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오리진 이벤트 <만월의 야상곡> 이후의 시점을 다룬 팬픽입니다. 

'The Thames and Greenwich Hospital by Moonlight' (c. 1854-60), by Henry Pether ©National Maritime Museum




“지조 없는 달에게 맹세하지 마세요, 당신의 사랑이 바뀔 것이 아니라면.”

“그럼 어디에다 맹세를 하죠?”

“맹세하지 마세요. 하겠다면 당신 자신에게 맹세하세요. 그럼 믿을게요.”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바다 저편에서 불어오는 초저녁의 가을바람이 사령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마법소녀 모모, 백토, 그리고 뽀끄루 대마왕을 둘러싼 일련의 소동이 마무리 된 후, 오르카는 정기적인 유지보수를 위해 바다 한가운데에 멈춰있었다. 혹시 모를 철충의 공격을 예방하기 위해 평소에는 바다 아래에서 운행하기 때문에, 이 유지보수 시간은 사령관에게 있어 갑판 위로 올라와 바닷바람과 파도소리를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주인님." 


   뒤돌아보니 메이드복을 정갈하게 입은 바이오로이드가 서 있었다. 


   "안녕, 콘스탄챠." 


   사령관의 인사에 콘스탄챠 S2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네요. 바람이 기분 좋아요."


   "그러게, 얼마전까지만 해도 밤에도 후덥지근했는데." 사령관이 수평선 너머로 어둑어둑 모습을 감추는 태양을 바라보며 동의했다. 


   사령관의 옆에 선 콘스탄챠는 노을에 정신이 팔린 사령관을 살짝 바라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사령관이 알아채기 전에 손에 들고 있는 단말기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부터 백토와 뽀끄루도 당직에 들어간다는 걸 보고 드리려고 왔습니다. 오늘은 백토 양이 일일부관으로 주인님 곁을 지킬거에요."


   "벌써?"


   "네, 두 분 다 오르카 생활에도 잘 적응한 것 같고, 무엇보다 빨리 일을 도와주고 싶어하더라고요. 특히 백토 양이..."


   "아..." 사령관이 조금 난처한 듯이 웃었다. "한시라도 빨리 '매직 젠틀맨'과 함께 악을 물리치고 싶다는 거지?"


   콘스탄챠도 사령관을 따라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꼭 자기를 넣어달라고 신신당부하더라구요."


   "뭐, 조금 특이하긴 해도 나쁜 녀석은 아니니까." 사령관이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만 들어가자, 콘스탄챠. 저녁 먹어야지."


   "네, 주인님."




***


   "문 라이트 매지컬 파워! 액티베이션! 오늘 밤은 잘 부탁한다, 매직 젠틀맨. 오늘은 월광의 힘이 한층 더 강하게 느껴지는군." 


   "그, 그래?" 


   조금이나마 백토에게 적응했다고 생각했던 사령관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한치의 부끄러움 없이 마법소녀로서의 포부를 밝히는 백토의 당당함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백토, 오늘은 나를 지키는 게 임무니까, 그...'의식'은 오늘은 좀 자제해줬으면 좋겠어. 알겠지?"


   "물론이다." 백토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매직 젠틀맨을 지키는 것 또한 마법소녀의 의무. 섣부른 의식으로 의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으음...아, 아무튼 부탁할게."


   "그럼, 지금부터 매직 젠틀맨을 지키기 위한 매지컬 프로텍션을 전개한다." 


   백토가 느닷없이 사령관의 허리춤에 팔을 두르며 찰싹 안겨왔다. 


   "백토?!"


   "왜 그러는가. 젠틀맨."


   "이, 이건...?"


   "사방에서 날아오는 악의 기운을 차단하고 마족의 공격으로부터 언제든지 방어할 수 있는 궁극의 보호, '매지컬 프로텍션'이다. 뭔가 문제라도?"


   "아니, 그게..."


