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모음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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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남가일몽(南柯一夢) 

 

휘-이잉

 

 차가운 바람이 내 뺨을 훑으며 스쳐지나가자 나는 깊게 감았던 두 눈을 천천히 떠보았다. 살짝 무거운 속눈썹 탓일까, 시야가 흐릿해 주변의 상황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머릿속도 평소와 달리 아무런 생각도, 작전도 떠오르지 않았다.

 

'..졌구나. 우린.'

 

 흐릿한 시야의 너머로 비치는 것은 환한 달빛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짙은 어둠과 그 어둠 속에서 힘겹게 빛을 내는 새하얀 눈의 향연. 세찬 설원의 바람 속에 눈발이 섞여 내 뺨을 더욱더 강하게 후려쳤다.

 방금까지 들리던 총성도, 폭격음도. 그 무엇 하나 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소녀들의 목소리도, 비명도, 나를 향해 다급히 무언가를 외치던 부관의 외마디 비명조차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우린 패배했다. 그 사실 하나에 나는 천천히 모든 것을 내려다 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죽을 거였다면 애들 데리고 휴가라는 것을 가볼 걸 그랬나 봐.'

 

 언제였나, 님프 개체 하나가 주둔지 아래의 마을에 내려가 보고 싶다고 나에게 건의해 왔었다.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단칼에 기각하긴 했었지만 비단 그것은 그녀만의 소원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랬었다. 설산에 하루 종일 갇혀 매일 반복되는 일상 그리고 그 속에서 겪는 힘든 훈련에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휴가라 불리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지휘관급 개체인 나조차도 어느 때는 지치는데 하급 바이오로이드인 그녀들은 오죽했을까.

 

 그런 그녀들에게 유일한 낙은 보급품에 가끔 딸려오는 바깥 서적들과 가끔 주둔지를 방문하는 인간 병사들과의 수다 정도. 그마저도 인간들이 바이오로이드를 멸시하거나 무시한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와 함께 오는 인간 중에는 그런 이들이 보이지 않아 그의 방문날짜만을 기다리는 녀석들이 수두룩했었다.

 

‘그래서 피터슨 중사님은 어디서 오셨어요?’

 

‘나 말인가? 나는 스코틀랜드 출신이지. 행여나 말하는 것이지만 대충 영국이라고 싸잡아 생각하지 말아 주게. 우리 스코틀랜드인들은 그걸 무척 싫어하거든.’

 

‘영국이랑 스코틀랜드랑 다른 거야? 우웅. 알비스는 잘 모르겠어!’

 

‘아무렴! 다르지. 우리 스코틀랜드는 말이야-’

 

‘흥. 이 녀석 말은 이렇게 해도 말이지, 사실 스코틀랜드보다 잉글랜드에서 더 오래 산 놈이야. 중고등학교에 대학까지 잉글랜드에서 나온 놈이 스코틀랜드인이라고 생색내기는.’

 

‘뭣이 어째?! 이 썩을 놈이!’

 

‘중사님이랑 하사님 또 싸우신다! 막아!’

 

 그들의 삶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들만의 역사가 숨 쉬고 있었다. 투명한 생체관에서 제조되어 그저 가라는 가고 오라는 곳에 배치되어 살아온 우리와 달리 그들에겐 부모가 있고, 저마다의 이름이 있고, 저마다의 삶의 방식이 있었다.

 나의 부하들은 그것을 듣고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을 보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녀들을 주둔지 밖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현실은 멀리서 봐야 아름다운 법, 가까이 다가갈수록 잔혹하기 그지없기에.

 

'..그래도 어쩌면.'

 

 문득 그것들을 떠올리고 있자니 나 또한 그녀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는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 역시 그 님프처럼 한 번쯤은 인간들이 사는 세상 속에 몸을 던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아니. 오만한 생각을 가져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기에.

 

바스락-

 

 나는 살짝이 힘겨운 한 걸음을 내딛었다. 눈이 하이힐의 굽에 묻혀 기분 좋은 소음을 내자 나는 그 소리를 따라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갈빗대가 부러진 걸까, 가슴께에서 계속해서 통증이 느껴져 거동하기에 무리라는 것을 몸소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걸음을 쉬이 멈출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 생각 하나로 거센 눈바람을 뚫어가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박-사박-

 

"...커맨드 프레임. 정찰..기능. 가동."

