!”

 

 불굴의 마리의 신경질적인 명령에 하급 스틸라인의 부대원들은 긴장이 서린 얼굴로 제 분대원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장비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장교급과 부사관급 스틸라인 병사들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하늘 위를 날아다니며 각 부대의 인원과 보급품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탁-

 

 불굴의 마리는 그녀의 부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지면에 살짝 띄웠던 자신의 발을 흙바닥 위에 사뿐히 안착시켰다.

 

“하아..”

 

 살짝 머리가 어지러운 탓에 불굴의 마리는 팔짱을 끼고 있던 오른손을 왼 팔꿈치 사이에서 꺼내어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오른 팔목에 칭칭 감긴 인식표가 햇빛에 반사되어 그녀의 눈을 부시게 하였으나 불굴의 마리는 되려 그것을 보곤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걸은 채 생각에 빠졌다.

 

‘진격 속도는 나쁘지 않지만. 이래서는 그녀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겠군.’

 

 “앵거 오브 호드..”

 

 살짝 열린 그녀의 입술 사이로 내던져진 한 부대의 이름, 불굴의 마리는 인식표에서 눈을 떼고선 이번에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 여성의 얼굴을 조심스레 떠올렸다.

 자칭 사막과 초원의 전사들이라 자랑할 정도로 강인하고 그 누구보다 빠른 기동력을 자랑하는 블랙리버의 기동 타격부대. 각각의 병사들의 수준은 스틸라인의 일개 분대원들을 능가한다고 불굴의 마리는 내심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우리 스틸라인과 비교했을 때 머릿수는 현저히 떨어지나 그 기동력과 화력만큼은 순수 유격대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다.’

 

 각각의 병사들은 저마다의 개성적인 장비들을 지닌 채 광활한 평지에서 불굴의 마리조차 감탄케 하는 전투력을 과시했었다. 저마다의 바이크형 외골격 장비를 활용한 뛰어난 기동력, 그리고 측면에서 충분히 적들을 격멸할 수 있는 파괴력.

 그리고 불굴의 마리가 생각하는 앵거 오브 호드의 진정한 강함은-

 

‘신속의 칸. 원 맨 아미.’

 

“...흠.”

 

 불굴의 마리는 자신과 같은 저항군의 소장급 지휘관 개체의 얼굴을 떠올리곤 미간을 살짝 좁혔다. 항상 갈색의 워페인트를 눈가에 짖게 그리곤 그 사이로 철혈의 레오나와는 다른 분위기의 회색빛 눈동자를 빛내는 그녀는 호리호리한 체구와는 달리 지구력만큼은 자신을 능가한다고 그녀 스스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녀라면 이제 곧 도착하겠군.’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신속의 칸의 무자비한 돌파력을 떠올린 불굴의 마리는 제 오른 손목에 달린 손목시계를 닮은 단말기를 두들기며 꾹 닫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각 레드후드 개체는 내게 전황을 보고하도록.”

 

 딱딱한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단말기 너머에서 세 여성의 똑같은 음색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예. 대장님. 레드후드 1호, 현재 위치는 중앙 전선. 현재 일시적인 소강상태를 활용해 각 부대원들의 보급품 조달 및 부상자 호송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레드후드 2호, 보고 올리겠습니다. 현재 위치는 북동 방면 전선, 현재 AGS 강하부대, 램파트와 스파르탄즈 시리즈의 비호 아래 진격 중입니다. 보급품은 AGS 드론들을 통해 받았으며 부상자들 역시 그것들을 통해 이송했습니다. 이상입니다.

 

-레드후드 3호, 현재 위치는 북서 방면. 현재 AGS 강하부대, 포트리스 개체의 협력 아래 진격하고 있습니다. 보급품은 방금 익스프레스 공중 보급부대를 통해 받았으며 부상자 이송은 실키들의 군용차량으로 후송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줄줄이 흘러나오는 전황 보고를 들은 불굴의 마리는 딱딱한 얼굴 위로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걸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음.”

 

 불굴의 마리는 딱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으나 각 부대의 보고를 듣곤 현재 전황에 매우 만족스러워 저도 모르게 눈가에 힘을 풀은 채 메케한 연기가 넘실대는 수풀의 저 너머를 응시했다.

 

‘전황이 매우 순조롭군. 그런데..’

 

“레드후드 3호. 혹 앵거 오브 호드는 보았나?”

 

 불굴의 마리는 기분 좋은 미소를 여전히 입가에 걸은 채 방금까지 떠올렸던 그녀들을 찾았다. 분명 섬의 서쪽 해안가를 따라 올라왔을 터이니 현재 자신이 있는 중앙 전선까지 오기 위해서는 북서 방향 전선을 먼저 돌파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이 들어 맞았다는 듯 레드후드 3호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의 물음에 답하기 시작했다.

 

-아..아! 죄..죄송합니다! 대장님. 보고에 누락이 있었습니다. 예. 앵거 오브 호드 대원들의 이동으로 예상되는 한 부대가 5분 전 저희 전선 부근까지 다가왔으나 곧바로 인근 안전지대로 이동. 그 이후로 목격되지 않았습니다.

 

“...흐음. 그래. 알겠다.”

 

 레드후드 3호의 대답에 불굴의 마리는 아쉬운 얼굴로 살짝이 자신의 혀를 찼다.

 

‘그녀들이 어디까지 왔는지는 굳이 부하들에게 물을 필요도 없지만..’

 

 그녀들 자신들의 작전 진행 상황을 알아보는 것은 번거롭게 병사들의 보고를 통해 들을 필요가 없었다. 매우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각하께 통신을 요청하거나 단말기를 통해 중앙 서버를 들어가면 되지만..’

 

“..알겠다. 2호와 3호는 계속해서 작전을 진행토록 하고, 1호는 각 부대원의 상태를 철저히 검사하도록.”

 

-예!

 

 일시에 들려오는 그녀들의 당찬 대답을 들음과 동시에 불굴의 마리는 곧바로 통신을 끊었다. 그리고는 여느 때와 같이 팔짱을 낀 채로 제 오른손의 검지로 왼팔을 두드리며 스스로의 상념에 빠지기 시작했다.

 

‘신속의 칸, 나와 같은 멸망 전 개체. 그리고..’

 

‘..다수의 과거 부하들을 잃은 나와 달리 제 과거 부하들을 거의 온전한 상태로 유지하고 있는 유능한 바이오로이드지. 그리고 각하의 보급을 우리와 같이 간접적인 형태가 아닌 직접적인 형태로 받고 있고. 어쩌면 각하에게 가장 가까운..’

 

“...아니다. 이런 것으로 그녀와 날 저울질하는 것은 군인으로서도, 전우로서도 옳지 않다.”

 

뿌-득

 

 문득 그녀를 향한 묘한 질투심을 느낀 불굴의 마리는 제 발아래 흙바닥을 거칠게 문지르며 휘날리는 흙먼지와 같이 제 머릿속의 불필요한 생각을 지워 내려 하였다.

 

“..나도 너무 오래 살았군. 과거 그 인간들과 같은 생각을 하려 하고 있어.”

 

 불굴의 마리는 굳이 제 입 밖으로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인간들과 자신을 동일 선상에 올린 듯한 말을 내뱉어 스스로 자책을 하였다. 그만큼 그녀가 일순간 신속의 칸을 향해 느꼈던 질투심은 그녀 자신도 불쾌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우선 그녀들이 오기 전에 전선을 최대한 깔끔하게 유지해야겠지.”

 

 일순간이지만 동료를 질투한 자신에게 크게 실망한 불굴의 마리는 팔짱을 풀곤 제 군모를 깊게 눌러썼다. 군모의 캡 부분의 그림자가 그녀의 이마와 눈썹을 온전히 가려 그림자 아래서 빛나는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를 더욱더 부각시켰다.

 

짤-그락

 

 여전히 자신의 오른 팔목에 칭칭 감겨있는 인식표가 철제 줄과 맞부딪혀 상쾌한 마찰음을 내자 불굴의 마리의 얼굴에 또다시 미소가 서렸다.

 

‘언제봐도 참으로 기분 좋은 물건이야. 볼 때마다 각하를 떠오르게 해.’

 

 불굴의 마리는 햇빛에 반사되어 환하게 빛나는 인식표를 왼손으로 매만지며 여태까지의 잡생각을 조금씩 지우기 시작했다.

 엄지로 쓱쓱 문지를 때마다 인식표 위를 덮었던 흙먼지가 자신의 검은색 장갑 위로 옮겨졌으나 그것은 그녀에게 별로 중요치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니군. 각하께 어서 승전보를 전해드려야겠지.”

 

 그런 그녀의 중얼거림에 반응한 것일까, 갑자기 그녀와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기간테스 개체 한 기가 그녀를 향해 그 묵직한 두상을 내리며 남성적인 어투가 섞인 기계음을 내뱉었다.

 

-기간테스 001. 색적 반응 있음.

 

“음?”

 

-대장님! 현재 중앙 전선으로 미확인 적 개체가..

 

쿠-웅!

 

 다급함이 섞인 레드후드의 목소리가 단말기 너머에서 들려옴과 동시에 불길이 사그라들던 수풀 너머로 지축을 뒤흔드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불굴의 마리의 귓가에 들려왔다.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큰 발소리에 불굴의 마리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수 미터는 족히 넘는 거구가 굵직한 나무 기둥을 부수며 수풀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쿠-웅! 쿠-웅!

 

“...저건.”

 

-기간테스 001. 적 개체 확인. 데이터 베이스 검색 완료했음. 저거너트 개체. 확인했음.

 

 기간테스의 보고와 같이 수풀을 헤집고 등장한 것은 그녀 곁에 묵묵히 서 있는 AGS의 철충 감염 개체, 저거너트였다.

 연갈색의 기간테스와 달리 철충 감염을 암시하는 검회색의 몸체와 유독 눈에 띄는 흰색 베이스의 두상. 그것만 빼면 기간테스와의 큰 차이를 느끼기 힘들었으나 불굴의 마리는 부릅뜬 눈으로 그것을 응시한 채 큰 목소리로 하늘 위에 있는 피닉스를 향해 외쳤다.

 

“피닉스! 쏴라!”

 

-예스 맘!

 

투-펑!

 

 경쾌한 그녀의 주포 발사음과 동시에 흰 연기를 내뿜는 포탄 하나가 묵묵히 걸어오는 저거너트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저거너트는 그것을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제 왼팔을 들어 올렸다.

 

쾅!

 

 이윽고 피닉스의 포탄과 저거너트의 육중한 장갑이 부딪혀 큰 폭발음과 함께 일순간 불길이 일었으나 저거너트는 여전히 그녀들을 향해 걸어올 뿐이었다.

 그것을 본 불굴의 마리는 작은 신음을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별 영향은 없나.”