   갑작스러운 행동에 사령관은 콘스탄챠를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녀는 그저 힘없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하아..." 사령관은 포기한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태의 백토를 저지할 수는 없겠지. 사령관은 억지로 백토를 밀어내기보다는 우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보기로 했다. 


   "그럼, 우선 저녁부터 먹으러 갈까? 백토."


   "음." 백토가 사령관의 허리춤에 볼을 파묻은 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령관은 옆구리에 백토를 매단 상태로 엉기적엉기적 식당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후우..."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사령관은 진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내내 백토는 사령관을 껴안은 팔을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백토를 소완, 리제, 그리고 블랙 리리스가 눈에 살기를 잔뜩 머금고는 노려봤지만, 백토는 신경도 쓰지 않고 등에 매단 '매지컬 핑크 문 라이트'를 번뜩이며 주변의 위협요소를 탐색했다. 방에 들어오고 나서야 더 이상의 위협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팔을 풀어주었다. 


   샤워실 안까지 호위를 서겠다는 백토를 겨우겨우 말리고 씻고 나왔을 때 백토는 침대 맞은 편의 의자에 걸터앉은 채 사령관을 응시하고 있었다. 둥근 창밖에서 쏟아져내려오는 달빛이, 백토의 올곶은 눈에서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젠틀맨이 씻고 있는 동안 방 안의 결계를 확인해보았다. 확실히 이 방은 안전한 것 같군. 역시 매직 젠틀맨이야." 


   "호위 고마웠어, 백토." 사령관이 침대맡에 앉으며 말했다. "배 안고파? 식당에서 한 입도 안 먹었잖아."


   "문라이트 매지컬 파워가 가득한 지금 나에게는 지구의 음식은 필요하지 않다."


   "그래? 그래도 혹시 매지컬 파워가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나중에 이거 먹어." 


   사령관은 식당에서 가져온 음식이 든 바구니를 작은 탁자 위에 두었다. 사령관의 말을 들은 백토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고, 고맙다. 감사히 받도록 하지." 


   사령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니,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오직 둥근 보름달만이 높게 뜬 채 바다와 오르카를 비추고 있었다. 


   '혹시...오늘 문라이트 매지컬 파워가 강하게 느껴진다는 건, 보름달이 떴다는 걸 말하려는 걸까.'


   백토의 말과 행동은 마법소녀물에 익숙하지 않은 사령관에게 늘 난해했다. 그래도 조금씩 백토의 언행이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조금을 알 수 있게 된 듯 했다. 적어도 모모를 비롯한 친구와 매직 젠틀맨인 자신을 아끼고 지키려는 마음만큼은 그 말과 행동에서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


   이런저런 생각에 넋을 놓고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는 사령관을 백토는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사령관의 눈길을 따라 창 밖의 달을 바라보았다. 


   "..."


   영롱한 달빛만이 방을 그윽하게 채우는 가운데, 사령관과 백토는 잠시 말을 잃은 채 보름달을 바라본 체 앉아있었다. 


   "젠틀맨."


   방금까지의 강인하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아닌, 조금 부드럽고 잔잔한 목소리였다. 


   "응?" 사령관이 바라본 백토는 의자에 앉은 채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오롯이 받아들이려는 듯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오늘은 월광의 힘, 문라이트 매지컬 파워가 특히나 강한 날이다."


   "응."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사령관은 사뭇 진지하게 백토의 말에 경청하기 시작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신비로운 만월의 운명이 우리 월인들을 이끌기도 한다. 그것에는 달의 의식조차 뛰어넘는 신성함이 깃들어있지."


   "응."


   "그 운명이 나, 그리고 나와 달의 의식을 치른 당신을 어디로 이끌지는 나도 모른다."


   "응."


   "설령 내가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길을 잃더라도, 당신이 나를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만월의 저편으로..."


   "..."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인 뒤, 백토는 눈을 감은 체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 


   "...백토?"