 

 천천히 내 등께에서 따라오는 물건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자 이윽고 키-이잉하는 기분 나쁜 소음이 내 귓가를 간질이는 바람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평소에 듣던 기동음보다 거친 소리, 이 물건도 격전의 영향으로 여기저기가 망가진 것 같다.

 

키-이잉

 

"..생존 반응. 없음."

 

 조금은 기대를 걸었건만, 대원들의 생존 반응이 그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반경 2~3km 이내까지 생존 반응을 읽어낼 수 있는 이 물건이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이것이 망가졌거나 이 주변에 생존한 이들이 없다는 소리.

 

"...제법 튼튼한 물건인 줄 알았는데. 이거 완전 고물이었잖아."

 

 나는 메마른 입을 열곤 내 등에 달린 이 고철덩어리를 향해 비웃음을 나지막하게 보내었다. 평소에는 그토록 든든한 물건이었는데, 이렇게 보니 완전히 고물이었네. 조금 망가졌다고 가장 중요한 기능이 고장 났을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직접 걸어야 하잖아. 귀찮게 정말.

 

사박-사박-

 

 두 걸음을 더 걷자 짙은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은색의 머리결을 새하얀 눈 속에 깊숙이 파묻고 있는 작달막한 체구의 소녀, 알비스 개체였다.

 

"..알비스? 일어나렴."

 

"..."

 

 매번 보는 눈인데도 그렇게나 좋은 거니? 나는 눈 속에 머리를 박고 있는 알비스의 앞에 무거운 무릎을 굽히곤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내 거친 손길에 흔들려 눈 속에 파묻힌 그녀의 얼굴이 나의 눈에 비쳤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눈 속에서 두 눈을 뜬 채로 묻혀 있었다.

 

"..."

 

 어깨를 흔들어도 이 아이는 일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잠이라도 든 걸까? 라고 생각할 때쯤, 그녀의 허리춤을 가린 눈밭의 색이 내 시야로 들어왔다. 시뻘겋다.

 새하얀 도화지에 붉은 물감을 머금은 물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그녀의 허리 주위의 눈들이 새빨간 물감에 적셔져 현실을 부정하려는 나를 타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아이는 죽었다. 개체명은 기억나질 않는다. 아마 내가 쓰러지기 직전에 날 향해 날아온 포탄을 막으려다 죽은 거겠지. 정말 평소에도 이렇게 듬직한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초코바를 압수하는 일도 적었을 텐데.

 

"..부디 발할라로 향했기를."

 

 나는 이 이름 모를 알비스의 명복을 빌어주며 굽혔던 무릎을 다시 폈다. 슬프다거나, 눈물이 흐른다거나. 그런 감정은 들지 않는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나는 철혈의 이명을 지닌 바이오로이드. 철혈의 레오나. 그 어떤 감정도 쉽사리 내비치지 않고 적재적소의 인원 배치와 목표 달성을 위한 최적의 작전을 추구하는 지휘관. 이미 수없이 많은 자매를 발할라로 이끈 '여자'다.

 

'발할라라. 좋네, 그거. 아저씨도 나중에 죽으면 거기로 갈 수 있으려나?‘

 

’아저씨도 따라올 거야? 헤헤! 올 때는 초코바 한 상자!‘

 

’어이쿠. 가도 아저씨가 먼저 가야지. 뭘 너희들이 먼저 가려고 하니?‘

 

"..."

 

 언제였더라, 쓸데없이 보급품을 직접 전달하러 온 그 남자가 이 아이들 앞에서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일부러 합동 작전 전에 진을 빼놓으려고 평소보다 더 험하게 굴려 놨었더니 그 남자의 방문 탓에 모든 게 의미가 없어졌었지. 언제나 타이밍이 나쁜 남자였다. 사사건건 방문해대는 탓에 아예 그의 방문에 대해 상부에 항의해볼까 했던 것이 엊그제처럼 다가왔다.