 

 자신이 나설 차례라 생각한 불굴의 마리가 푸른 전자기와 함께 몸을 붕 띄우자 갑자기 그녀의 곁으로 기간테스가 그녀보다 한 걸음 빨리 앞서 나갔다.

 

“-자네?”

 

-기간테스 001. 근접 격투 교본 실행함.

 

 갑작스러운 기간테스의 행동에 불굴의 마리가 잠깐 당황한 사이 기간테스 001이라 자칭하는 개체와 조금 따로 떨어져 있던 다른 기간테스 개체가 수풀을 헤집고 나오는 저거너트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투-두두두!

 

 자신을 향해 조금 빠른 모양새로 걸어오는 기간테스를 향해 저거너트의 가슴팍 양쪽에 달린 기관포가 그를 향해 불을 내뿜기 시작했다.

 

팅-! 팅-!

 

 연신 기간테스의 연갈색 페인트가 발린 장갑 위로 불똥을 튀었으나 기간테스는 오히려 무릎관절 파츠의 기동속도를 높이며 몸을 살짝 웅크린 채로 양팔을 들어 올렸다.

 

티-디딩!

 

쿵! 쿵! 쿵!

 

-대장?! 어떻게 해?

 

“..피닉스 대령. 대기해라. 타 인원들도 마찬가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피닉스의 목소리에 불굴의 마리는 뛰어나가는 기간테스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담담히 입을 열었다. 무언가 재밌는 상황이 펼쳐질 거란 직감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쿠-웅! 쿠-웅!

 

-#@%..

 

 양측에서 쇄도해오는 기간테스 두 개체에 저거너트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 이내 정면으로 뛰어오는 기간테스 001을 향해 자신도 속도를 높여 돌진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먼저 기간테스 한 개체를 없애겠다는 건가.”

 

쿵! 쿵! 쿵!

 

“어어-저저..”

 

 여태껏 본 적 없는 크나큰 흙먼지가 무너지는 나무들 사이로 피어오르자 황급히 전열을 갖추던 스틸라인 병사들이 멍한 얼굴로 일렁이는 흙먼지 사이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두 거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쿵!

 

 그리고 기간테스 001과 저거너트의 거리가 일순간 좁혀지는 그 순간 저거너트의 한발 빠른 오른 강철 주먹이 기간테스의 겹쳐진 양팔 위로 뻗어 나갔다.

 

콰-앙!

 

 철과 철이 부딪히는 듯한 아니면 바위와 바위가 부딪히는 듯한 강렬한 타격음이 전장에 서 있는 이들 모두의 귓속을 파고들어 뇌를 강타하자 몇몇 이들은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고 또 어떤 이들은 화들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쩌-적!

 

 첫 일격으로 양팔의 장갑 사이로 크게 금이 간 기간테스 001을 향해 저거너트는 뻗었던 오른팔을 거두며 오른발을 기간테스의 왼 옆구리로 이동시킴과 동시에 기간테스의 오른팔을 노리고 왼 주먹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굳게 닫혀있던 기간테스의 양팔이 활짝-하고 열렸다.

 

쿠-직!

 

“...음? 저건.”

 

 무언가 귓속을 간질이는 기분 나쁜 분쇄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불굴의 마리는 흙먼지가 일렁이는 그 사이에서 일어난 광경에 두 눈을 부릅떴다.

 

-기간테스 001. 일격 성공했음.

 

 기간테스 001의 무뚝뚝한 기계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눈앞의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왼팔을 쏘아 올리려던 저거너트의 텅 빈 가슴팍을 향해 어느새 기간테스 001의 육중한 양 주먹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아주 잠깐의 순간, 기간테스 001은 그녀들이 상상치도 못한 재빠른 움직임으로 저거너트의 가슴팍을 향해 양주먹을 꽂아 넣은 것이었다.

 

“저런..움직임이 AGS에게 가능하단 말인가?”

 

-기간테스 001. 후속타 개시하겠음.

 

콰-앙!

 

 가슴팍 안에 꽂혀 있던 기간테스 001의 양 주먹에 노란 불꽃이 터져나옴과 동시에 저거너트의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저거너트의 가슴팍을 둘러싸던 검회색의 장갑은 여기저기가 터져나가 볼썽사나운 모양새가 되었으나 저거너트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듯 흰 두상 위로 적색의 안광을 뿜어내었다.

 한 방 먹으면 어떨까, 철충 감염으로 인해 본래 기간테스 개체의 강함을 아득히 넘어선 자신에게 있어서 이러한 타격쯤은-

 

쿵! 쿵! 쿵!

 

-기간테스 002. 연속 타격 개시함.

 

쐐-액!

 

 어느새 한달음에 다가온 또 다른 기간테스 개체의 육중한 오른 주먹이 환한 햇빛 아래 연갈색의 페인트를 반짝이며 뒤뚱대는 저거너트의 흰 두상을 향해 거친 파공음과 함께 쇄도해왔다.

 그리고 그것이 저거너트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콰-앙! 쿠-직!

 

“...와.”

 

 두 거인의 합동 공격에 스틸라인 병사들은 그저 멍한 얼굴로 그것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저 훌륭한 방패라고 생각해왔던 기간테스들이 이리도 훌륭한 격투술을 보일 줄이야, 모두가 멍하니 흙먼지 사이에서 묵묵히 서 있는 그들의 등을 바라볼 때 불굴의 마리만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언제 그렇게 훌륭한 격투술을 배운 겐가?”

 

탁-

 

 몸을 붕 띄워 기간테스의 어깨 위에 올라탄 불굴의 마리는 흥미로운 눈길로 기간테스의 붉은 안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물음에 기간테스 한 개체가 여전히 딱딱한 기계음으로 회답했다.

 

-전투 데이터 베이스에 있었음.

 

“호오..”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불굴의 마리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언가 석연찮은 듯 팔짱을 낀 채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혹시 말이다. 그대들의 움직임을 보건데-”

 

투-두두두!

 

쿵! 쿵! 쿵!

 

 그녀가 채 입을 다 열기도 전, 다시금 얼마 남지 않은 수풀 사이로 철충들의 포화가 그녀와 기간테스들을 향해 쇄도해왔다.

 

“음!”

 

파-직!

 

쾅!

 

-적영 다수 확인했음.

 

 불굴의 마리는 제 전자 보호막을 펼쳐 자신을 향한 총탄과 포탄을 일시에 막아내었고 기간테스들 역시 자신들의 팔에 달린 장갑을 들쳐 올리며 방어하기 시작했다.

 

“스틸라인 전 병력!”

 

“아, 아! 네!”

 

 불굴의 마리의 하늘을 찢을 듯한 목소리가 멍하니 서 있던 스틸라인 병사들을 향하자 그녀들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황급히 자신들의 장비를 챙겼다.

 장교들은 병사들보다 조금 빨랐다.

 

쿵! 쿵!

 

“호오. 저거너트가 더 있었나? 이리도 꽁꽁 숨겨 뒀을 줄이야. 기간테스 001. 방금과 같은 교전, 또다시 가능하겠나?”

 

 불굴의 마리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검회색의 물체를 보고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질문에 기간테스는 여전히 딱딱한 기계음으로 회답했다.

 

-기간테스 001. 현재 오른 주먹 장갑 손해 막심함. 불굴의 마리 개체에게 지원 요청함.

 

“-하하! 그것참. 알겠다! 기꺼이 돕도록 하지!”

 

파-지직!

 

쿵! 쿵! 쿵!

 

 그녀의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기간테스 001은 온몸에 푸른색 전자기를 두른 채로 또다시 검회색의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전원 대장님을 따라 돌격하라!”

 

“와-아아아!”

 

 그녀들의 전쟁은 이제 막바지에 들어섰다.

 

43) Day 77, AM 09:43

 

 “와-아아아!”

 

키-잉! 키-잉!

 

“그녀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전선에 가까워진 것 같군.”

 

 수풀을 가로지르는 황갈색의 무리 중 가장 선두에 선 자, 신속의 칸은 숲 너머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에 가까운 기합 소리에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녀의 시야에 비치는 것은 오로지 우거진 수풀과 드문드문 보이는 회색의 바위들이었지만 초목에 둘러싸인 그녀마저 신경이 쏠리게 만드는 우렁찬 기합 소리에 그녀는 잠깐 시선을 그 방향으로 돌렸다.

 

키-이잉!

 

“..곧 스틸라인 본대와 합류한다! 속도를 높여라!”

 

“예! 대장님!”

 

“오우!”

 

 그녀의 발뒤꿈치에 달린 외골격 부스터의 구동음이 격해질수록 그녀의 어깨를 스치는 공기의 저항이 더욱 거세져 그녀를 억누르려 들었으나 신속의 칸은 몸을 한층 아래로 눕히는 동시에 제 캐논을 앞세운 채 한층 더 가속해 보였다.

 

키-이잉!

 

 격한 구동음을 내지르는 그녀의 외골격 부스터는 양 날개를 안쪽으로 접어 V자 형태를 취한 채 가속 부스터의 불길만으로 최대한의 속력을 내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앵거 오브 호드의 일원들 역시 부드러운 모래사장이 아닌 거친 숲길을 거닐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외골격 파츠들을 최대한 안쪽으로 모은 채 그녀의 등을 따라 내달렸다.

 시시각각 변하는 숲길 사이로 제멋대로 펼쳐진 나뭇가지들이 연신 노출된 그녀의 양팔과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신속의 칸은 여전히 매서운 눈으로 그것들을 스리슬쩍 피하며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귓가로 다급함이 섞인 부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님! 500M 전방에 철충 반응을 감지! 25기로 추정됩니다!

 

“알겠다. 탈론 페더.”

 

 그녀는 머리 위에 달린 통신기를 통해 받은 보고에 묵직한 캐논을 쥔 양팔에 힘을 쥐어 보이며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큰 목소리로 외쳤다.

 

“-500M 앞에 적영 25기를 확인했다. 내가 앞장서겠다.”

 

“예! 대장님!”

 

키-이이잉!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숙였던 허리를 세워 땅을 향하던 캐논의 끄트머리를 앞으로 세우며 회색빛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한층 더 가속하기 시작하는 외골격의 바퀴를 따라 그녀의 시야 역시 더욱더 흐릿해지며 주변 사물들을 속속히 인식하기 어려워져 그녀는 힘든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숲은 여전히 꺼림칙하군. 적을 찾기가 이리도 힘드니.’

 

“이런 곳에서 싸우라니, 사령관도 참으로 짓궂은 남자야.”

 

철-컹!

 

 그녀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녀 손에 들린 리볼버식 기관포의 약실이 덜컹대는 소리와 함께 한 바퀴,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았으면 어느 약실에 총탄이 남았는지 확인하는 행동이었으나 이번에는 모든 약실에 포탄들이 넉넉히 쌓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는 행위였다.

