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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Day 77, AM 09:59

 

“네가 원하는 게 뭐냐? RF87 로크.”

 

-호오. 서론을 필요 없으신 것 같군요. 최후의 인간이시여.

 

 잔잔한 바닷바람과 백사장 위를 넘실거리는 파도 소리만이 들리는 섬의 한적한 해안가 위에 무뚝뚝함이 묻어나오는 남성의 목소리와 기계음이 섞여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어느 로봇의 음성이 그 공간에 있는 이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오르카 1호의 전면을 둘러싼 함교의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무뚝뚝한 인상이 돋보이는 남성과 연신 적색의 안광을 반짝이는 AGS, RF87 로크는 서로를 마주 본 채 대화를 이어갔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당신의 전력을 빌리고 싶습니다.

 

“..내 저항군이 필요하다는 소리로군.”

 

-그렇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상당히 강한 전력을 빌리고 싶군요.

 

 RF87 로크는 음성모듈을 가동하는 동시에 자신의 양 날개를 천천히 접으며 상공 위에서 천천히 백사장 위로 내려와 함교에 서 있는 사령관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쿵! 쿵!

 

 백사장 위에 포진하고 있던 기간테스들이 양팔의 장갑을 가슴께로 들어 올린 채 RF87 로크와 사령관의 사이에 떡하니 자리를 잡자 RF87 로크는 그들에게 잠깐 시선을 주는 모양새를 보였다.

 

-이것이 사령관님의 AGS입니까? 최후의 인간이라 불리는 이에게는 너무나 평범한 AGS군요.

 

“오르카 저항군의 힘을 빌려서 무얼 할 셈이냐?”

 

-제 주인의 무덤에 들어온 벌레들을 박멸하고자 합니다. 영민하신 이여.

 

키-긱

 

“오오-”

 

 정체불명의 검은 AGS가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함교의 정중앙에서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노려보는 남성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자 오르카 1호의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저 AGS, 진짜 우리 기간테스랑 같은 AGS가 맞슴까?”

 

“...이야. 죽이네. 레벨이 다른 녀석인가 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던 이프리트의 눈에도 백사장 위에 고고하게 서 있는 RF87 로크를 향한 호기심이 엿보였다. 평소 그녀들이 보아오던 AGS와는 격이 다른 AI, 그것을 마치 과시하는 듯한 RF87 로크의 행동에 그녀들의 이목이 한순간에 그를 향해 쏠렸다.

 하지만 그런 이색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은 여전히 그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무덤덤이 무색무취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굳이 네 주인의 무덤에 있는 벌레들을 우리가 나서서 없애야 할 필요가 있나?”

 

-..제 주인의 무덤의 문을 부순 것은 당신의 휘하에 있는 장병이 한 짓이니, 그 책임을 무셔야 하는 것이 상관으로서 옳은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그래. 공병들을 빌려주마. 내 휘하의 공병들은 유능하니 반나절이면 문의 수리가 끝날 거다. 그거면 내 책임은 없던 것이 될 터.”

 

-...문을 부순 책임을 무셔야 하는 것에 문의 수리는 당연한 행위이니 논외입니다. 영민하신 이여. 논점은 부하의 책임을 지시는 것이 상관의 올바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영민하신 이라면 옳게 들으실 터일 진데 어찌 그리도 책임을 회피하려 드시는지 저로선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예상치 못한 한없이 차갑고 무뚝뚝한 응대, RF87 로크의 음성모듈에서 흘러나오던 기계음에서 여태까지의 여유로움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아예 자신의 팔을 들어 어떻게든 대화를 풀어가고자 손짓까지 해 보이는 RF87 로크였으나 기간테스의 어깨너머, 함교의 창 너머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사령관의 시선에는 일말의 변화도 비치지 않았다.

 

“책임이라..책임. 잠깐. 네가 내게 책임을 물고자 하는데, 넌 한낱 AGS잖나. 내가 왜 너에게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네가 묘지기도 아닌데 말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인형들의 주인이시여. 저는 제 주인 앙헬 리오보로스 각하께 묘의 수호를 전담받은 AGS. 따라서 제게는 당신께 묘의 훼손에 대한 책임을 물을-

 

 RF87 로크는 이제 조급함을 드러내며 한 걸음, 오르카 1호로 걸음을 옮기려 들었으나 그의 기계발이 채 백사장의 모래를 밟기도 전에 사령관은 팔짱을 풀곤 오른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의 행동에 제약을 걸었다.

 접근조차 거부하는 사령관의 모습에 RF87 로크는 들어 올렸던 제 발을 다시 뒤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사령관에 의해 행동 하나하나에 제약이 걸린 RF87 로크, 그는 이 백사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사령관의 손아귀에 잡혔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의 행동을 막아선 사령관은 꺼내 들었던 오른손을 그대로 자신의 턱 아래로 가져가 있는 듯 없는 듯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능청맞은 목소리로 그의 의사에 반대를 표했다.

 

“난 그런 인간은 모른다. 당초에 나는 멸망 전 세계의 예법 같은 건 기억하지도 못할뿐더러 배우지도 않았다. 그러니 갑자기 찾아온 너와 처음 들어보는 네 주인에 대해 존중할 필요성은 일도 못 느끼겠군. 하지만 부하들의 실수에 대해선 책임은 지도록 하지. 문의 수리를 맡은 인원들을 차출해 무덤 쪽으로 보내겠다. 이 이상 할 말이 있나?”

 

파-직!

 

 단호하게 내려진 축객령, RF87 로크의 등줄기에서 황금빛의 전자기가 더욱더 빠르게 그의 검은 몸체 틈 사이사이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변화에도 사령관은 여전히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빤히 응시할 뿐, 눈썹조차 까닥이지 않았다.

 

파-직! 파직!

 

-..이것 참. 어려운 분이시군요. 오르카 저항군의 사령관 각하께선.

 

“네 평가 따위 내 알 바인가?”

 

 대화를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로크의 검은 날개 위로 황금빛의 전자기가 더욱더 빠르게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것을 딱히 공격적인 행위라고 판단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관심은 무뚝뚝하다 못해 로크의 제안에 일절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사령관의 언동으로 더욱 쏠렸다.

 딱딱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언동은 그 대상인 RF87 로크뿐만 아니라 그를 지키기 위해 둘러싼 이들 역시 안색을 바꿀 정도로 냉정한 것이었다.

 

“오..우리 사령관님. 역시 냉정하시지 말임다. 말 그대로 철혈임다. 철혈.”

 

 햇볕이 내리쬐는 갑판 위에서 사령관의 목소리를 듣던 브라우니 한 개체가 사령관의 대화를 품평하고 있자니 그녀의 뒤에 앉아 있던 이프리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린 브라우니에게 긍정을 표했다.

 

“나라면 저렇게 정중하게 나오는 AGS를 보고 흥미라도 가졌을 텐데. 저 AGS보다 우리 사령관이 AGS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

 

“그러게나 말임다. 혹시 AGS 로보테크를 직할부대로 두신 건 사실 알고 보니 사령관님이 AGS라던가 혹 그런 거라서 아님까?”

 

“흐흐.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임마.” 

 

“..너희들. 총구 똑바로 못 들어? 지금 현 상황이 썩 즐거운가 봐? 엉?”

 

 그녀들의 잡담이 길어질 기색이 보이자 그녀들의 머리 위를 날고 있던 임펫 4호가 그녀들에게 불호령을 떨궜다. 그녀의 등장에 연신 떠들던 브라우니와 이프리트는 황급히 제 장비를 고쳐 들었고 이프리트는 그 와중에도 브라우니의 허벅지를 걷어차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그녀들의 모양새를 보고 혀를 쯧-하고 찬 임펫 4호였지만 그녀 역시 대화에 흥미가 쏠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이 정도면 동지 선에서 끝날 분위기네. 마리 대장한테 차후 보고를 올리라더니. 믿는 구석은 있었네. 우리 동지.’

 

 갑판 위를 날고 있던 임펫 4호는 갑판 아래 함교에 있을 사령관을 향한 호기심에 스피커 너머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한층 더 귀를 기울였다.

 부사관인 자신도 보기 힘든 사령관이었기에 지금 그에게 관심이 쏠리는 건 어찌 보면 모두에게 당연한 일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그 멋들어진 대장이 왜 사령관 동지한테 매달리는지 잘 이해가 안 갔는데, 이 정도면 뭐...’

 

 그럴 만도 하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임펫 4호의 머리 위로 또 다른 이들의 잡담이 시작되었다.

 

“전대장? 우리 사령관. 이~렇게 차가운 남자였어?”

 

“어..그러게? 평소보다 더 쌀쌀맞네?”

 

 두 눈을 반짝이며 한층 흥분한 듯한 린트블룸의 물음에 슬레이프니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백사장 위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로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어갔다.

 

“우리 사령관이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말하기 시작하면 무섭구나아..”

 

“그..그러게 말이에요. 평소에는 저희한테 냉담하셔도 부탁하는 건 다 들어주셔서 잘 몰랐는데..으으. 제가 저 자리에 서 있었다면 울고 싶을 지경이었을 거예요.”

