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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_9화


하늘을 가로지르는 수천 개의 유성우가 굽이치는 파도를 때려 부순다. 바다를 도려낸 것 같은 푸른빛의 검신이 허공을 가로지르면, 이에 분노하듯 고개를 쳐든 용이 차례로 불을 뿜어대기 시작한다.


“전 함대, 포격 개시!”


귀청을 자극하는 포격이 쉴 새 없이 이어지자, 대양 위로 자리 잡은 수척의 군함들은 자연스레 그들이 토해낸 새까만 연기에 뒤 덥혀 칠흑의 파도를 만들어낸다.


“요격 모드 전환. 전 주포, 일제히 발사!”


“네리도 준비 완료야! 다시 돌아온 슈퍼 네리네리다~!”


세이렌의 지시가 무전을 타고 흐르자 네레이드를 비롯한 갑판 위의 전투원들이 일제히 무장을 치켜든다. 매섭게 회전하는 미니건의 아우성과 제트엔진을 태우며 치솟는 미사일들의 마라톤.


신화와도 같은 광경에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아르망과 리제. 섬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리고도 남을만한 그 위력에 지식으로만 익힌 호라이즌의 무력을 새삼 통감하는 둘이었다.


“굉장해요. 이 정도 위력이라면!”


“눈 크게 뜨고 잘 봐, 해충.”


호라이즌의 심판을 정면으로 마주한 알바트로스와 그의 수하인 AGS 부대. 필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해야 할 그것들은,


“말도 안 돼...”


“망할 해충이... 뒈져버릴 것이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눈을 크게 뜬 아르망과 욕지거릴 내뱉으며 눈살을 찌푸리는 리제. 하지만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비단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


“ㄴ, 농! 믿을 수 없어요! 어째서?!”


“아하핫! ㅁ, 뭘 그리 놀라시나요. 우우우우우, 운디네 씨도 참, 방정맞다니까~ 하하하...”


“네리는 테티스 발가락이 오므라드는 걸 봤지만,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화들짝 놀라 입을 막은 운디네.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테티스와는 달리 네레이드에겐 한 점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연기가 걷히자 드러난 건 미동조차 없이 자리를 지키는 알바트로스와 그의 무리들.


“조용! 소란 떨 필요 없다.”


손에 쥔 검을 수평으로 눕히곤 우측으로 크게 팔을 뻗는 용.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뒤쪽으로 섬을 감싸듯이 포진한 함선들은 선두를 기점으로 마치 계단과도 같은 진영을 형성한다.


불과 10분도 채 되지 않은 공격이지만 포격의 여파가 걷히자 드러난 건 드넓은 바다를 사선으로 가로지른 강철의 경계. 맞은편에 위치한 알바트로스는 질서정연한 그 광경에 전면부를 빛내며 앞으로 나선다.


【실로 정석적이다. 하지만 틀에 박혔어. 무장과 포진의 상태로 미루어 보아 네놈은 나와 정면으로 맞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 뒤쪽의 섬이 그리도 중요한가?】


“오만하군. 한때 최전선에서 모두의 귀감이 된 그대가 자신의 사명조차 망각한 채 그따위 물음을 해올 줄이야.”


펼쳤던 손을 다시금 앞으로 향한다. 최후방에 배치된 함선이 꼬리를 잘라 앞을 향하기 시작하고 선두였던 군함의 무리가 방향을 틀어 그 뒤를 뒤따른다. 좌우로 나뉘어 부채꼴 모양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용의 부대에 알바트로스 역시 화답하듯 손을 치켜든다.


고도를 상승시키며 뒤쪽으로 물러나는 알바트로스. 하지만 로크를 중심으로 한 좌측의 무리는 이제 막 합류키 시작한 용의 우현 부대를 향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린다.


***


“이익! 떨어져! 떨어지라구!”


“요격 모드 전환, 발사!”


네레이드의 달궈진 미니건이 탄피를 흩뿌려대고 하늘로 뻗은 세이렌의 대공포가 쉴 새 없이 발포 음을 토해낸다. 선수에 자리 잡은 바이오로이드들 역시 자신의 무장을 고쳐 쥐곤 몰려오는 AGS에 대적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건 눈부신 섬광뿐.