 

“..그 남잔 어디에..”

 

사박-사박-

 

 몇 걸음을 더 걸어 내려가자 새하얀 눈만이 가득했던 땅 위에 드문드문 아까 보았던 핏자국들과 정체 모를 검은 파편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뺨을 때리던 바람의 세기가 조금 더 강해졌다.

 

"..발키리? 베라? 그렘린!"

 

 행여나 바람 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히진 않을까, 나는 일부러 목청을 높여가며 그녀들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싸늘한 설산의 바람만큼이나 현실은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나..아무나 살아 있다면 대답해!"

 

 가슴께에서 올라오는 고통이 말을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더욱더 깊게 다가온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 속으로 파고드는 걸까. 나는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하고 눈밭 위에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눈의 감각이 발목을 타고 올라와 결국 무릎까지 닿고야 말았다.

 

"제발..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살아 있다면."

 

 결국 모두가 나를 버려두고 발할라로 떠났구나. 이런 야박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자기 대장을 데려가질 못할망정 이리 홀로 떨어뜨려 놓고 가다니.

 마음의 한 켠에 담아두고 있던 희망 아닌 아집의 불꽃이 점차 사그라들자 억지로 들추고 있던 속눈썹이 점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흐릿했던 시야에 비치는 것은 달빛조차 들지 않는 어둠과 설산의 끝없는 눈밭뿐. 나를 따르던 이들의 목소리도, 숨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는다.

 이걸로 끝일까?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나는 것일까.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채 천천히 눈 위에 몸을 뉘려던 찰나, 어디선가 미약한 숨소리가-아주 작은 숨소리가 내 귓바퀴를 타고 혼미해진 내 정신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레오나냐?"

 

"..이 목소린.."

 

 미약하게 들려오는 굵은 남성의 목소리에 나는 흐릿해지던 이성의 끈을 꽉 부여잡았다.

 

"쿨럭."

 

사박-사박-

 

 목소리가, 각혈하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묵직한 눈의 감각을 무시하고 찬 바람을 뚫고 걸음을 나아가자 처참하기 짝이 없는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잎사귀 하나 맺히지 않은 빼빼 마른 고목들의 아래 누워 있는 백색 제복의 남성들과 나의 부대원들. 모두가 하나같이 방금 보았던 알비스와 같이 그 어떤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 누워 있는 모두가 발할라로 이미 떠난 이들이었다.

 

사박-사박-

 

 이미 먼 길을 떠난 전우들을 지나쳐 미약한 숨소리가 들리는 숲의 한가운데로 점차 발걸음을 옮겼다. 부러진 고목들 사이사이로 아까까지 우리에게 달려들었던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여기저기가 파쇄된 채 드러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잔해 사이로 한 검은 제복의 남성이 잔해에 등을 기댄 채 거친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당신.”

 

“후우..후우..”

 

“...용케 살아 있었네.”

 

“..곧 죽을 사람한테 한다는 소리가 참..”

 

 거친 숨을 내몰아 쉬던 그에게 평소와 같은 독설을 던져놓고는 재빨리 그의 몸을 확인했다. 팔이나 다리에는 약간의 찰과상, 이 정도는 그의 생명에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의 검은 블랙리버 제식 장교복을 들추자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여러 개의 총상이 드러났다. 이미 한참은 피가 빠져나갔는지 검붉은 피딱지가 이곳저곳에 얼어붙어 있었다.

 이건 위험하다. 체온도 피도 한참은 뺏겼을 터, 한시바삐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응급도구를 찾아볼 테니까. 기다려.”

 

 최대한 떨리는 목소리를 참으며 담담하게 그에게 말을 건네곤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자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가 내 오른 손목을 낚아채었다.

 

“..뭐하는 거야? 빨리 응급처치를..”

 

“틀렸어. 레오나 준장.”

 

“...”

 

 뭐가 틀렸다는 거지? 이 내가 무엇이든 간에 틀릴 리가 없잖아. 매번 상관들한테 대든 탓에 미움받아서 이곳으로 좌천당한 당신과 나는 달라. 여전히 제 주제도 모르고 까불거리는 유치한 남자야. 계급도 내가 한참 위인데 매번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던지던 안하무인한 인간 주제에.