 

 블랙 하운드의 말마따나 슬레이프니르는 조금 안쓰러운 눈치로 RF87 로크를 주시했다. 분명 황금빛을 흩뿌리며 등장했을 때는 식은땀이 맺힐 정도로 긴장했는데, 등장한 지 몇 분 채 지나기도 전에 저 검은 AGS는 쇠사슬에 칭칭 감긴 까마귀처럼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자 그녀는 오히려 사령관이 너무 야박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저 AGS, 어지간히 사령관의 눈 밖에 났나 본데? 사령관이 좀 무심한 남자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문전박대하는 인간은 아니었는데.”

 

“..뭐, 생긴 게 영 불쾌하게 생기긴 했어. 아니다. 불길하게 생겼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간만에 인간이 똑바로 일하는 것 같네.”

 

 인상을 찌푸리는 슬레이프니르, 울상을 짓는 블랙 하운드와 달리 그리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RF87 로크와 사령관의 대화를 품평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중얼거림에 격하게 동의하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하늘의 재앙, 둠 브링어의 지휘관인 멸망의 메이였다.

 

“흥! 아무렴, 그렇게 나와야지. 그 인상 더러운 남자가 오늘 자기 일을 톡톡히 하는 것 같네.”

 

 자신만만한 얼굴 위에 입가를 비꼬아 올리는 그녀의 모습에 그녀 곁을 지키던 나이트 앤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눈치채신 거라도 있으세요? 대장?”

 

“눈치챌 거고 자시고. 미확인 대상의 불투명한 요구를 넙죽 받아들이는 멍청이가 이 세상에 어딨어?”

 

 그런가요, 나이트 앤젤은 멸망의 메이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장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이다. 저 AGS가 제아무리 자기를 소개했다 한들 그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그녀들과 그로서는 쉽게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런 미증유의 방문자 말을 덥석 주워 담는 것은 머릿속이 꽃밭으로 가득한 녀석들이겠지, 나이트 앤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여는 제 상관을 바라보았다.

 

“사탕발림에 가까운 보상도 없어. 대뜸 와서 책임지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요구해와. 거기다 요구하는 건 우리의 전력, 목적은 해충 박멸. 어떤 멍청이가 자기 병력을 아무런 보상도 의무도 없는 곳에다 힘을 빌려줘?”

 

“우선 그 해충이라는 건 철충을 말하는 거겠죠?”

 

“..뭐. 그 암사자가 보낸 무덤이라는 곳의 데이터를 읽어보면 이 섬 지하에도 철충이 있는 건 맞는 것 같아.”

 

 멸망의 메이는 부관의 물음에 시큰둥한 얼굴로 혀를 들리지 않게 차며 대답했다.

 

“기껏 청소 다 했다고 생각했더니 지하에 또 한가득 있을 게 뭐야?”

 

“..그런데 대장, 지상이든 지하든. 철충은 없애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맞아. 맞는데, 지금 저 녀석이 원하는 대로 우리가 움직이면 우리 체면은 뭐가 돼? 우리 저항군을 저런 AGS 하나의 말에 넙죽넙죽 움직이는 그런 멍청이들로 만들 생각이야? 흥. 가뜩이나 지휘관급 개체 중 이 자리에 있는 게 나 하난데 다른 셋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옳다구나 하겠다. 그리고 단언컨대..”

 

 멸망의 메이는 말끝을 살짝 흐리며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눈동자만 굴려 그녀의 부관을 응시했다. 대장의 미적지근한 시선에 나이트 앤젤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단언컨대? 뭡니까? 뒤에 뭐 더 있어요?”

 

“..저 AGS, 보기보다 음흉한 놈이야.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게 확실해. 그걸 확인하기 전까지 쉽게 대화의 주도권을 뺏겨선 안 될 일이야.”

 

 여기까지 설명해줬으면 됐지? 멸망의 메이는 그렇게 말을 끝맺으며 나이트 앤젤에게 휙휙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수신호에 나이트 앤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위치로 조용히 부상하며 그녀의 곁을 떠났다.

 부관이 곁을 떠난 것을 확인한 멸망의 메이는 이마 위에 얹어두었던 선글라스를 내려쓰며 옥좌 위의 버튼을 하나 꾹 누르곤 방금과 같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삑-

 

“..야. 사령관. 내 말 들리지?”

 

“듣고 있다. 멸망의 메이.”

 

 함교의 정중앙, 여전히 RF87 로크와 대치 중이던 사령관은 블랙 리리스가 꽂아준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멸망의 메이의 시큰둥한 목소리에 입술을 작게 들썩였다.

 

“무슨 일이냐.”

 

-..흥! 뭐, 꼭 일이 있어야 내가 통신을 걸어?

 

“..지금은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작전 중이라는 걸 잊었나?”

 

 그녀의 새침한 물음에 사령관의 콧잔등 위로 작은 떨림이 일었으나 그것은 매우 옅은 것이었다. 사령관은 몇 번 두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다 다시 입을 열어 멸망의 메이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현재 위치를 사수해라. 스카이나이츠의 지휘 통제권까지 내어줬으니 제 역할에 충실히-”

 

-칫, 쪼오끔 자기가 해야 할 일 좀 한다고 유세 떨기는. 흥!

 

“...”

 

 왜인지 현재 별다른 스트레스 요소도 크게 없을 텐데, 사령관은 목 뒤의 시원한 감각이 밀려오는 것을 격하게 느끼기 시작해 무심코 제 오른팔을 들어 목 뒤에 손을 얹었다.

 보드라운 피부의 감촉 대신 딱딱하고 무기질적인 무언가가 그의 오른손바닥 아래로 느껴졌으나 사령관이 그것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이 이어폰 너머의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쉬지 않고 그를 향해 짜증을 연발했다.

 

-어서 저 AGS녀석을 어떻게 할 건지 결정을 내려! 언제까지고 우리한테 저걸 노려보게만 해둘 거야? 이제는 선글라스를 껴도 햇빛 때문에 내 눈이 아플 지경이라고.

 

“그 부분은 기다려라. 아직..”

 

-불굴의 마리나 신속의 칸을 회군시키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린 건 너니까 어느 정도 대책을 마련해뒀던 거 아냐? 설마 대책 마련도 생각해두지 않고 네 멋대로 굴고 있는 건 아닐 테지?

 

“..대책은 현재 탐색 중이..하아.”

 

 결국에는 RF87 로크마저 격침 시킨 사령관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나오자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메이드들의 얼굴에 그를 향한 안쓰러움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미확인 AGS보다 그를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지휘관급 개체들, 그중에서도 필두를 달리는 이는 역시나 멸망의 메이였다. 

 사령관과 멸망의 메이와의 대화가 교착상태에 들어가 있던 그때, 그의 등 뒤를 보좌하던 콘스탄챠가 단말기를 통해 무언가를 확인하고선 그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주인님. 닥터의 회신입니다.”

 

“..그래. 분석은 모두 끝났나?”

 

“네. 저 AGS의 설계구조와 그에 따라 유추되는 예상 스펙, 그리고 저 AGS가 말한 무덤의 설계도면까지 분석이 끝났다고 결과 보고서가 올라왔습니다.”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던 콘스탄챠는 어느새 사령관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음을 느껴 애써 그에게 애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어색한 미소에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다렸다는 듯 이어폰 너머에 있을 멸망의 메이와 대화를 재개했다.

 

“멸망의 메이, 닥터의 RF87 로크의 분석 결과를 송신하겠다.”

 

-흥! 유능한 꼬마를 부하로 둔 게 너의 천운이네.

 

 사령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콘스탄챠는 재빨리 단말기를 두들겨 닥터의 보고서를 멸망의 메이에게 송신, 멸망의 메이는 닥터의 보고서를 옥좌 위에서 확인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뭐야, 이거? 이거 제대로 분석한 거 맞아?

 

 보고서를 읽은 그녀의 목소리에 경악이 묻어 나오자 사령관 본인 역시 닥터가 보낸 RF87 로크에 관한 보고서를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언뜻 보아도 그가 이해하기 힘든 영역의 단어들이 전자 보고서의 전면 여기저기에 빼곡하게 늘여져 있어 사령관은 그런 것을 탐독하기보다는 RF87 로크의 설계 전면도를 주시했다.

 

‘..도면의 시뻘건 부분은 아직 우리 함 내 기술로는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뜻. RF87 로크의 파츠 대부분이 뻘겋네. 알바트로스랑 비슷한 레벨이야.’

 

 보고서에 대한 사령관의 감흥은 거기서 끝이었다. 하지만 멸망의 메이의 경우 사령관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을 곧바로 이해했는지 그녀는 쉽사리 보고서를 신용치 못한 듯 보였다.

 

“유능한 아이니 보고서에 실수는 없을 터. 철혈의 레오나의 특수탄으로 수집한 정보다. 오차율은 매우 낮다.”

 

-..겉만 번지르르한 녀석은 아니었네. 하마터면 삽시간에 당할 뻔했어. 아니, 잠깐만. 그럼 저 녀석 지금 공격 준비하는 거 아냐?

 

 살짝 다급함이 느껴지는 그녀의 물음에 사령관은 함교의 유리와 기간테스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RF87 로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협상이 잠시 중단된 현재, RF87 로크는 여전히 백사장 위에 가만히 발을 내려둔 채 오로지 제 황금빛 테두리 파츠를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그 사이로 노란빛의 전자기망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전까지 열심히 가동하면 음성모듈 대신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처럼 구는 그의 모습에 멸망의 메이는 다급함을 더는 숨기지 않은 채 큰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이 예상 스펙대로라면 저건 예열 행위에 가깝잖아! 야! 어서 공격 명령을 내려! 아니다. 내가 직접..