 

“-저기로군.”

 

 빠르게 지나가는 나무들과 바위 사이로 비치는 회색빛의 물체들, 신속의 칸은 적영을 확인하고는 재빠르게 자신의 캐논의 끄트머리를 그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캐논의 약실 속에 가득 차 있던 거대한 탄환이 우렁찬 소리와 함께 총열을 타고 튀어나왔다.

 

-쾅!

 

 무식하기 짝이 없는 포탄이 진로를 방해하는 나뭇가지들을 으스러뜨리며 미처 신속의 칸을 보지 못한 칙 스나이퍼의 몸통에 닿는 순간, 칙 스나이퍼의 허리 위가 불길에 휩싸여 흑색의 파편들을 숲 여기저기로 흩뿌렸다.

 

쿠-직!

 

 기분 나쁜 파쇄음과 폭발음이 포탄이 향한 곳에서 들려오자 신속의 칸은 그녀답지 않은 미소를 지은 채 그 불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일단 한 놈.”

 

카-앙! 카-앙!

 

 그녀가 돌부리를 찰 때마다 그녀가 바위를 스키를 타듯이 호쾌하게 한 바퀴 빙글 돌아 이동할 때마다 그녀의 외골격 제트 장치의 바퀴가 딱딱한 바위 겉면과 맞닿아 기분 나쁜 마찰음을 내었다.

 하지만 신속의 칸은 그것을 일절 무시한 채 어두운 숲속의 그림자 속에서 적색의 안광을 내뿜는 철충들을 향해 바퀴의 속도를 더욱 높여만 갔다.

 

투-두두두!

 

 일제히 그녀를 향해 날라오는 수십 발의 총알들, 신속의 칸은 몸을 웅크려 착탄 범위를 좁힌 뒤 마치 모래사장을 거닐 때와 마찬가지로 S자 형태로 우거진 산림 사이사이를 헤쳐가며 총알들을 회피하며 철충과의 거리를 빠른 속도로 좁혀갔다.

 철충의 시야모듈로도 읽기 힘든 그녀의 가공할만한 기동력과 짙은 살기. 그것은 마치 사냥감을 향해 달려가는 늑대와도 같았다.

 

카-앙! 카-앙!

 

-##@!!

 

“날 잡기에는 너무 무식하지 않나.”

 

키-잉!

 

 자신들의 화망(火網)이 그녀의 호쾌한 기동력에 의해 너무 쉽게 무너지자 나이트 칙들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한 채 뒤뚱뒤뚱 자신들의 몸체를 그녀의 호선을 따라 돌렸다. 하지만 시시각각 숲속의 무성한 나무 사이사이로 몸을 숨기는 신속의 칸은 자신을 향해 주포를 세우는 나이트 칙 런처를 확인하고선 그것의 앞에 곧게 선 굵직한 참나무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 ##@!

 

키-이이잉!

 

 미처 나이트 칙 런처의 주포에서 포탄이 튀어나오기 전, 굵직한 참나무 사이로 몸을 숨긴 신속의 칸은 연신 빙글빙글 도는 제 주포의 총검을 제 앞의 참나무 중앙에 대고선 두 눈을 부릅뜨며 캐논을 앞으로 힘껏 들이밀었다.

 

“-하앗!”

 

까-직! 콰-자자작!

 

 초당 수백은 가뿐히 넘는 회전을 선보이는 그녀의 칼날이 참나무의 까칠까칠한 까칠까칠한 겉면을 갉아 들어갔다.

 그녀의 삼지창과도 같은 세 칼날이 족히 수백 년은 살아온 참나무의 몸통을 삽시간에 꿰뚫어버림과 동시에 그 뒤에 있던 나이트 칙 런처의 몸통에 도달하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카-각! 카-극-칵!

 

 철과 철이 마찰하며 생기는 소리가 한순간 포화로 물든 숲속 사이를 가득 메웠고 나이트 칙 런처의 몸통은 마치 다 맞춘 퍼즐 조각들이 한순간에 퍼져 나가듯 주홍색 불길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콰-앙!

 

“흠. 나무가 생각보다 굵군.”

 

 적을 하나 처치했다는 생각보다 참나무 사이에 깊게 박힌 캐논의 총신을 무심히 바라보던 신속의 칸을 향해 남아 있던 철충들이 일제히 총구를 돌렸으나 그곳에는 그녀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그들은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그녀의 무리가 일제히 먹잇감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야이 짜식들아! 대장만 있는 줄 아냐!”

 

타-앙! 타-앙!

 

“얼른 대장님을 엄호해!”

 

콰-앙! 쾅!

 

 재빨리 그녀를 따라온 워울프들의 권총 탄환들에 일부 철충이 꿰뚫려 꼴사납게 흙바닥 위를 굴렀으며 퀵 카멜들의 왼손에 들려있던 캐논들 역시 일제히 불길을 내뿜자 그녀들의 앞에 있던 철충들은 맥없이 터져나가고 말았다.

 

캉! 카-앙!

 

“대장! 거기서 뭘 멍하니 서 있어?”

 

“..캐논이 빠지질 않는군.”

 

“엥?”

 

 참나무 사이에 깊게 꽂힌 캐논의 끄트머리를 계속해서 당기던 신속의 칸은 곁으로 다가온 워울프에게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미 그녀들을 위협하던 철충들은 조각조각 터져나가 그녀들이 여유롭게 떠들어 대어도 방해할 것이 없었다.

 신속의 칸은 조심히 자신의 황갈색 장갑 너머로 까칠까칠한 나무의 겉면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숲속 전투에 익숙지 않았지만. 이 나무, 뭐라 하지?”

 

“그런 건 나도 모른다고. 내가 아는 식물은 선인장뿐이야. 근데 딱 보기에도 딴딴해 보이긴 하네.”

 

 입에 담배 대신 어디서 주워 온 나뭇가지를 문 워울프는 몸통의 한가운데가 뚫리고도 굳건히 서 있는 나무를 올려다보고선 혀를 끌끌 찼다. 그때 워울프의 뒤를 따라 다가온 퀵 카멜이 대장의 앞을 가로막아 선 참나무를 한 번 쓱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문에 답해주었다.

 

“참나무라고 해요. 대장.”

 

“참나무라, 내가 나무를 너무 얕본 건가?”

 

“대장이 얕봤다는 것보단 원체 튼튼한 놈이라 그런 게 아닐까요? 크기만 봐도 족히 수백년은 살아온 녀석 같고요.”

 

“..대장의 공격에도 멀쩡한 놈이면 대장이 얕본 게 맞긴 해.”

 

“..후후. 나도 참 오래 산 티를 못 내는군.”

 

“헤헤. 다음부터는 조심하면 되죠.”

 

쿵-! 쿵-!

 

 전장의 한가운데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던 그들은 이내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에 일제히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쿠-웅! 쿠-웅!

 

뿌-드득!

 

“..호오.”

 

 숲을 빽빽이 메운 거목들보다 한층 더 큰 몸집을 자랑하는 연갈색의 거인은 신속의 칸의 캐논을 붙잡고 있는 참나무와 같은 나무들을 한 그루 한 그루 짓이겨 가며 묵묵히 앞을 보고 걸어가고 있었다. 거인의 등장에 일순간 긴장감에 물들었던 그녀들이었지만 이내 서로를 보고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들 중 워울프는 다른 이들보다 한술 더 떠 그 거인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야! 여기! 야!”

 

 워울프의 고함소리가 들린 걸까, 앞만 보고 나아가던 기간테스의 적색 시야 모듈이 손을 흔드는 워울프를 향해 돌아섰다.

 그녀를 확인한 기간테스는 앞을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그녀들을 향해 묵직한 발걸음과 함께 다가왔다.

 

쿠-웅! 쿵!

 

“쟤한테 이 나무 좀 부숴 달라고 하면 되겠다. 그치?”

 

“하아, 너는 저 AGS가 지금 무슨 작전을 수행하는 중인지도 모르는데 그걸-”

 

“잠깐. 퀵 카멜.”

 

 또다시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려 하던 둘을 신속의 칸이 막아 세우자 그 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녀들을 향해 걸어오는 기간테스를 주시하는 대장을 바라보았다.

 

“대장? 무슨 일인데 그래? 쟤 철충 아냐.”

 

“그걸 대장이 모를 리가 있냐! 이 멍청아! 무슨 생각이-”

 

“이거 앵거 오브 호드 아닌가?”

 

 또다시 시작되려던 워울프와 퀵 카멜의 대화에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끼어들자 그 둘은 화들짝 놀라 자신들의 대장과 같이 소리가 들려온 하늘 위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씩 흔들리는 땅 위로 굵직한 나무들의 얼기설기 얽힌 나뭇잎들 사이에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기간테스, 그리고 그의 어깨 위에서 검은 제복 코트를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는 금발벽안의 신속의 칸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카리스마를 풍기는 여성-

 

“신속의 칸 소장, 그댄 정말 빠르군. 벌써 이곳까지 올 줄이야.”

 

“이것도 제법 늦은 거다. 불굴의 마리 소장.”

 

“하하! 하긴, 그대의 속도는 지상군 중에 가히 최고지. 그것을 염두 못했어.”

 

“과분한 평가다.”

 

 기간테스 001의 어깨 위에 올라타 가벼운 목례를 건네는 불굴의 마리의 모습에 신속의 칸은 무덤덤이 고개를 끄덕여 응답해주었다.

 몇 번의 상투적인 대화를 나누던 두 소장급 바이오로이드가 서로 입을 다물며 눈빛만을 교환할 때 그들의 곁에 있던 하급 바이오로이드 둘은 서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기 바빴다.

 

“어-버버..”

 

“..나 쟤들 쪽으로 간다. 수고해라.”

 

“..이럴 때만 빠르더라. 어딜 가. 못 가.”

 

“케-윽!”

 

 한시바삐 자리를 피하려 드는 워울프와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채는 퀵 카멜의 만담에 두 소장급 바이오로이드들은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쿡쿡-하고 웃음소리를 내었다.

 

“괜히 그녀들을 불편하게 만든 듯하네. 미안하네. 좀 더 주의했어야 했어.”

 

“아니다. 이것도 전장의 유희 중 하나지.”

 

“그런가, 암. 그렇고말고.”

 

 아직도 아웅다웅하는 두 여성의 몸부림을 바라보던 불굴의 마리는 그리운 듯한 눈빛을 보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긍정 의사를 비쳤다.

 그러다 불굴의 마리는 이윽고 참나무의 한가운데 박혀 있는 신속의 칸의 캐논으로 눈을 돌리며 의아한 기색을 띄우며 그녀에게 물었다.

 

“헌데 그것은 어찌 된 일인가?”

