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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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카호에도 하나의 작은 사회가 구성되어있지만, 안쪽의 사회와 바깥쪽의 사회가 주는 느낌은 또 달랐다. 물론 연구를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된 작은 도시 정도의 규모였지만, 여러 종류의 상점이며, 회사며 다양한 것들과, 오르카호에는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존재하지 않는 여러 바이오로이드들까지 섞여있는 느낌은 멸망 전의 살아있는 도시의 느낌을 주고 있었다.

다른 취미나 관심거리가 별로 없던 레아로써는 여러 점포가 있다고 해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휘관 개체다보니 참치캔은 넉넉하게 갖고 있었지만 함 내에서나 밖에서나 쓸 일은 없었다.

밥이나 먹을까…”

주변에 간간히 보이는 식당을 둘러보아도 그다지 마음 내키는 곳이 없다. 어딜가나 오르카호의 인원들이 보이기 때문일까?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물론 다른 오르카호의 인원들에게 악감정이나 불편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페어리의 언니라는 레아의 입장에서 생각없이 친하게 지내기도 껄끄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페어리 시리즈는 다들 위험한 개체였다. 멸망 전 인간이 왜 그런 모습으로 페어리 시리즈를 디자인 했는지 까지는 레아도 알 턱이 없었지만, 페어리 시리즈의 대부분은 주인을 상당히 피곤하게 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주인에 대한 강한 독점욕을 보이는 리제, 반대로 주인의 시선이 닿지 않으면 미쳐버리는 드리아드,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혐오가 학습된 티타니아, 그나마 멀쩡해보이는 다프네도 유전자의 깊숙한 곳에는 어떤 위험한 성격이 내제되어있다고 들었다.

처음 제조될 때 배틀 메이드 시리즈에서 파생되어 나온 레아만이 멀쩡한 인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레아의 성격이 동생들을 관리하기 위해 디자인 된 것이란 추측도 있었지만, 레아가 처음 제작 될 때는 페어리 시리즈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였기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었다.

레아, 리제 말인데”

사령관이 레아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였다. 저 리제라는 말은 드리아드, 티타니아, 간혹 다프네까지, 모두가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자매들을 관리하는 것은 언니의 역할이었지만, 가끔은 그 정도가 지나쳤다. 오르카호는 그냥 평범한 사회가 아니었으니까, 전투가 없을 때에는 한 없이 평화로운 장소인 건 맞지만, 결국 유일한 인간인 사령관을 지키기 위한 전투부대가 바로 오르카호와 사령관 휘하의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페어리 시리즈라는 부대의 지휘관이 바로 레아였다. 레아에게는 모두 자매들일 뿐이었지만, 다른 바이오로이드와 사령관에게는 군인이자 전투원일 뿐이었다.

동생들의 일탈을 넘어가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은 레아를 천천히 옥죄어가고 있었다.

부대 내적으로는 자매들을 관리해야 했다면 외적으로는 다른 부대와도 경쟁해야 했다. 물론 모든 부대의 최종적인 목표는 사령관의 호위이자 인류의 재건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종이자 궁극적인 목표였고 그 안에 다른 목적들도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사령관은 자신들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바이오로이드들 끼리의 신경전 역시 존재했다. 누가 더 도움이 되느니, 작전에서 공적을 세웠느니 하는 이야기를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지휘대로 움직이는 바이오로이드들 보다 각자의 재량이 보장되어있는 지휘관기들간에 이런 경향이 더 강했다.

레아가 순수한 전투용 바이오로이드가 아닌데도 다른 바이오로이드들 보다 작전과 전투의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 형태가 어떻던, 요인경호, 국지전, 대규모 전투…여러 형태의 전투중 하나의 상황을 상정해서 만든 바이오로이드들과는 다르게 페어리 시리즈는 처음부터 전투용으로 제작된 바이오로이드가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전투를 위해 태어나 모든 정보를 유전자 단위의 본능부터 새겨 태어난 바이오로이드와, 후천적으로 학습한 바이오로이드와의 차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자매들의 성격상의 결함, 태생적인 전투지식의 부족과 본능에 새겨지지 않은 투쟁심,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해내고 다른 부대만큼의 성과를 올려야 사령관에게 페어리라는 부대와 자매들을 어필할 수 있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식히기 위해서 눈 앞에 보이는 아무 가게로 들어간다. 사령관과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정보대로 복원해낸 유리문에 달린 금색의 종소리가 가볍게 울린다. 오르카호 안에서는 들을 수 없는 편안한 음색이다.

