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3316232

이전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5731614

--------------------------------------------------------------------


다음 날 점심 즈음, 근육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온 몸을 추스르면서 리제는 앓는 소리를 냈음.

간만에 죽을 뻔 했네.

분명히 똑같은 코스튬 플레이였을 텐데 저번하고는 거의 정반대의 전개가 펼쳐진 건 역시 옷의 디자인 문제인가.

물론 대충 이렇게 될 걸 짐작했으면서도 강하게 정정하지 않은 시점에서 자초한 일이고, 이러니저러니해도 좋기야 좋았으니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오늘은 중파로 인한 비정기 휴일이구나. 

이불은 중파당할 때면 으레 그러했듯 뽀송뽀송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 아마 바닐라가 해 준 거겠지만 리제는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 굳이 깊이 생각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음 - 식사도 당연히 준비되어 있고.

적당히 쉰 다음 하던 대로 애들이나 보러 갈까 생각하다가 - 문득 어젯밤의 격함에 지대한 공로를 한 전신거울에 시선이 닿았음.


순간적으로 솟아오른 수치심에 이불로 얼굴을 덮었지만 그런다고 거울이 사라지는 건 아니고, 몇 번 힐끔거리다가 눈을 질끈 감고 불안-불안하게 옷을 챙겨 입은 후에야 좀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었지.

잘도 이걸 옷 갈아입고 안길 때까지 눈치를 못 챘구나.

아니, 워낙 싸들고 온 게 많았으니―


- …….


그 시점에서 리제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거울 뒤에 차곡차곡 쌓인 상자들로 향해 있었어.

그야 대부분은 참관 하에 고르긴 했지만 사실 정신이 없어서 그냥 사령관이 물어보면 고개만 끄덕인 정도였고.

조만간 사용하든 사용당(?)하든 할 입장인데, 예습해서 나쁠 것도 없잖아?

보는 눈도 없는데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마른 침까지 몇 번 삼킨 후에야 리제는 천천히 상자를 개봉했음.


*   *   *


이야, 많기도 하다.

윤활제나 기능성 콘돔 같은 당연한 것들이야 뭐 그러려니 하고.

이런저런 이상야릇한 코스튬 뿐 아니라 아로마 캔들 같은 분위기 조성용 아이템도 상당량.


물론 털 달린 수갑을 비롯한 '그런' 쪽 물건도 충실히 구비되어 있었음.

사실 쇼핑(?) 당시에는 사령관이 답지 않게 꺼림칙해했어.

C구역을 본 직후이니 어쩔 수 없는 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천년만년 그걸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뭣보다 사령관이 드물게 드러낸 취향인데 이렇게 묻히는 건 그것대로 싫었지.

결국 리제가 '자기도 좋다'고 속닥여서 해결을 하긴 했지만…….


- ……….


돌이켜보니 남사스럽기도 하지.

결국 언박싱이 재개된 건 뒤늦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식힌 다음이 되었음.

그 외에 진동하는 기구 같은 경우에는…… 흥미 본위로 몇 가지를 챙긴 정도라 그렇게 많지는 않았음.

사령관 가라사대, 리제에게 손을 대는 건 자기로 충분하다나 뭐라나.


어째 돌이킬수록 민망한 기억 밖에 안 나오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생각하면서 리제는 다시 내용물을 종류별로 정리하기 시작하다가…….


- 어…?


아무리 대충 골랐다곤 하지만 뭔가 낯선 물건이 눈에 들어왔어.


*   *   *


한편 일을 하는 사령관의 업무 효율은 그야말로 전례없이 뛰어났음.

키르케가 관리하던 테마 파크를 대원들의 휴양지 - 겸 C구역이 있던 자리는 추모를 위한 기념관 - 으로 손보겠다는, 예상 외의 업무가 더해졌음에도 평소보다 더 직접 지휘에 돌릴 시간이 늘어날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지.

물론 어젯밤에 받은 리제 버프(?)의 영향도 없는 건 아니겠지만, 이러니저러니해도 아르망이 본격적으로 참모진에 합류한 게 큰 힘이 되었음.

계획을 수립하거나 자문을 하는 분야에서라면 알렉산드라가 밀리지 않는다 해도 예지능력을 통한 모의 평가가 가능하다는 건 또 전혀 다른 메리트가 있게 마련이니까.


일이 잘 되는 만큼 더 흥이 오르는 선순환도 일어나서,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 되자 어느새 내일 예정되었던 업무까지 전부 끝마쳐버린 상태였음.

이거라면 내일도 연속으로 리제와 사랑할 수 있을지도, 아, 하지만 오늘은 어째 다른 휴일과는 달리 밖에도 안 돌아다닌 걸 보니 역시 힘들까 같은 생각을 하는 사령관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아르망이 지나가듯 한 마디를 던짐.


- 폐하, 가급적 빠르게 돌아가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 응?

- 송구하지만 오르카 호의 보안을 위해 물품의 출입 내역은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확인하고 있는데…….

 어제 들여오신 것 중에 하나, 리제 님께서 모르시던 것이 있지 않던가요?


어제 들여오신- 시점에서 사령관은 이미 함교 밖으로 부리나케 뛰쳐나가 버렸음.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아르망이 어제 아침과 마찬가지로 "고생하세요"라고 읊조렸지만,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   *   *


"리제! 그게―"


그리고 함장실에 뛰쳐들어간 사령관을 맞이한 건-


"……."


큼지막하게 박힌 설명을 읽지 않더라도 용도가 짐작 가능한 특정 상품-어째 구슬 모양이 많은-이 침대 위해 질서정연하게 놓인 모습과.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복잡미묘하기 그지 없는 표정으로 사령관을 올려다보는 리제였음.


"…관심 있어요?"


그냥 충동적으로 담았을 뿐이라고 변명하려던 계획은 묘하게 잠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쏙 들어가 버렸지.


"………응."

"……."

"……."


리제가 가타부타 말 없이 '검토해 보겠다'는 답변을 내놓을 때까지, 함장실에서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만이 감돌았어.

함께 민망해 하는 것도 아니고, 사령관 혼자 쪽을 팔게 되는 건 아마 이번이 처음(그리고 고확률로 마지막)일 테지만, 기억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이유로 유감스럽게도 그 역사적인 순간은 어디에도 남지 못하게 되었음.


--------------------------------------------------------------------



실로 민망야릇한 분위기로 할로윈 파크 패닉 마무리이빈다.

막간에서 에키드나 합류 + 외전 몇 개 정도 다른 후에 세인트 오르카로 넘어가겠스빈다.


다음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5845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