 

“아, 이것 말인가. 설명하긴 좀 부끄럽다만-”

 

 신속의 칸의 이어지는 설명에 불굴의 마리는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 이번에는 호쾌한 웃음소리를 뱃속에서 끌어올렸다.

 

“하하하! 과연! 이 나무가 이리도 튼튼할 줄은 몰랐다 그런 건가?”

 

“..창피하게도. 그런 셈이지.”

 

“하긴, 그대에게 이런 산림전은 익숙지 않았겠지. 그래도 그렇지. 함 내의 멸망 전 개체를 대표하는 그대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멸망 전 개체라 하여 모든 것을 예측할 순 없는 법이다. 후훗.”

 

덜-컹

 

 불굴의 마리의 핀잔에 신속의 칸은 애써 힘든 미소를 비추며 덜컹대는 캐논의 끄트머리를 붙잡아 흔들어 보였다.

 

“음. 기꺼이.”

 

 불굴의 마리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곁을 맴돌던 주시자들의 눈들을 그녀의 캐논을 붙잡고 있는 참나무의 주변으로 돌려 일시에 푸른색의 입자포를 휘갈겼다.

 

피-융!

 

쿵!

 

“고맙다. 꼭 사례하도록 하지.”

 

“무얼, 위기에 처한 동료를 돕는 것도 전장의 유희 중 하나이지.”

 

“후후. 이거 한 방 먹었군.”

 

 그녀들은 아직 자신들이 전장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대화의 꽃을 계속해서 피웠고 곁에서 난동을 부리던 퀵 카멜과 워울프는 이내 합류한 스틸라인 병사들의 응원을 받아가며 아예 서로의 머리채를 쥐어 잡은 채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게! 그래! 이 기회에 누가 최고참인지 한 번 해보자! 이씨! 딱 대!”

 

“어쭈! 나보다 제조일이 5일이나 늦는 게!”

 

“와아! 싸워라! 싸워라!”

 

“야 2호. 따지자면 너희가 최고참 아냐? 함 내 제조시설 첫 가동 때 나온 게 너희들이라며?”

 

“이뱀. 어차피 여기서 누가 그런 걸 따지겠슴까? 멸망 전 개체 선임들이 한 둘도 아니고 말임다.”

 

“그건 그래. 하여튼 야! 시원하게 던져 버려!”

 

 소동이 한창인 그녀들을 바라보던 불굴의 마리와 신속의 칸은 그것을 잠깐 구경하는 듯 싶더니 이내 서로를 다시 마주 보고 섰다.

 

“이제 작전도 막바지로군. 어서 끝내주는 것이 병사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겠지.”

 

“아아. 섬의 대부분 지역은 소탕이 끝난 듯 보이던데, 역시 스틸라인이야.”

 

“칭찬이 과하네. 후후. 진격 속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것은-”

 

땅-땅-

 

“-각하의 지원 덕분이지. 기간테스들과 타 AGS들이 각 전선에서 활약 중일세.”

 

 불굴의 마리가 오른손을 들어 등 뒤에 묵묵히 서 있는 기간테스의 정강이 위를 두드리자 신속의 칸은 고개를 들어 여전히 앞을 주시하고 있는 기간테스를 올려다보았다.

 환한 햇빛을 되려 반사하며 장엄함을 내뿜는 거구의 전사, 그의 두꺼운 장갑 위 여기저기에 나 있는 흠집들과 길게 갈라진 금들이 그녀들이 치고 올라온 전선의 무게를 가늠케 하였다.

 

“언제봐도 신기하군. 한때 우리의 파괴대상이었던 그들이 이제는 우리를 지키는 벽이 되어주다니.”

 

“각하의 AGS에 대한 무한한 지원 덕분이지. 함 내의 전력 70%가 AGS 공방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소문을 들어 본 적 없나?”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거기에 자신을 천재라 칭하는 소녀가 귀신처럼 흐느적거린다는 괴담은 들어 본 적 있다.”

 

“하하하-! 그건 조금 무서운 이야기군.”

 

 그렇게 그 둘은 한창이던 전투를 잠깐 멈춘 채로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제는 무방비하다 싶을 정도로 몸을 노출한 그녀들을 향한 거센 포화도, 적영의 움직임도 일절 보이지 않았다.

 이미 한창 전선을 밀린 철충들은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바닷가에 내몰릴 정도로 수적으로도 화력으로도 열세인 상황, 불굴의 마리와 신속의 칸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서로의 부대를 의식해 빠르게 움직이던 도중 마주친 이 상황이 서로에게 머쓱하게 다가온 탓이 가장 컸지만 말이다.

 

“야야! 퀵 카멜! 깨무는 건 반칙! 반칙이지!”

 

“아-으앙-우웅!”

 

“오오-! 퀵 카멜 1호 반항이 제법 거센데?”

 

“어휴, 저 둘은 매번 저러는 게 지겹지도 않나?”

 

 이제는 아예 서로 깨물고 있는 둘을 바라보는 이들이 늘어 앵거 오브 호드 대원들과 스틸라인 대원들은 둥근 원을 만들어 자리를 깔고 앉아 흙먼지 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워울프와 퀵 카멜의 싸움을 주시했다.

 불굴의 마리와 신속의 칸은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앵거 오브 호드의 대원들과 스틸라인의 병사들이 서로의 계급과 소속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웃고 떠드는 광경, 썩 보기 좋은 광경이라고 둘은 그리 생각했다.

 그러다 불굴의 마리는 불현듯 그녀와 나눌만한 대화 주제를 떠올려 팔짱을 낀 채 병사들을 바라보는 신속의 칸에게 질문을 건네었다.

 

“그러고 보니 말이다만, 혹 AGS의 지휘관급 개체에 대해 그대 아는 바 있나?”

 

“..있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실물은 보질 못했어. 그쪽은?”

 

 전혀 모르는 눈치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신속의 칸의 행동에 불굴의 마리는 짐짓 힘든 미소를 지은 얼굴로 돌아서서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어갔다.

 

“있지. 당연히 있다네. 나도 몇 번 본 적은 없네만. HQ-1 알바트로스. 분명 그렇게 불렸어.”

 

“..그럼 그 AGS의 성능은 어땠지?”

 

“흐음..”

 

 불굴의 마리는 신속의 칸의 이어지는 질문에 눈에 띄게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생각하기도 싫다는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목을 푸는 불굴의 마리의 모습에 신속의 칸 역시 눈가에 그린 워페인트를 좁히며 진지한 눈빛으로 돌변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불굴의 마리는 그녀의 강렬한 시선에 힘겨운 눈치로 말을 이었다.

 

“강했다. 투박하고 거대한 크기와는 달리 빠르고 행동 하나하나가 거침이 없었지.”

 

“호오.”

 

“연합 전쟁 당시부터 있었기에 적으로도 만난 적이 있고 멸망 전쟁 당시에는 아군으로 만난 적도 있었지.”

 

 생각보다 길어지는 그녀의 말에 신속의 칸은 캐논을 세워 거기에 팔을 얹은 채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적으로 만났을 때는 정부군의 AGS들의 통제를 일임한 지휘관급으로 만났네. 살면서 AGS들이 그렇게 유동적인 전술로 치고 들어오는 것은 처음 봤었지.”

 

“...”

 

“아군으로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네. AGS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개입하는 그들만의 명령체계, 그리고 그것을 해내는 최고성능의 AI 연산망. 아마 AGS들에 한해서 최강이라 불릴만한 개체야.”

 

“..그것이 철충화 되었다면 우리에게 큰 위험이겠군.”

 

 신속의 칸은 불굴의 마리의 독백 속에서 그려지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경외심보다는 그것이 적으로 등장했을 때의 위기감을 먼저 입 밖으로 내뱉었다.

 하지만 불굴의 마리는 그녀의 말에 살짝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마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질 않을 터, 라고 나는 생각하네.”

 

“..근거는?”

 

“근거..근거라. 근거라고 할 순 없지만.”

 

 불굴의 마리는 말을 끊고는 그녀들에게 그림자를 선사하는 기간테스 001을 올려다보았다.

 

“-자폭했을 터. 철충 감염이 시작되기 전에 패배를 직감하고 자폭하는 것을 이 두 눈에 담았지.”

 

“..그건 불행 중 다행이군. 연결체들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그런 고성능 AGS가 적으로 나타난다는 건 생각하지도 싫다.”

 

 신속의 칸은 그런 건 사양이라는 듯 가볍게 제 갈색의 포니테일 머릿결을 공중에 휘날리며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들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기간테스를 올려다보았다.

 자신들 바이오로이드보다 몇 배는 더 크고 무거운 몸체, AGS들은 단순히 스펙상으로 비교한다면 자신들을 웃도는 전투 병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다만 그 거체 탓에 생기는 느린 기동력과 유동적인 사고방식의 결여, 그러한 단점들이 있어 그나마 상대해왔던 것이었기에 불굴의 마리가 언급한 HQ-1 알바트로스와 같은 통솔 개체가 있다면-

 

“이 섬에는 연결체로 보이는 통솔 개체가 없는 것 같다.”

 

“그래. 그러니 이렇게 오합지졸일 수밖에.”

 

 신속의 칸의 말에 불굴의 마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2시간 가까이 이어진 전황 속에서 그녀들을 당황케 할만한 움직임을 철충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확답에 가까운 대답을 스카이나이츠의 정찰을 통해 받은 것도 그녀들이 이리도 평탄하게 전투를 진행한 것에 한몫했다.

 불굴의 마리는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투닥대는 퀵 카멜과 워울프를 바라본 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연결체들만 없었더라면 이미 각하의 지휘 아래 인류 재건을 이루었을 수도 있었겠군.”

 

“..그건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닌가. 하여튼 HQ-1 알바트로스라고 했나? 그것은 왜 갑자기 물어본 거지?”

 

“아아, 별 건 아닐세. 근래 작전 중에 그 AGS의 통신을 받아서 말이야. 아직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만약 그 AGS의 복원에 각하께서 성공하셨다면..”

 

“..그건 호재가 아닌가?”

 

 신속의 칸은 말끝을 흐리는 불굴의 마리의 모습에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결체만 아니면 그런 최상위 AGS 개체의 등장은 현 저항군의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신속의 칸과 달리 불굴의 마리는 어딘가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불굴의 마리는 애써 침착한 얼굴로 돌아와 허공에 오른손을 휘저었다.

 

“아니다. 말이 길어졌군. 하여튼 그대의 말대로 AGS의 지휘관급 개체 복원에 성공하신다면 그건 호재이지.”

 

“..그래.”

 

 석연찮은 불굴의 마리의 행동에 신속의 칸은 매서운 눈가를 좁혀 보였으나 이내 수풀을 헤치며 그녀들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이 있어 그곳으로 눈을 돌렸다.

 

철-컹!