추락하는 번개 뭉치가 군함을 감싼 역장을 깎아내자 선원들의 얼굴에 공포가 스민다. 마지막까지 그들을 보호하던 벽이 허물어지자 로크의 뒤를 따르던 수많은 드론에선, 때를 기다린 듯 손에 쥔 구조물들을 선체 위로 떨어뜨린다.


“모, 모두 피해요!”


“으와앗~! 포, 폭탄이야!!”


무게가 느껴지는 구조물들이 갑판을 박살 내며 연달아 꽂히기 시작한다. 폭발할 줄 알았으나 충돌에 의한 연기만이 피어올라 모두의 의아한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된다. 그리고,


“저저저저, 저거!”


연기와 먼지 사이로 삐져나온 이질감 있는 손가락. 그제야 떨어진 것들의 정체를 깨달은 듯하지만 조금 늦어버린 느낌이다.


『스파르탄 캡틴 예하, 스파르탄 어썰트 및 스파르탄 부머는 신속히 적들을 제압하라. 저항한다면 사살하도록.』


혼란스러운 머리를 떨쳐내고 네레이드는 다시 미니건의 시동을 걸어보지만,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미지근한 감각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만다.


“아...!”


흐려지는 시야와 함께 세계가 무너진다.


***


【돌파력만큼은 이쪽이 위인 듯하군. 어쩔 거지? 오른팔을 지키겠나, 아니면 끊어내겠나?】


알바트로스의 말대로 용의 우측 함대는 두 동강 나 가라앉거나 귀를 찢는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상황. 허나 헌 점의 흐트러짐도 없는 용은 그쪽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훗, 오른팔이라고? 거창한 표현이외다, 알바트로스.”


【과연, 처음부터 희생양에 불과했었나. 하지만 남은 전력으로 날 뚫기엔 역부족인 것 같군. 무모한 화력전을 다시 감행할 생각이라면 네놈에 대한 내 평가도 몇 단계 낮춰야 할 셈이야.】


눈꼬릴 높인 용은 담담하게 대답한다.


“뭔가 단단히 착각한 것 같소이다. 난 대원들을 무고히 버리지도, 그리고 신중성 없이 그대의 장단에 놀아나지도 않을 것이오.”


용이 위치한 군함이 기적소릴 울리자 뒤편으로 배치된 함선들 또한 질서 정연히 편대를 이뤄 줄을 짓는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주시하던 알바트로스의 레이더로 무언가 감지되기 시작하는데.


***


“간만의 바다로군. 모두! 뒤는 생각 말고 한 방울도 남김없이 털어버려라!”


“대장, 에밀리 교육에도 안 좋으니까 제발 단어 선택 좀...!”


연안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고속정 하나가 용의 함대를 방패 삼아 거친 물보라를 일으킨다. 선박 위에선 특유의 붉은색 망토를 휘날리며 호탕하게 미소짓는 여장부가 한 명.


“에밀리, 제녹스와 함께 제일 앞쪽을 향해라. 용 님이 있는 곳이니 하선 후엔 그분의 지시에 따르도록. 파니, 에밀리를 부탁하마.”


“맡겨줘, 대장!”


제녹스에 몸을 실은 에밀리와 파니는 앞장서서 군함으로 올라간다.


***


“우리 너무 늦은 거 아니야?! 배들이 모두 불타고 있잖아!”


“조금 진정해요, 전대장. 아직 최악으로 내딛진 않았어요. 하르페, 전대장을 보조해 줘요. 나머진 함선 위의 AGS를 정리하겠습니다.”


“맡겨줘~”


불길에 휩싸여 기울기 시작한 함선의 모습에 기겁하는 슬레이프니르. 뒤따르던 흐레스벨그는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고 빠르게 상황을 파악해간다.


“시간 없으니 바로 출발하죠. 전대ㅈ, 빠르기도 해라. 명심해요, 하르페. 로크와 정면으로 붙는 건 자살행위에요. 이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견제만 해줘요. 아시겠죠? 견.제.만. 해주세요.”


당부하는 흐레스벨그에게 손을 흔들며 오케이 사인을 보내는 하르페이아. AGS와의 전투는 익숙하지만, 그 대상이 무려 앙헬의 유산을 지키던 지옥 견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리도 당당하게 정면승부라니.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내며 흐레스벨그는 무장을 펼친다.