하지만 귀에 들어오는 작은 종소리마저 신경쓰지 못하게하는 무언가를 본 레아의 표정은 싸늘하게 얼어간다.

나가”

티타니아”

다프네의 말대로 금란, 바닐라와 동행하고 있는 듯 한 티타니아의 원색에 가까운 눈동자와 레아의 푸른 눈이 마주친다. 기본적인 감각체계와 갖고있는 기술이 다른 바닐라와 금란은 느낄 수 없었지만, 티타니아와 외관 빼고는 대부분이 동일한 레아는 손가락 끝마디 까지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이 주변 모두를 혹한으로 물들일 준비를 하고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좋아보이네?”

왜, 내가 행복해보이니까 싫어?”

아니”

티타니아의 정신을 적어도 제어 가능한 범위 내로 돌려놓는 것은 페어리 뿐만 아니라 오르카호 전체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정신상태가 불안할 뿐이지 티타니아의 전투력은 모든 바이오로이드를 통틀어서 최강급이라고 할 수 있었고, 직접 전투가 아닌 기후조작 능력은 레모네이드 오메가와 직접 충돌하지 않고도 오메가의 진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레아와 페어리는 티타니아의 복원을 수차례나 반대했다. 자칫하면 자신의 주인 뿐 아니라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유전자 단위에 새겨진 증오와 분노라는 감정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기에, 그녀를 통제한다는 건 사실상 무리였다. 설령 인간의 명령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멸망 전의 인간들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너무도 간단하고 쉬운 방법을 사용했다.

그녀의 육체는 영원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정신은 끝없는 패배감과 자기부정의 순환에 빠져 있었다.

고통과 절망이라는 최악의 감각과 감정, 단 두가지만이 티타니아 프로스트를 구성하고 있었고, 티타니아는 그것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인간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었다.

나가, 마지막 경고야”

나도 갈 곳이 없어서 왔는걸?”

내 알바 아니야, 아무데로나 가버려, 리제던 누구던 아무한테나…죽여버리기 전에”

죽인다는 말에 서린 살기가 보통이 아니다. 무어라 입을 떼고 싶었지만, 지금은 티타니아와 동행하고 있는 금란과 바닐라를 봐서라도 참기로 한다.

결국 가게에서 돌아 나온다. 티타니아를 복원시키기 싫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저 모습을 보고있는 것이 너무 괴롭다. 아무리 자기를 죽어라고 증오하는 바이오로이드라 할 지라도, 레아에게는 자신의 동생이었으니까, 원하지도 않는 고통에 아파하는 걸 보고 기뻐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티타니아는 복원되었다. 오메가와의 결전, 별의아이, 그리고 새롭게 발견된 철의 탑 등 여러 위험요소들이 갑작스레 생긴 탓이리라

아니면 레아의 발언권이 결국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정도였던가

리제라…”

티타니아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떠오른다. 그러고보니 리제를 못 본지 꽤 되었다.

리제는 의도적으로 찾지 않아도 그녀의 소식이 귀에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리리스와 싸우던, 주인님을 귀찮게 하던, 결국 레아에게 보고가 올라오니 말이다. 

오히려 리제의 얼굴을 못 보면 못 볼수록, 그녀가 얌전히 있다는 증거였다.

사령관님? 잠깐 만나러 가도 될까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의사를 묻는다. 와도 된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죽치고 있기만 해도 리제가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그래 뭐…아니 잠깐만, 리리스”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걸 보니 누군가와 같이 있는 듯 했다. 평소의 사령관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레아가 사령관의 위치로 날아간다.


레아 캐릭터성이 절대 나쁘지 않은데 맨날 정신병자 유아퇴행으로만 그려지는게 너무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