 왜 지금 와서 그런 매서운 눈으로 날 바라보는 거야?

 

“..당신이 내린 판단보다 내 판단이 우선이야. 이 손 놔. 중위.”

 

“..철혈이라는 이명답게 행동해. 레오나 준장.”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이 멍청한 남자는 핏물을 가득 묻힌 입가 위로 평소와 같은 웃음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핏기가 가신 얼굴 위로 옅어진 눈빛을 보내는 그의 얼굴을 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대로다. 내 판단은 틀렸다. 이 설산 한 복판에서 그를 구할 방도가 생각나질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뿐.

 

“..왜.”

 

 왜 이렇게 된 걸까? 아무리 답을 찾아보려고 해도 찬바람에 뇌가 얼어붙은 것처럼 사고회로가 전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답답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나는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왜 돌아온 거야? 당신들이라면 충분히 후퇴할 수 있었을 텐데.” 

 

 나 스스로 찾을 수 없는 질문의 해답은 그가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에게 힘겹게 그 해답을 물었지만 내 물음에 이 멍청한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웃어대었다. 경박하긴.

 

“..크흐, 흐흑. 뭐 도망간다고 해서 더 살 수나 있었으려나.”

 

“...여기를 지키는 건 우리의 일이었어. 당신은..”

 

“어차피 상부 놈들은 우리를 챙기지도 않았을 테고. 부하 놈들 역시 내 말은 안 듣더라고.”

 

“...”

 

“차라리 싸우다 죽는다면 어여쁜 아가씨들이랑 죽는 게 좋다고 어떤 놈이 말한 게 기폭제가 되었지 뭐. 아마 그놈은 저어쯤 어디에 누워 있겠지. 죽기 전에 소원을 이뤘구만.”

 

 정말 대책 없는 지휘관과 대원들이다. 알아서 죽을 곳을 찾아오다니. 하지만 그런 점도 그들답다면 그들다울까. 여전히 그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

 점차 내 오른 소목을 낚아챈 그의 왼손의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니 눈의 핏기가 발견했을 때보다 더 옅어졌다.

 

“..레오나. 이런 우리도 너희들이 말하는 발할라로, 갈 수 있겠지?”

 

“...”

 

“거기서는 이렇게 더 싸울 필요가 없겠지.”

 

“...그래.”

 

“..레오나, 부탁 하나만 하자.”

 

 내 오른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왼손이 천천히 힘을 잃고 떨어졌다. 그 대신 그는 오른손에 들린 무언가를 내게 건네며 힙 없이 말을 이어갔다.

 

“..좀 많이 힘들구만. 마무리를 부탁하지.”

 

“...”

 

 언제나 느긋한 태도로 일관하는 그의 입과 달리 강한 자의식을 불태우던 그의 눈빛에 탁한 기색이 엿보였다. 가슴 한 켠을 찔러오는 욱씬거림이 더욱더 강해졌다. 나도 그처럼 얼마 못 가겠지.

 그 탓일까, 그가 뻗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가져가는 것이 무척이나 힘겹게 다가왔다. 살면서 처음으로 손이 떨린다는 감각을 몸소 느끼고 있으니 그가 들었던 오른손을 다시 내려놓았다.

 

“가슴 속까지 얼어붙은 여제인 줄 알았더니. 손도 떨 줄 아는 여자였나?”

 

“..닥쳐. 그렇게 느긋하게 말할 틈이 있으면 살아남을 방도나..”

 

“네 손으로 발할라로 보내다오. 레오나.”

 

“...”

 

 발할라, 이 눈앞의 남자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낙원, 이 남자는 이제 그곳으로 가고자 한다. 나보다 빨리. 내 부하들처럼 날 내버려 두고 먼저 그곳으로 향하려 한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치사한 놈들뿐.

 머리가 아파. 분명 멀쩡했던 머리에 강렬한 두통이 느껴진다. 왼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전신이 통제되질 않는다. 이런 건 내가 아니다. 이런 건 철혈의 레오나가 아냐.