 

“잠깐 멈춰라. 공격할 거였다면 너와 떠드는 지금 했겠지. 분명 그런 의미는 아닐 거다.”

 

-무슨 그런 느긋한 소리를 하고 자빠진 거야! 이 멍청아! 우리 모두 죽게 만들 셈이야?

 

뿌득-

 

 멍청이라는 단어에 그의 눈썹이 살짝 씰룩거렸으나 그 미미한 변화를 눈치챈 이는 그의 곁을 경호하고 있던 블랙 리리스 뿐이었다.

 사령관은 코로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내었다는 잠깐 반복하다 귀에 꽂힌 이어폰을 이내 빼버리고 다시 RF87 로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상세 스펙은 확인했다. RF87 로크.”

 

-..호오. 그 말씀은 방금 저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함이셨다는 소리시군요.

 

“딱히 그런 것도 아니지. 네 제안에 크게 흥미를 못 느끼는 건 사실이거든.”

 

-어찌하면 제 제안에 당신이 흥미를 느끼시겠습니까?

 

“너는 말은 청산유수인데, 거래라는 걸 할 줄 모르는군. 먼저 무얼 우리에게 줄 수 있는지, 네 입으로 이야기해 봐라.”

 

 거래라는 말에 RF87 로크는 열고 닫기를 반복하던 제 황금색 장갑의 기동을 멈추고 적색의 흉흉한 안광의 빛을 더욱더 짙게 내뿜었다.

 

-거래라. 그렇군요. 제 접근방식이 잘못되었습니다. 그 부분은 인정해야겠군요.

 

“...”

 

-좋습니다. 이제 거래로 넘어가 보도록 하지요. 제 제안은 이전과 동일, 당신의 전력을 빌려 제 주인의 무덤을 더럽히는 벌레들의 박멸. 그리고 여기서 제가 당신에게 내어드릴 것은.

 

파-직!

 

-현재 제 주인의 무덤에 있는 모든 것입니다.

 

 RF87 로크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어떻게든 자신들을 무덤으로 끌고 들어가려 하는 RF87 로크가 내놓은 것은 다름 아닌 제 주인의 유품이었다. 어딜 보아도 수상쩍은 보상, 모두가 RF87 로크를 향해 다시 한번 총구를 겨눈 채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었다.

 

“제 주인의 무덤을 더럽히는 벌레는 박멸하고자 제 주인의 물건에 손을 대는 건 허용한다고요? 그런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가 이 세상 어디에 있나요?”

 

 사령관의 곁에서 쌍권총을 들고 RF87 로크를 겨누고 있던 블랙 리리스는 제 속내를 숨기지 않고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께름칙함을 콕 집어내며 그에게 반박해 나섰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바이오로이드 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총체적인 의사를 표시하자 RF87 로크는 검은 갑주를 두른 제 어깨를 으쓱거릴 뿐, 여전히 담담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제 주인의 무덤은 제가 수호해야 하는 영역, 하지만 그 영역 안에 안치된 그분의 유산을 지키라는 명령은 없었습니다. 이른바 외통수, 아니면 제 주인께서는 제가 그리 유능한 묘지기인 줄 아셨던 것이겠죠.

 

“..당신, 우리를 도굴꾼으로 만들 셈인가요?”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블랙 리리스의 물음이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자 RF87 로크는 이전까지 보이던 정중함과는 결이 다른 능청스러움이 묻어나는 기계음으로 그 물음에 답하기 시작했다.

 

-도굴꾼이라, 그렇군요. 그렇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당신들의 사령관님이 만일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제 주인의 유산을 가져가는 것은 엄연한 보상의 일환. 이미 2평 남짓한 관에 안치되어 흙으로 돌아간 제 주인에게는 더는 불필요한 물질적 재화를 당신들의 살아있는 사령관이 가져가는 것은 단순한 거래의 일환에 불과합니다.

 

“..방금까지 내 부하들에게 도구라고 하던 네가 그런 결정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 너도 네 주인의 도구에 불과할 텐데, 주인의 물건을 제멋대로 넘기니 마니 하다니.”

 

-제 주인께서는 저에게 꽤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지요. 아마 그분에게 있어서 저는 훌륭한 트로피 또는 훌륭한 묘지기 정도로 생각되었을 겁니다.

 

“...”

 

 RF87 로크는 쉬지 않고 놀리던 음성 모듈을 마치 옛일을 떠올리는 사람과 같이 잠깐 멈추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의 진홍색 안광이 밝은 햇빛 탓인지는 몰라도 옅어진 듯한 느낌에 사령관은 입을 다물곤 그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제가 이런 거래를 제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주인께서 모으신 재화는 더는 그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죽은 이는 그저 죽은 이. 필멸의 운명은 세계를 호령하던 사람이라 할지언정 피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공평함입니다.

 

파-직!

 

-죽은 이의 사유재산은 곧 누군가에게 계승되어야 그 가치가 발하는 법. 이것이 사령관께 그분의 유산을 넘겨드리는 그 첫 번째 이유입니다. 첫 번째가 있으니 두 번째도 있습니다. 저는 죽는다는 것을 모릅니다. 당초에 AGS인 저에게 그런 것은 무의미, 만들어진 AI 연산망에 감정 모듈 하나를 끼얹는다고 그것에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어렵겠지.”

 

-맞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감정모듈을 탑재했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무기질로 만들어져 AI 코어에서 연산된 출력값을 따르는 AGS,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니 저에게 인간적인 죽음에 대한 경의와 예우, 이런 것은 사령관님께서 일선에 언급하신 것처럼 저 역시 알 바가 아닙니다.

 

“...”

 

-그렇기에 저는 AI 연산을 통해 내려진 가장 합리적이고 문제 해결에 있어 빠른 길을 선택할 겁니다. 그것이 설령 제 주인의 유산을 이름 모를 이에게 넘기는 것이라 할지언정, 제 주인의 무덤 안의 벌레들을 방치하는 것보다야 나을 일이지요.

 

 RF87 로크의 힘이 빠진 듯한 기계음에는 처음 등장했을 때와 달리 어딘가 애처로움이 묻어 나와 처음에 그에게 적대적으로 굴던 이들의 눈동자에도 적의가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마치 주인의 죽음에 의해 이 섬에 내쳐진 그의 입장에 그녀들의 입장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었다.

 

"..저 AGS 좀 불쌍하지 말임다."

 

 어느 한 브라우니의 중얼거림이 그 자리에 있던 스틸라인 병사들 사이 사이로 흘러 들어가자 모두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주인을 어이없게 잃은 채, 섬에서 홀로 영겁의 시간을 이 섬 아래에서 보냈을 저 AGS의 상황이 인류 멸망 이후 목적을 잃은 채 길거리를 배회하던 자신들의 처지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그녀들은 방아쇠에 걸어둔 제 손가락을 슬며시 거둔 채 눈으로만 검은 AGS를 쫓기 시작했다.

 

“...좀 불쌍하긴 하네.”

 

“전대장,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아니, 뭐...”

 

 그것은 비단 스틸라인 병사들에게서만 번진 일이 아니었다. 하늘 위를 부유하던 스카이나이츠도, 백사장 위에 있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대원들도, 심지어 함교에 있던 블랙 리리스마저 모두가 저 미확인 방문자의 입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 AGS는 그녀들을 인형이라 부를지언정 자신을 결단코 인간이라고, AGS의 그 이상에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도 그녀들도 모두 다같은 인간의 '소유물'. 서로 생긴 것은 달랐으나 그와 그녀들의 공통분모는 확실히 존재했다. 모두가 침울한 얼굴로 사령관의 다음 대사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들이 기대하는 사령관의 대사는 조금 전과는 달랐다. 굳이 그녀들이 그에게 건 기대를 이야기하자면 더는 저 AGS에게 매몰차게 굴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

 그 분위기는 사령관이 서 있는 함교마저도 휩쓸었다.

 

"..주인님."

 

"...음."

 

 블랙 리리스마저 조금 애달픈 눈으로 자신의 옆모습을 쫒자 사령관은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잠깐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는 깨달았다. RF87 로크가 그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겼을지언정 결정의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자기가 들고 갔다는 것을.

 

'적에게 동정을 품지 마라. 적의 말에 동요하지 마라. 오로지 확실한 정보 내에서 적의 의도를 유추해라...하아. 반은 포기해야 하나.'

 

 머릿속에서 여태껏 부관에게 배웠던 화술에 대한 조언을 떠올리던 사령관은 결국 자신이 코너에 몰렸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길어진 대화 속에서 RF87 로크는 적대적이던 대원들에게서 동정표를 사는데에 성공했고, 자신은 그 동정표에 휘둘리는 입장.

 RF87 로크는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약점을 파악한 것이다. 적에게 약점을 들킨 이상, 그에게는 더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가 없었다.

 

'당초에 저 RF87 로크를 돕는 건 정해진 수순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휘관들이 납득을 할만한 건수를 찾는 게 목표였는데. 쯧. 게임 속 로크가 저렇게 말을 잘 했었나?'

 

 사령관은 시야에 들어오는 검은 AGS를 한껏 노려본 채로 잠깐의 침묵을 좀 더 길게 유지했다.

 

'..이 이상 이야기를 미뤄봐야 답은 없지.'