 

“오쓰-수고하심다! 아머드 메이든, 이제부터 합류하겠슴다.”

 

 퀵 카멜 못지않은 거대한 외골격 장갑을 걸친 보라색 단발의 여성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을 향해 경례를 해오자 불굴의 마리와 신속의 칸은 그녀와 눈을 맞대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다른 이들 역시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내었다.

 

“AA캐노니어 역시 합류하겠습니다. 포격 지원은 맡겨 주십시오.”

 

“아, 어. 저! 호라이즌 역시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포격 지원부터 정찰 지원까지 가능하니 어디든 필요하신 곳에 배치해주십시오!”

 

 무덤덤이 말을 건네는 블러디 팬서와 비스터헌터와 달리 그녀들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앳된 얼굴과 작달막한 몸집의 소녀, 하지만 기합만큼은 지지 않겠다는 듯 당찬 목소리와 함께 그녀들을 향해 경례하는 세이렌.

 많이 쳐주어도 열댓 살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귀여운 소녀의 기합 넘치는 목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일동 모두 웃음소리로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하하!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 없잖슴까? 세이렌 부함장.”

 

“그래도 상하관계라는 게 명확합니다! 부함장이라는 직분을 맡은 이상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호라이즌 부대의 위신이 제 어깨에 걸려 있으니까요!”

 

“..제발 당신의 그 행동을 저희 부대원들도 본받았으면 하는 바램이군요.”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주포가 달린 외골격을 걸친 소녀의 등을 호기롭게 두드리는 블러디 팬서와 그런 그녀를 보면서 매번 골치를 썩이는 자신의 부대원들을 떠올리는 비스트헌터의 모습에 불굴의 마리와 신속의 칸은 입가에 미소를 건 채 그녀들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 동시에 그녀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전장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대들의 지원을 기대하지.”

 

 두 소장들이 선뜻 손을 내밀어오자 블러디 팬서는 신속의 칸의 손을, 비스트 헌터는 불굴의 마리의 손을 맞잡으며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그녀 넷 모두 방금까지의 여유로움과 장난기는 온데 간데없이 살벌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서로를 주시한 채 맞잡은 서로의 손을 온 힘을 다해 꽉 쥐어 보였다.

 

“염려 붙들어 매십셔.”

 

“최강의 화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카리스마가 넘치는 그녀들의 악수에 이제 막 클라이맥스로 달하던 퀵 카멜과 워울프의 레슬링을 관전하던 모든 이들의 눈길이 그곳으로 향했다.

 눈치가 빠른 이들은 재빨리 자리를 떠 제 화기를 들쳐메기 시작했다.

 

“어..저기..”

 

 하지만 맞잡을 손이 없던 세이렌만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녀들의 악수에 이리저리 눈길을 돌리자 불굴의 마리와 신속의 칸은 맞잡고 있던 손을 풀어 동시에 그녀에게 내밀어주었다.

 

“자, 여기 있네.”

 

“내 손도 잡아주겠나?”

 

“예?! 예!”

 

 불굴의 마리의 적갈색 장갑과 신속의 칸의 황갈색 장갑을 동시에 맞잡은 세이렌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 중 브라우니 1호라 불리는 개체는 어느새 합류한 호라이즌 대원들과 당황한 세이렌의 등을 바라보며 이야기꽃을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이야-세이렌 부함장님처럼 똑 부러진 분도 당황할 때가 있지 말임다.”

 

“우리 부함장이 얼마나 세심한데. 흥, 뭐 그래도 나만큼 세련된 여자가 되려면 아직 멀었지.”

 

“응? 운디네는 세련된 여자였어? 맨날 입가에 크림 묻히고 다니길-”

 

“네리! 그런 건 사석에서 떠드는 게 아니야!”

 

“히히-맞아. 얼마나 세련된 여잔지 눈곱 떼는 것도 잊고 다니질 않나. 내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라니까?”

 

“야! 테티스!”

 

 한순간에 주변이 또다시 떠들썩해지자 신속의 칸은 회색빛 눈동자를 굴려 불굴의 마리의 청록색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뜻을 알아챈 것일까, 불굴의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당한 걸음으로 부대끼리 뒤엉킨 상태가 되어버린 그녀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전원-차렷!”

 

“헛!”

 

타-닥!

 

 우렁찬 그녀의 외침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가 제 뒷발꿈치를 맞추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딱히 그녀 휘하의 스틸라인 대원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의 노호와 같은 외침에 모두가 일순간 그녀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며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인 것을 확인한 불굴의 마리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과 현재 전장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알린다. 현재 우리가 맡은 이 섬의 상륙작전은 곧 끝맺게 될 것이다.”

 

“...”

 

“작전 개시 이후, 겨우 2시간 남짓. 우리는 이 섬에 있는 벌레들을 대부분 섬멸하는 것에 성공했다. 오랜 세월 수백의 전장을 헤쳐온 내게 있어 이리도 가볍고 쉬운 작전은 처음이다. 그것은 그대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

 

“....”

 

 그녀의 계속해서 이어지는 격문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병사가 소리 없이 목울대를 넘기며 그녀의 말 한 톨 씨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를 쫑긋 세웠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리도 쉬운 전장을 내어주는 분은 누구인가!”

 

 불굴의 마리는 팔짱을 풀고 오른손 검지를 들어 그녀 뒤에 서 있는 기간테스 001을 가리켰다.

 

“-이 AGS는 각하께서 친히 우리의 전장을 돕고자 보낸 병사다! 이 병사에게 목숨을 건진 이들이 몇인가! 각하는 우리를 아끼신다! 쉬이 전장에 우리가 눕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그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굵직한 나무들 사이로 연갈색의 반사광을 내뿜는 기간테스 001을 향했다. 여기저기 나 있는 자잘한 흠집들과 금이 간 장갑 사이로 적색의 안광을 내뿜는 AGS의 모습에 무엇인가 장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그것에 그녀들의 심장이 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열망이 담긴 병사들의 눈동자에 불굴의 마리는 팔짱을 온전히 푸는 동시에 어깨에 매달린 그녀의 검은색 제복이 펄럭일 정도로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짤-그락

 

 그녀의 오른 손목에 칭칭 감긴 그녀의 인식표가 환한 햇빛에 반사되어 병사들의 눈에 확연히 들어오자 병사들은 저마다의 목에 걸린 인식표를 꾹 쥐며 쉬이 몸에서 떨구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인류 멸망 이후 우리는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전장에 그저 몸을 내던졌다! 죽기 위해! 싸우기 위해!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싸운다! 각하를 위해!”

 

“...”

 

“그리고 돌아가기 위해 싸운다! 각하가 계신 오르카 1호로! 병사들이여! 무기를 들고 나를 따르라! 각하의 기대를 등에 업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라! 종전의 시작이다!”

 

“와-아아아!”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사들은 땅 위에 던져둔 저마다의 화기를 다시 들어 올리며 제 부대로 빠른 발걸음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딱히 장교들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제 화기의 점검을 재빠르게 마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타 부대와의 협력을 위해 인사를 나누는 이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이들을 묵묵히 내려다보는 불굴의 마리 곁으로 신속의 칸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이제야 좀 정상으로 돌아왔나.”

 

“후우, 이렇게 병사들의 사기를 돋구는 게 내 일이라지만. 이걸 오늘 하루 몇 번을 하는지 모르겠네.”

 

“후후, 그래도 이렇게 많은 병사를 다루는 데에는 그대가 제격이다. 나로선 힘들어.”

 

 흙먼지를 뒤집어 쓴 워울프와 퀵 카멜이 동료들에게 핀잔을 받는 광경을 보는 신속의 칸은 살짝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불굴의 마리 역시 그녀의 부대를 바라보곤 그녀와 같은 쓴웃음을 보이며 다시금 팔짱을 낀 채 병사들에게서 눈을 떼고 등을 돌렸다.

 

“전장의 막바지이네만, 그래도 그대들의 활약을 기대하겠네.”

 

“염려 붙들어 매십쇼. 우리 아들이 있으면 작전 종료까지 30분 안에 끝내드림다.”

 

“저희는 포격 지원 위주로 행동하겠습니다. 적들의 위치만 알려주십시오.”

 

“아, 저..저희도 돕겠습니다. 소장님!”

 

“음.”

 

 각 소규모 독립부대 대장들의 대답에 불굴의 마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든든한 전우들이 하루하루 늘어나는 광경에 그녀는 황홀함을 넘어 어딘가 초연한 얼굴로 푸르른 하늘을 주시하였다.

 

‘단합하는 것이 이리도 쉬운 일이었나. 정말이지. 욕심부릴 필요도 없었잖나.’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어딘가 회색의 연기가 뭉게뭉게 올라오는 탓에 썩 만족스러운 광경을 두 눈에 담긴 힘들었으나 불굴의 마리는 그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어딘가 공허한 하늘을 보고 있자니 그녀의 머릿속 한켠에서 묘한 기시감이 샘솟기 시작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머리 위를 거닐던 이들의 모습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카이나이츠와 둠 브링어는 물러난 것인가? 흐음..확실히 더는 공중지원이 필요하진 않지만.’

 

 우리에게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운 건가, 조금 불만스러운 생각에 그녀가 눈살을 좁힐 때쯤, 그녀의 오른 손목에 달린 단말기에 삐-삐-하는 발신음이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삐-삐-

 

“..이건.”

 

 살짝 붉은색의 빛을 내뿜는 단말기의 모습에 불굴의 마리는 찌푸린 눈썹에 힘을 풀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돌변했다. 그녀의 단말기에서 적색의 신호가 내비치자 자신의 캐논을 챙기던 신속의 칸 역시 그녀의 곁으로 걸어와 물었다.

 

“이건 긴급 통신이군. 어디서 보냈지?”

 

“..함에 남겨둔 우리 병사들이다. 분명 함의 수비에 주력하라고 하였는데..”

 

“..나도 들어도 되겠지?”

 

 함이라는 한 단어에 신속의 칸의 눈매가 눈에 띄게 좁혀들어갔다. 불굴의 마리는 그녀의 짤막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녀의 곁으로 다른 부대의 대장들 역시 모여들었다.

 그녀들 역시 불굴의 마리의 말을 들었는지 긴장감이 맴도는 얼굴로 불굴의 마리에게 무언의 허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불굴의 마리는 그런 그녀들의 요구에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붉은색의 빛을 연신 반짝이는 단말기 위를 두들겼다.

 

삑-

 

“통신 받았다. 무슨 일이지?”

 

-추..충성! 대장님, 전투 중에..

 

 다급함이 잔뜩 섞인 임펫의 목소리가 단말기의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자 불굴의 마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을 중간에 가로채었다.

 

“본론만 말하도록. 임펫 4호 중사.”

 

-아, 예! 알겠습니다. 대장님.