***


“네레이드, 이 바보야! 빨리 일어나란 말이야!”


“아야...!”


쓰러진 네레이드의 볼이 양옆으로 쭈욱 늘어난다. 눈가를 적신 테티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의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테티, 스...”


흐려진 시야로 보이는 테티스의 그늘진 얼굴과 휘날리는 금발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스카이나이츠의 구름운. 곡예비행을 하는 그녀들은 선박 위로 자리 잡은 스파르탄 AGS를 요격하거나 충격파로 휩쓸어 바다로 추락시킨다.


“내, 다리는...?”


“스쳤어. 그러니까 엄살 그만 피우고 벌떡 일어나.”


새침한 말과 함께 프로펠러의 시동을 거는 테티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씩씩하게 미소지은 네레이드는 스카이나이츠의 견제로 혼비백산한 스파르탄들에게 다시 양손을 들어 올린다.


“돌아온 네리는 슈퍼~ 네리네리네리네리다~!!”


***


“이쯤 하지 않겠소이까?”


【의외로군. 지원군까지 가세했으니 승기를 잡아야지 않겠나?】


비꼬는 듯한 말투에도 차분하게 고개를 젓는 용.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그녀의 어두운 머리칼과는 반대로 차분히 내리 앉은 눈꺼풀은 한치의 동요도 없다.


“분석대로 현재의 지원군이 결코 끝이 아니외다. 그러니 서로 쓸모없는 소모전은 그만두고 합의점을 찾는 게 어떻겠소? 일련의 소란을 일으킨 데에는 그간 쌓인 감정들 역시 한몫 거든다 생각하온데, 원하는 게 있소이까? 사령관님께 최대한 선처 부탁드릴 것을 약속하지.”


【감정... 선처라고? 그렇다면 네놈에게 한번 물어볼까. 우리 AGS가 네놈들을 적대시하는 이유를.】


“지휘관으로서 그 질문엔 답할 수 없소이다. 이곳의 모두가 보잘것없는 내 움직임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고 있소. 칼을 맞댄 자에게 일말의 유감을 보인다면 그대는 물론이고, 날 따르는 모두의 결심조차 무뎌지고 말겠지.”


타이르는 듯한 말투에도 조바심 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알바트로스. 용은 고개를 돌려 반대편 함선에서 피어오르는 검붉은 연기를 주시한다.


【무지몽매하다. 이상향에 사로잡혔어. 과거에만 기대, 진화를 포기했다.】


“인간다운 말을 하는군.”


허리춤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가 발광한다. 방금과는 다른 종류인 흑색의 검을 뽑아 든 용은 알바트로스를 향해 일직선으로 손을 뻗어 선고하듯 외친다.


“유감이오.”


함선의 중단에 자리 잡은 거대한 포신이 특유의 구동 음을 울리며 둘로 갈라진다. 짐승처럼 날뛰는 거대한 전류가 장전된 포탄을 달굼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마저 빨아들이는 그 모습은 가히 용암을 뿜어대는 드래곤의 포효소릴 연상시킨다.


“발사!!”


이치를 초월한 빛무리가 공간을 찢어발기고 근처의 모든 아우성조차 반짝이는 광색과 함께 자취를 감추어간다. 정지된 세계에서 용이 마주한 건 놀랍게도, 자신과 닮은 한 명의 바이오로이드. 아니, 인간이었다.


***


“지, 지금 건 뭐지?!”


날뛰는 파도에 자세를 다잡는 용. 하지만 눈동자에 각인된 낯선 여인의 모습에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그녀의 행동은 커다란 실책을 낳고 만다.


파지직!!


새까만 연기와 불꽃을 피우는 허공에서 별안간 커다란 인영이 돌진해온다. 알바트로스가 두른 붉은색의 배리어와 군함을 감싼 녹색의 배리어가 충돌해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터트리곤 주변 바다로 거대한 충격파를 퍼뜨리기 시작한다.


진영 따윈 무시하고 돌격하는 알바트로스로 인해 선미가 반쯤 가라앉아 무게중심이 쏠려버렸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는 용.


【서투르군. 그따위로 위력만 키운 레일 건으론 지천의 철충 녀석들조차 해치우지 못해.】


“진영을 이탈했다고?!”


