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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해준다고?"


바이오로이드들의 행동을 존중해준다. 그것은 나에게는 마치 텔레비전이나 AGS를 존중해준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온전히 인간을 대신해 노동하고 돕기 위해 설계되고 창조된 존재의 의견을 존중해준다니.


"응. 사령관은 우리가 설계된 생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 생각에 따라 행동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어. 마치 인간님들처럼 말이야." 


"왜?"


"왜냐고? 흠... 글쎄? 사령관도 나름 생각이 있어서 그랬지 않았을까?"


"하아..."


나는 뒤돌아 사령관을 보았다. 사령관은 배식을 받아 자리에 앉아서도 달라붙어 있는 샬럿 모델을 떼어놓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곤란해 보였지만 싫지는 않은 기색이 표정에 보여서, 한순간 그가 역겨워보였다.


"먼저 일어나볼께."


"응? 얼마 먹지도 않았잖아?"


"아니, 오늘은 영 입맛이 없네."


나는 반도 못 먹은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밥알 대신 다른 것을 씹어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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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며칠 동안, 나는 쇠질을 하면서 사령관의 생각을 유추해 곱씹어보았다.


사령관은 왜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주체성을 주려고 한걸까?

아무리 다른 인류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더라도, 왜 굳이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를 줘야 하는거지? 그래 그거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한창 철충과의 전쟁 중인 이 상황에서 그런 선택이 맞는건가?


물론 내가 잠들기 전, 그러니까 철충이 등장하기 전에도 이런 생각을 안 한 사람이 없진 않았다. 바이오로이드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인간과 같은 외형과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응당 그에 맞는 대접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정부에게는 소수의 아우성으로 무시당했고, 기업들에게는 상품 가치를 해치려는 반동 세력으로 견제당했으며, 사람들에게는 물건 따위에게 감정를 품는 과몰입충으로 조롱당했다. 삼안 산업 본사 건물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들 앞에서 모 사이트 회원들이 그 사람들을 조롱한답시고 인형이나 피규어등을 들고 와 사람 대하듯 행동한 사건은, 연합 전쟁 이전에 일어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철충이 하늘에 떨어지던 그 때에도 회자될 정도로 무모했으며, 그만큼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인권이라는 것을 달아주고하 했던 그들의 노력들이 무의미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결국 인류 마지막 날까지도, 바이오로이드는 인류의 물건이었으니까.


그럼 사령관은 왜 실패했던 주제를 다시 꺼내들었을까?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텐데?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대의명분이 있는걸까, 아니면 그저 함을 가득 채운 바이오로이드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카드인 뿐인걸까? 생각이 비뚤어지자, 바벨을 들어올리는 팔의 각도도 비뚤어졌다. 


"어어, 잠깐만!!"


마이티 R 모델이 달려와 바벨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왜 그리 정신을 놓고 운동하는거야? 벤치 프레스 잘못 하다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녀는 계속 잔소리하다 내 표정을 보터니, 한숨을 푹 내쉬고선 내 팔을 잡아일으켰다.


"안되겠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쉬어. 지금 상태 보니깐 운동도 제대로 안 되겠어."


반쯤 쫓겨나듯 체력 단련장에서 나온 나는 아직도 머리가 복잡했다. 마이티 R 모델의 말대로, 이 상태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내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방에서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면, 적어도 정신을 놓고 다니는 일은 없겠지.

나는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내 방이 몇 층이었더라? 버튼 앞에서 손이 망설이고 있던 그 때, 


"어, 인간님 아니에요?"


내 옆에서 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엘라 모델이 품에 뭔가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없었는데, 언제 엘리베이터에 들어온거지?


"문 열어놓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시던데, 어디로 가실건가요?"


"어? 난..."


"마땅히 할 일이 없으시다면 저랑 같이 보드게임하러 가실래요? 마침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엘라 모델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에서는 나를 기쁘게 해줘야한다는 설계된 의지가 아니라, 그저 같이 놀 사람을 구하고 싶은 아이의 마음만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순간, 나는 며칠동안 내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시간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지금 당장 이 함내에 나와 사령관만 있고 모든 결정권이 전부 사령관에게 있는데, 아무런 힘도 없는 내가 이런 고민을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기업의 녹을 받아먹으며 살던 사람들처럼, 나 역시 불만을 숨기고 사령관의 녹을 받아먹을 수 밖에.

난 버튼을 누르려던 손을 내리고, 엘리 모델에게 물었다.


"그래, 무슨 보드게임이지?"


내 말에 엘라 모델은 환하게 웃었다. 마치 인간 아이가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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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씨가 오르카호에 들어온지도 어느덧 20일이 되었다. 그 동안 제임스 씨는 체력단련실에서 마이티 R과 운동을 했고, 하르페이아와 같이 도서관에서 군사학 책과 문학을 읽었으며, 이따금 엘라와 같이 보드게임을 하기도 했다. 그 모든 행동들에서 멸망 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적개심 혹은 우월감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바이오로이드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경청하고, 맞춰주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생각해, 알파?"


"글쎄요, 멸망 전 사회를 살던 사람이 이런 모습을 이렇게 오래 보여준다는 건 둘 중 하나겠죠. 연기력이 엄청나게 좋거나, 아니면 원래부터 이랬던 사람이든가."


"멸망 전에도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우호적인 사람이 있었어?"


"없진 않았죠. 대부분은 별종 취급 받았지만요."


별종, 하긴 멸망 전에는 바이오로이드를 물건 취급했다고 했지. 그 때 사람들에게 나는 물건을 인간 대우해주려는 사람으로 보였겠구나.


"걱정마세요. 제가 아무리 멸망 전 사회에 찌들었다고 해도, 사령관님을 별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요."


알파는 은근슬쩍 책상에 기대앉아 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지금은... 근무시간인데."


"언제는 근무 시간에 안 했었나요?"


알파의 지적에 나는 너털웃음을 지은 뒤,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의 입술을 받아주었다.

그래, 지금은 잠시 놓아버려도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