   나지막한 부름에, 백토가 살며시 눈을 떴다.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이 몇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눈앞의 사령관을 보더니 놀란 토끼 같이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움츠렸다. 


   "누, 누구세요? 여기는 관계자외 출입금지인데..."


   "...어?"




***


   "백토?" 사령관이 주춤거리며 백토를 불렀다. 


   "네, 제가 백토인데요...인간님은 누구세요? 새로운 촬영스태프신가요?"


   사령관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게 갑자기 무슨 상황이지? 지금이라도 당장 닥터를 불러야 하나 고민했지만, 우선 갑자기 낯선 공간 낯선 사람 앞에 소환된 것마냥 불안감에 떨고 있는 백토를 진정시키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으, 응. 난 새로운 스태프야." 사령관은 우선 생각나는대로 뱉어서 백토에게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납득시키려 했다. "그...모모! 모모가 부탁해서 왔어."


   모모라는 이름에 백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모모가요? 헤헤...그랬군요."


   조금 마음을 놓은 백토는 그제서야 자신의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나저나...여기는 도대체 어디인가요? 촬영장은 아닌 것 같고...바다가 보이네요?"


   "음...그게 사실은..."


   어떤 말을 지어내야 할까, 사령관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말을 흐렸다. 그러던 중 백토와 눈이 맞았다. 백토는 은은한 달빛을 품어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당황스럽더라도 잘 들어, 백토."


   사령관은 백토에게 지금 세상은 철충에 의해 인간이 멸망한 후 100년이 지난 세계이고, 지금의 백토는 멸망 이후 재생산된 개체라는 걸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원래는 백토가 밤 동안 나를 호위하기로 한 날이었는데, 갑자기 네가 기억을 잃은 것처럼 되어버렸어. 혹시 뭐 기억나거나 짐작 가는 거 있어?"


   "...그랬군요." 백토는 의외로 간단히 사령관이 설명해준 것들을 받아들였다. "죄송해요, 사장님. 지금의 저로서는 사장님이 설명해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는 게 없어요."


   "음...그럼 일단 지금 기억나는 걸 설명해줄래?"


   백토가 손가락을 턱에 살짝 얹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으음...제 기억으로는 얼마전까지 제가 주연이었던 <8월의 만월야>를 촬영하고 있었거든요. <8월의 만월야> 촬영이 성공적으로 잘 되었다며 스태프분들도 다들 기뻐하셨고, 뽀끄루와 제가 주연인 속편 제작을 기획하기로 했었는데..."


   백토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헉, 하고 소리를 내었다. 


   "사장님!" 백토가 벌떡 일어나 사령관의 손을 잡았다. 꽈악 잡은 손을 통해, 백토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소, 속편! <8월의 만월야> 속편 촬영은 이미 진행되었나요?" 


   "지, 진정해!" 사령관이 갑자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백토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후편은 촬영된 적이 없어! 그 전에 철충의 습격으로 세상이 멸망해버렸다고. 그리고 나도 후편을 다시 되살릴 생각은 없으니까, 괜찮아. 안심해도 돼."


   "저, 정말인가요?" 백토가 어느새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사령관을 올려다보았다. "저는...그럼 저는 더 이상 뽀끄루를...제, 제 손으로..."


   사령관이 백토를 꽈악 껴안았다. 평소보다도 작게 느껴지는 백토는 겁에 잔뜩 질린 토끼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어."


   "흑, 흐윽..." 백토가 사령관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정말 감사합니다..."


   오직 달빛만이 방을 가득히 채운 고요함 속에서, 백토의 흐느낌이 이따금 조용히 울려퍼졌다. 




   "이제 진정이 돼?"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고 백토의 울음소리도 수그러들자 사령관은 백토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는 담요를 하나 건내며 물었다. 


   "네..." 백토는 자신이 방금 한 일을 떠오르자 얼굴을 붉히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죄, 죄송해요...소란을 피워서."