 

 무심코 손이 안주머니로 들어가려는 것을 꾹 참던 그는 더는 협상을 진행하기 어렵다고 잠적으로 판단을 내린 채 이 대화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결국에는 RF87 로크에게 주도권을 뺏긴 채로 생애 첫 협상이 끝나는구나, 하고 그가 협상을 마무리 지으려던 순간. 하늘 위에서 화법이라던가 화술이라던가를 모두 무시하는 독단적인 여성의 앙칼진 목소리가 백사장 아래로 터져 나왔다.

 

"흥! 네깟 AGS가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흠. 멸망의 메이 개체, 저는 당신과 대화를..

 

"대화? 대화아아?"

 

-...

 

"야! 너같이 음흉한 놈들은 말이야, 꼭 자기 자신을 불쌍한 녀석 또는 힘든 인생을 살아온 녀석. 이런 식으로 과대포장 하더라? 어때? 내 말이 틀렸을까?"

 

-저는 딱히 그런 의도로-

 

"아니. 확실해. 너는 그런 의도로 떠든 거야. 네 하소연 덕분에 거래가 오히려 간청을 받아주느냐 마느냐로 귀결되려고 하고 있잖아?"

 

 멸망의 메이의 앙칼지다 못해 적의가 가득 담긴 지적은 곧바로 그녀의 바로 밑에 있는 이들의 태도에 변화를 가져왔다.

 

"생..생각해보니 그렇슴다."

 

"어이쿠. 야, 야. 얼른 방아쇠에 손가락 올려라. 임펫 중사한테 깨질라."

 

 멍한 얼굴로 잠깐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검은 옥좌를 바라보던 이들은 임펫 중사의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검지와 손을 저마다의 장비 위에 다시 걸쳐 올렸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왜 저 녀석의 사정을 신경 써줘야 하는 걸까요?"

 

"린트블룸, 얼른 네 기관포를 장전해. 저 녀석, 생긴 것과 달리 지능파였네. 하마터면 보기 좋게 넘어갈 뻔했잖아."

 

"네~전대장. 근데 저는 린티거든요! 린티!"

 

철컹!

 

 하늘 위의 기사들은 저마다의 기관포와 로켓포를 다시 꺼내 들어 백사장 위의 RF87 로크를 향해 겨누었다. 그중에서도 전대장이라 불리는 슬레이프니르는 어느새 자신의 머리 위에 샛노란 바이저를 완착한 채 그 사이로 금빛의 안광을 내뿜으며 RF87 로크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RF87 로크는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다 이내 자신의 술수가 더는 틀려먹었다는 듯 어깨 파츠를 들썩이며 자신의 고개를 내저었다.

 

-..이것 참. 다루기 쉬운 분들인 줄 알았건만. 외통수가 여기 있었군요.

 

"외통수의 사전적 의미 검색이나 하고 다시 와라. 이 멍청한 AGS야."

 

 능청맞기까지 한 그의 행동에 오르카 1호 인원들의 눈빛에 투기가 스며들었다. 그녀들에게 그는 더이상 미확인 방문자가 아니었다. 능청맞은 상인, 아니. 사기꾼이었다.

 

-..좋습니다. 뭘 더 말해드릴까요? 멸망의 메이.

 

"..숨김없이 다 내놔."

 

-무슨 말씀인지..

 

"너 같은 녀석은 꼭 뒤에 뭘 숨기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야 아차, 저런 게 있었습니다~이런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한 가지 옵션을 더 추가하려 하거든. 넌 딱 봐도 그런 타입이야."

 

-단지 상대의 성격을 유추해서 그런 없는 사실을..

 

"야! 사령관! 너 듣고 있지?"

 

-...

 

 앙칼지다 못해 짜증이 잔뜩 묻어나오는 그녀의 부름에 함교에서 모든 것을 듣고 있던 사령관은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가 마련해준 역전의 발판에 올라탔다.

 

"그래. 듣고 있다."

 

"네 생각은..크흥..흠. 어..어때?"

 

 어딘가 어색한 듯 조곤조곤하게 물어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방금까지 짜증을 부리던 사람이라기엔 위화감이 물씬 느껴지는 목소리였으나 사령관은 그걸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녀가 되 잡아준 이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생각 역시 소장의 의견과 일치한다. RF87 로크, 네 제안은 어딜 봐도 수상쩍다. 왜 그렇게 해서까지 우리 병력을 빌리려 하는 거냐?"

 

 사령관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탄하고 딱딱했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살짝이 올라간 채, 두 눈에는 이전과는 다른 예기가 서려 있었다. 그 변화를 눈치챈 이들은 이 공간에 단 둘, 그의 곁을 경호하는 블랙 리리스와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정면으로 맞대고 있던 RF87 로크뿐이었다.

 그의 변화를 눈치챈 RF87 로크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으나 계속해서 자신의 의사를 고집했다.

 

-..말씀 드렸다시피 제 주인의 빈소를 침범한 벌레들을

 

"현재 우리의 손엔 너의 상세 스펙을 유추한 정보가 있다. 이것만 봐선 겨우 철충 조무래기들에게 너 정도의 AGS가 고심하고 있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다만."

 

-...

 

"혹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그래. 연결체, 연결체냐?"

 

 사령관의 무덤덤한 물음에 RF87 로크는 고개를 조용히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사령관님께서 제게 물으시는 그 '연결체'라는 것이 만일 철충의 지휘 개체를 부르는 것이라 하심은 그런 개체는 지하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병력을 요구하는 거냐?"

 

-그것은 제 힘만으로는 벌레들을 모두 처치하기엔 벅차기 때문입니다. 사령관님.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나?"

 

-예. 영민하신 이여. 저는 당신께 한 치의 거짓도 일삼지 않고 있습니다. 어찌하면 저를 믿어주시겠습니까?

 

 이제는 힘이 쭉 빠지다 못해 더는 협상의 주도권을 얻어내려 하지 않는 RF87 로크의 기계음에 사령관은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멸망의 메이 덕분에 주도권은 다시 돌려받았네. 아니, 뭐. 결국 RF87 로크를 돕는 건 이야기의 흐름상 당연한 거긴 한데. 다만 저 녀석은 왜 그걸 숨기려 하는 거지? 그걸 당최 모르겠네.'

 

"흐음.."

 

-...

 

 결국에는 사령관에게로 결정권과 분위기가 모두 넘어간 상황, 백사장 위의 RF87 로크도, 하늘 위의 멸망의 메이도. 이 주변의 모두가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몇 초의 시간이 지났을까, 사령관은 감았던 두 눈을 뜨고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감사합니다. 저항군의 사령관님이시여.

 

"사령관이라 불러라. 긴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사령관은 손을 허공에 몇 번 휘적이다 고개를 등 뒤로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다수의 메이드를 향해 다시 혀를 놀렸다.

 

"리리스, 너는 비전투 인원 대기실에 있는 에이미와 스카디를 호출해라. 전투복으로 환복하는 것도 전해두도록."

 

"네. 주인님. 여보세요? 에이미, 지금-"

 

“콘스탄챠, 너는 휘하 바닐라 2명과 함께 개인 장구류를 챙겨 외부 출격 포트로 이동해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후후, 간만의 출격이네요.”

 

“그래. 총열이 녹슬지 않았는지 꼭 확인하고.”

 

“제 언니가 주인님처럼 개인물건을 막 다루는 여성이신 줄 아십니까? 주인님이나 저희 없는 동안 말썽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바닐라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사령관의 말을 맞받아치자 그 자리에 있던 메이드 일동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올랐다. 저마다의 입가를 가린 채 쿡쿡 웃는 그녀들, 그리고 사령관은 그녀의 말에 잠깐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턱 아래로 손을 가져가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시 열었다.

 

“-나도 같이 간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

 

“어머! 주인님도 같이-예? 주인님. 방금 무어라..”

 

“그래. 나도 같이.”

 

“...예?”

 

 순간 그녀들의 미소 걸린 얼굴들이 그의 말 한마디에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당혹감, 이해 불가. 온갖 감정과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는 그녀들을 향해 사령관은 확답을 내리겠다는 듯 오른팔을 들어 단말기에 입을 대었다.

 

“알바트로스. 듣고 있나?”

 

-듣고 있다. 사령관. 네가 방금 떠든 소리까지.

 

“그래. 듣고 있었다면 이야기는 빠르겠군. 함 내에 남아있는 AGS들 중 네 원하는 대로 부대를 편성해라. 다만 철혈의 레오나가 보낸 맵과 적영 분포도는 일부일 거다. 예상 필요 전투력을 연산 결과보다 높게 책정하는 방향으로 진행해라.”

 

-말했을 터인데. 그들은 사령관을 지킬 용도로 남겨둔 병력이다. 이 함을 떠날 병력이 아니다.

 

“그러니까, 네가 수호하려는 그 인간인 내가, 직접 그 현장으로 간다는 것 아니냐. 설마 내가 없는 이 함에 네 AGS 개체들을 둘 생각은 아니겠지?”

 

-..알겠다. 함 앞에 배치해둔 기간테스 003과 004를 회수하겠다. 그리고 AGS 수송기의 출격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현장에는 철혈의 레오나와 몽구스팀 일원들도 있다. 그리고 배틀 메이드와 080기관 소속의 에이미와 스카디, 거기에..”

 

 사령관은 잠깐 말을 끊고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자신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블랙 리리스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직 상황파악이 덜 된 것일까, 아니면 사령관의 돌발 행동에 무어라 말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그녀의 호박빛 눈동자에는 사령관을 향한 의문스러움만이 담겨 있었다.

