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시점은 낙원 약간 뒤



 

충돌 7:30 am


오르카 호가 잠항한 지도 어느덧 열흘째다. 다시 말하자면, 따스한 햇빛을 받은 지도, 톡 쏘는 리튬전지를 먹은 지도, 기름을 흩뿌리며 죽어가는 철충들의 유해를 본 지도 열흘이 넘어간다는 소리다. 설상가상으로 어제 섭취한 나트륨 이온 전지는 유통기한이라도 지난 것인지 신경 회로에 불쾌한 느낌만을 전달할 뿐이었다.

 

“식량이나 빨리 떨어졌으면 좋겠군요…”


이른 아침, 블랙 리버의 역작 치고는 상당히 속 좁은 한마디를 뱉은 로크는, 조그마한 격납고 창문 너머 펼쳐진 어둠을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앙헬을 섬기며 무덤을 지키던 당시에는 말벗이 될 형제도 있었고 주인의 마지막 명령을 따른다는 사명감도 있었으나, 이 격납고에는 온통 머저리뿐이고 현 주인은 일이 바쁜지 통 볼 수가 없다.


“꼬마 새 치고는 불평불만이 많군. 닥치지 않으면 날개라도 뽑아버리겠다.”


그의 말이 들린 건지, 머저리 중에서도 특급 머저리 파충류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크는 침묵 속에서 사색을 계속...할 터였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남이 생각을 할 때는 조용히 좀 하십시오, 해피. 그 도마뱀만 한 논리 회로에 공공장소 예절이라는 개념은 탑재되지 않았을 테니 이해는 가지만 말이죠.”


악의가 뚝뚝 흘러 넘치는 조롱에 “폭군”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격납고에 방음처리만 되지 않았어도 오르카 호의 전 대원을 깨웠을 포효에 눈살이 찌푸려진 것도 잠시, “괴조” 역시 상대를 노려보았고, 이윽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양 서로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화염과 벼락의 격돌, 맞부딪히는 강철의 소음, 타들어가는 공기의 냄새, 강적과의 목숨을 건 사투…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로크가 쏘아낸 번개는 에너지장에 가로막혀 자멸하고, 금방이라도 불을 뿜을 것 같던 타이런트는 죽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짜증이 솟구친 채 주위를 둘러보자,


“그쯤 해두는 게 좋을 것 같군.”

안광을 번뜩이며 이쪽을 바라보는 알바트로스와,


“헉…헉…진짜 좆될뻔했거든…”

자기 몸뚱이만 한 “타이런트 전용 충전기” 플러그를 든 채 숨을 몰아쉬는 포츈이 있었다.

 

 


“오빠 진짜 미쳤어? 둘이 싸우면 잠수함 통째로 날아가는거 몰라?”


잔뜩 열이 받은 닥터가 왼쪽엔 포츈, 오른쪽엔 그렘린을 대동한 채 잔소리를 쏟아냈다. 

오빠(사령관) 뒷목 잡고 쓰러지는 꼴 보고싶냐, 알바트로스 오빠랑 포츈 언니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한 번만 더 이러면 잠수함 안의 리튬전지란 리튬전지는 죄다 태워버릴 거다…


고개를 푹 떨군 것이 얼핏 보면 반성하는 모습이었으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좌청룡 우백호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말이겠군요’ 따위의 실없는 생각이나 하던 로크였다.

 





 

구원 1:08 pm


몇 마디 하고 끝일 줄 알았던 닥터의 잔소리 폭격은 무려 3시간이나 이어졌고, 겨우 소음공해에서 해방된 로크는 야수의 심정으로 창문을 쏘아봤다. 실수인 척 식량창고를 폭격하면 어쩔 수 없이 육지로 올라가지 않을까, 잘만 얘기하면 스파르탄즈도 협력할 지도 모른다, 따위의 고뇌를 꽤 진심으로 하던 찰나, 오르카 호에 사령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흠흠, 사령관실에서 전파합니다. 2시간 뒤에 잔지바르 섬에 상륙할 테니까 다들 준비해. 이상.”


아아, 경애하는 사령관 각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던가. 딱히 자신을 돕지는 않은 로크였으나, 하늘, 아니 사령관이 그를 도운 것은 틀림없었다.

 




좌절 후의 자유 3:43 pm


오르카 호의 해치가 열리고, 대원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하나둘씩 모래사장을 밟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로크는 아직까지도 닥터에게 붙들려 있었다.