   "신경쓰지마. 그나저나, <8월의 만월야> 촬영 이후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어? 


  백토는 기억을 쥐어짜내려는 듯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죄송해요.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아니야, 그정도로도 충분해."


   백토의 말을 들은 사령관은 자신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었다. 백토는 원래 재생산되면서 모종의 이유로 재생산 이전의 기억을 잃고, 자신에게 주어진 마법소녀라는 설정이 진짜라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백토는 어찌된 일인지 반대로 재상산 이전의 기억이 아닌 재생산 이후의 기억을 잃고, 그 대신 재상산 이전, 자신이 '연극배우 백토'였던 시절의 기억을 되찾은 것이다. 


   "저, 사장님." 생각에 잠겨있던 사령관에게 백토가 말을 걸었다.


   "응?"


   "제가 재생산되었다는 건, 모모나 뽀끄루도 여기에 있다는 건가요?" 


   "응, 하지만..." 사령관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백토, 재생산 된 넌 네가 진짜 마법소녀라고 믿고 있어."


   "네?"


   "그러니까 네가 진짜 달에서 온 월인 마법소녀이고, 뽀끄루가 마법소녀의 숙적인 대마왕이라고 믿고 있다고."


   "그, 그럼 혹시 제가 뽀끄루를..."


   "아 그건 걱정마." 사령관이 백토의 말을 끊었다. "모모랑 여차저차해서, 뽀끄루는 마법소녀에게 패배한 후, 교화되어서 마법소녀가 되었다는 설정으로 지금의 너를 설득했거든. 어쨌든 지금은 셋이서 함께 철충과 싸우는 입장이야."


   물론 그 전까지 백토가 뽀끄루를 죽일 '뻔'한 적이 몇 번 있기는 했지만, 굳이 그 얘기까지 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그런가요...다행이다." 백토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입을 살포시 가리더니 후훗, 하고 작게 웃었다. "조금 이상하네요.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지금의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마치 이중인격자가 된 것 같아요."


   "그걸 너한테 설명해야하는 내 입장도 좀 생각해봐." 


   백토의 얼굴이 한층 더 편안해져보여, 사령관도 조금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생겼다. 


   "헤헤, 그러네요." 백토가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의 '저'는 제가 연기하던 톤으로 평소에도 이야기하는 건가요?" 


   백토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사령관에게 익숙한 포즈를 취해보였다. "매지컬 파워 레디! 언제라도 매직 젠틀맨의 명령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 


   "오, 완전 똑같은데?" 사령관이 박수를 보내는 시늉을 했다. 


   "우으으..." 백토가 빨개진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평소의 저는 어떻게 이런 연기를 평소에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거죠?"


   "내 말이."


   백토와 사령관은 서로 잠시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이 어이 없는 상황을 두고 웃었다. 조용한 밤의 분위기에 숨을 죽이면서도,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사장님."


   "응?"


   "괜찮으시다면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지금의 제가 사장님을 만난 이야기, 그리고 그 이전의 이야기도..."


   "음...그럼 내가 처음 깨어났을 때의 이야기부터 해줄까..."


   사령관은 침대 옆에 있던 커피포트로 커피를 두 잔 내려 백토에게 하나 건내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토는 좋은 관객이었다. 언제나 반짝이는 눈으로 사령관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었다. 처음 깨어난 자신에게 아무런 기억이 없었던 것, 처음 철충과 대치했던 일, 그리고 결국 자신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에 대해 이야기해줄 때는 마치 자신이 옆에 있었던 것처럼 놀라주었다. 현실성 없이 모든 전투원들의 급양 상태를 개선하려 했던 일에는 작게 웃었고, 트리아이나와 함께 여름의 한 섬에서 보물을 찾기 위해 떠났던 모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게 들어주었다. 이야기를 하는 사령관도, 이야기를 듣는 백토도 자신의 손에 들린 머그잔에 식는 것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제가 사장님을 만나기까지 오게 된 거군요." 백토와 뽀끄루를 만난 일까지 이야기하고 나자 백토가 창 밖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모모에게는 감사해야겠어요. 떠나버린 저를 포기하지 않고 찾아주다니...그리고 사장님께도 감사해야겠네요. 고맙습니다. 모모가 저를 찾는 걸 도와주셔서."