 

“..컴페니언의 블랙 리리스와 페로도 합류한다. 다만 이 둘은 전투력 총합으로 계산하지 말도록. 어디까지나 보험 정도로만 여겨라. 이상.”

 

-지시를 받들겠다. 사령관.

 

삑-

 

“..왜 다들 그런 눈으로 날 보나?”

 

 사령관은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메이드들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하나씩 마주하다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는 척을 하였다. 딱히 그녀들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던 그였기에 이 또한 그의 계산적인 행동에 속했다.

 어느 때보다 능청스럽게 구는 그의 행동에 여태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녀들이 봇물 터진 둑처럼 저마다의 말소리를 높여가며 떠들기 시작했다.

 

“주인님! 지금 주인님이 하신 말씀이 얼마나 위험한 건 줄 아시나요? 예?”

 

“물론, 리리스. 잘 알고 있다.”

 

“주..주인님? 저희가 출격하는 건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주인님께서 직접 가시는 건..”

 

“괜찮다. 콘스탄챠. 페로도, 리리스도 함께다.”

 

“..주인님. 저희 경호에는 차질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장은 변수가 많은 공간입니다. 차라리 저와 언니를 개별 출격시켜주십시오.”

 

“그건 불허한다. 너희는 내 경호 인력이지 전투 인력이 아니야.”

 

“이 우둔하고 멍청한 주인님! 지금 주인님의 생사에 저희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걸 알고 그렇게 여유만만하신 건가요?”

 

“AGS와 직할부대 인원들 모두가 출격한다. 어지간한 연결체급도 쓸어버릴 레벨이야. 과한 걱정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바닐라.”

 

“...”

 

 아까까지 써먹던 화술을 왜 메이드인 자신들에게 써먹는 걸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며 굳어버리자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이들의 목청 역시 함 밖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야..야들아! 얼른 갑판에서 내려가! 얼른 저 무모한 우리 동지를 사수한다! 어서! 대장한테 죽기 싫으면 얼른 달려!”

 

“예! 예! 중사님!”

 

“아오! 우리 사령관님이 이렇게 막나가시는 분이셨슴까?! 저도 저렇진 않슴다!”

 

우르르르-

 

 스틸라인 대원들의 군홧발 소리가 함교의 천장 아래로 들리자 사령관은 고개를 들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스피커를 안 껐었나. 그녀들이 오기 전에 재빨리 떠야겠다. 리리스, 어서 함교로 통하는 길목에 차단벽을 내려라. 시간을 늦춰야겠어.”

 

“..지금만큼은 그녀들을 막기 싫은데요. 주인님.”

 

“리리스, 얼른 채비해라.”

 

“..하아아아..”

 

 사령관의 무관심 일색의 명령에 블랙 리리스는 흐느적거리는 발걸음으로 함교 로비의 패널 하나를 가볍게 조작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가 조작한 것은 갑판에서 함교까지 연결되는 복도의 격벽을 내리는 것.

 축 늘어진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던 사령관은 또 다른 문제가 있음을 깨닫곤 무덤덤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수송기가 늦어진다고 하니, 수송 수단이 필요한데.”

 

-그런 일차원적인 문제라면 제가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사령관님.

 

 함교 밖에서 들려오는 RF87 로크의 말에 사령관은 고개를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돌리자 백사장 위에 서 있던 RF87 로크가 기간테스의 머리와 어깨를 넘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눈치채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기간테스의 그늘에 숨어있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대원들이 일제히 그늘막에서 뛰쳐나와 그를 향해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 이상 각하께 다가서지 마십시오.”

 

 주홍빛의 장발과 흰색의 제복이 돋보이는 그녀, 발키리의 낮게 깔린 위협에 RF87 로크가 날갯짓을 멈추려던 찰나. 그녀의 걱정을 무색케 하는 사령관의 명령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발키리, 총구를 거둬라. 내가 직접 응대하지.”

 

“..네. 각하.”

 

 발키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총구를 내리자 그녀 곁에 있던 다른 대원들 역시 찜찜한 얼굴로 RF87 로크를 겨누던 화기를 내려놓았다.

 RF87 로크는 자신을 가로막던 이들이 사라지자 이제는 아예 속력을 내어 곧장 사령관의 코앞으로 날아와 그와 한 뼘의 거리를 두고 멈추곤 여전히 능글맞은 기계음으로 그에게 자신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저의 스텔스 기능과 가히 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는 이 제트 부스터라면 사령관님을 저의 주인 무덤 앞까지 10초 안에 모셔다드릴 수 있습니다. 부디 제게 사령관님을 모실 영광의 기회를 선사해주시겠습니까?

 

“그건 절대 안 돼요! 주인님! 저런 무뢰한에게 주인님의 옥체를 맡길 순 없어요!”

 

“..안전은 확실하겠지?”

 

-물론입니다. 사령관님의 옥체에 생채기 하나 내지 않을 것을 제 AI 코어를 걸고 확신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 걸까, 메이드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다 못해 아예 거무죽죽하게 변하기 시작하자 사령관은 재빨리 오른손을 들어 그녀들 중 한 명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였다.

 

“..콘스탄챠, 함교의 전면 강화유리를 개방해라. 여기서 출발하면 되겠군.”

 

“아아..”

 

 그의 무심한 명령에 콘스탄챠가 현기증을 느끼며 천천히 바닥 위로 무너져 내리자 그녀 곁에 서 있던 바닐라 둘이 무너지는 그녀를 부축하고선 그녀의 현기증의 원인을 향해 앙칼진 목소리로 다그쳤다.

 

“이 멍청한 주인님! 드디어 뇌수가 콧구멍 사이로 흘러내리시는 겁니까? 어서 코와 입부터 막으십시오! 저희 메이드장을 이렇게 만들고도 죄책감 하나 못 느끼는 그 천진난만한 입을 얼른 막으란 말입니다!”

 

“콧구멍에서 콧물 하나 안 흐른다. 바닐라 2호, 네가 열어라.”

 

“이익!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저 께름칙한 까마귀가 주인님께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이 창마저 내리면 어쩌라는 겁니까?!”

 

“목구멍이 울리는 걸 보니 말은 말이다. 얼른.”

 

“아아악!”

 

 콘스탄챠로도 모자라 그녀 곁의 바닐라 둘마저 뒷목을 부여잡은 채 쓰러지자 사령관의 시선이 고양이 소녀에게로 향했다. 모두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 자리에서 오로지 그녀만이 이전과 같이 양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로 오드아이를 반짝이고 있었다.

 

“페로.”

 

“예. 주인님.”

 

“열어라.”

 

“예. 알겠습니다.”

 

“페로!”

 

 사령관과 동생의 짤막한 대화에 듣다 보다 못한 블랙 리리스가 그녀의 이름을 외쳤으나 페로는 자신의 꼬리를 살랑이며 사령관과 같이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언니에게 항변했다.

 

“주인님의 희망을 들어드리는 것, 그게 저희의 최우선 사항이라고 언니가 그러셨잖아요.”

 

“그..그건 그런데..”

 

“대신 주인님, 저런 언니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니.”

 

“음.”

 

“저와 언니도 주인님과 함께 동승 하도록 하겠습니다.”

 

 페로는 그것만은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제 손을 로비 컨트롤 패널 위에 멈추어 세운 채 사령관을 향해 고양이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 사령관은 고개를 돌려 이제는 함교의 전면 유리창이 열기만을 기다리는 AGS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데, RF87 로크. 한 손 더 빌리지.”

 

-제 몸체가 철로 만들어져 다행입니다. 만일 피부조직이란 것이 있고 그 아래 신경조직이 있었다면 사령관님의 제의를 거절했을 겁니다.

 

삑-

 

기-이잉

 

 자신의 제의가 받아진 것을 확인한 페로는 곧바로 패널 위를 두드렸고 그녀의 손짓이 끝남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함교의 가림막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함교의 전면을 가득 채운 강화 유리창이 위로 서서히 올라가자 RF87 로크는 제 검고 날카로운 손톱이 돋보이는 손을 그 아래로 슬며시 밀어 넣어 사령관의 앞에 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사령관님.

 

“그래. 부탁하지.”

 

“잠깐만요! 주인님! 하다못해 저희가 먼저 안전을 확인할게요! 페로!”

 

“네. 언니.”

 

 사령관이 RF87 로크의 손바닥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블랙 리리스와 페로가 먼저 나서 그 손바닥 위로 폴짝 날아올랐다.

 그녀들은 유심히 손바닥 이곳저곳을 확인한 뒤 블랙 리리스는 엄지와 손바닥 사이로, 페로는 약지와 손바닥 사이에 발을 걸쳤다. 행여나 사령관을 억세게 쥘 요량이라면 곧바로 RF87 로크의 손을 부술 심산으로 그러는 것이었다.

 

"주인님. 로자 아줄을 가동하겠습니다."

 

"그래."

 

키-잉!

 

 사령관의 허락이 떨어지는 동시에 그의 양어깨에 달려 있던 푸른색의 브로치와 같은 것들이 그의 어깨를 떠나 그의 주변을 빙 날아올랐다.

 그리고 곧장 푸른 보호막이 그의 전후좌우를 둘러싸자 사령관은 그제야 RF87 로크의 손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가 RF87 로크의 손바닥 위에서 당당히 몸을 세우자 RF87 로크는 천천히 제 손을 함교 밖으로 빼내었다.