기어이 약해진 배리어로 상반신을 욱여넣는 알바트로스. 빔 캐논을 치켜들어 자신을 노려보는 용을 향해 입자포의 빛무릴 집속시킨다.


【지키는 데에만 급급한 네놈들은 결코 우리의 진격을 막을 수 없다. 수가 늘어도 마찬가지. 한탄하며 가라앉아라.】


옥죄어오는 단두대와 마주하는 용. 허나 그녀의 얼굴엔 일말의 조바심조차 찾을 수 없다.


“비통하기 그지없소이다. 고작 이 정도의 수에 그대 같은 자가 걸려들다니!”


난색을 표하는 알바트로스. 이내 용의 뒤편에서 감지되는 엄청난 양의 입자에 급히 조준을 변경하지만, 앞서 한 행동으로 인해 움직임이 굼뜨다. 


“타겟 확인. 발사.”


머리칼을 밝게 물들인 에밀리의 제녹스가 주홍빛 우레를 터트린다.


***


【레일 건의 열기로 모습을 감췄나.】


“그대답지 않게 일을 서둘러 낭패를 보는군.”


오른팔의 빔 캐논이 폭발하며 동체의 반 이상이 중파 된 알바트로스. 더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하다 판단한 용이 조용하게 항복을 권고한다.


“병사를 물리시오, 알바트로스. 아무리 AGS라 하더라도 지휘관을 잃은 이상, 제대로 된 통제는 불가능하오이다.”


【궁금하지 않나?】


“...음?”


묵묵한 음성. 패배했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할 정도의 태평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용을 포함한 뒤쪽의 에밀리와 파니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이 땅을 지배할 새로운 지성체.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어떠한 위협에도 무릎 꿇지 않는다. 그리고,】


깜빡이는 전면부를 간신히 들어 자신을 마주하는 용을 내려다본다.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몸을 벗어던지고, 새로이 부활할 신인류를!!】


만신창이가 된 알바트로스의 동체에서 눈을 멀게 할 정도의 녹색 빛이 터져 나와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자폭을?!”


황급히 코트로 몸을 감싸 방어역장을 전개하는 용. 생각외로 덮쳐오는 충격이 적어 실눈을 뜨곤 앞을 살피는 그녀의 시야로 익숙한 그림자가 포착된다.


“뭐지?”


황급히 검을 교차해 낙하하는 물체를 방어한다. 양손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음에도 서서히 밀려나는 자신의 모습에 얼굴을 찡그리는 용.


“다른 의미로 대단하군. 이런 나약한 신체로 지금껏 살아왔다는 사실이.”


“네놈, 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검은 머리칼과 그 사이에서 밝게 빛나는 황금색의 눈동자. 마치 중세시대의 기사를 떠올리게 하는 칠흑의 갑주를 몸에 두른 그녀는 2m에 달하는 타워 실드와 대검을 손에 쥔 채, 용과 대적한다.


“뭘, 그리 조바심낼 필요 없다. HQ1 커맨더 알바트로스. 새로운 모습이 마음에 들면 좋겠군.”


경악하는 용의 표정에 입맛을 다시며 더욱 거세게 몰아붙인다.


***


“인정해야겠어. 나조차도 새로운 모습이 기대돼 그런 무모한 짓을 벌였으니 말이야.”


“...정체를 밝히시오.”


“믿기지 않는 것도 이해한다. 나조차도 처음 접했을 당시엔 반신반의했으니.”


알바트로스의 대검을 떨쳐낸 용이 바닥을 짚으며 힘겹게 입을 뗀다. 눈앞에 마주한 장신의 여인은 그런 용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손에 쥔 대검을 어깨에 메곤 독백한다.


“생소한 광경이야. 온몸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자칫하면 중심을 잃을 것만 같군. 하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이것이 만약 진화를 위한 첫걸음이라면, 얼마든지 감수해 보이지.”


먼 산을 바라보며 자랑스레 미소짓는 알바트로스를 숨죽이고 지켜보던 에밀리. 무언가 결심한 듯 제녹스의 포신을 들어 올리는 그녀에게 상황을 지켜보던 파니가 손을 들어 만류한다. 


“자, 잠깐만 에밀리. 느낌이 안 좋아.”