 

 평소의 장난기 섞인 여유로운 목소리는 어디 가고 다급함만이 묻어나오는 그녀의 언동에 불굴의 마리는 어쩌면 시급한 사안이 생긴 것이 아닐까, 아니면 없다고 생각했던 연결체 개체가 사실은 있어 지금 함을 공격한 것은 아닐까 등등 온갖 불길한 상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자 그녀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파-직!

 

그녀뿐만이 아녔다. 신속의 칸 역시 캐논을 어깨에 들쳐 멘 채 자신이 왔던 루트를 되새기며 함으로 돌아가기 위한 최단 루트를 계산하기 시작했으며 다른 부대장들 역시 저마다의 생각과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며 부대 회군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진정되었으면 용건을 말하도록.”

 

-예. 대장님. 그럼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여차하면 자신만이라도 함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던 불굴의 마리에게 단말기 너머의 임펫 4호는 이번에는 다급함 대신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그녀의 용건을 숲이 떠나갈 정도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사령관 각하께서..가출하셨습니다!

 

““..뭐?””

 

44) Day 77, AM 10:24

 

 짠내가 물씬 풍기는 바닷바람과 철썩대는 파도소리가 넘실대는 어느 한적한 섬의 해변 어딘가, 그곳에서 핑크빛을 띤 은발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성이 오른 귀를 꾹 누른 채 그녀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한껏 찌푸리고 있었다.

 

-언니! 오빠가 가출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닥터. 진정하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스틸라인 언니들이 지금 AGS 공방 문을 두들기면서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이어폰 너머에서 단말마를 내뱉는 어린 소녀의 물음에 블랙 리리스는 애써 힘든 미소를 지으며 찬찬히 말을 이어갔다.

 

“주인님께서 가출했다는 건 그러니까 은유적인 표현으로 그렇다는 말이고..”

 

-아니! 은유적이고 뭐고 간에! 오빠의 단말기에 달아둔 GPS에는..

 

“그..그냥 산책 나오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러.니.까! 한창 상륙작전을 실행하는 도중인데 오빠가 왜 함 밖으로 나가냐고! 언니는 안 말리고 뭐 했어?!

 

“...”

 

 그녀가 너무 똑똑한 것일까 아니면 지금 변명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일까. 블랙 리리스는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을 변명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살짝 침울해졌다.

 하지만 계속해서 분노를 표출하는 소녀를 달래야 하는 건 자신에게 맡겨진 과제라는 생각에 침울해진 자신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주인님의 곁에 내가 있잖니? 로자 아줄도 주인님께 붙여둔 상태고. 페로도 따라왔으니까..”

 

-페로 언니도 데려갔으면서 왜 난 여기다 떨구고 간 건데?! 지금 와서 눈치챘는데 에이미 언니랑 스카디 언니도 거기 있지?!

 

“그..그녀들은 주인님이 직접 호출하신 거야.”

 

-으으! 안 되겠어. 언니들만 오빠랑 놀러 가고! 지금 당장 나도..

 

“자..잠깐. 주인님이 앞으로 무슨 말을 하실지 모르니까. 너라도 함에 남아주렴. 주인님께서 아무 생각도 없이 널 두고 가실리는 없잖니.”

 

-..흥! 나중에 꼭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언니가 부탁한 거 앞으로 저얼대 안 들어줄 거니까!

 

“응. 응. 닥터. 알겠어. 응.”

 

삑-

 

“하아..”

 

 블랙 리리스는 계속해서 이어폰 너머의 소녀에게 사죄와 긍정의 의사를 보낸 후에야 그녀와의 통신을 종료할 수 있었다.

 가장 큰 고비를 건너자 블랙 리리스는 삼일 밤낮을 꼬박 세었을 때보다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주인님의 고집을 막을 방도가 있겠어.”

 

“후후. 우리 아이가 꽤 투정을 부린 모양이네요.”

 

 어느새 블랙 리리스의 왼편으로 다가온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모은 성숙미 넘치는 여성이 그녀가 처한 상황을 이해한다는 듯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자 블랙 리리스는 여전히 힘든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의 걱정을 아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죠. 에이미양.”

 

“아마 그 아인 자길 내버려 두고 나간 거에 화가 난 걸 거에요.”

 

“저희도 여기 놀러 온 게 아닌데 말이죠.”

 

“우리가 자기와 함께 놀러 나왔다고 생각하는 게 귀엽지 않나요? 후후.”

 

‘그건 공감 못 하겠네요.’

 

 블랙 리리스는 하마터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속으로 꾹 억누르며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에이미에게서 고개를 돌려 현 사태의 주범에게 시선을 옮겼다.

 

“...”

 

 해안가의 딱딱한 돌바닥과 우거진 수풀의 경계선에 간이 의자를 두곤 그 위에 앉아 있는 흰 제복의 남성. 그녀의 주인이자 이곳 모두의 주인인 사령관은 입을 꾹 다문 채 정면의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아.”

 

 블랙 리리스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령관의 모습에 이마를 짚으며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바닷바람이 찰까 싶어 급히 챙겨나온 그의 흰 장교 코트는 여전히 그의 뒤편에 서 있는 자매의 양팔 안에 고이 접혀 있었기에 에이미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네곤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주인님.”

 

 블랙 리리스는 사령관에게 말을 걺과 동시에 자매에게서 그의 코트를 건네받았다. 그녀의 부름에 사령관은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바닷바람이 아직 차가우니 어깨에 이걸 걸쳐라도 주세요.”

 

“...”

 

 블랙 리리스 자신도 느낄 만큼 힘이 없는 목소리여서일까. 사령관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며 긍정을 내비쳤다.

 그의 허락을 받은 블랙 리리스는 그의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 간이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그의 어깨 위에 살포시 코트를 펼쳐 올려주었다.

 문득 그의 목주변을 둘러싼 검은 빛깔의 무언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으나 블랙 리리스는 그저 작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이건 닥터도 별 방도가 없다고 했으니. 대체 제 주인님의 목에는 뭐 이리 이상한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건가요. 정말!’

 

 정작 본인이 별문제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탓에 블랙 리리스는 애써 그의 목에서 시선을 떼어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그녀 자신의 호박색 눈동자에도 담았다.

 

“...후응..”

 

 그녀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어떠한 백금발의 여성이 우거진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만들어낸 그늘막 아래서 은백색의 철골 구조물에 몸을 뉜 채 고개를 하늘을 향해 들곤 곤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그녀의 백금발의 머릿결은 나뭇가지와 잎사귀 사이로 들어오는 작은 햇볕에도 환한 금빛을 머금은 채 언뜻 앳되어 보이는 외모를 가진 그녀의 뺨과 눈썹 위를 간질였다.

 가히 그 모습은 한 폭의 명화라 해도 좋을 정도로 눈이 즐거워지는 모습이었으나 한껏 풀어진 그녀의 모습에 블랙 리리스는 도리어 인상을 찌푸리며 속으로 그녀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 여자는 전장에서 뭘 하는 건가요!? 분명 조금 전에는 제 입으로 전장이니 뭐니 지껄이더니 제 임무도 안 끝난 주제에 한가로이 잠이나 자고 있고!’

 

“...흐응..”

 

 잠깐잠깐 들려오는 그녀의 작은 잠꼬대와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넘실대는 나뭇잎들의 수다만이 그녀와 그들의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부터 사령관은 잠든 그녀를 발견하고선 한껏 떠들려고 하던 몽구스 팀 대원들을 저 멀리 떨어뜨려 놓고는 조용히 그녀의 앞에 간이 의자를 펼쳐 앉고는 그녀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깰세라 그와 동행한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에게 큰 소음을 내지 말 것을 명령해둔 상태였기에 블랙 리리스 역시 이러한 상황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를 수여 분째, 사령관은 그녀의 잠든 모습에 흠뻑 취한 사람과 같이 가만히 앉아 하염없이 그녀의 풀어진 얼굴을 찬찬히 눈에 담고만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블랙 리리스는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철혈의 레오나를 향한 질투심에 제 손가락들을 꼬물꼬물 꼬기 시작했다.

 

‘..주인님도 참 너무하세요. 이렇게 헌신적인 리리스를 곁에 두고 이 여자에게 그리도 관심을 보이다니.’

 

 그녀의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그는 알기나 할까. 사령관은 블랙 리리스가 그를 노려다보든 말든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선잠에 취한 철혈의 레오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나처럼 그는 딱딱한 인상만큼이나 얼굴 위로 일절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으나 그의 곁을 항상 지켜오던 블랙 리리스는 그의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을 읽어내었다.

 

‘...저 미세한 움직임은..’

 

“...리리스.”

 

 그녀를 향해 아주 작게 속삭이는 그의 저음에 블랙 리리스는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앉아 있는 그에게 허리를 굽혀 그의 입술 가까이 자신의 귀를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사령관은 살짝 들뜬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무소음으로 이 사진을 찍어둬라. 나중에 써먹을 데가 있을 테니.”

 

“...역시 짓궂은 생각을 하고 계셨나요? 주인님.”

 

“짓궂다니.”

 

 블랙 리리스는 자신의 말에 약한 부정을 보이는 그의 얼굴 위에 조금 웃음기가 보인 것 같아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여전히 사령관의 그 능글맞은 성격은 어디 가지 않는다는 생각과 함께 굽혔던 허리를 다시 세운 그녀에게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고양이 귀의 메이드 소녀, 페로가 자신의 고양이 손 위에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얹어 건네었다.

 

“어머.”

 

“..제 귀도 언니 못지않게 좋거든요. 여기요. 이걸 쓰세요.”

 

 살짝 옆으로 향한 그녀의 귀 방향에 블랙 리리스는 환한 미소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본인은 항상 감정선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의 기분을 읽는 법은 매우 간단했다.

 돌출된 그녀의 귀와 꼬리, 고양이 유전자가 배합된 탓에 그녀의 기분은 언제나 이쪽으로 유출되곤 했기에 블랙 리리스는 제 동생의 눈치를 보며 그녀가 건넨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받아들였다.

 

“고마워. 페로.”

 

“...천만에요.”

 

 문득 카메라를 받아들이면서 언제 챙겨 둔 걸까라는 미심쩍은 생각이 블랙 리리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멸망 이후 찾아보기도 힘든 물건이었는데 이런 걸 언니인 자신도 모르게 고이 모셔두고 있었다니, 동생에게도 로망이라는 게 있었던 걸까?

 블랙 리리스가 쓴웃음 대신 싱긋이 눈웃음을 동생에게 건넬 때쯤 미약한 신음이 그들의 귓가에 들려왔다.

 

“으음..으..”

 

“...?”

 

 무언가 안 좋은 꿈이라도 꾸기 시작한 것인지 철혈의 레오나는 이전까지 비추던 평온함 대신에 한껏 눈썹을 찌푸렸다.