 

휘-이잉

 

“역시 오늘은 날씨가 좋아. 안 그런가?”

 

-동의합니다. 사령관님. 해수욕을 즐기기에는 최적의 환경이군요.

 

“리리스. 작전이 끝나고 쉴 생각이나 하고 있어라.”

 

“..그 전에 제가 두통으로 쓰러지지 않는다면요.”

 

 시원하고 짭짤한 바닷바람이 함선 밖으로 나온 그와 그녀들의 주변을 감싸자 사령관은 두 눈을 감은 채 제 뺨을 때리는 바닷바람과 따사로이 내리쬐는 햇볕을 만끽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가 채 눈을 뜨기도 전, 하늘 위의 지배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함교 밖을 나선 그의 앞에 당도했다.

 

"..야! 뭘 그렇게 멍청하게 있는 거야? 제정신이야? 너?"

 

"..무슨 일이지. 멸망의 메이 소장."

 

"무슨 남 일처럼 이야기하고 자빠져 있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거야?"

 

 하늘 위에서는 언제나 사령관을 내려다보던 멸망의 메이.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사령관은 RF87 로크의 손바닥과 날개를 빌려 그녀와 동등한 높이에서 그녀와 대화에 임하고 있었다.

 그것은 멸망의 메이에게는 불쾌감을, 사령관에게는 뜻 모를 쾌감을 선사했다.

 

"별로, AGS들을 대동하기 위해서는 내 존재가 필요했다."

 

"...굳이 그 녀석들을 쓸 필요는 없잖아. 철혈의 레오나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도 전력을 유지하고 있고, 불굴의 마리나 신속의 칸의 부대도 있어."

 

"..."

 

"육지 제압 작전도 이제 막바지라는 걸 당신이 모를 리도 없고. 안 그래?"

 

"...그래. 맞다."

 

 평소와 달리 점잖게 대화를 걸어오는 그녀에게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자신이 이렇게 직접 나설 필요도 없는 일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 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멸망의 메이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신의 검은 선글라스를 살짝이 내리며 한껏 치켜세운 속눈썹 아래로 빛나는 제 연보랏빛 눈동자를 그의 앞에 드러낸 채 자신의 의문을 계속해서 토로했다.

 

"의도가 뭐야? 대체. 평소처럼 그냥 뒷짐이나 지고 있을 것이지. 왜 갑자기 이런 돌발 행동을 하는 건데?"

 

"...평소라. 그래. 평소처럼 전선에서 물러난 채로 있는다면.."

 

 그녀의 물음 속에서 평소라는 단어를 들은 사령관은 계속해서 그 말을 입속에서 곱씹었다. 평소, 평소처럼 굴면 그만이다. 그래. 평소. 평소처럼 함교에 앉아 있거나 기껏 해봐야 일부러 함 밖으로 나와서 전선을 보고 보급과 정찰만 하면 그만이다. 그녀들이 돌아올 오르카 1호를 지키는 것이 내 평소이다. 그래. 평소..

 

"? 뭐야? 말은 끝까지 해."

 

 갑자기 말하는 법을 잃은 것처럼 입을 꾹 다문 사령관의 모습에 멸망의 메이는 입술을 삐죽였다. 함장모의 그림자에 가려 평소에는 보기도 싫던 그의 매서운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자 멸망의 메이는 옥좌를 조작해 그의 앞으로 조금씩 다가왔다.

 조금씩 그림자 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사령관의 눈매, 그 속에는 이전과 같은 예리함이 어딘가 퇴색된 것처럼 흐릿하게 보인 것은 그녀의 착각일까, 멸망의 메이는 그의 그런 모습에 콧잔등을 씰룩였다.

 

"...뭐라고 말 좀 해! 이 멍청아!"

 

"..주인님께 지금 무어라 하신 거죠?"

 

찰-칵!

 

 그의 곁에서 한참을 서 있던 블랙 리리스가 그와 그녀의 사이로 끼어들어 어느새 장전된 블랙맘바 두 정을 교차해 그녀의 머리통을 향해서 겨누었다. 그녀의 명백한 도발 행위에 멸망의 메이 역시 자신을 향한 적의에 물러서지 않은 채 블랙 리리스의 호박색 눈동자에 이빨을 드러낼 때 꾹 닫혀 있던 사령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려 그 사이로 그녀의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을 내놓았다.

 

"...일탈, 일탈이다. 멸망의 메이 소장."

 

"일탈?"

 

"그래. 이건 나의 일탈, 그저 그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가출이군."

 

"..."

 

 어딘가 힘이 쭉 빠진 사령관의 목소리, 멸망의 메이는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다 이내 점점 예기를 되찾는 그의 눈동자에 흥! 하는 콧소리를 지어내며 옥좌를 그에게서 조금 떨어뜨렸다.

 

"뭐,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아예 과보호 속에서 안배하고 사는 인간보다는 이런 과감한 면모를 보이는 것도, 난 나쁘지 않다고 봐."

 

"의외로군. 너라면 싫어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흥! 이런 행동을 용납 못 하는 건 과보호밖에 모르는 암사자랑 땅개뿐이야. 난 당신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당신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거든."

 

 언뜻 들어보면 바이오로이드의 근본을 부정하는 그녀의 말에 사령관은 그녀의 앞에서 처음으로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올렸다. 언제나 당당하고 오만한 그녀의 태도,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만이 내놓는 말이 있었다.

 사령관은 그녀의 성격을 떠나 그런 점만큼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보다 네 직할부대로는 작전수립이 가능해? 네가 지휘라는 걸 할 수 있어? 설마 그 암사자한테 네 직할부대 지휘권을 위임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 넌 아직 모르겠군."

 

"?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딱히 숨기려고 숨긴 것은 아니다만. 내 밑으로 지휘관 개체가 하나 생겼다."

 

 사령관의 무덤덤한 대답에 멸망의 메이의 눈썹이 다시 한번 씰룩였다. 처음 접하는 정보, 그것도 지휘관급 개체에 대한 정보. 그녀의 관심이 동하는 정보였다.

 

"..설마 네 직할부대 지휘관급 개체야?"

 

"그래. 그래서 이번 작전으로 성능을 실험해보고자 한다."

 

"흐-응."

 

 멸망의 메이의 얼굴에 호기심이 드리웠다. 딱히 새로운 지휘관급에 대한 견제라던가, 아니면 불굴의 마리처럼 사령관의 직할부대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인해 생기는 질투라던가, 그런 종류가 아녔다.

 그녀는 멸망의 메이, 자신보다 강한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오만하고 거만한 바이오로이드. 그렇기에 관심이 갔다. 저 남자가 숨기고 있는 비장의 카드.

 

"좋아. 당신이 뭘 하든 어차피 내 알 바는 아니니까. 네 좋을 대로 해."

 

"그래. 네가 딱히 말 안 해도 하려고 했다."

 

"..근데 뭐, 내가 당신을 좀 거들어 줄게."

 

"...? 뭐?"

 

 이제야 그녀와의 대화가 일단락된 줄로만 알았던 사령관에게 멸망의 메이는 다시 한번 그의 행동에 태클을 걸어오자 이번에는 그의 속눈썹이 씰룩였다.

 어딘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얼굴에 사령관이 한껏 눈썹을 치켜세웠으나 그녀는 도리어 그 미소를 더욱 크게 그리며 그에게 검지를 까닥여 보였다.

 

"이제 그런 얼굴 해봐야 나한테 별로 소용없을걸?"

 

"무슨 의도냐? 멸망의 메이 소장."

 

"의도는 무슨. 그냥 바이오로이드의 근본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지."

 

"...당신. 방금까지 의무감이라던가 사명감이라던가, 그런 거는 일절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블랙 리리스의 앙금 맺힌 반박에 멸망의 메이는 콧노래로 맞받아칠 뿐, 별다른 대답을 내뱉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블랙 리리스의 눈이 또 한 번 뒤집히려 할 때, 사령관이 그녀의 어깨를 먼저 잡아 세웠다.

 

"주인님! 저 여자, 오늘은 반드시 제 손으로!"

 

"리리스. 진정해라."

 

"맞아. 경호대장. 제 주인의 말은 잘 들어야지."

 

"이익! 저 망할!"

 

"멸망의 메이, 그렇다면 내 지시에 따를 건가?"

 

"뭐, 이번 한 번만은. 기꺼이 들어주지."

 

 선심 쓴다는 것마냥 구는 그녀의 모습에 사령관은 제 함장모 끝부분을 꾹 눌렀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그녀와 다른 의미로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좋다. 네 선심을 받아들이지."

 

"흥, 좋아. 그래, 뭘 도와줄까? 폭격? 공중전? 뭐든 말만 해."

 

 그녀는 오른 검지로 옥좌 위를 톡톡 두들기며 사령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최후의 인간인 그를 홀로 전선에 내보내기엔 위험부담도 컸고, 그에게 빚이나 하나 씌울 심산과 그의 지휘관급 개체의 성능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여러 욕망을 동시에 충족할 생각에 멸망의 메이의 기대감이 높아질 무렵.

 사령관은 멸망의 메이에게서 눈을 떼곤 RF87 로크에게 시선을 돌린 채 말을 이어갔다.

 

"정찰을 부탁하지. 멸망의 메이 소장."

 

"좋아. 정찰 정도는-뭐?"

 

"무덤 주변으로 철충이 접근하는 것을 막고 다른 지휘관급 개체가 날 찾거든 얼버무리는 것까지. 부탁하지."