 

“힘든 부탁인 건 안다.”

 

“...”

 

 떨리는 내 왼손 위로 이 멍청한 남자의 오른손이 포개어진다. 얼음장처럼 차가울 줄 알았는데 아직도 온기가 맴돌고 있었다. 따스하다.

 

“...먼저 가 있어. 뒤따라 갈 테니 가서 우리 애들이나 좀 달래봐.”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내 왼손에 포개어진 이 남자의 오른손을 꽉 붙들었다. 이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억지로 숨을 들썩이는 이 녀석의 고통을 끝내주는 것이 나에게 남은 마지막 임무, 그렇게 생각하고 그의 무릎 위에 얹어진 권총에 오른손을 뻗었다.

 

“..저번에 알비스들이, 초코바를 한 상자 가지고 오랬는데. 보급품, 좀 털고 올 걸 그랬나.”

 

 말마디 사이에 그의 숨소리가 옅어진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얼굴. 어딘가 초연함이 묻어나는 그의 얼굴 위에는 말라붙은 핏줄기와 얼어붙은 땀방울, 그리고 평소보다 축 처진 눈썹 아래로는 빛을 잃은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내가 아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 부관이 널 챙길 거야. 그러니 길을 헤매는 일은 없겠지.”

 

“..좀 더, 너희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면. 그 앞을..”

 

“...”

 

 이제는 누구를 향해 말하는 건지도 모를 그의 중얼거림에 나는 그의 권총을 집어 들었다. 나와 같은 장교용 제식 권총. 아직 탄환이 남아있는지를 생체회로로 읽어내렸다.

 단 한 발만이 남아있다. 야속하게도 말이다. 권총의 안전장치를 확인한 후 그의 얼굴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제는 그에게 정말 얼마의 시간이 남지 않은 것을 눈치채었다.

 

“..중위?”

 

“...”

 

 이제는 말할 기력도 없는지 그의 열린 입술 사이로 옅은 하얀 입김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의 왼손을 붙들고 있는 그의 오른손은 따스했다. 마치 매서운 바람이 불어 재끼는 이 공간과 별개의 세계에 있는 것처럼 그의 오른손에는 여전히 따스한 온기가 맴돌고 있었다.

 그의 온기에 기대고 있으니 점차 가슴께에서 올라오던 고통이 옅어졌다. 원치 않는다. 이런 편안함은 더 나를 힘들게 할 뿐. 결단을 내릴 때이다.

 

“...먼저 가. 그래. 뒤따라 갈 테니.”

 

“...어.”

 

 그의 나지막한 마지막 한마디를 들은 뒤에야 멈춰있던 나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들어올린 권총이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레오나 준장, 천천히..와라.”

 

“...”

 

 멍청이. 당신만 아니었으면 더 늦게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당신이 그런 소리 하기야? 방아쇠 위로 검지를 걸어 올렸다. 제 가슴께 위로 총구가 올라오는데도 이 남자는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쫓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보기 싫다.

 

“...안녕. 멍청한 인간.”

 

“..또 보자. 레오나.”

 

 방아쇠에 걸린 검지에 힘을 줌과 동시에 나는 오른팔을 안쪽으로 꺾어 총구를 내 턱 아래로 돌렸다. 후훗.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정말 마지막까지 멍청한 남자야. 내가 언제 당신의 말을 순순히 따라준 적이 있었나? 그리고 당신이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게 있어.

 당신을 발할라로 인도하는 건 발키리가 아냐. 바로 나 철혈의 레오나라고.

 

찰-칵!

 

외전) 호접지몽(胡蝶之夢) 

 

찰-칵!

 

“-보니 그 카메라에는 무소음 모드가 없었죠. 옛 물건이라.”

 

 몽롱한 정신을 깨우는 정체 모를 소음과 누군가의 말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뇌에 흘러들어온다. 약간의 선잠을 취하는 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런 것 치고는 주변이 조용하다.

 여전히 선선한 바닷바람에 소금기와 풀 내음이 섞여 내 코를 간질였다. 잠깐 휴식을 취할 모양새로 눈을 감았던 것인데, 꽤 깊은 잠에 빠졌던 것처럼 머릿속이 어질어질하다.