   "신경쓰지마." 사령관이 손을 내저었다. "모모 스티커가 받고 싶었거든."


   사령관의 농담에 백토는 잠시 멍하니 있다 후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네, 모모 스티커라면 어쩔 수 없죠."




   "그나저나," 모모 이야기를 하던 중 생각났다는 듯이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모모랑 뽀끄루를 만나봐야 하지 않겠어? 둘 다 원래의 너도 만나고 싶어할텐데. 뽀끄루라면 특히 더 반길거야. 그리고 갑자기 기억이 뒤바뀐 이유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음..." 무조건 찬성할 줄만 알았던 백토는 창밖의 달을 바라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아뇨, 친구들은 제 예전 기억이 돌아왔었다는 걸 모르는 게 더 좋을지도 몰라요."


   의문스럽다는 표정의 사령관에게 백토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장님, 지금의 저는 모모와 뽀끄루와 잘 지내는 편인가요?"


   "어...일단 모모와는 잘 지내고...이따금 뽀끄루가 정말 선의 편에 섰는지 의심하기는 해도, 나름 서로 잘 지내는 편이야. 모모 말로는 지금의 백토는 '폭신폭신 백토'라고 했던가?"


   "그런가요?" 백토가 작게 웃어보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폭신폭신 백토가 되었다니."


   아무래도 모모와 백토는 '폭신폭신 백토'라는 게 뭔지 서로 아는 것 같다. 


   "그리고 역시, 기억이 돌아온 저는 친구들을 만나지 않는게 좋을 거 같네요."


   "왜?"


   "친구들은 지금의 저와 이미 친구가 되었으니까요. 괜히 제가 또 나타나서 친구들이 저를 그리워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앞으로도 계속 이 상태로 있을지도 모르잖아?" 사령관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건 아마 아닐 거에요."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어?"


   백토는 창 밖의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오늘 같이 문라이트 매지컬 파워가 강한 날에는...신비로운 만월의 운명이 우리 월인들을 이끌기도 하거든요."


   "어?"


   분명 기억이 뒤바뀌기 직전에 백토가 한 말과 같은 말이었다. 혼란스러워지는 사령관의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계속 생각했어요.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난걸까...어쩌다 제가 '마법소녀 백토'에서 잠시나마 '연극배우 백토'로 돌아오게 되었던걸까...하고요." 


   백토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의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조금 알게되었어요. 오늘 만월의 운명이 저희를 어디로 이끌어 주는지를."


   백토가 품 속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사장님, 아직 백토 스티커는 받은 적이 없죠? 모모 스티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인기가 많았답니다?"


   "응? 어, 아직 받은 적은 없는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사령관은 어떨결에 대답했다. 


   "후훗, 그럼 자, 여기 하나 드릴게요." 


   백토가 건넨 백토 스티커를 받으려고 팔을 뻗은 순간, 백토는 순식간에 사령관의 품에 파고들었다. 


   "백토?!"


   백토와 사령관의 얼굴은 1cm도 되지 않은 거리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백토의 양손은 사령관의 뺨을 감싸 사령관이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후후, 매지컬 텔레포트." 달빛에 비친 백토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사장님."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백토의 숨결이, 사령관의 코 끝을 간지럽혔다. 


   "고마워요, 사장님. 제가 뽀끄루를 아프게 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셔서. 마법소녀가 된 저도 뽀끄루와 함께 친하게 지낼 수 있게 해주셔서. 분명 마법소녀 백토는 부끄러워서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거에요. 저도 그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그래도 할 수 있을 때 이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걸 위해서 오늘 이 만월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저는 믿어요."