 

 예상치 못한 대답. 멸망의 메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함장모의 그늘에 가려진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 이내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야! 이 자식아! 지금 너 날 뭘로 보고!"

 

탁탁-

 

-흐음. 역시 만만치 않으신 분이군요.

 

 사령관이 구둣굽으로 제 손바닥을 두들기자 침묵을 지키고 있던 RF87 로크가 재빨리 제 스텔스 제트 부스터에서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블랙 리리스는 RF87 로크가 곧 날아오를 것이라는 걸 눈치채고는 사령관의 옆구리에 제 팔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블랙 리리스는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멸망의 메이에게 비웃음을 일부러 날려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안전 운행해라. 로크.”

 

-물론입니다. 각하.

 

“야! 어딜 가! 야!”

 

 RF87 로크는 사령관이 허리를 굽히자 곧바로 사령관의 머리 위로 제 왼손을 덮어씌운 채 강철의 날개를 퍼덕이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그 또한 블랙 리리스와 같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멸망의 메이에게 정중하게 도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럼 당신의 각하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시길. 오만하고 미련한 인형.

 

"-어어!? 야! 까마귀 이 자식아! 너 안 멈ㅊ.."

 

쿠-아아앙!

 

 이윽고 거대한 소닉붐과 함께 검은 AGS와 사령관이 저 멀리 지평선으로 모습을 감추자, 홀로 하늘에 남게 된 검은 옥좌의 소녀의 거침없는 포효가 오르카 1호 상공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이이익!! 야아아아!! 사령관! 너 이 자식아아아!"

 

“야아아아!!”

 

"...너희 대장, 언어모듈 원래 저래?"

 

"...저도 오늘 자로 포기했습니다. 전대장. 자자, 어서 사령관님 명령대로 움직일 준비나 하죠. 하아.."

 

"저, 저! 망할 인가아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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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Day 77, AM 10:32

 

"대충 이렇게 된 이야기지."

 

"..."

 

뚜벅-뚜벅-

 

 깊고 깊은 어둠을 지나 동굴 안으로 들어서는 흰 제복의 사령관과 그의 뒤를 따르는 백금발의 여성, 철혈의 레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며 그의 이야기에 분홍빛 입술을 뻐끔거렸다.

 돌아와야 할 대답이 들리지 않자 사령관은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려 할 말을 잃은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 뭘 그런 얼굴로 바라보나."

 

"...당신. 막무가내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무슨 생각으로 저런 불길한 녀석의 손에 올라탈 생각까지 한 거야?"

 

-불길하게 생겼다니, 그 평가는 너무 박하군요. 철혈의 레오나.

 

키-이잉

 

 RF87 로크가 위로 길게 이어진 입구의 그늘막 사이에서 짙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잠깐 떠났던 그의 둥지로 다시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어딘가 억울하다는 듯한 어조로 항변하는 그였으나 들어선 모양새는 철혈의 레오나의 말마따나 불길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 그 자체였기에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져 음산한 분위기를 한껏 뿜어내는 그에게 딴죽을 걸 만큼 강단이 있는 이는 그 자리에 철혈의 레오나, 그녀뿐이었다.

 

"..넌 네 모습을 거울로 볼 필요가 있어. 아마 꼬마들이 네 모습을 보면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릴걸?"

 

-섭섭한 소리로군요. 전 나름대로 제 디자인이 멋지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말이죠.

 

"지금만큼은 소장과 같은 소감이에요. 주인님."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블랙 리리스마저 철혈의 레오나의 편을 들자 사령관은 대충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을 회피했다. 남자인 그로선 RF87 로크의 디자인 자체가 멋없다고는 부정하기 힘든 탓이었다.

 검은색 베이스에 적색 안광, 거기에 황금색 테두리 파츠까지. 어릴 적 로봇 애니메이션에서 나왔다면 아마 한참을 부모님께 저렇게 생긴 장난감을 사달라고 졸랐겠지, 사령관은 애써 그런 감상을 속내에 숨긴 채 RF87 로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다시 무덤으로 들어온 기분은 어떤가?"

 

-흐음. 과정이 어찌 되었건, 결국 사령관님의 덕택에 오늘이야말로 이 무덤의 안녕을 지킬 수 있을 것 같군요. 감개무량합니다. 사령관님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저의 주인의 무덤은.

 

"...넓군. 자료로 보긴 했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넓어."

 

 사령관은 RF87 로크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앙헬 리오보로스의 무덤을 둘러보았다.

 천장은 동굴과 같이 검흙빛의 암석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여기저기 종유석들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철골 구조물들이 천장의 아래를 받치고 있어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무너질 염려를 일체 제거했으며 아래로는 이곳이 동굴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도로와 계단, 그리고 철벽들이 동굴 곳곳에 늘어져 있어 그가 생활하고 지내는 오르카 1호보다 훨씬 탁 트인 공간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였다.

 그런 감상은 그뿐만이 아니었는지 기다란 계단을 타고 내려온 그의 메이드들 역시 동굴의 여기저기를 둘러다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이 이 섬 아래에 있었다니, 전혀 몰랐네요."

 

"..정말이지. 죽기 전에 얼마나 부자였는지 대충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네요. 사치도 이 정도면 걸작이군요."

 

 바닐라의 신랄한 평가에 메이드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미소를 짓는 얼굴들과 달리 그녀들의 손에 들린 것은 저마다의 각양각색의 화기, 그녀들은 일제히 사령관의 주변을 둘러싸며 이 동굴의 어디에서 찾아올지 모를 적들의 기습에 대비했다. 지금의 그녀들은 모두 전장에 나섰을 때보다 더욱 긴장한 상태였다.

 그런 그녀들의 긴장의 원인인 사령관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오른팔을 들어 단말기에 대고 그의 지휘관을 찾았다.

 

"알바트로스. 무덤에 진입했다. 현재 작전 진행 상황은 어떠한가?"

 

 그의 딱딱한 부름에 단말기 너머에서도 그에 준하는 딱딱한 기계음이 흘러나오자 그 자리의 모두가 그 목소리에 집중했다.

 

-현재 이 동공의 절반 안까지의 철충들을 모두 섬멸했다.

 

"놓친 적은 있나?"

 

-놓친 적 개체는 없다. 모두 전멸이다.

 

"..그래. 우선 진행도를 80%까지 진행해라. 그 이후부터는 협공이다."

 

-알겠다.

 

삑-

 

쿠-웅!

 

"...당신의 지휘관. 꽤 쓸만한가 봐?“

 

투-두두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철혈의 레오나의 나긋나긋한 질문에 사령관은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였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충격음과 총격음이 그들의 귓가를 간질였으나 지금 그들의 앞에는 철충이라 부를만한 개체는 보이지 않았다.

 사령관은 고개를 돌려 제 왼편에 선 철혈의 레오나의 회색빛 눈동자와 맞댄 채 그녀의 회색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철혈의 레오나 역시 반쯤 내려 감은 눈으로 사령관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누군가에게는 부담스러운 눈의 대화, 하지만 그와 그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대화의 일환이었다.

 

"철혈의 레오나 소장. 근방의 적 개체 감지는?"

 

"...없어. 확실히 일도 없네."

 

 그의 쌀쌀맞은 질문에 철혈의 레오나는 싱거운 얼굴을 지으며 방금 그와 같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그들의 주변은 그 흔한 기계의 철컹거리는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철컹!

 

"...!"

 

"이 소리는!"

 

-아, 이거 실례. 그만 천천히 내려온다는 것이 발소리를 내었군요. 발톱이 원체 날카로운 지라 두 발로 서는 것은 제법 어렵습니다.

 

"..."

 

 대체 이 AGS는 뭘까? 모두의 얼굴에 RF87 로크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다. RF87 로크는 자신을 향한 무언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 날개를 반으로 접은 채 철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의 앞에 펼쳐진 기다란 철제 다리를 제 발로 걸어나갔다.

 사령관은 그런 그의 널따란 등을 유심히 바라볼 뿐, 그 어떤 제제도 그에게 던지지 않았다. 이윽고 RF87 로크는 다리의 정중앙에 선 채로 음성 모듈을 가동시키기 시작했다.

 

-제 주인의 무덤에 입성한 인간은 사령관님,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그렇겠지."

 

 이 세계에 남은 인간은 자신 하나, RF87 로크의 말마따나 이 무덤의 방문자 명부에 쓰일 이름은 자신 하나가 다일 것이다. 후에 이곳을 다시 방문할 일이 있을까, 사령관은 심드렁한 얼굴로 이색적인 동굴 내부를 둘러보았다.

 사령관이 메이드들에게 둘러싸여 이곳저곳을 바라볼 때 RF87 로크는 고개를 들어 종유석과 철골로 뒤덮인 동굴의 천장을 응시하다 곧바로 사령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뭐냐?”

 

 RF87 로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제는 익숙해진 사령관은 무언가를 물으려는 듯한 RF87 로크의 행동에 턱을 까닥였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RF87 로크는 그를 향해 화두를 내던졌다.

 

-..사령관께서는 영혼의 존재를 믿습니까?

 

"...무슨 소리냐?"