 앙다문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방금 그들이 들었던 미약한 신음이 계속해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아-”

 

 어딘가 매우 힘든 기색을 표하는 그녀의 얼굴 위로 굳게 닫힌 그녀의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동시에 그녀의 입술이 살짝이 벌어져 그녀의 신음이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 같은데.”

 

 사령관의 중얼거림과 같이 철혈의 레오나는 한눈에 보기에도 무언가 불안정한 모양새로 계속해서 몸을 부르르 떨어대었다. 그 모습에 블랙 리리스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을 때쯤, 철혈의 레오나의 왼팔이 무릎 위를 떠나 천천히 허공 위로 올라와 무언가를 찾는 듯 헤매기 시작했다.

 

“...”

 

 그녀의 왼손 전체를 감싼 갈색빛의 실크 장갑이 그늘막을 벗어나 그들에게로 뻗어오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향했다.

 

“아아..”

 

 마치 부모를 찾는 아이와 같이 이제는 애처롭게 들리는 그녀의 신음에 블랙 리리스가 그녀를 깨워야겠다는 생각을 실행해 옮기려 들 때쯤 그녀보다 먼저 사령관이 움직였다.

 

드득-

 

“...주인님?”

 

 간이 의자의 밑창이 까끌까끌한 돌바닥에 긁혀 기분 나쁜 마찰음을 내는 동시에 사령관은 제 어깨에 걸친 흰 코트의 그림자에서 양팔을 꺼내어 허공을 맴도는 그녀의 왼손에 양손을 가져다 대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흰 가죽 장갑이 그녀의 갈색빛 실크 장갑의 위아래를 감싸자 들썩이던 그녀의 어깨의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

 

 그렇게 한참을 그녀의 손을 맞잡던 사령관은 여전히 무뚝뚝한 인상으로 하지만 어딘가 애처로움이 담긴 눈빛으로 편안히 잠을 청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등에 달라붙은 블랙 리리스는 그의 얼굴이 우거진 수풀의 그림자에 가려져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철혈의 레오나에게 질투보다는 부러움을 느끼며 앞으로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셔터로 손가락을 옮겼다.

 

찰-칵!

 

“..어머. 그러고 보니 그 카메라에는 무소음 모드가 없었죠. 옛 물건이라.”

 

 마치 몰랐다는 듯 살짝 뻔뻔한 감으로 말하는 페로를 향해 블랙 리리스는 그녀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윙크로 대답했다.

 

지-잉

 

“으음-”

 

 폴라로이드 카메라 아래쪽 사출기에서 검은 필름이 담긴 사진이 나옴과 동시에 철혈의 레오나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작게나마 미간에 주름이 생기며 감겨있던 그녀의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자 사령관은 맞잡고 있던 그녀의 왼손을 천천히 그녀의 무릎 위에 다시 내려다 놓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속눈썹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일어났나?”

 

“..사..령관?”

 

“그래.”

 

 철혈의 레오나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무뚝뚝한 남성을 잠에서 덜 깬 멍한 눈빛으로 빤히 응시한 채 눈을 껌벅였다.

 사령관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 윗입술을 살짝 끌어올리다 이내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곤 그것을 뒤적였다.

 

“...”

 

 부스럭거리는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은 한 갑의 담뱃갑, 그는 능숙하게 오른엄지로 담뱃갑의 뚜껑을 열어 재껴 그 안에서 담배 한 대를 쏙 올려 입술에 가져다 물었다.

 

칙-

 

“후우-”

 

 사령관의 열린 입술 사이로 메케한 담배 연기가 뭉실뭉실 피어올라 자신의 콧구멍에 들어오자 철혈의 레오나는 멍한 얼굴 위로 웃음기를 입가에 머금은 채 작게 속삭이듯 그에게 말을 걸었다.

 

“...맞네. 사령관 당신이네.”

 

“그럼 누구라고 생각했나?”

 

“으음..인상 나쁜 괴한?”

 

“...”

 

 인상 나쁜이라는 소리에 사령관이 눈을 가늘게 뜨자 철혈의 레오나는 푸훗하는 웃음소리를 내며 입가를 가렸다. 저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 소리였다.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 자신인데.

 그런 그녀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령관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오른손가락 사이에 올리곤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갔다.

 

“..잘 잤으면 이제 일어나서 일할 시간이다.”

 

“..그러고보니 당신이 왜 여기 있어?”

 

“...후.”

 

 이제야 그걸 묻는 거냐라는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령관에게 철혈의 레오나는 앉아 있던 커맨드 프레임 위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자연스레 그를 향해 왼팔을 뻗어 제 왼손을 건네었고 사령관은 무심히 그 손을 향해 제 왼손을 맞잡아주었다.

 

“어머. 언제 신사적인 행동도 몸에 익혔어?”

 

“..알 것 없다.”

 

 철혈의 레오나의 능글맞은 눈짓에 사령관은 고개를 돌려 제 오른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껏 눈썹을 치켜세운 두 여성의 질투 어린 눈동자들.

 

“...”

 

 사령관의 갈 곳 잃은 눈길이 우거진 녹음으로 향하자 그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철혈의 레오나는 자신의 검은 권총을 오른손에 쥐곤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사령관?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해 줘.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야?”

 

“...후우.”

 

 사령관은 대답하기 꺼린다는 듯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파도가 철썩대는 해안가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 그런 그의 등을 쫓아 철혈의 레오나와 그녀를 향해 질투심을 이글대는 두 여성이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공간으로 걸어 나왔다.

 

또각-또각-

 

“..어머.”

 

 철혈의 레오나는 해안가 쪽으로 걸어 나온 뒤에야 그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에게 손을 흔드는 에이미와 스카디, 그리고 몇몇 배틀 메이드 인원들을 확인하였다.

 

“..설마 산책하러 여기까지 나왔다는 말은 아니겠지? 당신.”

 

 철혈의 레오나는 어느새 싸늘한 목소리로 돌아와 담담하게 담배를 피우는 그의 등을 향해 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질문에 사령관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산책보다는..그래.”

 

“뭔데?”

 

“..가출했다. 이 표현이 더 어울리겠군.”

 

“하아?”

 

 그의 장난기 없는 장난스러운 대답에 철혈의 레오나는 싸늘한 눈빛을 거두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얼굴로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철혈의 레오나는 한껏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무책임한 행동을 타박하기 시작했다.

 

“그게..지금 당신에게 용납될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사령관?”

 

“아니.”

 

“아니라고 대답해서 끝날 이야기가 아니잖아. 여긴 전장이야. 당신이 이렇게 여유롭게 돌아다닐 곳이 아니라고.”

 

“그런 곳에서 푹 자고 있던 네가 할 말은 아니다만.”

 

“아..그..그건.”

 

 반쯤 탄 담배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담뱃재를 휴대용 재떨이에 털어대는 그의 대답에 철혈의 레오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어떻게든 그의 말에 반박할 말꼬리를 찾아 헤매었다.

 당황한 그녀의 속내를 읽은 듯 사령관은 눈에 띄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대화를 이어갔다.

 

“서로 무신경한 행동에 대해서는 쌤쌤이군.”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하나뿐인 인간이잖아. 나랑은 달-” 

 

“그만.”

 

“...”

 

 단호하게 자신의 말을 끊는 사령관을 향해 철혈의 레오나는 한숨을 푹 내쉴 뿐 그를 함으로 돌려보낼 방법이 당장에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여전히 이상한 데에서 고집을 부린다니까.’

 

 밀려오는 두통을 눈을 질끈 감아가며 참던 철혈의 레오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그녀의 곁으로 새침한 얼굴의 블랙 리리스가 다가왔다.

 

“네가 그렇게 걱정 안 해도 주인님의 곁에 나와 페로가 붙어 있어. 연결체가 와도 주인님께 손끝 하나 못 댈 테니 네 행동이 오히려 주인님보다 더 문제야. 알아?”

 

“...그래. 그 부분은 인정해야겠네.”

 

 아예 대화에 말뚝을 박아넣는 블랙 리리스의 타박에 철혈의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 핀 꽁초를 재떨이에 집어넣는 사령관을 빤히 바라보았다.

 

‘...왠지 기분 나쁜 꿈도 꾸었던 것 같아서 찝찝하긴 하지만. 뭐. 상관 없을 려나?’

 

“사령관? 그럼 질문을 바꿀게. 하필 왜 가출해서 여길 온 거야?”

 

“...”

 

 살짝 토라진 말투로 물어오는 철혈의 레오나에게 사령관은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재떨이가 들린 왼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의 왼손을 따라간 철혈의 레오나의 시선에는 뻥 뚫린 지하동굴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당신 제정신이야? 저기에 뭐가 있는지-”

 

-그만하면 됐습니다. 철혈의 레오나. 인형 주제에 제 주인께 너무 간섭하는 것 같군요.

 

“...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등진 채 소리소문없이 천천히 그림자를 드리우며 등장하는 검은 물체의 기계음에 철혈의 레오나는 한껏 미간 위로 주름을 그리우며 그것을 노려보았다.

 RF87 로크의 등장에 철혈의 레오나는 그제야 이 상황의 주범이 누구인지 파악하곤 이전과 같이 적색의 안광을 내뿜는 로크를 향해 신경질적인 말투와 함께 입을 열었다.

 

“네가 벌인 일이야?”

 

-흐음.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지.

 

“그를 여기에 데려온 거. 안 그러고서야 이렇게 쥐죽은 듯 조용히 내 곁으로 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거라면 맞습니다. 이 분을 여기에 모시고 온 것은 제가 했습니다.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로봇을 향해 철혈의 레오나는 눈썹을 한껏 치켜세운 채 말을 이어갔다.

 

“..역시 그냥 널 보내는 게 아니었나 봐?”

 

-저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면 당신은 선잠이 아닌 영원히 잠에 빠졌겠지요.

 

“그만. 그만.”

 

 격해지려 하는 그녀와 로크의 대화 내용에 사령관은 귀찮다는 듯 필터까지 타오른 담뱃불을 허공에 흔들어대었다.

 사령관의 제지에 그녀와 로크는 대화를 중단하고 둘 모두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뒤통수로 받아내던 사령관은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빨아 재낌과 동시에 긴 숨을 내뱉었다.

 

“후-우”

 

“그래서 왜 가출한 거야?”

 

“몇 분 사이에 질문만 몇 갤 받는지 모르겠군.”

 

“이해할 수 없어서 그래. 여기 수색 임무는 그저 나에게 맞기면 될 일이잖아.”

 

-그 물음에는 제가 답해드리는 게 맞겠군요. 제가 당신의 각하를 이곳에 초대했습니다.