 

‘...머리가 아파.’

 

지-잉

 

“으음-”

 

 잠기운이 좀처럼 빠지지 않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신음을 내뱉자 누군가 내 왼손을 들고 있었던 것인지 내 무릎 위로 내 왼손이 얹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따스해.’

 

 누군가의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왼손의 감각에 몸 여기저기가 마치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간질거렸다. 마치 이 손길을 놓치기 싫다는 듯 구는 이 뜻 모를 감각에 나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내 몸이 왜 이러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다.

 

‘..누구야? 발키리..인가? 미호? 아니면 불가사리?’

 

 아직 잠이 덜 깬 듯 몽롱한 정신 사이로 이 따스한 감각의 주인공을 찾으려 머릿속에 인물들을 추려내 보려 했으나 마땅히 짚이는 인물이 없었다. 안 되겠다. 누구인지 두 눈으로 확인해야지.

 천근같이 무거운 두 눈꺼풀을 조심스레 열어 올리자 여전히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이 눈꺼풀을 뚫고 내 두 눈에 새어 들어왔다. 그리고 누군가 내 앞에서 햇빛을 등지고 서 있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채었다.

 

‘...누구야?’

 

 햇빛을 등진 탓에 내 앞에 선 이의 뚜렷한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밝은 햇빛을 등진 탓에 오히려 뚜렷하게 드러나는 외관으로나마 내 앞에 선 이의 특징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오기 시작했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과 흰색 바탕의 제복 코트. 여체라기엔 어딘가가 각진 모양새의 몸체. 그리고 그림자 사이로 반짝이는 두 눈동자. 그리고 들려오는 낮게 깔린 남성의 목소리.

 

“...일어났나?”

 

 익히 봐온 옷가지. 익히 봐온 몸집. 그리고 복원 이후부터 계속해서 마주친 눈동자. 그리고 별로 어울리지는 않는 딱딱한 어투의 말본새. 머릿속에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남자.

 

“..사..령관?”

 

“그래.”

 

 갓 잠에서 깬 탓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내 작은 부름에 눈앞의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자신의 품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이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것을 호기롭게 열어 재끼곤 거기에 입을 가져갔다.

 

칙-

 

“후우-”

 

‘...담배 냄새.’

 

 메케한 담배 연기가 그의 주둥아리 앞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라 산뜻한 풀 내음이 가득했던 이 공간을 순식간에 화생방 현장으로 바꾸었다.

 여전히 코를 콕콕 찌르는 싫은 냄새,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그 어느 때보다 그리웠던 향기가 민감하기 짝이 없는 내 후각을 간질이자 나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석연찮은 무언가가 맴도는 머릿속을 떨쳐내고자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이번에는 잠기운을 온전히 떨쳐낸, 살짝 올라간 톤으로 말이다.

 

“...맞네. 사령관 당신이네.”

 

 내 부름에 그의 눈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자기 딴에는 자신의 감정을 잘 감추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NNIE 안면 근육제어로도 숨기지 못하는 그만의 버릇은 곁에서 가만 보고 있으면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게 만든다.

 

‘..하지만 그래도 그걸 눈치채는 것 정도는..나 아니면 그 스토커 정도가 다니까.’

 

 산들바람에 몸을 맡겼던 탓일까, 눈을 떴을 때부터 유독 차갑게 내려앉았던 체온 위로 왼손에 남아있던 그의 따스한 온기가 내 온몸을 덮어씌웠다.

 어느새 잠들기 전부터 느껴지던 한기가, 옆구리에서 올라오던 차가운 그 한기가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쉬고 싶다는 어리광스러운 생각도 더는 들지 않는다. 이제야 온전히 나를 되찾은 기분으로 나는 온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잠든 사이에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어딘가 석연찮은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난 그것보다 내 눈앞의 현실이 더 중요해. 그가 있는 이 현실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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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44번 플롯이었으나 삭제되었던 플롯)

(삭제해놓고 보니 삭제하면 안 되었던 플롯)

(에라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