   백토가 사령관을 향해 살짝 웃어보였다. 


   "그리고, 아마 지금 사장님을 보는 백토의 마음은 이럴거에요..."


   조금씩 거리를 좁히는 백토를 보며, 사령관은 잔뜩 긴장한 채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입술에 닿을 거라고 생각했던 감촉은 사령관의 코에서 느껴졌다. 눈을 떠보니 백토가 살며시 자신의 코와 사령관의 코를 맞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슬며시 떨어진 백토는 아까전보다 더 빨개진 얼굴로 작게 웃었다. 


   "제가 앞서나가는 건 반칙이니까, 두 번째 의식은 마법소녀 백토에게 맡기도록 할게요."


   그리고는 백토는 사령관을 살포시 안았다. 


   "앞으로도 잘부탁드립니다, 매직 젠틀맨."


   백토는 그렇게 속삭이고는 말이 없었다. 




   "...백토?"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자, 사령관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으음?" 사령관의 소리에 백토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사령관으로부터 떨어졌다. 


   "이, 이런! 언제 내가 잠에 들어버리고 만거지? 조심해라 매직 젠틀맨! 이 방의 결계를 뚫고 이블슬립 마법을 구사하는 악의 무리가 있는 거 같다!"


   방 안을 두리번거리면서 매지컬 포즈를 취하는 백토를 잠시 멍하게 보던 사령관은 하핫,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야 백토. 악의 무리 같은 게 아니야."


   "그, 그럼?"


   "으음..." 사령관이 여전히 하늘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는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저 문라이트 매지컬 파워가 강한 날일 뿐이야."




***


   "주인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다음날 아침, 업무를 보기 위해 사령관실에 들어가자 콘스탄챠가 아침 인사를 해왔다. 


   "응, 좋은 아침이야, 콘스탄챠."


   "지난 밤에 백토는 어땠나요? 맡은 일은 잘 하던가요?" 찻잔을 사령관 앞에 가져다주며 콘스탄챠가 물었다. 


   "음..." 


  사령관은 지난 밤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백토는 그 이후 다시 처음 만났을 때의 백토로 돌아갔다. 자신은 지난 밤에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령관 자신도, 어쩌면 자기가 밤 동안 꿈을 꾼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사령관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곳에서 꺼낸 것은, 눈을 번뜩이며 엄지를 치켜세운 백토가 그려진 백토 스티커였다. 


   "콘스탄챠, 혹시 마법이 있다는걸 믿어?"


   "네?" 의외의 대답에 콘스탄챠가 되물었다. 


   "아니야." 사령관이 책상 위에 백토 스티커를 올려두며 말했다. "백토는 어제 잘해줬어. 걱정 안해도 돼. 자, 오늘 업무를 시작해볼까?"


   패널을 키며 사령관은 생각했다. 백토는 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꼭 자신을 당직에 넣어달라고 했다. 정말로 만월의 힘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사령관은 다음 보름달이 뜰 때에 다시 '연극 배우 백토'를 만날 수 있겠지. 다음에는 좀 더 익숙하게 그녀를 맞이하고, 그녀가 좋아할 이야기를 더 많이 해주고, 그녀와 더 많이 웃을 수 있을까?


   사령관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한 달에 한 번, 기적이 허락한다면 사령관은 아무도 모르는 신비로운 마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달의 반대편과도 같은 그녀를 만나는 마법을.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 Fin.









현재 오르카의 백토는 재생산 과정에서 설정 속 자신이 진짜라고 믿게 되었다는 점에서 착안해서


'배우'였던 백토는 어떨까하는 이야기를 써보고자 했음


하지만 글실력이 후달려서 제대로 전달이 안된 거 같아서 아쉬움. 라오 팬픽들 중 리메이크 한다면 얘가 1순위임. 


암튼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글로 벌어먹고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