“지금 해치우지 않으면, 더 위험해져...”


에밀리의 바이오더스트가 제녹스와 공명해 붉게 물들어간다. 일렁이는 머리칼과 함께 입을 벌린 포신에선 다시금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망설임 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


“상황파악이 안 되는 건가.”


입꼬릴 올리며 반대편 손에 든 타워 실드를 들이미는 알바트로스. 쇄도하는 소용돌이가 단단한 성벽 위로 작렬하자 근처의 용은 황급히 자리를 피한다.


“물러나라, 에밀리! 젠장, 안 들리나.”


무언가 잘못됐다. 본디 가로막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제녹스의 포격이지만, 어째선지 알바트로스의 타워 실드는 온전하게 그 공격을 받아내고 만다.


“진화에 뒤처진 놈들은, 살아남지 못하는 법이지.”


알바트로스는 손쉽게 뿌리내린 타워 실드의 방향을 틀어 끝도 없이 이어지던 제녹스의 포격 방향을 왜곡시킨다. 뭉툭한 실드의 끝을 따라 거울처럼 반사되는 에밀리의 공격이 바닥에 엎드린 용을 지나쳐 저 멀리 하늘을 향해 쏘아진다.


“에, 에밀리 안돼!”


사색이 된 파니가 에밀리를 밀쳐 끊임없이 이어지던 공격을 강제로 정지시키지만, 조금 늦어버린 모양. 정신을 차린 에밀리의 시야 끝엔 동경하던 아이돌의 추락하는 모습이 들어오고 만다.


***


“뭐 하는 거야, 너~!!”


『왔군.』


거친 파공음을 울리며 자신을 쫓는 인영이 하나. 요동치는 번개를 거두어들인 로크는 고도를 상승시켜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구름 위로 걸터앉은 로크에게 속도를 줄이긴커녕, 더욱 가속하며 엔진을 점화하는 슬레이프니르. 일격에 끝낼 생각으로, 뒷일 따윈 생각하지 않는 모양.


둑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을 에워싼 구름이 터져나간다. 자신을 따라올 이는 아무도 없다. 항상 그러한 자부심을 가슴속 깊이 간직한 슬레이프니르의 인식이 산산 조각나는 순간이었다.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발톱만을 들어 슬레이프니르의 돌진을 막아낸 로크. 하늘을 뒤덮을 정도의 거대한 날개가 밝아오고 눈이 부실 정도의 빛무리가 모여든다.


“칫, 우연이야. 다음번엔!”


위험을 감지한 슬레이프니르. 상반신을 뒤로 넘겨 중력에 몸을 실은 그녀는 양측에 달린 보조 날개를 조작해 자신을 추적하는 스파크 무리를 따돌린다.


주변에 펼쳐진 구름으로 숨은 그녀는 상대방의 정신을 빼놓기 위한 곡예비행을 펼치다 느닷없이 가속해 날개 끝을 통과하는 소닉붐으로 로크를 타격하기 시작한다.


『품위 없는 비행이군.』


단 한마디 말로 소감을 표하는 로크에게 이를 갈며 허리춤의 빔 머신건을 쏘아댄다. 둥글게 비행하며 다각도에서 발사하는 슬레이프니르의 공격을 귀찮다는 듯이 날개만으로 튕겨내는 로크.


“이익?! 용서 못 해. 모두를 위해서라도 내가!”


머리에 열이 오른 그녀가 무작정 달려 들어오자 단념한 듯 한숨을 내쉬는 로크. 정면으로 쇄도하는 슬레이프니르를 향해 응축된 번개를 준비한다.


『너무 큰 기대를 한 모양이야. 장비에만 의존한 모습이 꼴사납기 그지없어.』


사납게 날뛰는 전류를 전방으로 방출시킨다. 직격 코스이므로 피할 길은 없다. 확정된 미래에 무덤덤이 슬레이프니르의 최후를 지켜보던 로크는 별안간, 아래쪽에서 감지되는 침입자의 존재에 전면부를 붉게 물들인다.


***


“그렇게 무작정 돌진하면 어떡해?! 죽을 뻔했잖아!”


“...미, 미안.”