 

-딱히 철학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모호한 뜻을 가진 존재를 또는 이해하기 힘든 사상을 믿는가 아닌가, 그것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RF87 로크의 기습적인 질문에 사령관은 잠깐 눈을 내리깔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이들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모두가 숨을 내쉬고 모두가 자신을 위해 제 한 목숨을 바치려 하고 있다. 이런 그녀들을 두고 어떻게 영혼의 존재는 없다고 말하겠는가. 당장에 지금 자신의 존재에도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그였기에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은 애초부터 단 하나였다.

 

"난 믿는다. RF87 로크."

 

-..호오. 그 시각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영혼의 존재를 어떻게 그리 단언하시는지요?

 

"딱히 그것을 본다거나, 만진다거나. 그런 쪽의 문제가 아니다."

 

-...

 

"그저 믿는 거다. 영혼이 있다고, 그리고 그 영혼의 안식처가 있다고 믿는 것. 그게 내 정의다."

 

-..마치 철혈의 레오나가 속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가 외치는 '발할라'의 존재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RF87 로크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접었던 자신의 양날갤 양옆으로 쭉 펼치기 시작하자 그의 행동을 예의주시하던 두 바이오로이드가 그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까마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이제는 좀 수상한 행동은 그만하지? 까마귀.”

 

 저마다의 권총을 든 그녀들의 물음에 RF87 로크는 그 어떤 회답도 내놓지 않은 채 천천히 한번 땅에 내려놓았던 자신의 몸을 또다시 부상시키기 시작했다.

 

-영민하신 사령관님께서는 제 명칭의 유래를 아십니까?

 

“...뭐?”

 

 RF87 로크의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 그리고 자신을 향해 또다시 시작되는 질문 공세에 사령관은 안면 근육 제어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한층 일그러뜨렸다.

 무언가 이상하다. 게임 속의 스토리대로 주인공의 육체를 지닌 자신이 기껏 가출이라는 명목하에 이곳으로 왔음에도 RF87 로크의 언동이 게임 속의 틀을 벗어나기 시작하자 사령관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의 눈동자 속 당황스러움을 읽은 것일까. RF87 로크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자신의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모르시나 보군요. 사령관님께서는 고전문학에는 크게 관심이 없으신가 봅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로크.”

 

-제 영광스러운 명칭인 ‘로크’는 그 유명한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한 모험가의 이야기, 신드바드에서 등장하는 거대한 새를 의미합니다.

 

“...”

 

“사령관. 저 녀석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마. 어서 공격 명령을..”

 

 그의 이해하기 힘든 언동에 철혈의 레오나는 미간을 찌푸리다 못해 그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었다. 그녀의 커맨드 프레임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색의 빛이 더욱더 강렬해져 이윽고 그와 그녀들의 주변으로 넓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RF87 로크는 그녀의 공격적인 언사에도 쉼 없이 말을 이어갔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신드바드는 두 명입니다. 한 명은 짐꾼이라는 직업에 한탄하며 세상만사에 불만을 토하는, 정작 우둔하고 게으른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우민, 신드바드.

 

“...”

 

-다른 한 명의 신드바드는 선원으로 시작해 여러 모험과 고난을 거쳐 위대한 부를 이룩한 영민하고 개척 정신이 강한 신드바드.

 

파직! 파직!

 

 RF87 로크의 검은 날개를 덧씌운 황금색의 장갑 사이로 금빛의 섬광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자 그의 행동을 주시하던 블랙 리리스의 호박색 눈동자에 살기가 서렸다.

 

“주인님. 로자 아줄을 기동하겠습니다. 저희로부터 물러서 주세요.”

 

“리리스!”

 

 블랙 리리스는 RF87 로크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는 제 주인의 반향을 거부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 사령관은 어딘가 급박하게 흘러가는 주변 상황의 변화에 제 본분도 잊은 채 평소답지 않은 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외쳤으나 블랙 리리스는 호박색의 눈동자에 불을 지필 뿐, 다급한 그의 음성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사령관, 들리는가? 긴급 보고다.

 

“무슨 일이냐!?”

 

 마치 예고도 없던 폭풍이 몰아치듯 이번에는 단말기에서 이상 현상을 보고하려 하자 사령관은 아예 제 짜증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 뒷덜미가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여전히 동굴의 천장을 향해 부상하는 RF87 로크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었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을 잘못되었다고 그가 생각할 때에 HQ-1 알바트로스의 무심한 보고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굴 최심부 쪽에서 이상 열원을 감지했었다. 신호 분석 결과, 철충 개체로 확인. 교전에 들어갔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개체의 속력이 현재 투입된 AGS들을 한참 상회한다. 기간테스 003이 기동 정지. 004가 반파되었다. 그리고 현재 그 미확인 철충 개체가 우리의 포위망을 무력으로 돌파했다.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패전의 소식. 사령관은 그 사실보다 미확인 철충 개체가 무엇인지, RF87 로크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를 이제서야 눈치를 채었다.

 그만이 알고 있는 지식, 그만이 알고 있던 미래. 하지만 그 미래는 자신의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와 저 검은 새가 있었다.

 

“로크!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냐!”

 

-선원 신드바드는 자신의 부를 질투하는 짐꾼 신드바드를 데려다 놓고 그 자신이 겪었던 모험과 험난한 여정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그의 이야기 중에 2번째 여행에서 신드바드가 탑승한 거대한 새. 그것이 바로 저, 로크의 어원이 되는 새입니다.

 

파-직!

 

“레오나! 미호를 불러라!”

 

 동굴 벽면을 강타하는 그의 다급한 외침에 철혈의 레오나는 왼손으로 권총을 바꿔 잡고는 오른 손목에 들린 단말기에 입을 올리곤 입구를 지키고 있을 분홍 머리 여성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몽구스 팀 전원! 긴급 상황! 모두 무덤 내부로 진입해!”

 

-어?! 뭐야! 갑자기! 우리 보고 입구를 지키라며!

 

“불만은 조금 있다가 내놔! 미호! 어서!”

 

-아..알겠어! 애들아! 모두 내려가! 시급한 사안인가 봐!

 

파-지직!

 

-신드바드는 로크를 타고 다이아몬드 계곡에 떨어졌으나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계곡을 빼곡하게 메운 뱀의 무리. 신드바드는 보물을 찾았다는 희열감보다 자신을 둘러싼 죽음의 공포에 먹히고 말았습니다.

 

“자기! 어서 제 뒤로 와요!”

 

“에이미! 저격 준비! 스카디! 해킹을 준비해라!”

 

“갑자기 뭘 해킹하라는 거예요?! 사령관님?!”

 

“곧 온다! 얼른 네 해킹툴을 준비해라!”

 

 사령관과 그를 둘러싼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의 목소리가 커짐에도 RF87 로크의 기계음은 그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파-지직!

 

-영리한 신드바드는 자신의 무덤이 될 수 있었던 그 계곡에서 꾀를 내어 살아 돌아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자신을 최후의 인류라 자부하는 오만하고 우둔한 인간이시여. 당신은 제 손에 올라타 제 발로 이곳으로 왔습니다.

 

 어느새 동굴의 천장까지 부상한 거대한 검은 새는 제 온몸을 금빛으로 뒤덮은 채 그 사이로 자신의 붉은 눈동자를 번뜩였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흰 제복의 신드바드가 서 있었다.

 

-..또 한 마리의 로크가. 죽음의 계곡에 들어온 침입자를 맞이하러 오는군요.

 

“미확인 적 개체! 확인! 전방 1km. 아니, 전방 600m...당신!”

 

“알겠다! 전원-”

 

-이곳이 당신의 무덤이 될지, 아니면 당신의 새로운 도약이 될 것인지. 저는 그것이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신드바드이시여.

 

파-직! 파-지직!

 

 철혈의 레오나의 다급한 외침에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그 찰나의 순간, 검붉은 빛의 번개와 황금빛의 번개가 그들의 눈앞에서 강렬한 파공음을 터트리며 서로의 빛을 맞부딪혀 일순간 그들의 시야와 청각을 빼앗아갔다.


찌-이잉!


"...사령관!"


 마치 귓속에 폭격을 맞은 것처럼-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콰-앙!

 

“...주인님!!”


 두 눈으로 햇빛을 바라본 것처럼-눈썹이 쉬이 열리지 않는다.

 

콰-앙! 쾅! 쾅!

 

 수천 년의 시간을 간직한 종유석들이 힘없이 무너진다. 붉은빛을 머금은 황금빛의 번개에.

 

쿠웅!

 

 수천 년의 기술이 집약된 철골들이 고무처럼 뒤틀린다. 보랏빛을 머금은 검붉은 번개에.

 

콰-직! 쿠-직!

 

 제 무덤을 찾아 들어온 어리석은 모험가들은 입을 벌린다. 눈 앞에 펼쳐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저게 뭐야?”

 

 신드바드는 가면 사이로 두 눈을 부릅뜬다. 제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오랜만입니다. 나의 형제여.

 

“총원! 공격 개시! 목표는 눈앞의 철충이다!”

 

 사령관의 굳센 외침이 동굴 안에 울려 퍼지기도 전, 검붉은 몸체를 자랑하는 또 하나의 RF87 로크가 오랜 시간 침묵만이 흐르던 제 주인의 무덤을 침범한 어리석은 이들을 향해 기괴한 포효를 내질렀다.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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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조절 실패. 플룻 나누기 실패.

이 3만자 분량 쓰기 위해 2주동안 2만자를 지우고 쓰고 옮겨 쓰고를 반복했다.

담편으로 진짜 리오보로스는 끝낸다. 진짜.


근데 이 문학은 언제 끝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