 

 로크의 대답에 철혈의 레오나는 그녀답지 않게 혀를 쯧-하고 차며 그녀 곁에 선 블랙 리리스를 노려보았다. 왜 안 막았냐는 그녀의 말 없는 질타에 블랙 리리스는 자신도 할 말이 없다는 듯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흥-하는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초대를 받았으니. 응해주는 게 맞지. 안 그런가? 철혈의 레오나.”

 

“..그 대답. 기억해두겠어. 사령관.”

 

 살짝 귀기가 서린 그녀의 말에 사령관은 다 핀 담배꽁초를 작은 케이스 모양의 재떨이에 집어넣은 후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평소에는 정돈하게 입고 다니던 장교 코트를 자신과 같이 어깨에 두른 채 묘한 카리스마를 풍기는 남자의 모습에 철혈의 레오나는 무심코 이마를 짚었다.

 

‘외관은 멀쩡해 보여도 하는 짓은..정말. 언제쯤 이 남잔 철이 들까?’

 

 평생 무리인 건 아니겠지, 철혈의 레오나는 오랜만에 제멋대로 구는 사령관의 행동거지에 한숨을 내쉬는 한편,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하고 타협안을 제시하기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우선 당신의 안전 확보가 최우선이야. 그걸 확인하지 않고는 당신을 저 무덤 안으로 들여보낼 순 없어.”

 

“당신! 제가 있는 한 주인님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있는 녀석은 없어요!”

 

 사령관의 앞이라 그런지 블랙 리리스는 둘만 있을 때보다 공손한 말투로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 철혈의 레오나는 그것을 비웃음이 담긴 콧소리로 흘려들을 뿐이었지만.

 

“이익-!”

 

“하여튼 저쪽에 대기하고 있는 당신의 직할부대 인원들만으로는 저 안의 적들을 상대하는 건 무리야. 우선 내 부대원들을-”

 

“그래. 네가 그런 말을 할 것도 예상했다.”

 

“..뭐?”

 

“철혈의 레오나. 네가 한 가지 모르는 게 있군.”

 

 뭐가 그리 당당한 것인지 사령관이 살짝 올라간 톤으로 자신의 말을 가로채 가자 철혈의 레오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령관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곤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자신의 오른 손목을 들어 단말기를 입가에 가져갔다.

 

“알바트로스. 대기 병력 전원 강하시키도록. 작전을 개시한다.”

 

-알겠다. 사령관.

 

 그의 부름에 답하듯 단말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남성적인 어투의 기계음이 흘러나온 그 순간, 철썩대는 파도 소리만이 넘실대던 그와 그녀들의 머리 위로 하늘을 두들기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이건.”

 

“아직 네게 이야기 안 했었나. 내 밑에 지휘관이 하나 생겼다.”

 

“...설마 그 프로젝트가 완성된 거야?”

 

 그녀의 물음에 사령관은 제 오른손을 들어 흑색의 무언가에 뒤덮인 제 목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동체는 미완성이긴 하지만. 중추 프로세스와 메인 AI코어는 현재 함의 제일 깊숙한 곳에서 가동 중이지.”

 

“..그건 축하할 일이네. 그래. 그래서 자신만만한 얼굴로 여기에 왔구나.”

 

“아아.”

 

두-두두두!

 

 점차 자신들을 향해 가까워지는 거대한 크기의 수송기를 올려다보던 철혈의 레오나는 패배를 인정한다는 것처럼 권총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그에게 펼쳐 보이자 사령관은 재떨이를 쥔 왼손을 훤한 이마에 가져다 대며 톡톡 두들겼다.

 

“-원래 철이 덜 든 사내놈이 가출할 땐 말이다.”

 

기-이이잉!

 

-기간테스 003. 강하 준비 완료.

 

-기간테스 004. 강하 준비 완료.

 

“자기 집에 있던 물건들을 좀 훔쳐서 나오는 법이거든. 빈손으론 어디에도 못 간다는 것 정돈 세 살배기 아이도 알아.”

 

-스파르탄즈 시리즈 강하 준비 완료.

 

 주변 나무들을 뒤흔드는 수송기의 모터바람에 철혈의 레오나는 왼팔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이윽고 천천히 하단부를 개방하는 수송기를 바라보던 철혈의 레오나는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그의 말에 재차 딴죽을 걸었다.

 

“..그걸 뭘 그렇게 잘났다는 듯 말하는지. 난 당신을 그런 뻔뻔한 남자로 키운 적 없어. 사령관.”

 

“네가 내 엄마도 아니고 말이다. 날 키우긴. 무얼.”

 

쿵! 쿵!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적막만이 흐르던 무덤의 앞에 육중한 거체를 자랑하는 로봇들이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땅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기간테스의 묵직한 발과 주먹, 사각형으로 몸체를 접은 스파르탄즈 시리즈들. 그리고 이들과 달리 작달막한 몸체로 날렵하게 뛰어내리는 라인히터. 언제 내렸는지도 모를 쉐이드.

 족히 열은 넘은 AGS들이 일시에 햇살 아래 모습을 드러내자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다고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로크만큼은 이들에게 불만족스럽다는 듯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것이 각하의 직할부대 일원들입니까? 제 예상보다 훨씬 적군요.

 

“..머릿수는 적을지 몰라도 성능만큼은 보장하지.”

 

-흠.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기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용히 다시 부상하는 로크에게 잠깐 시선을 주던 사령관은 다시금 그녀들을 향해 시선을 돌린 후 짤막하게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입을 열었다.

 

“직할부대 AGS 로보테크의 첫 단독 작전이다. 어디 우린 구경이나 하러 가자고. 레오나.”

 

“..후후. 자신작인가 봐? 그 AGS.”

 

“내 자신작이라기 보다는 닥터와 포츈의 고생의 결과다. 아, 물론 네 부대원인 그렘린도 근래 고생했다. 보조라도 좋으니 프로젝트에 참여시켜 달래서 꽤 험하게 굴렸지.”

 

 그 아이를 숙소에서 자주 볼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네, 철혈의 레오나는 왼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고 조용히 웃음소리를 내었다.

 

“주인님. 호위부대 전원 전투준비를 끝마쳤습니다.”

 

 블랙 리리스는 철혈의 레오나의 곁을 떠나 사령관의 오른편에 착 달라붙듯 몸을 밀착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페로 역시 어느새 그의 등 뒤에 슥 붙은 채 말없이 그의 그림자를 밟고 섰다.

 철혈의 레오나는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다 어깨 위에 걸치고 있던 코트에 양팔을 집어넣는 사령관에게 한 걸음 다가가 자신의 왼손을 내밀며 밝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에스코트는 철저하게 준비해왔겠지? 사령관.”

 

“아직도 그런 걸 나한테 기대한다는 게 더 놀라워.”

 

 그녀가 내민 왼손 위의 갈색빛 실크 장갑에 사령관은 제 흰색의 가죽 장갑을 낀 오른손을 건네었다.

 

“그런데 불굴의 마리나 신속의 칸이 용케 허락해줬네? 당신의 외출.”

 

“...방금도 말했지만 외출보다는 가출이다. 철혈의 레오나.”

 

“...설마 당신..”

 

“뭐. 다른 한 명한테는 이야기해뒀으니 괜찮을 거다.”

 

 사령관의 눈꼬리가 음흉하게 휘어지는 것을 본 철혈의 레오나는 또다시 밀려오는 두통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또 뭔 짓을 한 거야. 이 인간.’ 

 

막간)

 

쾅!

 

“이익!”

 

 푸른 하늘과 우거진 녹음 사이의 어딘가. 멸망의 메이는 연신 제 분을 참지 못하겠는지 자신의 옥좌 위를 연신 내리치며 제 붉은 머리카락만큼이나 얼굴 위를 시뻘겋게 달구고 있었다.

 

“..대장. 열 뻗치는 건 이해하겠는데 이제 그만 화 좀 가라앉히면 안 됩니까? 계속 그렇게 화내면 징그러운 얼굴이 더 징그러워진다고요.”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나이트 앤젤은 깊은 한숨을 내쉬다 이내 고개를 가로로 절레절레 내저었다.

 모처럼 좁혀진 사령관과 그녀의 대장의 사이가 또다시 벌어진 것에 그녀는 두손 두발을 다 들고 말았다.

 

‘물과 기름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건가..’

 

“야! 화 안 나게 생겼어?! 기껏 내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말해줬더니! 뭐?! 주변 정찰 좀 맡아 달라고?! 이..이익!”

 

쾅!

 

“날 물로 보는 거야아아! 그 썩을 인가아안!”

 

“..동굴과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저희가 할 것도 없는 건 팩트에요. 땅꼬마 대장.”

 

 불이라도 뿜을 듯한 기세로 터져 나오는 그녀의 분노가 온 하늘 위로 울려 퍼지자 나이트 앤젤은 그저 멍한 시선으로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늘 한 번 드릅게 푸르네.”

 

“두고 봐! 작전 끝나면 그 녀석 머리통 위에 폭격을 갈겨 버릴 거야! 내가 누구인지 똑똑히 새겨주겠어!”

 

“그랬다간 대장이 먼저 경호대장한테 죽어요. 대장.”

 

“이익! 씨이...씨잉!”

 

 욕지기가 치밀어도 차마 육두문자는 못 내뱉나. 멸망의 메이는 제 짧은 다리를 허공 위에 동동 구르며 고개를 하늘을 향해 치켜세운 채 또다시 포효를 내질렀다.

 

“난 멸망의 메이란 말이야아아아! 멸망! 멸망! 멸망의 메이이이!”

 

“예. 예. 잘 알죠. 다 압니다. 대장.”

 

 오늘은 밴시한테 책이나 빌려 읽어야겠다. 그래. 해수욕을 즐기면서 독서나 하자. 나이트 앤젤은 벌써 자신만의 바캉스 계획을 머릿속에 써 내려갔다.

 

 -----------------------------------------------------------------------------------------------------------------------------------------


피드백을 받았다. 내용이 너무 길고 질질 끄는 것 같다고.

 사실 글 쓰는 나도 체감할 정도인데 보는 사람은 어떨까 싶다. 그래서 그 피드백 이후 1주일 정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해봤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나한테 짧고 간단하게 상황을 전달하는 건 무리다.

 내 글을 읽어본 친구들한테도 이래저래 물어봤는데 이제와서 오히려 문체를 바꾸면 앞 내용과 뒷 내용의 전달이 뒤틀릴 거고 차피 니 글 읽는 사람은 계속 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돈 받고 쓰는 전문 작가도 아닌데 너무 신경쓰지 말라더라.

 그래서 앞으로도 이렇게 ㅈ같이 길게 쓸 거다. 피드백을 수렴해서 두 플룻을 삭제했는 데도 이런 분량이다. 아몰랑. 난 내 머릿속에 있는 망상을 글로 옮길 뿐이야. 애들 대사 하나 하나 꼬박꼬박 다 쓸 테다.


 

리오보로스 파트 2편 남았다!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