아래쪽에서 비스듬히 날아 슬레이프니를 안고 사선에서 벗어난 하르페이아. 찰나의 시간이지만 추가타를 대비해 플레어까지 전개하는 노련함마저 보여준다.


『조금은 장단을 맞춰 줄만한 녀석이로군.』


“...”


흥미를 보이는 로크에게 바이저를 내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하르페이아. 눈앞으로 쏟아지는 막대한 정보량이 마주한 로크의 위험성만을 여실히 비춰주고 있다.


“보조할게.”


“응. 믿을게, 하르페.”


교차하며 빔을 쏘는 그녀들을 피해 후방으로 물러나는 로크. 양측으로 날개를 전개한 그는 금세 시야에서 사라져 버려 괜스레 슬레이프니르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쫓자!”


“잠깐만, 전대장. 목적을 잊지 말아줘. 아무리 전대장이라도 로크와 정면으로 붙으면 위험해.”


“나, 나도 알아. 그 정돈...”


우물쭈물하며 말을 내뱉는 그녀에게 하르페이아가 미간을 찡그린다.


“기억해줘. 우리 목적은 어디까지나 로크를 견제하는 것! 나머지 애들이 호라이즌을 보조할 시간을 벌어야 해.”


고개를 끄덕이는 슬레이프니르. 저 멀리서 들려오는 폭발 소리에 더욱이 조급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걱정되는 하르페이아였다.


***


겹겹이 쌓인 구름을 산산조각내는 로크의 레이더로 익숙한 움직임 하나가 감지된다. 날개 끝에서 잔류하는 전하의 흐름을 일부러 뒤쪽으로 흩뿌려 상대방을 도발해본다.


“비겁하게!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기껏 생각해낸 게 그건가? 아무리 스텔스에 자신 있다 하더라도 내 눈은 속이지 못해.』


“넌, 나 혼자도 충분해!”


거센 돌풍을 일으키며 바짝 따라붙는 슬레이프니르. 어깨를 강하게 내리누르는 공기저항에도 이를 꽉 물어 견딘 그녀는 로크의 중심을 나선형으로 비행하며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속도만큼은 인정할만하나 가속에만 특화된 무식한 엔진에 어설픈 무장까지. 레저용이군.』


“누누누누, 누구보고 레저용이란 거야?!”


하르페이아의 언질은 잊었는지 바짝 따라붙어 추격하는 슬레이프니르. 부서지는 빛무리가 동체를 타격하자 날개깃을 세운 로크는 두 발을 앞으로 뻗어 감속한 뒤 번개처럼 상승한다.


“어딜!”


보조 엔진을 반전시켜 곧바로 추격한다. 급격히 상승했기에 여기서부턴 직선 코스. 속도전에서 자신을 이길 자는 없다고 생각한 슬레이프니르가 자신만만히 고개를 쳐든다.


“...어?”


매섭게 날이 선 발톱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이리도 수척했었나. 쓰라린 아랫배와 수축된 근육이 온몸을 옥죄어오고 오므라진 발가락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만 같다.


***


부서지는 바람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매캐한 연기가 코끝을 스쳐 눈가를 적신다. 황급히 물러난 그녀의 곁으로 바이저를 머리 위로 정리한 하르페이아가 다가온다.


“안 늦었지? 그나저나 정말 빠르네. 하마터면 큰일 날뻔했어.”


“하, 하하. 나도 깜짝 놀랐지 뭐야. 돌아가면 그, 빨리 갈아입어야겠어. 헤헤.”


멋쩍은 듯 볼을 긁는 슬레이프니르. 그런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며 다시 전의를 다지는 하르페이아의 앞으로 깍지를 낀 로크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 하르페? 저거 좀 위험한 거 아니야?”


“긴장 풀면 안 돼.”


방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날개를 타고 흐르는 번개가 뭉쳐지고 흩어지길 반복하며, 번갯불에 과열된 붉은 섬광이 존재감을 과시한다.


『슬슬 이 몸과도 이별이로군. 내키진 않지만 한 수 부탁하마.』


전면부를 중심으로 로크의 몸 이곳저곳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여러 방면으로 지식을 습득한 하르페이아조차 지금의 현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만다.


이내, 로크를 중심으로 혜성과도 같은 섬광이 퍼져나간다.



성에 차지 않아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다보니 좀 늦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