“로크 오빠는 반성하는 차원에서 함내 근신! 오빠도 동의하지?”


라며 스크린 속 사령관에게 닥터가 통보했다. 하지만 경애하는 사령관 각하께서 이 꼬맹이의 말을 듣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


“음…닥터가 알아서 해. 하하…”


충격 받은 로크의 눈길도 외면한 채, 사령관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둘러 통신을 종료하려 했다.


“사,사령관 각…”


“야, 아스널! 지금 업무 중이우우웁!”

“시끄럽네, 그대여. 에밀리가 며칠째 그대 방에서 자느라 내가 얼마나 쌓였는지 잘 알텐-“ 삐익.


못 볼 걸 봤다는 얼굴로 통신을 종료한 닥터가 한숨을 쉬며 자신의 몸을 (특히 가슴을) 내려다보는 찰나 –

펄럭, 하고 괴조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로크 오빠! 빨랑 안 돌아와? 야!!!"

 

 

정말 아름다운 날이었다.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이런 날엔, 로크는…

“후하하하하하하!”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독수리에게 인사를 건네고, 수면을 가르며 물고기를 낚아채는 그의 모습은 인류 최고 군수회사의 역작이라기보다는 들뜬 어린아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불멸 4:27 pm


한바탕 날아재낀 로크는 모래사장 근처 절벽에 조용히 착륙했다. 눈부신 태양빛이 인도양을 비추는 광경은 미적 감각을 지닌 생명체라면 누구든 압도하기 충분했고, 그의 미적 감각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들뜬 마음을 정리하는 데는 문학만 한 것이 없지.


“…그분은 대지이며 태양이고, 나무의 잎사귀들이며, 독수리의 비행이시다. 그분은 살아 계셔. 그리고 죽음을 맞은 이들은 모두 살아 있다. 그들은 다시 태어나며 종말을 모르지…”


어디서 읽은 구절이었던가. 죽은 이들은 대자연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렇다면 앙헬 공도, 내 형제도 바다와 바람이 되어 살아있다는 걸까.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절벽이 그들일 수도 있다는 걸까.


“...앙헬 공. 그대가 사령관 각하를 만났다면 그대마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친애하는 형제여, 지금 우리가 만난다면 나를 알아보지 못하지는 않을지.”

 

더 고귀한 새로운 주인을 만나 섬긴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의 외형은 변함없지만 내면은 –AGS에게 내면이라는 개념도 우습지만– 바뀌었다. 이 변화가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는 두고 볼 문제이겠지만. 다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부터 옛 주인에게도, 잃어버린 형제에게도, 무덤지기 시절의 로크 자신에게도 믿을 수 없는 일이리라. 그날 이래로…

 

“존중…입니까. 오르카 호로 돌아가면 닥터 양에게 사과라도 해야겠군요. 그리고 트리…양에게도 새삼스럽지만 감사를…”

 



“까마귀야~~ 놀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귀신 같은 타이밍에 끼어든 탐험가를 바라보며, 괴조는 몸을 일으켰다.


“이런, 혼자 이 절벽까지 기어 올라오신 겁니까?”

“당연하지! 이 네오 뉴 모던 트리아이나 님께 불가능한 건 없다구! 근데 혼자 뭐하는 거야? 궁상맞게.”

 

 

성장 9pm


지친 몸을 이끌고 격납고에 몸을 구겨넣었다. 설마 4시간 내내 섬을 돌아다닐 줄이야.

로크가 보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 잔뜩 벼르고 있던 닥터였지만, 순순히 사과하니 꽤 놀라는 눈치였다.


“그…럼…우이씨.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도 없고…벌칙은 일단 없던 걸로 할게. 대신 한번만 더 이래봐. 확 그냥...”


옆에 있던 아자즈가 눈에 띄게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별 일은 아닐 터였다. 아마…

아무튼 슬슬 절전 모드로 돌아가야 내일 트리…트라이아나 양에게 시달려도 방전되지 않을 터. 안녕히 주무십시오, 사령관 각하.

…또 보지, 형제여. 앙헬 공도.

 

 


“…그런데, 저 파충류는 언제까지 저 상태로 방치할 겁니까?”

“나도 몰라…재가동하면 난동부릴게 뻔하니까 오빠가 와서 달래야 되는데, 아스널 언니가 사령관실로 향하는 통신을 죄다 끊었어…”

 

 

 

 



참고문헌: 어스시의 마법사 – 머나먼 바닷가. 게드와 거미의 대화에서